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릴때 잡지 같은 거 보면

기사 사이 사이에 쉬어가는 페이지 같은 것이 있잖아요?

저는 특히나 작은 미스테리 퀴즈 같은 것이 나와있는 짤막한 쉬어가는 페이지를 좋아했는데요.

그 때의 추억이 괜시리 떠올라 한 번 기획기사로 만들어 봤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매그레 캣은 사실은 첫번째 라트비아인이 나왔을 때

거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서 그걸 한번 '매그레 캣의 깨알같은 재미를 주는 유모어 극장'이라는 제목으로 만화로 한 번 만들어볼까 하고 생각했을 때 등장시키려 만들었던 캐릭터였는데요...

갈레씨 까지는 보였는데 생폴리앵에 지다 부터는 그런 에피소드가 잘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는 바람에 그만 영영 출연기회를 얻지 못했었죠. 그러다가 즉흥적인 이번 기사로 잠깐 출연 기회를 얻게 되었네요^ ^.

 

그렇게 매그레 캣이 등장하는 일종의 '미스테리 풀기'입니다.

월간 매그레에서 그렇게 쉬어가는 페이지로 실리면 좋겠다 여기고 있습니다.

과연 실릴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실리게 된다면 보다 많은 분들이

월간 매그레를 보아주셨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정답은 거기서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정답을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발 댓글로 달아주시지말길 바랍니다^ ^

 

사건의 에피소드 자체는 사계절에서 나온 마틴 가드너의 '아하!'에서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마틴 가드너는 이 에피소드를 조지 가모프와 마틴 스턴이 편찬한 '수학의 퍼즐'에서 가져왔다고 하는군요.

 

매그레는 그야말로 직관력의 대가!

정말 직감 하나로 범죄의 냄새를 맡고 단서를 찾아내고 해결까지 하게되는 경우가 많죠.

그럼 당신의 직감은 어떻습니까?

자아, 어디 한 번 매그레의 직감에 도전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 ^

 

 

 

  

                               당신도 도전해 보세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게 된 네 사람 . . .

 

 

 

 

 그런데 . . . 

 

 

 

  

 

 

 

  

 

 

 그리고 불이 들어오고 . . .
 

 사람들은 각 자 이렇게 생각했다 . . .

 

 

 

 

 

 

 

 

 

 

 하지만 매그레만은 특유의 직감으로 

사건의 진상을 단번에  알아 차렸는데 . . .

 

 과연, 당신도 어떻게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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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7-3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헤르메스님 여기서도 뵙는군요 반가와요.
앞으로 리뷰 많이 쓰려고 해요.
지금 다니는 곳 곧 때려칠 꺼거든요 ㅋㅋ 이럴 때일수록 글이 잘 써진단 말이죵 ㅠㅠ ㅋㅋ

여기서 자주 뵈요 //

ICE-9 2011-08-01 23:25   좋아요 0 | URL
앗! 삽하나님^ ^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갑네요.
원래 시험치기 전날이 가장 딴짓 많이 하고 싶어지는 법이쟎아요^ ^
어떤 이유로든 마무리와 새로이 맞이하게 되는 일들 모두가 잘 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삽하나님의 리뷰 보러 마구 들르겠습니다.^ ^
 
별이 가득한 심장
알렉스 로비라 셀마.프란세스 미라예스 지음, 고인경 옮김 / 비채 / 2011년 6월
품절


갑자기 심장에 문제가 생겨 깨어나지 못하는
사랑하는 한 소녀를 살리기 위해
열 개의 사랑으로 빛나는 별을 모아
그렇게 별로 가득한 심장을 만들어
선사하려는 한 소년의 이야기...




때로는 그냥 하릴없이 가벼운게 좋다.
아무 생각없이 뒤적여도 상관없을 것 같은 책이
어떤 땐 더 반갑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콕콕 가슴으로 날아와 박혀주는 문장들이 있으면
더 고맙다.
가지마다 작은 둥지들이 가득차
지저귀는 새소리로 풍성한 나무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느끼게 해준다면 더욱 환영이다

그림만 보아도 절로 이해되면 더 좋다.
눈요기만으로도 눈이 배부르다면 더 고맙다
활자의 중력에서 벗어나서 아무렇게나 시선을
유영시켜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지구처럼
그 뜻을 느낄 수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가벼워서 어디든 들고다니면서
내키는대로 읽을 수 있으면 더욱 좋고
그렇게 얻어 낸 한줄 글로써 때로 사람들에게
감탄마저 덤으로 얻게되면 더욱 더 좋다.

