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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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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足履之適也  忘要帶之適也 知忘是非心之適也

                                            -장자, 달생편-

 

 

이 책은  몇 년전 알라딘 서재의 어떤 미모로우신 분이 선물해 주신 책인데,(==>링크)

한동안 잊고 지내다보니, 언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려 다시 구입하게 되었다.

'자살의 전설'을 보는 동안 내내 떠올라서 내처 읽게 되었는데,

언젠가 읽었던 '페터 회'의 소설들도 생각나는 것이, 역시나 좋았다.

 

이 책의 뒷표를 보면 '죽음과 고통 뿐만 아니라 행복과 '삶의 즐거움'을 아우르는 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렇게 긍정적인 소설은 아닌 것 같고,

삶의 연장선 상에 놓여있는 죽음과 고통을, 너무 슬퍼서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켜 그려내려 한게 아닌가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감정으로 복잡했다.

책 제목이 왜 '이탈리아 구두'일까를 놓고 여러가지 추측을 했었다.

책의 중간 쯤에,

장자라는 사람이 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164쪽)

라는 문장이 등장하는데,

책에서 신발 만드는 장인으로 나오는 '자코넬리'가 이탈리아 로마 출신이라고 한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으로만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친구가,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신발을 보면 그 신발의 주인을 정확하게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며,

대단한 것처럼 설레발을 치길래,

나도 그럴 수 있다며 일축한 적이 있었다.

 

난 사람의 필체를 가지고 판단의 준거로 삼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내게 또 한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게, 그 사람이 신은 신발이다.

 

단지 신발은 필체보다는 덜 정확하게 여겨지는데,

그 이유가 신발을 처음 사서 신었을 경우엔, 많은 것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게 되고,

신발을 선물하는 경우는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랬을 경우 그 사람의 개성이나 습관이 신발에 바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중국의 전족이나 마당발 같은 단어를 봐도 그렇고,

신발이 사람의 개성이나 습관, 성향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만도 없다.

 

신발이 편하면 신발을 신고 있는 발이 편해서 신발을 신었는지 벗었는지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고,

허리띠도 마찬가지로 편하면 허리에 띠를 했는지 안 했는지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살이의 어려움이나, 관계의 허허로움 따위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전제를 하게 되는데,

'아버지가 지금 신은 구두는 발에 대한 모독이에요.' 라는 구절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나는 이 신발을 신을 자격이 있는가, 나는 이 허리띠를 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를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신발에, 허리띠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게 될때, 우리는 자유로워 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책에서 주인공은  어떤 일을 겪고 스스로를 유폐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건 하나의 구실일뿐 주인공은 그 이전부터 홀로 외롭게 살아간 사람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는 그는,

'추우면 외로움도 깊어진다.(7쪽)'고 하는데,

그의 그것은  들어줄 대상이 없는 독백이라서 한층 춥고 외롭게 여겨진다.

 

창문마다 서로 다른 프로그램에서 내보내는 누더기 소음이 이따금 들려왔다. 외로움이란 사람들이 같은 방송을 시청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세대나 가족은 저녁마다 각각 다른 위성이 보내는 서로 다른 세계에 몰두한다.(111쪽)

그는 외로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 방송을 시청하기 위하여 택한 것은 자기 자신으로,

공감과 소통을 거부하고 단절을 택한 건, 다른 방송 프로그램을 택한 본인의 의지이기도 한 셈이다. 

 

나는 배신당할까봐 두려워 내가 먼저 배신했다. 얽매이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감정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나를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종류의 두려움을 가진 남자들이 많았다.(331쪽)

책 뒷표지에서도 이구절을 만났는데,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당신 여전히 몰래 엿들어?"

하리에트가 물었다.

"섬에는 엿들을 대화가 없어."

"내가 전화를 할 때면 당신은 언제나 엿들었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책이나 신문을 넘기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렇게 행동하며 안 듣는 척 하려고 했지. 기억나?"

화가 났지만 그녀 말이 옳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불안하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이래로 나는 언제나 사람들의 말을 엿들었다. 닫힌 문에 기대서서 동료나 환자들의 대화를 엿들었고, 카페나 기차에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대화들 대부분이 거의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사소한 거짓말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원래 그런 건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허위적인 이탈이 반드시 필요한 걸까?(131쪽)

이 구절을 본 후에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연히 듣게 된 '어머니와 아버지가 불안하게 속삭이는 소리'란 것이 '그가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면,

그 후로 그가 엿듣는 버릇을 갖게 된 것을,

자신이 버림 받지 않기 위하여 먼저 상대방을 버리는,

배신당할까봐 두려워 먼저 배신하는, 그 상황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다 읽고나서,

주인공을 미워할 수 없었던 이유는,

버림 받을까봐 두려워 상대방을 먼저 버리고, 배신 당할까봐 두려워 먼저 배신했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정하고 스스로 유폐시키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얼음장에 구멍을 뜷고 들어가며,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얼음 구멍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105쪽)'고 하지만,

이것 외의 방법으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이 그렇게 무덤덤하게 살아간다는 얘기도 된다.

 

남의 얘기가 아닌 바로 내 얘기를 하고 있는 듯 여겨져, 이 책을 읽는 내내 쓰리고 아팠다.

그런데 내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바로 그'  느낌 때문에 남들이 간과했을지도 모르는 것도 깨달았다.

"사람들은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는 말의 이면에 있는,

편안 신발을 신을 수 있는 발, 편한 허리 띠를 맬 수 있는 허리 따위와 더불어,

상대방이 나에게 맞는 편안함 만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나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편안한 존재인가 돌이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ㆍㆍㆍㆍㆍㆍ도시에서는 이제 더 이상 별을 볼 수 없잖아요. 난 그래서 여기 살아요. 도시에서 살 때는 어둠과 적막함이 그리웠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별빛이 보고 싶었지요. 무한히 이용할 수 있는 환상적인 자연자원이 이렇게 있다는 생각은 왜 아무도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적막함을 숲이나 광석처럼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150쪽)

 

"독특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어요. 하지만 늙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없지요. 우리는 노인들이 유리처럼 투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노인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하지요. 아버지도 점점 더 투명해질 거예요. 엄마는 이미 투명해졌고."

