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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인베이젼 - World Inv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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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이상 지구상에는 미국의 적이 없어서 그런지 최근 헐리우드 영화에서 다시금 예전의 50년대 처럼 외계인 침공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자주 눈에 띈다. 

 물론 이 영화 '월드 인베이젼'도 그러한 영화들 중 하나이다. 

 '월드 인베이젼'이란 제목과 외계인 침공이란 소재 때문에 2005년에 나왔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이 자주 연상되어 떠오른다. 제목과 소재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는 그러나 참 다른 영화들이다. 물론 '월드 인베이젼'은 군인의 입장에서 '우주전쟁'은 민간인의 입장에서 다룬 영화들이긴 하지만 이 차이는 그러나 그리 본질적이지는 않다. 왜냐면 군인과 민간인이라는 신분적 차이만 있을 뿐, 사실 이 두 인물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두 인물은 모두 주류에서 밀려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월드 인베이젼'의 주인공 낸츠 하사는 아프간에서 있었던 일로 젊은 병사들로 부터 고립되어 있다. 첫 장면에서 영화는 낸츠가 해변의 구보에서 나이 어린 병사들에게 자꾸 뒤처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젊은 병사들은 그를 한물간 노땅으로 취급한다. 낸츠 하사도 자신이 이미 무력해졌음을 알고 퇴역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우주전쟁'의 주인공 역시 가족들로 부터 버림받은 신세다. 자기 멋대로이고 무책임한 성격 덕분에 그는 진작에 아내로 부터 이혼 당했고 아이들 마저 이미 재혼한 아내에게 다 빼앗겨버린 상태다. 정기적으로 자식들과 만나지만 자식들은 아무도 제대로 아버지로 대해주지 않는다. 그는 늘 소통하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들로 부터의 냉담한 반응 뿐이다. 

 이렇게 둘은 사실상 비슷한 처지이다. 그런데 그들 앞에 갑자기 외계인이 침공해 오기 시작한다. 낸츠 상사는 하필이면 퇴역 하루 전날, '우주전쟁'에서는 하필이면 아이들을 맡게 된 날이다. 

 '하필이면'이다. 외계인은 왜 하필 그 때 침공해 오는가?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고 여기엔 침공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이 영화들에서 침공은 주인공들이 다시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한 일종의 '계기의 촉발'이자 영웅에게 흔히 주어지는 시련 처럼 '통과의례'라는 것을 뜻한다. '통과의례'라는 것은 결국 영웅을 보다 더 영웅답게 만들어주기 위한 '연단'의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통과의례'는 겉으로는 시련이라는 외피를 둘러쓰고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영웅의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영화에서 집단적 비극으로 겪는 전쟁은 주인공 개인의 차원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이뤄가는 과정으로 전이 된다. '월드 인베이젼'에서 낸츠 하사는 퇴물 취급이나 받는 노땅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만 병사가 우러러 보는 진정한 군인으로 거듭나고 '우주전쟁'에서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가족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진짜 아버지가 된다.  

그런데 이 두 영화는 각기 현 시대의 미국이 처한 위기에서 촉발되어 나왔다. '월드 인베이젼'은 서브 프라임 사태 이후의 급속한 몰락과 점차 커지는 중국으로 인해 점점 그 패권적 위치를 잃어가는 현재의 미국에 대한 위기에서 비롯되었고  2005년에 개봉된 '우주전쟁'은 2004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2001년의 그 끔찍한 9/11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초래했던 부시가  다시 당선된 것에 대한 미국인들의 당혹과 충격, 그 정신적 공황에서 태어난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미국이 겪고있는 위기로 부터 비롯되었지만 계기는 이렇게 달랐다. '월드 인베이젼'은 그 위기가 외부적이었고 '우주전쟁'은 내부적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월드 인베이젼'의 주인공은 신분이 군인이고 '우주전쟁'은 민간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앞서도 말했듯이 주인공들의 신분적 차이는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더 큰 문제는 각 영화들이 위기의 계기를 어디에서 상정하느냐에 따라 두 영화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데 있다.  

  헐리우드영화에서 전쟁을 소재로 할 경우 주제는 크게 잡아서 대략 두 개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는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 처럼 전쟁을 치뤘던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적'인 영화들이고 다른 하나는 '람보' 같이 특히 패전한 전쟁의 기억을 불러와 그것을 영화를 통해 보복함으로서 미국이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영화들이다. 
 [주) 프로파간다(propaganda)'라고 하며, '어떠한 사상을 강요하거나 주입하기 위한 목적의 선전, 교육 등의 활동 ]  

 그렇게, 오로지 위기의 계기를 외부적인 것에만 찾고 있는 '월드 인베이젼'은 프로파간다로의 길을 걷는다. 반면 내부적인 것에서 그 계기를 찾는 '우주전쟁'은 성찰적인 길을 걷는다. 

 '월드 인베이젼'에 대한 글이므로 거기에 국한시켜서 보려한다. 

  하면, 어째서 이 영화가 프로파간다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보자면 영화의 도입부 그러니까 주인공이 해변에서 구보하고 있는 장면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옆으로 패닝하면서 뛰어가는 일단의 군인들을 잡는다. 거기서 화면은 Zoom In 해 들어가 뒤처지는 주인공 낸츠 하사를 보여준다. 그는 나이 어린 병사들이 자기를 마구 앞질러가자 곤혹스러워한다. Zoom In 해 들어간 화면은 낸츠 하사를 앞질러가는 병사들을 보여준다. 거기엔 흑인 동양인 히스패닉계 등등으로 아주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이 장면이 뜻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인종 모두는 각각의 국가들을 뜻하며 그들이 하나 둘 미국을 앞질러 어느새 미국은 뒤쳐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낸츠는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는다. 이게 지금 모든 국가가 생각하는 현재 미국의 위치이기도 하다. 그의 고립은 바로 미국의 고립이다.

