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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구속!!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일말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는데
역시 사필귀정!
이제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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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7-03-31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구속됐다는 말로 남편이 깨워서 일찍 일어났어요. 어지간하게 했어야지 원..

헤르메스 2017-03-31 22:52   좋아요 0 | URL
부군께서 저 보다는 나은데요. 저는 너무 기쁜 소식이라 새벽에 깨워서 알렸다는...^^;
맞아요. 어지간히 했어야죠. 이젠 정말 속이 시원합니다. 불금이라서 더 그러네요. 하하^^
CREBBP님,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맙소사!

 영화를 본 뒤 내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공각기동대'를 만드는 줄 알았는데, 이거야 원 '토탈 리콜'을 만들어 놓았잖아!


 안다. 모든 작품들은 개별적이다. 설사 원본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내가 '맙소사'를 느낀 건 원본이 되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의 주제와 달라서가 아니다.

 영화 자체의 문제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모두 보신 분은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따왔는지 아실 것이다.

 영화 초반 장면부터 시작해서 건물 습격 장면을 비롯하여 참 많다. 공간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하물며 건물 위로 비행기 지나가는 것까지

 애니메이션에서 가져왔다. 영화 마지막은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소령이 광학미채로 사라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크레딧 화면에서 흘렀던 카와이 켄지의 음악이 영화 크레딧에도 그대로 흐른다.

 그러니 '맙소사!'다.


 애니메이션에서 관객을 매혹시켰던 장면들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와 놓았지만

 정작 그 장면이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혀 헤아리지 않아 이번 영화에서는 아주 엉뚱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본에 대한 수많은 인용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쓰여 이 영화 내부의 정합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하하하!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그칠 수 없다.

 오시이 마모루가 왜 초반에 광학미채 장면을 썼는지, 후반의 스파이더 탱크와 소령이 싸우는 의미가 무엇인지?

 인형사가 그 영화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쿠제 히데오와는 왜 맞지 않는지?

 정말 자신이 그 장면들을 가져 오면서도 그것이 지금 자기가 말하는 것과 어울리는 것인지 전혀(영화를 보니 이렇게 단정지을 수밖에 없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광학미채 자장면을 마지막에 마치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서비스 하듯 넣었겠지.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막대한 제작비, 그것에 돈을 준 중국의 두 회사 때문일까?

 아무래도 원본의 이야기는 많은 관객들이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을테니(원본은 일본에 개봉했을 때조차 흥행 참패했다. 그래서 공각기동대 속편은 제작사가 공각기동대라는 이름을 붙이면 저번처럼 흥행이 안되니까 그냥 '이노센스'로 하자고 했을 정도다.) 관객들이 보다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바람에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일까?


 모르겠다. 내겐 너무나도 그리운(난 공각기동대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상영했던 96년, SICAF에서 봤다. 아직도 그 날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의 충격이 생생하다. 너무나 경이로워서 포스터가 그려지 티셔츠를 구입했고 그것을 한동안 입고 다녔다.) 작품이라 실사로 만들어진다기에 잔뜩 기대하고 봤는데 주제는 그렇다쳐도 영상과 이야기가 이렇게 따로 노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기에 보지 말 것을 후회하는 중이다.


 이런 글을 쓰는 건, 이런 말을 할 사람이 가까이에 없기 때문이다. 보고나서 정말 이 영화에 대해 뭔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그런 말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것이구나 처음 느꼈다. 그만큼 애정하는 작품이라 그런가 보다.

 어쨌든 어디다 쏟아낼 길이 없기에 여기다 내지른다.

 영화 리뷰는 언제든 쓸 것이다.

 조목조목 말하지 않고 냅다 이런 말만 싸질러 놓는 건 그래도 열심히 만든 이에게 예의가 아닐테니.

 지금은 감상 소감만 말해 둔다.


 '맙소사'라고...


 그건 그렇고 요즘 누가 원본 따위에 신경 쓰나?

 필립 K 딕의 '토탈리콜' 같은 건 이미 한 물간 이야기다.

 더구나 순종을 찾고 원본을 고집해서 자꾸만 사람들 불안과 혈압 상승을 부추기는 트럼프 시대에...

 

 스칼렛 요한슨은 괜찮았다. 바트도 좋았고...(원본에는 없는 바트가 눈을 잃게 되는 연유를 영화는 보여준다.)

 쿠제(맞다. TV판 2기에 나온 그 쿠제다. 영화엔 인형사가 나오지 않는다. 그 쿠제의 카리스마를 이 영화에서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영화에는 그 쿠제를 이용했던 고다 카즌도도 나온다. 정확히 이름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얼굴 모습이 고다와 많이 닮았기에 하는 말이다. 쿠제가 있는 곳으로 알려진 바에서 요한슨에게 춤추라고 명령하는 사람을 말한다.)는 화면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의 표정조차 잘 볼 수 없었다.

 키타노 다케시가 또 헐리우드 사이버펑크 영화에 캐스팅 되었다.

 로버트 롱고가 필립 K 딕의 원작으로 만든 '조니 메모닉(우리나라 개봉명이 뭔지 기억이 갑자기 안 난다.)'에 이은 두 번째다.

 그 때는 야쿠사였는데 이번엔 야쿠사를 잡는 공안이다.

 사고로 얼굴의 표정이 없어졌기에 사이버펑크 분위기에 어울려서 캐스팅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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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3-31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다시피 《공각기동대》는 원작 만화가 1989년~1997년에 걸쳐 나왔고, 만화 영화는 1995년에 나왔죠. 지금으로부터 28년 전부터 태동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1996~1997년 당시 《공각기동대》를 보고 한국 영화에서는 거의 접해볼 수 없었던 cyborg, cyberpunk, cyberbrain(電腦) 등등의 개념이라든가 사유 세계, 상상력의 전개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받고 놀라워하고 열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충격받고 놀라워하고 열광하는 데서 그쳤을 뿐 그것을 심층적으로 분석 · 탐구 · 연구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죠. 해서 한국은 그런 장르를 창작하거나 영화로 제작하는 문화의 단계까지 나아가는 건 꿈조차 꿀 수 없었다고 봅니다. 일본은 적어도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저런 개념들과 사유 세계를 폭넓게 상상하고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반면 한국은 지금 21세기 초에서야 알파고 충격을 경험하고 나서부터 저런 비슷한 개념들과 사유 세계에 겨우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닌가 합니다(사회 전반적인 측면에서). 일제 식민지 노예 상태에서 풀려난 것이 194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겨우 72년 전이니까 한국은 모든 측면에서 늦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2017년 할리우드판 《공각기동대》는 과연 저런 조건에 놓인 한국인들한테 어떤 사유를 던져줄지 궁금합니다.