우리는 말없이 서 있었다.(151쪽)

그렇게 되면, 주인공 딸인 루이제의 이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어린왕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상한 부분도 있었다.

'혈압은 155에 90(9쪽)'이라면 하이퍼의 범주이지 '아무 이상도 없는'게 아니다.

 

군데군데 해석이 껄끄러워서 미루어 짐작해야 했던 구절들이 있었다.

헤닝만켈의 유려한 문장들을 만끽하려면 그가 쓰는 언어를 내가 구사하는게 제일 가까울텐데 싶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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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5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6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6-07-26 02:51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어보라는 권유를 저도 꽤 받았는데 아직 못 읽었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어요.
제목부터 괜히 쓸쓸한 느낌이 들어서. 제목에 구두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그럴까요.
˝그분˝은 지금 잘 지내고 계신지도 문득 궁금해지네요...

양철나무꾼 2016-07-26 09:50   좋아요 0 | URL
hnine님, 강추하고 싶은 책인 건 맞는데,
아버님이 기억날 수도 있으니 한참 후에 읽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동안의 쿠르드 발란더 시리즈와는 정서나 어조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 해요.

저도 그 분 가끔 궁금한데,
전엔 가끔 안부 페이퍼를 올리시더니, 이젠 바쁘신지 그것도 뜸하시더라구요~--;

날 더운데, 님도 잘 지내시죠?^^


마녀고양이 2016-07-26 14:32   좋아요 0 | URL
여전히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주는 사람˝을 그리워하는구나, 아하하, 나도 여전한데.

알라딘에서 유일하게 말을 놓은 동갑내기 친구인데,
지나치게 소홀하여 미안하오. ^^, 누군가에게 소속되고 싶은 마음과 자유롭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는 나는, 어릴 때의 간섭으로 인한 영향이 너무 강하여 친밀함의 거리 조절을 잘 못 해서.... ㅠ. 나 8월 2일까지 휴가야, 혹시 나는 시간이 있을까? (코알라도 데리고 나오라는 말은 하지 말고, 그 녀석 고딩이라서 나하고도 외출이 어렵당... ^^)

양철나무꾼 2016-07-27 18:28   좋아요 0 | URL
코알라도 없이 아줌마 둘이 만나서 뭐 하나? 심드렁~(,.)
코알라 많이 컸겠다.

내가 코알라 첨 봤을때가 5학년이었나 그랬지?^^
그런 코알라가 벌써 고딩이니 우리가 안 늙겠어?

난 토욜이나 일욜, 주말이 좋은데...ㅋ~.

마녀고양이 2016-07-28 10:22   좋아요 0 | URL
심드렁~~~ 쳇! ^^

2016-07-26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07-27 18:32   좋아요 1 | URL
저도 님 댓글보면 기분이 마구 좋아져요.
이 동네에 그런 사람들 몇 잇죠?
제겐 님도 그 중 한명이구요~^^

중복인데 치킨 드시려나 삼게탕 드시려나?
전 점심땐 삼계전복죽 먹었구요.
저녁엔 치킨을 먹어야죠.
전 대학1학년 때까지 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그때 명륜동에 있는 KFC를 처음 갔었는데,
그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죠.

이젠 어느 브렌드를 먹어도 그만큼은 맛있어요, ㅋ~.
 
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독서를 통하여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되고, 그것을 간접경험이라고 한다지만,

어떤 책들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뛰어넘는 이렇다 할 것들이  없는데도,

그리하여 흔히 말하는 책을 읽는 묘미라고 할 만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내 가슴이 먹먹한데도, 읽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책들이 있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줄어드는 책의 두께가 아쉽지만, 뒷장이 궁금해 손에서 내려놓을 순 없고,

내처 읽으려니 가슴이 멍든것 같기도 하고 체한 것 같기도 한 것이 먹먹해져와,

숨고르기를 하면서 그렇게 읽게 되는 책들 말이다.

 

이 책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으려나?

재밌다는 표현은 좀 그렇겠고,

좋다고 설레발 치는 것도 행여 누가 될까 싶어 조심스럽지만, 그동안 읽은 책 중에서 손가락 안에 꼽게 되는 책이다.

 

그냥 맹물 같이 아무 맛이 없는 소설이랄까.

평상시 맹물을 먹을 때 맛이 있어서 먹는게 아니지만,

갈증으로 목이 마르게 되면 같은 맹물도 꿀물처럼 달콤하게 여겨지듯,

아무맛도 아닌 '맛'을 지닌 소설이다.

 

그동안 자살에 대해서, 자살의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되게 비겁한 행동이라고만 여겼을 뿐,

그 (또는 그녀)를 자살로 몰아간 상황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할 정도로 깊이있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왜 아파요?

그냥 종양 때문이야. 제거해야 했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ㆍㆍㆍㆍㆍㆍ어쨌든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냥 쉽게 약해지고 슬프고 지치는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도저히 혼자 지낼 수가 없단다.

아버지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당연히 혼자는 아니지. 네가 있으니까. 그런데 나도 너무 외롭다.ㆍㆍㆍㆍㆍㆍ아버지 바로 옆에 있으면서 존재조차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로이는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135쪽)

 

책의 이 부분을 읽다가 ,

난 자신이 종양으로 죽게 될 걸 알고 미리 자살하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잠깐 했었는데,

뒷부분을 보게 되면, 로다라는 여자 생각을 들키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었음을 아들 로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작가 데이비드 밴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 3년간은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할 정도로,

아버지의 행위를 부끄럽고 추하다고 생각했다고 '작가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우리는 타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추측만 하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고,

자살도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는 것처럼 어떤 문제나 특별한 원인에 의해 계획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단순히 우발적이고 즉흥적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며,

죽은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지만,

살아 남겨진 주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로이가 아직 살아 있고 그래서 어디든 데려갈 수 있다면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 로이가 실제로 하고 싶다던 일이고 아버지한테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 정도라면 귀농만큼이나 쉽게 준비할 수 있다. 배를 살 돈도 있었고, 항해술도 익혔고, 시간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가능했다 해도 로이의 말에 귀부터 기울여야 했다.(203쪽)

 

책에서, 로이의 아버지는 이런 깨달음에 이른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조금만 주의깊게 생각해보면 작가 데이비드 밴의 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수콴 섬이란 단편 소설을 이렇게 끝 맺는 것으로,

작가 데이비드 밴은 하고 싶은 얘기를 대신한다.

