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NFF (New Face of Fiction)
찰스 유 지음, 조호근 옮김 / 시공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필립 K 딕의 '토탈리콜'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처음으로 가상 여행 회사 ‘토탈리콜’에 갔을 때다
  그 회사의 사장이 주인공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다녀온 모든 여행의 공통점이 뭐였죠?”
  “네?” 주인공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사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그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죠.” 

  여행이란 이미지는 무엇보다 우리에게 공간을 이리저리 옮겨가는 것으로 흔히 그려진다. 그렇게 만일 이 이야기가 공간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도 역시 이와 똑같이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어떤 시간에 있던지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라고! 당연한가?  하지만 물론 여기엔 몇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 시간이 오로지 당신만의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시계로 재곤하는 그런 테일러가 만든 이래로 규격화된 근대의 시간말고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흔히 '배꼽시계' 같은 것으로 아직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오로지 주관적인 개인만의 시간말이다. 그런 시간 안에서라야 모든 시간에 있어서 공통점은 당신이란 말이 가능할 것이다. 하긴 결국 달리 생각해보면 공간이든 시간이든 어차피 당신을 떼놓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을 경험할 주체가 없다면 시간이든 공간이든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쇼펜하우어 말대로 공간이든 시간이든 오로지 경험으로 통해서만 의미를 얻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그 둘을 경험할 수 있는 당신이야말로 중요한 존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시간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참 많은 베르그송의 말을 빌리더라도 이것은 마찬가지 결론에 이른다. 베르그송도 근대적 시간이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특히나 근대적 시간은 시간을 단위별로 하나하나 쪼갬으로써 무엇보다 그저 순수한 흐름일 뿐일 시간을 억지로 공간화시키고 있다고 일갈한다. 베르그송은 그래서 주장한다.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주자고! 근대가 행한 시간의 공간화로 부터 시간을 해방시키면 시간에게 남는 건 오로지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흐름, 한 마디로 '지속'밖에는 없을 것이며 바로 그것이 시간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시간이 절대로 나눠질 수 없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순수한 '지속'이라면 그것은 오로지 경험할 수 있는 주체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시간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건 그것을 그대로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주체, 즉 당신 뿐인 것이다. 결국 시간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베르그송에 의해서도(나만의 자의적 왜곡이라면 죄송하지만) 시간이란 당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어떻게보면 하나마나한 얘기를 이렇게 장황스럽게 늘어놓는 것은 그저 단순히 당신을 어지럽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공간이든 시간이든 따지고보면 당신 자의식의 산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해서 만들어지는 '시공'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숟가락 장면 처럼 사실은 숟가락이 휘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 숟가락을 의지로 구부렸기 때문에 정말 구부러진 것이 아니겠냐는 그런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지금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를 길게 늘어놓고 있을 뿐인 것도 같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리도 장황한가 하실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정말 이 심심풀이 땅콩으로도 쓰이지 못할 얘기를 하게 만든 이유를 말해야겠다. 그것은 한 권의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찰스 유의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책이다. 제목만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짐작하지 못할 이 책은 단순하게 말한다면 시간 여행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제목 만큼이나 내용 또한 종잡을 수 없다. 왜냐면 이 소설은 우리가 익숙한 그런 시간 내용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전에 그 어떤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을 읽었든, 그것이 웰즈의 '타임머신'이든 패리 앤더슨의 '타임패트롤'이든 코니 월리스의 '둠스데이 북'이든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그 어떤 소설과도 같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읽어보면 아실 것!'이란 말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그 이유는 이렇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정말 시간 여행을 다룬다기 보다는 '시간 여행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얘기했던 대표적인 시간여행을 만일 당신이 읽고 있다고 한다면 찰스 유는 당신의 머리속으로 들어가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의식을 그대로 타자기로 재현해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신이 아니니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의식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못하고 그러니까 그런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밟을 것 같은 그런 사유의 과정들을(이것도 모호한가? 그럼 관습화된 장르적 독서 행위는 괜찮은가?) 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언제나 사물을 온전히 담기엔 모자름이 있다고 말했던 건 노자였던가? 아무튼 그의 말대로 아무리 내가 정확하게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려해도 제논의 거북이 처럼 어쩔 수 없이 남는 간극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간극은 내버려두고 바로 작품으로 뛰어들자! 수영을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따지지 말고 무조건 뛰어드는 것이란 말도 있듯이! 물론 익사의 위험이 있지만 어쩌면 돈오점수와도 같은 개안의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니... 

  소설의 배경은 타임머신이 상용화된 시대다. 이것은 시간여행 소설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시대를 비유한 것과도 같다.  소설을 한 번 직접 인용해볼까? (( )안은 나의 말이다.)

  사람들은 타임머신을 빌린다. (사람들은 서점에 가서 웰즈의 '타임머신'을 산다.)
  사람들은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웰즈는 미래로만 가잖아! 그는 그 책을 다시 꽂고 비디오방으로 향한다. 과거를 바꾸려 노력하는 마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벡투더퓨처'를 보기위해서) 


  그리고 과거로 돌아간 후에야 인과율이 자신이 생각하던 방식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붙들려버린다. (이런 마틴이 엄마랑 연애를 하니까 자신이 사라지네...) 

 자신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곳에, 자신이 가려고 했던 곳에, 가려고 시도하면 안 되었던 곳에, 문제가 발생한다. (웰즈의 타임머신이 어마어마한 미래로 가버리자 거기서 차마 믿기힘든 인류의 몰락을 보게되고, '벡투더퓨쳐' 2부에서는 욕심 때문에 가져온 스포츠 연감 기록으로 마틴의 현재가 지옥으로 바뀐다.) 

 (...) 내가 개입하는 곳은 바로 그 시점이다. 그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구출해오는 것이 내 일이다(p.36) (그래, 당신은 찰스 유 작가이니 모든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을 얼마든지 펜으로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액션'을 외침으로서 구해낼 것이고...) 

  자아, 이렇다. 이렇게 찰스 유의 소설 속 문장들은 얼마든지 현재 시간여행 장르를 소화하는 우리의 독서경험, 영화경험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읽기'를(혹은 '보기'를) 쓰는 소설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경험을 또 달리 재현해내는 것이며 그렇게해서 내용 자체 보다는 그 내용을 음미했던 당시의 자신으로 되돌려보내는 소설인 것이다. '시간이란 무엇보다도 집착의 산물이다.'란 말이 소설에도 나오듯이 이 소설은 시간과 감각(그렇게 경험)을 분리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경험 속에서 체험된 시간만을 진정한 시간이라 본다. 그래서 이 소설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시도하며 그렇게 소설 자체가 하나의 마들렌으로써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집적된 그 무수한 시간 경험중 어쩌면 아주 특별했거나 아니면 그냥 그렇고 그런 시간경험이었으나 왠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색다른 빛을 내면서 다가오는 그런 시간 경험으로 돌려보내는 타임머신으로도 기능하는 것이다. 