문득 시원한 바람불고
잎들이 저마다 부끄럽게 속얘기를 하는 것 처럼
속살거릴때 평상에 누워 잎들 사이 조각난 파란
하늘을 보며 읽기에 적합한 책을 찾는다면...

깜빡잊고 끄지못한 모기향 처럼
왠지 헤어진 누군가의 채취가 주위에서
진하게 느껴지는데 마음을 무겁게 하기는 싫고 그저
살짝 손끝이나 발끝만 젖고 싶다면...

한번쯤 벗해보면 좋은 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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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의 밤 매그레 시리즈 6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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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권이나 되는 매그레 시리즈를 차례로 보았더니 저절로 문리라도 트인 것일까? 

  문득 뭔가 규칙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뭐, 말하고 보면 사실 별거 아닌데 그러니까 다음의 작품은 바로 이전 작품의 일종의 변주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얼 스탠리 가드너의 페리 메이슨 시리즈와도 비슷하다. 물론 페리 메이슨 시리즈 역시도 변주란 뜻은 아니고 그 시리즈는 언제나 한 작품의 결말에 다음 작품의 시작을 삽입하는데 그렇게 두 작품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농의 매그레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연속적인 두 작품은 그냥 연속으로 그치지 않고 변주를 하면서 서로를 보완한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이를테면 매그레의 연속된 두 작품은 에셔의 이 그림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이루어졌던 범죄는 다시 바로 그 뒤의 작품 '갈레씨 홀로 죽다'에서 주요한 테마로 등장하고(스포일러상 이렇게만 언급한다.) 세번째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피해자로 다루어졌던 삶은 그 다음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는 가해자의 삶으로 다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다섯번째 작품 '누런 개'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의 형태는 다음 작품 '교차로의 밤'에서는 더이상 믿지 못할 무언가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이렇게 심농의 매그레는 연속된 두 작품의 변주를 보여주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마치 사건의 양 면을 모두 아울러 고찰해 보려는 태도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시 심농이 나름 훗설이라도 읽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심농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 훗설이 말했던 현상학적 환원 태도와도 닮아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정해진 신체가 있는 이상 인간은 언제나 대상의 한 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궁극적 한계다. 그 사물의 뒤쪽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신체에 갇혀있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구에서 영원히 달의 뒤쪽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한계지어진 객관 세계를 마치 진정한 객관 세계로 알고 살아간다. 사실은 신체적 제약으로 단편 밖에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전부 아는 것 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훗설은 그러한 착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그 착각을 버리기 위해서 요구되어지는 것이 지금까지 인식한 모든 것의 백지화(에포크). 즉 현상학적 환원이다. 이는 바로 내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여기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뒤로 가서도 보아야 한다는,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앎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앎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란 늘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 바로 현상학적 환원의 태도이다. 심농의 매그레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음의 변주에서 이전에 해왔던 것은 전혀 고려에 넣지 않으면서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아무튼 당신이 '누런 개'를 읽고 바로 이 작품 '교차로의 밤'을 읽는다면 이러한 심농의 면모가 더욱 더 잘 드러나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교차로'라는 제목 자체에서 드러나지만 내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물이 보이는 그대로만은 아님'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 소설에 나타난 버나드 쇼의 '피그마리온'과 완전히 반전된 형태는 이러한 심농의 현상학적 환원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이 소설에 유독 전면으로 나오고 있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심농이다. 

  이 소설은 사건이 복잡하고 용의자도 많은데다 사건 전개가 쉴 사이 없고 유달리 액션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사실 '누런개'도 비슷하니 시즌2의 전형적 특성이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저번과 같은 차분한 전개 속에 드리워졌던 감상적 필치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묘사에 정확히 사건의 핵심만 짚어 풀어내는 저널리스트적 묘사가 한껏 드러나있다. 아마도 매그레 시리즈 중에서 지금까지 이만큼 심농의 저널리스트로적 면모가 드러났던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교차로의 밤'은 이전 작 '누런 개'와 비교하자면 보다 공간적으로 확장되고 묘사되는 계층은 더욱 더 다양해졌다고 할 수 있다

  '누런 개'가 이른바 프랑스의 엘리트 집단을 다루고 있다면 여기서는 전 프랑스의 계급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심농은 1930년대 초반의 점증하는 계급적 갈등 앞에 서 있는 당시 프랑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을 다 읽고 분위기를 짐작해보면 소설 속 상황이 마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당시의 프랑스와 어쩐지 비슷하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그만큼 심농 역시도 당시 프랑스 사회를 덮쳐오던 어떤 파국의 전조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던 피그마리온의 반전된 형태는 그가 단정적으로 "계몽주의는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더욱 그렇다. 

