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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로 간 예술가들 -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산촌 생활자 이야기
박원식 지음, 주민욱 사진 / 창해 / 2016년 5월
평점 :
기억도 가물거리는 대학 새내기 시절 학교 자치 기구인 방송국에 지원을 했었다.
지원한다고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배들은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수습작품이란 것을 만들어 내라고 했었는데,
내가 지원했던 분야는 프로듀서 였던지라, 보도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따는 일이 주어졌다.
묻고 대답하는게 인터뷰라고 알고 있었던 내겐,
인터뷰를 따는 과정에서 내가 묻는 목소리가 같이 녹음되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겨졌지만,
선배들은 프로듀서란 겉으로 두드러져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꼬투리를 잡아,
눈물을 쏙 빼놓은건 물론이고 혼까지 쏙 빼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암튼 그때 이후로 난 방송국에 주눅이 들어, 대체로 의욕 상실 사기 저하의 나날을 보냈었다.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산촌 생활자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산골로 간 예술가들'이란 이 책을 읽게 된데에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을뿐더러,
지독히도 몸을 움직이는걸 싫어해서 강이나 산으로의 여행은 물론이거니와,
동네 뒷산을 바라보는 것도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여겼던 내가,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며 귀촌을 동경하는 것으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남편의 고향이 시골이어서 명절 때마다 한번씩 다녀왔었고,
'미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의 일침을 통해서도,
시골이 마냥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할 사안은 아니어 주시고,
이런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간접 체험하고, 꿈꿀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의미이다.
이 책은 (산골이라기 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총 4장에 걸쳐서 다루고 있는데,
자연이라는 길을 통해서 교감하고,
자연이라는 교사를 통해서 성찰하고,
자연이라는 순리를 통해서 조화를 이루며,
자연이라는 춤을 통해서 몰입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준다.
난 그동안 막연하게, (농촌도 그렇겠지만),
유독 산에 사는 사람과 관련하여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졌었다.
역으로, 산에 사는 사람들은 으례 자유로운 사람이겠거니,
(실상은 안 그럴지라도), 적어도 영혼이라도 자유로운 사람일테지 하고 상상했었다.
흔히들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신선이나 도사 정도 일텐데,
이들의 자유로움은 경계조차 없는 자유로움이겠고,
또 한 부류로 예술가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이들은 경계나 형식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고 있는데, 예술가인지 신선이나 도사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ㅋ~.
총 25명이 등장하는데, 제일 앞에 등장하는 사람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하는 시인 '나태주'이다.
"심플한 표현. 이게 중요합니다. 사람들을 보면, 어려운 걸 어렵게 말하는 사람, 쉬운걸 어렵게 말하는 사람, 어려운 걸 쉽게 말하는 사람, 이렇게 세 부류가 있어요. 시도 마찬가지죠. 독자를 골치 아프게 하는 시가 휑행하지만, 사실 어렵게 쓰기는 쉽고, 쉽게 쓰기가 더 어려워요. 그럼 시가 왜 어려워졌느냐? 시의 본질은 '예藝'에 있는데 '학學'을 먼저 가르쳐서 그래요. 또, 시에서 우선하는 건은 말言이며, 말의 근본은 입말에 있어요. 이건 제가 절대 양보 못할 개념인데, 이런 신념에서 쉽게 읽히는 시가 나오는 것이죠."(17쪽)
그는 작품과 인격이 일치해야 하는지를 놓고 이렇게 얘기한다.
"ㆍㆍㆍㆍㆍㆍ알아서 믿는 게 아니라 몰라도 믿으면 그게 길이 되는 거죠. 문학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내가 믿는 길을 갑니다. 동시에 나와 다른 사람의 길도 인정해요."(20쪽)
이 책의 저자 박원식은, 자연과 인생의 자잘한 징후들에서 핵심을 읽어 시를 가꾸는 일에 노련한 시인 나태주를 일컬어 '달인'이라 한다.
시의 언어들은 풍진 세상의 정밀한 상처를 드러내는 데 능하다. 시인의 내면에 고인 상처를 정밀하게 드러내는 일에도 능숙하다. 하지만, 언어는 요술의 일종이라서, 능함이 넘쳐 현란한 헛꽃을 피울 가능성이 있다. 재능이 폐단과 동거한다는 말은 무릇 틀린 게 아니다. 본색을 잃은 시는 자본을 비아냥거리되 상품시장에 이미 주둔해 호객행위를 하며, 허영의 시장에 좌판을 벌여 명예라는 푼돈을 챙긴다. 그러나 명예욕이나 탐욕이 창작의 화톳불이 될 수도 있으니, 그걸 때 묻었다 몰아칠 일만은 아니다.(24쪽)
저자 '박원식'의 목소리는 책 여기저기서 개입하는데, 어디까지가 인터뷰어이고 어디부터가 인터뷰이인지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금방 헷갈리게 되고,
그리하여 한 예술가의 삶을 줏대없이 왔다갔다 하는 그런 것으로 오독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여야 하겠다~--;
나태주는 한때 심한 병고에 허덕였고,
쓸개가 터지고 췌장이 녹아없어지는 질환에서 용케 회복한 후, 삶이 변했단다.
