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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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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부터 꽤 좋다는 입소문을 많이 들었던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시리즈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그 첫 권인 '다섯 번째 계절'이 마침내 우리나라에도 출간된 것이다. 



 SF 판타지에 속한다고 봐야 할 이 소설은 아마도 지구의 아주 먼 미래가 아닐까 생각되는 '고요' 대지를 배경으로 세 여성의 삶을 담는다. 이 '고요' 대지는 원래는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었던 대륙들이 지각 변동 때문에 어느덧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변동의 여파는 아직도 남아 현재 고요 대지는 늘 불안정한 지각 상태로 거주민들에게 불안을 계속 안겨주고 있는 참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보다 땅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로 인해 그들이 쓰는 많은 언어들이 땅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땅의 움직임을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조산술'이라는 아주 특별한 기술이 존재한다. 물론 이 기술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로진'이라는 불리는, 그런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이들만 '조산술'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산술을 이롭게 다루려면 높은 수준의 정신 통제력을 필요로 하기에 그런 자제력이 많이 없다고 생각되는 어린 오로진들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고요' 대지의 각 마을(소설에선 '향'이라 불린다.)에선 오로진 아이가 발견되면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없애거나 추방한다. 부모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서 자신의 자식이 오로진인 걸 알게 되면 아이를 매매하는 자에게 넘기기 일쑤다. '고요'대지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국의 수도 '유메네스'엔 이런 아이들을 모아 조산술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펄크럼 오로진'으로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존재한다. 그런 일(어린 오르진들을 유메네스로 데려가는 일)을 도맡아 하는 자들은 '수호자'로 불린다.



 이러한 설정을 깔고 있는 '다섯 번째 계절'은 종말의 태동으로 시작한다.

 한 남자와 스톤 이터('천사' 같은 존재로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 수호 천사 같은 이미지니까.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 밑에서 솟아나는데, 역시 모든 게 대지가 중심인 '고요' 대지에 어울리는 설정이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돌을 먹으며 땅속을 공기 속처럼 마음대로 활보한다. 그리고 소설 처음에 등장한 스톤 이터가 그러하듯이 대지를 커다랗게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남자의 정체는 마지막에 가서 밝혀진다.)가 유메네스를 붕괴시킨 것이다. 그 뒤, 우리는 에쑨, 다마야, 시엔이란 이름의 세 여성의 삶을 번갈아 보게 된다. 에쑨은 어머니로 최근 자기 아들이 오로진이라는 게 밝혀져 그 사실을 안 그녀의 남편 지자가 아이를 죽인 비극을 겪었다. '오로진'이라면 무조건 적대와 배척만 일삼는 마을 사람들에게 거센 증오를 느끼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 죽음에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건 바로 자신이 오로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고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남편 지자가 이번엔 자신의 딸 나쑨을 데리고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린 것이다. 에쑨은 딸을 구하기 위해 지자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러다 또 하나의 스톤 이터인,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호야'를 만난다. 뒤이어 등장하는 다마야 또한 집을 떠나게 된다. 오로진이라는 게 밝혀져 마을에 더이상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동매매자가 자기를 데려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자신을 찾아온 것은 유메네스로 데려가려는 '수호자', 샤파였다. 다마야는 유메네스로 가서 펄크럼 오로진이 되는 교육을 받는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건 시엔이다. 그녀는 펄크럼 오로지이지만 아직 반지가 없는 하급자다.(펄크럼 오로진은 반지의 개수로 상급자와 하급자로 나뉜다.) 그녀는 열 개의 반지를 지닌 상급자 오로진 남자를 찾아간다. 최근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아직 능숙하게 조산술을 쓸 수 없는 그녀에게 한 남자 감독관을 붙여준 탓이다. 그녀는 그 남자 오리진, '알라베스터와 함께 유메네스를 떠난다.




 이것으로 이제 이 세 여성의 공통점이 드러난 것 같다. 

