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겔만 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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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너무나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그토록 많이 들으면서도 한 번도 이런 의문은 가져보지 않았다. 왜 소년만 야망을 가져야 하는 거지? 노년은 야망을 가지면 안 되나? 왜 이런 의문이 들었는가 하면,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혁명을 꿈꾸는 할머니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노년이 야망을 품으면 노욕(老慾)이라고. 늙어서 그러는 건 너무 추하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정반대로 말한다. 꿈이든 야망이든 사랑이든 그런 건 모두 나이와 전혀 상관 없다고. 혁명도 얼마든지 꿈꾸어도 좋다고. 그 할머니의 이름은 메르타 안데르손. 그녀는 다이아몬드 요양원에서 보호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온갖 금지 속에 갇혀 있다. 예전에 그녀는 농부였다. 억센 두 손으로 가축도 기르고 작물도 생산했다. 자기 스스로 뭐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러지 못한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한다. 잠자는 시간조차 정해져 있다. 그야말로 다시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 하는 어린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내가 끌기 보다는 남에게 끌려가기만 하는 생활. 당연하게도 이런 자신이 못 미더울 수밖에 없다.


 여기, 노인 요양소에 들어온 이후로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변해버렸을까? 국민들이 자기 나라 정부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여기서도 혁명을 일으켜야 할지 모른다. 메르타는 <거의 언제나,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메르타는 이 믿음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p. 15)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믿음에 기대어 보려고 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그러나 바란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메르타처럼 꿈을 이루기가 요원한 장소에 있는 경우엔 더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감을 따고자 한다면 직접 장대를 사용해 가지를 흔들지 않으면 안된다. 혁명이 행위로 완성되듯이 오로지 적극적인 실천만이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메르타에겐 과감한 실천력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쥐구멍을 찾아내는, 아니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람을 모으고 함께 금지를 위반해, 거기서 오는 자유와 쾌감을 통해 반기의 즐거움을 동료들에게 전염시킨다. 그렇게 하나의 그룹이 형성된다. 장차 다이아몬드 요양원만이 아니라 스웨덴 전국의 노인 요양원 전체를 뒤바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갖고 올 그룹이.


 애초엔 감옥에 가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을 전혀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요양원의 처사에 반발해서였다. 감옥의 간수는 적어도 죄수를 어린아이처럼 대하진 않으니까. 다시 말해 메르타와 그녀의 동료들은 어린아이로 길들이려는 요양원의 행태에 지쳤던 것이다. 


 메르타가 바르브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젊은 것은 노는 게 뭔지 도통 몰라! 어린아이들도 잔치를 하면 밤새 놀고 그러잖아! 우리에겐 그럴 권리도 없다는 거야."

 천재가 입을 열었다. "규칙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야."(p. 525)


 그건 그들의 성미에 전혀 맞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를 가진, 주체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선원 출신 갈퀴는 각종 꽃과 허브를 길렀다. '천재'라 불리는 오스카르 크루프는 온갖 물건들을 발명했다. 사서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여성 모자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었던 스티나는 회화에 몰두했다. 평생 은행에서 일하다 은퇴한 안나그레타만이 다소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정해진 궤도만 따라 살던 사람에겐 위반이 더 큰 의미와 즐거움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므로. 그리하여 그들 모두 메르타에 뜻에 동조, 감옥에 가기 위하여 범죄를 지으려 했다.


 감옥, 그 곳은 평범했던 그들의 인생에서 무진장 멀리 있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그런 곳에 스스로 간다고 하는 것은 구획된 삶에서 탈주하는 것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 탈주를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행위라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화단에 심어 놓은 꽃처럼 사회가 정한 위치에서 그가 부여한 정체성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된 일상이 형성하는 사회적 정체성의 중력으로 어느새 무엇이 진짜 자신인지 모르게 된 우리들은 사회가 씌어준 가면을 나의 진짜 얼굴로 여기며 벗어날 줄 모른다. 탈주란 그 예속의 상태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사회가 정한 자리가 아니라 내가 정한 자리에서 뿌리 내리려는 움직임이기에 주체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탈주의 강조를 위하여 보통 사람들의 비정상의 장소로써 '감옥'을 가져왔을 것이지만 그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메르타 일행이 막상 감옥에 가보니 요양원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바르브로가 있다면 감옥엔 리사가 있듯이, 어디서나 개인에게 주체의 역량을 빼앗고 명령을 잘 따르는 아이로 길들이려 하는 건 똑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으로 작가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마음을 먹고 작은 실천이라도 하다보면 탈주는 이뤄지는 것이며 장소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즉 메르타와 '노인 강도단' 동료들이 모여서 범죄를 모의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하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가신 노인들이 돼보는 거야.(p. 54)


 정말 그들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 감옥에서의 그들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노쇠한 몸에게 어디서든 공격이 이뤄질 수 있는 감옥은 그야말로 공포의 장소다. 하지만 메르타 일행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감옥은 오히려 메르타는 더 원대한 꿈을 꾸고 천재는 다른 사람의 범죄 방법을 배우며 몸을 젊게 가꾸는 등, 더 능동적인 주체로 만드는 토양이 될 뿐이다.


 이처럼 요양원의 금지된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는 이미 자기 내부에 있다. 안주하지 않고 탈주를 감행할 때 열쇠 또한 이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소설 초반, 가장 먼저 능동적인 주체가 된 메르타가 하필이면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훔치게 되는 건 그런 의미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러한 탈주를 강조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우리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미리 형성되어 있는 정형화된 이미지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성별, 인종별, 종교별 그리고 연령별. 저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데서 오지 않은, 누군가 주입한 이미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자주 우리는 거기에 따라 판단한다. 우리는 이런 걸 선입관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메르타 일행이 고가의 명화 두 점을 훔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람들의 선입관 덕분이었다. 노인은 약하고 수동적이라 범죄 행위 같은 건 감히 꿈도 꿀 수 없다는, 이러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선입관이 경비원으로 하여금 메르타 일행을 범행 현장에서 뻔히 보고도 그냥 가게 한 것이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의 선입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러고 보면 메르타 일행이 하필이면 범죄를 저지르게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범죄 영화에서 노인들은 은행 같은 곳에서 범인들의 총구 앞에 덜덜 떠는 존재이거나 갑자기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어 주인공으로 하여금 활약하게 만드는 계기였지 이렇게 범죄 행위의 주축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메르타 일행이 저지르는 것과 같은 강탈 행위에선 더욱 그랬다. 갑자기 횡단 보도 위로 넘어져 주인공의 활약을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작가가 허다한 범죄 중에서도 절도와 은행 강도 같은 강탈 행위를 가져온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걸로 영화가 노인에게 반복적으로 형성한 관습적인 이미지를 통렬하게 깨뜨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메르타의 생각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모두 웃는 얼굴 밑에 참으로 많은 것을 숨기고 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웃음에 얼마나 잘 속는가!(p. 45)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도 사회가 씌어 놓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지만 타인을 볼 때도 가면인 줄 모르고 진짜 얼굴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어리석음 속에서 우리는 기성복처럼 양산된 가짜 얼굴에 안주하며 그 아래에 있는 맨얼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사회가 이식(移植)한 자리를 마냥 있어야 할 내 자리로 알고 살아가는 것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평생 누군가 씌워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도 또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 소설로 그 가면을 벗기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진짜 얼굴이 드러나도록. 그리하여 탈주를 강조한다. 탈주란, 다름아닌 그 가면을 벗기는 행위이니까.