  "자아, 이제 서로가 꿈꾸고 있던 화해의 환상은 모조리 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어떡할 것인가? 폐허의 잔재를 보면서 씁쓸히 연민을 곱씹을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하면서 깨어진 환상에 마냥 억지로 매달릴 것인가?" 마치 심농은 '교차로의 밤'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듯 한데, 정작 심농 자신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선택해 보여주지 않는다. 매그레는 여전히 교차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사방으로 열려진 그 어느 길이든 그는 갈수가 있지만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난처함이 마치 그 발을 대지에다 그대로 못박아 버린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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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요 네스뵈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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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부터 정말 읽고 싶었던 작가였다. 

                          요 네스뵈

 노르웨이의 작가 요 네스뵈. 최근 밀레니엄의 스티그 라르손 때문에 더욱 각광을 받게 된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영미 비평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꼭 선정되는 작가이자 벌써 부터 워싱턴 포스트나 월 스트리트 저널등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기사나 인터뷰가 종종 실리는 등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비평가들 사이에선 스티그 라르손이 죽고 없는 지금 그 인기를 대신 차지할 가장 유력한 작가로 꼽히는 작가이건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정식으로 그의 소설이 소개된 적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드디어 살림에서 그의 소설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해리 홀레' 시리즈가 아니라서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나온 스탠드 얼론 '헤드헌터'도 왜 영미 소설계에서 네스뵈가 그토록 각광을 받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는데 말이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링컨차를 탄 변호사와 해리 보슈 시리즈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질 대로 알려진 마이클 코넬리는 THE REDEEMER를 읽고나서 정말 충격이었고 이제 네스뵈는 새로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며 해리 홀은 자신의 새로운 영웅이다라고 말했고 THE REDEEMER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자신의 심장 박동을 위험한 수준까지 고동치게 만들었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 코넬리가 이렇게 까지 극찬하는 작품이라니 정말 읽고 싶어 마구 애가 탈 정도다. 

   네스뵈는 스티그 라르손과 더불어 이른바 노르딕 느와르의 진화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노르딕 느와르의 좋았던 점들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특유의 느린 진행을 과감히 개선하고 영미 스릴러 만큼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한없이 처지고 우울하기만 하던 분위기를 적당히 가감하여 유머스러운 분위기도 연출한다는 점에서 또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르딕 느와르 특유의 첨예한 비판 의식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리한 냉소적 시선마저 더해졌으니 더욱 더 그렇다. 

  어쩐지 오랜 기다림 끝에 읽은 소설이고 거기다 이제 막 소개되는 작가라 어쩔 수 없이 칭찬만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또 그대로 허언만은 아님을 소설을 직접 읽어본다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네스뵈는 언젠가 자신의 고국 노르웨이가 속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국가들을 두고 '조용한 사회'라 부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건 일종의 냉소가 섞인 반어법적 표현이었다. 즉, 겉으로는 조용하고 평온한 사회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냥 기만이고 치장에 불과할 뿐 내부적으로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이 들끓는 곳임을 에둘러 말하기 위한. 베르코르의 소설 제목 처럼 일종의 '바다의 침묵'이라고나 할까?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물결이 움직이고 요동마저 치고 있지만 늘 잔잔히 너울거리는 수면만을 보여주는 그 바다처럼 네스뵈는 자신의 나라들이 사실은 그렇게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이중성, 그 '조용한 사회'의 이면에 가리워진 본성을 파헤치는데 주력한다. 사회가 쓴 기만의 가면을 벗기고 사실은 약자의 희생으로 지탱되는 야수와도 같은 그 사회의 맨얼굴을 보여주려는 작가이다. 네스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KILLER INSIDE ME)를 꼽았는데 그 작품 역시도 평범한 남자의 가면을 쓴 사이코패스의 연쇄살인마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이중성의 테마가 그에게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그는 두 작가를 언급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나브코프 이다.)

