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옥토버리스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7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반전은 스릴러가 재미있으려면 필요한 동력과도 같다.

 강한 인상은 자주 강한 반전으로부터 왔다. 때문에 스릴러는 저절로 하나의 한계 지점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역순의 불가능성’이다. 반전이 가능한 것은 언제나 두터운 베일로 가려진 미래의 예측 불가능성 덕분이었다. 하여 작품 시간의 순서는 미래에서 과거로 거꾸로 흘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가장 충격적인 반전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생각해 보라. 엘쿨 포와로가 이미 범인을 밝힌 상태에서 거꾸로 소설이 진행된다면 분명 그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의 충격을 절대 주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도서추리라는 것도 있다. 예전에 유명했던 추리 드라마 ‘형사 콜롬보’처럼 처음부터 범인과 범행을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다. 순서가 뒤바꼈다는 의미에서 ‘도서추리’라 부른다.


 그러나 이 장르의 주안점은 반전이 아니다. 이미 범인과 범행이 다 밝혀졌으므로 반전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장르가 더 주안점을 두는 것은 ‘서스펜스’다. 과연 범인이 잡힐까, 안 잡힐까? 독자는 범인에 감정 이입하여 그 과정을 긴장감 넘치게 경험할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도서추리는 단지 범인과 범행을 먼저 보여줄 뿐, 시간의 역순은 아니다. 소설 속 시간은 언제나 미래로 흐른다. 어쨌든 역순은 반전을 포기해야 가능하다.  현실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에 미래로의 타임 슬립이 불가능하지만 스릴러에서는 반전 때문에 과거로의 타임 슬립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예외없는 법칙은 없었던 것일까? 그걸 가능하게 한 작품이 나왔다. 바로 링컨 라임 시리즈로도 유명한 제프리 디버의 ‘옥토버리스트’다.



 이 책 전체가 제프리 디버의 매지션즈 샐랙트와 같으므로, 독자는 디버가 확고하게 지배하는 게임의 룰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감옥 이미지를 배경으로 찍어보았다. 표지의 영어 문장은 첫 시작이 되는 챕터 36의 마지막 부분을 가져왔다. 즉, 실제론 이 소설의 결말이다. 당신은 표지에서부터 이것을 읽고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결말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이렇게 역순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사진은 소설 속 챕터의 모습을 인용한 것.


반전 때문에 역순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옥토버 리스트’는 오히려 반전을 위해 역순을 취한다. 정면승부! 이건 보란듯이 확고한 역순의 불문율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니  흡사 창을 휘두르며 단신으로 조조의 백만 대군 속으로 뛰어드는 조자룡과도 같다.



데이빗 보위의 출세작인 '지기 스타더스트'는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는데 사진은 그 ost의 안쪽 면을 찍은 것. 커버의 보위의 사진이 불에 타들어가는 것을 거꾸로 배열했다. 뒤쪽 커버엔 완전히 다 타버린 사진이 찍혀있다. 형식이 정확히 '옥토버 리스트'와 똑같은 지라 생각나서 같이 찍어 본 것. (앗, 몰랐는데, 저 아래의 것은 냥이의 발...! 언제 들이밀었단 말이냐!^ ^;)


사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위에 인용한 챕터의 시작 페이지를 넘기면 이렇게 어김없이 사진 한 장이 등장한다. 챕터 내용 중의 한 장면을 찍은 것인데 제프리 디버가 직접 찍었다. 그냥 흥미를 돋구기 위해 넣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매지션즈 셀렉트!


 그럼, 결말은? 과연 소설은 결말에서 시작한다. ‘뭐야? 그럼, 시시하겠는 걸!’ 하지만 막상 읽으면 ‘정말 이게 결말이란 말이야?’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무언가 중간에서 흐지부지 끝난 느낌이 강하다. 마지막에 나올 시작의 반전을 위해 뭔가를 감춘 것이 분명하다. 역시 반전의 백만 대군이 가진 힘은 강했던 것일까? 조자룡이 된 제프리 디버는 그래도 한쪽 팔은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역순 보다도, 마지막의 반전 보다도 더 놀라운 반전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우리가 보았던 그리고 흐지부지하다고 생각했던 시작이 확실한 결말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걸 아주 마지막에 가서야 한 문장으로 알게 된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깜짝 영상이 나와서 진짜 결말을 보여주는 영화와 같다. 그리고 깨닫는다. 두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도 몰랐다는 것을.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진정한 체크메이트다!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가지고 뒷 페이지를 넘기게 하려면 종결을 감출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서야 완벽한 역순이라고도 할 수 없다. 체스의 체크에 불과하다. 진정한 역순, 외통수인 체크메이로 만들려면 시작은 어디까지나 진짜 결말이어야한다. 진짜 결말을 스포일러하면서도 뒷 페이지를 아니 넘길 수 없게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 이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제프리 디버는 해 낸 것이다. 그것도 성공적으로!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말고 읽어라! 그래야 진짜 결말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제프리 디버는 책 자체를 하나의 퍼즐로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선 책 자체가 매지션즈 셀렉트다. 이 소설은 진짜 독자와의 게임인데 제프리 디버는 게임을 확고하게 지배하면서 거기로 뛰어든 독자를 가지고 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진짜 즐기는 방법은 되도록 아무 것도 모르고 게 좋다. 그래서 이야기의 소개는 과감히 생략하기로 한다. 세세한 분석을 할 수 없는 것도 나로서는 실로 유감이다. 아무튼 읽는 동안은 꼼꼼히 읽어야 한다. 책의 모든 것이 단서다. 과정의 재미는 그 디테일의 역순에서 나온다. 


 단언컨대, ‘옥토버 리스트’는 가장 인상적인 스릴러 중 한 편이 될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5-02-23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이거 큰일이네요
제가 링컨 라임 시리즈를 하나씩 사모으다가 이제 슬슬 질려서 홀랑 팔아치우려고 새해 결심을 했는데.. 오늘 헤르메스님의 유혹을 마주치는군요

아아.... 가장 인상적인 스릴러라니, 과감하게 결말부터 시작이라니 ㅠ

헤르메스님 설 잘 지내셨죠? ^^

ICE-9 2015-02-23 01:02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냥이님, 어느 틈에 오셨다 가셨나요? 정말 반갑습니다^ ^ 마녀고양이님은 설날 잘 보내셨나요? 저는 연휴 후유증이 오래 갈 것 같은 기분이네요, 하하^ ^; 솔직히 디버의 경우, 저는 본류인 링컨 라임보다 이런 스탠드 얼론이 더 재밌더군요. 예전에 `엣지`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 작가 게임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옥토버 리스트`는 그런 성향이 한껏 드러난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

마녀고양이 2015-02-27 17:43   좋아요 0 | URL
실은 최근에 `엣지`를 읽었는데
책장이 너무 안 넘어가서 고생을 좀 했어요. 아무래도 제프리 디버의 작품은 잠시 쉬었다 읽어야 할까봐요.
그러니 너무 유혹하지 마셔요.... 아하하.