 

"ㆍㆍㆍㆍㆍㆍ물에 빠졌을 때 정신이 들었다.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다. 제발 살려줘. 짐은 처크와 네드가 와서 구해주기를 바랐다. 목으로프는 쉽게 풀어냈지만, 옷을 입은 채라 그 무게에 자꾸 가라앉기만 했다. ㆍㆍㆍㆍㆍㆍ이곳이 물속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바다 아래로 끝도 없이 가라앉는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한참을 발버둥 쳤건만 그 시간이 영겁인지, 불과 10분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전신의 감각이 사라졌다. 갑자기 피곤하다 싶더니 입속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ㆍㆍㆍㆍㆍㆍ마치 마지막 물이라도 되는 양 허겁지겁 들이켰다. 차고 딱딱하고 불필요한 물. 그리고 로이가 아버지를 사랑했음을 깨달달았다. 그 사랑으로 충분해야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깨달음이란 왜 이렇듯 늘 늦기만 한지. (262~263쪽)

 

 

그동안 읽은 다른 책들보다 문체가 수려한 것도 아니고, 어떤 깊은 깨달음을 준 것도 아닌데,

이 책이 그토록 좋았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적절한 표현이 생각 나지 않아서 망설여지는데, 이런게 아닐까 싶다.

작가 데이비드 밴은 글쓰기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치유를 경험했고,

독서라는 간접 체험을 통하여,

책을 읽은 사람들은 각자 취사 선택하여 나름대로 치유되는 걸 경험한달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취사 선택'을 사용했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이 구미에 맞게 선택을 하는 그런 선택은 아니고,

책을 읽게 되면 어느샌가 자기에게 적절한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맞춤 치유'라고 하겠다.

 

늘 그렇듯이, 책을 읽는 데 정석은 없는 것 같다.

해석이 분분할 수도 있고, 하나의 결말을 놓고도 각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작가 데이비드 밴이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이 치유를 경험했다고 해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감동과 치유를 경험하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인간 영역의 많은 부분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아직 인간을 대신 할 수 없는 일정 부분이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마음이랑 연관된 외로움이나 쓸쓸함 등 감정의 영역 '공감'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가 몸이랑 연관된 '치유'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변해도 변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의 이영애를 향한 절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가 아니라, '사랑은 변하는 거다'쯤으로 바뀔 수도 있겠다.

영화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변하는 사랑을 가지고 절규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 하지 못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한 눈을 팔았다면,

그게 직무유기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자, 는 깨달음은,

책을 읽는 사람만이 얻어 가질 수 있는 값지고 귀한 수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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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7-15 17:19   좋아요 1 | URL
간혹 별거없는데 굉장히 몰입되는 책이 있더군요..그런 책이 아니었을까요.
뭔가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어도 상당히 심리적인 코드가 매치되는 그런 책말이죠^^..

양철나무꾼 2016-07-26 09:33   좋아요 1 | URL
데이비드 밴은, 그리고 그의 중단편이라고 할 수 있는 수콴섬은,
아마 제 인생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별거 없는 그것이 `별거`인 소설이라 할까요~^^

암튼 그런 좋은 소설을 이제라도 읽게된, 제자신을 대견해하고 있습니다여~^^

서니데이 2016-07-15 18:17   좋아요 1 | URL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님 밖에 비가 오고 있어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6-07-26 09:39   좋아요 2 | URL
오늘은 후끈한 것이...비 예보는 없던데,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는 그런 하루가 될 것 같아요.
이열치열이라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 보다는, 이런 날씨 앗쌀하고 화끈한 것이 낫지 않아요?^^
하긴 까뮈의 이방인에서는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햇살 탓으로 돌리지만 말예요~--;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 -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마주친 모나드
이광수.최희철 지음 / 알렙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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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라는 제목이나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마주친 모나드'라는 소제목이나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진'이라는 '찰나'의 시간의 물음에 대해 '철학'이라는 '삶'의 시간들로 답하다 라는 의미로 해석해 보려 하지만,

이 마저도 영 자신이 없어 쭈뼛거리는 고로, 이 책을 읽고난 후의 느낌은 한마디로 '어렵다' 정도가 되겠다.

 

그동안 나는,

소설가는 소설속에서, 음악가는 음악속에서, 미술가는 미술작품 속에서, 그리고 사진가는 사진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해당 분야의 작품들을 통하여 자신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녹여내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기 때문에,

자신의 예술을 보게 되는 다른 사람 내지는 자신의 예술 영역 밖의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도 있고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으며,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도 그렇고, 작품을 감상하는 감상자도 그렇고, 얼마든지 중의적인 표현이나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모든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만 얘기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예술가가 작품 외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야 본인의 자유의지겠지만 썩 좋게 보지 않았던 연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진가는 자신이 찍은 그 사진 행위와 그 결과물에 대해 말을 잘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 든다. 왜 이 사진을 찍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 사진을 찍었는지, 그때의 느낌은 어땠으며, 어떤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는지,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난 뒤의 느낌은 어떠한지, 사진을 보고 든 생각은 어떠한지, 다른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고 무슨 생각을 가질 것 같은지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냥 이미지만 보면서 좋네, 멋지네, 잘 찍었네, 하는 따위의 별 의미 없는 반응만 보일 뿐,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그것을 가지고 또 다른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더 넓은 삶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하고, 이런 거 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7쪽)

 

때문에 이 책의 <들어가는 글>에서 '산다는 것, 본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사진 찍는 인문학자'이신 '이광수' 님이 제기하신 이 문제가 다소 의아했었다.

한참을 읽다가 책날개 안쪽에 적힌 프로필을 되짚어 읽은 후에야,

'사진 찍는 인문학자'가 아니라 '인도사를 전공한 교수이자 사진비평가'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한 나라의 역사를 공부를 공부하다가 사진이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사진을 이론부터 공부했으며 결국 사진비평가라는 직함을 얻은 '이광수' 님이기에 가능한 일이란 걸 인식하게 되었다.