 모두가 오로진이라는 것 그리고 다들 길을 떠난다는 것. 두 말할 것도 없이 오로진은 이종적 존재다. 작가 제미신이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이종성은 그대로 그녀가 가진 흑인의 인종적 정체성이 강하게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오로진이 평생 겪는 배척과 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어느 정도 존중을 받으려면 그들이 부여한 교육을 거쳐야만 하는 것도 그대로 백인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흑인이 겪는 경로와 일치한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여성으로 우리 사회의 흑인 여성이 그러하듯이 인종과 성별에 따른 이중 차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여성이 가지는 열악한 상황은 에쑨이 남편이 아들을 무참히 죽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나 펄크럼 오로진인 시엔이 오로지 번식을 위해 사랑도 없는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고요의 대지는 그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차별과 억압이 들끓는 곳이었던 거다. 그 고요 대지에 군림하는 자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 어떻게 하면 고요의 대지를 이름대로 고요하게 만드는가다. 땅 아래에 존재하는 저항과 변화의 움직임을 억누르는 것. 이건 그대로 그들이 차별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받는 차별에 순종하도록 그들의 입을 막고 자유를 위한 몸짓을 결박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정한 자리에 모두가 가만히 앉아 자신들이 정한 운명을 오롯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설정들이 '다섯 번째 계절'을 그저 흔한 SF 판타지로 보지 않게 한다. 여기엔 인종과 성별에 대한 이중 차별이 횡행하는 지금 사회에 대한 뭉근한 비판이 서려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진 또 하나의 공통점인, '길 위에 존재'라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다들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물론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길을 떠난다는 건 거의 보편적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그 여정의 의미가 '다섯 번째 계절'에서 더욱 두드려져 보이는 건, 설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땅, 대지라는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땅하면 얼른 떠오르는 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고정적인 이미지다. 이렇게 모든 게 제자리에 들러붙은 그 곳에서 세 여성들은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떠남이 더욱 대비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지란 또 어떤 곳인가? 바로 가이아 여신을 뜻하는 곳으로 여성의 영역이자 여성의 상징이었다. 스톤이터란 천사와 비슷한 존재조차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오듯, 하늘이 아니라 땅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에서 이 소설이 흔히 말하는 여성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굳이 여성주의에 국한해 이 소설을 볼 필요는 없다. 사실 그것을 넘어 차별을 받는, 모든 존재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원래 그런 여성의 영토였던 것이 지금은 남성들에게 지배되어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고요의 대지를 그리 불안에 떨게 만드는 '흔들'(소설에서 지진을 가리키는 말이다.)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사실 세 여성의 여정 또한 이런 '흔들'을 너무 닮았다. 그 떠남으로 인해 그녀들 모두 새로운 사람과 경험으로써 유메네스가 부여한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확고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작가가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끌어나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 온다. 그런만큼 설정이나 구성 상의 빈틈은 없으며 모든 게 유기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 그래서 나중에 만나는 반전 또한 놀라운 것이다.(사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그 전에 먼저 알아차렸겠지만.) 그런 면에서 나는 주로 이 작품이 가진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걸 제쳐두고서라도 이야기가 여간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무척 재밌는 작품이다. 역시 입소문 대로 오랜만에 아주 기대가 되는 작품을 만난 것 같다. 반전과 함께 또 다른 떡밥 하나가 던져졌는데, 그것 역시 오랫동안 여성의 상징인 존재라 그것과 관련된 뒷 얘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 이어 다시 한 번 휴고상을 수상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오벨리스크 관문'이 어서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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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reau 2019-05-0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 여성. 공통점. 이런 어휘들을 선택하신 까닭은 스포일하지 않으려는 의도이신 것이지요?

헤르메스 2019-05-04 01:00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
캐서린 M. 밸런트 지음, 아나 후안 그림,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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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네뷸라 수상작(네뷸라 상 중에는 'Andre Norton Award'라고 해서 영 어덜트를 대상으로 한 과학 소설과 판타지 소설에 주는 상이 있는데 '페어리랜드'는 바로 그 상을 수상했습니다.)이기도 한 캐서린 M 밸런트의 '페어리랜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 드디어 나왔네요.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라는 부제를 달고 말이죠. 2011년, 클라우드 펀딩의 일환으로 온라인에서 연재되었던 이 소설이 5년이 지나 드디어 완결된 것입니다. 캐서린 M 밸런트는 이 소설을 시작할 때 이미 '페어리랜드'가 다섯 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결국 그 약속을 지키고 말았네요.


 저자 자신이 고백했듯이, 원래 이 소설은 별 기대없이 시작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은 이 셉템버(9월)라는 열 두살 꼬마의 요정 나라 여행기가 오랜 시간 이어졌을 뿐만아니라 다섯 권 모두 멀리 있는 우리나라마저 번역 소개될 정도로 커다란 인기와 좋은 평가를 얻었으니 아무래도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다섯번째 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페어리랜드'와 만났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권만으르도 왜 '페어리랜드'가 그만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지 좀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일단 굉장이 독특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판타지 소설을 읽어보셨더라도 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페어리랜드' 같은 소설은 절대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흔히 판타지 소설은 현실 세계에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일들이 가능한 세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정의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 '페어리랜드'는 진정한 판타지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정말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소금 한 알갱이 보다도 더 안 나오거든요. 당신의 상상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마음껏 변화시켜 보세요.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모조리 그려 보세요. 그런 세계가 바로 '페어리랜드'입니다. 한 마디로 'ALL THAT FANTASY!'인 것이죠. 그래서 저 역시 그랬습니다만, 처음엔 좀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의 문장마저 현실에선 물과 기름처럼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들이 간단히 섞이고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따라 잡는데 애를 좀 먹게 되더군요. 그러나 차츰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페어리랜드'의 스타일에 점차 적응하고 보니 무척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매혹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제 언어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겠군요. 여기엔 뭔가 자유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정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유를 꿈꿉니다만 그것을 실현하긴 어렵죠. 살다 보면 살기 위해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일에 얽매이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 자체가 알고보면 그런 중력의 산물이죠. 거기에 진정한 나는 없습니다. 오직 사회화를 통해 사회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동화될 수 있도록 사회가 형성한 정체성의 '나'가 있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이죠. 라캉이 왜 이렇게 말했나 하면 그는 생각 자체를 언어의 산물로 보았는데 그 언어라는 게 진정한 자아를 사회의 식민지로 만드는 대표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아닌 것이죠.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지게 되는 욕망 역시 이러한 언어의 연장선 상에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욕망하기 보다는 남들이 다들 좋아하는 것을 욕망하게 된다고 라캉은 말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는 많은 돈, 좋은 집, 커다란 차, 어여쁜 이성에 대한 욕망은 사실 우리 스스로 형성한 고유의 욕망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에 잘 순응하도록 사회가 주입한 욕망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사회가 자아를 끌어당기는 힘, 그것을 저는 중력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중력에, 우리가 피로를 느끼면서도 기꺼이 끌려가는 것은 많은 것들이 그 중력을 정당화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면서 흔히 만나게 되는 온갖 학문이 그러하죠.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등. 이처럼 학문으로 촘촘하게 만들어진 그물망까지 가세하고 있으니 우리는 더욱 사회가 가하는 중력을 진리라 여기고 행여나 거기서 달아날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채 진정한 나가 아니라 남과 닮은 나가 되기 위해 오늘도 기를 쓰고 더 잘 돌아가는 사회의 톱니바퀴로 있는 것입니다.


