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8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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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의 제목 '헤븐'은 소설 속에서 고지마가 '헤븐'을 보여주겠다며 주인공을 데리고 간 미술관에서 고지마가 보여주는 그림의 제목이다. 사실 그림의 진짜 제목은 아니고(진짜 제목은 나오지 않는다.) 그 제목이 너무 밋밋하다며 고지마가 멋대로 붙인 제목이지만. 아무튼 그 그림 '헤븐'을 묘사한 걸 읽고 보니 그 그림이 진짜는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 샤갈의 1915년작 '생일'이라는 그림이었다.

  

    1915년 당시 샤갈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벨라와 결혼했고 그 기쁨 때문인지 계속해서 결혼을 주제로 한 연작을 내어놓고 있었다. 이 그림은 당시는 연인 관계였던 벨라가 샤갈의 생일날 서프라이즈를 위해 찾아갔을 때의 정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두 연인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충만한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뜻하지 않은 연인의 축하를 받은 샤갈은 그야말로 더 높이 붕붕 떠다닌다. 

     이 그림을 두고 고지마는 이렇게 말한다.

   그 연인들에게는 말이야, 아주 힘든 일이 있었어. 아주 슬픈 일이 있었거든. 굉장히. 그렇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은 최고의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야. 둘이 극복하고 도달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 방이 사실은 헤븐인거야. (P.62)

     진짜 그림이 어떻게 해서 그려졌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고지마는 자기식대로 그림을 해석한다. 그녀가 이러는 것은 이 그림 속에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현재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 '공해'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등으로 발길질마저 예사로 당하는 등, 온갖 괴롭힘을 다 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 모든 고통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이겨나가면 언젠가는 저 그림 처럼 그 모든 고통들에 대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그림 '헤븐'은 고지마에게 고통의 이유이자 희망의 근거가 된다.

     그런 고지마와 같이 그림을 보고 있는 주인공 역시도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날마다 뒤통수를 세게 맞거나 학교를 결석하기만 해도 책상 서랍이 오물로 가득찬다거나 분필을 억지로 삼키거나 걸레를 입에 물거나 청소도구함에 갇히거나 하는 온갖 괴롭힘을 날마다 당하고 있다. 주인공 역시도 고지마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고지마와는 달리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냥 어서 이 모든 괴롭힘들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고지마와 주인공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은 바로 고통의 원인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고통을 당하는 건 태어날 때 부터 사시였기 때문이다. 즉, 그건 자기와 상관없이 주어진 제약 때문에 받게 된 고통이었다. 하지만 고지마는 엄마가 버린 아빠를 잊지 않으려고 초라하고 궁색하게 사는 아빠의 모습을 스스로 재현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즉 고지마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 차이, 즉 고통의 원인이 외부로 부터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초래한 것인지의 차이에 따라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소설 '헤븐'은 그렇게 고통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이다.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이러한 소설의 모습이 그리 생경한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 부터 우리 인간들은 주어진 고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왔었다. 아마도 그것이 잘 드러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의 '욥기'라 할 것이다. '욥기'는 그야말로 이유없이 주어지는 고통에 대해 그 까닭을 알아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 할 만하다. 중세 이후로 고통은 철학과 신학 전반을 아우르는 사유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었던 중세인들에게 고통은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고통은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니 '악'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주재하지는 이 세계에 그런 '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주요한 의문이었다. 성경에서도 중세인들에게서도 그리고 근대에 있어서도 고통은 세상의 주권자라는 하나님과 어긋나는 모순된 존재였다. 그래서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하나님과 고통의 존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일련의 흐름들을 '변신론'이라고 불렀다. 즉, 고통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변호하는 논의들이라는 것이다. 

    변신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가 둘 있는데 하나는 라이프니츠고 다른 하나는 칸트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둘의 입장은 또 소설 속의 주인공과 고지마의 입장과도 겹친다. 라이프니츠는 고통은 이 세상이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고통이 악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존재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고통은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 따르는 잔여이고 오히려 고통이 없다면 존재는 제대로 존재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그저 현상되는 고통을 긍정하고 그저 어서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과 유사하다. 이에 반해 칸트는 '요청론'을 끌어들인다. 즉 우리가 고통의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 고통을 견디면 언젠가는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칸트는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의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고통 끝에 도달하는 천국을 그것에 보상을 주는 신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그림 '헤븐'을 보며 보상의 희망 속에 고통을 인내하는 고지마와 겹친다. 

    하지만 이 모든 해석은 유신론이라는 가정하에서 내려진 것이다. 신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고통 역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내려진 견해들이다. 그렇다면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무신론이라면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는 무신론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고 모든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무신론 아래에선 모든 사물은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도 그 어떤 의도도 이유도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따라서 고통 역시도 마찬가지다. 고통을 당하는 존재는 하필이면 그 공간 그 시간에 우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역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장과 겹친다. 우리는 이 무신론적 입장을 바로 '모모세'에게서 보게 될 것이다.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모세에게 주인공은 왜 자기를 그토록 괴롭히냐고? 그러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느냐고 묻는다. 모모세는 주인공이 당하는 고통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물론 양심의 가책 또한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한다. 고지마로 부터 고양되었던 고통에 대한 의미에 대해 기울어져 있는 주인공은 모모세에게 그야말로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된다. 왜냐면 그 때 주인공은 인간 축구공이 되어 무수한 발길질을 당하는 학대를 경험한 후 그 인내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이상 무의미하게 쏟아지는 폭력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한 편 이 모든 고통에 이유가 있다는 고지마를 믿고 싶어했다. 그건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을 만큼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모모세는 그 모든 게 다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또 묘하게 고지마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그는 정확히 모모세의 세계와 고지마의 세계 중간에 있게 된다. 

     우연한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소설은 고통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입장을 한 인물에 대입하여 하나하나 보여준다. 이러한 '인물적 형상화'를 통해서 우리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입장들을 좀 더 가깝게 살펴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의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하는... 

     주인공과 고지마는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는 점 뿐만아니고 그 가족관계마저 어쩐지 유사하다. 주인공은 엄마가 없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건 새엄마다. 한 편 고지마는 아빠가 새아빠다. 둘 다 어느 한  쪽이 부재한다. 이에 더하여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얼마든지 손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은 후에 사시가 수술 가능한 것임을 알고 놀란다. 그것도 너무도 손쉽게. 고지마는 언제든지 스스로 몸을 씻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그들 모두에게 고통이 숙명적이 아니라는 것이 똑같다. 이 둘의 이러한 비슷함은 가와카미 미에코가 고통의 의미에 대한 입장과는 또달리 고통을 대하는 어떤 자세 같은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둘은 아주 비슷한데도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만큼은 또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껴안으려 하지만 주인공은 어떡하든 그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그 둘의 관계는 눈 수술로 파국을 맞는다. 고지마와 주인공이 마지막 만나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고지마는 주인공에게 고통을 당하는 의미에 말하면서 사실은 그들이 주인공과 고지마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옳았음을 스스로 주인공에게 보여준다. 그렇게 가와카미 미에코는 이지메란 다름이 아니라 무리에 들지 않으려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폭력이라는 걸 이 장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결국 고지마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스로 괴물이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지 못한다. 고지마 처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이지메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은 애초에는 포기했던 가능성이 조금 빛을 발하자마자 얼른 그것을 부여잡는다. 그렇게 그에겐 오로지 회피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가와카미 미에코가 손을 들어주는 것은 '모모세'쪽이다. 그토록 무겁게 고통을 천착해왔던 것과는 달리 결말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낙관적으로 끝맺는다. 주인공은 눈수술을 감행했고 결국 제대로 된 시야로 보는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수술 전 의사와의  상담에서 의사는 수술을 가볍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냥 조금 바꾸는 정도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사실 주인공은 그 전에도 수술을 받았었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돌팔이가 그 수술을 맡았었고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그 돌팔이의 말로 더이상의 수술을 불가능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뒤로 계속 고통의 굴레를 둘러써왔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는 생각한다. 만일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났더라면 지금까지의 고통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거라고... 이런 생각은 모든 건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일 뿐이며 고통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모모세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니 가볍게 생각하라고. 모든 건 언제든지 변한다. 내일엔 내일의 바람이 부니까... 이런 속삭임이 저절로 들려오는 듯한 이 소설의 결말은 어쩌면 가와카미 미에코가 그래도 어떤 희망적인 것을 가지게 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지 싶다. 