 

거칠게 얘기해보자면,

자신이 찍은 사진들의 기법이나 테크닉에 대해 얘기하는게 사진가의 몫이라면,

생각이나 느낌을 '얘기하는건' 겉으로 보기엔 '인문학'이나 '철학'의 몫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사진 찍는 인문학자'이신 이광수 님과 '철학하는 시인'인 최희철 님은 그런 의미에서 중첩된다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이광수 님이 '사진을 가지고 하는 인문학적 '이라고 하셨을 때에서야,

이론과 실제,지식과 경험, 거기에 생각과 느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렇지만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철학하는 시인'인 '최희철' 님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고 존중해야할 지향점으로 삼고 생각의 놀이를 같이 하고자 한게 참 멋지게 느껴졌다.

최희철 님은 철학하는 시인이시지만,

항해사인 경력이 있으신, 배 타는 일과 닭 잡아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고,

녹색과 잡종의 세상을 지향하는,

삶 자체가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이다.

이광수 님은 최희철 님을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다고 하시는데,

난 이말이 어렵거나 현학적인척 하지 않는다 정도로 읽혀서 좋았다. 

 

개인적으론, 

사진을 찍는 인문학자 이광수 님의 글이 고차원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졌다면,

철학하는 시인 최희철님의 경우 철학적인 걸 시각적으로 형상화시켜서 알기 싶게 설명하려 노력하여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가령 길이가 다른 두 개의 선분이 있다고 해보자. 선분의 길이는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선분은 점들이 모여서 된 것이므로 한 개의 선분에는 길이와 상관없이 무한 개수의 점들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두 선분은 모두 '무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무한 중에 어느 게 더 큰 무한일까? 무한을 비교할 수가를 물은 것이다. 보통은 길이가 긴 선분의 무한이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두 무한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어느 무한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길이가 긴 선분의 무한이 더 크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무한을 본 게 아니라 그 무한을 함유하고 있는 선분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본 것과 같다.(25쪽)

 

난 앞으로도 사진을 포함한 다른 예술 작품을 향하여서도,

좋네, 멋지네, 잘 찍었네, 따위의 말들만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광수 님처럼이 아니고, 최희철 님처럼 쉽게 쉽게 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존재를 존재자로 보질 않고 존재로 볼 때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최희철 님의 말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상 모든 건 기준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인간을 절대자로 보는 것 또한 인간 중심의 독선이니까 말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세상은 얼마든지 아름다워 질 수 있고,

실패와 패배에 대해서도 보다 넉넉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게 될테니까 말이다.

 

이 책은 이런 의도로 쓰여진 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지식과 깨달음의 깊이가 요 정도인걸~(,.)

안분지족의 묘를 느끼게 해준 책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하던 대사가 생각나는,

그런 요상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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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9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6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07-09 20:32   좋아요 1 | URL
ㅎㅎㅎ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읽었는데 리뷰는 차일피일
미루었던터라서..리뷰가 더 와닿네요..^^..ㅎㅎㅎㅎ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기보다는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한 시선의 관념성...

저도 늘 사진을 그렇게 찍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잘봤습니다..^^..^^

양철나무꾼 2016-07-26 09:27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귀중한 댓글에 덧글이 많이 늦어버렸네요.
그렇지 않아도 사진에 관한 책이어서,
님의 코멘트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댓글로라도 만나게 되니, 궁금증이 많이 줄었습니다.

어서 리뷰 올려주세요~ㅅ!^^

2016-07-25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골로 간 예술가들 -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산촌 생활자 이야기
박원식 지음, 주민욱 사진 / 창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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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가물거리는 대학 새내기 시절 학교 자치 기구인 방송국에 지원을 했었다.

지원한다고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배들은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수습작품이란 것을 만들어 내라고 했었는데,

내가 지원했던 분야는 프로듀서 였던지라, 보도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따는 일이 주어졌다.

묻고 대답하는게 인터뷰라고 알고 있었던 내겐, 

인터뷰를 따는 과정에서 내가 묻는 목소리가 같이 녹음되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겨졌지만,

선배들은 프로듀서란 겉으로 두드러져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꼬투리를 잡아,

눈물을 쏙 빼놓은건 물론이고 혼까지 쏙 빼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암튼 그때 이후로 난 방송국에 주눅이 들어, 대체로 의욕 상실 사기 저하의 나날을 보냈었다.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산촌 생활자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산골로 간 예술가들'이란 이 책을 읽게 된데에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을뿐더러,

지독히도 몸을 움직이는걸 싫어해서 강이나 산으로의 여행은 물론이거니와,

동네 뒷산을 바라보는 것도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여겼던 내가,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며 귀촌을 동경하는 것으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남편의 고향이 시골이어서 명절 때마다 한번씩 다녀왔었고,

'미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의 일침을 통해서도,

시골이 마냥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할 사안은 아니어 주시고,

이런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간접 체험하고, 꿈꿀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의미이다.

 

이 책은 (산골이라기 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총 4장에 걸쳐서 다루고 있는데,

자연이라는 길을 통해서 교감하고,

자연이라는 교사를 통해서 성찰하고,

자연이라는 순리를 통해서 조화를 이루며,

자연이라는 춤을 통해서 몰입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준다.

 

난 그동안 막연하게, (농촌도 그렇겠지만),

유독 산에 사는 사람과 관련하여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졌었다.

역으로, 산에 사는 사람들은 으례 자유로운 사람이겠거니,

(실상은 안 그럴지라도), 적어도 영혼이라도 자유로운 사람일테지 하고 상상했었다.

 

흔히들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신선이나 도사 정도 일텐데,

이들의 자유로움은 경계조차 없는 자유로움이겠고,

또 한 부류로 예술가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이들은 경계나 형식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고 있는데, 예술가인지 신선이나 도사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ㅋ~.

 

총 25명이 등장하는데, 제일 앞에 등장하는 사람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하는 시인 '나태주'이다.

