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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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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이 답을 줄 필요는 없다. 그저 지금까지와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면 된다. 그것이 설령 반딧불 같은 것이라고 해도. 내 생각, 내가 보고 느끼는 세계에 객관성이 스며들 수 있는 간극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괜찮은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래서 가즈오 이시구로를 좋아한다. 그는 밀착된 것에 주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밀착은 단일하고 견고한 세계다. 그 안에 있으면 이것이 전부구나 여길만한 세계.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신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이러한 '밀착'을 집어넣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슨이 일하던 저택, '나를 보내지마'에서의 '헤일셤' 그리고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의 '공동조계'. 외부의 도움이 필요없는 자족적 세계. 그리하여 격리가 얼마든지 가능한 그런 세계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얼굴을 바꿔가며 등장한다.

 그런데 문득 주름이 생겨난다. 계기는 저마다 다르다. '남아있는 나날'에선 처음으로 하게 된 여행, '나를 보내지 마'는 문득 들게 된 자신의 원본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갑자기 가지게 된 상실이다. 하지만 데려가는 곳은 같다. 주름이 허물어버린 폐허 위에서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남아있는 나날'처럼 자신이 헌신했던 세계가 실은 죄악으로 점철된 곳이었음을 깨닫는 수도 있고, '나를 보내지마'처럼 자신이 의심했던 그 곳이 정말은 유일한 구원처였음을 확인하게 되기도 하며, '우리가 고아였을 때'처럼 그 세계에서 누리던 내 편익이 진실은 무엇 덕택이었나를 보게되기도 한다. 그것이 주름의 역할이다. 내가 전혀 서보지 못했던 저 바깥으로 데려가는 것. 그래서 자신이 있던 세계의 외곽을 보도록 하는 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그런 꼬드김이며 어린 시절 같이 놀자고 밖으로 불러내는 친구의 목소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파묻힌 거인'이 나왔다.
 이시구로의 일곱번째 장편이다. 발간은 2015년. 바로 전작인 '나를 보내지마'가 2005년에 나왔으니 무려 10년만에 나온 장편이다. 시쳇말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시구로의 소설은 어떨까?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과 많이 달라졌을까? 거기에 대답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이왕이면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읽고 이 작품, '파묻힌 거인'을 읽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두 작품 모두를 읽어봐서 하는 말인데 연속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먼저 주인공이다. '파묻힌 거인'은 한 노부부가 기억 저편에 아스라히 남아있는 아들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그들은 아들과 왜 헤어졌는지 모른다. 존재하는 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저 있으리라는 막연한 감만 믿고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도 그랬다. 그는 어렸을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부모를 잃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는 내내 자신의 삶이 뭔가 부족하다고 여긴다. 탐정이 된 근본적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의 모든 삶은 그 이유를 아는 데 있으며 결국 존재가 불확실한 부모를 찾아 고향으로 떠난다. 이렇게나 비슷하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선 아들이 부모를 찾고, '파묻힌 거인'은 부모가 아들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외곽을 확인하게 되는 세계도 유사하다. 그 세계란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선 '공동조계'요, '파묻힌 거인'에선 영국이다. '파묻힌 거인'의 시대적 배경은 아서 왕 사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때이다. 란셀롯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서 왕 전설의 주역 중 하나였던 가웨인 경이 소설에 직접 등장하고 있다. 이시구로는 가웨인 경을 묘사하는 데 있어 영국식이 아니라 프랑스식을 따르고 있는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자꾸만 존 부어맨 감독이 만든 '엑스칼리버'에 나왔던 가웨인 경이 생각나 재미있었다. 그 영화에서 '테이큰'으로 유명해진 리암 니슨이 연기했던 가웨인 경이 소설 속 가웨인 경과 유사하다. 나는 리암 니슨을 연상하며 읽었다. 그 가웨인 경은 리암 니슨이 영화계에 처음 데뷔하여 맡은 역이기도 하다.

 어쨌든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공동조계'와 '파묻힌 거인'의 영국은 비슷한 점이 있다. 모두 내부의 분열을 가까스로 통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조계는 무시를 통해, 영국은 망각을 통해 간신히 봉합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모두 외부의 압력으로 위기에 봉착한다. 공동조계는 상하이에 닥쳐오는 전쟁이, 영국은 아서 왕때 당한 원한을 풀려 하는 바다 건너 색슨 족이 위기로 몰고 간다. 이런 점에서 영국은 공동조계의 확장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결정적인 것은 '파묻힌 거인'의 존재다. 놀랍게도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도 파묻힌 거인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진짜 거인은 아니고 소설 '파묻힌 거인'에서 거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통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주인공의 어머니다. 여기서 거인은 아마도 아틀라스를 의미하는 것 같다. 아틀라스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그리스 신화 속 신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어머니가 정녕 그러하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 아들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아들인 주인공이 반드시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이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 모두가 어머니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진실은 혜택이었고 그래서 부채였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게 된 자에게 세계란 더이상 전적인 누림도, 전적인 부정도 불가능한 곳일 것이다. 올바른 마음을 가진 자라면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그랬듯이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이 역시 내가 또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채무라는 생각에 책임을 자각할 것이다. 또한 부족한 부분을 주시하기 보다는 눈을 바깥으로 돌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 더 많이 되돌려 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부족이 낳았던 나를 위한 여정은 이제 공존을 향한 남을 위한 여정이 된다. 이것이 '파묻힌 거인'이 가진 진실의 힘이었다. 이는 또한, 보다 외연을 확장하자면, 우리 모두가 역사 속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현재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과거 혹은 지금 누군가의 희생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얼른 떠오르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조금은 색다른 구원관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원관이기도 하다. 구약에서 세계의 구원은, 아니 보다 정확한 의미로는 세계의 존립이라 해야 할 텐데 그것은 거창한 존재의 능력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소돔과 고모라'이다. 당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였던 소돔과 고모라. 신의 심판에서 그 도시를 구하는 데 필요했던 것은 단 한 명의 의인이었다. 그 하나가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한 것이다. 이는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정확한 출처가 당장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거기서도 이스라엘이 거대한 제국의 위협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살고 있는 70명 때문이라는 게 하나님의 직접 음성으로 들려온다. 구약에서 세계의 지속은 그런 자들에게서 이뤄진다. 권력과 재력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선의와 그에 따르는 포기와 희생으로 이 거대한 세계가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 어머니는 그런 존재다. 