 '페어리랜드'는 바로 그 중력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게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성이 만든 규칙 따위 여기서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며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여도 자연 법칙이 되고 절대 명제가 되며 실정법이 되기 때문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자유 분방하다는 건 아닙니다. 여기의 이야기는 명확한 주제에 따라 일관된 흐름을 엄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주된 줄기는 부제에 나왔든 '경주(race)'입니다. 셉템버는 여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도전하는 많은 존재들과 경주를 해야 하죠. 이 경주조차 제멋대로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는 경로도 없고 내가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알 도리도 없으며 내가 가진 탈것에 기대기도 어렵고 경주를 주관하는 심판이 내키는 대로 경주자의 자리를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이토록 자유분방한 경주에서 셉템버가 승리하는 길을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페어리랜드'의 심장을 찾는 것. 이제는 왜 부제에 '심장'이 있는지 아시겠죠? 심장과 경주. 이것이 바로 이번 책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경주를 하면서 셉템버가 거쳐가는 곳이 의미심장해요. 셉템버는 도서관이나 바다 등을 지나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빼앗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서관을 다스리는 그리니치라는 놋쇠 공은 이런 말을 하죠.


 시간은 모두 못됐어. 가져가기만 하고 돌려주지는 않으니까.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하는 때는 쏜살같이 흐르고 쏜살같이 흘렀으면 싶을 때는 굼뱅이처럼 기어가지. 시간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 뚱하니 흘러가. 수천 번 방향을 꺾어도 되련만. 일단 시간이 가져간 건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어.(p. 165)


 그리고 원래 바다 요정인 세터데이(나중에 셉템버의 연인이 되는 소년이죠.)는 자신의 할머니 바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할머니가 항상 따뜻한 물살이나 상냥한 고래 같은 건 아니야. 나이가 아주 많아서 자기만의 방식이 굳어져 있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집을 관리하지. 바다는 모든 걸 쌓아두기만 하거든. 파도가 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훔쳐 와. 그리고 동전 하나라도 다시 내놓는 법이 없지.(p. 209)


 시간과 바다. 이렇게 둘은 가지기만 하고 내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둘 모두 다른 것을 끌어당기기만 할 뿐,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중력과 닮아있는 것입니다. 셉템버는 그런 곳을 횡단하며 심장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심장이란 존재가 참 특이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일상 속에서 생각하는 그런 심장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장은 태초의 모습을 뜻합니다. 소설 속 거대한 도서관은 원래 작은 오두막이었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거대한 도서관을 꿈꿨기에 그런 도서관이 된 것이죠. 그 도서관의 심장은 오두막입니다. '페어리랜드'의 심장 역시 태초의 페어리랜드의 모습인 것이죠. 이것은 그대로 사회화 되기 전의 개인이 원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과 닮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셉템버는 현실 사회처럼 중력을 발산하는 존재들이 은폐한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 다니는 것이죠. 이러니 제가 라캉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죠. '페어리랜드'를 두고 철학 동화라고 평가하기도 하던데, 이것으로 저도 그 말을 납득했습니다.