"심플한 표현. 이게 중요합니다. 사람들을 보면, 어려운 걸 어렵게 말하는 사람, 쉬운걸 어렵게 말하는 사람, 어려운 걸 쉽게 말하는 사람, 이렇게 세 부류가 있어요. 시도 마찬가지죠. 독자를 골치 아프게 하는 시가 휑행하지만, 사실 어렵게 쓰기는 쉽고, 쉽게 쓰기가 더 어려워요. 그럼 시가 왜 어려워졌느냐? 시의 본질은 '예藝'에 있는데 '학學'을 먼저 가르쳐서 그래요. 또, 시에서 우선하는 건은 말言이며, 말의 근본은 입말에 있어요. 이건 제가 절대 양보 못할 개념인데, 이런 신념에서 쉽게 읽히는 시가 나오는 것이죠."(17쪽)

그는 작품과 인격이 일치해야 하는지를 놓고 이렇게 얘기한다.

"ㆍㆍㆍㆍㆍㆍ알아서 믿는 게 아니라 몰라도 믿으면 그게 길이 되는 거죠. 문학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내가 믿는 길을 갑니다. 동시에 나와 다른 사람의 길도 인정해요."(20쪽)

이 책의 저자 박원식은, 자연과 인생의 자잘한 징후들에서 핵심을 읽어 시를 가꾸는 일에 노련한 시인 나태주를 일컬어 '달인'이라 한다.

시의 언어들은 풍진 세상의 정밀한 상처를 드러내는 데 능하다. 시인의 내면에 고인 상처를 정밀하게 드러내는 일에도 능숙하다. 하지만, 언어는 요술의 일종이라서, 능함이 넘쳐 현란한 헛꽃을 피울 가능성이 있다. 재능이 폐단과 동거한다는 말은 무릇 틀린 게 아니다. 본색을 잃은 시는 자본을 비아냥거리되 상품시장에 이미 주둔해 호객행위를 하며, 허영의 시장에 좌판을 벌여 명예라는 푼돈을 챙긴다. 그러나 명예욕이나 탐욕이 창작의 화톳불이 될 수도 있으니, 그걸 때 묻었다 몰아칠 일만은 아니다.(24쪽)

저자 '박원식'의 목소리는 책 여기저기서 개입하는데, 어디까지가 인터뷰어이고 어디부터가 인터뷰이인지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금방 헷갈리게 되고,

그리하여 한 예술가의 삶을 줏대없이 왔다갔다 하는 그런 것으로 오독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여야 하겠다~--;

 

나태주는 한때 심한 병고에 허덕였고,

쓸개가 터지고 췌장이 녹아없어지는 질환에서 용케 회복한 후, 삶이 변했단다.

아프기 전엔 불필요한 일들에 많이 사로잡여 살았으나, 이젠 그러지 않는다며,

매사 언제 어디서고 잣대를 대충 재도 다 맞아 떨어진다고 너스레를 떤다.

예전엔 눈치를 봐가며 대충 사교하고, 듣기에 좋은 말을 하고, 처세처럼 술을 마시고 그랬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나이든다는 것조차 즐겁다는 나태주의 말에, 박원식이 선문답 같은 한마디를 보탠다.

상생이 본분이라지만 상극도 이치다. 배터지게 얻어먹을 지경만 아니라면, 적시에 마땅히 얻어먹은 욕은 차라리 양분이라서 먹어도 체할 게 없다. (27쪽)

요즘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질병에서 회복된 후의 나태주에 가깝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살면,

누가 뭐라고 하던, 주위 신경쓰지 말고 대범하게 살아야 하는데,

작은 일에도 연연해하고 안달하는 본성은 그대로인지라 여전히 '안달루시아'과의 삶을 살고 있다.

 

실은 지난 석달동안 알라딘서재, 이곳에서 '이달의 당선작 선정위원'을 했었다.

소금이 짠지 단지 찍어먹어봐야 아는 성격 탓에 지원을 했었고,

숙제로 주어지면 좀 적극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을거라 기대도 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손 내밀어주고, 말 걸어주는 것에 익숙했던지라,

내가 먼저 다른 알라디너의 서재에 가서 손 내밀고 말 걸고 친한 척 한다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나를 잘 모르거나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이 곧잘 당황하고 황당해 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생각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널을 뛰고 중간 생략을 하다보니,

다른 알라디너의 리뷰나 페이퍼에 친목이나 관계를 목적으로 다는 댓글인데도,

머릿말이나 꼬릿말 등 인사 따윈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 버리곤 한다.

또 댓글이란 것이 대부분 입말이어서 말할때 버릇이 그대로 튀어나오는지라,

뒤에 이모티콘이 없거나, 이모티콘이 있더라도 내 말버릇을 모르는 상대방이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시비거는거냐?' 내지는 '싸워보자는 거냐?'의 심정이 될 수 있다는걸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깨달았다.

 

그런데, 이제까지 제대로 못한 걸,

앞으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또는 '관계 개선을 위하여'라는 이유로,

눈치를 봐가며 대충 사교하고, 상대방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고, 술을 마시는 것도 처세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서,

대충 그렇게 살 자신은 없다.

병 후의 나태주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만나고 싶은 대로 만나고, 오가고 싶은 대로 오가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싶고,

그러기 위해서 '친목 도모'나 '관계 개선'을 위한 마실이나 댓글 놀이 따위는 집어치우고,

예전에 그렇게 해오던 대로 닥치고 책이나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살기위해선 안달루시아를 지양하고 산을 보며 호연지기를 키우는게 제일이지 않을까도 싶다.

 

사실 이 책이 완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귀촌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느꼈는데,

작가 자야 같은 경우, '적게 벌어 적게 쓰자'가 귀촌의 목적이라고 했던 반면,

나주 죽설헌에 사는 화가 박태후 같은 경우는 집의 전체 면적이 자그만치 8천 평(그 정도면 소공화국 수준)이라고 하고 있다.

 

예술가란 원래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한다지만,

누군가는 와인이고 누군가는 오디오이고 누군가는 사진이고,

누군가는 미식가를 넘어 탐식가의 수준이며,

누군가는 이 모두를 한데 아우르기도 한다.