 소설 '파묻힌 거인'이 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어머니를 다시금 마주하게 한다.

 당신에게 나쁜 짓이 저질러졌다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멋진 기념비를 갖게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악한 나무 십자가나 색칠한 바위만 달랑 있는 경우도 있고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 있어야 햐는 이들도 있다. 어느 경우든 당신은 아주 오래전에 일어났던 한 과정의 일부다. 그렇기 때문에 거인의 무덤은 죄 없는 어린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육당했던 오래전 어떤 비극의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그것이 아니라면 이 무덤이 왜 여기 서 있는지 이유가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 하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무거운 돌을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놓은 것은 왜일까? (p. 397)

 무덤은 어머니다. 그 아래 놓여있는 희생된 수많은 넋들. 그들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오늘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장소. 여기가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독자를 데려가고자 하는 섬이다. 그들을 보는 것. 그들을 기억하는 것.

 커다란 비극이 터졌을 때, 늘 나오는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화합의 미명 아래 망각을 강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분열이 온다고 한들, 다시는 이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3. 11이 터졌을 때, 일본 정부는 국민들에게 망각을 강요했다. 국가에게 닥친 난관을 빨리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세월호의 비극이 일어났을 때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망각할 것을 강요하고 또 강요했다. 이런 걸 우리는 너무나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잘 안다. 이런 망각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화합을 위한 것이라 해도 독약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망각을 바탕으로 한 화합은 진정한 의미의 화합이 아니며, 그런 화합이란 그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방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희생자들을 그냥 잘라내고 싶은 것이다. 그대로 무시해버리고선 눈 앞의 소나기를 급히 피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엔 오로지 자기 보신의 욕망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망각은 희생자들을 또 살해하는 길이기에. 기억 자체가 저항이며 망각이 버린 넋들을 다시금 되찾아 오는 일이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  '파묻힌 거인'의 무덤이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어머니와 이어진다는 것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바로 그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본다.

  비극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는 것. 그들을 늘 뇌리의 아랫목에 거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며 우리의 구원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다고 '파묻힌 거인'은 말하는 것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다른 길을 택할 것이기에...
 적어도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길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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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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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의 시대다. 작년엔 세월호, 올해는 메르스. 반복된 상실. 늘어나는 상처. 도래하지 않는 치유. 웃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애도와 우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떠나간 자들을 애도하면 할수록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는 우울하기만 하다. 희망은 누구의 주머니에 들어있기에 이리도 보이지 않는 걸까? 모든 것이 겨울의 해변처럼 공허하다. TV를 보고 싶지도 않고 음악을 듣고 싶지도 않다. 한겨울의 숲처럼 침묵만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난 책만 벗하였다. 그리고 하루키.

 그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었다. 단편집이다. 비틀즈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드라이브 마이카'와 '예스터데이'를 비롯하여 표제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까지, 무지개도 아닌 것이 7개의 단편을 한 곳에 모아두고 있었다. 제목 그대로 이 모든 단편 속의 남자들에겐 여자가 없다. 과거에 없었거나 현재에 없는 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한 마디로 상실의 거주자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자'라는 대상이 아니다. '없다'는 상황이다. 수면 위로 던져진 돌처럼 문득 도래한 상실. 그것이 그리는 내면의 파문. '불모의 행성'과도 같은 상실한 자들의 그 모든 '황폐한 광경'을 궤도 위성이 사진을 찍듯 멀리서 조용히 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여기 집합한 단편들에게 주어진 임무다. 

 그러니 이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실로 가득한 거대한 수영장 밑바닥에서 그 무게에 짓눌려 있는 나와 같은 자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그러자 갑자기 소설은 눈감고 귀막고 그저 내부의 호흡만 느끼고 있을뿐인 내게로 하루키가 내려와 대화나 하자면서 어깨를 툭치는 것으로 변했고 그가 가후쿠와 기타루, 도카이와 하바라, 기노와 잠자 그리고 엠에 대해 마치 능숙한 바텐더가 컵을 닦듯이 조금은 무심한 어조로 들려주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들의 동료라는 것을.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거주지에 세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상실로 인한 무력감과 죄책감을 임대료로 치뤄 가면서.