  그 드러냄의 대표작이 바로 해리 홀 시리즈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소설 '헤드헌터'도 사실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이중성은 여기서도 여전히 테마이다. 그것은 주인공 자체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제목인 헤드헌터는 바로 주인공의 직업이기도 하다. 그는 그 업계에서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유망주다. 하지만 168CM라는 작은 키의 그는(주인공이 이렇게 키가 작은 것은 네스뵈가 그 자신 해리 홀과는 완전 반대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새로운 작품을 쓰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해리 홀은 193CM의 거구다.) 아마도 그 키로 어떤 컴플렉스라도 가지고 있었던지, 그 작은 키가 주는 약점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아주 매력적인 여성과 결혼을 했고 그 여성이 원하는 최상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늘 아낌없이 돈을 쓰는 바람에 만성 재정 적자에 허덕인다. 그래서 그는 부업을 하나 갖는데 그것은 헤드헌터 대상자를 인터뷰할 때 얻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이 가진 미술품을 훔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 밤에는 도둑으로 활동하며 늘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에 체화된 이중성의 모습은 사실 자본주의에게 보내는 네스뵈의 냉소라 할 수 있다.  좋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고래로 부터 사회가 보다 더 질적으로 잘 살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었고 그래서 인성을 중시했으나 자본주의에 들어와서는 단순히 돈만 잘 벌면 인성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능적인 머리'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철저하게 분업화된 자본주의는 그에 맞게 인재를 뽑는데 있어서도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분업화된 영역에 잘 맞는 사람인가만을 따지는 것이다. 즉 사람에다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다 사람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본주의도 네스뵈가 보기에 그리 공정하게 운용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주인공 자신이 정작 생계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 일종의 약탈인 범죄이듯 그렇게 자본주의 역시도 사실은 누군가로 부터 약탈해야만 그렇게 범죄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있는게 아니냐고 냉소를 보내는 것이다. 뭐, 어쩌면 보다 단순한 이유일수도 있다. 해리 홀이 형사이기 때문에 그 반대인 범죄자로 주인공을 설정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반문은 그가 결정적으로 모든 난관에서 헤어나게 해 줄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 범죄에서 훔치게 되는 미술작품이 바로 루벤스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이라는 점에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루벤스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은 그야말로 이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집약해놓은 것과 같은 작품인데 가급적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네스뵈가 이 작품에 넌지시 찔러넣은 숨은 저의를 말하자면 칼리돈을 거의 폐허로 만들었던 그 멧돼지가 사실은 누군가가 보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멧돼지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르테미스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견된 일종의 징벌의 천사라는 점이다. 소설을 읽고나면 이 그림이 얼마나 탁월하게 소설의 내용을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는가 놀라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멧돼지에게 상처를 입히는 유일한 여성 영웅 아틀란타의 존재 또한 너무도 절묘하다.) 아무튼 이 그림은 단순히 인물의 형상화를 너머 소설에 나오는 바대로 아르테미스는 미국으로 그녀가 보낸 멧돼지는 바로 미국이 퍼뜨리고 있고 노르웨이가 따라가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걸 암시하게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가장 전위적 위치라 할 수 있는 헤드헌터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아주 부유하게 됨으로써 자신을 그 모든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구원이 신자유주의 자체의 상징인 멧돼지에게서 온다는 점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결국 멧돼지가 가져온 것은 칼리돈의 파멸이었다. 즉 이 그림 때문에 단순히 해리 홀의 반대되는 인물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약탈을 그 자체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정확히는 신자유주의)를 고발하기 위해서였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최근에 '헤드헌터'는 노르웨이에서 영화화되었다

  깜짝놀랄 반전도 있고 한번 잡게 되면 그냥 내처 끝까지 읽게되는 진짜 '페이지터너'이지만 이렇게 깊이를 우려내는 솜씨 또한 만만치 않은 작가가 바로 네스뵈다. 이런 저력이 있는 작가이기에 영미 소설계에서 그토록 주목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이 소설은 말로만 듣던 그의 명성이 그저 허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지리한 장마비로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면 아니면 지금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노르딕 느와르의 그 진화된 현재형이 궁금하다면 꼭 접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읽으셔서 제발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가 마구 나왔으면 좋겠다. 마이클 코넬리가 저토록 침을 튀기며 칭찬하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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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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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이 소설은 '손'에 관한 얘기일까 아니면 '이빨'에 관한 얘기일까? 

 소설은 처음 '이빨'에서 시작한다. 한 남자가 가지고 있는 이빨. 그것은 삶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살기 위해 와구와구 씹어댔을 이빨. 그 이빨이 남자에게 묻는다. '미칠 수 있겠니?' 소설의 제목은 바로 이러한 이빨의 물음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여기 앞에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는 이내 알 수 있다. 바로 '삶에'라는 것을... 