 

 

 

 

 

 

 

 

 

 

 

 그런데 그런 낸츠의 자리가 확인된 순간 갑자기 외계인의 전면적인 공습을 받게 된다.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 때 퇴역 신청을 내고 물러나 있던 낸츠 하사는 다시 전장으로 투입될 것을 명 받는다. 여기서도 이 영화의 프로파간다적 의도가 명백하다. 영화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봐라! 미국이 뒤로 물러나 있으니까 이렇게 침공을 받지 않나. 너희들이 미국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텐데 말이야."하고... 더 경악스러운 것은 히스패닉 소대장이 낸츠 하사가 속한 소대를 이끌고, 각 대원들이 낸츠 하사 보다는 소대장을 더 믿고 따를 때 소대원들이 마구 죽어나간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전면 침공의 모습과 더불어 소대원들의 계속된 죽음은 낸츠 하사에게 제대로 된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은 탓 때문이라는 걸 영화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해서, 당연히 세상을 이렇게 만든 그 책임의 대표자로서 히스패닉계 소대장은 죽고 낸츠가 그 뒤를 이어받게 된다. 그 뒤 부터는 일사천리로 승리의 행진을 계속한다. 급기야 그는 구조한 한 가족의 아버지로 부터 아버지라는 자리마저 물러받음으로서 더욱 더 리더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진다. 군인들이야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 있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운 민간인들마저 '아버지' 자리를 양도하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의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암묵적 의사표시이기 때문이다.(아버지가 히스패닉계라는 설정은 왠지 현재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관계를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낸츠 하사가 완전히 확고한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자 마자 이제 더이상 외계인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다양다종한 인종들로 구성된 그야말로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만한 소대는 이제 미국 낸츠 하사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오로지 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덕분에 모든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제 마구 학살당하는 것은 외계인들 뿐이다. 

 그 거대한 외계의 함선이 무너질 때 최종적으로 영화는 이렇게 선언하는 것 같다. 

 "보라! 미국을 중심으로 이렇게 뭉치니 세계는 결국 구원되지 않는가!" 

  따라서,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현재 미국의 위기를 온전히 남탓으로 여긴다. 그들이 미국을 믿지 않아서 그들이 미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서 현재 미국의 위기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세계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이 호소는 오로지 미국 국민들에게 향하고 있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BATTLE IN LA'이다. 가상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이렇게 미국의 고유 영토명이 나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바로 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지금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위기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전쟁의 원인이 바로 모든 나라들이 예전처럼 미국을 믿고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자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미국 국민들이 겪고 느끼고 있는 모든 위기는 모든 국가들이, 병사들이 그렇게 낸츠 하사를 믿고 따랐던 것 처럼 미국을 믿고 따라와 주기만 하면 깨끗이 해결될 것이라 설파한다. 그러니 자국민들이여 더욱 더 미국을 위해 뭉쳐라! 정말로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럼, 같은 위기를 내부에서 찾았던 '우주전쟁'은 어째서 성찰적이라고 하는 것인가? 

 간단히 살펴본다. 낸츠 하사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도 역시 가족들로 부터 소외되고 아버지라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영화는 바로 그 이유가 주인공 자신에게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 인물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못 믿을 인물인지 또한 아버지로서 모자라는지 보여준다. 그 뒤에 외계인의 침공이 일어난다. 외계인의 첫 공격 대상이 교회라는 건 참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부시의 재선에 결정적으로 공을 세웠던 세력이 기독교였기 때문이다. 그 영화에서 외계인들은 차례로 미국인들을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을 부셔간다. 어느새 미국인들은 학살의 위기에 노출된다. 영화는 그 위기가 바로 아버지가 제대로 아버지가 되지 못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준다. 중반에 스필버그는 2차대전의 유태인 학살의 기억까지 가져옴으로서 그 아버지 답지 못함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주인공이 전쟁을 통해 겪는 여정은 그야말로 진정한 아버지가 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진정한 아버지가 된 때 외계인은 느닷없이 종말을 맞이한다. 

  

 스필버그는 미국의 위기를 외부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미국인들 자체에 그 위기의 원인이 있다고 영화를 통해서 말한다. 모두가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끔찍한 부시의 재선이 일어났다고 말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란 어떤 이해 타산에도 굴복하지 않고 미국의 건국 이념이 되었던 숭고한 정신적 원칙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우주전쟁'의 가장 마지막 가족들이 진정으로 해후하는 장소가 '하필이면' 미국 건국의 중심 '보스턴'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005년 스필버그는 이렇게 위기의 원인과 그 해답을 내부에서 찾았건만 2011년의 지금 미국은 어찌하여 남탓만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아마도 서브 프라임 이후 그 정신적 충격 탓으로 스필버그가 진단한 그대로 아직도 미국인들이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프로파간다가 성행하는 것은 국민들이 정신적 공황을 느끼고 있을 때이다. 그렇게 지금 이 영화 '월드 인베이젼' 이 프로파간다로서 기능을 한다는 것은 현재 미국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 보여주는 징후라고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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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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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의 나홍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황해'를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자리 운이 없어서 앞에서 보는 바람에 두시간 넘게 길게 목을 빼고 보느라
아직도 목이 살살 아파오네요.