 스티나가 덧칠한 것을 벗겨내자 비로소 진짜 명화가 드러났던 것처럼.


 노인의 야망을 노욕이라 부르는 것도 선입관이다. 어떤 나이든간에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해선 안된다. 탈주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듯 나이 또한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선입관 없이 사람은 다만 그 자체로 이해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겉모습이, 거기에 덧칠된 선입관이 점점 본질을 압도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성별과 인종, 국적과 계층 그리고 세대에 있어 그런 것이 더 심해지고 있다. 그 사이에서 오고가는 혐오와 적대의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말들의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떤 범주에 속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거기 있는 단 한 사람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선입관에 물든 가면을 벗기고 그 사람만의 진실된 얼굴을 보려고 해야 한다. 메르타의 탈주는 그 직시(直視)를 위한 궤적이다. 그러므로 더욱 열렬히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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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0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1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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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무수한 시행착오의 집적이다사랑도   하나다.

 언제고  번은 부고장을 들고  있는 실연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나는 사랑에 능숙해서 그런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허세이거나 진짜 사랑을  번도 못해  자다  번도 연인에게 자신의 진심을   적이 없는 사람만 그렇게 말할  있다사랑을 종종 심장에 비유하는  심장을 남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과 같은 불안과 공포 또한 의미하 때문이다그렇게 된다 수밖에 없다. 영화 '봄날은 간다'가 유지태의 절규를 통해 잘 가르쳐주었듯이, 사랑은 변하기 때문이다연애의 시간은 언제까지나 한낮이고 봄날일  없다어느 순간 밤이 되고 겨울이 온다적막하고 스산한 겨울의 해변에서   추억의 바다에서 떠밀려온 미역 줄기와 같은 사랑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서성이는 때가 찾아오는 것이다찾아오고야 만다영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 또한 아주 아프게 깨닫지 않았던가사랑에는 엄연히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그 끝에서 사랑은 기억이 된다. 그렇다고 사랑이 끝나진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익사체다과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꿈에서 깨고 나서야 꿈이란  깨닫는 것과 똑같이, 사랑을 하고 있는 순간엔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사랑이 곁에 없을 때라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사랑은 그렇게 뒷모습으로만 존재한다.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롭다부재를 통해 존재를 이어가다니...

 없는 있다.

그렇기에 연애의 기억은 사막이나  위의 발자국이 되지 않는다그건 그대로 화석이 된다공룡의 화석이 그러하듯이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그것도 실패처럼 사랑의 전모를 기억의 실로 둘둘 감고서.


 자의든타의든 번은 발굴된다실패를 돌려 기억을 줄줄 풀고자 한다그렇게 밤과 겨울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사랑의 주검을 해부대 위에 올려 놓는다메스를 갖다 대는 최초의 동기는 혼란이다내겐  많은 질문이 남았는데 어느  하나 해답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렇게 싸늘한 주검이 되어야 했는지어쩌다  지경이 되었는지내가  잘못해서 이리  건지아니면 상대가 원래 나쁜 사람인 탓인지 등등 대답을 찾기 위해  부지런한 부검의 되어 꼼꼼이 살핀다봉인된 기억의 육체를 가르고 등뼈와 같은 연애의 연대기와 장기처럼 놓여져 있는 이런저런 사건들그리고  모두에 촘촘히 퍼져있는 신경과 같은 너와 나의 말과 행동들을 하나하나 핀셋으로 찝어 들고선 관찰한다소설 ‘연애의 기억 그와 같다




 그런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거기서 부검의는 케이시 이다진짜 직업은 변호사이지만어쨌든 우리와 마찬가지로 케이시 폴도 기억의 실타래를 풀게   질문 때문이었다소설의 첫문장이 그것을 나타낸다.


사랑을 하고  괴로워하겠는가아니면 사랑을  하고  괴로워하겠는가? (p. 13)


 케이시  말한다우리 대부분은  이야기가 하나밖에 없다( 소설의 원제는 ‘THE ONLY STORY’이다.)삶에서 오직  가지 일만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있고  만한 가치 있는 이야기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다바로 사랑이다그건 우리가 풀어야 삶이 가진 유일한 숙제다 밖에 다른 것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십자말 풀이에 불과하다.


 하여폴은 실을 푼다대답을 찾아서그건  묶음으로 모인다소나타 형식처럼 소설이  개의 파트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파트의 제목은 하나’, ‘’, ‘으로 단순하다그런데 인칭이 파트마다 달라진다. ‘하나에선 ‘ 되고, ‘에선 ‘ 되며, ‘에선 ‘ 된다얼른 보면 인칭을 파트 제목에 맞춘 인상이다물론 이유가 그리 단순할 리는 없다. 연애의 기억에서 사랑은 현실과 대립되어 존재한다케이시 폴의 사랑 또한 그렇다그는 자기 또래의 자식을 두고 있는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다거기다 폴은  아홉 살로 미성년이런 사랑은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라 해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아마도 반스가 이런 파격적인 사랑을 설정한 데는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하나는 현실 앞에 취약한 사랑의 형태를 통해 사랑과 현실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함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사랑이 독자 또한 이상하게 보일만큼 사랑의 모습이 너무 정형화되었다는  나타내려는 것이다소설에서 수전은 폴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랑은 탄성이 있어희석되는  아니야늘어나줄지 않아.’(p. 102). 그러나 때로아니 자주우리는 사랑에 전혀 탄성이 없다고 여긴다마치 특정 사람에게만 사랑이란  가능하다는 듯이.) 게다가 폴과 수전이 사는 ‘빌리지 아주 보수적인 마을로 수전의 유일한 친구 조운처럼 남과  다르게 살면 바로 배척당하는 곳이다현실은 이웃의 경멸과 폴의 부모 얼굴 또는 수전 남편 매클라우드의 폭력으로 번갈아가며 사랑을 위협해 온다.