yamoo 2015-02-2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재밌을 거 같은 책이네요....요즘 스릴러나 추리소설 찾고 있었는데...제대로 걸린 느낌입니다..ㅎㅎ

내친김에 로버트 러들럼의 책처럼 재밌는 첩보소설 3권 정도 추천 부탁드립니당~

ICE-9 2015-02-27 00:01   좋아요 0 | URL
저는 꽤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인데 yamoo님 마음에도 드셨으면 좋겠네요^ ^
오, 스파이 소설이라고 하면 전 언제나 존 르 카레의 작품을 추천합니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데뷔작인데 이언 플레밍이 구축한 스파이 소설을 한 단계 진화시켰다고 보아도 무방한 작가입니다. 물론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도 추천이구요. 여기에 하나 더 플러스 한다면 박찬욱 감독도 최고의 스파이 소설로 꼽은 바 있는 로버트 리델의 `르윈터의 망명`을 추가하겠습니다.(번역의 질은 어느 정도 감안하셔야 할 겁니다만 ㅠ ㅠ) 같은 작가의 `레전드`도 정말 강추합니다.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어벤저`도 마음에 들어하실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재미도 정말 끝내주더군요.
참고로 예전에 로버트 러들럼의 `마타레즈 서클`이 나왔을 때 쓴 리뷰 하나를 링크 해 둘게요.
http://blog.aladin.co.kr/748481184/5266565
개인적으로 이언 플레밍, 존 르 카레, 로버트 러들럼을 비교해 본 것입니다.(그런데 너무 기네요. ㅠ ㅠ. 이 때는 왜 이렇게 길게만 썼는지 ㅠ ㅠ)

yamoo 2015-03-01 15:28   좋아요 0 | URL
추춘나라에서온스파이
팅커테일러솔저스파이
어벤저
마타레즈클럽

모두 본 것이에요...ㅜㅜ
로버트 리델의 <르윈터의 망명>과 <레전드>를 찾아 보겠어요! 이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텐더니스 밀리언셀러 클럽 85
로버트 코마이어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지나친 부드러움은 오히려 고통이 된다."


 소설은 그렇게 칼란 지브란의 말로 시작한다. 십대가 처한 세상의 어두운 현실을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로버트 코마이어의 '텐더니스'는 제목처럼 강박적으로 '부드러움'을 찾는 십대의 그 여자, 그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여자의 이름은 로리 크랜스텐.

 십대의 그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안정된 삶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떠돌이 인생. 엄마와 나의 삶은 그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일거리를 찾아 떠나거나, 아니면 어차피 깨지고 말 남자들의 약속을 쫓아다니는 것이다.'(p. 19)


 진짜 아버지가 일찍 죽어버린 뒤로 엄마가 둥지를 틀었던 남자들은 두 가지 중의 하나였다. 가정 폭력을 휘두르거나 로리에게 은밀한 욕망을 드러내거나. 그랬기에 로리의 삶은 늘 위태로웠고 때문에 로리의 '부드러움'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한 마디로 안정에 대한 희구에 다름 아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 안정을 가져다 줄 부드러움을 가지기 위해 집을 떠난다. 자신이 좋아하는 드롭이란 락커의 입술에 키스하기 위하여. 결국 그녀는 목적한 바를 이룬다. 그토록 집착했던 것을 이루었으나 커다란 공허함만 남는다.


 왜냐하면 로리에게 있어서 집착은 그 대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집착이라는 상태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상은 그저 집착을 더 가열차게 움직이게 할 증기기관차의 화로에 넣는 석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결정적으로 부드러움의 집착을 가져온 원초적인 만남이. 로리의 집착은 그 첫 순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집착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첫 부드러움을 주었던 대상을 향한. 살면서 느꼈던 유일한 부드러움과 타인의 자애에서 비롯된 안정감을 준 소년을 향한.


 집착은 그녀에게 러브 레터였다.


로리는 우연히 TV에서 남자를 본다. 로리는 놀란다. 바로 그 남자였기 때문이다. 부드러움의 집착을 낳게 한 장본인. 이제 로리는 그 남자에게 키스해야 한다고 집착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에릭.

 평범한 남자는 아니다. 그는 십대 나이에 부모를 살해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의 실체 전부는 아니다. 사실 그는 연쇄 살인범이다. 지금까지 다섯 명의 소녀를 살해했다. 그가 부모를 살해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연쇄 살인을 덮기 위해서. 그는 학대 받은 끝에 어쩔 수 없이 살해했다는 정황을 남겨 짧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다. 그가 노렸던 그대로 된 것이다. 그가 저질렀던 연쇄 살인에 그는 전혀 연루되지 않았고 세상은 동정의 시선마저 보냈다. 그는 키득거렸다. 그의 연기에 다들 속은 것이다. 아니, 한 사람은 속지 않았다. 프록터 경위. 그는 에릭이 감옥에 있는 3년 동안, 1년에 네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와서 에릭에게 말한다. '너는 괴물이야.'라고.


 에릭도 로리만큼이나 강박적으로 부드러움에 집착한다. 에릭의 살인은 그 집착의 결과다. 그는 어릴 때 고양이 목을 꺾을 때 부드러움을 느낀 뒤로 내내 그것을 얻으려 찾아 다닌다. 즉 그에게 부드러움이란 다름아닌 죽음이다. 아니나 다를까 생명있는 모든 것을 금이라는 무생물로 만들어버리는 마이더스의 손과도 같이 그는 부드러움을 찾아낼 때마다 족족 죽여버린다. 소멸. 대상인 존재가 제거되지 않고서는 에릭은 부드러움을 얻을 수 없다. 반면 로리는 대상인 존재는 온전히 보존된다. 그렇게 같은 집착이지만 결과는 다르다. 실은 만나지 말았어야 할 그 여자와 그 남자.


 하지만 잔혹한 운명은 그들을 만나게 한다. 결국 로리가 에릭을 찾아온 것이다. 처음 에릭은 로리를 몰라보았다. 그러다 기억해 내었다. 가장 처음으로 소녀를 살해했던 날 철로에서 만났던 어린 계집아이였다는 것을. 로리는 프록터 경위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첫 살인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것이다. 프록터 경위의 수사와 감시가 아직도 시퍼런 칼날처럼 자신을 향해 있는 상황에서 로리의 존재는 자신에게 지극히 위험하다. 결국 에릭은 그녀를 제거하기로 한다.