아무튼, '황해'란 바로 서해를 말합니다. 그 서해를 중국은 황해라 부르는데 국제에서 통용되는 이름은 바로 이 이름이죠. 주인공은 '구남(하정우)'이라고 연변에 사는 조선족. 그는 한국에 돈 벌러간 아내에게서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그 아내를 찾기 위해 거액의 수수료를 빚까지 얻어가며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는 못하고 그만 거액의 빚더미에 깔려 벌어들이는 몇 푼 안되는 돈을 족족 양아치들에게 상납해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그것을 한 방에 해결하고자 늘 마작판을 기웃거리지만 그나마도 있는 돈을 다 털릴 뿐입니다.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인 것이죠. 그런 그에게 같은 조선족 면가(김윤식)가 한국에 가서 사람 하나 죽이고 오면 그 빚을 탕감해 주겠다면서 한국으로 가서 아내도 찾고 해서 새출발하라고 제안을 해 옵니다. 아무데서도 탈출구를 찾지못했던 구남은 결국 면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한국으로 밀항, 자신의 타켓을 처리할 방법을 강구하면서 틈틈히 아내도 찾아나섭니다.

 



 

 줄거리 소개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간략하게 소개된 줄거리에서도 드러났듯이 여기서 황해란 바로 파라다이스로 가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구남은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아서 거기를 건넜죠.
그런데 황해를 건너 찾아온 바로 이 곳은 과연 그에게 파라다이스였을까요?
흥미롭게도 영화의 처음 부분에 구남의 나래이션이 나옵니다. 그건 구남이 어릴 때 보았던 광견병에 걸린 개에 대한 추억입니다. 그 개는 광견병에 걸린 나머지 자기가 물 수 있는 모든 것을 죽였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에게 쫓겼지만 결국은 잡히지 않았는데 어느날 자신 앞에 홀연히 나타나더니 죽었다고... 그리고 그 개가 죽고난 뒤 광견병이 마을 전체를 휩쓸었다고...

 이 나래이션은 그야말로 황해의 모든 이야기를 집약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얘기했던 개처럼 구남은 그렇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아 건너온 이 곳에서 마구 쫓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듯이 한국은 파라다이스가 아니니까요.

물론 이것은 적나라한 현실이지만, 나홍진 감독의 전작과도 어느정도 연속성이 있습니다. '추격자'의 결론에서 이어지는 부분이니까요. '추격자'는 결국 무슨 얘기였을까요? 그것은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지금의 한국에 다시 예수가 재림한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재림한 예수는 처음에 내려온 예수와는 많이 달랐죠. 네, 그 예수가 바로 하정우가 분한 살인마였습니다. 그렇게 밤으로 가득한 한국이란 사회에 다시 내려온 예수는 살인으로 복음을 전하고 시체로서 신도를 삼고 스스로 죽음의 겟세마네 동산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내려온 예수가 유다에게 결국은 죽음을 당하듯, 새로운 교리를 따르지 않는 신도, 처음에 내려온 예수가 설파한 '사랑'을 믿는 신도에게 죽임을 당하는 거죠. 유다도 사실 처음 예수 이전의 유대교 교리를 충실히 따랐던 바리새파였으니까요. 결말에서 살인마 하정우가 괜히 옆구리에 찔리는 게 아니죠. 그게 바로 김윤식이 가하는 룽기누스의 창이었습니다. 아무튼 제가 '추격자'를 보고 놀랐던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절망의 깊이도 느낄 수 있었죠. 어쩌면 이 감독이 죽이되든 밥이되든 이 한 편으로 모든 걸 폭발시켜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어쨌든 나홍진 감독은 지금의 이 한국을 도저히 믿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전혀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인마 예수가 종말을 불러와야 할 만큼 이 나라는 오로지 어둠 뿐입니다. 그건 오히려 역설적으로 환한 대낮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하정우에게 살해당하는 서영희에서 완성되죠. 그렇게 이 나라는 살인마 하정우에 의해서 멸망해야할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추격자'의 결말은 조금 희망차 보여도 그건 그냥 속절없는 희망일 뿐입니다. 도시에 거대하게 내려앉은 어둠으로 영화 '추격자'는 끝이 나니까요. 

 그렇게 조금의 구원도 없는 세상... 이 지금 황해를 건너온 자들이 목도하는 세계입니다.
이번 영화에서 한국은 그래서 완전히 협잡과 배신 그리고 야수들이 활개치는 땅이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히 새겨두었던 한국의 근대적 모습은 잘 나오지 않습니다. 나홍진은 마치 그동안의 발달을 생략해버린 듯이 찍었습니다. 연변과 한국이 그리 다르지 않고 70년대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이 다르지 않습니다. 영원히 문명적 성숙이 배제된 세계...
도처에 널린 빈집이며 폐허들... 도끼질과 칼부림이 가득한 세상...
그렇게 구남의 나래이션 대로 광견병이 모조리 휩쓸고 있는 세상...
두 시간 넘는 러닝타임 내내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치, '네가 살고 있는 한국이란 곳이 얼마나 처참한 곳인지 두 눈 뜨고 똑바로 보라구!'하는 것 같습니다.
 

- 세세한 분석은 아무래도 보지 못한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하지 못하겠네요. 그냥 영화를 본 전체적인 감상만 이렇게 적어두어 봅니다. -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은 아마도 제작기일에 쫓긴듯 시나리오를 충실히 숙성시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후반의 헐거워지는 부분을 액션으로 땜질하는 듯한 느낌이 좀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여주는 액션 장면들이 나무랄데 없었으니(우, 정말 도끼질과 칼부림은 리얼했어요. 김윤식이 정말 후덜덜하게 나오더군요.) 어느정도 보상이 되기는 하는데 그래도 폭발력이 없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때문에 하정우의 후반이 이상해졌습니다. 정작 주인공이 이렇다 할 클라이막스없이 조금은 맥없게 결말을 맞게되는 것 같군요.