  타임머신은 누군가 시간을 정해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운전자가 있다. 시공을 멋대로 횡단하면서 온갖 우주의 시공간에 간섭가능한 운전자는 신과도 같다. 그렇게 그 타임머신이 운신할 수 있는 시공간에서 운전자는 전지전능한 신이나 다를바 없다. 그런데 그것이 소설속 우주라면? 그렇다면 모든 문장마다 간섭가능한 작가야말로 신이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찰스 유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우주를 특별히 'SF 우주'라 부르고 아예 고유한 이름마저 붙인다 'TN-31' 우주라고. 그것은 모든 소설이 아닌 단 하나의 이 소설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만을 위한 우주임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거기서 주인공은 수리공으로 일한다. 그의 임무는 시간 속에 조난당한 자들을 구해내는 것인데 그 행위는 주로 그들의 시간 문장을 시제 문법에 맞게끔 적절하게 고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지고보면 그는 수리공이 아니라 차라리 '교정자'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 시제 고치기는 자의적이 아니라 하나의 모범이 되는 문법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그 문법이 바로 '시간문법학'이다. 그 때 그 때의 시간에 알맞은 시제를 쓸 수 있도록 하는 문법이다. 이쯤 풀어놓고나면 앞서 내가 얘기했던 그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조난자들을 구조하는 것은 작가가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을 문장을 고치거나 새로 씀으로서 구하는 것과 똑같고 아무리 작가라 하더라도 문법을 무시할 수 없으니 그렇게 시간문법학에 맞게끔 고치는 것과 또 똑같다. 그러니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찰스 유'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인 것이다. 이 소설은 마치 진짜 찰스 유가 하나의 시간 여행 소설을 쓰면서 의식속에 일어나는 자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담아낸 것 같은 소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의식적 시간을 다룬다고 해서 이 소설이 정말 시간 여행을 다루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앞에서 찰스 유의 소설이 가진 독특성을 말하면서 '이 소설이 시간여행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시간여행소설을 읽는 경험을 다룬 소설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사실 그 말도 틀린 것이다.  이 소설을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에 충실하자면 그 어떤 소설보다도 '진정한 시간 여행'을 다룬 소설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왜냐면 누누히 말해온 대로 정말 시간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베르그송의 말 그대로 순수한 지속 밖에는 없는 시간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개인' 밖에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다 사람마다 다르며 지극히 상대적이다. 굳이 그것에 관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빌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누구가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같은 1시간이더라도 내 옆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느껴졌던 적이. 싫은 사람이 있을 때면 1년 보다도 길어보이고 사랑하는 연인과 있으니 1분 보다 더 짧게 느껴졌던 적이 말이다. 바로 그 경험이 진짜 시간인 것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간이란 어디까지나 그렇게 서로다른 상대적 시간들을 형식적으로 일치시키기 위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H.G 웰즈의 '타임머신' 같은 것은 굳이 '양자이론' 때문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 어떤 기계도 오로지 주관적으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을 단일한 수치로 절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외부적 세계로의 시간여행이야 말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정말 가능한 것은 그렇게 철저하게 자의식적 시간 여행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만일 어린시절을 회상한다면 바로 그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고 만약 당신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 그것으로 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 있어 당신에겐 그 어떤 시간도 흐르지 않는 것이 된다. 마치 소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영원히 하나의 시간만을 사는 '타임루프'에 갇혀있듯이 말이다. 

  베르그송의 말대로 당신이 현재 있는 그 공간에 집착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 당신은 늘 시도 때도 없이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소설 속 찰스 유가 시간 시제를 살짝 바꾸는 것 만으로도 시간 패러독스에 빠져버린 이들을 구해내듯이 당신 역시 그 기억을 뇌리에 새길 때마다 당신에게 존재했었던 그 다른 시간대로 여행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최초로 시간 여행기를 만든 주인공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현재를 경험하고 과거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현재를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데자 뷔가 바로 현재의 기억이 아닐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현재를 기억할 수 있다면, 과거를 경험하는 일이 불가능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어떤 종류의 기계일까요? 이 기계, 저와 제 아들이 함께 만든 이 기계는, 그런 일종의 인식 기계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장소에서와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탑승자의 마음안에서도 작동하지요. (p.258) 

  이 말대로 타임머신은 인식 기계다. 당신의 마음에 나이테처럼 그려진 그 모든 기억들을 인식하는 기계.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아마도 진정한 타임머신의 정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계는 바로 당신의 머리 자체 내부에 이미 주어져 있다. 그것을 당신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궤변인가? 아니 그만큼 우리가 근대가 만들어낸 시간이라는 관념에 너무 뼈속 깊이 지배당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만큼 시간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란 관념은 라캉이 말한 일종의 초자아(인간을 멋대로 규정하려는 외부적 사회적 권력 같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가 싶다.)이다. 우리의 내부적 시간을 거기에 맞춰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그러니 사실은 나이라는 것도, 늙음과 젊음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시간은 오로지 당신 혼자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른 누구의 시간을 대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나이라든가 젊음과 늙음 식으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실 시간으로 부터 자유로운 자들이다. 공간은 우리를 가둘 수 있지만 그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 공간을 횡단하고 때로는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찰스 유의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렇게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당신 자신이 얼마든지 시간과 공간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찰스 유가 앞서 말했듯 SF를 읽는 경험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가 약속된 '시간'이란 형식으로 서로의 시간들을 맞추듯이 그저 오로지 개인적일 수 밖에 없는 시간 경험을 '장르 소설을 읽는 경험'을 통하여 독자로 하여금 '추체험'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당신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찰스 유의 시간'을 경험하지만 거기에 또 그것을 읽고 있는 '당신 자신의 시간'마저도 경험하는 것이다. 글이란 바로 그것이지 않은가. 그것을 쓴 자와 읽는자의 시간이 서로 중첩 하는 것이지 않은가. 찰스 유가 계속 장르소설적 독서 경험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간의 중첩'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누구의 시간도 다 개별적으로 대등하게 존재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로 겹쳐질 수 없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여기서 찰스 유가 인도하는 여행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이 소설을 따라 이동하면서 여기에 있는 그 어떤 문장이 당신으로 하여금 기억 속의 어떤 시간을 인식하도록 만든다면 거기에 따라 그렇게 당신만의 시간 여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겐 광대한 우리만의 시간이 있으니까... 이것을 소설에서 찰스 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의 극한이며, 그 극한이란 현재이다 (P.323) 

  멋진 말이다.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숙고해보면 이 말이야 말로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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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6-2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책이죠.

ICE-9 2011-06-23 20:46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님도 벌써 읽으셨군요^ ^
한 편으론 이민자의 시간 경험으로도 읽을 수 있을 듯 해요.
전혀 낯선 곳에서 전혀 낯선 시간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은 이 소설의
시간 처럼 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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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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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찬찬히 읽었다. 밤에 조금 아침에 조금 때에 따라서는 가지고 나가서 쉴 때마다 조금씩. 그래서 초반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오웰의 문장들이 그렇게 쉽게 소화되는 것들도 아니곤 해서 가다 끊고 다시 앞에서 읽어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조금은 지루했고 처음엔얼른 마음 속으로 콕콕 박아넣기가 어려웠던 소설이다. 그렇게 볼링의 어린 시절 얘기가 끝나고 나서, 그가 잡지 못했던 거대한 잉어가 가득 있는 연못 얘기가 나오고 나서 5장 부터는 그나마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부터는 그저 일상의 빈 부분만을 채우곤 하던 그 책이 오히려 책을 읽다 빈 부분만을 일상이 채우도록 만들고 말았다. 오웰의 이야기는 신기했다. 1939년에 지어졌다는 이 소설이 전혀 쾌쾌묵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가 세밀하게 복원해내는 일상들은 그대로 지금 현재 한국의 모습과도 많이 겹쳐지기도 했다. 특히나 이런 부분... 

 물론 우리 같은 사람의(주인공은 조금은 아래에 위치하는 중산층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같이 잃을 게 있다고 상상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엘즈미어로드 주민의 9할은 자신들이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엘즈미어로드와 그 주변 단지 전체는 사실상 '헤스페리데스 주택단지'라는 거대한 사기판의 일부이며 이 단지는 '명랑 신용 주택금융조합'의 소유다. 주택금융조합은 아마 현대의 가장 영약한 사기 집단일 것이다.( ...) 주택금융조합의 협잡이 놀라운 것은 당하는 사람들이 협잡꾼이 자기들한테 무얼 베푼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기꾼한테 한대 얻어맞고도 그의 손을 핥는 격이다.(...) 우리가 실은 소유주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 모두 집값을 지불하고 있는 중인데 마지막 할부금을 내기 전에 무슨 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는 그런 심리를 더욱 부채질 한다. 우리는 모두 매수된 것이며, 더 딱한 점은 우리 자신의 돈으로 매수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한국의 '하우스 푸어'랑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그리고 볼링의 아버지가 하시는 종자 가게가 전국적 체인망의 하나로 들어온 새라진 때문에 서서히 망해가는 모습은 또 지금 한국의 기업형 슈퍼마켓이 골목마다 터줏대감으로 버티고 있었던 하루벌이 자영업자들을 서서히 질식시켜가는 것과 또 어찌나 그리 닮아보이던지...  그렇게 오웰의 소설을 읽다보면 무려 70년이 넘는 시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실의 한국 모습을 참 많이도 볼 수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인생에 맞먹는 그 오랜 시간동안 자본주의는 어쩌면 그리도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것인지, 어쩌면 그리도 내내 자기보다 낮은 자들을 착취함으로써만 존속해왔는지 참 많이 씁쓸하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하여 내가 꼭 산소가 바닥나 조금의 공기를 마시려 오히려 물 밖으로 입을 내밀고 뻐금거리고 있는 언젠가 본 연못의 잉어 같았다. 