 여지없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융합의 움직임 또한 있습니다. 여기서의 자유는 이분법적 사고에서의 자유이기도 합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천방지축과 진지함, 미성숙과 성숙, 실제와 환상, 책임과 방종이 쉽사리 구분되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하나를 내세우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리는 일 따위, 이 소설에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경주에 임하는 셉템버의 상황에서 드러납니다. 셉템버는 한 편으로 여왕이 되어 자신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철부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지만 한 편으로는 왕관이 주는 책임의 무게에서 자유롭고도 싶습니다. 그 왕관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면 셉템버는 자신이 떠나온 현실 세계의 집을 그리워 합니다. 그런데 그 집으로 쉽게 돌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결투에서 지는 것입니다. 각자 다른 세계에서 경주를 하는 경주자들이 어쩌다 만나게 되면 무조건 결투해야 하는 게 경주 규칙인데, 그 결투에서 지면 자신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이 정말 그립다면 셉템버는 결투에서 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심장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왜 그러는 걸까요? 그런데 이 상황이 굉장히 아이러니 합니다. 페어리랜드는 자유이고, 현실 세계는 의무입니다. 원래 셉템버가 현실 세계를 떠나올 때 세계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참전하고 있었죠. 그만큼 현실 세계는 중압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셉템버를 '페어리랜드'로 데려온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이 가지는 의미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페어리랜드와 현실이 가지는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현재의 셉템버에게 '페어리랜드'는 의무이고, 현실 세계는 자유입니다. 이 작품에선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를 소설은 세터데이와 셉템버의 관계를 통해 넌지시 일러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확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우리 삶 자체가 무한한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삶의 속성이 천변만화(千變萬化)이기에 우리는 고정된 의미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고 이분법적 사고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며 완전히 다른 타자와의 융합에 있어서도 거리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태도를 하나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아마도 자유가 되겠죠.. 자유, 그건 무엇보다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페어리랜드', 그 곳은 세터데이에게 시간이 그러하듯이 자유의 대지입니다. 펼쳐보시면 산에서 맞는 아침의 안개처럼 오롯이 들어찬 자유의 운무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동화적인 외양을 가지고 있지만 한 켠엔 깊은 철학적 사유도 슬쩍 감춰둔 작품이었습니다. 덕분에 어릴 때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하듯 읽을수도 있더군요. 찾아냈을 때의 기쁨도 아울러. 특히 환상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께, 정말로 독특한 환상 소설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페어리랜드'를 살짝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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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적혈의 여왕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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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에도 관심이 많다. 이번에 나온 '레드 퀸'도 거기에 속한다. 이 책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존에서 꽤 높은 순위를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더구나 이제 갓 25살이 된 작가의 데뷔작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젊은 여성의 데뷔작이 이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니 얼른 '트와일라잇'의 스테프니 메이어가 떠오른다. '레드 퀸'도 '트와일라잇'처럼 3부작으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된다. 과연 빅토리아 애비야드는 제2의 스테프니 메이어가 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쨌든 1부가 엄청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영화화 작업도 한창 진행중이라고 하니까. 뒤이은 2부와 3부가 성공하고 영화까지 흥행한다면 애비야드를 제2의 스테프니 메이어라고 불러도 누구든 부정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레드 퀸'이 가진 설정의 얼개는 헝거 게임과 유사하다. 일단 계급의 격차가 현저한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거기다 제목에 '퀸'이라고 나와 있듯이, 열악한 계급의 보잘 것 없었던 한 소녀가 결국 그 디스토피아를 허물게 된다. 여기서 벌써 식상함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설정은 헝거 게임의 커다란 성공과 더불어 이 장르의 대세가 되어 버렸다. 이후, 얼마나 많은 판타지 소설들이 '헝거 게임' 설정을 답습했던가? 솔직히 말해 '지긋지긋한 판타지 소설들''이라는 '커커스 리뷰의 표현은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애비야드는 식상할 대로 식상해진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다. 신물이 날만큼 흔한 설정을 가져왔다는 것은 알고도 가져왔다는 것일테고 그렇다는 것은 그 식상함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뜻이다. 신인으로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보기 좋다. 하지만 그것도 다 독자가 식상함을 느끼지 않고 소설을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할 때라야 예뻐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신감마저 마이너스로 채점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자가 소설 끝까지 흥미를 가지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위해 애비야드는 변화를 추구했다.


 일단 소설이 담은 세계가 달라졌다. 

 레드 퀸의 세계는 비록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지만 헝거 게임과 같은 것은 아니다. 헝거 게임은 근대의 독재 국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드 퀸'은 중세의 전제 군주 나라에 가깝다. 왕이 있고, 왕과 함께 소수의 귀족들이 나라를 다스린다. 그런 그들을 특별히 '은혈(silver blood)'이라 부른다. 서양 속담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태생이 아주 좋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유행어가 된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은 물론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은 아주 옛날, 그러니까 중세 때  이미 존재했다. 하필이면 '은수저'가 된 것은 그것이  당시 귀족들에게 최고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애비야드는 이 은수저의 의미 그대로 은혈을 쓰고 있다. 그들은 특권 계층이며 막강한 힘으로 다수의 약하고 가난한 민중들을 착취한다. '은혈'은 비유가 아니다. 실제 그들의 피는 은색이다. 그리고 그 피 때문인지 그들은 영화 '엑스맨'의 뮤턴트들 처럼 초능력을 쓸 수 있다. 거대한 화염을 일으키고, 손을 바위처럼 만들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동물들을 자기 뜻대로 부릴 수도 있고 식물을 순식간에 자라나게 한다거나 상처도 얼른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엑스맨과 똑같이 한 사람이 한 능력만 쓸 수 있다. 그런 능력으로 '적혈(red blood)'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지배한다. 다수의 민중을 이루고 있는 적혈은 붉은 피의 소유자들로 아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세계는 엑스맨의 매그니토가 그토록 바랐던 세계이기도 하다. 뮤턴트가 보통 사람들을 지배하는. 이렇게 사람도 달라졌다.