 그들의 실수는 나의 실수였다. 그들의 오해는 나의 오해였다. 그들의 잘못은 나의 잘못이었다. 가후쿠와 기타루처럼 나는 나를 너무 특별하다 생각했다. 그들이 정말 잃었던 것은 아내와 아키라는 대상이 아니었다. 실은 아내와 아키의 배신으로 이제 더 이상 특별하게 존재할 수 없게 된 자기 자신이었다. 더 이상 그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정말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제 조금 깨닫는다. 왜 하루키가 이런 언질을 하필이면 연애를 통해 보여주는 지를 말이다. 사랑이야말로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감정이 아니던가. 사랑으로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는 '보편'에서 유일한 나라는 '특수'로 전이한다. 나는 태양과 같은 항성이 된다. 어제까지는 세상에 끌려다니기만 했던 나였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사랑으로 인해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게 된다. 누구나 빛이 되려하지 그늘이 되려 하지는 않는 법. 언제까지나 중심에 있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지속의 열망은 중독을 낳는다. 그것을 우리는 집착이라 부른다. 도카이와 하바라가 그랬듯이. 그러므로 상실의 고통은 상대가 아니라 실은 나와의 결별에서 온다. 더이상 그런 나가 될 수 없기에 나를 사랑한만큼 고통받는 것이다. 결별의 아픔이란 갑작스런 금단에 따르는 후유증에 다를 바 없다. 하바라는 고백한다.

 "그건 병 비슷한 게 아니라 분명 진짜 병이었어. 병 때문에 한참동안 열에 들떠 착란상태였던 거지."(p. 211)

 그러니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가 분명해진다. 기노처럼 나를 떠나는 것이다. 더이상 웅크리지 말고 일어나 나를 내던지듯 위로 활짝 팔을 펴 드는 것이다. 그가 이불 속에서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가장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정작 그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장본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 웅크림은 나의 집착이 구현된 체위였다. 하지만 집착이 가져온 것은 더 큰 공포 뿐이었다. 그 때서야 기노는 비로소 타자를 생각했다. 나 아닌 다른 것들을. 나를 내어주고 세상의 새를, 회색 암고양이를, 가게 앞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늙은 버드나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짜 사랑이란 내가 아니라 타인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인 것을. 더불어 나도 각성한다. 내가 가진 상실의 아픔은 떠나버린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연민에 불과하다는 것과 정말 그들의 상실을 아파한다면 나를 내려놓고서 이전보다 더 강하게 세상을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더이상의 말이 필요할까? 
 하루키는 말한다. 이제 네 안의 무게를 비워봐. 잠자와 엠이 그랬듯이. 너를 비우면 비울수록 상실은 또 하나의 문이 되어줄 거야. 그리고 넌 더 넓은 곳으로 갈 수 있겠지. 이제 곧 저 높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될 너처럼. 그런걸까? 그럴 지도 모른다. 엠이 말한 스페이스가 기억난다. 그녀는 음악의 취향은 스페이스의 문제라고 했다.

 "이런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가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공간에 있는 기분이 들거든. 그곳은 정말로 넓고, 칸막이 같은 것도 없어. 벽도 없고 천장도 없어. (...) 단지 그 곳에 있기만 하면 돼. 그냥 눈을 감고 스트링스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몸을 맡기면 돼.(p. 334)

 나는 끄덕인다.
 지금 내가 가진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 얼룩' 같은 상실의 아픔을 희석시킬 수 있는 건 오로지 더 큰 세상에 나를 내맡기는 것 밖에는 없다고. 뒤로 걷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눈과 귀를 막는 대신 더 많이 보고 들어야 한다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천천히 펴듯 마음에 새겨 나간다. 그리고 떠오를 생각을 한다. 나는 하루키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내겐 당신이 '드라이브 마이카'의 미사키인 셈이로군요."
 물론 과묵한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가후쿠처럼 나도 그 침묵에 감사했다.
 바닥이 조용히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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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11-02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감동적인 리뷰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여자없는 남자들> 다시 읽어보고싶어지네요.

ICE-9 2015-12-08 13:43   좋아요 1 | URL
아앗! 고양이라디오님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그동안 제 눈이 어딜 향해 있었던 걸까요? 이 댓글을 이제서야 보다니...
이런 기분 좋음을 안고 잠시 좀 하늘을 날다 오겠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15-12-08 13:48   좋아요 0 | URL
여행떠나시나요ㅎ??
하늘 기분좋게 날고오세요ㅎ

2015-11-21 0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8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5-12-11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맘에 들었어요, 오랜만에 하루키의 소설을 다시 보게 해준 시발점이었죠.
이후 마음 편하게 하루키의 소설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ㅋㅋ

ICE-9 2015-12-15 02:27   좋아요 0 | URL
역시 마녀고양이님과 저는 통하는 게 있다니까요^^
하루키의 최근 소설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참으로 힘이 되는 댓글입니다^^
 
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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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프터 다크'를 읽다가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호크'란 그림이 생각났다. 