헤르메스 2017-03-31 23:07   좋아요 0 | URL
qualia님 말씀 고맙습니다. 제가 공각기동대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봐서 그 때 분위기를 조금은 잘 알고 있는데요. SICAF 상영 전에 키노에서 먼저 공각기동대가 나왔을 당시 똑같이 많은 관심을 받고 평가가 좋은 애니메이션이 ‘마크로스 플러스‘를 포함하여 두 편 더 있어 함께 소개했었죠. 물론 비평 탑은 공각기동대였습니다. 키노 때문인지 입소문인지 SICAF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공각기동대를 보러 왔었습니다. 코엑스 광장에 꽤 긴 줄이 있었을 정도로 말이죠. 아마도 이번 영화판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때 봤던 이들이 아닐가 해요. 그 뒤로, 그 때는 아직 인터넷이라는 게 발달하지 않아서 공식적인 팬덤의 존재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각기동대는 무조건 필수 관람작이었습니다. 대부분 영화 동아리에서도 함께 보고 많이 토론한 것으로 알고 있고 ‘공각기동대‘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 성인 취향 SF 애니메이션이 나오기도 했었죠. 말씀하신대로 일본은 이미 그 쪽에 충분한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그 때 비로소 본격적으로 사이버펑크가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긴 합니다. 물론 그 전에도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라든가 ‘토탈 리콜‘ 같은 것이 어느정도 사이버 펑크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사이버 펑크를 주제로 한 sf 단편집도 나왔던 걸로 압니다. 제 생각에 저변에선 사이버펑크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분명 있었지만 그 수가 너무도 일천했기에 주류로 나아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sf의 영토란 지극히 협소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개인들간의 관심이 있었기에 영화 ‘매트릭스‘도 쉽게 받아들여지고 인기를 얻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 ‘매트릭스‘는 공각기동대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죠.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한 ‘루시‘가 ‘아키라‘에서 영향을 받은 것과 똑같이 말이죠. 아마도 영화판으로썬 우리들에게 별로 사유할 거리를 던져주진 못할 것 같습니다. 영화판 주제는 철지난 것들이기 때문이죠. ‘공각기동대‘ 때는 정말로 많은 논의들이 있었는데, 영화판이 좀 더 사이버펑크 적으로 존재론적 주제를 지녔다면 그 때의 논의들이 좀 더 발전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로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네요. 쓴다고 쓰긴 했는데 과연 제대로 된 댓글일지 모르겠습니다. 두서가 많이 없을텐데 널리 양해하시고 읽어주세요. 그리고 qualia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머니볼 - Moneyba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흔히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아마도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샘 레이미가 감독했고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영화 '사랑을 위하여(1999)'가 아닐까 생각된다. 거기서 프로야구의 투수이자 야구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주인공은 이제 마지막 게임을 치르고 있다. 영화는 노히트 노런의 퍼펙트 게임을 향해 완투하는 현재의 모습과 그의 과거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의 과오 실패 상처 등등으로 점철된 그의 과거의 모습을. 거기서 그는 마치 그러한 과거의 상흔을 지우려는 듯이 하나 하나 힘차게 볼을 던진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던지는 하나의 볼은 그 모두가 몰려드는 아픔과 죄의식을 지우려는 욕망의 몸짓이다. 그래서 그의 퍼펙트 게임은 그대로 인생 전체를 성공적으로 봉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샘 레이미가 이토록 인생과 야구를 조화롭게 연결시켰으면서도 결국 이 영화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은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를 못해서도 샘 레이미의 연출이 모자라서도 아니었다. 정작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과거의 그 상처를 아픔을 포용하려 든다기 보다는 오히려 지우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극히 수비적인 인생에 대한 태도가 정작 주인공을 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으며 때문에 관객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다시 샘 레이미의 '사랑을 위하여'처럼 다시금 야구를 통하여 인생에 깊이 새겨진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영화가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하고  아론 소킨이 각본을 쓰고 베넷 밀러가 감독한 '머니볼'이다.  

  

  이 영화는 머니볼 이론을 이용하여 약체이자 가난하기 그지없는 구단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미국 야구 역사상 140년만에 처음이라는 '20 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이루게끔 만든 단장 빌리 빈의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영화가 더 주의 깊게 다가가는 것은 빌리 빈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실패에 대한 기억이며 그것이 현재의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가 그 실패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홀로 타석에 들어서서 쳐낼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날아올 공을 기다리고 있는 고독한 타자 빌리 빈의 모습인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 태도를 강조한다. 그러니까 애슬래틱스가 플레이 오프전 우승 여부를 놓고 싸우는 그 순간,  단장인 빌리 빈은 그 시합장에 있지 않고 텅 빈 구단 운동장 관객석에 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승이 좌절되자 카메라는 분노에 차서 홀로 자동차를 타고 이리저리 누비는 그의 모습을 담더니 그나마 있는 스타급 플레이어들 마저 줄줄이 트레이드 되고 현재 가용한 비용으로서는 도저히 제대로 된 팀을 꾸릴 수 없음을 체감하는 그 순간에 영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각광받는 기대주였으나 시합에 참가하자마자 형편없이 몰락해 버린, 이제 빈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그 기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내내 애슬래틱스를 강한 팀으로 만드려는 그 모든 노력들이 모두 그 과거의 실패로 부터 달아나려는 노력에 다름아님을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각인시킨다. 그리고 드디어 이 영화가 정말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그 장면이 바로 빌리 빈의 딸이 기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불러주는 노래를 빌리 빈이 듣는 장면이다. 그렇게 LENKA의 'THE SHOW'를 들으며 빌리 빈은 자신의 삶이 그 노래의 가사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I'm just a little bit caught in the middle 