 그러나  어떤 것도 폴의 사랑을 거꾸러뜨리지 못한다그는 강한 성벽을 가진 군주처럼 자신의 사랑을 보호한다. ‘라는 1인칭은 그런 강한 사랑을 암시한다폴은 어떻게 현실에 굴하지 않고 이토록 강한 사랑을   있었을까하지만  대답을 찾아가노라면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그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이란  알게 되는 까닭이다


 첫사랑은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어떻게 그러지 않을  있겠는가압도적 현재형으로다른 사람들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p. 137)


 그러나 사랑의 달콤함에만 취하는 자는 그걸 모른다타격이 통증을 통해 몸의 존재를 알리듯고통이 수반되어야 깨닫는다사랑의 상실이 사랑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현실의 공성전은 멈추지 않는다사랑을 위해 빌리지를 떠나 헨리 로드에서 드디어 둘이 함께 살게 되었지만 수전은 돌연 알콜 중독에 빠지고 폴에게 거짓말을 잇달아 하는가 하면 나중엔 폴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마저 걸린다.(수전이 이렇게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돌연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사랑이 이처럼 시험당하기 쉽다면 그만큼 연약한 것이니 이를 강조내기 위해 그렇게 했을 지도 모른다.) 폴은 점점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속에 아픈 가시들이 제법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시를 품어야할지 도려내야할지 그는 알지 못한다첫사랑을   그는 능동적이었다현실그것의 총체인 삶은 오로지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폴은 점점  수동적이 된다삶이 자신의 목줄을 잡고 있는 것처럼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된다수전은 폴에게 언젠가 이런 말을  적이 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운 거야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가운데 하나지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p. 74)


 폴은 그런 장소를 찾았다고 생각했다수전은함께 테니스를   끝까지 공을 따라가 완전하게 상대편 코트로 쳐냈던 것처럼삶도 차분하고 질서정연하며 신뢰할만 했기에 자기처럼 네트에  붙어 불안하고 충동적인 파트너에게 가능한 최선의 백코트 지원자(p. 70)였으니까헨리 로드  정점이라 여겼다


 우리의 사랑을 향한  태도는 독특하게 고지식했다.-사실 독특하게 고지식한 것이 모든 첫사랑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지만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우리 사이에 사랑의 확실성이 자리잡았으니이제 삶의 나머지가 그것을 둘러싸고 자기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나는 전적으로 그렇게  것이라고 확신했다.(p. 66)



 하지만 수전의 삶이 폴의 생각과 전혀 달랐듯수전도 안전한 장소는 되지 못했다. 조운처럼 그도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아야했다어쩌면  때의 수전 역시 자신을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폴의 존재는 차츰 위축된다그것은 폴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타인에게   번도 수전의 애인이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난다무심코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김정은에게 했던 이런 대사가 떠오를 정도로.


 “ 말을 못해 남자가  사람이다 남자가  애인이다 말을 못하냐구!”



 사랑은 연약해진다현실의 차디찬 냉기 앞에서 육체의 온기를 서서히 빼앗기듯 마모되어 나간다그런데 그와 동시에  속에 굳게 또아리 틀고 있었던 자기중심주의 썰물처럼 빠져나간다사랑이 점차 실망과 위기불안과 피로의 대상이 되어가는  보면서 폴은 어느덧 ‘ 떠나 ‘ ‘ 자리에 있게 된다거듭되는 인칭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암시다사랑에 대한 정의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이 어디까지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타인의 자리에 서서 타인의 눈과 마음으로 그를 헤아리고 그를 위할  있을 때라야 사랑이라고 부를  있다는 그게 사랑이 욕망과 구별되고 스토킹이 사랑이   없는 이유다.  포르투칼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는 사랑을 사유라고 단적으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폴이 ‘ ‘ 되어 자신의 사랑을 사유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  있지 않을까? 연애의 기억이라는 소설 자체가 그렇게 되었을  마치  과실처럼 비로소 나왔다는 것도 이걸 어느 정도 시사하는  같다.(소설 전체는 수전의 사후에 폴이 자신의 사랑을 회고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의  문장에 대해 대답을   있을 듯하다그것에 대한 진짜 대답은  사랑이 어떤 것이냐에 달렸다는 것을. 앞서 내가 사랑은 과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난다고 했던 것은 이 사랑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나를 벗어나 너와 그의 자리에서 헤아리는 사랑. 그런 사랑이라면 아무리 괴롭더라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제 말하련다. 우리가 계속 사랑의 부검의가 되어야 하는 까닭을.


 우리는 잘 안다. 사랑이 변하기 쉽고 끝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이건 죽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아무튼 모든 것엔 끝이 있다. 그런 끝에 대한 얘기를 지속적으로 작품을 빚어내는 작가가 바로 줄리언 반스다. 그 환멸의 작가손에  해골을 보며 자신이 이토록 고뇌하고 갈등한 끝에 복수를 하더라도  또한 죽음에 삼켜져 결국엔 무의미하게  거라는  너무나  아는 햄릿의 후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사랑도, ‘시대의 소음처럼 예술도 결국엔 시지프스의 형벌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사랑과 예술이 끝이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을  있는가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이것을 쓰면서 반스는 과연 소설 속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때로 삶은 잔인한 아이러니를 선사한다.)부터 그는 내내 아주 냉철한 현실주의자의 시야로 그것을 따져왔다.(그것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가 보여주듯이 아내의 죽음을 기점으로 더 집요해지고 깊어지고 있다.) 제아무리 쇼스타코비치가 위대한 음악을 남기더라도 언젠가는 시대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전기뿐 아니라 역사도 희미해져갈 것이다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시대의 소음’, p.257)누구도 무엇도 예정된 운명을 피할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나왔던  그대로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아니다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생에서 변화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p. 254)




 문제는  닫힌 이다존재가 유한한 이상 우리는 패배의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아니 우리가 물어야  질문은 오직 하나다폴이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이야기만이 가능하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그것이 바로 우리가 풀어야  오직 하나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패배에 그저 길들여질 것인가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너머를 꿈꾸며 희망을 찾아 다닐 것인가?'