       하지만 그 눈부신 세상 속 어딘가 고지마가 분명 존재한다. 아빠를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통의 굴레를 둘러쓰고 살아가는 존재가. 생각해보면 주인공에게 '사시'의 존재도 그랬다. 그것은 엄마로 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가 눈수술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엄마와 단절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지마는 아빠를 간직하기 위해 고통을 껴안았지만 주인공은 엄마와 단절하면서까지 고통을 회피했다. 고집스럽게 껴안으려는 자와 바람처럼 가볍게 떠나버리는 자가, 절대로 엄마를 용서할 수 없는 고지마의 고집과 별로 정든 사이도 아니지만 새엄마 곁에 있으려는 변화의 주인공이, 그렇게 뚜렷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이걸 '고집과 변화의 문제'로 풀어 변화를 택하는 쪽으로 조금은 성급하게 결론내린 것 같지만 과연 그런 정도로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많이 아쉬워하는 부분일 것이다. 문제는 고지마의 존재다. 그 눈부시도록 환한 세상에 끝끝내 하나의 검은 얼룩으로 남으려는 고지마의 존재다. 이걸 어떻게 대해야할까? 끝없이 우리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존재를 어떻게 붙들어야할까? 여전히 그렇게 책을 덮은 후에도 의문은 계속된다. 지금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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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아저씨 제르맹
마리 사빈 로제 지음, 이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맞아, 책 뒤에 있는 말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네. 그러면 어떤 책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설책 뒤에 적힌 말들은 정말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인지 외려 반문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나같은 사람들을 위한 말은 아니었다. (...) 게다가 내가 집어든 책 중 그 어떤 것도 쉽게 쓰여진 것은 없었다. "사랑과 모험, 그게 아니면 인디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끝." 이렇게 말이다. (P.268)

    이 소설의 주인공 제르맹은 마흔 다섯살의 중년이지만  글도 모르고 이해력이 아주 많이 떨어지는 그래서 소위 '모자란다'는 취급을 받는 그런 남자다. 그렇게 이 소설의 원제(La Tete en Friche)의 뜻 그대로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미개발 상태'인 남자다. 인용한 말은 그가 누군가를 위해 책을 읽어주려고 생애 처음으로 도서관을 찾았다가 어떤 책이 좋은지 알 수 없어 당황하고 있는데, 문득 앞에 있는 꼬마 하나가 책 뒤에 쓰여진 말들을 읽고 고르는 것을 보고 따라하다가 하게 된 생각이다. 책 뒤의 문구가 내용의 전달과는 아무 상관없는 오로지 현혹을 위한 과장과 칭찬 일색임을 비웃는 일종의 풍자 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왠지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내개는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혹 내 리뷰도 제르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그런 것이지 않을까 언뜻 드는 두려움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리뷰라는 것도 결국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 책 뒤에 쓰여져 있는 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렇게 혹시 내 리뷰도 타인에게 잘 소화되지도 않을 말들을 억지로 씹어먹게 만드는 자기도취적인 글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인다. 얼른 떠오른 건 글을 쓸 때 늘 저렇게 제르맹 같은 이들을 위한 배려도 되도록 잊지말아야겠다는 결심이지만, '되도록'이란 말이 그렇듯이 언제 도래할 지 모르는 배신의 가능성을 다분히 상정한 결심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보다 많이 알면서도 늘 모르는 제르맹을 배려해주었던 마리게리트 할머니가 더 대단해 보인다. 아무튼 결심한 지금 이 순간, 그 노력의 흔적이라도 내보이기 위해서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쓸까 한다. 되도록 알기 쉽게 간단히... 

  '이제까지 생각없이 살아온 한 중년의 남자가 우연히 한 할머니를 만나 책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바꾸어가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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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 부분은 이런 정도의 글로는 만족하시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붙여놓은 글이다. 

천성이 남의 글을 파헤치기 좋아하는 나인지라 아무래도 저 글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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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하게 말한다면 '바보아저씨 제르맹'의 핵심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은 책이 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모두 네 권의 소설들이 나온다. 그 소설 하나하나가 다 그대로 주인공 제르맹으로 하여금 새삼 자신을 일깨우고 확장하도록 만드는 그런 하나의 계기들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리뷰도 그렇게 네 권의 책을 중심으로 써 보려한다. 

 

    1. 알베르 까뮈 '페스트'  

   

    까뮈의 '페스트'는 제르맹이 공연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 마르게 리트로 부터 처음 듣게되는 책이다. 마르게리트는 양해를 구하면서 그의 앞에서 페스트의 시작 부분을 낭독하게 되는데 그 전까지 책이라고는 전혀 접해보지 않았던 제르맹은 마르게리트가 낭독하는 '페스트'에 바로 매료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는 이 소설 때문에 예전의 한 사건을 떠올린다. 그건 자신의 이웃집에 살던 한 아버지가 아이들도 학교가서 홀로 집에 있는 사이 권총 자살한 사건이었다. 그 아버지는 혹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죽은 자신의 모습을 볼까 봐, 일부러 문 밖에 '시장에 갔음'이란 푯말을 걸어놓았으나 그것이 거꾸로 문 앞에서 기다리기 싫어 아무 생각없이 그저 문을 열고자 창문으로 기어들어간 아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준 꼴이 되어 결국 그를 정신병자로 만들고만다. 제르맹이 떠올린 이 사건은 사실 제르맹의 세계와도 유사하다. 그 역시 아버지란 존재가 없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낳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그의 존재가 늘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원망하면서 걸핏하면 손찌검을 해댔다. 그에겐 단 한번도 애정을 느껴본 순간들이 없었다. 컴컴한 바닥 위로 무참히 머리가 파열된 채로 쓰러져 있던 아버지가 있었던 거실. 그것이 그의 세계였고 그 아들이 정신병자가 되었듯이 그도 뒤떨어지는 지능으로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마르게리크가 읽어주었던 까뮈의 페스트는 그래서 제르맹에게 그의 세계의 현재 모습과 그 원인을 아울러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2.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아시다시피 이 소설은 로맹 가리의 자전적 요소가 깊이 배인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소설이다. 제르맹 역시도 마르게리트로 부터 이 소설을 들으면서 지금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이 소설은 제르맹에게 '페스트'로 촉발되었던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모습과 원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재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계기로 작동한다. 그러한 삶의 모습은 현재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공간이 '카라반'으로 상징된다. 그 카라반은 어머니가 있는 집의 마당에 있다. 그렇게 그는 어머니로 둘러싼 세계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스스로 카라반이라는 공간을 설정에 거리를 둔다. 그건 그대로 한 편으론 어머니로 부터 달아나고 싶은 만큼 욕망의 표현이지만 다른 한 편으론 그대로 어머니의 세계에 머무르고 싶다는 더 은밀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카라반이 그곳에 있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눌러앉은 남자에게 매맞는 제르맹을  보호해주려고 나선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라반은 제르맹의 독립에의 열망과 어머니의 보호속에 머무르고 싶다는 바램의, 상반된 이중의 욕망이 표현된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모순된 욕망이 중첩된 공간은 그야말로 제르맹 현재의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카라반과 완전히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는 물건 하나를 제르맹은 마리게리트로 부터 선물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전이다. 마리게리트는 사전을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사전은 여행을 하게 해 준답니다. (...) 