 Life is a maze and love is a riddle 

 I don't know where to go, can't do it alone 

 I've tried and I don't know why 

  
 I'm just a little girl lost in the moment 

 I'm so scared but I don't show it 

 I can't figure it out, it's bringing me down 

 I know I've got to let it go 

  and just enjoy the show 

 

  어쩌면 이 가사를 토대로 빌리 빈의 삶을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랫말은 정확히 현재 빌리 빈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그 노래를 듣는 가운데 뭔가 마음에 덜컥 와 닿아버린 듯한 표정을 빈이 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 '머니볼'은 빌리 빈의 노력과 성공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담아낸다. 빌리 빈이 자신의 과거를 통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측불가능성'이다. 그것은 모든 스카우터로 부터 최고의 기대를 받았으나 정작 시합에 임해서는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준 자신의 과거 경험 그 자체에서 절절히 느낀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빌리 빈은 '머니볼' 이론에 매달려 오랜 시간의 경험과 감을 무시한다고 항변하는 자기 팀의 스카우터 앞에 예측 가능하다는 얘기는 하지말라고 당당히 말할 수까지 있는 것이다. 이 '예측불가능함'은 그의 두려움 근저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가 브랜든의 머니볼 이론에 매달리는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출루율'이라는 드러나는 기록에만 의지하는 머니볼 이론은 오로지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넘쳐나는 이 상황에 있어 그나마 '기록'이라는 예측 가능한 좌표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문득 홀로 밝혀진 등대 불빛과도 같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자료들을 말이다. 바로 그랬기에, 그 자신 가장 두려워하는 예측불가능에 그나마 구원의 빛을 던져준 것이었기에 그는 그 누구의 반대와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매달렸던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빌리 빈이 얼마나 예측불가능성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예측불가능성을 벗어나려 머니볼 이론의 매달림이 과거 상처의 치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저 또 다른 것으로 도피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영화는 대표적으로 20연승이라는 140년만의 대기록이 막 이루어지려는 현장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시합에 지는 것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는(당연히 그것이 과거의 상처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빌리 빈은 그 어떤 시합도 관전하지 않고 그 시간을 언제나 홀로 차 속에서 보낸다. 카메라는 운전하는 그를 화면에 꽉 차도록 담음으로써 그 '홀로'라는 고립감을 더욱 더 강조한다. 20연승이 이루어지는 그 시간에도 빈은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축하한다고. 라디오를 켜니 어마어마한 점수 차이로 자신의 팀이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절대로 지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처음으로 직접 시합을 관람할 생각을 하고 경기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서자 마자 갑자기 하늘을 흐려지고 자신의 팀이 내리 점수를 내주기 시작한다. 결국 패배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빈은 경기장을 나오고 만다. 이러한 영화의 묘사는 빌리 빈의 성공기를 다루었다면 굉장히 이상한 묘사이다. 20연승이란 머니볼 이론의 최종적 승리나 마찬가지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만한데 영화는 그 어떤 흥분도 전해주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빌리 빈이 대단히 불운한 남자로구나 하는 인상만 심어줄 뿐이다. 

  즉 영화는 이렇게 또 한번의 (빌리 빈 개인으로서는) 좌절의 순간을 마련함으로써 빌리 빈이 머니볼 이론에 매어달리는 것이 그저 환자가 순간의 통증을 잊기 위해 모르핀을 맞듯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영화 내내 빌리 빈에게 있어 그 과거의 상처를 영원히 극복할 그 순간은 도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내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이자 때때로 환기되어 온 존재를 집어 삼키는 상처로서...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억지로 상처를 지우려 했었던 샘 레이미의 '사랑을 위하여'와 정확히 갈라지는 지점이다. '머니볼'이 새삼 빌리 빈의 이야기에 주목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깊이 남아있는 9.11의 기억이다. 그것은 커다란 비극이었고 여전히 환기되는 상처였다. 거기다 2008년에 서브 프라임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위기로 인한 아픔 또한 있다. 그렇게 만연된 아픔 널려진 상흔... 영화는 새삼 그것을 바라볼 것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상처는 이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바로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영화는 '머니볼'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하나의 본질로 간직한 빌리 빈의 신체를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그가 단 한 순간도 과거의 그 때 섰었던 타석으로 부터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차속에 홀로 고립되어 운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반복함으로써 말이다. 영화가 정말 묻고자 하는 것은 왜 그가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냐는 것이다. 거기에 영화는 바로 그가 그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지우려고만 애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샘 레이미의 케빈 코스트너가 그랬던 것 처럼... 지우면 치유가 될 줄 알았던 그의 착각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바로 지금 미국의 태도가 아닌가 묻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문제 앞에서 현재 미국은 그 고통들을 우리가 껴안으려 하지 않고 그저 다른 외부로 전가시킴으로써 애써 잊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것을 영화는 말 한 마디로 단칼에 해고되고 마는 선수들을 통해 보여준다. 보다 좋은 팀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내부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이너스가 되는 존재를 외부에 떠넘김으로서만 유지되는 시스템이 바로 미국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너무 멀리나아갔는지도 모르겠지만 영화가 상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떡해야 하는가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 영화는 단적으로 LENKA의 노래를 끝에서 다시 들려줌으로써 정리한다. 삶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지금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그건 그냥 잠정적 과정에 불과하다. 상처 또한 마찬가지다. 상처가 상처로 있는 것은 그것을 상처로만 기억하는 우리들 때문이지 그 상처가 장차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제레미 브라운 2003년 5월의 야구 경기 장면의 의미이다. 신체적 여건상 절대 도루를 해서는 안되는 그였지만 그날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도루를 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수비진에게 걸려 자신의 한계를 똑똑히 깨달았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홈런을 쳤었으니까... 제레미 브라운이 스스로 인정했었던 한계가 바로 빌리 빈이 가지고 있던 상처에 대한 의미였다면 그가 자기도 모르게 쳐 버린 홈런은 장차 그 상처의 의미가 어떻게 나아갈지 모른다는 것의 비유인 것이다. 또한 브라운이 정작 누군가 알려줘서 그 사실을 알았듯이 우리로서도 현재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모두를 볼 수 있는 관객의 자리에 앉아있지 않는 한은...