  아마도 이 책의 원제 Coming up for Air'가 뜻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상황일 것이다. 조금의 공기를 얻기 위해서 물 속이 아니라 오히려 물 밖에서 구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 그런데 왜 절박하고, 조금의 숨이라도 얻으러 그렇게 나가기를 애쓰는 것일까? 

  그건 한 때 기분전환 같은 것이 아니다. 문득 중년이란 삶이 생각해보니 가족이든 일이든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 갑자기 인생의 의미를 잃은 것 같이 느껴져서는 더더구나 아니다. 더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를 보면 그런 남자가 나온다. 남부러울 것 없이 성공한 삶을 살던 남자가 공사장을 지나다가 하마터면 돌에 깔려 죽을뻔 한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남자는 그렇게 죽음을 목전에 둔 경험을 하고서야 문득 자신의 삶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알고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홀연히 사라진다. 1930년대 공황기의 미국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맞춰 살아야했던 미국인은 모두 이렇게 홀연히 자신의 인행으로 부터 달아나는 꿈을 꾸곤 했었다. 당시 유행했던 서부극에서 영웅들이 마지막에 결국은 자신을 붙잡는 연인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터벅터벅 황무지로 사라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저마다 다 그렇게 영화 속 '쉐인' 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웰의 조지 볼링이 그렇게 경마를 하다 우연히 벌게된 17파운드를 가지고 일탈을 꿈꾸는 것은 그런 것과 다르다. 물론 그 역시도 '주당 5에서 10파운드 벌이'의 인생이고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도 서슴없이 반말을 듣는 '터비(tubby: 뚱보)'인데다 사람들이 뚱보에게 가진 선입관에 스스로 끼워맞추며 살아가지만, 그렇게 또 돈에 기갈이 든 것 처럼 구는 밥맛 없는 아내와 애정없는 가정생활을 하느라 힘겹긴 하지만 정작 그가 스스로 '전쟁전 여름'이라 부르는 그 어린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그 곳으로 가고 싶어하고 어린 시절을 자꾸만 떠올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자꾸만 엄습해오는 전쟁의 기미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초반에 온 영국인의 관심을 받으며 신문에 연일 오르내리는 '여자 다리 한쪽'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 한쪽만 남은 다리는 지금은 사라진 나머지 신체가 언젠가는 도래하리라는 예고이며 바로 그 사라진 신체는 전쟁을 의미한다. 소설의 후반부 볼링이 그토록 원하는 곳으로 갔을 때 우연히 훈련중 실수로 그 곳이 폭격을 당하는데 볼링은 거기서 또 다시 떨어져나온 다리를 보게된다. 그 때 볼링은 정말 공습을 당하는 줄만 알았고 그렇게 그건 전쟁 상황에서 문득 뛰쳐나온 다리 한짝이었던 것이다. 소설의 초반은 이렇게 내내 '머리 위로  폭격기 한 대가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p.30)' 처럼 끊임없이 전쟁의 분위기가 은근 슬쩍 드러난다. 따라서 그가 그 시절로 다시금 돌아가고 싶은 것은 전쟁 때문이며 그것은 그가 전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전쟁을 두려워하는가? 

   낯선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가자면 모두 밀랍인형 같다는 상상을 하지 않기가 어려운데, 그들 역시 나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할 지 모른다. 그리고 요즘 내가 계속해서 느끼게 되는 이 기분, 즉 전쟁이 임박했으며 전쟁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리라는 기분도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닐 터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내 곁을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포탄이 터지고 흙이 튀는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분명히 있었으리라(p.43) 

 그것은 여기 나와있는대로 전쟁이 모든 것을 끝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가 익숙하게 알아왔던 세상을 모조리 다른 무엇으로 바뀌버리기 때문이다. 그 어린시절의 전원적인 자신의 마을 로이빈필드가 1차대전을 겪고난 현재 예전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져버린 것 처럼. 그렇게 자신이 꿈꾸던 거대한 잉어들이 가득했던 연못이 있던 곳이 정신병자들을 위한 요양소가 되어버린 것 처럼. 조지 볼링에게 익숙했던 모든 삶이, 변함없이 이어지리라 확신했던 모든 삶이 전쟁으로 인해 다 무너지고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절박한 심정으로 숨쉬러 나가고 싶은 곳은 전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함이다. 그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확고한 무엇을 스스로 찾게되길 바란다. 그래서 '전쟁 전 여름', 그 꿈꾸던 거대한 잉어들이 가득했던 곳, 성실한 아버지가 열심히 일만하면 어려움 없이 살리라 순박하게 꿈을 꿀 수 있었던 그 곳, 

  끼니 같은 것들에 관한 한, 우리 집은 모든 게 시계처럼 돌아가는 집들 중 하나였다. 시계 같다고 하면 기계적인 것이 연상되니, 그 보다는 자연적 흐름에 가까웠다고 하는 게 좋겠다. 말하자면 우리는 해가 다시 뜰 것을 알듯이 내일이면 아침 식탁이 차려질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p.75) 

  그가 가고자 했던 곳, 그가 진정 찾고자 했던 곳은 바로 이런 곳이었다. 따라서 초반에 조금은 지루할정도로 아주 세세하게 복원되는 그의 어린시절은 사실은 그 만큼 그가 절박하게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례로 그가 지금 그의 현실을 묘사하는 모습을 보라. 어린시절의 묘사에 비한다면 그건 그저 고속으로 질주하는 KTX의 차창을 스쳐가는 풍경 정도의 묘사 밖에는 안되지 않는가. 

 하지만 물론 그의 그런 시도는 보기좋게 실패한다. 그토록 절박한 심정으로 예전의 마을을 찾았지만 이미 모든 게 변해버린 뒤였다. 그리고 그 변모의 절정은 바로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에서 나타났다. '전쟁 전 여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시대의 하나의 상징과도 같았던 연인 엘시 워터스는 '어깨 퉁퉁하고 몸집 푸짐한 할망구가 다 되어 뒤축이 몹시 닳은 구두를 신고 뒤뚱뒤뚱 가고 있었(P.294)'던 것이다. 그는 경악한다. 전쟁은 실로 너무도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그렇게 거대한 잉어가 상징하듯이 많은 것을 앗아가버린 것이었다. 따라서 그런 그가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쟁 중 어이없는 보직과 그 후 그가 보험회사에 취직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주었던 '죠셉 침 경'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더 확고해진다. 전쟁과 그 후의 영국 자본주의 사회가 모두 '죠셉 침 경'으로 묶이는 것은 전쟁 때와 지금의 영국 자본주의가 전혀 다르지 않은 단순한 연속된 세계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죠셉 침경 아래에서 전쟁을 치르며 목숨을 걸었듯이 이제 전후의 영국 자본주의 아래에선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똑같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쟁과 전후의 영국이 별로 다르지 않다라는 사실은 그 모든게 전쟁으로 일어난 결과임을 또 짐작하게 만든다. 따라서 당연히 현실의 영국을 지독히 혐오하고 있는 볼링에게 그 모든 걸 가져온 전쟁이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내내 읊조린다. 다시 한 번 더 전쟁이 일어나면 이제는 진압봉으로 머리를 두드려 맞고 마구 잡이로 끌려가는 그런 개인의 인권이 한없이 유린되는 전체주의 사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그는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과감히 길을 나섰던 것이나 결국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의 근거는 그 어디에도 찾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초라한 일상인으로 돌아간다. 초반에 그와 같은 계층의 사람들은 뭔가를 잃지 않을까 잔뜩 걱정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호기롭게 예전의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힐다가 어떻게 나와도 초연했던 그가 막상 자신의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정말로 힐다를 잃는 건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렇게 떠나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 된다. 그의 걱정은 기우였고 역시나 그가 애초에 예상했던 대로 힐다의 계략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계략에 놀아난, '끊임없이 백치짓을 하는' '가치있는 중요한 일 말고는 무엇이든지 할 시간이 있는' 그런 '주당 5에서 10 파운드 벌이를 하는' 넉살 좋은 '뚱보'로 돌아간다. 곧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거대한 전화의 불길이 닥쳐오는 것도 모른 채... 