 '레드 퀸'의 세계는 오직 '피'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이 타고난 혈통으로 결정되던 중세와 흡사하다. 이것이 '레드 퀸'만이 가지는 독특한 지점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대부분 헝거 게임 류 판타지 소설들은 근대 국가 체제를 모델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드 퀸'은 중세 왕국이 모델인 것이다.그것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엄격했던 중세만큼이나 심한 소설 속 세계의 계급 간 차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제목을 다시 떠올려 보면, '레드 퀸', 즉 적혈의 여왕이니 우리의 주인공은 적혈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맞다. 그녀는 적혈이다. 이름은 메어 배로우(Mare Barrow). 작가는 주인공의 성을 배로우(Barrow)로 하여, 그녀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배로우(Barrow)란 성이 낯익다면 당신도 메리 J 노튼의 'The Borrowers(마루 밑 버로우즈)'를 분명 읽은 것이다. 이 성은 바로 거기서 따온 것이다. 인간에게 기생하여 마루 밑에서 살던 조그만 인간 버로우즈. 메어의 처지도 그들만큼이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고 말았다. 오직 적혈이라는 이유로. 은혈이 인정하는 직업을 갖지 못한 적혈들은 18세가 되면 무조건 전쟁에 나가서 총알받이가 되어야 한다. 두 명의 오빠가 이미 죽었다. 아버지는 불구로, 메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소매치기를 한다. 결국 18세가 되어버린 메어는 직업이 없어서 군대로 징집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난 뒤, 은혈의 왕궁으로 갑자기 소환되어 거기서 일하게 된다. 알고 보니 그 소년이 바로 왕자 칼이었고 그 때, 메어는 소년에게 신세 한탄을 했는데 그 때문에 왕궁에서 일하게 해 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칼의 신부를 뽑는 이벤트가 열리게 되고 왕자의 신부가 되고픈 은혈 가문들의 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뽐내게 되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나 그만 메어가 거기에 휘말린다. 목숨이 위험해지려는 찰라, 메어는 놀랍게도 은혈만 할 수 있는 초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구한다. 그녀가 발휘한 것은 전기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능력. 압도적인 능력을 시전한 탓에 메어는 삽시간에 왕자비로 간택받는다. 엘라라 왕비가 적혈이 초능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메어를 유명한 은혈 가문의 잃어버린 자식으로 꾸미고 사람들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아예 둘째 왕자 메이븐의 짝으로 선포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만일 적혈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다면 메어뿐 만 아니라 가족까지 모조리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제 메어는 생존을 위해 은혈인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 은혈만이 가득한 그 곳에서 유일한 적혈인 것도 외롭지만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감춰야 한다는 것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은혈의 적혈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보면서도 무시하거나 은혈 편을 들어야 하는 나날이 계속된다. 유일하게 적혈인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알고 있는 칼과 약혼자인 메이븐, 그리고 그녀의 스승이자 칼의 외삼촌 줄리언 뿐이다. 칼의 어머니는 왕의 첫째 왕비였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했다. 그녀의 동생 줄리언은 정략적인 이유로 누나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은혈 체제를 증오한다. 그래서 메어의 정체를 알고도 기꺼이 돕는다. 칼도 마찬가지다. 완고한 성격 탓에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지만 메어를 마음에 두고 있다. 물론 메이븐도 그러하다. 어머니가 억지로 짝을 지어주었지만 그 역시 현재 체제는 문제가 많다고 여겨 적혈을 도와주고자 하는데 그러다 서로 좋아하게 된다. 이렇게 형제를 두고 메어는 삼각 관계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적혈이 이런 체제를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조직을 만들어 저항한다. 그것이 바로 '진홍의 군대'다. 메이븐은 적혈의 혁명을 위해 그들과 협력한다.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엘라라 여왕의 감시 아래에서 메어는 자신이 적혈이라는 것을 숨겨야 할  뿐 아니라 적혈의 혁명까지 도모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게 된다.


 이상이 '레드 퀸'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라 할 수 있다. 세계와 사람이 중세와 유사하게 바뀌고 정체성의 연기가 가져다 주는, 언제 들킬 지 모른다는 서스펜스와 형제 사이의 로맨스가 강조되었다. 이것이 애비야드가 꾀한 변화였는데, 어쩌면 이마저도 '뭐, 그리 참신한 변화는 아닌데?'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작 그녀의 자신감은 필력 혹은 이야기의 연출력에서 나왔다고 해야할 것 같다. 진부한 소재들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도록 소설의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계급 속에서 살아가는 메어의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적혈의 부조리한 처지에 대한 자각과 행동에 대한 결심들이 잘 묘사되어 있고 초능력을 통한 대결 장면도 인상적이며(아레나 같은 곳에서 능력들을 겨루는데, 그래서 리들리 스콧의 '글라디에이터'가 생각났다.영화에선 꽤나 화려하게 연출되지 않을까 싶다.) 후반의 반전은 놀라웠다. 무자비한 장면을 연출해야 할 때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일단 재미 면에서 왜 소설이 그만큼 성공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깊이 면에서도 날로 계급적 격차가 심해져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소설이 잘 반영하여 왜 점점 가속화되어가는 그런 경향에 대해 우리가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확실히 2부와 3부를 기다리게 만든다. 아직 풀리지 않은 떡밥들이 있어 더욱 그렇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1부라서 캐릭터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탓이라 생각되니 그 점은 2부와 3부를 다 읽고나서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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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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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더스(Enders)'는 리사 프라이스의 디스토피아 소설 '스타터스'의 속편이다. '스타터스'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아마도 10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전쟁에서 사용된 포자 형태의 생물학 병기로 인해 중장년들('스타터스' 세계에서는 '미들'이라 부른다.)이 모조리 죽고 오로지 미성년자와 노인 밖에는 없는 세상이다. 그 세계에서는 미성년자를 '스타터(STARTER)'로 노인을 '엔더(ENDER)'로 부른다. 이름의 의미는 단순하다. 이제 막 삶을 시작(START)하는 나이이기에 스타터고, 인생의 종막(END)에 접어들었기에 엔더인 것이다.