해외에서는 예술가들이 오픈 스튜디오나 거리의 카페를 통해 자유롭게 소통하는 살롱문화를 통해서 예술의 풍토가 다져지고 신진 예술가들이 배출되기도 하나 보다.

해외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나 해외여행을 자주 다닌 사람들 중에,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자유롭게 소통하는 이른바 '살롱문화'를 흉내낸 듯한 것들을 보게 되는데,

일반적인 의미의 산골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싶고,

그러다보니 내가 색안경을 끼고보는 것일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야 할까, '귀족의 품위에 걸맞는 전원 생활 놀이'를 향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교조 출신의 판화가 김준권 같은 경우는 골프에 심취해 태국으로 골프여행을 가기도 한다니 의외였다.

 

이 책에서는 제외됐지만, 산골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기인같은 삶을 사는 예술가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작가 자야는,

도시에서는 관계나 상황에 따라서 지출이 발생하니까, 돈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지만,

시골에서는 스스로 결정한 대로 꼭 필요한 지출만 가능하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는데,

이 견해에 글쎄 난 찬성하기 힘들다.

시골에서의 삶이어서 지출이 발생하지 않은게 아니고,

새로운 관계나 상황에서 도시에서 했던 것만큼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에 맺어왔던 관계나 상황은 약화되었고, 새로운 관계는 제대로 형성되기 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돈을 적게 번다고 해서 지출의 규모가 작아질 수는 있지만 지출이 전혀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출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계, 네트워킹이 성립되지 않고 혼자 고립된 채로 사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읽는 내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시골이 마냥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노년에 귀촌을 꿈꾸는 이유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서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삶'이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나이든다는 것조차 즐겁다' 는 '나태주'의 삶이나,

"ㆍㆍㆍㆍㆍㆍ 농사를 짓는 주인공은 햇빛과 비, 바람이에요. 순응이라는 거, 순종과는 다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자연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일이 정말 좋아요.ㆍㆍㆍㆍㆍㆍ세상에는 영원한게 아무것도 없다죠? 어느 선사가 말하길, 고정관념이나 과거에서 나온 생각이 아닌, 무無에서 올라온 마음이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에고에서 벗어나면 분노도 슬픔도 줄어들 거라고 생각해요. 자연이 그런 걸 가르쳐주죠.ㆍㆍㆍㆍㆍㆍ흔히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보통은 나의 기대와 상처, 바람을 싣고 상대를 바라보죠. 자연엔 그런 게 없어요. 묵묵한 수굿함이라고나 할까? 그게 자연의 미덕으로 다가와요.  "(40~41쪽)

라고 하는 '자야'의 삶에 가깝다.

 

될 수 있으면 문명의 이기를 줄이고, 획일화된 공장식 축산을 지양하며,

살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만 방목하여 키우고 채취하는 자급자족의 삶을 지향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2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등장하다보니까, 그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공통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산골'에 사는 '예술가'에 초점을 맞추기에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의 기준이 제각각일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어떤 사람은 '산골'이라는 '지역'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 들것이고,

어떤 사람은 '예술가'라는 직업 분류 상의 개념으로 접근하려 들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자유로운 영혼의 개념으로 바라보려 할 테니까 말이다.

 

앞에서 와인이며 오디오며 사진이며 음식이며 이 모두를 한데 아우르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는 살롱문화를 얘기했었다.

그 살롱문화 예찬론자는 어느 하나라도 격을 갖추면, 다른 장르 역시 다 따라오게 마련이라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그저 '오홋, 멋진걸~!'하는 정도였지, 산골에 사는 예술가의 풍모를 느낄 순 없었는데,

"사람 사이의 공감이라는 것. 그것만큼 좋은 게 다시 있을까? 굳이 예술인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에요. 공감이란, 이 시대 최대의 화두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은 물론, 자연과의 공감이라는 문제 역시 정색하고 깊이 있게 접근해야 해요.ㆍㆍㆍㆍㆍㆍ오디오로 음악을 즐기지만, 자연의 소리에 비하면 1퍼센트 미만의 감동을 얻을 뿐이죠. 최상의 음악은 자연이 내는 소리라는 겁니다. 자연의 소리를 닮으려는 것, 자연의 에너지와 감동을 닮으려는 게 예술이겠죠.ㆍㆍㆍㆍㆍㆍ"(193쪽)

이렇게 정색을 하고 자연을 얘기하는 걸 보니 또 달라보인다.

 

이 책은 글을 쓴 박원식도 그렇고, 사진을 찍은 주민욱도 그렇고,

소개되고 있는 25명의 예술가들도 그렇고,

하나하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25명을 묶어낸 방식이 통일성이 없고 산만했다.

누구 하나 책 한권으로 다루어도 손색이 없을 예술가들인데 가볍게 훑듯 지나가는건,

인터뷰어로서 인터뷰이에게 원하는 것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펼쳐주지 못한 셈이다.

비슷한 분위기로 몇 명씩 묶어 집중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는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쓴 박원식의 경우, 글이 수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산골 예술가들과 어우러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려하고 융슝했지만 겉도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박원식은 자신이 미문을 쓰는 줄, 글을 잘 쓰는 줄 알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러니 글 속에서라고 하지만, 상대방의 삶에 너무 깊숙이 개입해서 산촌생활자들의 개성을 짓누르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병고 후 삶이 변했다는 나태주를 향하여 '달인'이라고 치켜세우질 말던지,

"상생이 본분이라지만 상극도 이치다. 배터지게 얻어먹을 지경만 아니라면, 적시에 마땅히 얻어먹은 욕은 차라리 양분이라서 먹어도 체할 게 없다. (27쪽) " 

라는 박원식의 입장은 생략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경주 남산의 한국 화가 박대성 편을 보게 되면,

"소산과 추사는 무엇이 다르지?"

"감히 추사의 정신세계를 따를 수 있예로는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겠지. 그러나 시적 상상력, 다시 말해 문기文氣는 미치기 워려워요. 그렇다면 이를 어쩌나. 내가 말이오. 죽는 그날까지 붓을 손에 쥐겠다는 이유가 뭐냐면, 추사를 때려잡겠다는 것, 그 때문이오. 하하핫!"

"앗!"