  제르맹 사전은 말이에요.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그 이상이에요. 그건 미궁이에요. 행복에 젖어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미궁이지요. (P. 198 ~ 199) 

   마당 한 구석의 좁아 터진 카라반과 영원히 헤메일지도 모르는 미궁으로서의 사전. 이렇게 둘은 공간적으로도 구분되지만 머무름과 여행이라는 움직임에 있어서도 구분된다. 그렇게 사전은 여러모로 카라반과 대조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그의 현재가 가진 불완전한 모습을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하나의 출구이자 구원으로서 자리잡는다. 아니나다를까 제르맹은 점점 '말'을 익히게 된다. 말을 익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캉의 말처럼 우리가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우리 외부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바깥 그렇게 타자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은유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그것을 방증하기라도 하듯, 말을 익혀나가는 제르맹은 자신이 관계맺고 있는 타인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진다. 그렇게 타인을 받아들여간다.  이렇게 '새벽의 약속'은 제르맹이 현재 자신의 삶과 거기서 맺고 있는 타인들을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 

 

   3.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제르멩의 꿈이 하나 있다면 그건 인디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르게리트에게 인디언이 나오는 소설을 하나 읽어줄 것을 원했고 그렇게 그녀가 읽어주었던 소설이 바로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었다. 제르맹은 바로 이 책을 통하여 삶이 지닌 막연한 동경과 현실과의 괴리를 깨닫는다. 그렇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통해 제르맹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새벽의 약속'을 통해 타인에게 나아갔던 그의 사유는 이제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통해 '삶 자체'에게로 나아간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던져주는 삶의 유한성. 그렇게 늙어버림에 따라 마리게리트에게 떨어져버린 점점 잃어가는 시력은 그에게 새삼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일깨운다. 그렇게 그는 속절없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만드는 노년과 죽음을 선사하는 삶이 지닌 비극성을 적극적으로 사유한다. 십계명에 대한 제르맹의 비난은 아마도 그러한 사유의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삶을 더 알기위해 스스로 책을 찾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넘어 삶 자체를 사유하려 한다. 그건 오로지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내려진 마리게리트에게 닥쳐올 실명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삶에 대한 자신의 유한성의 자각은 타인의 받아들임과 같이 온다. 어쩌면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면 할 수록 그만큼 더 깊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의 말 그대로 사유란 바로 타자를 받아들임 자체일지도 모른다. 

 

   4. 쥘 쉬페르비엘 '난바다의 아이' 

 

 

  마치 이러한 아렌트의 말을 방증이라도 하듯이 제르맹은 이제 마리게리트를 스스로 도우려한다. 곧 언제 실명할지 모르는 마리게리트를 위하여 스스로 책을 읽어주려는 것이다. 환상문학의 걸작이기도 한 쥘 쉬페리비엘의 '난바다의 아이'는 그것을 위해 그가 가장 먼저 선택한 책이다.(물론 의도는 아니고 그저 우연에 의해 선택된 것이지만...) 

  그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 자신이 아닌 타인, 마리게리트를 이해한다.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줄 몰랐던 제르맹이 이제는 타인마저 이해하는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소녀가 점점 마리게리트를 닮아갈수록 그러니까 마지막 부분을 읽을 즈음 나는 점점 목구멍이 조여드는 듯 했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마치 살아 있는 것 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둔 것처럼 괴로워하는 존재를, 축축한 고독 속에서 영원히 불우하게 사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P. 275)

 

  작가 마리 사빈 로제는 제르맹이 마리게리트에게 읽어주는 이 소설의 한 부분을 주의깊게 인용함으로써 결국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은밀히 드러낸다.(그는 일부러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바로 거기서 낭독을 끝맺기까지 한다.)  

  난바다의 아이는 멀고도 먼 이 나라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샤를이나 스틴부르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P.283)

    네 권의 책을 통해 제르맹의 사유가 점차 자신에서 타자로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에서 '왜 우리가 새삼 책을 필요로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이유가 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작가는 일부러 문맹에다 아는게 거의 없는 주인공을 설정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작가가 책을 소재로 한 것은 그저 하나의 소통을 위한 매개물에 지나지 않았고 보다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왜 우리가 타인과 소통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확인되는 건, 우리가 타인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삶에 있어서 지극히 무지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작가가 마지막 인용한 소설의 주인공 처럼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의 눈에 압도적 크기로 달려드는 거대한 바다는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의 깊이로 가득하다. 그 바다가 바로 삶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삶 앞에서 지극히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마리게리트를 만나 책을 알기 전의 제르맹과 사실 별 반 다를바 없다. 그 때의 제르맹은 사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리게리트는 제르맹을 넘어 실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재밌게도 작가 마리 사빈 로제는 제르맹과 마리게리트가 가지는 현격한 키의 차이를 통해 이것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거구의 제르맹에 비해 마리게리트는 겨우 아이 정도의 키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쩐지 제르맹과 마리게리트의 관계는 몸과 머리 그렇게 육체와 의식의 관계로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제 홀로 있어서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관계들이다. 상호 보조를 맞춰주어야만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관계들. 그렇게 마리 사빈 로제는 시각적으로까지 소통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책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이 처음이 아니다. 같은 프랑스 소설중의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도 있었다. 지금은 거의 경험하기 힘든 낭독의 경험을 통해서 책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천착해서 이 소설 또한 마리 사빈 로제 처럼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했었다.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도 있다.  그러고보니 어쩐지 죄다 프랑스 소설들이다. 고다르를 비롯해서 프랑스 영화들을 보면 언제나 등장인물들이 책을 벗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토록 책을 가까이하는 나라 사람들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제르맹'은 늘 책을 벗하면서도 책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한번쯤 책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제르맹의 독백으로만 채워지는 이 소설은 제르맹 자신이 단순 솔직한 성격이기에 문장 역시도 그를 닮아 단순하고 쉽고 그래서 빠르게 읽힌다. 더구나 위트까지 풍부해서 재밌게 읽힌다. 그래서 '사유의 기회'라는 다소 부담되는 어휘를 썼지만 실은 편안하고 재밌게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소설이다.  이 책을 통해 책을 가지고 하는 얘기가 좋아졌다면 앞서 언급한 레몽 장과 카롤린 봉그랑의 소설까지 내처 읽으면 더욱 더 풍요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되도록이면 여행 갈 때 집으면 좋을 것 같다. 왠지 덜컹거리는 기차 좌석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을 간혹 흘깃거리면서 읽어야 더욱 더 제맛일 것 같은 생각이 읽으면서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그 경고를 위해 일부러 '되도록'이란 말을 써 놓았음을 간과하지 마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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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우코와의 대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153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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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어디고, 당신은 누구죠? 