 맞다 질문은 그대로 우리 존재의 의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반스에게 환멸은 끝이 아니다. '망할'이라고 내뱉기 보다 '그래서?'라는 의문문을 제시한다. 그에게 환멸이란 새로운 시작을 여는 문인 것이다. 그는 탐험가가 되어 찾는유한의 숙명을 뛰어넘을  있는 무언가를계속  다른 문을 열어 젖히면서.


 이번엔   근원적인 지점에 이르렀다 전까지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다가올 부재를 불길하게 예감하며 말을 했는데 이번엔 아예 부재 이후 그것을 관통한 지점에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수전의 죽음 이후라는 시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 이후에도 뭔가가 존재할  있을까있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일까?


 긴 답은 너무 시간을 잡아먹어 해 줄 수가 없었다. 짧은 답은 너무 고통스러워 해줄 수가 없었다. 그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그것은 상심이 무엇인가, 마음이 과연 어떤 식으로 상처를 입는가, 그 다음에는 거기에 무엇이 남는가의 문제다.(p. 375)


  그래서 반스는  소설에 사랑을 데리고 왔다폴이 수전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하게  것처럼사랑은 부재를 통해서 지속하는아니 그것을 통해  커다란 생명력을 얻는 존재이니까 말이다.(사랑의 가치란 언제나 상실한 뒤에 더 커지기 마련이 아니던가?) 이토록 취약하고이토록 우왕좌왕 서투르며나날이 혼돈과 불안이 거듭되는 사랑임에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기억을 통해 나를 넘어 더 확장되고 멀리 뻗어나갔다. 수전의 남편에게 더이상 증오와 원한의 감정을 품지 않게 된 것처럼, 사랑은 또 다른 걸 낳았다. 


 이런 연속적인 흐름 가운데 어딘가에서 그는 매클라우드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매클라우드를 용서하지는 않았지만-그는 용서가 증오의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글거리는 반감과 밤 시간에 터져 나오는 분노가 어쩐 일인지 의미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p. 307)

 

  보다 원숙하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했고 부모를 비롯한 대립하던 이들과 화해하도록 했다. 그런 폴에게 끝은 있지만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

 있는데,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폴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죽음은 더이상 비통의 순간이 아니다. 다만 고요한 작별이다. 끝의 허망함을 느끼기도 전에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정도로. 


 내 마음을 사랑과 상실에, 재미와 통탄에 묶어둘 수 없었다.(...) 나의 여생이, 비록 이 모양이지만, 그리고 이후에도 그럴 것이지만, 나를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었다.(p. 380)


  연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건 줄리언 반스의 결론이기도 하다. 실제 아내의 죽음과 픽션 속 수전의 죽음을 관통한 끝에 다다른 환멸의 종막. 거기엔 사랑을 통한, 아니, 기억으로 재생되는 '사랑의 사유'를 통한 초연이 있었다. 그 모든 불길한 예감과 성급한 낙담으로부터의 해방. 바로 그걸 사랑이 한 것이다. 그 사랑으로 패배에 길들여질 필요없이 죽음 너머에도 계속 이어질 것을 꿈꾸며 존재의 의미를 채우고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니 어떻게 나 또한 사랑의 부검의가 되라고 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애의 기억'은 단순히 연애 소설만은 아니다. 유한한 우리가 언제나 묻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오직 하나의 질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소설이다. 죽음마저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는.

 지금 이 순간, 문득 짐 자무시의 다음과 같은 영화 제목이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운 것 보다는 더 하고 더 괴로워하는 게 낫다.

  '연애의 기억'은 사랑의 순전한 긍정이요, 끝에 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사랑하라는 줄리언 반스의 권유 혹은 유혹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 유혹에 굴복할 것을 바라고 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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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0-2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은 어떻게 이렇게 리뷰를 잘 써서 똑같은 책을 읽은 사람에게 달콤한 열등감을 안겨 주시나요 ㅎㅎㅎㅎ 으하하하.....ㅠ

ICE-9 2018-10-25 21:43   좋아요 0 | URL
앗! syo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 과찬이세요. 사실 열등감은 늘 저의 몫이니까요. 하하하^^;

syo 2018-10-26 14:30   좋아요 0 | URL
무려 헤르메스님께 열등감을 안겨줄 수 있는 괴인(?)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미쳤어, 미친 세상이다....

ICE-9 2018-10-26 20:53   좋아요 0 | URL
그 괴인들이 너무 많아서 마치 가면라이더에 나오는 괴인 연합 같아요. 그 중의 총수급이 syo님이라면 믿으시려나요? ^^

syo 2018-10-28 10:31   좋아요 0 | URL
최근에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를 읽고 리뷰를 써볼까 머리를 쥐어짰는데 아무 것도 안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썼나 검색했다가 헤르메스님 글을 보고 저는 리뷰를 포기하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 제가 총수라니요.... 괴인연합 너무 날로 잡아드시려는 거 아니세요 헤르메스라이더님? ㅎㅎㅎ

ICE-9 2018-11-01 20:44   좋아요 0 | URL
그 때는 제가 원기옥 같은 걸 먹었던 것 같습니다. 라이더에게도 때로 그런 기적이 일어날 때가 있죠. 보통 땐 그저 바이크도 잘 다루지 못하는 초짜 라이더일 뿐 ㅠ ㅠ
 