"ㆍㆍㆍㆍㆍㆍ부처를 이루려면 부처의 목을 베야 하는 법.ㆍㆍㆍㆍㆍㆍ"(282쪽)

라는 구절이 있다.

그동안 이 구절을 임제록과 관련하여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의미로 알았었다.

그리고 여기서 죽이는 대상도 부처나 조사가 아니라,

내 안에 내가 만들어 놓은 부처나 조사에 대한 아상, 말하자면 편견이나 선입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소산 박대성의 기백이 읽히는 듯 싶어 새로웠지만,

이런 고전의 경우,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로 생각이 미치자 아이러니컬 하다 싶기도 했다.

 

좋은 글은 경험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통찰에서 나오기도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는 있지만,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론 좋은 글을 쓰긴 어렵다.

 

기억도 가물거리던 대학 새내기 시절,

혼자 겉으로 두드러져서는 안된다던 그 말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건 웬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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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6-07-07 16:18   좋아요 1 | URL
바쁘고 은근 신경 많이 쓰이셨을거같아요

2016-07-07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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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언젠가도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일본 작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옆 나라이고 우리나라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어온 나라이니,

지리적 특성 상 외양만큼이나 정서적으로도 닮았을텐데,

딱 꼬집어 무엇이 틀리거나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뭉뚱그려 아우를 수도 없는, 뭔가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내가 가장 이질감을 느끼는 부분은,

우리나라라면 중개자나 매개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설정일텐데,

일본 소설에서는 혼령이나 영혼이나 귀신따위가 중개자나 매개체 없이도 심심하면 나타나서,

소설 속의 등장하는 사람들과 지지고 볶고 난리 블루스를 추는걸 밥 먹듯 한다는 것이다.

 

중개자나 매개체 없이 산자가 혼령이나 영혼이나 귀신따위와 공감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니,

나로써는 감당 불가인 기괴한 정서가 아닐 수 없는데,

그렇다고 마냥 간과할 수만도 없는게,

사람들에게는 '음양사'로 유명한 '유메마쿠라 바쿠'의 '신들의 봉우리'같은 경우 내 인생 손가락 안에 드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후로 관심을 갖게 되었을 정도로 초창기부터 그의 팬이었던건 아니고, 요번『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같은 경우도 한풀 꺾이기를 기다리며 묵히다보니 좀 늦어졌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이 책은 참 좋았는데,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경우,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같은 에세이라는 장르여도 초창기의 그것들보다는 요즘 것들이, 좋은 것 같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제목 때문에 소설가라는 직업을 위한 내지는, 글쓰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어도 하루키의 팬이라면 한번쯤,

그의 팬이 아니더라도,

나보다 인생을 먼저 산 사람에게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인생상담이나 조언을 구하고 싶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가 있겠다.

 

이 책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허를 찌르고 있다.

일례로, 우리는 책에서 지혜를 얻고 삶의 답을 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책을 쓰는 작가들을 인격적으로 성숙하거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는데,

하루키는 이 책의 거의 첫 부분에서

'작가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종이고 역시 자존심이나 경쟁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아요. 작가들끼리 붙여놓으면 잘 풀리는 경우보다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0쪽)'라고 하면서 그 부분을 명확히 한다.

그런데, 바로 뒷 문단에서, 각 직업에서의 영역 배타성을 놓고 봤을 때는, 소설가는 넓은 마음을 갖고 포용력을 보이는 인종이라는 알쏭달쏭한 얘기를 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발달해서 좋고 편리한 점 중의 하나는 전화 기능 외에 문자 기능이다.

글은 언어에 비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제약이 따른다.

아니, 이모티콘을 생략하게 되면, 글이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오독이 빈번하다.

얼마전 글로써 내 의사 표현 하는데 한계를 느껴 속상해하는 내게 친구가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말로 위로를 하길래 속으로 '으쓱으쓱~^^'했었는데,

알고 보니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따위는 지극히 어려워서 보통 사람은 못할 짓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암튼,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는 소설가의 자격을 보면,

어쩌면 나는 '소설가'로 최적화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현실은 왜 이리 암울하기만 한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ㆍㆍㆍㆍㆍㆍ기본적으로 몹시 둔해빠진' 작업입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이것도 아니네, 저것도 아니네'하고 오로지 문장을 주물럭거립니다.ㆍㆍㆍㆍㆍㆍ실제로 내 발로 정상까지 올라가보지 않고서는 후지 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입니다.(20~26쪽)

나로 말할것 같으면, '엉덩이가 뚱뚱한' '엉.뚱.족'일 뿐만 아니라,

지루하고 둔해빠진 작업도 결코 지루해하지 않고 즐기며 버티는 재주가 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일일 경우에만 그렇지만~(,.))

생각이 이리저리 짬뽕공처럼 널을 뛰지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내 몸뚱이와 발의 경건함을 알고, 내 몸을 움직여 경험한 것만 믿는 부류이다.

그러니까 혼령이나 영혼이나 귀신따위가 중개자나 매개체 없이 나타나는걸 견딜 수 없어 하는 건 당연지사이다.

 

암튼 생각이 엉뚱하고 유니크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고로,

이 모두는 소설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직업인이라면 어느 직종의,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얘기가 아닐까 싶었다.

 

두뇌가 명석하고, 그리하여 천재라고 불리우는 사람일수록, 이해속도가 빠르고 그만큼 빨리 터득하겠지만,

전문가나 숙련인이 될만하면 싫증을 느낄 것이고,

싫증을 느껴 자리에 안주하기보단 새로운 일을 찾으려 들 것이고,

그러다보면 매번 나이에 상관없이 초보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루키가 맘에 들었던 것은,

그가 천재가 아닌, 소설가의 자질을 가져서 겪은 일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는 이를 통해 사회를 배웠다는 얘길, 전보다 얼마간 터프해졌고 전보다는 얼마간 지혜가 붙은 것 같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가로 제한시킬게 아니라 직업인이라면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자신이 더 흥미를 갖는 일을 찾아,

자신이 겪어냈고, 스스로 통과하여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로게' 써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괜히 어려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표현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50쪽)는 것을 하루키는 명확히 하고 있다.