   그러므로 영화는 전혀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측불가능성은 보기에 따라 빌리 빈에게 두려움의 근원으로도 또한 희망의 근거로도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상처 또한 마찬가지라고... 우리는 관객의 자리에 앉지 않는 한 경기 전체의 흐름을 알 수 없는 선수일 뿐이라고... 이 모든 삶의 의미는 결국 관객의 자리에 서는 날, 그렇게 인생 전체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신의 자리에 서는 날 알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예측불가능으로 인한 두려움이든 상처든 그대로 인정하고 그저 삶이란 쇼를 즐기라고...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내내 반복되는 'and just enjoy the show'는 그래서 영화가 들려주고 싶은 진심어린 전언이자 지금 아픔의 과정에 있는 모두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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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0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헤르메스님. 아..리뷰가 정말 좋습니다. 이 영화에서 9.11을 읽어내셨군요. 저도 이 영화를 보았지만, 사실 그런것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말씀을 듣고나니 깊이 공감이 갑니다. 말씀하신대로 야구는 또 예측불가능하기에 희망적이겠지요.^^

헤르메스 2011-12-02 15:4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맥거핀님. 좋은 말씀도 너무 감사드려요.^ ^
사실 9.11까지 생각한 건 아무래도 빌리 빈에게 그 과거의 상처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으며 영화 역시 그 치유가 영원히 불가능할 것임을 암시하는 듯 해서 그렇게 여겨졌던 것 같아요. 거기다 빌리 빈이 머니볼 이론을 적용했지만 계속 실패하는 초반의 시합 장면 대부분이 TV화면으로 재현되는 것이 제겐 흥미로웠는데 생각해보니 9.11의 아픔이 많은 미국인들에게 다가갔던 방식도 그와 유사했던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측불가능성에 대해선 특히나 브랜든이 빈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던 때 자기 방에 걸려있던 액자의 사진이 플라톤이라는 것에 착안하게 되었는데, 물론 머니볼 이론이 전형적인 플라톤적 국가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겠습니다만 현실의 삶을 오로지 초극(혹은 부정을 통한 수정)해야할 가상의 것으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 역시 거기에 담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이 영화는 허무주의마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니체(영화가 지향하는 철학적 입장)와 플라톤의 대립각이지 않을까도 생각했었는데 거기까지는 차마 리뷰로는 쓰지 못하겠더군요.^ ^

맥거핀 2011-12-02 17:33   좋아요 0 | URL
와우 플라톤과 니체까지. 이 영화에서 어떤 철학적인 관점도 읽어낼 수 있군요. 상세하게 덧글 달아주셔서 영화에 대한 이해가 한결 풍성해진 듯 합니다.

노다웃 2011-12-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영화 보고 왔는데 리뷰 읽으니 영화가 더 와닿습니다.
예측할 수 없으니 인생인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르메스 2011-12-07 16:00   좋아요 0 | URL
노다웃님도 저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셨군요^ ^
크레딧에 나왔던 노래 원래 가사는 I want my money back.'인데 그처럼 종국에 가서 신에게 '내 인생 물려 줘'라고 떼를 쓰게 되더라도 조금은 강가에 서 있는 아이와도 같이 여유를 가지고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삼총사 3D - The Three Musketee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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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색은 영화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아무래도 2차원적 활자를 3차원적 영상으로 옮겨야 하는 만큼 고유의 영상문법이 적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집중력은 90분 이상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더구나 상영시간이 길어지면 영화사 수입에도 지장이 있다. 그래서 고전일 경우, 특히나 '삼총사' 처럼 다소 긴 장편일 경우 부득이하게 대체로 거대한 줄기만을 가져오거나 혹은 몇 인상적인 에피소드만 따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거의 재창조 수준의 각색이 이루어지기가 일수다. 그렇다고 각색이 원작보다 뒤떨어진다고만은 할 수만은 없다. 여기에는 그런 경제적 효용 못지않게 그 고전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바로 지금'이라는 동시대적 가치관 또한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각색을 통해 오히려 고전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와 더불어 생생히 호흡하며 살아 뛰는 작품으로 거듭 날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각색이 상업적 이윤을 위한 한낱 소재이냐 아니면 인상적인 새로운 재해석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영화예술적 자의식이다. 즉 그들이 영화를 무엇으로 생각하냐에 달린 것이다. 

  

 