   문득 눈을 들어보니 나는 낯선 곳에 있었다. 그 곳은 어느 퇴락한 객실 같았다. 창문은 모조리 깨어졌고 바람이 몰려와 낡은 커튼을 쉴 새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내가 누워있던 곳은 소파였는데 그 역시 낡을대로 낡아 있었다. 엉덩이를 움직이다 튀어나온 스프링자국에 찔리기도 했다. 벽지는 위로부터 서서히 벗겨져 아래로 내려오고 의자 하나는 쓰러져 뒹굴고 있었다. 바닥에 자욱한 먼지는 이 방이 오래전부터 죽어있는 공간임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 유령처럼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자네가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 

   그의 목소리는 바로 맞은 편이 아니라 저 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실루엣 같은 그의 형상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어쩌면 진짜 유령인지도 몰라 난 그렇게 생각했지만 별로 무섭지 않았다. 모든게 그저 꿈결 같았기 때문이다. 이 방, 맞은 편의 남자, 그 목소리 모두가 현실감이 없었다.

   자네는 내 책을 읽었네. 내가 자살할 때 내 곁에 있었던 책이지... 

  또다시 먼 뱃고동 소리 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근데, 그 목소리는 내게 한 인물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야. 몰랐겠지만 난 내 책을 읽은 사람을 종종 이렇게 초대하곤 한다네. 물론 초대받은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아, 그럼 이건 꿈인가요? 

   정확한 의미에선 꿈은 아니지. 자네는 나와 실제로 만나고 있는 것이니까. 유령과의 만남이라고 해도 좋겠지. 어쨌거나 난 아무 상관이 없네. 난 다만 내 책을 읽은 자네와 얘기가 하고 싶은 뿐이니까. 

   그랬군요. 하지만 제가 얘기할 게 있는 지 잘 모르겠네요. 아시다시피 그 소설은 정말 난해하니까요. 그 수많은 대화들이 무얼 의미하고 있는지 어떤 땐 알 것 같다가도 어떤 땐 도통 모르겠다니까요. 

   그래도 뭔가 대략적이더라도 찾은게 있지 않았나? 

   그것이 일종의 여행 같다는 정도죠. 뭐랄까 사유의 여행?... 

   흥미로운 견해로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뭐랄까요? 선생님은...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내키는대로 하게나. 난 상관없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명확한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그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의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들 처럼 그 대화들이 스케치되듯이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명확한 하나의 의도라? 혹시 내가 말한 '삶은 피곤한 노동'이라는 말 때문인가? 

   그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선생님의 책을 번역한 역자가 말한 불멸과 필멸의 관계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불멸의 존재인 신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합할 때 마다 겪는 비극이 빠짐없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필멸은 스스로 불멸과 연합하여 불멸이 되려하지만 필멸의 존재성을 도저히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한 번 필멸인 존재는 어떡하든 영원히 필멸의 존재인 것입니다. 헤라를 겁탈하려 했던 익시온은 결국 반인반마 켄타우르스를 낳았고 그건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의 나신을 보고 죽은 것과 같죠. 하이킨토스는 아폴로의 연인이었으나 결국 그가 던진 원반에 예기치않게 맞아 죽었고 아르테미스와 사랑했던 엔디미온은 죽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영원의 잠을 자야했지요. 이 예를 더 이어가야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그런데, 자네는 오딧세우스를 잊고 있군. 

    아, 그런가요? 

    오딧세우스는 여신인 키르케와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파멸하지 않았잖나? 

    하지만 그 여신 키르케는 오래전에 서열에서 제외된 자가 아니었습니까?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흐음, 그럴수도 있겠군. 하지만 어쨌든 자네의 말은 그리 정확한 것은 아니군. 

    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뭔가 잡았다 싶으면 또 여지없이 미끄러져 버린다고... 선생님의 그 모든 대화들은 정말 하나로 얽매이지 않아요.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제가 머리에 떠올렸던 가장 최종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건 필멸의 존재인 우리들이 어떻게 우리의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모든 대화들은 각자가 다 달리 그 불멸을 받아들이는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의 죽음을 생각할 때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생각들과 겹쳐질 지도 모릅니다. 모두 27개의 대화에서 변주되고 있는 필멸에 대한 반응들은 그야말로 하나하나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지요. 하지만 선생님을 그러면서도 어느 하나로 모으지 않습니다.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모을 수 없듯이. 그래서 선생님의 소설은 그야말로 사유의 여행인 셈이죠.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네. 다만 자네의 이야기만 듣고 싶을 뿐이야. 

     초대란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던가요? 상당히 불공평한 대우로군요. 

    그것이 유령과 인간의 관계인 것이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햄릿과 그의 아버지를 생각해보게. 

    그렇게 당신은 불멸이 되었군요. 스스로 필멸을 이룸으로서... 그래, 어떤가요? 불멸의 존재가 된 기분이... 

    자네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하는군. 유령은 듣기 위한 존재라고 이미 말했지 않나? 

    네, 뭔가 불공평한 것 같지만 계속 이어가도록 하죠. 저는 이 모호한 대화들의 편린이 과연 무엇일까? 왜 선생님이 이렇게 저를 사유의 여정으로 이끄는가가 궁금했습니다. 다양한 반응의 변주를 보여줌으로서 궁극적으로 선생님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말이죠. 거기엔 모든 의도의 실패가 있고 신보다 더 강한 운명이 있습니다. 불멸에의 동경이 있는가 하면 필멸에의 찬양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 유한성 때문에 신들 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도 있지요. 저는 이러한 이어지지 않는 편린들을 보면서 얼른 놀이동산에 있는 거울의 미로가 떠올랐습니다. 사방이 거울의 벽으로 되어있는 미로가 말이죠. 거기는 자꾸만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얼른 자기가 어디있는지 알기가 어렵죠.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는지를 확인하고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선생님의 소설이 저에겐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 모든 대화의 편린에서 보여지는 건 언젠가 제가 했었던 사유의 조각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모든 이야기는 핵심을 추려보면 어떤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그 사유의 조각들에 점점 집중하다 보니 제가 가진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그 수많은 대화들을 읽으면서 내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무엇이었나 기억하기가 힘들어져 졌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알듯 말듯 모를 대화들에 어느샌가 매혹된 것이죠. 거기엔 본래의 내 생각을 포멧하고 다시금 언젠가 향유했던 사유의 조각들을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매혹이 있었습니다. 유려한 그들의 말투는 정말 현혹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상징과 암시가 가미된 문장들은 미스터리 소설에 나오는 암호문 처럼 해독의 열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선생님의 소설이 얼마나 수많은 밤을 저와 함께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저는 여전히 거울의 미로에 갇혀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저는 잠깐 불면의 밤이 이어진다 싶으면 불멸의 존재들과 필멸의 존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주 짧은 대화편이라 언제 어느때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그렇게 또 필멸을 사유하고 운명과 자유에 관해 생각하고 그랬습니다. 선생님의 궁극의 목적은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출출할 때 먹는 야식 처럼 문득 영혼의 빈곤이 느껴질 때 손쉽게 들 수 있는 사유의 단초를 제공해 주는 것? 그래서 혹시 선생님이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곁에서 머물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유령이 된 내게 더이상 물질로 요구되는 기호 같은 건 소용이 없다네. 있는 건 다만 포용뿐이야. 그래서 유령은 듣기만 하는거지. 자네의 생각에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말일세. 더구나 자네의 말대로 내가 그런 사유를 지속할 의도로 썼다면 더우기 그래서는 안될 일이지. 그러니 자네는 내게 해답을 구해선 안되네. 행여 내가 대답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자네가 어찌 알겠나? 그리고 사람은 또 세월에 따라 생각이 변하는 법이니 오늘의 대답이 궁극적 대답이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겠나? 사람들은 작가의 말이 일종의 해답 같은 것이라고 섣불리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사람에게 항상 고정불변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네. 그건 오늘의 대답일 순 있어도 궁극의 대답은 될 수 없는 것이지. 하지만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궁극의 대답이 아닌가? 그런데 궁극의 대답이 어디에 있는가? 시간이란 편의상 지속의 개념으로 만들어졌을뿐 과거와 현재 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네. 즉 지속이란 것은 우리의 환상에 불과하고 있는 것은 다만 '영원한 현재'일 뿐이야. 과거와 미래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 자네는 그저 순간속에 존재하는 거지. 그 무한의 순간 속에서 끊임없이 또한 변하고 있는 게 자네라네. 그러니 내게서도 어디서도 해답 같은 것을 구하지 말게.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알고 있나? 그 고양이 같은 거라네. 상자를 열기 까지는 그 반반의 확률로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 열어봐야 고양이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는데 결국 이 말은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하는게 자네에게 달렸다는 말이야. 이 영원한 현재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선 오로지 모든 것이 자네의 손에 달려있네. 질문에 자네만이 답해줄 수 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게. 