 중장년들이 없어졌다는 게 왜 최악이야 하고 궁금하실 분들이 있을텐데 물론 그것이 최악은 아니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미성년자들에게 부모가 될 중장년들이 모두 사망했으니 당연하게도 도시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미성년자들이 엄청 많다. 이들은 홀로 생존해나가야 하는데 근로권을 비롯하여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권리가 거의 없는 편이다. 구걸과 절도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부와 권력은 모조리 노인들 차지고 그들의 보호를 받는 스타터들만이 풍족한 삶을 산다. 그 세계에서 미성년자는 노인보다 우월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젊음'이다. 그들을 부르는 '스타터'라는 말 자체에 담겨 있듯이 '엔더'라 불리는 노인에 비해 월등하게 강한 육체에 담긴 싱그러운 생명력이 그들이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엔더들이 젊은 그들의 몸을 차지하기 위하여 '바디 뱅크'라는 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타터의 두뇌에 칩을 넣어 그 칩으로 엔더의 의식과 링크하여 엔더가 스타터의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 얼른 이해가 안된다면 영화 '아바타'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주로 10대 청소년들의 육체가 그 대상이 되는데 그렇게 노인의 의식에 지배된 청소년을 '렌터(RENTER)'라고 한다. 그렇게 틀린 명칭은 아니다. 정말로 렌터가 된 청소년들의 육체는 렌트카와 다를 바 없으니까. 살인을 제외한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엔더는 노인의 육체로는 못하는 온갖 익스트림 스포츠와 약과 술 그리고 섹스로 넘쳐나는 문란하기 그지 없는 환락을 즐긴다. 그것을 두고 소설에서 누군가 비아냥거리듯 말한다. 렌터가 된 엔더들은 렌트한 육체보다 자신의 차를 더 소중히 한다고. 이 말 그대로다.


 전작 '스타터스'는 주인공인 10대 여성 '켈리'가 아픈 동생 '타일러'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바디 뱅크'에게 육체를 대여했다가 전체 스타터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음모에 휩쓸리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 모든 음모의 배후에는 '올드맨'이란 수수께끼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결국 잡히지 않고 끝난다. '엔더스'는 바로 그 올드맨과 켈리가 치르는 마지막 결전이다.


 일단 되도록 '엔더스'를 읽기 전에 '스타터스'를 먼저 읽으시라고 간곡하게 부탁드리고 싶다. '엔더스'의 이야기 자체로는 전작을 읽지 않아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으나 이 '엔더스'에서 '스타터스'의 놀라운 반전들이 다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읽으면 '스타터스'가 지닌 뛰어난 서스펜스의 감칠맛이 휘발되기 때문이다. '스타터스'는 정말 재밌다. 신체 대여 장르가 주는 정체성의 의혹과 반전을 잘 살려낸 작품으로 끝까지 뒷 페이지를 넘기는 흥미를 유지한다. 아마도 마지막 반전에선 꽤나 놀라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엔더스'에게도 그만한 반전이 있다. 작가 리사 프라이스는 렌트된 육체의 진짜 정체성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가지고 능수능란하게 독자의 허를 찔러 반전을 만드는데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도입부'는 '엔더스'가 더 굉장하다. 켈리가 우연히 예전에 알던 렌터를 만나 뒤따라갔는데 그만 눈 앞에서 그 렌터가 말 그대로 폭발해 버린 것이다. 알고보니 그 폭발은 올드맨이 일으킨 것이었고 그는 렌터의 뇌 속에 이식된 칩을 마음대로 폭발시킬 수 있었다. 이제 켈리는 자기뿐만 아니라 똑같이 칩을 이식당한 남자 친구 마이클과 동생 타일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올드맨을 찾아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올드맨이야말로 바라는 것이었다. 그도 켈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스타터스'에서 켈리의 칩은 모종의 개조를 당했다. 덕분에 한 명만 접속할 수 있었던 칩이 여러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칩이 되어 버렸다. 다수의 엔더들이 하나의 육체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드맨은 거기서 훌륭한 도구 혹은 병기로서의 효용성을 깨닫는다. 하나의 육체를 여러 명의 전문가가 동시에 접속하여 일한다면 그 육체는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 올드맨은 그 칩을 필요로 한다. 켈리의 뇌에서 떼내어 분석하고 연구해서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이렇게 켈리와 올드맨은 누군가 하나 떨어져야만 건너갈 수 있는 외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며 다가서고 있다.


 '렌트 가능한 신체'는 SF의 고전적 아이디어 중의 하나다. 내 기억으로 그 시초는 아마도 로버트 셰클리의 '불사판매 주식회사'일 것이다.