 하정우와 김윤식 두 분 모두 연기가 기본 이상이 되시는 분들인지라 당연히 아주 실감나게 연기를 하셨는데 정말 장면 장면을 보니 고생을 참 많이 했겠더군요. 더구나 하정우씨는 그 추운 겨울산의 정상까지 오르고....

 

  개인적으로 눈에 띄었던 분은 바로 이 분! 조성하씨인데... 하정우 김윤식과 트로이카가 될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눈여겨 봐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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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 - Outrag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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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를 보면서 떠오른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조직과 인간' 

이것은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의 오렌지'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어졌을 때 붙여진 제목이었습니다. 아마도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 영화가 상영금지되었기 때문에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없어서 그런 제목을 붙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정말 이 말 만큼 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말은 없다고 생각되더군요.

처음 영화는 이제 부터 이야기의 중심이 될 야쿠자 조직이 얼마나 강고한 조직인가 부터 보여줍니다. 그것도 부하 - 중간 보스 - 최고 보스 이렇게 계급을 구분해서 차례 차례 말이죠. 

이것은 서열이 확실한 조직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서열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지극히 계산적으로 화면속의 담는 공간을 차차 줄여나갑니다. 부하들이 있는 텅 빈 공간에서
중간 보스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장면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것은 바로 최고 권력자 보스 한
사람의 클로즈 업... 이렇게 말이죠. 이것은 관객에게 지금 이 조직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를 자연스럽게 알려주기 위함이죠. 

뒤이어 열을 지어 도로를 다니는 벤츠의 행렬은 바로 그 조직의 강고함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한 대의 벤츠가 화면에 꽉 차 있을 때 '아웃레이지'란 제목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뒤이어 보스의 근심 - 중간보스 하나가 자신의 조직에 속하지 않는 보스와 어울려서 걱정이라고 오른팔에게 말하는 장면 - 이 나옵니다. 오른팔은 그 둘이 의형제라서 그런가보다고 대답하죠. 

관객에게 견고한 조직을 먼저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이 배신의 정도가 어느정도 의미가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 거기에 또 의형제라는 게 끼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익숙한 장르적 컨벤션을 발견하게되고 때문에 이 영화가 좀 진부한 주제를 다루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되죠.

아무튼, 마치 댓구를 이루듯 강고한 '조직'과 '배신, 의형제'라는 아주 인간적인 동기들이
나란히 등장하게 되는데 다케시는 바로 뒤이어 보스의 말을 통해 이 둘이 어떤 관계임을
바로 보여줍니다. 보스는 이렇게 말하죠. "아무리 의형제라도 조직을 위해선 용납할 수 없다."고 바로 여기서 이 둘의 관계가 상호 대치적인 관계, 그러니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시키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게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기타노 다케시는 조직과 인간의 이러한 상호 대치적인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구조적으로 장면들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한 장면 한 장면 무심하게 지나가는 듯 하면서도 은밀하게 배여든 계산은 바로 이 조직과 인간의 대립 관계가 이 영화의 핵심적 테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이렇게 통제하려는 조직과 어떻게든 그 조직을 뚫고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인간의 대립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익히 보아왔던 장르적컨벤션에 불과합니다. 진부한 이야기의 지루한 동어 반복에 불과한 이야기에 이토록 기타노 다케시가 공을 들였단 말인가 하고 의아해질 무렵 바로 여기서 다케시의 장르적 비틈이 일어납니다.

종종 익숙한 장르적 컨벤션에서 배신은 의형제라는 보다 더 고귀한 도덕적 가치로 인해 관객에게 정당화되곤 했었죠. 하지만 아웃레이지에서는 다릅니다. 다케시는 의형제를 순진하게 믿었던 관객들을 비웃습니다. 그렇게 의형제라는 게 사실은  그 중간 보스가 이익을 모두 가로채기 위해 상대편을 이용하기 위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고 앞서 나왔던 조직의 안위를 염려했던 보스 역시도 사실은 그 중간보스의 수입을 가로채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줌으로서 말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다케시의 냉소를 봅니다.

그리고 그 냉소와 더불어 이렇게 말합니다.
'조직이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내세우는 '조직의 논리'라는 것이 사실은 '그 조직의 최고 위치에 있는 자' 개인의 이익 추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종종 타인의 협력을 구하거나 이용하기 위해 내세우는 일종의 휴머니즘적 논리도 사실은 자신의 주머니를 보다 배불리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냉소가 이제는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가 다케시의 새로운 한걸음을 위한 전환점이진 않을까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사실 보다보면 '소나티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 보스가 중간 보스의 영업권을 차지하기 위해 죽음으로 내몬다는 내용은 바로 소나티네와 똑같죠. 그 밖에도 많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는 소나티네의 변주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유희'의 장면은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 '키쿠지로의 여름'에서 변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곁가지로 말합니다만, 소나티네는 그 이후의 모든 작품, 그러니까 '브라더'까지 이어지는 모든 작품의 일종의 원형이 되는 작품으로 저에겐 여겨집니다. (물론 소나티네는 3X4-10월 에서 나왔습니다만...)