 시간적 배경이 그림과 비슷하고 공간 역시도 그림처럼 식당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 속의 식당은 사람이 얼마없지만 소설 속 식당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는 정도랄까. '나이트호크'는 1942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진주만 이후 미국이 한참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을 무렵에 그려졌다. 그림에서 등을 보이고 앉은 남자는 홀로 있는 데다 대화에서마저 소외되어 더욱 외로워 보이는데 호퍼가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느낌은 바로 그 남자에게 있는 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 속의 식당은 전면 유리로 외부에 한없이 개방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들어가는 입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약간 비튼 각도로 그려져 보고 있는 관객에게 더욱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평행하게 그려져 있는 내부의 바와 외부의 식당 벽은 겹겹인데다 높낮이마저 중심으로 갈수록 높아서 그 자체로 관객에게 저 외로운 남자만큼이나 중심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어쩐지 가장 시선을 많이 받고 있는 붉은 드레스의 여인이 마치 우리를 보며 '당신은 여기 절대로 들어올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여인을 '애프터 다크'의 에리라 볼 수 있을 듯 하다. '애프터 다크'엔 두 여자가 나온다. 자매로 언니가 에리고 동생이 마리다. 마리는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남자에 가깝다. 에리는 빼어난 외모로 어릴 때부터 어디를 가든 '백설공주'처럼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마리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에리의 그늘에 가려 부모의 관심은 물론 어디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지 못했다. 그림과 똑같이 에리는 중심에 있고 마리는 변방에 있다. 에리는 한낮의 사람이고 마리는 자정의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밤마다 떠도는 것일까? 그녀는 밤이 아무리 늦어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안한다. 소설의 시작에서 마리는 저 그림과 비슷한 '데니스'란 식당 창가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런 그녀는 남자와 똑같이 세상에서 뚝 떨어진 섬처럼 보인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에리 때문이다. 에리가 벌써 두 달째 잠만 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몸이 아프다는 등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자의로 에리는 두 달 동안 내내 '잠자는 미녀' 상태를 계속 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그 돌변이 마리를 두렵게 만든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안정적으로 보이던 에리가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돌연 닥쳐온 어둠에 삼켜진 것만 같은 언니. 다카하시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그것은 거대한 문어에게 갑작스레 끌려가 버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았던 언니마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하물며 언니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위태로운 자신은 얼마나 쉽게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방에서 잠자는 에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마리에게 너무나 가볍고 약한 자신의 존재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창가에 거한다는 것. 거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마리가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존재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까닭에 유리창이라는 보호막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 그녀는 단절, 혹은 확실한 경계를 원한다. 예상치 못한 어둠에 먹히지 않도록 자신을 두텁게 보호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어릴 때, 지진 때문에 엘리베이터에 에리와 단둘이 갇혔을 때, 자신을 보호하려 힘껏 안아주던 에리의 몸과 같은.


  어둠이 얼마 동안 계속됐는지는 기억 안 나. 아주 오랜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오래가 아니었을 지도 몰라. 그렇지만 오 분이건 이십 분이건 구체적인 길이는 문제가 아냐. 아무튼 그동안 에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내 날 끌어안고 있었어. 그것도 그냥 끌어아는 거랑 달라. 우리 둘의 몸이 녹아서 하나가 될 만큼 꽉 끌어안았던 거야. 에리는 잠시도 힘을 풀지 않았어. 잠깐이라도 떨어지면 이제 두 번 다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지 못할 것처럼.(P.226)


 하지만 소설은 마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녀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밤새 움직이게 만든다. 마리는 데니스에서 모텔 '알파빌'로, 이름모를 작은 바로, 스카이락 식당으로 계속 이동한다. 마리는 흐르고 나누고 섞인다. 마리는 에리를 회피하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녀에게 회피가 아니라 응시를, 침묵이 아니라 대화를, 도피가 아니라 관통을 요구한다. 소설의 그러한 요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단적으로 선언된다.


 "도망치지 못해. 넌 잊어버릴 지 몰라. 우리는 잊지 않아."(p.216)


 이 불길한 협박의 진의는 무엇일까? 그런데 이 말을 우리는 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도 들었다. 정확히는 '1Q84'에서다. 거기서 주인공 덴고의 아버지로도 보이는 NHK 수금원은 집에 없는 척 하고 있는 아오마메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봤자 끝끝내 도망칠 수 없어요. 반드시 누군가 찾아와서 이 문을 엽니다. 정말이에요.(1Q84, 3권. P. 199)


 이렇게 '애프터 다크'와 '1Q84'는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애프터 다크'의 인물들은 대부분 '1Q84'처럼 도망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알파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고오로기가 그렇고, 중국인 창부를 폭행한 시라카와도 그러하다. 아버지가 형무소에 가버리는 바람에 한 때 고아로 살았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늘 다시 고아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빠져 있는 다카하시도 그렇고 에리를 피하고 있는 마리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 소설은 분명히 전하는 것이다. 절대 달아날 수 없다고. '1Q84'와 똑같이.


 메세지가 이렇게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하루키가 전하고 싶은 진심이 아닐까 생각될만도 하다. 그리고 그 진심을 통해 하루키가 독자에게 촉발시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행위이다. 그것은 경계의 허뭄이고, 비유하자면 '나이트호크'에 그려진 소외된 남자에게 시선을 주고 참여를 유도하는 손을 내미는 것과 같다. 진심의 궁극은 여기에 있다. '애프터 다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리가 하는 것에. 그러니까 다카하시와 손을 잡고, 에리의 침대로 올라가 언니의 몸에 가느다란 팔을 둘러 언니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려 언니 가슴에 뺨을 대고 꼼짝하지 않는 것에 말이다. 바로 그 '함께', '참여'가 하루키가 '애프터 다크'를 관통한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리와 몽환적이면서 어딘가 불안한 밤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정작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달아나려는 마음 자체 있음을 본다. 감금과 악몽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산물이었다. 오로지 피하고 도망치려는 마음이 스스로 만든 감옥과 악몽이었던 것이다. 마리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이유없이 폭행당하는 '알파빌'은 그런 마음들이 만들어내는 장소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은데. 그러니까 너희 언니는 어딘지는 몰라도 또 다른 ‘알파빌’ 같은 곳에 있으면서 누군가한테 무의미한 폭력을 당하고 있어. 그래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눈에 안 보이는 피를 흘리고 있어.(P. 156)