 그런데 '텐더니스'는 로맨스다. 로리가 에릭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로리는 그 사랑이 목숨을 건 사랑인지도 모르고 그저 한껏 드러내기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부드러움의 집착을 낳게 한 그 남자는 궁극의 부드러움을 가져다 줄 남자였던 것이다. 로리는 그것을 느낀다. 그가 그토록 찾던 절대적 안정을 줄 것이라고. 그 확신 때문이었을까?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에릭도 스스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취향도 아니고 찾고 있는 부드러움도 아닌데 에릭은 그녀를 쉽게 제거할 수 없다. 에릭은 그 이유를 정확히 몰랐지만 독자는 읽으면서 알 수 있다. 에릭이 로리를 쉽게 제거하지 못하는 까닭은 늘 괴물이었던 에릭은 로리를 처음 만났던 날의 그 잠깐 동안 유일하게 인간으로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렇다. 로리는 그가 오래도록 방치하고 있었던 '인간다움'의 환기였던 것이다. 그는 비록 무의식적이었지만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집착하던 부드러움의 정체가 진짜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아니라 '인간다움'임을. 모든 인간적인 감정들, 눈물과 자애로움인 것을.


 '텐더니스'는 그러한 이야기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사랑 이야기. 더구나 남자는 연쇄 살인범. 결말이 좋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이 과연 비관적인지는 모르겠다. 로버트 코마이어는 냉정한 현실론자다. 그는 로리의 바람인 절대적 안정이 결코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며 오직 죽음만이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삶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수면은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수면은 잠시도 제자리에 있을 수 없다. 어제의 안정이 오늘의 불안이 될 수도 있다. 시간따라 항상 끊임없이 움직이며 예측과 안정이 결코 허용되지 않는 수면은 오직 시간이 정지했을 때라야 절대적 평온을 얻을 수 있다. 프로이트도 그걸 잘 알았기 때문에 우리에겐 본질적으로 죽음 충동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 영겁에 걸친 정지의 시간으로 들어갈 때 마음에 과연 무엇을 담고 가느냐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타인의 따스한 자애로움을, 또 어떤 누군가는 비정한 지옥만을 담고 갈 수도 있다. 삶의 진짜 의미는 바로 거기서 결정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로리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로리는 그 순간 오직 자애로움의 기억만 안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코마이어가 그 때의 공간적 배경을 물 속으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물의 생명이 물에서 비롯되듯이 물은 죽음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생명과 부활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에릭은? 에릭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위해 단 한 번도 울 수 없던 그가 마지막엔 울게 되지 않았던가?


 그렇다. 결국 그 여자와 그 남자는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 하는 부드러움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어째서 로리는 에릭에게서, 에릭은 로리에게서야 가능했을까? 이유는 딱 한 가지인 것 같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무엇보다 지속이라는 시간의 차원을 갖는다. 그러고 보면 서로를 만나기 전에 로리와 에릭이 집착한 대상을 가졌을 때는 모두 순간 속에서 이루어졌다. 로리는 키스라는 짧은 입맞춤, 에릭은 즉각적인 살해. 집착하는 대상을 이루기 전까지 로리는 대상을 직접 만나볼 수 없었기에 자신에게만 골몰할 수밖에 없었고 에릭은 대상을 죽이기 위하여 어떻게 유혹할까 하는 생각만 했다. 단 한 번도 서로의 내면을 교류할 깊고도 진득한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다. 로리와 에릭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한다면 그건 사랑의 위대한 힘 때문이고 그 위대한 힘은 다름아닌 사랑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러한 관계 맺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이 책의 질문이기도 한 '부드러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도 알 수 있을 듯 하다. 그것은 서로를 만나기 전의 로리와 에릭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나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렇다. 오히려 그것은 내 안에 있다. 타인의 입장에서 그를 깊이 이해하려 나를 온전히 내어줄 때, 부드러움은 비로소 태어난다.


 부드러움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발현되는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같다면 2015-02-13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텐더니스... 깊이 이해하다...
부드러움은 획득되는 아니라 발현되는 것이다...
 
실크웜 1 코모란 스트라이크 시리즈 2
로버트 갤브레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앤 K 롤링이 창조한 하드보일드 탐정인 코모란 스트라이크가 여타의 다른 탐정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안일 것이다. 코모란은 지금까지 나온 하드보일드 탐정 중에 가장 불안한 탐정이다. 그는 아버지에겐 버려졌고 어머니에겐 사랑받지 못한 아들이며 다리는 하나 없는 데다 16년간 사랑했던 연인과는 기어이 헤어졌다. 사회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주로 불륜의 증거를 찾는 코모란은 그 이름조차 사람들은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의 삶이 어둡고 불안한 것은 이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코모란은 콘월 지방의 민담에 나오는 거인의 이름이다. 거기서 거인 코모란은 우리에겐 요술 콩나무로 유명한 잭의 함정에 빠져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최근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잭 더 자이언트 킬러’란 영화로 만든 적이 있다. 아무튼 코모란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결국 파멸한 샘인데 그 이름을 가진 코모란도 거인의 숙명을 그대로 따르는 듯 하다. 도대체 그가 원하는 것은 손에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실크웜’은 그 획득의 불가능성과 그로 인한 불안이 더욱 첨예화 되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연인은 곧 결혼한다고 하며 오래도록 자신의 탐정 파트너가 되어줬으면 하는 사무실의 유일한 동료인 로빈은 그 일을 아주 싫어하는 남자 친구와 곧 결혼한다고 한다. 전작인 쿠크스 콜링에서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여 일약 명성을 얻었으나 그의 입지는 오히려 줄어만 간다. 그러던 차에 사라진 작가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그 의뢰를 수락하게 된 것은 작가 부인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는데 쉽게 해결되리라 기대했던 의뢰는 뜻밗의 존재가 출현함으로써 복잡하게 꼬여버린다. 바로 그 작가가 썼다는 원고 ‘봄빅스 모리’다. 봄빅스 모리는 라틴어로 ‘누에’를 뜻한다. 즉 제목의 ‘실크웜’은 바로 이 원고를 말하는 것이다. 왜 이 원고가 문제인가 하면 사라진 작가 오언 퀸이 자기 주변 인물들의 치부를 비록 우화적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남김없이 까발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오언을 둘러싼 출판계에 던져진 폭탄이나 마찬가지. 그런 폭탄을 던져놓고 그는 사라진 것이다. 코모란은 그 원고를 중심으로 거기에 등장한 인물들을 하나하나 만나간다. 그러다 지금 오언과 앙숙인 마이클 팬코트라는 부커상을 수상한 명망있는 작가가 과거 친구였던 시기에 죽은 동료 작가에게서 공동으로 그의 집을 상속했음을 알아내고 그 집을 찾았다가 적어도 10일 전에 살해된 오언의 시체를 발견한다. 시체는 참으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몸통은 목에서 허리까지 갈라져’ 있었고 내장이 없어서 텅 비어 있었던 데다 ‘옷감과 살점이 온통 타들어가 있어서’ 혹시 그것을 익혀서 먹어치우진 않았을까 하는 끔찍한 느낌마저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봄빅스 모리'가 ‘실크웜’이라는 것을 코모란에게 알려준 로빈이 왜 다음과 같은 말까지 덧붙였는지 알수 있게 된다. 로빈은 이렇게 말했다.