 다음, 여자의 얘기가 나온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런데 둘의 이름이 똑같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언제나 맞잡은 손이다. 그녀의 사랑은 손으로 시작했고 손으로 지속되었고 결국 그 손을 놓음으로써 헤어졌다. 그 손이 묻는다. '미칠 수 있겠니?' 여기서 생략된 말은 이빨과 다르다. 묻는 것은 타인의 손에 이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니까...

  남자는 이빨을 여자는 손을... 

  이빨은 삶에 대한 집착을 손은 관계의 집착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둘은 다르고 사실은 반대다. 남자는 인도네시아(최근에 쓰나미가 일어났던 곳이라서 그저 추정한 것일뿐. 확실한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하긴 어디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대한민국만 아니면 되니까.)인이다. 그는 택시기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최근에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여자와 강제로 헤어졌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여자는 한국인. 칠년 전 필리핀에 와 있던 남자친구의 배신으로 한 여자를 죽이게 되었다. 칠년만의 귀환은 그 속죄를 위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은 그 죽음으로 인해 더욱 더 속박되어버린 전 남자친구와 완전히 결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주인공 남자에겐 친구가 있다. '만'이라고. 유일한 친구다. 그는 막대한 유산을 노리고 늙은 외국인 여자의 아들 노릇을 한다. 지극히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친구. 이빨과 같은 존재다. 남자는 사랑의 상실로 늘 자살을 꿈꾸지만 그의 주위엔 이렇게 삶의 집착으로 가득하다. 여자는 그 죽음으로 인해 칠년 동안이나 전 남자친구에게 집착했지만 그녀의 주위엔 온갖 버려짐으로 가득하다. 그녀가 일하는 도서관 원장의 별명조차 '쓰레기통'이다. 

 살고 싶진 않지만 살아야하는 남자와 가지고 싶지만 버려야하는 여자. 인도네시아와 한국이라는 그 거리적 격차만큼이나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남자와 여자 사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라인이 존재한다. 바로 그 '월리스 라인'을 추적하는 것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삶의 집착과 그 포기 사이를... 

  그렇게 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빨에 관한 얘기이자 손에 관한 얘기이다. 남자와 여자 둘의 이야기이다. 둘은 완전히 대등한 존재들이고 그렇게 서로 어떻게 변해가는가가 이 소설의 관건이다. 마치 저마다 주어진 화두를 풀어나가고 있는 듯한 소설이랄까... 그렇게 파편화된 소설. 독자가 마치 고고학자처럼 이야기의 도편들을 끼어맞추어야 하는 소설이다. 여자가 왜 먼저 남자를 유혹하여 정사를 나누게 되는지. 그리고 그 정사를 나누자마자 왜 거대한 쓰나미가 덮치는지, 어쩌다 남자도 그 여자를 애틋하게 여기게 되는지... 소설에는 그 결정적 얘기들 모두에 침묵한다. 감정의 발로는 왠지 즉흥적으로 보이고 재난 조차도 여기선 우연적이다. 그리고 모든 게 아련하개 느껴진다. 재난의 급박한 상황에서 조차 어쩐지 꿈을 꾸는 듯 조금도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에두르듯 흘러가는 미려한 문장들이 물기를 마구 자아내어 시야를 흐리게 만들고 있는 탓이리라. 마치 빗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유리창을 통해 바깥은 내다보는 것 처럼... 

  파편화와 흐릿함... 좋다 싫다를 말하기 전에 참으로 리뷰 쓰기 어렵게 만드는 특징들이 아닐까 싶다. 오래도록 이 소설을 입안에 넣고 굴려봤는데 도대체 언제 내어놓아야될지 알수가 없었다. 재난에 중점을 둬서 최근 한국 소설과는 다르게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소설이다라고 말 할 수도 있었다. 삶의 집착과 집착의 버림은 사실 다른게 아니라 하나다 라고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남는 찜찜함. 뭔가 뚫리지 않는 답답함. 그래서 여전히 지금도 오도독거리고 있다. 

  이 소설은 그렇다. 마치 제비뽑기를 위해 내밀어진 여러 개의 줄로 가득한 다발과도 같다. 나는 그 중 하나를 뽑았고 거기에 대해 조금 지껄였을 뿐, 어쩐지 아직도 거기엔 남아있는 다발만큼의 많은 이야기들이 가능할 것 같다. 누구도 바닥을 흘러가는 물길의 경로거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 없듯이 이 소설 역시도 문장과 문장의 틈 사이로 어떻게 해석의 물줄기가 길을 내어 이어갈지 정의내리기 어렵다. 이 리뷰는 그런 나의 난처함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혹시 당신이라면 이 보이지 않는 의미의 '월리스 라인'을 제대로 짚어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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