 시라카와가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는 프로그래머다. 소설에서 그는 아침에 있을 화상 회의를 탈없이 할 수 있도록 밤새 작업하고 있다. 그의 일은 다른 이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것이지만 정작 그는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는다. 아내도 있지만 그는 철저히 혼자다. 마리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마리와 똑같이 그는 그 상황을 관통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의 피부와 같아져버린 가면을 쓰고서 그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한다. 타인들에게 펼쳐보이는 능수능란한 연기는 그만큼 그저 달아나고만 싶은 그의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는 전화 속 목소리 그대로 시라카와는 한계에 봉착한다. 중국인 소녀에게 한 이유없는 폭력이 그것이다. 심하게 폭력을 휘둘렀음에도 다른 건 하나도 기억에 안 남고 오직 욱신거리는 손의 통증으로 폭력만 기억난다는 점에서 그의 폭력이 실은 한없이 엷기만한 그의 존재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남자들이 자신의 미약한 존재감을 지워버리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우리는 왕왕 보지 않았던가. 이런 폭력은 차라리 항복에 가깝다. 이제 더 달아날 곳이 없다는 자백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1Q8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욱신거림은 거기서도 나온다. 바로 덴고가 회상하는 '멕베스'의 다음과 같은 대사다.


 엄지의 욱신거림이 알려주는구나,

 불길한 것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노크를 하거든 그게 누구이든, 자물쇠여, 열려라.(P. 152)


 문을 열라고 요구하는 것은 NHK 수금원이다. 그는 절대 도망칠 수 없고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애프터 다크'의 전화 속 목소리가 하는 말 그대로다. 그 요구는 응시와 대면 그리고 관통의 요구다. 시라카와의 통증은 더이상 피할 수 없다는, 이제 관통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다. 


 이것이 대화의 요청이라면 그것은 육신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것의 강조일까? 하루키는 '애프터 다크'에서 좀 색다른 형식을 취했다. 관객의 입장을 공공연히 내세운 것이다. '알파빌'이 인용되었으니까 하는 말인데 '알파빌'은 프랑스의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의 유명한 SF 영화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다. 장 뤽 고다르가 영화를 만들면서 취했던, 하루키 식으로 말하자면 고다르의 '애티튜드'다. 고다르는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영화가 실제가 아니라 환영에 지나지 않음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고다르의 특기라고 알려진 '점프컷'이었다. 레코드의 바늘이 튀는 것처럼 장면이 갑자기 튀어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그 이름은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환영임을 주지시켰다. 다름아닌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응용한 것이었다. '알파빌'도 거기에 속했다. 늘 해왔던 그대로 고다르는 이 영화에서도 영화 속 세계가 허구와 관념의 집적에 지나지 않음을 알렸다. 그것을 통해 고다르가 원했던 것은 행위였다. 관객의 눈이 수동적인 거울이 아니라 능동적인 카메라가 되는 것이었다. 보여주는 것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담도록 하는 것. 자신만의 사유가 동반된 그 적극적인 시선이 고다르가 원하는 것이었다.


 '애프터 다크'에서 하루키가 취한 형식도 근본엔 그런 마음이 있다. 하루키도 독자의 눈이 카메라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계속 독자들의 마음에 카메라를 상상시키는 문장을 던진다. 이런 식으로 고다르와 똑같이 소외효과를 주면서 독자를 작품에 대한 보다 능동적인 참여자로 만든다. 이 소설에 서려 있는 몽환과 불가해함도 마찬가지다. 몰입이 아니라 소외를 통하여 더 많이 보도록 하고, 듣도록 하며 생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소설은 온전히 힘을 다해 독자를 움직이도록 한다. '나이트호크'의 그림에서 당신이 중심에 있다면 경계에 있는 자들에게 손을 건네게 하고, 등을 보인 남자라면 스스로 일어나 거기로 걸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애프터 다크'는 우리들에게, 이미 찾아왔거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어둠'을 관통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결국 모든 것은 손이 닿지 않는, 깊은 갈라진 틈새 같은 곳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한밤중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그런 곳이 어딘가에 은밀히 암흑의 입구를 연다. 그 곳은 우리의 원리가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는 장소다. 언제 어디서 심연이 사람을 집어삼킬지, 언제 어디서 토해낼지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다.(P. 210)


 정말로 그렇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피하려고만 하고 달아나려고만 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심연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 놓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정말 변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바로 나인 것이다. 심연은 존재 자체로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의 증언이다. 필요한 것은 밀실로의 도피가 아니라 문을 열려는 손짓임을 알려주는.


 우리는 계속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 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애프터 다크'에 음악이 무수히 나오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소설에서 이름 모를 작은 바의 바텐더는 이렇게 말한다. 


 한밤중엔 한밤중의 시간의 흐름이 있단 말이지.(...) 그걸 거역해봤자 소용없어. (P. 78)


 그 흐름의 시간에 우리가 순종해야 할 유일한 명령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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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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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블랑쇼는 독서란 자신도 모르게 저자와의 깊은 투쟁으로 들어서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주저이기도 한 ‘문학의 공간’이란 책에서다. 무의식적으로는 몰라도 의식적으로는 아직까지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란 소설이다.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고 그로 인해 남녀공학이 금지되며 여자들의 사회 진출은 봉쇄되고 일부다처제마저 허용되는 등 체제가 극한의 가부장제로 변하는 것을 한 학자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이 소설은 곳곳에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내 가치관과 어긋나 전장을 만들어냈다.