 “네, 있잖아요. 전 항상 누에가 실을 자아내는 거미 같은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누에한테서 어떻게 실크를 얻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끓여요.” 로빈이 말했다. “산 채로 끓인다고요, 누에가 고치에서 뛰쳐나와서 고치를 망치지 않게요.”(P. 67)


 그러니까 ‘실크웜’은 오언의 시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오언의 시체는 산 채로 끓인 누에 그대로였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사체 훼손이 바로 ‘봄빅스 모리’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용의자는 한정된다. ‘봄빅스 모리’를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살인자는 자신의 치부를 까발렸다는 것에 앙심을 품은 자일지도 모른다. 코모란은 거기에 수사 중심을 두고 그런 자들을 차례로 만나간다. 그런데 만나는 이들마다 하나같이 제3의 공모자가 있음을 암시한다. 소설에 오언은 절대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범인은 그들 중 하나일까? 아니면 오래도록 실패한 작가로서 살아온 그가 최후의 성공을 위해 벌인 자작극인 것일까? 물론 롤링은 뻔한 결말을 마련해 놓지 않는다.


 아마도 롤링이 이 소설의 명목상 작가인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걸 몰랐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코모란 스트라이크에서 뇌리로 인상 깊게 들어오는 것은 그가 가진 불안의 심리 묘사이다.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 모두 여자라는 것도 흥미롭다. 헤어진 옛 연인과 이제 이별할 지도 모르는 여인. 이제까지 하드보일드에서 사립탐정은 여인과 관계 맺는 것을 금기시 했으므로 이 불안은 더욱 이채롭다. 물론 여기서 불안을 야기하는 여인들의 존재는 그리스 신화 속의 사이렌과 같아서 삶의 안정을 뒤흔드는 모든 것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코모란이 여인들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절단된 다리가 상처입는다든지 의족을 잃어버린다든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알고 보면 다리가 하나 없다는 것이야말로 코모란을 이제까지의 사립탐정과 가장 구별시켜주는 그만의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하드보일드 장르의 사립탐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추리가 아니라 탐문이며 하나의 단서까지도 놓치지 않는 끈질기고 집요한 탐문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리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립탐정의 본질은 다리라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거기에 하나 더 필요하다면 들을 수 있는 귀 정도일까? 그런데 코모란은 그런 다리 하나가 없다. 코모란은 사립탐정을 자신의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자신에게 본질과도 같은 다리 하나가 없으니 아무래도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 과연 로빈에 따르면 행여나 그가 의족 없이 나올 때는 다리에 대한 어떤 언급도 그의 화를 부른다고 한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로빈이 약혼자 매튜의 어머니 장례식에 가기 위해 막차를 타는 장면이다. 마침 그녀는 의족을 할 수 없어 운전을 못하게 된 코모란을 위해 대신 운전하느라 막차를 탈 수 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갑자기 내린 눈으로 차가 밀려 탈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대로 차를 역으로 몰고가면 가까스로 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의족을 하지 못한 코모란을 차에 둔 채 방치할 수밖에 없다. 로빈은 차마 그럴 수 없어 장례식 가는 것을 포기하려 하지만 코모란은 자기는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기차에 태워 보낸다. 결국 그는 ‘운전도 못하는 렌터카에 탄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덩그마니 홀로’ 남게 된다. 밤 11시의 세인트판크라스 역 앞에서…


 굳이 이 장면을 인용한 까닭은 이 장면이 코모란의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렌터카에 옴짝달싹 못한 채로 혼자 남게 된 것만큼이나 불안하며, 그런 상황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로빈이듯(공교롭게도 바로 그 전에 로빈은 내내 마음에 담아왔던 것, 즉 자신이 정말 바라는 것은 탐정으로서 코모란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라는 걸 고백한 바다.) 불안은 코모란이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림자처럼 파생되는 것이다. 그렇게 코모란에게 불안은 관계의 부산물인데 사실 이것은 이번 ‘실크웜’의 핵심이기도 하다. 롤링은 마치 이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코모란뿐만이 아니라 로빈을 통해서도 보여주는데 로빈은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약혼자 매튜와 더 심하게 갈등을 겪게 된다. 또한 작가 오언 퀸 사건도 이것과 관련이 깊다. 사실 오언 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러모로 코모란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언 퀸의 삶은 핵심만 놓고 보자면 코모란의 삶과 다를 바 없는데(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하게 밝히진 않으련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 속 인물 하나는 오언과 코모란이 비슷하다거나 죽이 잘 맞을 것 같다는 말을 반복한다. 


 결국 ‘실크웜’은 불안에 대한 소설이다. 어쩌면 제목의 누에는 정말은 코모란과 비슷할지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은유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내 맘 같지 않기 때문에 관계를 맺을 때마다 배태 될 수밖에 없는 불안으로 삶이라는 고치 통째로 끓여지고 있는 우리 말이다. 그렇기에 여기 투영된 불안을 더욱 공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불안에 관해서라면 조앤 K  롤링만큼 전문가도 없으니까 말이다. 해리포터로 성공하기 전 그녀가 미래에 대해 조금의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던 극빈의 싱글맘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다. 재밌는 것은 코모란이 여타의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과는 달리 택시비 걱정, 벌금 걱정등, 돈 걱정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는 것인데 이것도 아마 그 시절 극빈자였던 롤링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관계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는 것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 이렇게 자전적 경험이 바탕되었기에 불안한 심리와 관계에 대한 묘사가 더 한층 설득력을 가지는 것 같다. 소설은 확실한 대안을 보여 주지 않는다. 사건은 해결되고 갈등은 봉합 되지만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저 코모란과  로빈은 잠시 쉴 틈을 얻는 것 뿐이다. 우리 스스로도 잘 알지 않는가? 모든 불안과 갈등을 잠재우는 완벽한 관계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롤링은 이미 주연들의 이름에서부터 그걸 암시해 놓았다. 코모란은 앞서 말한 대로 잭에게 죽고, 로빈은 마더구스에 따르면 스패로우에게 죽는다. 둘 다 살해 당하는 존재다. 그들에게 관계에서 비롯되는 불안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임을 롤링은 이런 이름으로 암시한 것이다. 절단된 다리가 다시 붙을 수 없듯이 불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결국 롤링이 코모란 스크라이크 시리즈에서 바라는 것은 불안의 해결이 아니라 ‘여기 당신과 똑같이 늘 관계로 힘들어하고 불안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와 똑같은 불안 속에서 고민 하면서도 코모란이 의족 없이 홀로 서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거기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렇게 이 소설은 같은 불안 속을 떠도는 누에인 우리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소설이라고. 왠지 내겐 그런 속삭임이 들려온다. 때문에 불안이 더욱 깊어질 코모란과 로빈의 다음 이야기가 몹시도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닥터 슬립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도 영화 '샤이닝'을 처음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두 가지 이름이 뇌리에 콕 박혔다. 하나는 감독인 스탠리 큐브릭이고 다른 하나는 원작자 스티븐 킹이다. 그것이 킹과의 첫 만남이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은 공개적으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영화가 그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적어도 실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그 영화로 스티븐 킹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이도 적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샤이닝'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니 30년만에 속편이 나왔다는데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1998년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자루속의 뼈'를 출간한 스티븐 킹은 홍보를 위해 미국을 돌고 있었다. 한 서점의 사인회 자리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저기, 샤이닝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킹도 궁금했다고 한다. 그에겐 한 가지 의문이 더 있었는데, '샤이닝'에서 대니의 알콜중독자 아버지인 잭 토런스가 혼자 알콜 의존증을 참으려 하지 않고 모임의 도움을 구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의문들이 30년만에 대니를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리하여 불현듯 재회는 도래하게 된 것이다. '닥터 슬립'이라는 이름으로.