1959년에 나온 이 소설은 영혼과 내세가 정밀하게 규명되고 그리하여 영혼 이식 기술이 발달한 22세기를 그리고 있다. 거기서 '불사판매 주식회사'는 부유한 자들의 불사를 위해 과거의 죽기 직전의 사람들을 타임 슬립시켜선 그들의 몸을 부유한 자들에게 영구 임대한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당대 자본주의에 대한 선명한 비판이 되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 더욱 가속화된 노동 착취 상태에 있어서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육체 그리고 정신만은 자기 것으로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셰클리의 '불사판매 주식회사'는 그마저도 자본주의는 착취할 것이라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몹시도 불길한 예언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이 실현되었음을 보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에서 말이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다름 아니라 노동자들의 육체와 정신을 자본가처럼 만드는 것이라 간파했다.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정말로 이제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열심히 읽고 노동의 권리 보다 기업의 이익을 더 칭송하며 복지 보다 경쟁을 더 선호한다(물론 복지 역시도 원래는 노동 계급의 연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나온 것이었지만.) 부자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현재 가정과 정부는 빚더미에 올라 앉았는데도 편파적인 기업 절세로 대기업의 사내 보유액은 9백조에 달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황과 살인적인 고용란에도 대기업은 조금의 희생조차 하지 않으려 하며 말도 안되는 임금피크제 같은 것으로 노동자의 임금만 어떻게든 줄이려 한다. 그런 상황인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의 일이라는 듯이 강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으니 셰클리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거기다 그것을 획책하고 있는 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연령층을 감안한다면 '스타터스'와 '엔더스'의 이야기도 그저 공상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고령화 사회'는 소수의 젋은 세대가 다수의 노인 세대를 부양하게 된다.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평균 수명은 자꾸 늘어나기만 하니 젊은 세대에 부과되는 짐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면 젊은 세대들이 과연 자신의 육체를 자기의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 싶다. 육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부양에 따르는 온갖 사회적 의무의 쇠사슬로 칭칭 감겨져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스타터스'와 '엔더스'도 '불사판매 주식회사'처럼 예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점차 진전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 그만큼 전면화 될 세대 착취를 우려하여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활로를 이제라도 찾자는 뜻에서 한 편의 소설로 형상화 된 예언. 너무 앞서 나간 말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 아무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도 가열차게 '고령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데다 다수의 노년들이 렌터가 된 엔더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스타터스'와 '엔더스'는 실은 바로 그 노년들에게 읽히고 싶은 작품이다. 암울하기 그지 없는 미래를 앞둔 젊은 세대들을 부디 좀 헤아려 달라는 간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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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오더 메이즈 러너 시리즈
제임스 대시너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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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즈 러너’를 좋아한다. 비슷하게 세계의 종말 이후를 다루고 있는 여타의 영 어덜트 판타지 소설과 처별되는 이 소설만의 독특한 면모 때문이다. 다른 작품들은, 대표적으로 ‘헝거게임’이 그러한데, 등장인물들 간의 경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메이즈 러너’는 등장인물 사이의 협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작금의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들이 주로 멸망 후라는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것은 2008년 미국의 금융 위기 이후 더욱 노골화된 경향으로  현재 미국 사회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의 간접적인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들이 경쟁을 통해 이야기를 끌고 나갔던 것도 현대 사회가 바로 그것을 주축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으로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엔 한계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승리하는 주인공의 묘사가 오히려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도록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하이에크가 주도했던 신자유주의의 근본 목표는 어디까지나 노동자를 개인 기업가처럼 만드는 데 있었다. 즉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와 의식 모두를 1인 기업처럼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노동자들의 단결권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을 뭉치게 만드는 계급 의식을 희석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하이에크 같은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이 계급 의식을 가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하나의 개인으로 남겨둘 수 있을까를 가장 최우선적으로 생각했고 거기에 노동자들을 한 명의 기업가처럼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경쟁이 중시되었다. 나아가 모두를 경쟁이라는 게임에 참여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정부의 보호막도 모조리 해체해 버렸다. 그들의 작은 정부란 바로 그것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신자유주의가 정부의 개입을 줄이려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오해에 불과하다. 사실 그들은 정부의 개입을 적극 옹호한다. 단 그 개입이 어디까지나 예전에는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영역까지 진출해 거기에서조차 경쟁 제도를 만들어 낼 때에만 그렇다. 대표적으로 공기업이나 의료, 수도, 전기, 경찰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같은 것 말이다. 모든 영역에서의 경쟁의 창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생각하는 정부의 지상 목표다. 그들이 이렇게 경쟁을 중시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모순을 얼마든지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로 사람들에게 쉽게 정당화시켜 흔한 말로 혹세무민하기 쉽기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의 진짜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능력에 따른 결과로 생각토록 만드는 것. 모두를 ‘MEA CULPA’로 만들어 구조적 모순을 은폐시키는 것.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타격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연대했을 개인들을 어디까지나 자기 능력의 부족으로만 생각케 하여 연대 의지를 휘발시키는 것.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 대폭 늘어난 자기계발서도 신자유주의가 바로 이와 같은 인간형을 양산하려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다시는 프랑스 대혁명이나 파리 꼬뮌 혹은 러시아 혁명 같은 노동자들의 계급 운동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소수의 권력자와 다수의 노예와 같은 순종자들.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이 종말 후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것도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꿈꾸는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권력자들은 그런 세계를 종종 유토피아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주인공은 그런 세계를 부수려 한다. 그런데 부수려 하면 할수록, 경쟁에 이기려 하면 할수록 주인공은 더욱 개인 기업가적 모습을 보인다. 능력을 연마하고 홀로 전략을 짜며 성공하면 무리의 인정을 받아 지위가 높아진다. 신자유주의가 그리던 이상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추구하는 대안의 설득력도 그 기초가 부실해진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후반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그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메이즈 러너’는 달랐던 것이다. 이들의 공동체는 마치 플라톤의 국가를 연상시켰다. 모두가 정해진 자리가 있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미로를 빠져나간다는 공동체의 목적에 맞춰 서로 협력했다. 그들의 모든 노력 자체가 대안을 향한 한 걸음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행보가 궁금하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흐름이 이 다음엔 어디로 연결될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즈 러너’의 속편 스코치 트라이얼의 개봉에 발맞춰 출간된 ‘킬 오더’는 ‘메이즈 러너’의 프리퀄이다. 즉 영화의 결말에 밝혀지는 세상의 멸망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소설은 메이즈러너의 주인공 토머스와 테리사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제 토머스는 기억을 지우고 메이즈 러너가 되기 위해 미로로 향하는 승강기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주인공 마크와 트리나를 보여준다. 그들은 원래 소꿉친구다. 나중에 ‘태양 플레어 현상’이라 일컬어지는 태양열의 엄청난 증가로 노출된 지구 상의 사람들이 모두 불타 죽기 바로 직전 마크와 트리나는 서로 마주보며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 마크는 트리나를 좋아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근사해 학교 인기인이 된 트리나에게 사랑을 섣불리 고백하지 못한다. 그러다 갑자기 지하철이 멈추고 억지로 문을 열고 나간 터널에서 마크와 트리나는 플랫폼의 사람들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목격한다. 서둘러 터널로 달아나지만 터널 역시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위기가 닥쳐오고 전직 군인인 알렉의 도움으로 그것을 무사히 넘긴 그들은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과 이제 정착촌을 이루어 살아간다. 하지만 고난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하루는 공공연히 필요한 물품들을 나눠주러 날아오던 비행선 버그가 나타나더니 도움을 기대하고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화살의 비를 퍼붓기 시작한다. 쓰러지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마크와 알렉은 마을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결국 며칠에 걸쳐 버그 한 대를 추락시키고 돌아와 보니 화살에 맞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벌레들이 들어와 마구 갉아먹는다며 끔찍한 통증을 호소하다가 죽어버렸다는 것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마크는 비행선에 서 보았던 상자를 떠올린다. 바로 그 상자에 ‘바이러스’라고 되어 있고 ‘전염성이 매우 높다’고 적혀 있었던 것을. 버그가 쏘았던 화살에는 ‘플레어’라는 이름의 사람의 뇌를 공격해 죽게 만드는 바이러스가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감염자는 속출하고 마크의 친한 친구들도 잇달아 죽는다. 마크와 알렉은 트리나를 비롯하여 사람을 모아 백신을 구하려 버그가 왔던 곳을 찾아 떠난다.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기지에서 그들은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알래스카에 있다는 연합 정부가 이대로는 지구 재건이 힘들다고 생각해 바이러스를 통해 인구를 대폭 줄이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그것이 바로 메이즈 러너 후반의 지구 풍경을 낳은 ‘킬 오더’였던 것이다.