 

     마지막 그의 목소리는 아련하게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그렇게 그것은 내가 그 객실을 빠져나와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뜻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다. 내가 나올 때 그와 악수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했으면 좋으련만. 유령의 감촉이 어떤지 알 수 있었을 테니까. 혹시 만졌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가 말했던 대로. 그럼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레우코와의 대화를 흉내낸 이 대화들은 사실일까? 아니면 그저 어렴풋한 기억만이 남은 상태에서 그냥 내가 작위적으로 채워넣은 픽션일까? 아, 알 수 없다. 나 역시 지금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버린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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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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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돈... 

  읽고나서 처음엔 어떻게 이 소설을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이제는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괴물을 마주할 준비가... 더구나 이 소설은 우리를 그  괴물의 내면으로까지 데리고 간다. 난처하다. 당신이 이끄는 손길은. 거부하고 싶었다. 뿌리치고 싶었다.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 괴물의 모습을. 그의 눈으로는 더더욱... 

  왜냐면 난 이미 그 시선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을 통해서... 그 소설에도 고문기술자의 시선이 나온다. 그의 시선일 때 우리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그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구나' 하는 모습이다. 노모를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보통의 가장... 단지 한국전쟁 때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이 살해당했던 기억 때문에 '빨갱이'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이 맺혔고 그래서 이성 보다는 감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의 고문이란, 그러한 응어리진 한을 푸는 그래서 어쩌면 인간적으로 이해할만한 폭력이라는 동정... 그도 결국 온전한 폭력의 주체는 아니며 다만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한낱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인식 등등... 하지만 이러한 소설 속 제안들은 오히려 날 미치게 만들었다. 작고하신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심정과 같았다. 실제 피해자인 자신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범인을 보며 그렇게 용서의 기회마저 박탈당하여 절망 끝에 결국은 자살한 여주인공 처럼, 나 역시 끔찍하게 자행되는 고문에 대한 분노를 '그래, 당신도 피해자였어...'라는 소설의 시선 때문에 어디다 풀어야 할지 몰라 온 영혼이 비틀거렸다. 

  나는 솔직히 가해자를 동정하고 싶지 않다. 가해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 만큼은 절대적 이분법을 선호한다. 악은 악일뿐. 그건 전혀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그는 가둬져야 한다. 소설 속 공간 '다락방'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두고 굳게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 그렇게 영원히 봉인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붉은 방'이 나온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누군가가 그 문을 열어 젖히고 그 괴물을 소환한다. 

  그가 천운영이고 그렇게 괴물은 다시 나타나 그의 내면 안으로 또다시 우리를 포획한다.  돌연 햄릿 앞에 나타나 숙부가 자신을 죽였음을 말하는 아버지 유령과도 같이... 

  세월이 흘렀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이... 그 괴물 조차 이제는 개과선천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하던가... 세월마다 켜켜이 퇴적되는 망각에 힘입어 괴물의 존재가 거의 지워져버린 지금 어쩌자고 작가는 다시 그 괴물을 소환하여 우리에게 마주보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 시선을 거부하면서도 한 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운영. 솔직히 나는 이 작가를 처음 만난다. 그래서 이 작가의 세계관을 알 길이 없다. 해서 들어야 했다. 그 이유를. 그녀의 말로 직접! 하지만 '작가의 말'을 읽어봐도 알 수는 없었다. 단 하나의 대답이 있긴 했었다. "써야하니까!" 헐~ 어쩌라는것인지?... 

  다만 알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이 괴물을 소환한 계기였다. 그건 다락방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괴물이 잡히기 전에 10년간이나 다락방에 은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다락방... 다락방이라면 나도 추억이 있다. 하지만 그 추억은 그리움과 공포를 동시에 수반한 것이다. 숨바꼭질 할 때 가끔 다락방에 숨곤 했다. 그건 그리움이다. 가끔 들창으로 햇살이 빠꼼이 비쳐들때면 만화책을 읽다가 졸기도 했다. 그것 역시 그리움이다. 하지만 화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락방에서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렇게 광란의 매타작을 당하는 날이면 다락방의 문을 쳐다보는 것 조차 무서웠었다. 낭만과 공포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애증의 공간. 그것이 '나의 다락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 소설 '생강' 자체가 어쩐지 '나의 다락방'과도 비슷한 것 같다.  

  나의 다락방에 대한 상반된 감정은 시간을 두고 서로 분리된다. 햇살이 들이치는 낮의 다락방은 온전히 그리움의 공간이다. 하지만 주로 밤에 끌려 올려가 매타작을 당한 탓에, 밤의 다락방은 그야말로 공포의 공간이다. 그렇게 나에겐 다락방이 낮과 밤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각각 그리움과 공포로 명확히 대응되고 있다. 이 소설 '생강'의 세계도 그렇게 나뉜다. '밤'이라는 고문기술자 '안'의 세계와 '낮'이라는 그의 딸 '선'의 세계... 소설의 초반부 두 세계의 명암의 대비는 극명하다. 어둠의 고문방에서 '안'은 오로지 파괴와 종말만을 가져다 준다. 거기엔 빛 조차 파멸을 위한 무기이다. 반면 '낮'의 '선'은 이제 꿈꾸던 대학생활이라는 희망으로 눈부시다. 거기엔 다락방의 백열 전구 조차 따스함과 정겨움을 담는다. 결국 세상이 바뀌고 '안'은 도피하게 되는데 그 바깥에서의 도피의 여정 또한 여전히 밤이다. 여러 공간을 전전하지만 결국 '밤'이라는 기차에서 이 객차에서 저 객차로 건너가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좁아져만 간다. 이러한 두 세계의 대조적인 모습은 외연을 확장한다면, 마치 내 다락방이 시간적 차이를 두고 서로 다른 인상을 불러 일으켰듯이,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안'의 세계는 80년대를. 그리고 '선'의 세계는 지금 우리들의 시대를 말이다. 그렇게 이 소설을 '선'의 세계가 상징하는 지금의 우리들이 ''안'의 세계'에서 묘사된 80년대를 바라보고 그것을 껴안아 가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가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임철우의 '붉은 방'에서도 이렇게 두 개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나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선으로 대립적이었다. '생강'의 두 시선들은 모두 한 쪽에 위치한다. '부녀지간'이란 혈연 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선'은 아버지의 행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나 단지 그의 딸이라는 이유로 몰려가게 된다. 그 계기를 만든 사람은 '낯선 남자'이다. 이 남자는 '안'에게 고문을 당한 피해자이다. 말하자면 천운영은 '붉은 방'에서 시선의 주체였던 피해자를 이제는 바라보기의 대상인 '객체'로 만든 것이다. 그 자는 처음엔 '안'과 '선'을 분리시키지만 나중엔 다시 맺게해주는 이중의 역할을 맡는다.이 묘한 관계의 변화, 혹은 수십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뒤틀림. 천운영은 왜 이런 관계를 설정했을까? 이 호기심이 결국은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 소설을 독해하도록 만든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내겐 그 낯선 남자의 존재가 여간 흥미롭지가 않다. 그는 내게 예전에 나온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의 바로 그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영화에서 괴물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그저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그 괴물을 다시금 우리를 80년대로 인도하는 존재라고 느꼈다. 분명히 존재했엇지만 서서히 지워져버린 역사.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떠 올리는 이별한 연인의 얼굴 처럼 생생했던 그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다만 아련한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는 80년대, 그 암흑의 현장 속으로 다시금 우리를 데려가 그것의 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존재라고... 