 스티븐 킹 소설의 중심엔 무엇이 있을까? 그 수많은 작품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관통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여러 개의 키워드들 중에서 가장 비중 있어 보이는 것 하나를 고르라면 그건 집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바로 아버지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가 숙고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의 나이 두 살 때 담배 사러 간다며 나간 아버지가 그대로 킹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킹은 그 때부터 아버지 없이 살아왔다. 미처 아버지란 존재를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그건 오로지 상상으로만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어쩌면 킹의 소설에서 아버지란 존재가 영웅에서 악마까지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탓일지 모른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버지였기에 혼자서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확고한 모습이 없었기에 그 아버지란 존재는 카멜레온이 되었다. 글 쓰던 당시 킹의 감정에 따라 그 때, 그 때마다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스티븐 킹에게 있어서 소설의 아버지란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건 그대로 현재 스티븐 킹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한 해석일까?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있다. 이 때의 그가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26살에 '캐리'로 프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그는 아버지였다. 그것도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세탁소에서 주당 50에서 60시간을 일했고 시급으로 1. 75달러를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루하루가 '바탄의 죽음의 행진'과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끔찍한 생활고만큼 가장에게 힘든 것도 없다. 카프카는 일상이야말로 작가를 망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런 상황의 스티븐 킹도 카프카의 말에 반박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애들은 시끄럽게 울어대고 글 쓸만한 환경은 도저히 안되며 힘겹게 번 돈은 신기루처럼 곧장 사라졌다. 삶은 악몽이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피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혼돈마저 가미된 악몽이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아버지들은 무엇을 소망할까? 더구나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작가라면?


 통제일 것이다. 자신이 집중할 수 있게 가정의 환경을 정돈하는 것. 그것이 가장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대부분 보통 아빠들이 그러하듯이. 그게 불가능 하다면 킹의 아버지처럼 스스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를 꿈꾸리라. 대부분의 포유류 수컷들이 그러하듯이.


 나는 지금 다른 아버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샤이닝'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나타났던 아버지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잭과 루이스. 그들 모두 가정의 강력한 통제를 원했다. 두 이야기는 아버지가 가진 강력한 통제의 염원이 초래한 비극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샤이닝'에서 자신의 딸과 아내를 살해하고 유령이 되어 돌아와 잭과 만난 오버룩 호텔 전 관리인 그레이디는 잭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자기 가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남자는 우리 지배인님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자기 아내와 아들의 행동을 바로잡지 못하는 남자는 이 큰 호텔에서 높은 자리는커녕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합니다." ('샤이닝' 1권, p. 207)


 '애완동물 공동묘지'도 마찬가지다. 매장지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 고양이 처칠의 변화된 모습은 그대로 루이스의 소망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루이스는 성질이 사나워 통제가 안되는 고양이가 제발 좀 통제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다시 살아돌아온 고양이는 쥐죽은 듯이 얌전히 지내는 것이다. 잭과 루이스 모두는 점점 통제가 안되는 가정을 고통으로 인지한다. 하지만 자신을 거기에 맞추기 보다는 그걸 자기 권위의 상실로 생각하고 오히려 환경을 자기 뜻에다 맞춰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고만 든다. 그것이 '샤이닝'에서는 잭의 살해로, '애완동물 공동묘지'에서는 가족을 다른 존재로 바꾸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그 때문에 비극은 도래한다. 그러면서 스티븐 킹은 묻는다. 통제의 집착은 보다 강화된 자기 본위 욕망의 형태가 아닌가 라고. 잭과 루이스에게 닥쳐온 위기란 사실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하는 타자들로부터의 부름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대니'가 가지고 있었던 '샤이닝' 능력은 바로 그러한 부름을 상징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30년 뒤, 대니의 이같은 능력이 가진 상징적 의미는 더 분명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결국 '닥터 슬립'을 낳은 '잭 토런스가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하려 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의 의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교감 그리고 연결을 강조하기 위한.



 그건 소설의 시작부터 선명히 부각된다. 오버룩 호텔이 보일러 폭발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대니는 여전히 자신을 목조르던 메이시 부인과 바텐더 로이드를 본다. 대니는 공포에 떨고 그에게 샤이닝 능력을 알려준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딕 할로런에게 도움을 구한다. 딕 할로런은 대니에게 자신이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 경험을 들려준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고 딕 역시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않았기에 학대는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 큰 문제는 죽은 다음에 찾아왔다. 죽은 할아버지가 계속 그에게 나타나 학대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대니와 같은 능력을 가진 '로즈' 할머니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이제 그 방법을 대니에게 알려주려 한다. 대니의 문제가 해결된다. 딕은 대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말 잘 들어라, 대니. 이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어.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이런 옛말이 있지. 학생이 준비되어 있으면 선생님이 등장하는 법이라고. 내가 네 선생이었어. (1권, p. 24)


 바로 이것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들을 준비가 된 학생이 되는 것. 조언을 구할 일이 있다면 기꺼이 타인을 스승으로 초빙하는 것. '닥터 슬립'은 바로 이런 태도를 은연중에 던져주는 소설이라 생각된다. 어려울수록 자신에게 집착하지 말고 더욱 타인에게 마음을 열라는, 달리 말해 통제의 위기를 자기 존재 가치의 실추로 여기지 말고 변화의 부름으로 여기라는 소설인 것이다.


 이것은 딕과 대니 관계의 반복인 대니와 아브라 관계에서 전면으로 부각된다. 아브라는 대니보다 더 뛰어난 샤이닝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렇다고 삶이 편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것이 정상으로 인정되는 사회에서 아브라의 능력은 사람들 눈에 대니가 그랬듯이 흔히 괴물로 받아들여지기 쉽기 때문에 고립감과 부모에게마저 숨겨야하는 것에서 오는 고통이 크다. 대니는 그런 아브라에게 자신이 이미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적절한 조언을 해준다. 할로런이 대니에게 그랬듯이.


 트루낫에 대처하기 위한 상호 연대의 관계가 아니라 도움을 주고 받는 사제지간의 관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스티븐 킹은 소설의 결말을 그렇게 끝냈던 것이다. 이왕 트루낫이 나왔으니 말인데, 소설에는 뚜렷이 대비되는 두 개의 조직이 존재한다. 하나는 물론 물리쳐야 하는 악의 역할을 맡은 트루낫이고 다른 하나는 대니와 아브라가 아니라 대니가 소속된 알콜 중독자 협회다. 