맥베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세익스피어, '맥베스' 중에서 -



 윌리엄 세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이하여 현대 유명 작가들이 그의 대표작들을 재해석하여 자기만의 소설을 쓰는 '호가스 세익스피어 프로젝트'가 발표되고 어떤 작가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지 명단을 미리 알렸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띄었던 작가는 바로 '요 네스뵈'였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너무나도 아끼는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요 네스뵈는 권력을 향한 욕망에 눈이 멀어 스스로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맥베스'를 맡았다. 늘 사랑으로 아파하고 그로인해 고난을 자처하는 해리 홀레를 떠올린다면 리어왕이 좀 더 그와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우울과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해리 홀레를 생각한다면 맥베스도 제법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파멸의 궤적을 그리는 데 있어 능한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였으니! 그러고 보면 '맥베스' 처음에 등장하는 맥베스가 극 중에서 첫 전투를 치르게 되는 이가 바로 노르웨이의 왕 '스위노'다. 혹시 이것 때문에 요 네스뵈가 맥베스를 맡게 된 건 아니겠지?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 작가라서. 안다. 말 도 안 되는 상상이란 걸.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다. 흰 소리는 그만하고 어쨌든 드디어 수 년의 기다림 끝에 그 작품을 만났다. 그런데 이런! 제법 두툼하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그렇게 분량이 많지 않은데, 어쩌다 이렇게 분량이 늘어났을까? 그 궁금증 때문에라도 나는 서둘러 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요 네스뵈는 일단 맥베스의 골격을 그다지 바꾸진 않았다. 스위노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덩컨 왕에게 코도의 영주로 임명되고, 갑자기 나타난 세 마녀를 통해 자신이 장차 왕이 될 것이며 버남 숲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여자가 낳은 자가 상대라면 절대 파멸하지 않을  거라는 예언을 듣게 되는 것도 그대로 나온다. 물론 자멸하는 것도. 인물들 역시 원래 희곡에서 맡은 역할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네스뵈의 '맥베스'가 새로운 이야기로 읽히는 것은 그것을 아주 현대적인 이야기로 잘 옮겼기 때문이다. 희곡의 무대가 되었던 중세의 스코틀랜드는 70년대의 도시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도시란 배트맨에 나오는 고담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전직 경찰청장 케네스 때문에 부패와 마약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희곡에선 스코틀랜드 왕으로 나왔던 덩컨은 그런 부패와 마약 조직을 일거에 소탕하여 깨끗한 도시로 만들려고 하는 신임 경찰청장이다. 소설의 맥베스는 희곡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마약 시장을 카테(희곡에선 세 마녀를 거느린 여신 같은 존재였는데, 소설에선 마약 조직의 수장이다.) 조직과 양분하고 있던 노스 라이더 조직 급습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그 와중에 노스 라이더 조직의 수장 스위노는 사살된다.) 덩컨에 의해, 희곡에서 코도의 영주가 되었던 것과 똑같이 조직범죄수사반장이 된다. 그러자 헤카테가 거느린 세 마녀와 같은 존재들(그들은 헤카테 아래에서 마약을 제조한다.)이 나타나 희곡과 같은 예언을 들려준다. 세 마녀는 헤카테에게 돌아가 맥베스 마음에 일단 씨앗은 심어 놓았지만 과연 맥베스가 헤카테 생각대로 움직일 것인지 의심한다. 그런 그들에게 헤카테는 맥베스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레이디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레이디는 맥베스가 결혼한 여성으로 그녀는 인버네스 카지노의 사장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이름이 아니라 레이디로 나오는 이유는 세익스피어 희곡에서도 그냥 '맥베스 부인'으로만 나오기 때문이다. 이름을 줬어도 별 상관없었을테지만 이만큼 요 네스뵈는 원작의 골격을 유지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 아무튼 맥베스는 그 예언을 레이디에게 들려주고 레이디는 맥베스에게 덩컨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요 네스뵈는 레이디를 맥베스만큼이나 권력 욕망에 물든 존재로 그린다. 그런데 여기엔 연유가 있다. 과거에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잘못된 선택을 스스로 정당화시키다 보니 권력의 집착에서 더이상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레이디의 잘못을 맥베스 역시 하게 된다. 처음엔 사소한 오판에 따른 선택이었던 것이 나중엔 벗어날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의 올무가 된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한낱 낯선 이의 예언이 나중엔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신탁이 되어버렸던 맥베스처럼.


 톨킨의 '반지의 제왕'처럼, '맥베스' 역시 욕망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욕망을 자신의 인간성과 맞바꾼 자의 이야기다. 그건 그가 원하는 자리에 가면 갈수록 자신의 사람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드러난다. 다른 이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고 분노가 되지만, 맥베스의 죽음은 찰라로 묘사되며 누구에게도 잔영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마치 원래부터 없던 사림인 것처럼 된다. 요 네스뵈는 이것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설에서 맥베스가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살해하는 인물은 알고보면 그 때 가지고 있었던 맥베스의 중요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덩컨은 경찰로서 맥베스가 되고 싶은 바람직한 경찰의 상징같은 인물이고 뱅쿼(희곡에선 맥베스와 함께 세 마녀의 예언을 듣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진짜 아버지도 아니면서 진짜 아버지보다 더한 부성애로 약물에 중독되었던 맥베스를 파멸에서 건져내고 사람으로 만들어준, 달리 말하자면 두 번째 기회를 가져다 준 사람으로 인간으로써의 맥베스가 가져야 할 사람다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둘을 참혹하게 살해하여 원하는 경찰청장 자리에 오르는데, 이건 그대로 권력을 차지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경찰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그는 괴물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맥베스는 경찰청장이 되고 난 후, 더욱 약효가 강한 마약을 찾게 된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크기에 비례하여 더 중독성 강한 약을 찾는 것만 같다. 여기서 약은 이중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약의 중독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사소한 잘못된 선택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의 굴레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맥베스의 삶이 그랬듯이 처음엔 타의에 의해 괴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면 이제 자의에 따라 괴물로 남는다는 것이다. 약은 명확하게 괴물의 상징이다. 사람의 증명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을 억제하고 오로지 욕망의 충족만 추구하도록 만드니까 말이다. 세익스피어 희곡에서는 맥베스에게 잠을 박탈하는 것으로 점점 비인간화 되어가는 그를 나타내었다. 소설에서의 마약 중독은 마약이 늘 각성 상태에 있게 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희곡에서 잠을 상실한 것을 빗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잠의 상실이 소설에서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더프가 맥베스를 죽이기 위해 찾아갔을 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원하는 게 뭐야?"

 "정의와 우리의 잠을 돌려 받는 것"(p. 430)



그런 마약이 팽배해는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정의나 타인을 위해 싸우는 사람은 모두 마약과 멀리 있다는 것도 이것을 방증한다. 한 쪽에는 괴물이 있고, 다른 한 쪽엔 사람이 있다. 맥베스의 반대편엔 더프(희곡에선 맥더프)가 있다. 희곡을 읽어 본 사람은 이 더프가 장차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연인 케이스네스(희곡에서 케이스네스는 그저 더프와 뜻을 같이 하는 스코틀랜드 귀족으로 나왔는데, 요 네스뵈는 재밌게도 소설에서 연인으로 만들어버렸다.)에게 고백했듯이, 그는 욕망보다 사랑과 책임을 더 소중히 하는 사람이다. 케이스네스를 향한 욕망 또한 아이들에 대한 책임과 사랑 때문에 과감하게 접을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쳤어. 내가 살 수 있도록 당신을 희생했어.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그랬듯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내 천헝이라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잖아.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걸 바치지는 못할망정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내 이기적인 욕심에 아이들에게서 가족을 빼앗겠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어머니의 무덤에 침을 뱉는 거나 다름없어.(p. 313)