   삼총사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지금까지 이미 수많은 연극과 영화가 만들어졌고 애니메이션 까지 부지기수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익숙한 작품을 다시금 만든다는 것은 사실 모험에 가깝다. 다시금 만들려는 사람은 작품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강고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유명세다. 유명세는 양날의 검이다. 즉 유명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잇점은 있으나 그들에게 깊이 각인된 인상은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인상은 그들에게 두 가지를 가져다 주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새로이 만들어지는 작품은 그 목숨이 위태로워지게 된다. 즉, 인상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그 작품을 처음 맛보았을 때 느껴던 환희를 재차 환기시켜줄 것과 그와는 반대로 그 인상을 넘어선 또 새로운 느낌 역시 맛보게해달라고 새로운 작품에게 요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은 이 둘을 모두 다 만족시켜야 하는데 물론 이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너무 독창적이면 예전의 그 기분 그대로라는 '환기'를 줄 수 없어 원성을 살 것이고 그렇다고 '환기'에만 집중하면 허름한 재탕에 불과하다고 비난을 들을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고전을 다시금 만들려는 작가는 이러한 위험을 무릎써야만 한다. 이러한 위험은 마치 '나는 가수다'에서 탈락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가수라고 불러지는 '김건모', '임재범'의 노래를 경연에서 부르게 되었을 때 그 가수가 직면해야 하는 위험과도 같은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작가는 우리말로는  '객기' 일본말로는 '곤조'를 부리게 된다. 자신이 믿는 영화의 정의에 따라서 말이다. 관객에게 새로운 삶의 비젼을 준다는 예술가적 '똘끼'로 충만한 작가라면 다른 것 신경쓰지 않고 고전의 재창조에 목숨을 걸 것이다. 그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쉽고 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을 영화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전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데만 신경을 쓸 것이다. 즉, 우리는 고전을 다시 어떻게 만드는가를 통해 작가의 자의식마저 유추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다면 2011년 다시금 찾아온 '삼총사'를 만든 폴 W.S 앤더슨은 어떨까?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그가 아주 개인적인 작가 영화에서 대중적인 상업영화로 진행해 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물론 개인적인 작가영화라고 내가 평가하는 '이벤트 호라이즌' 마저 상업적인 영화라는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앤더슨 감독의 개인 필모그래피만 기준해서 본다면 그 영화는 그래도 개인적 자의식이 많이 들어간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던 그가 대중적인 상업 영화로 넘어왔을때 무엇보다도 그를 그렇게 인도했던 것은 바로 '게임'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상업영화 '레지던트 이블'은 일본의 게임회사 캡콥의 히트 게임 '바이오 하자드'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즉, 앤더슨에게 있어 지금 지속되고 있는 상업 영화를 떠받치고 있는 중추는 감히 '게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 '삼총사 3D'도 마찬가지다. 삼총사가 소개되는 도입부분에서 우리는, 특히나 아라미스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게임인 '어쎄신크리드'를 떠올리게 된다. 액션의 연출이 참으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렇게 된 데에는 이 영화가 '3D'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한 몫할 것 같다. '3D'는 아무래도 관객에게 3D체험을 많이 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니 진지한 연출 보다는 게임과도 같이 현란하면서도 과장된 연출을 할 수 밖에 없다. 즉 여기에는 이 영화가 3D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에서 애초에 원작의 맛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줄 '환기'의 쾌락은 포기해야 한다는 한계가 지워져 있다. '3D' 자체가 원래 관객에게 작품을 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줌으로써 보다 쉽게 다가가려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앤더슨은 영화에 대해 후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삼총사 3D' 역시 거기에 충실하여 원작과 많은 다른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원작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살짝 비교해보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트레빌'의 부재다. 트레빌은 영화에서 다르타냥의 아버지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총사가 있다고 하면서 그 이름은 차마 말하지 못한 그 사람이다.(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분명 그러할 것이다.) 원작에서 트레빌은 총사대를 이끌면서 다르타냥에게 일종의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다. 원래 원작은 그 트레빌과 추기경을 대칭구도로 하면서 트레빌에 속한 총사대와 추기경에 속한 친위대의 집단적 대립 구도다. 하지만 트레빌이 사라지면서 총사대 자체도 사라졌다. 즉 양강구도가 영화에서는 일강구도가 되면서 리슐리외 추기경이 왕마저 능가할 정도로 프랑스 전체의 권력을 가지고 있음이 더욱 강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로 왜 추기경이 왕을 폐위시키려 하는지 그 동기는 약화되고 말았다. 사실 이미 왕은 추기경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게 총사대가 사라짐으로 인해 원작에서 총사대에서 만나서 결투에 이르게 되는 다르타냥과 삼총사의 만남 역시 수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다르타냥이 파리에 올라오자마자 그 삼총사와 오해에서 비롯된 만남을 가지게 된다. 재밌는 것은 아라미스와의 만남이다. 원작에서 다르타냥은 아라미스가 감추고 싶었던 한 아녀자의 손수건을 주워 돌려줌으로써 아라미스를 난처하게 만들고 결국 결투를 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주차 위반 딱지'로 바꼈다. 아마도 종이가 손수건과 비슷한 얇은 것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초반에서 모든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바로 다르타냥이 고향에서 타고온 '버터컵'이라는 말이다. 살찌고 못생긴 말은 시골에서 갓 상경한 다르타냥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화에서 말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그 말과도 같은 시골 청년 다르타냥에 대한 도시 파리인들의 무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원작에서 뒤마가 다르타냥으로 하여금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과 차이가 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원작과 영화는 아주 다른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달타냥이 그들과 악연을 맺게 한 것은 바로 로슈포르' 때문이었다. 그를 뒤쫓다 그만 일이 꼬이고 말았던 것이다. 

                                                                                

 로슈포르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앤더슨에게 가장 실망한 것은 로슈포르의 묘사다. 로슈포르는 악역이긴 하지만 삼총사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느끼겠지만 작품 내내 미지의 인물로 남아있으면서 다르타냥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죄의식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악마적 존재이다. 사실 로슈포르는 다르타냥에게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과 하이드씨' 처럼 또 하나의 분신 즉 하이드 같은 존재인데 이 영화에서는 로슈포르가 원작에서 가졌던 그 풍부했던 의미를 모조리 제거하고 그저 비열하고 무자비함만 강조한 단순한 악역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것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은 비단 로슈포르 뿐만 아니라 삼총사의 악역 전부에 미친다. 원작의 버킹엄 공작은 비록 적국인 영국인이지만(프랑스와 영국이 견원지간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꽤 합리적이고 귀족다운 풍모를 보인다. 더구나 악역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완전 정반대로 만들어버렸다. 올랜도 블룸이 연기한 영화 속 버킹엄은 그지없이 오만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버킹엄과 프랑스의 여왕이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할 수 없고 그래서 원작에서는 버킹엄과 프랑스 여왕이 연정이 싹터 사랑의 증표로 보내준 보석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리슐리외 추기경이 여왕을 몰아낼 심산으로 거짓으로 꾸며낸 증거가 되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사실은 인간적이고 선한 인물들을 오히려 역전시키면서도 유독 밀레디만은 예외로 남겨둔다.  