 나는 곳곳에서 흠을 찾아내고 그의 논거를 허물어뜨릴 반격을 고심했다. ‘복종’의 독서는 한 마디로 치열한 공성전이었다. 나는 공성이고 우엘벡은 수성이었다. 그의 성은 그리 견고하다고 할 수 없었다. 제법 사실적인 묘사로 무장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생긴 빈틈도 많았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이슬람화에 있어 최대의 피해자라고 할 만한 여성의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커다란 흠결이었다. 남녀 공학이 폐지되고 여성에게 고등 교육은 허용되지 않으며 사회적 진출의 통로마저 압도적으로 차단될 뿐만 아니라 일부다처제까지 허용되는 데도 가장 독립적이라 알려진 프랑스 여성들은 봉기는 커녕 변변한 시위조차 안 했다. 다들 조용했고 그것을 시행한 이슬람 정부를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프랑스의 여성들이 모조리 뇌 개조라도 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읽을 때 받는 소설의 인상처럼 소설이 실제의 프랑스를 담으려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우엘벡은 태연하게 써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엔 독립된 여성들마저 지워져 있었다. 모든 여성들은 오로지 남성과 결부되어서만 존재했다. 가장 지식인이라 할만한 마리프랑수아즈조차 학자라기 보다는 아내의 면모를 더욱 드러냈고 미리암도, 알리사도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다. 남성과 대등한 여성은 없었다. 거기에 해당될 수도 있었던, 우익 쪽 대권 후보로 나온 여성마저도 결국엔 패배한다. 소설엔 트로이의 여성 예언자 카산드라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 역시 꽤나 의미심장하다. 카산드라는 태양의 신 아폴론의 유혹을 받는다.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잘 보이려고 예언의 능력까지 선물했으나 카산드라는 그를 거부한다. 남성성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냉대를 받은 것이다. 옹졸한 아폴론은 카산드라가 그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저주를 내린다. 카산드라는 많은 예언을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입은 있으나 남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없었다. 남성에 의해 목소리가 지워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여성에게 하고 있는 그대로다. 그래서 더욱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복종’은 사실 남성만의 판타지라고.


 물론 ‘복종’은 환상 소설이다. 가까운 미래이긴 하지만 분명 2022년의 프랑스라는 가상 사회를 그리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리는 시간 대가 아니라 다른 면에서 이 소설은 더욱 환상에 충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문학의 '환상성' 전문가인 로즈메리 잭슨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녀는 환상의 중요한 특징으로 우리에게 한없이 낯선 것, 즉 이질적인 것의 출현을 들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뤄지는, 현실 세상에선 가능할 리 없는 남성 욕망의 평화롭고도 완벽한 충족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일 테고 그런 의미에서 ‘복종’은 로즈메리 잭슨이 요구하는 환상의 요소를 충족하고 있다고 하겠다.


 낮 시간에 전혀 들리지 않던 소음이 모두가 잠든 밤엔 들을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은 현실의 이면에 억압된 것들을 깨운다. 대부분 현실의 문제점을 간직한 것으로써 그대로 두면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에 균열을 일으키기에 현실이 ‘비정상’ 혹은 ‘괴물’이란 이름으로 가둬둔 것들이다. 환상은 그런 것들을 해방시킨다. 하여 내 세계가 완벽하지 않으며 절대가 아니라 가능한 많은 세계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비정상’이나 ‘괴물’들은 사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고 인도하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길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복종’도 그렇다. 무모함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이 소설이 이슬람화된 프랑스를 그리는 것은 단순히 이슬라모포비아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 이슬람은 일종의 사유 실험으로써 프랑스에 있어서, 특히 남녀관계에 있어서라면 전적으로 타자이기에 정중히 초대된 것이라 봐야 한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토록 하여 현재 삶의 방식을 스스로 반추해 보도록 하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로써 말이다. 그대로 소설의 이슬람은 프랑수아로 하여금 현재 굳어진 유럽의 남녀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특히 프랑수아의 친구 브뤼노와 안리즈 부부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그 부부는 결국 이혼했는데 프랑수아는 여성의 사회 진출로 여성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라 이해한다. 프랑수아는 결혼이 위스망스의 시대처럼 성역할의 구분이 분명하고 여성이 어디까지나 가정 내에 머무를 때 온전히 지켜지리라 믿는데 그것은 그대로 이슬람의 생각과 같다. 이런 식으로 '복종'은 슬쩍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갖다 댄다. 로즈메리 잭슨이 말한 환상이 만든다는 여백과 같다. 진실이라 여겨 경계가 없던 그 곳에 문득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건너가 진실이라 여겼던 것을 새롭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즐겁지만은 않고 어떤 땐 울화와 분노가 치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내 기분에 상관없이 '복종'은 상대화를 향한 참조가 되려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미셸 우엘벡이 '복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미셀 푸코의 용어를 빌려와 말한다면 일종의 ‘계보학’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처음 시작했던 계보학의 핵심은 계보의 복기에 있다. 알고자 하는 대상의 시작과 현재에 이르는 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하여 진리처럼 굳어진 실체를 계보로 용해시켜 본래의 모습이 앙상한 허구의 구성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이 계보학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은 주로 참조를 통해 이뤄진다. 계보학은 무엇보다 우리의 기준에서 그 시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안으로 들어가 그 시대의 눈으로 당대를 보게 만들기에 역사들 사이에 위계가 없고 모두를 대등하게 대한다. 역사 이외의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중립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비교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저마다 지니고 있는 진실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환상이 현실의 대차대조표로 기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엔 두 개의 계보가 나온다. 하나는 주인공의 것으로, 그는 '거꾸로'로 유명한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데 위스망스는 여러 면에서 주인공과 비슷하다. 위스망스가 파리에서 한 평생을 보냈듯이 프랑수아도 거의 파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지금 느끼고 있는 무기력과 냉소는 위스망스가 '거꾸로'를 쓰던 시절의 모습과 판박이다. 무신론자였던 위스망스는 나중에 카톨릭으로 개종하는데 그와 똑같이 주인공도 무신론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이렇게 개인의 계보가 있고 다른 한 쪽엔 사회의 계보가 있다. 물론 프랑스 사회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이슬람 정권의 성립 과정과 그 이후의 모습은 거센 민중 봉기만 없을 뿐이지 프랑스 대혁명과 닮아 있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테러에다 당리당락에 따른 여러 세력의 이합집산의 모습까지도 비슷하다. 프랑스 대혁명 중에 귀족들이 받았던 충격은 프랑수아가 이슬람화 되어가는 프랑스를 보면서 받은 충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왕이 민초들에게 참수당했을 뿐만 아니라 남녀가 한 공간에서 같이 교육을 받고, 아내 외에 다른 여성을 더 이상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또한 귀족들에겐 적잖은 심적 타격이었을 것이다.


