내가 김유정의산골 나그네를 처음 읽은 때는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비록 짧은 단편이지만 그 강렬한 인상에 한동안 다른 소설들을 볼 생각을 못했다. 소설 보는 재미에 밤잠을 지새우곤 하던 때였다. 학점 따는 일보다는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찾아 읽는 일에 영일이 없었던 거다. 사실 당시 어려운 집안의 형편을 생각한다면 나는 만사 제치고 학점 따는 일에 우선을 두어서, 학업성적 우수생에게 주는 장학금이라도 받아야 했다. 그래야만 힘들게 살던 부모님의 이마 주름살을 조금이나마 펴 주는 효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 무심한 아들이라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참회한다.

 

얘기가 옆길로 나갔다. ‘(2차 세계대전)전후문학 전집의 실험적인 소설들에 빠져 지내던 내가 우리나라 30년대 향토 작가 김유정의 산골 나그네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병든 남편을 챙기기 위한 들병이 여인의 행각은 내용상 비극이지만 외관상으로는 희극이었다. 비극과 희극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스토리 전개.

특히 소설 끝의 문장이야말로 반세기가 돼가는 지금도 내 뇌리 속에 선연히 남았다.

 

<어디선지 지정치 못할 늑대 소리는 이산 저산서 와글와글 굴러 내린다.>

 

한밤중에 병든 남편을 이끌고 달아나는 들병이 여인.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처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특히 늑대 소리가 와글와글 굴러 내리는 것으로 표현한 데에는, 청각적인 대상을 시각화한 공감각적 기법이라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싶었다. 30년대 김유정 작가가 구사한 첨단의공감각적 표현이라니!

소설 앞부분에, 홀어머니가 장가 못 간 아들을 둔 간단치 않은 시름을 에둘러 표현한 구절이 있다. 이 또한 압권이다. 옮겨 본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리는 듯 나직나직 속삭인다.

더욱 몹쓸 건 물소리, 골을 휘몰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도 음률을 읊는다.

! 퐁 퐁! 쪼록 퐁!>

 

나중에 알았는데 이 좋은 표현들을 다른 사람들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의암댐 부근 길가에 세운 김유정 문인비에 동판으로 새겨놓았다.

김유정 문인비

돌아가신 아버지가 예총 강원도 지부 일을 할 때 (196870) 세운 비라서 사실 나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다. 요즈음은 어쩐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예총 일은 무보수 봉사 직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문인비 건립의 주무를 맡아 부족한 자금을 해결하기 위해,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거두리의 야산을 팔았다. 누님이 내게 한 말이다.

글쎄, 아버지가 그 야산을 팔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기만 했어도 후손들에게 대단한 유산이 돼서, 사는 고생이 덜하지 않았겠니? 아버지가 그 때 야산 팔아 문인비 세우는 데 보태고 책도 낸 뒤 남은 돈 몇 푼으로는 뭐한 줄 아니? 집에 전화 한 대 놓았단다. 기가 막히지.”

그 시절 우리 집은 전화도 있는잘사는 부자집처럼 남한테 보였었다. 사실 독채 전세로 사는 집이었는데.

아버지는 김유정 문인비를 세운 뒤 김유정 전집도 펴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내가 그 전집을 읽다가 산골 나그네에 이르러 충격을 받았던 게 아닐까?

 

돌아가신 아버지가 한 일은 너무 앞선 일이었다. 그 후 30년 가까이 흐른 뒤 김유정 문학촌이 춘천에 들어섰으니. 아아 아버지. 저는 불효했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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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일은 여하튼 사건이다. 비 내리지 않았더라면 별 일 없었을 일상(日常)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편하게 이뤄지던 외출도 비 내리면 불편하게도 우산을 따로 들어야 한다. 물론 우산 없이 그냥 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온몸이 빗물에 젖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모습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거나 비루먹은 강아지 꼴이 되거나.

비가 내리면 지붕 위나 마당에 놓고 말리던 고추들도 부리나케 집안으로 들여놓아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태양초 만드는 일을 망친다. 어디 그뿐인가. 하루 벌어먹고 사는 막노동 사람들은 일 나가지 못해 한숨으로 하루를 보낸다. 이런 노래가 있다. “에헤이 에헤이이 에헤이 엥헤이 엥헤야 엥헤이 엥헤야 / 우리가 놀면 놀고 싶어 노나/ 비 쏟아지는 날이 공치는 날이다

광장이나 인근학교 운동장을 빌려 하려던 단체행사는 며칠 뒤로 미루거나 그도 아니면 대폭 축소해서 강당 같은 실내에서 해야 한다. 행사의 낯이 서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림 속 춘천에 비가 내린다. 당장 일상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그렇지만 새삼스레 되살아나는 두려운 기억이 있다. 오래 전 춘천은 수해가 잦았던 도시였다는 사실이다. 장마 비에 도시의 반 가까이가 수해를 입은 적도 있었다. 두 개의 강이 봉의산 근처에서 만나 도시를 감싸듯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춘천에 비가 내리면 알게 모르게 우리 가슴 한편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을 터.