 프리퀄인데다 주인공도 다르지만(한국인 캐릭터 ‘민호’도 나오지 않는다. 민호의 이야기는 아마도 ‘피버 코드’에서 나오는 것 같다.) 페이지가 거침없이 넘어가는 것은 여전하다. 익숙한 전개인데도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는 빠른 속도감으로 식상함을 느낄 여지마저 얼른 없애 버리고 있다. 한 마디로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푹 쩔게 만드는 제임스 대시너의 솜씨는 ‘킬 오더’에서도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개가 다소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내가 ‘메이즈 러너’의 매력으로 생각했던 점은 여기에서도 변함은 없었기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공존과 그것을 위한 협력이라는 ‘메이즈 러너’의 모토는 여기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무엇보다 마크의 일행을 가로막는 것들 모두가 철저히 공존 보다는 자기 본위로 똘똘 뭉친 집단이기 때문이다. ‘킬 오더’를 만든 연합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숲에서 마크 일행을 마귀라 부르는 광신자 집단(사실 그들은 바이러스의 실험 대상으로 알고보면 피해자였다.)도, 자기들을 감염시켰기에 치료제를 얻기 위해서라도 연합 정부마저 감염시켜야 한다고 선동하는 기지의 브루스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비극은 모두 그들의 두려움에서 잉태되고 있는데 정작 그 두려움의 원인은 그들 자신이 낳았다는 것이다. 브루스는 광신자 집단을 두려워 해 세상 전부를 파괴할 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한다. 그런데 광신자 집단을 만든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다. 똑같이 연합 정부도 ‘킬 오더’ 명령을 수행한 브루스에 의해 커다란 위험에 처한다. 이렇게 소설은 그들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내린 지극히 편협한 결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비극의 부머랭으로 돌아오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덕분에 그런 그들과 대비되어 주인공 일행이 마지막에 택하는 행위는 더욱 극적으로 강조된다. ‘킬 오더’는 메이즈 러너 시리즈가 어디를 향해 뛰어가는 작품인지 보다 선명하게 말해주는 작품이다. 나처럼 메이즈 러너의 모토에 반하여 이 작품을 찾게 된 이들이라면 ‘킬 오더’도 만족하리라고 본다. 다 읽고 나니 프리퀄 제2부인 피버 코드가 기다려진다. 글레이더들이 ‘메이즈 러너’가 되기 전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담긴다고 하니 더욱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부디 갈증이 깊어지기 전에 나와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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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8-2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 바로 얼마 전에 메이즈 러너 시리즈를 새벽까지 탐독했는데
헤르메스님 아니었으면 프리퀄을 놓칠 뻔 했군요!

피버 코드? 으아... 아무래도 제임스 대시너 작품을 다 훑어봐야겠네요.
사고 싶은 책이 있다는 사실은, 늘 신납니다~

헤르메스 2015-08-28 18:53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 역시나 저랑 판타지 취향이 비슷하시군요^^
저도 늘 읽을 책이 남아 있을 때 신나더군요^^ 특히 섀도우 헌터스 4권과 5권이 나와서 반가웠어요. 최근 4권을 읽었는데 후반에 완전 폭발하더군요. 세상에 그런 식으로 위기를 넘길 줄은... 어쨌든 신나하며 5권을 시작하려 하고 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5-08-2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는 섀도우헌터스 읽고 세권 모두 홀랑 팔아버린터라 후속 안 읽으려고 했는데, 이런, 헤르메스님 말씀 들으니 슬슬 끌려가네요 ㅋㅋ

헤르메스 2015-08-31 22:36   좋아요 1 | URL
네번째 부터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라 세권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저는 잘 기억이 안나서 자주 이전 책을 찾아봤습니다만^^; 마녀고양이님이 어떻게 읽으실지 정말 궁금한데 제발 낚여주세요^^

2015-08-29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3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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