  그렇게 소설 '생강'에서 '선' 앞에 나타난 낯선 남자의 존재도 영화 속 괴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낯선 남자는 '선'에게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렇게 그때까지만 해도 '선'이 자신의 삶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던 역사의 어둠이 사실은 자신의 존재와 아주 단단하게 결부된 것임을 일깨워준다.  동시에 우리들에겐 우리 역시 '선'처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그 시절 80년대의 어둠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는 '선'과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80년대에로의 초대장 같은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그러니까 객체화된 '낯선 남자'의 존재는 앞에서 말했던, 우리가 바라보는 그 괴물의 내면이 사실은 바로 80년대를 독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을 더욱 더 신빙성있게 만든다.  

  아무튼 초반부 '선'의 세계는 '안'의 세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선'은 자신의 세계에 그러한 '안'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임철우의 '붉은 방'에서도, 고문을 당했던 자는 TV 속에 나오는 고문이니 시국선언이니 하는 모든 정치적 사건들을 자신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그러한 '붉은 방'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설마 자신이 그러한 붉은 방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리라고는 더더욱 말이다. 이건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 독재정권으로 정의되는 70년대 80년대의 관계와도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생채기도 시간이 흐르면 딱지가 안고 결국은 그 딱지 마저 떨어져 나가 버리듯이, 아무리 그 시간들이 고통과 공포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흐르는 시간 속에 그 아픔들과 두려움은 희석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느새 우리도 그것들을 그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한 때의 전설로 여겼다. 어쩌다 듣게되는 독재의 무시무시한 폭압은 그저 과거의 한 때에 일어난 불쾌한 추억 같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우리나라에 곳곳에서 확인되는 현상은 그게 단지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다. '선'에게도 '붉은 방'의 피해자에게도 결국은 현실이었듯이,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 바라보는, 천운영이 이 소설에서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풀어놓는 그 시절의 어둠 역시도 언제 어느 때 또다시 반복될지 모르는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다만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다락방에 숨겨져 있을 뿐... 

  그래서 섣불리 외면하거나 망각할수가 없다. 그건 지금 우리들을 상징하는 '선과  그 시대의 어둠을 의미하는 '안'이 혈연으로 맺어진 '부녀관계'라는 점과 다락방의 문 하나를 두고 공존하게 되는 설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그 시절이 어둠은 불가사리의 다리를 잘라내듯 쉽게 잘라내어 버릴 수 없는 역사이다. '선'이 다락방에 숨은 '안'과 함께 살면서 그를 양육하듯이 우리가 안고가야 하는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 존재에 단단하게 고착된 역사란 인식이 가장 인상깊게 드러난 장면이 개인적으론 '안'과 그 가족이 백숙을 먹다가 갑자기 경찰이 들어오는 바람에 '안'이 다락방으로 숨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안'은 서둘러 숨느라 그만 다락방 문을 닫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 때 '선'은 이미 아버지로 인해 가장 친한 친구인 '진'과 짝사랑하던 '민'에게 버림받은 후였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쌓일대로 쌓여 있었다.  그는 선에게 제발 문을 닫아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래 착하지. 이제 문만 조용히 닫으면 끝나. 문을 잡고 선 딸애의 얼굴. 아무 표정이 없다. 넋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문을 붙들고 선 채 꼼짝도 않는다. 텅 빈 눈. 아무것도 담지 않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고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 침묵의 눈. 침묵 조차도 숨겨버리는 절대적인 암묵의 구멍 (P.155) 
 

  하지만 선은 문을 닫지고 그렇다고 경찰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그렇게 문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안은 경찰이 물러간 뒤 내려와 딸애를 본다.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기 내 아내와 딸애가 있다. 문득 딸애의 눈빛이 뇌리를 스친다. 딸애의 눈에 순간적으로 감아돌던 밫은 아버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딸애는 버러지를 보고 있었다. 발정난 개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경멸과 혐오, 절망과 증오, 복수와 처벌을 다짐하는 결의의 눈빛(P.159) 
 

  '안'도 이렇게 느낄 만큼 '선'의 원망은 컸다. 그런데도 왜 대관절 그녀는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것일까? '부녀지간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겐 좀 다르게 읽혔다. '선'이 만일 경찰에게 그대로 알렸다면 아버지는 체포되고 아버지는 배신감에 부녀지간은 어쩌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러한 '선'의 행위는 불가사리의 다리를 잘라내듯이 그 역사를 그대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그렇게 완전히 망각해버리는 것을. 하지만 '선'은 계속 열려진 다락방 문을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갈등을 하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겠지만 내게 이 모습은 왠지 우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렇게 완전히 우리에게 달라붙어 함께 안고 가야할 역사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닫을 수도 활짝 열수도 없는... 그렇게 혐오와 포용을 함께 안고 짊어지고 가야하는 절대로 도려내질 수 없는 불치의 환부 같은 것이라고... 

  그래, 환부이다. 불치의 환부...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안고가야 하는 환부... 

  고통스럽다면 왜 안고가야 하는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안고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은 역설적이다. 우리가 안고가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니까 그것을 안고가야 하는 것이다. '생강'에서 '선'은 일상에서 문득 문득 아버지의 어둠이 엄습해 올 때 마다 반드시 고통을 느낀다. 민가협의 시위 현장에서도 대학을 그만두고 일하던 미용실에서 '진'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렇다. 고통을 받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다. 고통이 그 시절의 기억을 육체에 새겨주기 때문이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 고통을 기꺼이 껴 안아야 한다. '안'은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어린 계집에게 자기 몸에다 채찍질을 하라고 한다. 낯선 남자는 자신의 육체에 고문받을 때 들었던 라디오 방송이 생생히 새겨져 있다고 호소한다.  

  '생강'에서 모든 고통은 육체에 잔인하게 각인된다. 그렇게 되어,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어쩔 수 없이 고통은 현상되는 순간, 우리에게 바로 그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  '생강'의 후반으로 갈수록 기억한다'는 건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선'은 끊임없이 다락방에 숨은 아버지에게 그가 한 일이 기록된 신문 기사를 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스크랩한다. 

  당신은 장물이었다. 담벼락에 숨겨둔 스티커 쎄트 처럼, 내가 직접 훔친 것은 아니지만 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께림칙한 장물이었다. (...) 당신을 잊고 싶었다. 무시하고 외면하고 아주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잊을 만하면 신문에 당신의 이름이 실릴 때나 연례행사처럼 미용실을 찾아오는 기자들을 마주할 때면, 그제야 그들이 지목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렇게 당신은 유령이 되었다. 다락방의 유령.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가끔씩 자신의 존재를 어떤 신호나 징후로 보여주는, 한밤중에 다락 바닥에 덧댄 나무합판을 들썩이는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당신은 다락방의 유령이었다. (P.255) 

   기억하는 건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더이상의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다.  