서현종 화백의 이 그림에는 그런 불안감이 보인다. 춘천의 하늘도, 자랑거리인 봉의산도, 거리도 온통 무채색 빗줄기에 젖어 가는데이런 상황이 마냥 계속된다면 봉의산 정상에 삐죽이 솟은 송신시설에 벼락까지 치면서 도시는 결국 침몰할 것 같다. 이런 불안감을 견디게 하는 게 그림 좌측 하반부, 승용차의 붉은색 브레이크 불빛이다. 본디 붉은색은 뜨거운 정열이거나 불안감이나을 상징한다. 춤추는 여인의 붉은 옷차림은 정열을, 소방서 차의 붉은 외관은을 뜻한다. 하지만 서 화백의 이 그림에서 붉은색 브레이크 불빛은, 무채색의 어두운 세상에 대응하는 유일한 유채색으로써 전체 풍경의 좌우균형과 비 내리며 엄습한 불안감까지 잡아준다.

전체 풍경의 좌우균형이란 말은 이런 뜻이다. 그림 상반부 우측의 봉의산이 검게 넓은 면적을 차지했는데 그에 맞서듯 그림 하반부 좌측의 차가 하얀색으로서 넓은 면적을 차지했으며 그 때 차의 붉은 브레이크 불빛이 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이 그림의 비는, 해 지기 전 오후에 갑자기 내린 비다. 그 까닭에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놀라 상가들은 전등들을 켰지만 도로 변 가로등들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

 

원래 비 그림은 수채화가 제격이다. 물감으로 그리므로, 페인트로 그리는 유화와 달리 그림 대상인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 화백의 비 오는 춘천그림은 물감 아닌 재료(페인트? 크레파스?)로 거칠게 그려졌음에도 질감이 그에 못지않다. 못지않을 정도가 아니라 빗물이 캔버스 밖으로 넘쳐날 것 같다.

 

이 그림에서도 우리는 숨바꼭질 놀이를 해야 한다. 우선 봉의산 정상에 높이 꽂힌 송신시설이다. 그런 시설물들이 모조리 제거된 요즈음의 봉의산과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최소한 2019년에서 몇 년 전 춘천이 배경이다.

도로에서 마주 오는 차가 하이빔을 켰음을 놓쳐서도 안 된다. 차의 하이빔은 비가 급작스럽게 많이 내려서 운전하는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불안감과 긴장은 공포영화의 필수 요소다. 이 그림에서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림에 배인 긴장과 불안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하얀 차 브레이크 등에 쓰인 붉은색이, 차 말고도 멀리 작게 한 점 찍혀 있음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게 무엇일까? 내리는 비 때문에 시야가 분명치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다. 하긴 굳이 알 필요도 없다. 비 내리면 멀쩡했던 풍경에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하고 그렇다면 그 정체를 몰라도 그만이다.

서현종의 비 오는 춘천그림은 일상에 잠복해 있다가 비가 내리면서 드러나는 도시민의 불안을 그렸다. , 굳이 무슨 내용을 그렸는지 알려고 골몰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그림을 보며 당신 가슴 한편이 불안해진다면 그것으로써 충분하다. 시험 문제를 푸는 일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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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춘심산촌의 관정 개통은 38일에 이뤄졌다. 38, 관정 속 모터에 마중물을 붓고서 전기를 넣으면 파바박!’ 소리에 이어 콸콸콸!’지하수가 별 일 없이 잘 나왔던 것이다.

그 지하수가 배출되는 수도 시설은 세 군데다. 관정 바로 옆의 수도와, 농막 앞 개수대의 수도와, 농막 안 씽크대의 수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3월 1일) 모처럼 관정 개통을 일주일 앞당겨봤다. 지난겨울이 예상 외로 덜 추웠을 뿐만 아니라 요즈음 맞는 봄 햇살이 아주 화사했기 때문이다.

관정 쇠판 덮개를 열고 들어가 모터에 관을 이은 뒤 마중물을 부었다. 전기를 넣자 이내 파바박!’소리에 이어 관정 바로 옆의 수도꼭지에서 지하수가 콸콸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날씨가 예년보다 따듯했으니까 일주일을 앞당겨 개통해도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다음으로 농막 앞 개수대까지 부지런히 걸어가서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이런,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농막 안 씽크대의 수도도 마찬가지였다. 그 수도꼭지들을 틀어놓은 채 저물녘까지 기다려봤지만 변화가 없었다. 물론 관정 바로 옆의 수도에서는 줄기차게 지하수가 나왔다.