  일상은 얼마나 견고한 것일까?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인간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얼마쯤 될까? 비관적인 소설의 결말은 오히려 그러한 희망의 근거를 없애면서 더더욱 독자들에게 일상에 함몰되지 말 것을 호소한다. 일상은 전쟁 한 번으로 확 바뀌어버릴 만큼 여지없이 약한 것이며 거대한 수레바퀴안에 있는 인간의 운신의 폭은 좁을 지 모르지만 그건 그 자신이 그 수레바퀴에 머무르길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견고해 보이는 일상은 볼링이 언젠가 씹었던 '프랑크 프루터'안의 생선살 처럼 보기좋은 허울에 지나지 않고 거대한 수레바퀴와도 같은 일상에 함몰되는 것도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략에 속아 선택한 것 뿐이다. 힐다의 계락에 빠져버린 죠지 볼링이나 초반과 중반에 나오는 한 개인의 예측을 훌쩍 뛰어넘는 자본주의 사회가 구조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우리의 것을 원하는 누군가의 계략과 음모로 이루어져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오웰은 우리가 속지 않기 위해 언제나 홀로 깨어있으며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제 머리로 헤아리면서 의심스럽게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라며... 

  모로코에 있는 마라케시의 한 요양원에서 오웰은 폐질환을 앓는 가운데 이 소설을 써내려 갔다. 소설의 조지 볼링 처럼 한 번 마음껏 숨쉬어 보는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 무엇보다도 가장 바라는 일이었을 것이다. 닥쳐오는 전화의 예감으로 그러지 않아도 답답증을 느꼈던 오웰에게 이 소설은 그렇게 상상적으로나마 제대로 숨쉴 수 있는 여지가 되어주었으리라. 소설에서 조지 볼링은 제대로 큰 숨 한 번 쉬지 못하고 그저 그런 누추한 자신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볼링이 닫아 논 그 문 뒤에서 제대로 큰 숨을 한 번 쉬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웰이 열어놓은 창으로... 그리고 오웰의 속삭임을 듣는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네 안에 있다. 네가 원하면 그 무엇이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될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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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첫 장면에서 기겁했다. 안그래도 제목이 으스스한데 첫장면부터 고어적 연출이 심상치 않아서 대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려고 이렇게 세게나가는가 싶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다 작품에 대한 정보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얼른 든 생각으론 정말 제목처럼 내내 사람으로 만든 요리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카를로스 발마세다의 두번째 소설인, '식인종의 요리책'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요리와 정치의 관계를, 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와 요리와의 관계를 다룬 소설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른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영국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라는 영화다. 상영되자마자 컬트의 반열에 올라서버린 그 영화에서도 이 소설 처럼 카니발리즘(食人)과 독재와의 관계를 다루었었다. 아마도 결말이 요리사가 독재자를 정성껏 요리해 파티에 참석한 고관들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 영화처럼 이 소설도 그렇게 카니발리즘과 독재와의 관계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세계1차대전으로 갑작스레 부흥하게된 한 해변 도시의 레스토랑 알마센의 70여년에 걸친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그렇게 허구의 역사와 현실의 역사를 교묘히 교차시켜 70여년에 걸친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고 있다. 겨우 274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말이다. 

  이렇게 하나의 공간에 집약된 기다란 역사적 줄기를, 그것도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내력을 동등하게 소상히 다뤄가며 드러낸다는 점에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한편,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요리사들과 그들의 요리책을 마치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그렇게 그야말로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행복한 결합이라 할 만하다. 

  기이하게도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이탈리아와 독일을 끌어들인다. 모두 파시즘이란 전체주의를 경험한 나라들이다. 소설의 초반 그러니까 알마센의 근원이 되는 레스토랑을 세웠으며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기도 한 신비의 요리책 '남부해안지역 요리책'을 쓴 저자이기도 한 카글리오스트로 쌍둥이 형제는 어쩐지 로마를 세웠던  로물루스,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이 그렇게 고향을 떠나 로마라는 나라를 건국했듯이, 카글리오스트로 형제도 고국을 떠나 머나 먼 아르헨티나에서 그들만의 레스토랑을 만든다. 그렇게 레스토랑은 어쩌면 정말 '로마'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에 있으면서도 '로마'인,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외부'로서 존재하는지 모른다. 카글리오스트로 형제에게 신비의 요리법들을 전수했던 마시모 롬브로소 역시도 이탈리아인이었다.(롬브로소란 이름때문에 자꾸만 '생래범죄인설'을 만든 체자레 롬브로소가 떠올랐다. 롬브로소는 현재 프로파일링 기법의 창시자라고도 일컫는데 그렇게 그는 범죄인의 외모를 집중 연구하여 범죄인이 가지고 있는 외모적 특징들을 추려내어 진짜 범죄 수사에 응용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범죄인의 외모를 찬찬히 관찰하는 롬브로소의 모습은 왠지 어떻게 요리할까 하면서 사람 고기들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는 세사르 롬브로소의 모습과 많이 닮아보인다. 아무래도 그런 이미지의 연상적 작용을 위해서 롬브로소의 이름을 정말 택했던 것은 아닐런지....) 알마센은 바로 이들 세사람의 힘으로 완성된 것이었는데, 사실 마시모는 늘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꿈꿨지만 1차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아르헨티나에 눌러 앉아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1차대전은 알마센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었고 더구나 앞서도 말했듯, 알마센을 부흥시킨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1차대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바다를 넘어 아르헨티나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불행이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 법이고, 재앙이란 사회적 계층 같은 건 무시하기 마련이며, 처절한 액운이란 혈통 같은 건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민자들 역시 유럽에서 먼저 건너온 친지들을 찾아내는 데 실패해 거지꼴이 되어버렸고, 그러는 사이 엉겁결에 대서양이라는 바다가 되돌가갈 수 없는 철조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탓에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 잃은 고아가 되었고, 수많은 남자들이 아내를 잃은 홀아비 신세가 되었으며,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달려든 전쟁이라는 괴물은 마을 곳곳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아르헨티나에도 상당수의 유럽인들이 돌아갈 곳을 잃고 눌러앉게 되었다(p.43) 

  이렇게 말하자면 알마센은 1차대전으로 고향을 잃은 자들로 만들어진 그들이 아르헨티나에 만든 새로운 영토 혹은 고향이었으며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외부였다. 그렇게 발마세다는 이 알마센이 가진 '아르헨티나의 외부로써의 특성'을 형성하고는 뒤이어 바로 그 외부적 성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바로 그 뒤 초창기 맴버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다시금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새로운 후손들이 알마센으로 오게되는 장면을 통해서다. 그들이 이탈리아를 떠나 알마센으로 오게되었던 것은 바로 무솔리니가 총리에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체주의화되어가는 이탈리아를 떠나 알마센으로 오게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다 분명하게 발마세다가 알마센이 가진 외부적 특성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하는 것인지 알 수있다. 그것은 '알마센'이 다름아니라 바로 전체주의 자체에 대한 저항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알마센을 만든 카글리오스트로의 형제가 사실은 로마의 창시자 로물루스,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했던 우리의 의심이 사실은 맞는 것임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그 쌍둥이 형제에 의해서 건국된 로마가 초창기에 공화정의 형태를 띄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더 그렇다. 그렇게 로마 초창기 공화정은 전체주의에게 있어 극단의 정치적 형태라 할 만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에 있어 알마센의 의미를 아르헨티나 독재에 대한 저항 공간으로 만든다. 그가 이렇게 하필이면 레스토랑을 그런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요리가 가진 이타적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요리는, 특히 레스토랑의 요리는 더욱 더 그렇듯이, 내가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을 위해 혹은 더불어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초부터 이타적 행위인 요리와 오로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독재적 권력을 그렇게 대비시키려는 뜻에서 레스토랑을 그런 저항의 공간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을 방증이라도 하듯, 소설은 알마센을 거쳐가는 세대들이 모두 전체주의와 독재에 저항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신념들이 세대를 거치는 동안 희석되어 가듯이 그렇게 알마센을 통해 변함없이 이어져온 그들의 모습도 끝내 그들의 가장 마지막 후예 '세사르 롬브로소'에 이르러서는 단절되고 마는데, 바로 그가 소설의 초반부 자기 엄마를 물어뜯었던 그 사람이다. 