 비록 계보는 역사를 단층의 조합으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나 유사하게 보이는 이 두 단면은 비교를 가능케 하여 결정적으로 환상처럼 계보도 가지고 있는 힘 하나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바로 절대를 상대화 시키는 힘이다. 즉 아무리 영원한 상식처럼 굳어진 것이라 해도 그 역시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그 당시엔 충격을 동반하는 한없이 낯선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이슬람 세력 지도자 하메드 벤 아베스의 야심대로 전 유럽이 이슬람으로 통합되어 그대로 계속 이어져 갔다면 후일 누군가가 남녀평등과 일부일처제를 주장했을 때 분명 듣는 사람들의 입은 놀라서 벌어지게 될 것이다. '뭐, 저런 이상한 놈이 다 있느냐?'란 따가운 눈초리는 덤일테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환상과 계보는 설령 내 가치관이 아무리 진리처럼 굳어졌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동일한 틀로 찍어낸 기성품에 불과할 지 모른다는 의심을 낳고 나아가 우리에겐 오직 지금의 세상만 가능하다는 믿음을 깨뜨린다. 여기에 대해서 알랭 바디우가 유용한 말을 하나 했는데 지금 그것을 빌려오려 한다.

 

 ‘우리의 적은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라는 쌍을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체제라고 선전하고, 그 밖의 체제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함으로써 ‘이념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여기서 ‘이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바디우가 적으로 통칭하는, 환상의 존재와 계보로써의 역사를 부정하는 이들은 이념의 폐쇄를 의도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상상의 혈맥 중간을 권력으로 꽉 묶어서는 흐르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을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현실을 유일의 실체라 여기며 식물처럼 살아가도록 만든다. 이카루스가 되고 싶은 이들에겐 도약의 환희 보다는 추락의 공포를 더 주지시키고 오디세우스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겐 모험의 자유보다 방랑의 불안을 강조하여 구속 당한 곳에서의 안정이 주는 달콤함에 취하도록 유혹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에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다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일본 원전 사태 이후 가타라니 고진은 연구 보다 시위에 더 매진했다.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같이 행동할 것을 독려한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아티스트라 부르는 고진에게 누군가 시위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걷는 것입니다.'라고. 바디우의 이념은 다른 게 아니다. 그냥 걷는 것이다.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고 믿으며 설령 방향도 모르고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지조차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 것. 내게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있다는 것의 증명. 그것이 다름아닌 이념이며 환상과 계보가 궁극적으로 해방하고자 하는 힘인 것이다.