 올곧게 욕망의 길만 따랐던 맥베스와는 정반대의 남자. 하지만 아직 맥베스를 만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하자. 지금은 그저 세익스피어가 맥베스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주제를 현대적으로 잘 리메이크 하고 생생한 현실과 심리 묘사로 잘 살을 붙여 더욱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만 말해두려 한다. 부피가 이토록 두터워진 연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등장 인물들을 리얼한 삶의 현장 위에서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그만한 부피로 핍진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성공했고 끝까지 몰입해 읽을 수 있도록 한다. 액션 장면도 많아 더욱 지루할 틈이 없다. 맥베스를 좋아하는 사람도, 요 네스뵈를 좋아하는 사람도 다 만족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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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1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1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 명의 의인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2
에드거 월리스 지음, 전행선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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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미스터리 소설을 읽을 때, 그 평가를 가장 많이 참조하고 미스터리 팬에겐 걸출한 평론서인 '블러디 머더'로 이름 높은 줄리언 시먼스는 에드거 월리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다작 작가들 중에서 진정한 상상력의 재능을 지닌 사람은 에드거 월리스가 유일했다.('블러디 머더', p. 317)


 신랄한 평가를 서슴지 않는 시먼스라 이 정도로 말하면 상찬이 분명하다. 그러나 에드거 월리스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무려 173편의 소설을 발표(그 중의 절반이 추리 소설이다. 그는 SF를 쓰는 것도 좋아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 작품의 출간이 반가웠다. 그것도 윌리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네 명의 의인'이라서 더욱 그랬다.






 '네 명의 의인'은 제목과 다르게 피카레스크 장르에 넣어야 할 듯 하다.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사익 때문에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실 돈 때문에 살인할 필요가 없다. 충분히 부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 살인을 감행한다. 세상을 고통 속에 빠뜨렸는데도 자신의 돈과 권력을 사용하여 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찾아내 처형하는 것이다. 때로 여기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자를 방해하는 이들도 포함된다. 소설에서 '네 명의 의인'의 최종 목적이 되는 영국의 외무부 장관, 필립 레이먼 경이 그러하다. 최근 영국에 스페인에서 부패한 정부(엄청난 기근이 스페인에게 닥쳐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정부는 자신의 주머니 채우기에만 급급해 국민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을 서고 있는 마누엘 가르시아가 스페인 정부의 손을 피해 망명해왔다. 그런데 필립 레이먼 경은 새로운 스페인을 위한 혁명의 등뼈와도 같은 가르시아를 스페인 본국으로 송환하는 법을 만들어 통과시키려 한다. 이 법이 실행될 경우 가르시아는 죽은 목숨이다. 그것은 현재 부패한 스페인 정부가 계속 존치하는 것을 뜻한다. '네 명의 의인'은 이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 위해선 가르시아를 영국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걸 방해하는 필립 레이먼 경은 죽어야 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네 명의 의인'(실은 세 명이지만.)이 필립 레이면 경을 암살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 탈퇴해 경찰에 쫓기다 죽어버린 맴버를 대신해 '네 명의 의인'이 새로 영입한 인물은 '테리'. 그러나 스페인에서 데려온 이 청년은 선뜻 합류하려 하지 않는다. '네 명의 의인'에게 그는 필립 레이먼 경을 죽이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다. 과연 테리는 그들의 맴버가 될 것인가? 그 이야기를 한 축에 두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필립 레이먼 경을 암살하기 위한 과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들은 스스로 신사라 자청하기에 방법도 정정당당하게 한다. 그러니까 필립 레이먼 경에게 법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언제까지 죽일 것이라 예고장을 공개적으로 보내는 것이다. 아침마다 수 십 통의 협박을 받는 레이먼 경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자 '네 명의 의인'은 자신이 마음먹으면 누구든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의 예고장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영국 하원 의회에 폭탄을 설치하고 그렇게 했다는 쪽지를 남긴다. 오직 경고의 목적이었기에 폭발을 하지 않도록 된 폭탄이었지만, 그토록 사람이 많았던 하원 의회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들어와 폭탄까지 설치했다는 사실에 그 의회에 있던 사람은 물론 영국 전체가 공포에 잠긴다. 그 일로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네 명의 의인'은 그들이 전에도 대의 명분을 위해 먼 외국의 대통령까지 목을 매달아 처형하는 등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해왔다는 게 알려지면서 더 비상한 관심과 공포의 존재가 되며 과연 그들이 제시한 시간에 레이먼 경이 죽을 것인가가 초유의 관심이 된다.


 그러나 뚝심 있는 레이먼 경은 법안 철회를 생각도 않고, 경찰은 '네 명의 의인'을 대대적으로 쫓는 한 편, 레이먼 경을 보호하기 위해 물샐틈 없는 경비로 완벽한 밀실을 만든다. 과연 '네 명의 의인'은 이 두터운 벽을 뚫고 레이먼 경을 암살할 수 있을까?


 피카레스크 장르에 밀실 살인을 뒤섞은 참신한 설정의 소설이다. 거기다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때가 1905년임을 감안하면 돈과 권력의 힘을 빌어 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를 스스로 처벌하는 자경단이 등장한다는 것도 놀랍다. 자경단의 대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배트맨도 1940년이 되어서야 등장했으니 얼마나 앞서 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배트맨의 설정은 아주 부유한 자가 자경단이 된다는 동일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데, 혹시 밥 케인이 '네 명의 의인'을 읽고 그런 설정은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네 명의 의인'은 1921년과 39년에 두 번이나 무성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어서 밥 케인이 영화로 만났을 수도 있다.