  마지막 후손, 세사르에 와서 알마센은 열린 이타적 공간에서 폐쇄적인 이기적 공간으로 변질되고 요리의 의미도 더이상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로 변질된다. 그것은 그가 그의 이모와 나누는 사랑을 통해서 더욱 견고해지는데, 발마세다는 여기서 궁극적으로 카니발리즘과 독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 지 드러내준다. 소설은 이렇게 말한다. 

  아르헨티나의 정국은 육식문화를 부채질했다. 역사르 되짚어보면, 각각의 시대별로 어떤 스타일의 음식이 유행했는지를 세세히 설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결국 각각의 시기는 나름의 음식 문화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며, 유행하는 맛과 풍미는 늘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과 별개일 수 없음이 확인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머리' 보다는 '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명료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음식을 보면 시대적 열광과 두려움이 무엇인지, 결함과 문제점은 무엇인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혐오하고 집착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결점과 어떤 미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수 있으니까 말이다. 피의 기록에 따르면 독재정권이 마련한 화려한 연회를 즐길 수 있는 자들은 매우 한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재자가 군림하면 대다수의 대중은 굶주리고 허기지게 되며, 대부분의 평범한 가정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차분한 슬픔 속에서 빵 한조각을 나누었고, 그런 그들에게 포도주는 수세기 전 부터 그래왔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여겨졌다.(p.238 ~ 239) 

 이렇게 독재정권과 인육이 자주 관계를 맺는 것은 인육이야말로 여기 언급한 대로 독재정권의 얼 그렇게 정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인간을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의 향연이란 오로지 내 배를 불리기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핍박 받고 고통받는 가난한 서민들이 빵 한 조각이나 포도주 한 잔을 나누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마지막에서 발마세다가 굳이 예수님의 보혈을 운운하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이타적 향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리라. 

 세사르의 존재를 통해 발마세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쩌다 세사르가 그런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도대체 거기엔 무엇이 작용한 것일까? 소설은 세사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상세하게 말해준다.

 세사르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을 먹고 취해서는 우연히 경찰청장의 장례식을 차로 들이받는다. 그리고 그 때문에 테러리스트로 오해 받아 총알 세례를 맞고 숨진다. 그 후 정권에 의해서 앎센 자체가 반정부테러세력으로 의심받으면서 알마센 마저 폐쇄되기에 이른다. 세사르의 엄마는 세사르를 임신한 채 경찰에 끌려가 모진 심문을 받는다. 이전에도 페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탄압은 받았지만 지금에 비하면 오히려 하찮을 정도다. 세사르는 바로 그러한 와중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권력에 의해 완전한 단절이 있고나서 변해버린 세사르가 태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소설이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담아왔음을 상기한다면 이것 역시도 어쩌면 오랜 군부 독재를 거친 탓에 이전의 아르헨티나와는 결정적으로 변해버린 지금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은근히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사르'는 발마세다가 바라보는 현대 아르헨티나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오랜 군부독재를 경험한 탓에 이제는 완전하게 변해버린 현재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인지도 모른다.(어쩐지 현재 한국의 모습과도 통하는 것 같다.) 

  아르헨티나 역사가 어쩌고 카니발리즘과 독재가 어쩌구 했지만 이 책은 작고 채 300페이지가 안되는 가벼운 소설이다. 그리고 그 크기와 무게 만큼 놀랍도록 빨리 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얘기해온 것 처럼  그렇게 작거나 가볍지가 않다. 한 번쯤 읽어 볼만한 작품으로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분위기를 좋아하신다면 더더욱 추천한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배고플 때는 이 책을 읽지마시라는 것! 여기엔 아주 많은 상세한 음식의 묘사가 나온다. 읽으면 절로 식욕이 인다. 그래서 깊은 밤에 읽으면 문득 라면 생각이 간절해지곤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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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의 사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1
수사나 포르테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들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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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니아'하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이다. 

그의 소설 '부서진 4월'을 통해 들여다보았던 알바니아는 소설이 1980년대라는 비교적 최근의 시간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현대적이지 않은, 마치 여전히 중세인 것만 같은, 신화와 야만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그래서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 그런 나라였다. 나중에 그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유럽에 있다는 걸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카다레가 보여주었던 풍경으론 알바니아가 꼭 중동 어디쯤에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바니아는 그렇게 이상한 나라였다. 유럽에서 유일한 이슬람 국가. 그리고 마치 유럽을 관통했던 역사적 흐름들이 어쩐지 알바니아만은 비켜나가버린 것 처럼 전혀 근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마치 고인 물 마냥 아주 오래도록 전해내려온 고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나라. 그 특이성과 항구적인 불변성은 유럽의 화약고라고도 불렀던 발칸반도에 자리잡은 알바니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더욱 더 기묘하게 보였다. 그들은 어떻게 20세기를 휩쓴 전쟁의 불길 속에서도 자신의 전통을 지켜가며 생존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알바니아의 궁금증을 키우고 있던 차에 또 하나의 소설이 불현듯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것이 바로 수사나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이었다.

 수사나 포르테스가 그려내는 알바니아도 카다레와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다레의 '부서진 4월'이 주로 아직도 꿋꿋이 고래로 부터 내려온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북쪽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쓰여졌다면 프로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은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카다레가 역사의 중심에서 비껴나 그 역사적 시간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항구적인 대지와도 같이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 온  알바니아의 본질을 보여주려했다면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은 그 역사적 중심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가는 알바니아의 모습 자체를 보여주려 한다. 아마도 그것은 카다레가 바로 알바니아 사람이고 포르테스는 알바니아 사람이 아니라 스페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외부인이고 아무래도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의 시선으로 밖에는 알바니아를 바라볼 수 밖에 없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관찰자의 시선은 마치 인류학자의 시선과도 같아서 참여자로서는 그를 둘러싼 상황이라는 테우리로 인하여 시선의 제약 때문에 볼 수 없는 그 바깥을, 관찰자는 내부와 외부 아울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알바니아에 대해서 보다 완전하고도 객관적인 지평을 열어보일지도 모른다. 

  불현듯 다가왔던 알바니아를 다룬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강하게 연상되는 영화가 하나있다. 

  바로 '붉은 수수밭'으로도 유명한 중국 감독 장이모우의 '국두'다.  영화 '국두'는 중국의 한 염색을 전문 으로 하는 집안을 배경으로 삼촌이 돈을 주고 데려온 신부와 조카가 금기를 어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다룬 영화이다. 이것은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형의 아내와 금기의 사랑에 빠지는 동생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결국 영화 ‘국두’에서 이 금기를 어긴 두 남녀는 아들을 하나 낳는데 조카는 아이의 앞에서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없어 번민한다. 이것 역시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주인공에 얽힌 출생의 비밀에서 드러나는 진짜 아버지의 존재와 유사하다. 나중에 삼촌은 중풍으로 쓰러지는데 이제 삼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조카와 아내는 결국 그에게 태어난 아이가 그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털어놓고 분노한 삼촌은 아이를 죽이려고 하지만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친자식처럼 여기고 살려한다. 하지만 결국 삼촌은 염색통에 빠져 죽고 아이는 사실은 자신의 부모인 그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하고 복수를 하려한다. 영화는 이렇게 복잡하게 뒤얽힌 치정관계를 보여주는데 하지만 거기엔 단순히 금기를 위반한 사랑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은밀한 의도가 숨어있다. 