 이는 소설의 마지막과 얼마나 다른가. 이슬람 개종을 결심한 프랑수아가 대강당에서 '오직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라고 선언할 때 그는 정지해 있다. 프랑수아만이 아니다. 아침 조례 시간처럼 우리 대부분은 어떤 권위 혹은 권력에 복종할 때마다 제 자리에 식물처럼 가만히 서 있다. 물론 복종은 전적으로 강요가 아니고 우리의 욕망으로 동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멀미가 오고 피로를 느끼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위화감이 솟아오르게 된다. 환상과 계보의 힘은 그럴 때를 위해 필요하다. 완전히 전복시키는 혁명이 아니라 산발적 봉기를 위한 힘인 것이다. 그 힘은 그 때 걷도록 한다. 한 발 옮겨 나를 내리누르던 권위 혹은 권력을 옆으로 흘려 보내도록 만든다. 제목의 복종은 바로 그 순간의 내 선택에 대한 복종인 것이다. 프랑수아가 그토록 좋아하는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는 제목 그대로 현실의 모든 가치와 사상들을 뒤집어 보는 소설이다. 한없이 염세적이었던 주인공 데 제셍트는 그것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그것을 소설 '복종'은 환상과 계보를 통해 하고 있다. 표면이 아니라 심층에서 '복종'은 당신을 다시 걷도록 만드는 힘을 은밀히 비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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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민음사 모던 클래식 72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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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경험. 소설은 꼭 지문은 모조리 생략된 채,  대화만 나와 있는 희곡 같다. 스웨덴의 기대주라는 요나스 하센 케미리라는 작가의 소설이다. 제목은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우리 나라 명동과 같은 스톡홀롬의 드로트닝가탄에서 실제로 일어난 자살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아모르. 그는 아랍 청년이다. 소설은 온전히 그의 내면으로만 채워져 있다. 전화로 자살 폭탄 테러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불안에 떤다. 테러는 자기와 같은 아랍인의 소행이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그 테러범으로 오인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현재 규정의 폭력을 당하고 있다. 아랍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아모르가 가진 모든 개성은 말살당하고 오롯이 그들이 규정한 '아랍인'의 틀에 끼워 맞춰진 형태로만 존재하게 되는 폭력. 아랍인에 의한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아모르는 유주얼 서스펙트가 되어 그런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모르가 실제 그런 폭력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의심과 감시의 시선 그리고 경멸과 냉대가 그를 따라다니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오로지 그의 내부에서만 일어난다. 요나스 하센 케미리가 소설의 형식을 이렇게 만든 것도 바로 그래서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규정의 폭력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이제 그것이 너무도 깊이 내면화된 나머지 외부의 공격이 없어도 자신이 먼저 자기 검열부터 하게 되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자의 내면인 것이다.  마치 조건 반사와도 같은 그 과정을.


 그렇게 아모르는 분단된다. 온전한 자신과 규정당한 자신으로 폭력적으로 갈라진다. 그 규정에 저항하고자 그는 친구와 옛 애인과 전화를 하면서(실제로 하는 지는 알 수 없다. 내 생각엔 그 모든 대화가 실은 환상인 것 같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인한다. 친구 샤비를 헬륨이란 원소로 부른 그는 샤비가 그럼 너는 어떤 원소냐고 묻자 우눈트룸이라고 대답한다.


 그게 뭔데?

 합성 원소인데,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이야. 원자번호는 113이야. 원소 기호는 Uut (p. 22)


 그는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 확정이 아니라 임시의 존재. 규정의 그물을 바람처럼 빠져나갈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더이상 자기 검열로 인한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


 그가 스토킹했던 옛 여자 친구인 발레리아가 그에게 한 말 그대로 자신을 도시의 똑같은 일부로 만드는 규정의 마비 가스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넌 계속해서 집착하고 있는 거야. 나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그 사랑을, 이제는 바로 네가 끝내야만 해. 나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나를 고정관념으로 만들어 놨어. 그러는 바람에 상상 속에 만들어 놓은 나와 실제의 나는 결코 대응이 안 되는 거야, 알아듣겠어? (p. 86)


 알아듣겠어?

 발레리아가 아모르에게 하는 말은 사실 작가 케미리가 스웨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헤닝 만켈의 쿠르드 발란더 형사 시리즈가 잘 보여줬듯이, 또 스티그 라르손이 '밀레니엄 시리즈'가 여실히 드러냈듯이 스웨덴의 인종 차별은 뿌리가 깊고 심각한 상황이다. 이웃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한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한 이민 자녀 학살극이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만한 사건이 아닌 것이다. 케미리의 이 소설은 실제 일어난 테러로 인해 더욱 심각해질 인종 차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이렇게 규정의 폭력을 당하는 자의 내면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에 대한 모든 규정이 당하는 자들에겐 얼마나 묵직하고 둔중하게 영향을 끼치는 지 경험할 수 있도록.


 정체성의 분단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념의 혼동 그리고 해소할 길 없는 불안.

 이런 것들 모두가 신체의 멍과도 같은 정신의 상흔이 되는 것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런 규정의 폭력을 행하는 자들 또한 당하는 사람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내비친다.


 당하는 자들과 똑같이 가해자들 역시도 자신의 고유함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자신이 개체성을 보존할 수 없듯이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도시의 일부가 되기 위해 늘 똑같은 연기를 해야만 하므로 개체의 고유성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아모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 맹세해. 너희같이 비겁한 사람들은 모두 색깔을 고백하지 않고 스며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 너희를 심판하는 날이 올 거야, 기다려 봐. 너희를 박살내고 말 거야. 알아들었어?(p. 110)


 케미리는 인종 차별을 행하는 사람들 역시 처한 상황은 피해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분리 보다는 포용을, 증오 보다는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전화가 나타나는 이유이며 소설 전부가 대화로 이루어진 것의 까닭이다.


 분명 낯선 형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그런 생경함이 이 책을 끝까지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안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갈등을 낳는, 하여 본질이라고 불러도 좋을 차별에 대해서 포를 떠서 말린 오징어처럼 오롯이 드러나는 당하는 자의 심리를 통해 공감을 바탕으로 천천히 실타래를 풀듯 조금씩 우리의 사유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설령 이야기나 문장이 암호문 같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낚시 바늘처럼 꿰어 이끌어내었을 저의는 우리도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정황을 가리켜 나를 거기에 대입시키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 소설이 꼭 인종차별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계층, 서로 다른 성별,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세대 간에도 얼마든지 통용 가능하다. 그 모든 지점마다 규정의 폭력은 쉽게 자행될 수 있으므로.


 그런 곳마다 이 소설은 경고의 표지판을 세우려 한다. 타인을 향한 규정의 폭력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불과 136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지만 여운은 제법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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