 

1939년에 나온 영화의 포스터


 어쨌거나 저쨌거나 당대엔 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와 설정 그리고 형식으로 무장했으니, 왜 줄리언 시먼스가 에드가 월리스를 두고 진정한 상상력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 아주 오래된 작품이지만 피카레스크 장르에 미스터리 물, 법정 물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기에 마지막까지 지루할 틈 없이 읽힌다. '네 명의 의인'이 때로는 위협을 위해, 때로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트릭을 구사하는데 그것을 보는 재미도 있다. 물론 그 중 어떤 것은 좀 너무 안일한 것 같지만 말이다.(하지만 1905년이란 시간을 감안하면 용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프랑스의 유명한, 범죄자 출신 경찰이자 경찰 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던 '비독'의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아무튼 재밌다. 분량도 200여 페이지밖에 안 되니 가볍게 즐길 만하다. 고전 미스터리 소설이 취향이라면 오래도록 미싱 링크였던 것을 이제 확인한다는 마음으로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시 줄리언 시먼스에 따르면, 에드가 윌리스는 꽤 독특한 방식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인물의 이름만 적어두고 거기에 대해 다른 어떤 것도 메모하지 않았고 연재 소설을 쓸 때는 다음 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거의 생각하지 않은 채로 즉흥적으로 썼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왜 '네 명의 의인'이 자유 분방한 전개를 보였는지 알 것 같다. 이런 그가 믿었던 것은 자신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에드가 윌리스는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여러 직업을 거쳐 가며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다. 그러한 거리의 삶이란 당시를 생각해보면 범죄에 많이 노출된 삶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윌리스는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숨길 수 없는 사회가 가진 냉엄한 진실을 보았던 것 같다. 주로 사기꾼들을 통해서 말이다. 시먼스에 따르면 윌리스는 사기꾼들의 습성과 언어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었고 그 지식을 작품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 나온 재치있는 트릭들도 그런 식의 활용이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악인을 통해 사회의 참된 진실을 보고 그런 그들의 행위가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가진 자들 쪽으로 너무 기울어진 사회의 균형을 바로 잡는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사회가 만든 정상성의 범주를 이탈한 타자를 통해 기존 사회의 전복을 꾀하는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네 명의 의인'도 그렇지만 이 책의 띠지에서 윌리스의 대표작으로 소개하고 있는 '킹콩'(이것은 책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1931년,  RKO 영화사가 당시 고릴라가 나오는 영화를 계획했을 때, 그것을 위해 썼던 110 페이지 분량의 초안이다. 월리스는 이것을 5주에 걸쳐 썼다고 한다.)도 문명 저 바깥의, 오로지 야만의 땅에서 온 타자가 아니던가. 그 타자가 자신을 이용만 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기존 사회를 거의 전복시킬 정도로 뒤흔드는 것이다. 이건 그대로 혁명의 은유로 보아도 무방하다. 언제까지 타자를 배척하거나 이용만해서는 사회 역시 지속될 수 없다는 외침의 표현이다. '네 명의 의인' 역시 정확히 그 연장선 상에 있다.


1933년 '킹콩' 영화 포스터. 원안이 에드거 윌리스에서 나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소설 후기에는 나오지 않는데, 시먼스는 이 책과 관련하여 재미난 사실 하나를 알려주고 있다. 원래 이 책은 출판사에 팔리지 않아서 에드거 윌리스가 자비로 출판했다고 한다. 그는 책이 좀 많이 팔릴 수 있도록 꾀를 냈는데, 그건 마지막에 필립 레이먼 경이 사방이 가로막힌 밀실에서 살해 당하는데 과연 '네 명의 의인'이 어떤 방법으로 살해했는지 그 방법을 책에서는 밝히지 않고 누군가 정답을 맞추면 상금으로 500 파운드를 주겠다고 신문에 광고를 실은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참혹했다고 한다. 아무도 못 맞힐 것이라 여겨서 500 파운드나 되는 상금을 걸었는데, 정답이 너무 많이 접수되었던 것이다. 이런!


 줄리언 시먼스는 에드거 윌리스의 최고작으로 1922년에 발표된 '크림슨 서클'을 꼽고 있다. '놀라운 심리 탐정' 데릭 예일이 스코틀랜드 야드와 맞붙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는 이 소설을 자신의 베스트 100으로 꼽기도 했다. 그 당시에 미드 '멘탈리스트'와 같은 심리 분석 탐정이라니, 놀랍다. 이 작품도 만나볼 수 있게되면 좋겠다.


1933년에 나온 영국판 초판 페이퍼백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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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더 포스 1~2 세트 - 전2권
돈 윈슬로 지음, 박산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뉴욕 시민들이 절대 감옥에 가지 않을 사람으로 시장, 미국 대통령, 교황에 이어 마지막으로 꼽을 만한 사람이 바로 뉴욕 형사 데니스 존 멀론이다.

 영웅 경찰.

 영웅 경찰의 아들.

 뉴욕시 경찰청 최고 엘리트팀 소속 베테랑 경사.

 맨해튼 북부 특별수사대.

 무엇보다 숨겨진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사나이이자 그 중 절반을 직접 처리한 장본인. (p. 9)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데니 멀론은 맨해튼 북부의 왕이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특별 수사대 '더 포스'의 리더이니까 말이다. 그는 상부의 명령 없이 자의적으로 수사와 작전을 벌일 수 있었고 체포와 신문 과정에서 불법을 자행에도 간단히 넘길 수 있었다. 마피아도 그를 쉽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과 온갖 거래를 하거나 심부름을 하며 뒷돈을 챙기고 있었지만 대니 멀론을 비롯한 '더 포스'의 형사들은 그다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커다란 정의를 실현하려면 그런 작은 악행들은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합법적 절차를 준수하며 윤리적으로 형사 일을 해도 뉴욕의 범죄를 근절시킬 수 있다는 이상주의를 경멸했고 그런 면에서 철저한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그런 그들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데니 멀론은 하나의 사소한 성급한 판단으로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멀론은 그동안 선과 악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위기를 잘 헤쳐나왔다. 그러나 이번에 닥쳐온 덫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살면서 성취한 모든 것,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은 물론 형제나 다름없는 동료들 그리고 자신은 좋은 경찰이라는 자부심. 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과연 다시 한 번 더 데니 멀론에게 운이 따라줄까? 멀론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분명 스타워즈의 대사를 패러디한, '다 포스'의 은총이 그와 함께 하게 될까?


 '개의 힘'으로 이제 우리에게도 제법 이름을 알린 작가, 돈 윈슬로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다. 2017년에 출간되어 그 해,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최고의 소설에도 뽑힌 '더 포스'가 바로 그것이다. 뉴욕타임즈만 올해의 책으로 뽑은 건 아니다.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도, 반스 앤 노블스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와 데일리 메일도 올해의 책으로 뽑았다. 비록 언론의 감식안이라는 게 그리 믿을 게 못된다고 해도 이 정도로 많은 이들이 올해의 책으로 꼽는다면야 작품이 확실히 좋긴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도 있지만 이 소설만큼은 그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읽어봤더니 나 또한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을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돈 윈슬로의 '더 포스'는 진정 뛰어난 작품이다. 400여 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두 권이지만 그런 길이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을만큼 페이지터너인데다 인종 갈등을 비롯한 온갖 구조적 모순으로 점철된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에 서린 압도적인 깊이하며 생생하게 묘사된 등장인물의 삶이 가져다 주는 묵직한 정서적인 울림 또한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은 이 소설을 읽고 마리오 푸조의 '대부'가 생각난다고 했는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킹이 또 과장한 것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정말 나도 대부가 떠오를만큼 그만한 울림이 있었다. 저번에 '개의 힘'을 읽었을 때 이미 그의 역량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이번 '더 포스'는 그보다 더 성숙한 느낌이다. '더 포스' 이전에 나온, '개의 힘' 속편인 '더 카르텔(2015)'도 정말 뛰어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는 점점 성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순간 나의 바람은 '더 카르텔'을 빨리 만나고 싶을 뿐이다.