  아마도 내 생각엔 여기에 깃든 보다 깊은 은밀한 의미는 그대로 이와 유사하게 얼혀진 치정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알바니아의 사랑’에도 그래도 통용될 것 같다. 그럼 본래 영화 '국두'가 그 치정관계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이 거쳐 온 역사적 변화 과정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금기에 빠져든 남녀 간의 사랑 얘기는 일종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여기에 비추어 보자면 영화속 등장인물들이 진정으로 의미한 바가 무엇인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삼촌은 공산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중국(청나라)을 상징한다. 금기에 빠져든 조카와 아내는 그렇게 전통적인 중국을 무너뜨렸던 공산주의 혁명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세대는 또 그 보다 더 젊은 그렇게 그들의 아이에 의해서 부정되는데 그 아이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그러니까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치정 관계는 그대로 중국이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장 이모우는 결정적으로 삼촌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문화혁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의 재건이 가능했음을 주장하고 또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그렇게 재건된 중국이 사실은 삼촌이 상징했던 전통적이며 가부장적인 중국을 그대로 닮으려 했던 것은 아니냐고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즉 작가가 영화 ‘국두’를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는 그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읽어야 비로소 드러나는데, 나는 수사나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 역시도 영화 ‘국두’처럼 단순히 금기를 위반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알바니아의 역사적 변화 자체를 다루는 알레고리로 읽어야 하며 그 때서야 포르테스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알바니아의 사랑'을 알레고리적으로 읽을 때, 주인공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보자면 일종의 프롤로그와도 같은 도입부를 지나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의 묘사가 눈에 띈다. 거기 자신의 집에서 주인공 이스마일이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공간은 탑 꼭대기 방이다.(p.15) 그 방은 비좁은 나선형 계단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은 방이다.(p.14) 이것은 유럽에서 오래도록 유일하게 이슬람을 유지시켜온 그렇게 타자의 침입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던 알바니아 하고도 어쩐지 유사해 보인다. 더구나 이스마엘은 신체적으로도 살집이 없고 뼈만 앙상하고 "특히 아치처럼 생긴 쇄골, 손목, 무릎이 그랬는데, 이들 부위는 몸이라고 하는 지도에 산맥처럼 두드러져 있었다."(p.33)로 묘사된다. 포르테스는 여기에 '몸이라는 지도에 산맥처럼 두드러져'라는 비유를 쓰는데 이것은 나중에 또 한 번 반복되는데 작가가 유독 이스마엘에게만 쓰는 표현이다. 즉 작가는 이스마엘의 신체를 하나의 대지로 바라보게 유도하는데 여기서 이스마엘의 신체는 대대로 군인으로 유명한 자신의 가문에 맞지 않게 아주 허약한 신체이다. 더구나 그것은 그의 형 빅토르의 신체와 대조되면 더욱 더 그 허약함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신체적으로 어떤 별종임을 암시하고 그것은 그렇게 그에게 깃들어진 출생의 비밀을 함축함과 동시에 신체를 하나의 대지로 바라보게끔 하는 작가의 의도를 고려하면 그대로 유럽에서 북쪽 알프스 산맥으로 고립된 알바니아 자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난 바와 같이 주인공이 이 소설에서 진정 의미하고 있는 바는 '알바니아'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제목 '알바니아의 사랑'은 그야말로 정확한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정말로 '나라 알바니아'가 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소설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주인공을 알바니아로 여긴다면 그가 속한, 그렇게 이스마일을 지배하고 있다고도 볼 수있는 라드지크 가문 자체는 독재자 엠베르 호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스마일과 라드지크 가문 사이의 관계의 변화로 증명될 수 있다. 처음에 이스마일은 아버지와 형 빅토르에게 모두 호의를 가진다. 그의 엄마가 이스마일이 뭐가 되고 싶냐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아버지처럼 대장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와 형 빅토르 처럼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허약한 신체 때문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초반의 이스마일이 가지는 호의는 알레고리적으로 볼 때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맞서 알바니아를 구해냈던 엠베르 호자에게 서슴없이 정권을 이양했던 알바니아의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하지만 그렇게 파시즘에 맞서 알바니아를 구해내었던 엠베르 호자는 스탈린과 비슷하게 나라를 고립시키고 오래도록 독재로 다스린다. 후반에 이스마일은 형의 아내가 된 헬레나와 함께 금기의 사랑에 빠지게 됨으로서 서서히 라드지크 가문으로 부터 멀어지는데 그것은 그대로 호자의 오랜 독재에 지쳐 서서히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던 알바니아와 또 그렇게 겹친다.

  이렇게 이스마일을 알바니아로 라드지크 가문을 엠베라 호자로 보는 게 가능하다면 결국 금기의 사랑이라는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은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거기에 보다 은밀한 의미가 배여있음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우리는 헬레나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소설에 대하여 한 리뷰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맥을 잇는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헬레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이 헬레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이름을 어디선가 또 본적이 있다. 바로 그리스 신화, 트로이 전쟁에서이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 파리스에게 여신은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선물한다. 그녀가 바로 헬레나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비로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던 몸이었다. 그런 그녀를 파리스가 데리고 트로이로 달아난다. 그리고 그로인해 결국은 트로이를 멸망시킬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헬레나를 이미 만났다. 트로이 전쟁의 헬레나는 이미 한 남자에게 매인 몸이면서 불륜에 빠졌다는 점에서 '알바니아의 사랑'에서의 헬레나와 겹친다. 이러한 존재적 겹침은 사실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자 하는 작가가 의도한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서 헬레나가 진정 상징하는 것은 그렇게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는 존재, 그리고 결국은 트로이를 멸망시키는 존재로서의 헬레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다시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헬레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헬레나로 인해 그녀를 유혹한 파리스의 모국인 트로이가 그렇게 무너졌듯이, 그와 똑같이 헬레나를 유혹한 이스마일이 속했던 라드지크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 그렇게 그것이 상징하는 독재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은 그 체제를 무너뜨리는 '여성성'인 것이다. 

  결국 이스마일이 그러한 여성성과 금기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금기란 것이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란 것에서 볼 때, 이 소설에서의 금기란 그렇게 엠베르 호자의 독재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란 것을 상징하며 그것을 위반하여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는 것은 그렇게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을 가급적 억제해야만 하는 독재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스마일이 결국 헬레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의 보다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렇게 자신을 규정하고(이는 이스마일이 가진 출생의 비밀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출생의 비밀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은폐시키는(이스마일의 아버지는 절대로 엄마를 엄마로 부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스마일은 내내 엄마를 '그녀'라고 부른다. 그는 그렇게 진정한 엄마로 부터 떨어져나온 존재가 된다. (다른 하나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하지 않겠다.)) 독재 체제 자체의 저항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그렇게 독재에 의해서 규정되고 거짓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 보다 가깝게 알바니아의 본질로 다가가려는 몸짓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마일의 엄마나 헬레나가 다 같이 알바니아의 변방 태생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렇게 그들은 엠베라 호자에 의해서 규정된 알바니아로 부터 벗어나 있는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이 알바니아의 변방이란 어떤 곳인가 이스마일 카다레에 의하면 그야말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내려져 온 알바니아의 본질을 품고 있는 곳이다. 더구나 작가는 헬레나가 처음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녀로 하여금 이스마일의 엄마 초상화를 마주하게 하여 거기서 그녀에게 "낯선 여자의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P.17) 드는 것을 보여주어 사실은 이스마일의 엄마와 헬레나가 하나의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런데, 그 헬레나는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이스마일에게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을 읽고 있었음을 들킨다. 그 소설을 본 날 이스마일은 이렇게 속내를 드러낸다. 