 

   즉 원작에서 사랑 따위는 발톱의 때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자를 이용할 뿐인 밀레디가 영화에서는 다르타냥을 구해주거나 아토스에게 여전히 애정이 있음을 내보이는 등 오히려 인간적 색채가 가미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후 여성의 지위가 그 때보다 격상되었다거나 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다. 차라리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보자면 원작의 밀레디가 훨씬 더 급진적이다. 그녀는 남성중심의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밀레디는 다르타냥을 비롯 삼총사에게 전혀 이해불가하면서 속수무책인 존재이기에 더 그렇다. 다르타냥마저 밀레디에게 유혹된다. 더구나 그녀는 다르타냥의 사랑인 콩스탕스를 죽인 장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밀레디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대표적인 악녀 '메데이아'를 연상시킨다. 그 메데이아는 크리스타 볼프에 있어서 완전히 재해석된 바 있다. 밀레디 역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완전히 재해석될 필요가 있는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앤더슨이 이번 영화에서 그러한 것을 좀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모든 인물의 뒤틀린 변형에는 한 가지 일관된 시선이 느껴진다. 그 시선은 물론 감독 자신의 것으로 그것이 향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귀족적인 것'이다. 즉 앞에서도 말했듯 원작과 영화가 뚜렷이 차이를 나타내는 지점은 바로 '귀족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다. 원작의 뒤마는 '귀족적인 가치'를 지지한다. 그는 특히나 귀족이 가지는 '명예를 소중히 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다르타냥에게 나타난다. 다르타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귀족'으로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의 '귀족적인 것'을 무시했을 때 다르타냥은 언제나 발끈한다. 적국인 영국의 귀족이지만 버킹엄의 중후한 인간미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앤더슨에게 있어서 귀족은 이미 지난 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영화속 다르타냥에게 있는 것은 자존심 뿐이다. '귀족적인 것'은 오로지 배신과 술수 그리고 협잡으로만 연결될 뿐이다. 다르타냥의 자존심은 어차피 그러한 귀족들에게 무시당할 필요없다는 일종의 당당한 선언 같다. 때문에 앤더슨은 적이지만 귀족적인 풍모를 여전히 보여주었던 버킹엄은 비열한 모사꾼으로, 다르타냥의 또 하나의 분신이자 언제나 공정히 승부를 겨루었던 로슈포르는 비겁하고 무자비한 악한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바로 거기에서 뒤마와 앤더슨은 절대적인 차이를 보였으며 때문에 삼총사의 이야기는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삼총사'는 기존의 대강적인 줄거리만을 따왔을 뿐이고 그 밖의 배경이나 사건이나 그리고 인물은 모두 변형을 가했다. '3D'라는 한계상 오로지 관객에게 쉽고 빠르게 다가가는 것만을 목적했기에 원작에서 풍부했던 인간적 모습은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평면적이 되어버렸고 로슈포르나 밀레디의 묘사에 이르러서는 거의 안타까울 정도의 수준마저 보여주었다. 원작을 모른다면 그럭저럭 액션 영화로 즐길 수 있겠으나 원작의 팬이라면 글쎄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 영화가 일종의 프롤로그와도 같기 때문에 생겨난 한계인지도 모른다. 다르타냥의 아버지가 끝내 '트레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나 스포일러상 말할 수 없으나 가장 마지막 장면은(이것은 분명 '라로셸 포위전'을 다룬 것이리라) 앞으로 이 영화가 속편으로 이어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작의 팬으로서, 이 영화에서 느꼈던 아쉬움과 실망감은 다음 뒷 편이 나올때 까지 잠시 유보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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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우리 젊은날 - Our Joyful Young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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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연이라는 것은... 

  

 사람과의 인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 작품과의 인연도 그렇게 전조도 없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나보다.  그 날 내가 무슨 연유로 평소에는 거의 보지도 않는 TV를 보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무튼 채널 서핑을 하다 그만 우연히 보게 된 장면에서 누군가 내게 '얼음!'이라고 외친 것 처럼 딱 내 시야가 거기에 고정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한국영화였다. 

 바로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 그것이었다. 

 

 

 주말마다 EBS에서 하는 '한국영화특선' 시간이었다. 영화는 이름만 들어봤지 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내가 본 배창호의 영화는 '고래사냥'이 유일할 것이다. 영화는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진행중이었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중요하지도 않았고. 내가 시야를 고정시키게 된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 아니라 카메라가 인물을 담는 방식 때문이었으니까. 나중에 알아보았는데 '기쁜 우리 젊은 날'은 1987년에 나온 영화라고 한다. 그러니까 6.29선언이 있었던 해다. 영화는 5월 2일 개봉되었다. 그러니까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에 개봉된 것이다. 그 시기를 알고 보니 왜 그렇게 주인공을 맡은 안성기가 영화 내내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는지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그 영화를 안성기는 민주화를 염원하는 우리네 모습으로 짝사랑의 대상인 황신혜는 도래할 민주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무엇보다 두 번의 사산 경험에다 임신중독으로 인해 딸아이만 낳고는 죽어버리는 황신혜로 인해, 그렇게 황신혜에서 새롭게 아이로 바뀌는 것은 다가올 6.29선언 자체를 예언하는 것 처럼도 보여졌다. '아, 배창호는 이렇게 시대적 열망을 영화에 담았던 것이로구나!'  이게 이 영화에 대한 내 처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해 안가는 게 있었다. 단순히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대적 열망을 담아냈다는 것만으로는 포함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영화학자 로빈 우드가 말했던 거기에 속하지 않는 '불균질적 층위'들이 이 영화에 분명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시야를 사로잡았던 장면의 묘사였다. 그리고 그게 다시금 이 영화를 바라보게 된 처음의 단서이기도 했다. 

 

 2. 아버지라는 것은... 

 