 일단 이 둘은 비슷하다. 특정된 구성원으로 형성된 모임이라는 점이 그렇다. 알콜 중독자 협회는 말 그대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알콜 중독자들로 구성된 모임이고 '트루낫'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줄 '스팀'이 필요한 비인간(Not Human)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모두 무언가 특별한 도움이 필요해서 형성된 모임이라는 것도 똑같다. 하지만 같은 것은 여기까지다. 스티븐 킹은 이 두 모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선명히 부각시킨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누군가 그리고 무언가의 도움이 필요한 건 같지만 그 구성원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콜 중독자 협회'와 '트루낫'은 뚜렷하게 갈라지는 것이다.


 알콜 중독자 협회는 새로 온 회원을 자기들과 똑같이 바꾸지 않는다.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해준다. 억지로 달라지기를 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알콜 중독자 협회가 구성원들을 대하는 근본적 방식이다. 반면 '트루낫'은 정반대다. 트루낫이 되기 위해선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설 첫부분에서 바로 이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정 학대로 인해 성인 남자들을 증오하게 된 여성 앤디는 남자를 유혹하여 특이한 최면 능력으로 잠재운 뒤 돈을 강탈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트루낫' 눈에 띄었고 그들의 일원이 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인간 그대로의 모습으론 '트루낫'이 될 수 없다. 이건 무조건이다. 그래서 앤디는 '트루낫'의 리더 로즈에 의해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 변한다. 트루낫은 이를 '터닝'이라 부른다.  하지만 알콜 중독자 협회엔 이런 '터닝'이 없다. 그들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준다. 강제 변환과 최대한의 배려와 존중. 이것이 트루낫과 알콜 중독자 협회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자신 역시 알콜 중독자였고 협회 경험이 있는 스티븐 킹이 잭 토런스가 알콜 중독자 모임에게 도움을 구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알콜 중독자 협회에서 사람들을 대하고 참여하는 사람의 태도가 소설의 주제를 구현하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주제는 모임이 가진 힘의 차이로도 부각된다. 공교롭게도 스티븐 킹은 '트루낫'과 '알콜 중독자 협회'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일단 '트루낫'의 묘사다.


 트루낫은 법인이 아니었지만 만약 트루낫이 법인이었다면 메인, 플로리다, 콜로라도, 뉴멕시코의 몇몇 지역은 '기업도시'로 불렸을 것이다. 그런 지역의 주요 사업체와 넓은 땅덩이들은 복잡하게 얽힌 지주회사를 통해 모두 그들과 연결되었다. (1권, p. 235)


 트루낫은 겉보기와 다르게 아주 세력이 크고 가진 돈도 천문학적인 액수이다. 반면 알콜 중독자 협회는


 알콜 중독자 협회는 광고를 하지 않고 아무 상품도 판매하지 않으며 농구모자나 야구모자를 돌려서 기부 받은 꾸깃꾸깃한 지폐로 유지되는 단체이고, 모임이 열리는 각종 대관실이나 교회 지하실 훨씬 너머까지 조용하지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권, p. 290)


 실상 알콜 중독자 협회는 트루낫에 전혀 상대가 안된다. 하지만 모임이 가진 힘은 알콜 중독자 협회가 훨씬 강하다. 트루낫은 그만한 세력을 가졌지만 '스팀'을 흡수했던 아이가 걸려 있던 홍역만으로도 쉽게 위기를 겪는다. 반면 알콜 중독자 협회에겐 위기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재정도 얼마없고 트루낫의 RV처럼 모임 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할 형편이지만 모임 만큼은 굳건히 유지된다. 관계의 강도를 두고 보았을 때, 트루낫은 알콜 중독자 협회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트루낫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로즈를 중심으로 상하 관계란 것도 한 몫한다. 우리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평등한 것처럼 보였던 트루낫이 실은 통제를 강조하는 위계적인 조직임을 점점 보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트루낫'과 닮은 게 하나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데 그건 바로 '샤이닝'의 '오버룩 호텔'이다.


 '샤이닝'에서 잭 토런스가 보는 오버룩 호텔의 유령 세계는 평등해 보인다. 저마다 대등하게 가면 무도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그 세계에 매료되는데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나중에 그 세계는 오로지 힘있는 하나를 주축으로 한 절대적 위계 질서의 세계라는 게 드러난다. 그 힘있는 하나란 바로 '오버룩 호텔'이다. 잭 토런스가 매료된 세계는 오버룩이 절대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세계였다. 자기 본위적인 통제의 열망으로 가득한.


 '트루낫'도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이 '트루낫'은 통제의 열망이 강했던 '샤이닝'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것도 오버룩과 루이스가 통제를 위해서 가했던 행동을 모두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오버룩은 대니를 자신의 통제에 두기 위해 잭 토런스라는 존재 자체를 마셔버렸다. 정확히 트루낫이 대니와 같은 존재들에게서 샤이닝 능력을 주는 '스팀'을 흡혈하는 그대로 말이다. 또한 그들은 루이스가 통제를 위해 고양이와 가족을 바꿔버렸듯이 사람을 자기들과 똑같이 '터닝'시켜 버린다.


 이런 특성까지 고려한다면 '트루낫'을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트루낫'은 '샤이닝'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나왔던 나쁜 아버지의 재림이다. '스타워즈' 식으로 말한다면 다스 베이더의 귀환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제의 구현은 '알콜 중독자 협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대니 역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트라우마를 그 모임을 통해 치유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바닥이 있기 마련이지. (...) 자네도 누군가에게 자네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올 거야.(1권, P 278)

 

 알콜 중독자 협회에서 대니는 이런 말을 들었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에 가서 대니가 오로지 자신만 간직했던 트라우마를 모임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면에서 '닥터 슬립'은 절대 타인에게 내비치지 않고 비밀을 혼자서 꼭꼭 숨겨두기만 하던 대니가 타인들에게 허심탄회하게 고백하게 되기까지의 여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트루낫'의 형성과 해체는 이것과 궤적을 같이 하는데 이로써 '트루낫'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난관과 불안을 극복하려고 할 경우 생겨나는 통제 욕망의 은유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렇다는 것은 통제 욕망이 어느 한 순간 근절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당면해야 할 문제임을 뜻한다. 대니는 딕 할로런의 도움으로 통제 욕망의 부산물이라고 할만한 유령들을 단단히 봉인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잭 토런스라는 나쁜 아버지와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유산처럼 물려준 나쁜 아버지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소설의 말마따나 '착각'이었다. 이는 스티븐 킹의 자전적 경험으로도 증명된다. 앞서 소설 속 아버지의 모습을 스티븐 킹 내면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쁜 아버지의 반복적인 출현은 스티븐 킹 역시 그런 권력과 통제의 유혹을 반복적으로 받았음을 뜻할 것이다.