  시를 쓰면서 욕망을 억눌렀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미워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폐쇄된 나라, 알바니아라고 하는 거대한 벙커에 생길 수 있는 가장 무의미하고 작은 틈새마저도 꽉꽉 막아버리기 위한 작업에 대대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나라을 미워하면서 욕망을 억눌렀다.(P.138) 

  여기서 이스마엘은 두 가지를 고백한다. 자신의 가문과 현 알바니아 독재체제에 대한 증오와 헬레나를 향한 욕망. 이 두가지가 모두 하나의 고백으로 담겨져 나오는 것은 그대로 그 증오와 욕망이 결국 연쇄적인 것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여기서 더없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스마일이 헬레나와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 않는 독재체제로 부터 벗어나 카다레가 그렸던 본질적인 알바니아의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것이. 더구나 작가는 또 하나의 장치를 통해 더욱 이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이스마일과 헬레나가 처음으로 접촉을 했던 날 내렸던 '비'를 통해서이다. 작가는 내리는 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지붕 처마에서 힘차게 떨어지는 빗물이 정원의 흙을 파헤쳐 마침내 흙 표면에 작은 구멍들을 팠다.(P.168) 

  그들이 처음으로 신체적 접촉을 했던 날, 내리는 비는 그대로 대지에 구멍을 낸다. 그렇게 비는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이고 이것은 헬레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동일하다. 더구나 이 비는 이스마일의 아버지가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그가 체포되는 순간 다시금 예감으로서 나타난다. 또 한 번에 내려올 거센 비는 아마도 독재체제의 종말을 고하는 그런 비일 것이라는 암시를 잔뜩 머금은 채 말이다. 여기서 보다 분명하게 되듯이, 결국 이 날 내리고 있는 비는 바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폭압에 의해 조작되고 거짓으로 위장된 체제의 장막이 그들의 사랑으로 이제 찢겨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인 셈이다.  작가는 이렇게 내리는 비를 통하여 그들의 사랑이 가지는 의미를 더 한층 견고하게 다듬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가는 이러한 저항으로서의 사랑의 의미를 견고하게 만들면서까지 보여주려하는 것일까?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으로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과정에 그대로 국가 알바니아가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이스마일이 헬레나를 만나 사랑에 눈 떠가는 과정은 서서히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에 눈 떠가는 알바니아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헬레나를 만나 사랑을 이루는 과정은 이제 알바니아가 더이상 독재체제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장면과도 같다. 그렇게 결국 소설에서도 현실적으로도 알바니아는 독재를 벗어났다. 하지만 이스마일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망명자의 신세가 된다. 여기에는 감독 장이모우가 영화 '국두'에 현재 중국에 대한 평가를 은밀히 감추어두었던 것 처럼 그렇게 현재의 알바니아에 대한 수사나 포르테스의 평가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 결국 알바니아 자체를 뜻하는 이스마일이 망명자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현재의 알바니아가 그토록 추구했던 본래적 알바니아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존재임을 에둘러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알레고리고 읽었을 경우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다 말한 것 같다. 나중에 읽을 이의 즐거움을 위하여 보다 자세하게 내용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독해를 저지하는 것이 적정할 것 같다. 하지만 수사나 포르테스가 '알바니아의 사랑'을 통해 정말 전하고 싶었던 것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결코 모자람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말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것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세부일 뿐이고 거대한 몸통은 드러낼 수 있는 한 다 드러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무튼 수사나 포르테스는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의 이면에 이렇게 알레고리적 의미를 가미함으로서 감독 장이모우가 영화 '국두'를 통해서 그랬던 것 처럼 자신이 '알바니아의 사랑'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보다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개인이 나누는 금기마저 위반한 사랑이 단순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며 그것은 차라리 독재에 대한 저항이며 보다 본질적으로는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보다 순수한 알바니아의 본래적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대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기까지의 알바니아가 거쳐갔던 역사적 과정의 재현이기도 하다. 본질로서 변하지 않는 알바니아의 모습에 천착했던 이스마일 카다레와는 달리 수사나 포르테스는 변화하는 알바니아를 담는다. 하지만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남녀간의 금기마저 위반하는 사랑의 형태로 보여줌으로서 그렇게 간절히 서로를 원했던 만큼 독재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또한 간절했음을 더욱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우리는 여기서 문학이 가지는 또 하나의 긍정적인 가능성 마저 엿보게 되는데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이 단순한 사실의 기술 보다 더욱 더 재현에 있어서 풍요롭고 전달에 있어서 생생할 수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지극히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수사나 포르테스의 문체가 오히려 이렇게 보다 더 풍요롭게 역사적 변화마저 재현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포르테스가 이러한 문학이 가진 또 하나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끝으로 하나 더. 주인공 이스마일은 헬레나와 직접 접촉하게 될 때까지 시를 씀으로서 욕망을 억누른다. 그렇게 시를 쓰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저항행위였다. 그러니까 헬레나와 만나 그녀와 의 사랑을 통하여 저항하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문학을 통하여 알바니아의 독재체제에 저항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 이스마일은 이름마저 이스마일 카다레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혹시 수사나 포르테스는 처음부터 이스마엘 카다레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퍼뜩 든다. 더구나 소설의 결말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의심은 더욱 더 커진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 이스마일은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되는데 현실의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도 결국은 독재 체제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알바니아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했던 것이다. 이토록 현저히 드러나는 둘의 유사성은 어쩐지 그저 우연으로만 보기가 어렵게 만든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쩌면 정말로 포르테스는 카다레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 소설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상정하고 읽으면 또 다른 색다른 맛을 이 소설을 통해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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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새 날다
구경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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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경미의 신작 '키위새 날다'는 한 아버지의 느닷없는 복수 선언으로 시작된다. 팔 년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가 그냥 위암에 걸린 것이 아니란다. 그렇게 위암에 걸릴 정도로 누군가가 심하게 정신적 학대를 했기 때문이란다. 그 사람이 엄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란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하품하다 낚시줄에 걸린 메기 처럼 커다랗게 눈을 꿈뻑이는 자녀들은 아랑곳않고 아버지는 내처 그 복수의 대상까지 밝혀버린다. 바로 엄마가 시장에서 양말 자판을 할 때 그 맞은 편 옷가게 '국제상사'의 여사장이란다. 낚시줄에 걸린 메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끌려 올라가는 것 밖에는 없듯이, 자녀들 역시 얼른 이해되지도 않는 이유들을 들먹이는 아버지의 복수 계획에 뭔지도 모른 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끌려 들어간다. 

  이렇게 복수 선언과 그에 따른 복수 계획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그러나 속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 '복수'는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당신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다른 손으로 'UFO가 떴다'고 가리키는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수를 상정하고 읽을 경우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부분, 즉 작품의 분위기가 가볍다던지, 복수의 동기가 뚜렷하지 못하다던지, 계획 마저 어설프기 그지없다던지, 복수를 테마로 하는 작품답지 못하게 인물들이 너무 평면적이며 전개가 산만하다든지 하는 것들은 사실 이 소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이 소설에서 '복수'란 게 그리 중요한 테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저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한 하나의 동력에 불과했을 뿐! 더우기 작가가 정말 복수를 소설에 끌고 들어온 것도 '대상의 제거'에 있지 않다. 그러니까 흔히 '복수'란 소재가 '독자'에게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상황장악력(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힘) 때문이 아니라 복수가 가지는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상황장악력'(그러니까 복수가 그들의 일상을 복수를 중심으로 블랙홀 처럼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이전까지 영유하고 있던 일상생활을 여지없이 찢어버리고 '복수'라는 압도적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끌여들여온 것이다. 마치 '태초에 빛이 있으라'라는 말 때문에 세상이 태어났다고 말하는 성경의 창세기 처럼, 소설을 펼치자마자 아버지의 복수 선언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복수 선언은 그들의 일상을 확 바꾸어 버린다. 이전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던 일상의 굴레에서 그들을 폭력적으로 빠져나오게 만든다. 이 일상의 '변화'. 이것이 사실은 이 소설이 진정 추구하고자 하는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제목인 '키위새 날다'에서도 잘 드러난다. 키위새란 뉴질랜드에서 서식한다는 날지 못하는 새를 말한다. 태어날 때 부터 날개가 퇴화되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란 고립된 섬에서 아무런 천적의 위협 없이 안온하게 오래도록 살다보니 그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고여있는 웅덩이는 그저 썩어만 가듯이, 그처럼 아무런 변화없이 사는 존재들에 대한, 어찌보면 섬뜩하기도 한 비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또한 '키위새'들이다. 아버지와 그의 딸 하은수 그의 아들 하경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복수 대상이 되는 국제상사의 여사장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가족들이 마당에 뿌리를 내리고 잎사귀가 말라버린 대추나무 처럼 한 집에 붙박혀 살아왔듯이, 그 여사장 또한 커다란 국제상사 안에서 어마어마한 옷더미에 짓눌린 채 박힌 못마냥 살아온 것이다. 그건 복수로 한을 풀어주려 하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국제상사 앞 자판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날 줄 모르는 삶을 살아왔다. 