깨달았다. 관정에서 농막까지의 거리가 30m. 그 사이의 땅이 여전히 얼어 있다는 게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사이의 땅까지 다 녹으려면 천생 일주일쯤 지나야 할 듯싶었다.

 

몇 년째 춘심산촌의 관정 개통은 38일에 이뤄졌다. 누구도 그 날짜를 어길 수 없다. 춘심산촌 또한 대자연의 일부이며 대자연의 순행(順行)은 어느 한 개인이 어길 수 없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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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대문 따위를 두지 않고 그냥 농사를 지었다. ‘대문 따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보기 좋은 숲속 풍경에 괜히 대문 같은 걸 만들어 달아서는 안 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끔씩 외지인들이 불쑥 농장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다 가는 일들이 생겨나면서 우리 부부의 생각이 달라졌다. 밭의 작물이야 옥수수와 배추 정도라 큰 걱정이 안 되지만 문제는 프라이버시 침해였다. 마치 우리 부부가 외지인들의 구경거리라도 된 듯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 춘심산촌에 대문을 달자.’는 결심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주택가처럼 대문을 달 수는 없었다. 대문을 달려면 먼저 밭 둘레에 담부터 둘러야 하는데 800평 밭 주위를 그리 한다면 소요되는 경비도 만만치 않을 테고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 부부가 담에 갇혀 지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간수는 죄수를 지킨다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같은 공간에 갇혀 지내는 모습일 수 있다,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대문을 걸 일이 아니라면 대체물을 생각해봐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봄 현재의 차단봉이 우리 춘신산촌 농장 입구에 설치된 것이다.

 

 

처음에는 어떤 모양의 차단봉을 설치할지 판단이 안 섰다. 주위 분들한테 조언을 구했다. ‘주택이 아닌 농장 입구에 설치하는 차단봉이라는 우리 설명에 그분들은 한결같이 입산금지용 차단봉을 권했다. 그런 물건을 파는 곳을 수소문해서 찾아가 실제 눈으로 보니 세상에, 교도소나 군부대 입구에 놓는 삼엄한 형태였다. 그것을 춘심산촌 입구에 놓는다면 당장 부근에서 농사짓는 분들한테서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았다. 참으로 농장 입구에 놓는 차단봉 하나 정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생각 끝에 쇠파이프를 취급하는 공장을 찾아갔다. 쇠파이프만으로 이뤄진 현재의 차단봉 형태가 내 머릿속에서 구상을 거쳐 종이에 그려진 직후다. 정확하게 그 길이까지 자로 재서 적었으므로 공장 직원이 긴 철봉 하나를 골라, 두 토막을 낸 뒤 종이에 그려놓은 형태대로 용접함으로써 마침내 차단봉이 완성됐다. 그 때 공장 사장이 말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실어가려우?”

우리 차는 산타페다. 뒷문을 열어 차단봉을 싣고 가려 했으나 공간이 좁아 차단봉의 반 이상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대로는 운반하기 어려워보였다. 사장이 이어서 말했다.

손님들이 항상 그래요. 구상한 물건을 만드는 데만 신경 쓰느라고 막상 만들고 난 뒤에 그것을 실어 나르는 단계에서는 당황한다니까요.”

우리 부부 역시 그 말에 당황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럼 어떡해야 하나요?”

용달차라도 불러야죠.”

난감해진 남편 대신 눈치 빠른 아내가 웃으며 나섰다.

사장님. 담뱃값을 드릴 테니까 여기 트럭으로 실어다 주시면 안 되나요? 우리 농장이 멀지 않거든요.”

 

 

마침내 춘심산촌 입구에 들어선 자 모양의 차단봉. 아내가 은빛 페인트까지 바르자 단번에 아름답게 빛나는 시설물이 되었다. 그 후 불시에 외부인이 춘심산촌 농장에 들어와 두리번거리다 나가는 일이 사라졌다. 그 부분은 마음이 편해졌는데 다만 부근에서 농사짓는 분들한테는 조금 미안한 감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소통을 막는다는 뜻의 차단봉이라는 삭막한 이름 때문인 듯싶다. 그렇다면 다른 좋은 이름이 어디 없을까? 정 없으면 정낭이라 할까?