 그렇게 잭 토런스는 한 순간에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기 본위의 욕망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림자처럼 출몰하는 것이다. 대니도 마찬가지다. 대니는 타인들에게 자신을 괴물처럼 여기게 만드는 샤이닝 능력을 억누르기 위해 술을 마셨고 그러다 급기야 평생 트라우마가 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우연히 같이 술을 마신 여자의 돈을 슬쩍 한 것이다. 먼저 깨어나 돈을 훔쳐 나오는데 그녀의 아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대니는 샤이닝 능력으로 아기가 아기의 삼촌에게 학대받고 있으며 도와주지 않을 경우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외면했다. 결국 훗날 대니는 아기와 그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샤이닝으로 알게 된다. 이것이 대니의 트라우마였다. 도와줬어야 했는데 외면하는 바람에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그는 거기서 잭 토런스의 모습을 본 것이다. 디니라는 여자와 아기의 존재는 잭 토런스에게 살해 위협을 받던 엄마와 대니 모습 그대로였다. 딕 할로런은 그 때 그들을 도와주었다. 무려 플로리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서는 눈보라마저 무릎쓰고 도와주러 달려왔던 것이다. 그보다 훨씬 쉬운 상황이었음에도 그러나 대니는 도와주지 않았다. 어쩌면 대니의 고통은 실상 두려움일지 모른다. 어쩌면 자기도 아버지 잭 토런스가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


 '닥터 슬립'은 결국 살면서 시시 때때로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유혹과 두려움을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할 것인가를 말하는 소설인지도 모른다. 그 방법은 딕 할로런, 알콜 중독자 협회가 잘 보여준 바대로 타인에게 있다. 하지만 '트루낫'처럼 내 본위대로 바꾸는 타인이어서는 안된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나를 내려놓고 귀기울여야 한다. '닥터 슬립'으로서 대니가 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지 않았던가. 그를 따스한 수건으로 닦아주고 가만히 손을 잡아주며 그의 기억을 내면으로 경청하는 것. 그럴 때 타인은 자신이 진정 바라는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똑같이 대니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양방향의 구원. 이런 관계로 맺어진 사제 지간은 일방적이지 않다. 부머랭처럼 도움을 주는만큼 도움을 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딕 할로런이 말한 '세상은 돌고 도는 거지. 운명처럼.'의 진짜 의미이리라.


 결국 소설이 권유하는 대로 살면 언젠가 우리도 대니처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는 도와줄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서약이자 그가 태어난 이유였다. (2권, P. 406)


 이것이야말로 '잭 토런스'가 사라진 세상, '오버룩'이 사라진 세상이자 스티븐 킹이 진정 바라는 세상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한가운데 밀리언셀러 클럽 134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혹시라도 매튜 스커더가 자신의 창조주 로렌스 블록을 70년대에 실제로 만났더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미스터리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하드보일드 탐정 중 하나로 만들어주었으니 고맙다면서 악수나 포옹을 할 것 같다고? 아니, 그건 오산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읽어보았다면 분명 이런 내 짐작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로렌스 블록의 얼굴에 일단 주먹부터 날리고 볼 거라는 걸.

 

 

 그래도 로렌스 블록은 기꺼이 이해하리라.

 자기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테니. 로렌스 블록은 그의 상처와 속죄를 가지고 주머니를 채웠고 94년엔 미국의 작가협회가 일찌감치 그랜드마스터로 선정할만큼 유명세 또한 누리지 않았던가. 너무 로렌스 블록을 나무라는 거 아니냐고?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죽음의 한가운데'를 읽고나니 그의 고독과 슬픔이 더욱 진하게 다가와서 나라도 나서서 정말 작가에게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하고 삿대질 해주고픈 심정이니까.

 

 

 

 이 소설에서 그는 두 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는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그의 삶이란 속죄의 삶이었다. 원래 그는 잘나가던 형사였다. 어느 날 그는 현장에서 강도를 추격하다 강도를 향해 두 발의 총을 쏜다. 한 발은 원했던 대로 강도에게 맞았지만 다른 한 발은 그렇지 않았다. 길가에 있던 어린 소녀의 눈에 맞아 소녀는 죽는다. 경찰 조직은 그에게 책임이 없는 것으로 판정했지만 스커더는 그럴 수 없었다. 설령 고의는 없었다고 해도 자신으로 인해 끝장나버린 소녀의 죽음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죽음이든 그대로 무시될 수는 없다.'

 시리즈 내내 이어질 이러한 그의 정의를 그는 몸소 실천한다. 자신을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이제까지 누리고 있었던 모든 안락한 삶과도 결별하는 것이다. 경찰을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아내와 아이들에게서마저 떠나간다. 고독한 사립탐정으로 사는 것. 그것은 그의 속죄였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10월이 온다. '죽음의 한가운데'는 10월의 정경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시의 10월은 1년 중 가장 쾌적한 때'라면서...

 

 

 과연 그에게 두 가지 좋은 일이 찾아온다.

 그에게 있어 좋은 일이란 많은 보수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외로움의 코트를 잠시 벗어둘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두 명의 여인이 앞에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의뢰로 미행했던 여자, 포샤 카. 그녀는 특이한 성적 경향을 지닌 손님만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다. 원래 경찰이었던 이번 일의 의뢰인은 특별검사와 함께 굉장한 규모의 경찰 비리를 들춰내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 그녀가 의뢰인을 협박범으로 고소한 것이다. 스커더는 그녀를 직접 만나 '왜'라고 묻는다. 그녀는 거짓 고소임을 시인하면서 배후에 뭔가 큰 것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암시를 남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암시도. 그러면서 스커더를 은밀하게 유혹해 온다. 그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자꾸 끌리는 자신을 스커더는 이상하게 여긴다. 결국 유혹을 물리치고 떠나려는 스커더에게 포샤 카는 '자신에게 10월은 가장 슬픈 때'라고 말한다. 왜냐고 스커더가 묻자. 포샤 카는 이렇게 대답한다.

 

 

 "겨울이 오고 있으니까."(p.24)

 

 

 그 말은 예언이었을까? 스커더는 뒤에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용의자로 자신의 의뢰인이 체포되었다는 말도. 스커더는 아연 실색한다. 꿈까지 꾸면서 강하게 끌렸던 그녀를 그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아니, 지켜줄 수 없다. 스커더 자신이 발사한 첫 번째 총알의 트라우마.

 

 

 구치소에서 만난 의뢰인은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고 한다.