 그건 아버지(최불암 분)과 아들(안성기 분)이 만나는 장면이었다.  화면의 톤과 둘러싼 배경 묘사는 이 영화의 연식이 제법 오래되었음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두 배우가 나란히 출연하는 걸 보는 것도 신기하긴 했으나 보다 내 시야를 사로잡은 결정적인 원인은 두 인물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이었다. 흔히 옛날 한국 영화라면 이런 경우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나눠 찍는 분절된 쇼트들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표정과 대사를 강조하고 줄거리를 인지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배창호는 이것을 롱테이크로 담아내고 있었다. 대화 장면이 짧지도 않다. 게다가 그리 극적이지도 않다. 그저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부자간의 대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카메라는 아주 중요한 장면을 찍는다는 듯이 움직임 조차 사려깊게 하려는 듯 그 공간 전체만을 집요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거기서 아들은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고 아버지는 이리저리 공간 속을 활발하게 움직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요즘엔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되서 큰일이라더라." "요즘엔 종합상사가 가장 좋다더라. 너는 거기 들어가라." 의 말을. 아버지의 이 말은 영화에서 자주 반복된다. 안정된 삶을 바라는 아버지의 희구가 느껴진다. 하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흘려버리듯 내뱉는 말들은 그의 이말이 되도록 아들에게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있는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이 이왕이면 어려움 없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과 그래도 왠만하면 자기가 뜻하는 대로 살면 좋겠다는 생각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들 역시도 그랬다. 그저 조용히 앉아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군말없이 '네'하고 대답하고 있지만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극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아들 역시 자신을 위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꿈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단답식의 조용한 대답으로 나오고 있었다. 배창호의 롱테이크는 그것을 잡아내고 있었다. 화면 속에 가로놓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간격과 똑같이 그들이 들어서길 꺼려하는 그 심리적 간격을. 배창호는 바로 그 간격을 그들의 표정과 말투로 서로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사랑'의 영역으로 구현해 놓고 있었다. 그랬다. 이 영화에서는 짝사랑하는 존재인 황신혜 만큼이나 아버지의 비중이 높다. 그것이 이 영화를 애초 생각대로 '민주화 열망의 형상화'라는 주제를 고집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가급적 삼가하고 그저 멀찍이서 조용히 지켜보며 필요할 때 아낌없이 사랑과 위로를 주는 아버지의 존재는 지금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아들이 하는 것과 정확히 닮았다. 카메라는 자주 아들을 위로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는다. 여인에게 처음 마음을 고백했으나 결국 거절당하고 술에 취해 돌아와 드러누운 아들을, 그가 잠든 뒤에도 이부자리를 챙기고 전등을 꺼주는 등 상심한 아들을 보살피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래도록 담는다. 그녀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놀이터에서 혼자 있는 아들을 발견하는 것도 그 아들을 조용히 위로하는 것도 아버지다. 

 

 

   아들의 여인에 대한 사랑이 난항을 겪을 수록 배려와 존중으로 놓여져 있었던 그 간극을 아들은 자꾸만 잘라내지만 그 때도 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서 최대한 아들을 배려하면서 조용히 지켜본다. 언제든 기대어줄 어깨와 다독여줄 손을 가진 채. 이렇게 자주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를 보게 되면 정말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다시한 번 생각하게 된다. 배창호는 정말 한 여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리면서 비록 결실은 맺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그 자체로도 기뻤노라 라는 의미에서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어째서 아들이 그토록 아버지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인지 기묘해진다. 아들이 여인을 처음 만나는 장면은 사실은 아버지가 아들의 맞선을 주선하는 자리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의 착각으로 인해 정작 아버지의 맞선 자리로 바껴져 버리는 장면으로 다시금 반복된다. 그런데 그 뒤 배창호는 홀로 남은 아들이 그 여인과 처음 만나는 순간을 혼자 반복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그 여인을 처음 만나게 된 것도 아버지가 했던 것과 똑같이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 자리로 여인을 인도한 것도 아버지의 모방이었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도,  다시금 배창호가 순서를 재배치 함으로써, 아버지를 모방한 것이 된 것이다. 또한 오래도록 멀리서 지켜보던 아버지의 시선 그대로 아들은 그 여인을 지켜본다. 그렇게 사실 그의 짝사랑이란 다름아닌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의 반복된 형태이기도 하다. 더구나 마지막에 엄마 없이 자라게 된 딸과 아버지로서 대면하는 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엄마 없이 홀로 그를 키운 아버지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3. 배창호의 '회상'적 시선...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표면으론 한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그 아래에 깔린 것은 그 사랑 자체를 가능하게 해 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댓가를 바라지도 않으며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부모의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제목의 의미 또한 이제는 바뀌게 된다. 사랑함으로서 기뻤던 게 아니라 우리는 몰랐지만 그렇게 우리 등 뒤에서 지켜보는 부모로 부터 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기에 기쁜 젊은 날이었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에서 진행되는 내용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바탕이 되고 틀이 된 영화 형식 자체로 부터 드러나는 내용이다. 이러한 전혀 별개의 맥락 자체가 드러난다는 것이 배창호가 이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보여주는데 그가 이렇게 주제와는 별도로 형식에 공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영화의 질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였을까 우리는 그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유념해 볼 것이 배창호가 공간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특히나 앞에서 말했던 내 시야를 사로잡았던 롱테이크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생신 축하 술자리 공간이 묘사되어지는 방식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 공간은 이렇게 드러난다. 

 

 카메라는 바로 그 곳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5촉짜리 전구의 자그마한 빛 아래 생신 축하를 위해 삼삼오오 모여있는 술자리를  카메라는 아주 멀리서 잡는다. 조명 역시 거기 밝힌 5촉짜리 전구가 전부다. 그러니 술자리의 배경과 관객 가까이의 전경은 어둠속에 잠겨있다. 그것은 마치 꿈결처럼 몽환적으로도 보인다. 거기서 생신을 축하하는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5촉짜리 전구의 빛은 작지만 다사롭게 그들을 둘러싸고 나즈막히 들려오는 그들의 노래소리로 그 장면은 더욱 더 아련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왠지 그 장면은 마치 막 기억하려는 그 순간을 닮아보인다.  우리가 뭔가를 떠올리려 할 때 점점 머리 속 어둠이 밖으로 물러나면서 기억하는 그 장면이 처음엔 작게 시작해서 서서히 다가오듯이 그렇게 말이다. 바로 그와 똑같은 속도로 카메라는 노래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그 곳으로 다가간다. 기억 속에 떠오른 장면이 머리 속에 가득찰 때와 같은 똑같은 속도로... 그래서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의 이 장면이 바로 우리가 하는 기억의 과정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다는 것이... 