  낯선 남자는 고문 받을 때 자신이 허위 진술한 대가로 희생당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세상에 '붉은 방'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량한 가족이었지만 결국은 모두가 정권유지를 위해 희생당해 버린 가족의 이야기를.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라디오 방송으로 자신의 육체에 각인해 놓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들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어느날 미용실을 찾아온 다른 낯선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잘못된 과거를 그냥 숨겨두고 묻어두면, 언젠가는 그게 다시 유령처럼 튀어나와서 똑같은 과올르 저지르게 되어있거든. 난들 그 때의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니? 내가 내뱉은 이름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만 했던 사람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인걸. 그러니까 역사는 말이야, 그런 과거의 유령들 때문에... 그래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예전에 안이 나를 도왔던 것처럼." (P.254)  

  '선'은 이 남자의 이야기를, '낯선 남자'의 이야기를, '안'의 이야기를 듣고 모으고 또다시 우리에게 들려준다. 다시는 이러한 어둠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선'이 지금 시대의 우리를 대표하는 존재라면 이로써 천운영이 왜 하필 지금 그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고통스런 경험을 하게 만드는가는 보다 분명해진다. 그건 비단 그 '괴물'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운영이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바라보게 하는 건, 그 괴물의 내면이 아니라 사실은 그 괴물을 탄생시켰고 활개치게 만들었던 그 '시대' 자체인 것이다.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였는지, 그것이 간직한 어둠이 얼마나 깊었는지 또한 얼마나 편협한 눈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들을 희생시켰는지 생생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왜? 인용한 한 남자의 말에 잘 나와있듯이, 또 다시 그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시절이 어떠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처럼 붙어있는 마지막 부분은 더더욱 우리가 기억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슬금 슬금 그 괴물이 다시금 나오려고 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뭣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 또한 분명하게 그 괴물들이 날뛰었던 시대로 역행하고 있다는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소설에서 '생강'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은 '선'이 미용실의 점심 시간 우연히 엿듣게된 동료들의 대화에서이다. 그 중 한 여자가 김치를 먹다가 생강을 씹었다고 말한다. 어쩌다 씹게 되는 생강의 맛... 행여 당신이 이 소설을 읽게된다면 그렇게 이 소설 역시도 당신이 우연히 씹게된 생강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생강은 모든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는 재료중의 하나다. 사실 우리가 그 맛을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매일 어디서고 우리는 생강을 삼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단단히 결부된 그 어둠의 역사에 대한 은유로도 될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삼키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그 맛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생강이 아주 잘게 썰어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의 역사가 생강의 맛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맛을 잘 못 느끼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 우리 전에 미리 그 생강을 덩어리째 삼키고 잘게 빻아놓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 또한  다시금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 스스로 생강을 덩어리째 삼켜왔던 사람들 덕분이라고... 때문에 더더욱 비록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혐오나 공포를 무릎쓰고서라도 이 소설을 삼킬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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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의 비밀스러운 삶
아틀레 네스 지음, 박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혹시 그런 때가 있지 않은지? 문득 길을 걷다가 절반 정도 왔는데 생각해 보니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구나 분명 제대로 목적지로 가는 길로 왔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걸으면 걸을 수록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때가...  어쩌면 이것은 비단 길을 걸을 때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삶에 있어서도 불현듯 엄습해오는 때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제대로 내게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지는 때가... 

    바로, 노르웨이 작가 아틀레 네스가 그려내고 있는 소설 '리만의 비밀스러운 삶'의 주인공 역시도 그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수학자이고 '소수'란 것에 매료된 나머지 수학자로서의 인생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현재까지 이어온 사람이다. 그는 교수이고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까지 꾸리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문득 자신이 제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꿈꾸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나, 즉 꿈을 실현한 내 모습에 끌렸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묵묵히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젊은이로 여겼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잘 모르겠다.(P.14~15) 

  그가 이렇게 느끼게 된 것은 나이 때문이다. 

 마흔살이 된다는 것은 현대 수학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일이다. 죽은 알프레드 노벨은 유언을 작성할 때 수학자인 우리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우리 수학자에게 노벨상 같은 큰 영광이라고 한다면 필즈상이다. 물론 아벨상도 영예롭기는 하지만,  사 년 마다 주는 필즈 메달이야 말로 가장 명예로운 상이다. 어떻게 보면 올림픽의 금메달과도 같다. 그러나 이 상에는 특별한 추가 조항이 있다. 바로 나이 제한이다. 마흔 살 이전의 수학자에게만 수여되는 것이다. 나는 최종 후보로 거론된 적도 없고, 올림피아드 승자도 아니며 국내 대회 결승에도 진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꿈은 항상 수학 올림피아드의 금메달이었다. 나는 금메달을 손에 쥐는 모습을 그리며 정말 열심히 연구했지만 이제 마흔세 살이 되었기 때문에 소용없게 되었다. 대신 나는 리만의 평전을 쓰면서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P.42~43)

  이렇게 나이로 인해 더 이상 의미있는 수학적 업적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려 한다. 그것은 바로 곡면기하학으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영감을 주었고 아직까지도 증명되지 못하여 영원한 미제로 남아있는 가설 때문에 불멸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수학자 리만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이다. 그 평전이 그에게 그만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리만이 40세라는 짧은 인생을 산 데다가 남긴 논문도 몇 편 안 되어 그의 삶이 그가 수학에 미친 영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만의 삶은 짧고 특색이 없다. 그러나 그의 발견은 영원성을 지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난하고 의기소침하며 서툰 왼손잡이에 폐병까지 걸린 사람이 쓴 가설이 후세에 미칠 영향력과 파급력이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설은 완벽한 증명없이 오로지 그의 직관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P.111)

  리만의 영원히 증명되지 않은 가설을 풀기위해서라도 그는 리만의 삶이 제대로 세세하게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그는 석 달이 지나도록 하나의 문장 밖에는 쓰지 못했고 여기에서마저 한계에 봉착한 그는 아무래도 글 쓰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되어 작문 교실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여인 잉빌드를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은 일종의 액자구조를 취하고 있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은 실종된 상태로 나타난다. 그의 딸은 혹시 그를 찾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의 컴퓨터에서 찾아낸 일기를 경찰에게 건네준다. 바로 이 일기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독자는 처음부터 하나의 호기심 - 그는 왜 사라진 것일까? -을 가지고 그의 일기를 읽게 된다. 미스터리를 푸는 것은 사람이 가진 근원적 욕망중의 하나라서 그의 일기에 나온 모든 문장은 그래서 무심히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일기는 어떤 일기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스스로 필생의 프로젝트로 여기는 리만의 평전을 써가는 동안의 일상을 그대로 담아낸 일기이다. 그렇게 모든 일기가 그렇듯이 아주 개인적인 내밀한 고백까지 다 담겨져 있다. 평전의 일부인 리만의 삶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그 평전을 쓰면서 느끼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대한 좌절감이나 잉발드를 만나 새롭게 사랑의 기쁨을 느껴가는 과정까지 다 담겨져 있는 r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보다 분명한 목적, 주인공이 사라진 이유를 찾기 위해 읽기에 이 모든 내밀한 고백들이 언젠가는 우리 앞에 그 이유를 제시해 줄 것으로 믿지만 당신은 아마도 수백년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이 덤벼들었으나 풀어내지 못한 리만 가설 처럼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분명, 이 소설 역시 영원히 당신에게 '리만 가설'로 남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읽기 보다는 처음에도 말했듯이, 문득 자신이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남자의, 그렇게 불현듯 가야할 방향을 상실한 자가 느끼는 갈등을 오롯이 건져낸 자기 고백적인 글로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물론 여기서의 갈등은 새로운 길을 걸으려 할 때 늘 따르게 마련인, 늘 걸어온 길을 계속 걸어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정감과 그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때 늘 따라다니게 될 불안감 사이의 갈등을 말한다. 쉽게 말해 늘 우리에서 살아온 동물이 갑자기 그 우리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 자기 앞에 놓여진 그 광막한 초원 앞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그 불안감 때문에 더 유혹적으로 다가오는 우리 안에서의 안정된 삶 사이의 그런 갈등이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단순히 말해 두 개의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세계란 각각 아내인 키라로 대표되는 늘 유지해 온 삶의 궤도를 따르는 안정된 세계와 잉발드로 대표되는 이전의 삶의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세계를 말한다. 