그런데 이 영화(아웃레이지) 이전의 작품들은 모두 개인의 내면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뭐랄까 '도대체 이 삶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할까요.
영화가 자주 선택의 기로에 선 다케시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이유도 아마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 '아웃레이지'에서는 그 질문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정말 얼마나 막되먹은 세상인가!'하는 새삼스러운 회한이 있습니다. 다케시가 영화에서 자주 장르적 컨벤션을 비틀어 보여주는 것도 그만큼 달라진 세상에 대해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의형제가 사실은 협잡이고 조직의 안위를 걱정하는 보스는 사실 자기 배 채울 일 밖에 생각하지 않고 손가락을 갖다 바치는 사죄는 조롱에 지나지 않고 윗분들 모르게 커미션을 떼먹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말이죠...


빙 돌아왔습니다만, 다시 본 얘기로 돌아가서...
이 영화의 핵심은 조직과 인간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애초부터 조직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개인의 이익 추구를 가리기 위한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한 아프리카 국가의 '대사관'이 '비밀 카지노'로 운영되는 이야기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사실 대사관 에피소드는 영화에 그렇게 필요불가결한 부분이 아닙니다. 아마도 분명히 다케시는 영화의 주제를 위해 일부러 대사관을 넣었을 것입니다. 대사관으로 상징되는 국가라는 외피속에 있는 것이 바로 '카지노'라는 지극히 개인의 이익 추구의 장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아프리카의 대사가 개인적인 이익 추구에만 전념했던 중간 보스를 삽으로 파묻는 장면은
아마도 다케시가 '조직의 이익' 운운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가장 뼈있는 냉소일 것입니다.
다케시의 진언대로 조직 자체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이익 추구 뿐이지요.
 
하지만 순진하게 '조직의 이익'이라는 거짓말에 속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무라'와 그 부하들, 그리고 '다케시'와 그 부하들 입니다. 그들이 모두 죽는 것은 바로 이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무라는 살아남습니다만,) 그들이 처벌받은 것이 오로지 조직의 이념 같은 것을 순진하게 믿고 따랐기 때문이란 건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조직의 이념'이란 '것은 보스에 대한 충성', '의리'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사실은 보스의 이익 추구에 자발적으로 헌신토록 만드려는 도구 같은 것이죠.
'기무라와 그 부하들'과 '다케시와 그 부하들'의 유사성은 기무라 부하 하나가 달아나다 기차안에서 죽는 장면이 다케시의 부하 '미즈노'의 죽는 장면으로 반복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모두 죽기전에 내연의 여자를 찾았고, 가는 도중에 살해되죠. 다케시는 이걸 일부러 반복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걸 반복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그 둘이 사실은 동일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죠. 이 때문에 결말 부분 다케시는 바로 기무라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결국 순진하게 믿었던 이들은 모두 죽고 오로지 약삭빠른 놈만 살아남습니다.
조직의 이익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은 모조리 버리고 오로지 개인적 이익 추구에만 전념했던 사람들만 말이죠. 세상은 이제 그런 사람들만 살아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그런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것으로 끝이나죠.

'아웃레이지'는 세상으로 향한 다케시의 첫 시선으로 보여집니다.
그 시선 속에서 그는 차가운 웃음을 짓습니다. 허탈한 체념이 짙게 배인 그런 웃음을 말이죠.
그는 이 영화에 그 시선 속에 들어온 세상의 참모습을 담고자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꾸며도 가득한 것은 오로지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 뿐이라는 그런 진실을 말이죠...

듣기에 2부가 또 나온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세상의 현상태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이 영화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그 뒤의 얘기는 무엇일까요? 혹시 그런 세상을 모조리 깨부수는 어떤 상상적 복수는 아닐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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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킥 애스 - 아웃케이스 없음
매튜 본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마크 밀러의 원작도 매튜 본의 영화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도대체 왜 슈퍼히어로물을 보는(혹은 읽는)걸까?”
여기서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의 대답을 말하기 전에 생각나는 ‘마팔다’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만화가 뀌노의 한 만화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뀌노는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담은 4컷 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런 만화가 하나 있습니다.

거대한 회사라는 조직에서 일하는 한 우울한 사무원이 주인공인데

그는 일하다 가끔 스스로 자괴감이 들 때마다 화장실로 향합니다.

거기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마주보며 그는 누군가의 사진을

자기 얼굴에 갖다 댑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체 게바라’이죠.

그렇게 그는 거울을 통해 ‘체 게바라’가 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한 번

호탕하게 웃고는 다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반복하기 위하여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체 게바라’의 사진을 얼굴에 쓰는 것이

자신이 자기 삶에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로 이 뀌노의 ‘체 게바라’ 가면 쓰기 행위와

사람들이 슈퍼히어로 장르물을 보는 이유가 결국은 같다는 것이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래도(이것은 비단 이 영화만은 아니라 모든 슈퍼히어로물에서

다 그렇습니다만) 영화속에서 자주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게 변신과 코스튬플레이는 바로 그와 같이 삶의 무의미성에 짓눌려버린

현대인들의 소박한 자기 위안 행위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결국 그 출발점이 동일하다는 것 뿐이고 사실,
이 소박한 자기 위안적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일단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영화의 시작은 높은 빌딩의 옥상에서 슈퍼히어로로 코스튬을 한 사람이

거기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특별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인가!’ 선언하면서 뛰어내리죠.

그가 추락하는 도중 날개를 펴자 사람들은 진짜 히어로가 나타난 줄 알고

박수를 칩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대로 추락사하고 말지요.

여기서 마크 밀러는 그것이 바로 신문에서 ‘킥 애스’에 대한 것을 읽고

따라하다 죽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해서, 원작의 끝부분에 그는 다시 등장하는데,

시점은 영화 처음의 뛰어내리기 바로 전 빌딩의 옥상으로 오르는 모습입니다.

역시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곧 자신에 대한 기사를 읽게될 것이라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추락해서 죽어버렸죠.