 이번엔 진범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의뢰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스커더였지만 의뢰인에 대해 분노한 경찰이 하나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게을리하는 것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는 의뢰를 수락한다. 어쨌든 그 어떤 죽음도 이대로 그냥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의뢰인은 자기 아내가 집에서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 말한다. 아내의 이름은 다이애나. 달의 여신이자 사냥꾼 여신의 이름을 가졌다. 고독한 자에게 달은 단 하나의 벗이자 위안의 벗이다. 스커더는 다이애나에게 끌린다. 비로소 자신의 이 고독을 가시게 할 존재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제 인생에서 마치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에요. 처음부터 그런 기회는 계속 있었겠지만, 그게 있다는 걸 알아야만 잡을 수 있잖아요. 당신이 그 기회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걸 깨닫게 해 준 계기였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p. 188)

 

 

 다이내나가 스커더에게 한 말은 스커더가 다이애나에 대해 해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다이애나라는 이름이 가진 또 다른 의미 그대로 '헌팅'당한 것이다. 그렇게 포샤 카의 유혹은 거부했던 스커더는 다이애나의 유혹은 받아들인다. 그건 자기만큼이나 절박한 다이애나의 외로움에 공감되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둘은 키스하고 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속죄의 여로는 거기서 멈출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고독과 상처는 조금 마모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렌스 블록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스커더가 사랑에 빠져 있는 사이, 잇달아 죽음이 발생하도록 만든다. 블록은 그 순서를 마치 스커더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타인의 죽음들이 초래된 것처럼 만들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마땅히 그를 향해야 하는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그 타인들이란 의뢰인을 무죄로 방면시킬 수 있는 유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죽었다는 건 그만큼 의뢰인이 감옥에서 풀려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는 걸 의미했다. 이건 그대로 스커더가 양심의 가책없이 다이애나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정확히 1 대 1 대응하는 살인과 사랑의 함수 관계. 스커더의 보통 삶에 대한 욕망이 증가할수록 살인 또한 늘어나는...

 

 

 결국 파국이 온다. 스포일러 상 밝힐 수 없지만 결코 다이애나와 함께 할 수 없게 만드는 파국이. 결국 그건 자신에게 영원히 트라우마가 될 두 번째 총알이었던 것이다. 현재 속죄의 삶을 가져온 경찰 시절에 발사한 두 번째 총알처럼.

 

 

 그에게 벗어날 길은 허락되지 않는다.

 짧은 10월의 쾌적함은 긴 겨울의 고통만 남겼을 뿐이다. 가장 눈물이 많고 상처가 많은 탐정. '죽음의 한가운데'는 이제 겨우 시리즈 두 번째의 작품이다. 아직도 그가 흘릴 눈물과 가지게 될 상처가 많이 남아있다. 그는 영원히 속죄의 여정을 걸어 갈 운명이다.

 

  "사람은 운명을 바꾸지 못해. 운명이 사람을 가끔씩 바뀌게는 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지."(p. 234)

 

 

  세번째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탓에 단정내리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커더가 자신이 걸어 온 속죄의 여정을 확고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바로 이 두 번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모습이 지금까지 하드보일드 탐정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지극히 매튜 스커더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하게 된 결정적 한 방이었으니까.

 

 

 하드보일드는 어디까지나 초연함에 있었다.

 세상이든,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대쉴 해미트의 무표정한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는 하나의 전형이었다. 어떤 경우든 타자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는 것. 그것만이 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립탐정들이 유일하게 자신의 '모럴'을 지킬 수 있었던 길이었다. 챈들러의 말로우도, 맥도널드의 루 아처도 그랬다. 냉정한 관찰자가 되는 것만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되는 역할이었다. 그건 작품에서 철저하게 상대방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리 근사한 여인이 유혹해오더라도 절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이 작품의 스커더처럼 문득 느낀 유혹에 대한 상념으로 괴로워하고 아예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대의 하드보일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1976년에 나왔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때는 아직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가 현역으로 활동할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드보일드의 근본 규칙을 허물어뜨리면서까지 로렌스 블록은 혁신을 단행했던 것이다. 지극히 타자의 감정에 공감하고 함께 하는 사립탐정으로.

 

 

 한 마디로 하드보일드의 뉴 웨이브!

 이 같은 뉴 웨이브는 아마도 베트남 전쟁이라는 외부적 자극 때문이었을 지 모른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몽키스 레인코트'처럼 외부 사회의 변화는 하드보일드적 태도의 변화를 요청하는 법이니까. 사실 당시 사회에 그토록 만연된 아픔을 앞에 두고서 언제까지나 냉정한 관찰자인 척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 앞에서 네 아픔의 원인은 이런 것이야 말해주는 사람은 그저 재수없는 녀석일 뿐이다. 그들이 아픔을 호소하는 건 그 원인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한 마디 따스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 아니던가. 로렌스 블록이 현명했다면 자신의 사립탐정도 기꺼이 그런 존재가 되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져다 준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같은 상처를 가진 자만이 더욱 타인이 받은 상처에 공감할 수 있고 보듬어줄 수 있는 법이니까. 그리하여 하드보일드 역사상 유래없는 공감의 탐정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죽음의 한 가운데'는 유일무이한 매튜 스커더의 하드보일드적 정체성이 완성되는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만연된 '죽음의 한 가운데'에 있다. '긴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많은 죽음들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는 이유로 작은 불똥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죽음마저 차별받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긴 겨울의 고통은 어쩌면 바로 거기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 그 자체가 아닌 오로지 외부의 것으로만 평가되는 세상이기에. 그러므로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죽음에게조차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갖고 공감하며 그 의미를 세상에 남기기 위하여 분투하는 매튜 스커더를 난 지지할 수 밖에 없고 이왕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외로워하며 울고, 상처받고 실연당하는, 그렇게 아주 인간적인 온기마저 느껴지는 탐정이기에 더더욱. 겨울이면 누구나 무언가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법이 아니던가.

 

 

 끝으로 인상 깊게 읽었던 장면 한 토막.

 

 

 "가끔은 달의 인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바보 같죠?"

 "글쎄, 바다는 그걸 느낍니다. 그래서 밀물과 썰물이 있는 거고. 달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확실해요. 경찰들은 다 알아요. 범죄율은 달에 따라 변해요."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특히 기이한 범죄들이 그렇죠. 보름달이 뜨면 사람들은 기괴한 짓을 해요."

 "예를 들면요?"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키스하는 거."(p. 190)

 

 

 보름달이 뜨는 밤에 한 번 응용해보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4-01-0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잠깐 차이로 해가 바뀌었습니다 첫날 빨리 인사하고 싶어서요^^ 제가 책을 읽고 쓸 때 조금 괴로워했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야겠습니다 잘 못 쓰더라도 즐겁게 해야겠습니다 쓰고 나서가 아니고...^^

헤르메스 님은 어떠신가요 책읽고 쓰기 즐거우세요 책 읽기를 먼저 즐겨서 잘 쓰시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새해에도 책 즐겁게 보시고 쓰기도 즐겁게 하세요 지금까지 얼마나 했는가보다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쉴 때는 잘 쉬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ICE-9 2014-01-06 01:29   좋아요 0 | URL
희선님 감사합니다. 저야 뭐, 책 읽는 건 대부분 즐겁죠. 하지만 쓰는 건 아직 그리 다 즐거운 건 아닌 것 같아요ㅠ ㅠ 엉덩이 근력을 보다 기르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중이랍니다. 희선님도 2014년엔 더욱 즐거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 행복한 추억들을 많이 가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