 커다란 정의 실현을 위해 사소한 비리와 불법을 거침없이 행하는 형사나 경찰 조직에 대해선 익히 보아왔다. 대표적으로는 미국 드라마인 '더 와이어'가 있을 것이다. 이는 모든 합법과 윤리를 지켜서는 범죄를 제대로 근절할 수 없는 현실의 반영이다. 하지만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내겐 그 모든 게 드라마적 과장으로 보였다. 설마 가장 견제 시스템이 잘 되어있다고 자부하거나 평가받는 미국의 경찰 조직이, 지금이 엘 카포네가 설쳐대는 대공황 시대도 아니고 저토록 비리에 물들어 있을리 있겠어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더 포스'를 읽어보니 그건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뉴욕 경찰 역시 뿌리 깊이 어둠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더 포스'는 그걸 아주 적나라하고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인 '형사 서피고'(소설에서 데니 멀론은 비리에 물든 경찰 조직을 홀로 고발했던 서피코(프랭크 서피코)를 배신자라고 욕하지만.)에 영향 받아 무려 5년 동안 수십명의 경찰들을 인터뷰 하면서 이 소설을 준비했다고 하던데, 소설에서 갓 잡은 송어처럼 펄떡 펄떡 뛰고 있는 리얼리티를 보면 빈말은 전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뉴욕 경찰을 비롯한 미국 사회가 개인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썪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멀론에겐 동생이 있었다. 그는 소방관으로 2001년 9.11 사태가 벌어졌을 때 진화 작업을 하다 숨졌다. 멀론에겐 동생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 때문에 그는 곁에 있는 가족과 동료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그러한 무리의 형성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기 마련이다. 무리에 절대 끼어들 수 없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생기니까 말이다.


 '9.11' 이후, 미국은 대체로 그런 길을 걸어왔다. 테러를 빌미로 나와 피아를 구별지었고 피아에겐 차별로 대했다. 그렇게 9.11 이후 더욱 거세어진 미국 보수주의의 흐름을 '더 포스'는 여전히 짙게 남아 있는 인종 갈등을 가져와 매섭게 비판하고 있다. 


 당신이 겪은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동료 경찰들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이해해. 당신네 경찰들은 모두 프레디 그레이나 마이클 베넷(둘 다 경찰의 발포로 죽은 흑인 소년, 청년들) 죽였다고 비난받는 것이 괴롭고 억울하겠지. 하지만 자신이 프레디 그레이이거나 마이클 베넷이라서 비난을 받는 건 어떤 느낌인지 당신은 절대 몰라. 당신은 당신 직업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증오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나라서 사람들이 나를 중오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당신은 그 파란 경찰 재킷을 벗을 수 있지만, 난 이 피부 속에서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이렇게 살고 있어.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신이 백인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나라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의... 무게야... 그 어마어마하게 진이 빠지는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눈을 피곤하게 해서 가끔은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고 아파.(p. 239)


 이것은 멀론의 연인이자 흑인인 클로데트가 하는 말로 이 소설에서 내가 꼽고 싶은 최고의 문장이기도 하다. 어떤 정체성의 강조는 그 정체성이 될 수 없는 자의 아픔과 희생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인종 갈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은 9. 11 이후 자기만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9.11 이후 미국은 '애국자법'을 제정하고 국토안보부를 창설하였다. 애국자법은 모든 분야에 대해 사법집행기관의 감시를 강화하는 것으로 개인의 사생활과 통신의 자유를 비롯한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감시에 있어 국토안보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이쯤 되면 왜 돈 윈슬로가 멀론의 동생을 9.11에서 죽게 하고 그 트라우마에 의해 '더 포스'를 창설하는 식으로 설정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과정이 그대로 미국이 국토안보부를 창설하는 과정과 닮아 있기에 그런 것이다. 즉, '더 포스'는 '국토안보부'의 문학적인 비유다. 국토안보부는 실제 인권 침해를 하면서도 테러 방지라는 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걸 용인했다.(오바마 역시 이와 비슷한 이유로 '애국자법을 연장하는데 서명했다.) 이건 멀론의 '더 포스'가 마피아들과 더러운 뒷거래를 정당화할 때 하는 것 그대로이다. 소설 '더 포스'는 그렇게 걸어온 미국이 어떤 결과를 낳았나 보여준다. 그것이 어떤 오늘의 현실을 빚어놓았는지를 말이다. 그들은 보다 더 단단한 내부의 결속을 위하여 외부를 도려내고 버렸지만 그렇다고 내부의 연대가 단단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부의 고인 물이 썪어간데다 내부와 외부의 대립과 갈등은 더 들끓어 아주 작은 것도 방아쇠가 되어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약하고 아슬아슬한 상태가 바로 미국이었던 것이다. 소설 후반은 그걸 극명하게 재현하고 있다


 물론 '더 포스'엔 이러한 사회 비판적인 주제만 있지 않다. 이 소설은 장대한 인간 드라마이기도 하다. 선과 악, 개인과 제도 사이에서 회오리 바람 속의 연처럼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아이러니한 삶의 순간들, 가난과 고난 그리고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용기라든가,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사소한 악행을 거듭하다 되돌아 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치닫는 인생들하며... 그런 드라마가 유유히 펄쳐진다. 사회적인 주제에 맞춰 읽든, 인간드라마에 맞춰 읽든, 그 어느 쪽으로 읽어도 '더 포스'는 포만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물론 그냥 재밌는 스릴러로 읽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경험하고 최근 양승태의 사법 농단과 국민 여론을 깡그리 무시하고 영장 기각을 남발하면서 사법 농단 세력을 비호하기에 여념이 없는 사법부를 비롯하여 날이 갈수록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들에게 혐오와 적개가 깊어지는 걸 보고 있는 우리들에겐 이 소설이 특히 더 피부에 와 닿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감히 올해 내가 읽은 소설 중 최고의 한 편으로 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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