하지만 매튜 본은 그자가 정신병력으로 인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해서

죽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매튜 본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고 시작합니다. 이것만 봐서는 매튜 본도 마크 밀러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어질수록 그가 추구하는 것은 슈퍼히어로를 통한 대리충족

입니다.(그것이 아마도 힛걸의 비중을 원작보다 꽤 많이 다룬 이유일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처음의 빌딩 옥상에서의 추락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고

거기서 추락이 아니라 비상하는 걸 보여줍니다.(원작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슈퍼히어로를 통한 대리만족의 최종 완성판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은 시작은 동일하였으나 도착한 곳은 서로 달랐습니다. 마크 밀러는 ‘킥 애스’를 통해 오시이 마모루나 안노 히데야키 처럼

만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현실로 다시 내동댕이치려 하지만, 매튜 본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꿈을 간접적이나마 실현시켜주려 합니다.



원작에서 드러나듯이, 마크 밀러에게 ‘가면쓰기’는 데이브가 왕가슴을 보며 자위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행위입니다. 자위의 끝이 결국 허무한 것처럼, 데이브 역시 그렇게 험란한 전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아니, 더 처참합니다.

데이브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케이티에게 용기있게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고 고백했다가 냉정하게 차이고 심지어 그녀는 친구 흑인에게 그를 구타하라고까지 합니다..

그렇게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온 밤, 데이브에게 케이티의 친구가 보낸 사진 하나가

핸드폰으로 전송되는데, 그건 케이티가 그 흑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독백을 남기며 원작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칸막이 안에 담겨 닫힌 문 뒤에서…

“나는 내 삶에서 이 이상 낙담한 적이 없었다.

나는 부끄럽지만 인정해야겠다.

그것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버려 며칠 밤을 울며 지샜다는 것을…”



마크 밀러는 데이브에게 가차없는 ‘no happy ending‘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거기까지 데이브에게 감정이입되어 함께 온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대리만족을 느낄 여지를 전혀 주지 않습니다.

남는 건 다만 허무함과 씁쓸함.
그것은 마치 가면을 벗고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정해진 일을 해야만 하는


만화속 인물이 느꼈을 씁쓸한 감정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마크 밀러는 ‘킥 애스’를 통해 슈퍼히어로물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위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것은 바로 빅 대디의 최후의 장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영화와 원작이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이 바로 빅 대디의 설정일 것입니다.

영화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아내의 복수를 위해 ‘빅 대디’가 되었다는 설정이지만

원작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레드 미스트의 간계로 데이브와 함께 붙잡힌 ‘빅 대디’.

마피아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합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혔는가 알기 위해서이죠.

결국 빅 대디는 그의 최후에 이르러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은퇴한 전직 경찰 같은게 아니야 난 회계사였어

신용회사를 위해 숫자 세는게 고작이었지

거기다 나를 정말 증오하는 아내랑 결혼했었지. 당신 같으면 그런 삶에 만족하겠어?

나는 내 친구도 싫었고 삶 자체가 싫었다. 그래서 딸애를 데리고 도망쳤어.

그녀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려고…”

“난 만화광일 뿐이야. 데이브, 자네와 마찬가지지.

민디는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지만, 난 그저 또 다른 한 명의 후레자식에 지나지 않아.”

“제길! 그럼 너 같은 만화광이 왜 우리를 뒤쫓았던 거냐?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 왜 하필이면 내 부하들을 골랐던 거냐구? 이 자식아!”

“간단해. 우리에겐 악당이 필요했으니까?”

“뭐?”

“난 민디에게 정말 살아 숨쉬는 삶을 주고 싶었다.

민디가 아메리칸 아이돌이나 보면서 자라는 걸 원치 않았어..

나는 민디가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이 되길 원했다.”

그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 역시 원작에서 사라집니다.



이와 같은 데이브와 빅 대디의 마지막 모습의 유사성은

(데이브는 케이티를 잃었고, 빅 대디는 민디를 잃었습니다.)

마크 밀러가 사실은 빅 대디와 데이브를 일종의 같은 연장선상에 놓은 인물로

설정하였음을 드러내 줍니다.(어쩌면 빅 대디는 데이브의 미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둘 다 그렇게 자기 위안적 행위에 불과한 것을 자기 본질로 체화시키려 하다가

처벌을 받는 것이죠.(아마도 그것이 데이브가 고문을 당할 때 거기에 전기 고문을

받는 이유이고 같은 의미에서 ‘설계’한 빅 대디는 머리에 처형을 당하는 것일 겁니다.)

마크 밀러는 이렇게 슈퍼히어로물의 한계를 명확히 긋고 싶어합니다.

환상은 환상일 뿐이고 환상과 현실을 혼동해 그것에게 위안 이상의 것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이떻게 보면 슈퍼히어로물을 쓰는 작가로서 그는 꽤 자학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WANTED나 OLD MAN LOGAN 처럼, 슈퍼히어로 보다 슈퍼빌란에게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에 레드 미스트가 하는 대사 ‘WAIT UNTIL THEY GET A LOAD OF ME’는 바로

죠커의 유명한 대사이기도 하죠.)



하지만, 매튜 본은 다릅니다.

영화엔 더 이상 원작에서 보여지던 처절함은 없습니다. 오히려 슈퍼히어로물의

장르적 쾌감으로 충만합니다. 그것도 아주 완성도 높게…

그렇게 매튜 본은 우리들에게 슈퍼히어로물을 통한 대리충족을 듬뿍 느끼게 해줍니다.