 

  배창호의 카메라가 아버지를 담을 경우 드러내는 방식은 이와 같다. 그는 언제나 전경 또는 배경에서 아버지가 서서히 드러나도록 한다. 마치 우리가 아버지란 존재를 기억할 때와 같이. 현재에서 과거의 한 때를 기억하는 것을 특히 회상이라 한다. 회상은 언제나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의 그 때를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암기와도 같은 단순한 기억과는 다르다. 그래서 회상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때로는 그 신념에 바탕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아버지를 회상함은 영화속에서 경험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겠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배창호는 어쩌면 그 장면을 찍으면서 정말 아버지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영화속 형식은 그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개인적 회상과 그대로 닮아있을 지 모른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은 표면에 전개되는 내용과는 다르게 형식에서 전혀 다른 맥락을 드러낸다. 그건 배창호의 카메라가 '회상'적 시선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바로 그 '회상'으로서의 측면이 관객에게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는 화면 톤을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조율하며, 회상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 시간의 지속에 대한 경험임을 비추어 볼 때 장면 마저 분할하지 않고 가급적 롱테이크로서 잡아내는 것이다. 하면 이제 우리는 그가 왜 '회상'적 방식을 영화 표현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택했느냐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건 왜 하필이면 그 '회상'적 시선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는가 하는 질문과 닿아있다. 여기서 우리가 아무래도 고려해야 할 것은 그 시대적 상황이다. 예술가들 역시 국그릇 속의 건더기와도 같아서 아무리 예술적 자의식으로 홀로 독야청청하려 해도 자신을 둘러싼 국물에 젖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대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시대가 엄혹할 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그 암울한 시대에 영화를 하는 예술가들은 어떻게 시대를 헤쳐 나아가는가? 아마도 배창호와 관련해 물어야 할 본질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 될 것이다. 그가 '회상적' 방법을 쓴 이유가 - 그토록 공을 들인 것을 보자면 - 하나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념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스스로 다졌을 그 신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신념은 무엇인가? 같은 시기 나름의 소신을 갖고 역시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저항적 신념을 나타내었던 이장호 감독과 비교하면 배창호의 시대를 헤쳐가는 자맥질의 원형이 좀 더 잘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4. 이장호와 배창호... 

 

  이장호와 배창호 모두 형식적은 측면을 중시했고 그것을 통해 시대의 어둠을 헤쳐가려 했지만 그러나 형식으로 드러나는 둘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이장호는 영화 '바보선언'으로 대표되듯이 아방가르드 형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 아방가르드는 과잉이고 파괴에 맞춰져 있다. 영화에서 감독 자신은 진짜 영화를 만들 수 없음에 자살하고 음악은 오로지 적을 파괴하는 것만이 목적인 슈팅 게임의 사운드를 카피해 쓰고 있다. 그는 아방가르드를 취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지금의 한국 자본주의적 현실 자체를 부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계속 이어진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방가르드는 원래 모더니즘적이지만 그의 아방가르드는 리얼리즘이 된다. 

  반면 배창호는 기존의 영화 문법을 크게 비틀지 않는다. 장르적 관습도 여전히 따른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내용과 형식을 분리시킨다. 내용은 기존의 사회가 원하는 것을 충실히 복제하지만 형식은 그러한 복제된 진실에 대해 여전히 의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형식에 투영되어진 '회상'적 시선은 사회에 오염되지 않는 개인적 신념을 늘 자각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보여지는 내용과 형식으로 드러나는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배창호의 영화들은 오히려 모더니즘적이 된다. 그러니까 이장호는 기존의 것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고수하는 한 편, 배창호는 그 회상적 시선에 깔린 - 그의 아버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로 부터 나온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기억함으로서  스스로 하나의 섬이 되어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가치를 지키려 한다. 파괴를 지향하는 이장호에겐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중요하지 않으므로 기꺼이 연대를 위해 내미는 손이 되지만 배창호는 스스로 관찰자의 입장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마치 최인호의 '술꾼'이 그렇듯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는 척 하는 모습의 아래에서 그 모든 것을 데카르트적 회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바로 이러한 배창호의 자세가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1인칭 시점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유이다. 그 장면은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처음 황신혜를 만날 때이고 나머지는 황신혜가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할 것을 알았을 때이다. 그것은 곧 개인이 희망과 절망을 느끼는 순간과도 같은데 그 때 처음 부분에서 배창호는 안경알 속에 그녀를 담음으로써 선명해진 세상을 부각하지만 두번째 부분에서는 모든 세계가 전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흐릿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1차적 시점의 형상화에 있어서의 차이는 줄거리에 따른 외부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바로 배창호 작가 개인의 신념이 짙게 투영된 결과다. 이른바 '까이에 뒤 시네마'가 말했던 카메라 만년필 효과인 것이다. 배창호 개인은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순수한 영역이 사회 어딘가에 있을 것을 믿는다. 주인공 자신의 순정이 통했다고, 그렇게 역시 순수가 있었다고 생각할 때 세계는 또렷해진다. 하지만 여주인공이 최종적으로 자본을 선택할 때 그의 순수에 대한 믿음은 좌절되고 세상은 그 빛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영상은 정확히 그 형식에서 배창호 개인이 믿는 가치를 반영한다. 이러한 이장호와 배창호의 차이는 공교롭게도 두 감독의 대표작 모두에 출연한 '최불암'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즉, 이장호의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아버지의 기표로 존재했던 최불암은 마지막에 살해당하지만 배창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는 나의 신념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보호막이 되어 주는 것이다. 

 

 5. 덧붙여...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기쁜 우리 젊은 날'을 통해 다시금 암울한 80년대를 헤쳐갔던 영화 감독들의 자의식을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오늘자 경향신문 때문이었다. 오늘 경향신문의 1면은 영화 '도가니'로 인해 새삼 깨닫게 된 영화의 저력에 대해 할애되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어느 정도 현실적 변화를 일으킬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이고 개인적으로는 한국 영화의 감독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지금 역시도 80년대와 다를 바 없는 어둠의 시절인데도, 내 일천한 한국 영화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 만큼이나 한국 감독들이 동시대에 대해 직접적 발언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튼 다시금 상기된 영화의 저력과 그동안에 쌓여 왔던 내 불만이 같은 암울한 시기의 80년대를 한국의 영화 감독들은 어떻게 견뎌갔던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에 얼마전에 본 '기쁜 우리 젊은 날'이 그 촉매제가 되어주었다. 저번주에는 곽지균의 91년작 '젊은 날의 초상'을 방영하던데 앞으로 계속 8,90년대의 영화를 방영할 모양이다. 한 번 차분히 영화를 통해 드러내는 감독들의 견딤의 자세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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