 

또 한가지 '소설가의 자격'으로 다른 것과 아울러, '기초체력이 몸에 배도록 할 것'이라고 한 것도 좋았다.

나이가 들수록 책상앞에 앉아있는 시간이나 책을 붙들고 앉아 있는 시간에 비해, 집중력은 한참 못 미치는 걸 느낀다.

운동을 잘 하지도 않고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도 않지만,

한때는 마라톤 동호회에서 일주일에 두세번은 7킬로씩을 걷듯이 달려(?)줬었는데,

얼마전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깜박거릴때 몇발자국 뛰었다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걸 보니, 세월을 탓해야 할지, 어쩔 수 없는 저질 체력을 탓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리고 그 강고한 의지를 장기간에 걸쳐 지속시키려고 하면 아무래도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가 문제가 됩니다. 일단은 만전을 기하며 살아갈 것. '만전을 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혼을 담는 '틀인' 육체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입니다.ㆍㆍㆍㆍㆍㆍ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균형을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올바른 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198~199쪽)

라고 하고 있는데,

 

하루키에 의하면,

천재적 소설가가 아닌, 소설가의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되는 생명력이 긴 소설가들을 보게 되면,

막노동으로 생활비를 벌어야했던 스티븐 킹 같은 경우도 담배랑 술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글을 쓰고 운동을 하는 등 지금도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마이클 코넬리와 로버트 크레이스는 서로의 작품 속에 주인공을 교차 등장 시킬 정도로 절.친.인데,

그들 또한 작품활동시간과 운동시간을 따로 정해놓고 철저히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가를 꿈꾸진 않더라도,

직업인으로서의 나에 대해 얘기해보라고 한다면,

관리해야할 시간과 쉬어할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자고 생각한다.

주5일 근무를 했으면, 나머지 이틀은 완전한 휴식과 재충전에 할애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직업인은 일 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까지 고려하고 적절히 안배하여,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다양하고 멋진 형태로 나타날지라도, 지지고 볶고 그러면서 사는게 인간의 본모습이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하루키는 소설가라서 사람을 관찰하는 게 일이지만,

세밀히 관찰해서 대략적인 프로세스는 거치지만,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판단은 정말로 그것이 필요할 때까지 보류해 둔다고 한다.

 

이 말은 어찌보면 무척 양심적인 말 같지만, 무척 애매모호한 말이 될 수도 있다.

정말 필요한 순간이 오면, 판단을 한다는 얘기이니까 말이다.

그때의 판단 기준은?

어찌보면 가와이 하야오의 임상 심리 기법 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가와이 하야오와 카를 융을 합한 하루키만의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36년동안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왔다는 것은, 그것이 소설가이든 다른 무슨 직업이든 간에,

도통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일테니까 말이다.

 

 

군데 군데, 껄끄러웠던 단어가 보였는데...차치하고,

하나만 얘기하자면,

 

사전을 찾아보면, 감촉이란 '외부의 자극이 피부 감각을 통하여 전해지는 느낌'이라고 되어있다.

282쪽과 330쪽에 '감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느낌'정도로 바꿔주는게 어떨까 싶다.

우리의 정서상, '감촉'이라고 하기엔 '외부의 자극이 '피부감각'을 통하여 전해지는 느낌으로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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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7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06-29 10:59   좋아요 2 | URL
아직 님이 젊다는 거예요.
젊을 때는 앞만 보고 달려도 좋거든요.
아마 하루키도 29세까지였던가 돈을 이리저리 빌려 재즈바를 하느라고 앞만 보고 달렸다고 하죠.
그가 작가로 데뷔하게 된 첫 소설을 그렇게 바 한 귀퉁이에서 탈고했다고 하더라구요.

재충전할 기회를 갖는다는 건,
바꾸어 말하면 그냥 열심히 내달리기만 할 정도로 체력이 협조해 주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젊음을 향하여 그토록 찬사를 보내고,
젊었을 때는 누더기만 걸쳐도 아름답다는 둥,
젊음이 가장 값나가는 밑천이고 재산이라는 둥,
그런 얘기를 하는 걸거예요.

저는 지금의 제 삶을 완전 만족하진 못하고,
때때로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만약 다시 한번 젊은 시절로 돌아가 그때를 살 수만 있다면,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읽고...그러고 사는 대신,
젊은 시절을, 젊음을 만끽하며 살고 싶어요.

젊었을때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일들 있잖아요.
무모함이나 치기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그런 것들이요.
저는 너무 바른생활로 살아온 것 같아서요~--;

루쉰P 2016-06-29 00:04   좋아요 1 | URL
오옵 역시 같은 책을 읽어도 나문꾼님의 리뷰가 훨씬 좋군요 ㅎ 아니 내가 읽은 책이 이런 내용이었나 하며 다시 읽게되는 ㅋㅋㅋ

하루키의 에세이가 좋다는 건 정말 완전 공감이에요 ㅎ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알던 그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너무나 좋아요. 나무꾼님이 말씀하신데로 어떤 외적 존재와 바로 소통을 하고 등장을 하는 그런 부분이 저도 좀 다가오지 않고 어려운 부분은 있어요.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결론에 다가올 수록 `응?` 이런 반응을 보이게 돼요 ㅋ 아무래도 톨스토이류 소설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제대로 맺어서 끝내는 스타일이 아닌 소설은 힘들다고 할까요? ㅎ

오늘은 금연 3주째라 병원과 약국가서 칭찬 받고 왔습니다. 완벽한 금연가가 될려구요 ㅎ

양철나무꾼 2016-06-29 11:14   좋아요 1 | URL
교주님~!
저 놀려 먹는게 그렇게 재밌어요?
자꾸만, 그렇게, 계속, 놀려먹으면 교주님이랑 안 놀거예요, 끙~(,.)

근데, 교주님, 혹시 `루쉰의 편지`라는 책 가지고 계시면, 저 좀 보여주세요~^^
품절인데다가, `자음과 모음`출판사 거라서 일부러 구하긴 좀 그렇고 말이죠, 헤에~^^

금연 3주째라~,
간식 완전 땡기지 않으시려나?
응원하는 의미루다가 간식 좀 보내드릴가요?
연락처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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