원작에서 데이브나 ‘빅 대디’의 가면은 무참히 찢겨 나갑니다. 고문을 당하는 순간

데이브의 가면은 반쯤 찢겨져 나갔고, 빅 대디는 가면이 벗겨져 얼굴이 엉망인 상태에서

처형됩니다. 마크 밀러는 이렇게 그들의 가면을 벗겨 가면을 벗은 그들이 현실에서 얼마

나 초라하고 무력한지 보여주려 합니다.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존재는 처음부터 슈퍼

히어로로 자라온 민디 정도죠.

하지마 매튜 본은 그 누구의 가면도 벗기지 않습니다. 빅 대디 역시 최후의 순간에도

그 가면을 벗지 않죠. 매튜 본은 그렇게 슈퍼 히어로를 끝까지 슈퍼 히어로로 남겨두려

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느끼고 싶은 슈퍼 히어로를 통한 대리만족을 보존시켜 주려

하려는 것이죠.



이상, 간략하게 마크 밀러의 원작과 매튜 본의 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얘기했습니다만

섣불리 뭐가 더 옳다고 말 할 수는 없겠죠.



여기서 다시 뀌노의 1칸 짜리 만화 하나를 인용하려 합니다.

그 만화는 극장 내부를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엔 지금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모던 타임즈에서 유명한 장면중 하나인 구두끈을 스파게티 처럼 먹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이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뀌노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층을 묘사해

보여줍니다. 맨 위층의 100달러 로얄석의 관객들은 너무 웃기다며 마구 웃습니다.

하지만 맨 아래 거의 바닥의 1달러의 관객들은 그것이 자기 얘기 같아서 씁쓸한 표정입

니다. 뀌노는 이렇게 같은 작품이더라도 자기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와 똑같이 마크 밀러의 원작을 더 선호하든, 매튜 본의 원작을 더 선호하든,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달린 일 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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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트 로커 - The Hurt Lock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는 일단 너무나 잘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132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내내

잔뜩 긴장한 채 보게 만드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면서도 일순 당혹감을 느끼는 건,

흔히 ‘전쟁 영화’라고 했을 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대규모 전투라든지 아니면 전쟁으로 인해 인간성이 황페화 된 것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동료 병사들간의 진한 휴머니즘 같은…

것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거겠죠.

거기다 이 영화는 이라크전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이라크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캐슬린 비글로우의 ‘허트 로커’는 전쟁 영화가 아니라

단순히 ‘전쟁’만을 빌려온 ‘액션’영화라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 이 영화는

만일, 전쟁 영화가 전쟁의 본질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가장 전쟁 영화다운 전쟁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 만큼 전쟁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없다는 것이죠.

아니, 보여주기 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아주 뛰어나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허트 로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객이 직접 전쟁의 현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리들리 스콧의 ‘블랙호크다운’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그 영화도 그냥 관객으로 하여금 그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했지요.

하지만 그 영화는 그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시간적 추이를

다 보여줍니다. 그렇게 전체적인 사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전쟁을 객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허트 로커>에는 그나마도 없습니다.

<허트 로커>엔 오직 조각 조각난 단편만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 단편들마저 그리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폭발물 처리반 EOD의 실제 처지와도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서 그들을 출동하게 만들지 모르는

폭발물들에게(특히 급조된 IED 같은 것들은 더더욱) ‘인과’라는게

있을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와 똑같이 전쟁에 참여하는 모두도 그저 자신이 속한

지금-여기의 상황만 알 뿐, 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시야의 한계’는 절대적입니다.

<허트 로커>에서 병사들이 망원 렌즈를 통해서야

비로소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죠.



게다가 캐서린 비글로우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도

관객이 EOD와 동일한 체험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주로 ‘출동-해체’의 과정으로 이루어 놓았습니다.

관객은 그들과 똑같이 아무런 사전 설명없이 느닷없이 폭발물이

있는 장소로 안내되고 그들의 시야와 똑같이 제한된 시야 속에서

사방이 한껏 열려진 장소에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과

어디서 튀어나와 폭발할지 모르는 공포를 느껴야 합니다.

(관객은 자주 등장인물의 주관적 시점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건 해체된 이후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마치 “대체 내가 왜 이걸 해야하지?”

라는 의문이 군인에게 허용되지 않듯이

“대체 제가 왜 저러는거야?”

라는 의문이 관객에겐 허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유의 틈은 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에

“어떻게 그렇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덤빌 수 있느냐?”에 질문에 “나도 모르겠다.”라는 대답은

그야말로 이 영화에서는 정확한 것입니다.



전쟁이 요구하는 것은

질문과 생각이 아니라

오로지 상황이 닥쳤을 때 요구되는 반응을 위한

반사신경일 뿐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엘드리지가 군의관 앞에서 했던

“제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이렇게 방아쇠를 당기면 톰은 살아요.

안 당기면 그는 죽어요. 이것 뿐이에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가 살인이라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고

전쟁이 요구하는 대로 반사신경처럼 행했다면

지금 그가 가지는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드리지가 그렇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전쟁이란 것에 그다지 중독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드리지는 영화 초반에 샌본에게 이라크에서 잔디 사업을 하면

크게 히트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에겐 이 전쟁에서 벗어났을 때

그렇게 보통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 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가 해체한 폭탄의 숫자에서 드러나듯이

전쟁에 너무도 중독된 나머지, 전장이 아니고는

그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영화의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전쟁은 마약이다.”라는 말은 마약에 깔려있는 중독성이야 말로

가장 전쟁의 본질을 잘 요약해 주는 말임과 동시에 캐서린 비글로우가

<허트 로커>를 통해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하지만 캐서린 비글로우는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하고 느끼게 하는 것 까지 나아갑니다.