 

 

*‘정낭은 제주도에서 대문 역할을 하는 설치물이다. 집 입구의 양쪽에 구멍 뚫은 돌을 세우고 사이에 나무를 가로로 걸쳐놓은 것이다. 얼마나 단순한 형태인지, 집을 지킨다기보다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달라는 뜻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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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7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춘심산촌의 밭농사는봄에 밭 갈고 씨 뿌리면서시작되는 게 아니다. 봄에, 지난겨울 면사무소에서 신청했던 퇴비부터 공급받은 뒤에야 시작된다. 퇴비포대들을 잔뜩 실은 트럭이 밭 어귀에 나타나는 3월 중순 어느 날이 그 해 밭농사의 시작 날이다.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밭 가장자리의 관정도 개통시켜야 한다. 관정이란지하수를 이용하려고 만든, 둘레가 대롱모양으로 된 우물이다. 밭농사를 지으려면이 필수적이다. 밭 가까이 하천이 흐른다면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천생 관정 하나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평시에 관정은 지름 15m쯤 되는 둥근 철판 덮개로 덮여 있다. 값비싼 모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무심은, 관정 모터야말로 춘심산촌 밭의 심장이라 여긴다. 지하 깊숙이 있는 물을 지상의 밭으로 뽑아 올려 작물들이 잘 자라게 하는 동력원(動力源)이기 때문이다. 무심이 그 모터와지하에서 올라온 관()’을 서로 이은 뒤 모터에 전기를 넣으면위이잉!’하는 모터 가동소리와 함께 지하수가 지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사실, 지하수는 겨우내 지하 깊이 고여 있던 물이라 쉬 나오지 않는다. 그런 때를 대비해 한 주전자 물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 모터를 작동시킴과 동시에 그 물을 부어서, 지하수가 지상으로 잘 나오도록 돕는 것이다. 설명하자니 길었는데 짧게 말하자면 마중물을 붓는 일이다.

마중물

얼마나 정겨운 우리말인가! 지상의 물이 땅속 지하수한테 어서 밖으로 나오도록 마중 간다는 뜻이니, 전직이 국어교사였던 무심은 이른 봄 관정 물 개통 작업 때마다마중물어휘의 맛에 잠시 시름을 잊는다.

아직도 땅속에서 졸고 있는 지하수한테 지상의 물이 손수 내려가 뭐하시는 겁니까? 어서 나오셔야죠.’마중나간 모습. 생명체가 아닌 들끼리 오가는 정겨운 상봉 장면이러니.

 

무심네 관정은 그 깊이가 60m. 대개의 관정들이 2030m 정도 깊이이므로 무심네 관정은 별나게 깊은 편이다. 공사할 때 땅 밑으로 박은 관()이 최소한 암반층 하나는 뚫고 내려갔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 물이 아주 차갑고 맑다. 밭의 작물들에 뿌려주는 게 원래 목적이지만 무심이 목마를 때는 마시기도 하고, 온몸이 땀에 젖어 씻을 때에도 사용한다. 그럴 때 시원함이란 하늘로 날아갈 듯하다.

무심네 관정은 8년 전 무심 내외가 농사를 시작하기 한 달 전, 지하수 개발업자한테 맡겨 공사했다. 공사비가관정 깊이를 2030m 정도로 한 것보다 두 배나 들었다. 무심이 거금 지출을 무릅쓰고 관정을 그리 깊이 판 것은 농사일을 잘 아는 친구의 조언을 따랐기 때문이다. 친구가 지하수 개발업자를 무심한테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관정을 깊이 파라고. 그래야 가뭄이 와도 물 걱정 없을 뿐만 아니라지하수 물맛이 좋은 집으로 소문도 나지. 마치 약수 나오는 명소처럼 되는 거지.”

친구 말대로 이듬해 여름 몹시 가물어서 다른 집 관정들은 물이 잘 안 나온다고 걱정들 많았지만 무심네 관정은 그렇지 않았다. 다소 양이 줄어들긴 했지만 큰 걱정 없이 물이 잘 나왔다. 하지만지하수 물맛이 좋은 집으로 소문난 것 같지는 않다. 외진 골짜기 춘심산촌이니 그럴 만하고, 솔직히, 그런 소문이 나서 낯선 사람들 발길이 잦아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저 무심 내외가 조용히 농사지으며 세상 살아가는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면 그만이다.

 

요즈음 들어 햇살이 화창해졌다. 겨울이 끝나가는 것이다.

한 열흘 후 봄 햇살이 온 산하에 넘쳐나는 날 춘심산촌에 갈 것이다. 십자드라이브와 몽키렌치를 찾아 들고서 관정에 다가가, 철판 덮개를 연 뒤 모터와 관을 다시 잇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럴 때 아내는 주전자 물을 준비해야 한다. 마중물이다.

아직도 땅속에서 졸고 있는 지하수한테 그 마중물이 내려가 말붙일 것이다.

뭐하시는 겁니까? 어서 지상으로 나오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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