  정확히 주인공은 언제나 그 두 세계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가 리만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도 아마도 사실은 그러한 욕망,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욕망에서 발현되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리만은 그 당시까지 정설로 내려오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로써 새로이 '곡면기하학'이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정초해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 유클리드 기하학이 '평행한 직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면 리만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아무리 평행한 직선도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리만의 기하학은 완전히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났고 그렇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전복시켰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서 뉴튼의 기계론적 물리학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리만의 기하학이 가진 전복적인 힘을 생각한다면 당연해 보인다. 아마도 이렇게 리만이 당시의 통념으로 부터 벗어난 완전히 자유로운 사유를 하는 수학자였다는 것이 주인공 역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자'라는 점에서 유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리만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왕정을 선택했을 때 그렇게 실망을 느꼇던 것이고 리만이 다시 히노버의 자유로운 체제 아래에서 괴팅겐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이리라. 

  나는 리만이 사고의 자유를 부르짖는 하노버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괴팅겐으로 돌아왔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P.122) 

  하지만 그렇다고 리만이 전혀 자유로운 존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난했고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늘 자신의 가족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에도 부응해야 했다. 일상속에서 그는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수학'에서 뿐이었다. 이것은 지금 주인공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언제나 가정의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점점 통제를 벗어나는 아이들 때문에 근심이 끊이지 않고 아내 카린은 그에게 늘 정신이 딴 데 가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타박한다. 그가 유일하게 자유로움을 느낄 때는 언제나 잉빌드와 함께 할 때 뿐이다. 그렇게 리만이 수학을 통해 자유로웠듯이 주인공은 잉빌드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 따라서 사실은 이 소설에서 리만은 그대로 주인공의 도플갱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자유엔 늘 불안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아틀레 네스는 바로 이러한 불안감을 소설에서는 불륜으로 인한 불안감으로 치환해서 보여준다. 주인공과 잉빌드는 서로 거세게 끌리지만 서로가 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기에 늘 극도로 조심하고 주위 상황에 예민하게 대응한다. 사실 이러한 불안감은 소설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안정과 자유 사이에서 주인공이 늘 갈등하고 있음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리만의 평전과 새롭게 사랑을 엮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이 소설은 본래는 다시 새로운 자유를 찾아 떠나려는 자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네스는 이러한 내면을 충실히 복원만 할 뿐 섣불리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대로 '과정으로서의' 소설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고 작가 역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의 실종이 그 어떤 대답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실종은 그저 단순한 사라짐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소설이 끝났을 때 모든 등장인물이 사라지듯이... 그런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는 단순한 사라짐... 그렇게 이 소설엔 그 어떤 결말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나면, 이 소설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주인공 역시 매혹시켰던 '소수'의 존재 때문이다. 

  골드바흐는 이미 삼백년 전에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추측을 발표했다. 이 명제는 소소한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마치 수학선생님이 수업시간 끝나기 십 분 전에 새로운 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골드바흐의 추측은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증명되지 못했다. 이처럼 소수를 공식으로 증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수는 모든 규칙을 벗어나 안전한 보호막 속에 있기 때문에 연구 가치가 있다.(P. 14)   

   여기서 보듯이 소수란 단적으로 말해 불규칙적인, 다시 말 해 규칙에서 벗어난 '얼룩' 같은 존재이다. 소수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도 같이 모든 규정하려는 것으로 부터 탈피한다. 어떤 것을 공식화하려는 순간 불현듯 뛰쳐 나와 그 공식을 전복시켜 버리는 존재. 그것이 바로 소수인 것이다. 그렇게 소수는 모든 불확실성으로 열려진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아 있다. 누구도 소수를 공식화 할 수 없듯이, 삶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없다. 우리는 늘 '왜 사는가?'하는 의문을 입버릇 처럼 달고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 일쑤이지 않는가? 소수가 모든 규정성을 벗어나듯이 우리네 삶 또한 그렇게 모든 규정성으로 부터 벗어난다. 그 어떤 결말도 내지 않고 그대로 공백으로 만들어버린 결말은 어쩌면 작가 자신이 문학을 '소수'적인 것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작가는 왜 굳이 자신의 소설을 '소수'적인 것으로 구현하려 한 것일까? 바로 이 소설 말미에 나오는 리만 자신의 미발표 논문의 한 부분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소수가 어떻게 사라지지도 않고 영원히 무한의 길을 가는지 그 이유에 대해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가는 길 중간에는 소수가 전혀 없거나 기나긴 구간이 있었다. 이 숫자들은 예언 시대 이전인 태고적부터 존재해왔다. 우리는 이 수를 잡지 못하고 선회하면서 모호한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신은 만물의 모습을 통해 현현하신다. 소수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가 남긴 족적이자 신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실재한다는 흔적이다. 우리가 수학을 신의 위치인 고차원에서 바라보면, 의심할 바 없이 n차원 공간에서 소수가 신의 규칙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숫자가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P.271)

   소수는 인생의 신비를 구현하고 있다. 소수의 비밀을 아는 것은 리만의 고백에서 보듯이 우리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과 같다. 신의 규칙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지 않을까? 아마도 바로 이러한 이유로 네스는 자신의 소설을 굳이 '소수'적인 것으로 만드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는 소수가 영원히 무규정적이듯이 그렇게 일부러 결말을 내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작가의 진실한 태도라고 여긴다. 이는 아틀레 네스의 이전작들을 생각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그의 이전작들 대부분은 모두 한 개인의 삶을 충실히 복원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작품에서 주로 한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많은 삶의 모습을 세밀히 바라보았던 그였던 만큼 소설이 인생을 어떻게 구현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분명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소설 역시도 그러한 고민 끝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동안 타인의 삶에 천착해서 충실히 복원해왔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그는 이렇게 '과정으로서' 그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작가의 진실한 태도라고 여긴다. 그것은 인생이 가진 신비 앞에서 작가는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리만이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평생 소수에 집착했던 그토록 가우스 이래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었던 리만 마저 소수가 가진 신비 앞에 스스로를 낮추었다면 작가 역시도 소수를 닮은 인생의 깊이 앞에서 겸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때문에 그는 그 어떤 선택도 주인공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그냥 그대로 '공백'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기까지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라 여긴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기로에 선 존재가 어떤 내면의 변화를 그려가는지 충실히 담아내는 것만이 전부라고... 

    혹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고 다른 길에로의 유혹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 이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여기엔 그 어떤 해답도 없지만 어떤 고민들은 굳이 해답을 구하지 않고 다만 천착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다행이 이 책은 작고 가벼워서 어디서든 들고 읽을 수도 있으니, 문득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 한 조각이 괜스레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운다면 자판기 커피를 마시듯 홀짝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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