‘중독’에는 아무런 이성적 판단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중독엔 오로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만 요구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게, 불을 켜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 처럼

자극이 있으면 단순히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즉각적인 반사신경적 행위와

같습니다. 중독은 ‘의지’와 ‘가치판단’을 뛰어넘는 영역에 있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중독이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의문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지고 감정도 메말라

점점 자극과 반응만이 전부인 일차원적 동물로 퇴화되어 가는 것일테죠.

그리고 이건 그대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영화는 자주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무심히

지켜보고 있는 군중들도 자주 보여줍니다. 하지만 곧 코 앞에서 폭탄이

터져 사람들이 죽어나갈지 모르는데도 그들의 얼굴엔 전혀 어떤 표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무심한 표정만이 전부입니다.

후반의 ‘인간 폭탄’은 그러한 중독된 상태에서의 인간성 부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일 것입니다.



영화에서 머무르는 날짜를 카운트 하는 게 아니라

본국으로 돌아갈 날짜를 카운트 하는 것도 의미심장 합니다.

마치 이 카운트는 중독중의 사람이 그것을 끊기 위해 얼마 만큼

참았나 헤아리기 위해 날짜를 카운트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담배 같은 것을 끊을 때,

‘오늘이 끊은 지 며칠이나 되었지?”하는 것 처럼 말이죠.



거기다, 단순히 출동-해체’의 과정으로만 이루어진 이 영화는

점점 출동하는 대원들 앞에 더 더 강력한 폭탄을 준비합니다.

처음엔 대전차포 로켓 하나이던 것이 여러 개가 되고

급기야는 자살 폭탄에 인간 폭탄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처음엔 여유있게 대처하던 EOD 대원들도 이제는 말수가 없어지고

미래에 대한 계획 보다는 단지 살아남기 위한 본능만이 남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영화는 전쟁이 일종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면

참여하는 사람들은 왜 중독되는가에 대해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건 바로 전쟁이 마약이 주는 체험과도 같이, 평범한 일상이 제공할 수

없는 극단적 체험을 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극단적인 체험은 일종의 ‘경이’를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해서

거기서 인간은 아무런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없고 그저 그것에 짓눌릴 뿐이니까요.



<허트 로커>는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 것 처럼 하면서

사실은 관객으로 하여금 절절하게 전쟁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중독성을 정말 잘 느끼도록 해 주는 영화입니다.

전작 'K-19 위도우메이커' 의 후반부에서 리암 니슨은 재판정에 선

해리슨 포드를 위해 이런 옹호 발언을 합니다.

“당신들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지만 나는 거기서 모든 걸 지켜봤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다면 당신들은 함장님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함장님을 판단할 수 있는 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 뿐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보기에 함장님은 우리가 보았던 가장 위대한 함장이었습니다.”

<허트 로커>는 바로 이러한 리암 니슨의 말이 잘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그렇게 전쟁 속에 던져진 자가 어떤 느낌을 가지는가?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 던져진 자에게 다가가 느끼게끔 해주는…





마침,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허트 로커>는

'K-19 위도우메이커' 와 어쩐지 좀 유사성이 느껴집니다. 리더가 교체되는 것도 그렇고

교체된 리더와 종래 있었던 구성원들과의 불화도 그렇고 거기다 엘드리지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되어라.”라고 상담해주는 군의관은

하필이면 에서 원자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어간 ‘크리스찬 카마고’였다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결론은 전혀 다릅니다.

의 결론은, 마지막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K-19’ 사건이

있은 지 25년이 지나 그제서야 그 때 동료들을 위해 희생된 동료들에 대한

추모가 허용되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행한 해리슨 포드의 추모사에서

잘 드러나듯이 일종의 ‘동료애’ 입니다 하지만 <허트 로커>는 이와 정반대에

있습니다(특히나 제임스를 해리슨 포드로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더 극명하게

벌어집니다.) 여기엔 남자들만의 끈적한 유대감도 없고, 유일하게 휴머니즘으로

보였던 행위들도 허무한 비웃음거리로 돌아올 뿐입니다. 남은 건 다만 점점

깊어지는 고독뿐이죠.

물론 고독은 중독된자의 유일한 동반자입니다만…



그리고 가장 중독된 자 제임스는 전작 <폭풍 속으로>의 패트릭 스웨이지의

또 다른 버전이기도 합니다. <폭풍 속으로>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중독되어 그것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 가면을 쓰고 은행을 터는

리더였습니다. 영화 <폭풍 속으로>는 마지막에 그가 50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거대한 파도를 타기 위해 그 파도 앞으로 서핑보드를 타고 헤엄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허트 로커>에서 제임스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폭탄을 해체하러

가는 모습이 그와 똑같이 찍혔더군요.

어쩌면 그것을 통해 패트릭 스웨이지가 그 파도 속에서 사라졌듯이,

제임스도 결국 가장 자기가 좋아한 현장에서 사라져벼렸음을 암시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촬영감독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Barry Ackroyd 입니다.

아마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을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꽤 낯 익은 이름이죠.
이 촬영감독의 커리어가 바로 켄 로치의 유명한 명작
‘RIFF-RAFF’와 더불어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 ‘레이닝 스톤’
‘레이디버드 레이디 버드’ ‘칼라송’ ‘빵과 장미’ ‘내 이름은 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등
수 많은 영화들을 켄 로치와 함께 만들었으니까요.
물론 이 말은 폴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 93’이 나왔을 때 해야만 했을 말이었겠지만요.
아님, 가장 최근의 ‘그린 존’ 에서라든가… 아무튼 너무나 반가운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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