  고정된 장소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날 줄 몰랐던 그네들은 그렇게 날개가 퇴화되어버린 키위새들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그 키위새들이 날아보려 한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초입, 아버지의 복수 선언인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이 천착하는 복수의 과정들은 그렇게 변화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어떡해든 해보려는 그들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그들의 시도는 '타인의 자리에 서기'로 나타난다. 소설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가족과 국제상사 여사장의 가족이 상당히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국제상사의 여사장 또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것이다. 하경수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염탐을 위해 국제상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싹싹하고 일을 잘하는 경수는 곧 여사장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건 소설에서 여사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냈던 아들에 대한 신뢰와 겹친다. 그렇게 하경수는 여사장의 실종된 아들의 자리에 선다. 하경수의 누나 하은수는 그와 똑같이 여사장의 딸의 자리에 선다. 여사장의 딸이 오빠를 이해하고 뭔가를 해주려 하였듯이 은수 역시도 그와 똑같이 여사장의 인간적 고뇌를 이해하고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해주려 한다. 그렇게 작가는 변화의 시도를 타인의 자리에 서 보는 것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물론 날아보려 발돋움을 하는 것은 자녀들 뿐이다. 정작 복수 선언을 했던 아버지와 그 복수의 대상이던 여사장은 조금도 아무런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사실은 똑같은 존재들이다. 그건 소설 속 여러군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각각 그 세계에 있어서 중심이라는 것. 그들이 똑같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실을 상상적으로 메우려 한다는 것(아버지는 집을 잃지 않기위해 수술을 포기함으로서 엄마를 잃게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사장을 그 원망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렇게 그는 상상의 이야기를 꾸며댐으로서 자신의 죄책감을 지우려 한다. 여사장은 상실된 아들이 현재도 어딘가 살아있다는 자신의 상상에 근거를 만들기 위해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행자들에게서 그들의 여행 경험을 구매하여 마치 자신이 다녀온 것 처럼 이야기한다.) 더하여 결국 날아오르는 것에 있어서도 실패하고 만다는 것도 똑같다. 

  남들에게 걸을 수 있는 구두를, 그렇게 언제나 고정된 지점을 훌쩍 떠날 수 있는, 말 그대로 변화를 받아들임을 뜻하는 구두를 만드는 아버지가(아버지는 자주 하은수에게 구두를 선물하기까지 한다.) 정작 그 어떤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아버지의 복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의 일상을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더욱 더 견고히 시키려는 의도에서 발현된 것이라 봐야한다. 때문에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일상을 변화당하는 은수와 경수의 '복수'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과 시장이라는 누구에게나 왕래가 자유로운 곳에 있으면서도(거기다 '국제상사'라는 간판 이름 자체에서 오는 광활한 활동영역이라는 느낌마저 가미한다면) 늘 가게, 골방, 가게 앞 포장마차와 같이 끊임없이 좁은 곳에서만 서식하는 것 같은 여사장의 모습은 어찌보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늘 아버지와 여사장이 한정된 장소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하던 소설이 아버지가 권총을 들고 자신의 장소에서 빠져나와 옥상에 올라간 순간,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빠져나온 순간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빠져나와 처음으로 시장 거리를 걸어내려오는 여사장을 만나게 하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같다. 더구나 그 길은 어제 내린 큰 눈으로 얼어버린 자꾸만 미끄러지는 길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유동하는 공간이다. 

  결국 아버지와 여사장이 그 한정된 공간이 표상하는 '붙박힌 삶'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망집'때문이다. 아버진 아내 '엄마'가 여사장에겐 실종된 '아들'이 각각 망집으로 남아있다. 그건 영원한 상실이므로 도저히 메울 수가 없는 것인데도 아버지와 여사장은 어떻게든 그것을 메우려 애쓴다. 아버진 복수에의 집착으로 여사장은 이야기 지어내기로. 그렇게 그 망집은 욕망의 또다른 이름이 된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사마귀 내기' 장면은 여기에 있어 중요한 암시가 된다. 거기서 사장을 염탐하러 갔던 하은수는 여사장이 사람들과 사마귀 목에 줄을 감고 그 줄을 손으로 잡고 사마귀를 놓아준 다음, 그 사마귀가 무사히 반대편 쪽으로 길을 건너가는지를 두고 내기를 벌이는 장면을 보게 된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 이것이 하나의 비유임을 알게 되는데, 물론 사마귀는 아버지와 그 여사장을 가리키며 망집이 바로 그렇게 사마귀 목에 감긴 줄을 잡고 있는 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그 줄로 인해 사마귀가 달아날 수 없듯이, 그들 역시도 영원히 망집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암시받게 되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결국 사마귀는 길을 다 건너지 못하고 자전거 바퀴에 깔려 죽는다. 그렇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자들, 그렇게 영원히 키위새로 남은 자들의 운명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망집이란 그렇게도 무거운 것일까? 달아나기 힘든 굴레일까? 작가는 그것에 대해 '비밀상자' 에피소드를 통하여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밀상자'는 여사장에게 있어 망집 그 자체와도 같다. 아들이 해외여행 도중 보내준 그 상자는 비밀장치가 여간 아니어서 지금껏 아무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여사장은 그 상자 안에 아들이 실종된 이유를 알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하은수에게 열어달라고 맡긴다. 하은수는 결국 열지못하고 그래도 집에서 가장 손재주가 있는 아버지에게 맡긴다. 아버지가 결국 열긴 연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런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밀상자'의 에피소드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애초부터 부재했다는 것은 아버지와 여사장의 망집이 원래 뚜렷하게 근거가 없는 그저 스스로 만들어낸 작위적 집착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어이없이 해결되어 버리는 그 장치는 망집이라는 것이 그렇게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무게로 내리누르는 것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마음에 아주 작은 바람이 불어도 그렇게 사소한 마음의 변화만으로도 땡볕 아래의 아이스크림 처럼 쉬이 허물어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비밀상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들은 그대로 주인공 가족이 가지는 '여사장에 대한 복수'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즉 '비밀상자'와 '복수'는 바로 동일한 상징인 것이다. 따라서 복수의 결말에서 받는 느낌이 비밀상자의 결말에서 받는 느낌과 그리 다르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다.  

  소설 '키위새 날다'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의 날개짓이다. 혹은 그것을 향한 발돋음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공하는자들은 따로 있다. 그들은 모두 외부로 부터 주어지지 않은 오로지 그 스스로 내부적 동기만으로 도약을 위한 시도를 해보려했던 자들이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삶의 변화를 받아들였던 자들, 하은수와 하경수 그리고 여사장의 딸이다.  문제는 비밀상자와 복수의 결말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에서도 집약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그건 아주 사소한 마음가짐만으로도 충분하다. 때문에 하은수와 하경수의 심경의 변화가 그리 극적으로 묘사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어느 순간 문득 변해버리기 때문에 읽다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나쁘게 말하면 무리한 캐릭터의 변화이지만 '비밀상자'나 '복수의 결말'이 주는 암시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그 변화의 계기란 게 얼른 눈치도 차리지 못할 만큼 사소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더하여, 이들에게서 보이는 또 하나의 공통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타인에 대해 이해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타인의 자리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버지와 여사장에겐 그러한 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건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가지는 긍정적 효과 같은 것을 작가가 보여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때문인지 결말로 갈수록 처음엔 그저 아버지 앞에서 약한 존재에 불과했던 그들이 점점 강해지는 느낌도 받게된다. 마지막의 '원장이 없을 때는 내가 대장이다"라는 하은수의 말은 그렇게 강해진 그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싶다.   

  작은 소설이다. 맘만 먹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만에 읽을 수도 있는 소설이다. 거기다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조금은 헐겁게 스케치하듯 이어지는 소설이라 꽉 짜여진 전개가 아니어서 더 부담없이 대할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빈틈없이 전개되는 것을 선호하는 쪽이라면 이 소설의 헐거운 구성은 좀 불만을 사게될 듯도 하다. 하지만 문득 고개들어 지하철 차창 밖으로 보게된 저녁 노을에 덩그러니 떠 있는 빨간 애드벌룬에 왠지 꽉 죄인 넥타이가 더 답답하게 느껴졌던 경험이 있다면, 그렇게 일상의 사소한 변화에도 내가 가진 삶의 자그마한 편린들을 자주 곱씹곤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도 좋지 않을까 한다. 그냥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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