아프기 전엔 불필요한 일들에 많이 사로잡여 살았으나, 이젠 그러지 않는다며,
매사 언제 어디서고 잣대를 대충 재도 다 맞아 떨어진다고 너스레를 떤다.
예전엔 눈치를 봐가며 대충 사교하고, 듣기에 좋은 말을 하고, 처세처럼 술을 마시고 그랬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나이든다는 것조차 즐겁다는 나태주의 말에, 박원식이 선문답 같은 한마디를 보탠다.
상생이 본분이라지만 상극도 이치다. 배터지게 얻어먹을 지경만 아니라면, 적시에 마땅히 얻어먹은 욕은 차라리 양분이라서 먹어도 체할 게 없다. (27쪽)
요즘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질병에서 회복된 후의 나태주에 가깝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살면,
누가 뭐라고 하던, 주위 신경쓰지 말고 대범하게 살아야 하는데,
작은 일에도 연연해하고 안달하는 본성은 그대로인지라 여전히 '안달루시아'과의 삶을 살고 있다.
실은 지난 석달동안 알라딘서재, 이곳에서 '이달의 당선작 선정위원'을 했었다.
소금이 짠지 단지 찍어먹어봐야 아는 성격 탓에 지원을 했었고,
숙제로 주어지면 좀 적극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을거라 기대도 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손 내밀어주고, 말 걸어주는 것에 익숙했던지라,
내가 먼저 다른 알라디너의 서재에 가서 손 내밀고 말 걸고 친한 척 한다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나를 잘 모르거나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이 곧잘 당황하고 황당해 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생각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널을 뛰고 중간 생략을 하다보니,
다른 알라디너의 리뷰나 페이퍼에 친목이나 관계를 목적으로 다는 댓글인데도,
머릿말이나 꼬릿말 등 인사 따윈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 버리곤 한다.
또 댓글이란 것이 대부분 입말이어서 말할때 버릇이 그대로 튀어나오는지라,
뒤에 이모티콘이 없거나, 이모티콘이 있더라도 내 말버릇을 모르는 상대방이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시비거는거냐?' 내지는 '싸워보자는 거냐?'의 심정이 될 수 있다는걸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깨달았다.
그런데, 이제까지 제대로 못한 걸,
앞으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또는 '관계 개선을 위하여'라는 이유로,
눈치를 봐가며 대충 사교하고, 상대방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고, 술을 마시는 것도 처세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서,
대충 그렇게 살 자신은 없다.
병 후의 나태주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만나고 싶은 대로 만나고, 오가고 싶은 대로 오가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싶고,
그러기 위해서 '친목 도모'나 '관계 개선'을 위한 마실이나 댓글 놀이 따위는 집어치우고,
예전에 그렇게 해오던 대로 닥치고 책이나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살기위해선 안달루시아를 지양하고 산을 보며 호연지기를 키우는게 제일이지 않을까도 싶다.
사실 이 책이 완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귀촌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느꼈는데,
작가 자야 같은 경우, '적게 벌어 적게 쓰자'가 귀촌의 목적이라고 했던 반면,
나주 죽설헌에 사는 화가 박태후 같은 경우는 집의 전체 면적이 자그만치 8천 평(그 정도면 소공화국 수준)이라고 하고 있다.
예술가란 원래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한다지만,
누군가는 와인이고 누군가는 오디오이고 누군가는 사진이고,
누군가는 미식가를 넘어 탐식가의 수준이며,
누군가는 이 모두를 한데 아우르기도 한다.
해외에서는 예술가들이 오픈 스튜디오나 거리의 카페를 통해 자유롭게 소통하는 살롱문화를 통해서 예술의 풍토가 다져지고 신진 예술가들이 배출되기도 하나 보다.
해외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나 해외여행을 자주 다닌 사람들 중에,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자유롭게 소통하는 이른바 '살롱문화'를 흉내낸 듯한 것들을 보게 되는데,
일반적인 의미의 산골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싶고,
그러다보니 내가 색안경을 끼고보는 것일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야 할까, '귀족의 품위에 걸맞는 전원 생활 놀이'를 향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교조 출신의 판화가 김준권 같은 경우는 골프에 심취해 태국으로 골프여행을 가기도 한다니 의외였다.
이 책에서는 제외됐지만, 산골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기인같은 삶을 사는 예술가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작가 자야는,
도시에서는 관계나 상황에 따라서 지출이 발생하니까, 돈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지만,
시골에서는 스스로 결정한 대로 꼭 필요한 지출만 가능하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는데,
이 견해에 글쎄 난 찬성하기 힘들다.
시골에서의 삶이어서 지출이 발생하지 않은게 아니고,
새로운 관계나 상황에서 도시에서 했던 것만큼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에 맺어왔던 관계나 상황은 약화되었고, 새로운 관계는 제대로 형성되기 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돈을 적게 번다고 해서 지출의 규모가 작아질 수는 있지만 지출이 전혀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출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계, 네트워킹이 성립되지 않고 혼자 고립된 채로 사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읽는 내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시골이 마냥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노년에 귀촌을 꿈꾸는 이유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서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삶'이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나이든다는 것조차 즐겁다' 는 '나태주'의 삶이나,
"ㆍㆍㆍㆍㆍㆍ 농사를 짓는 주인공은 햇빛과 비, 바람이에요. 순응이라는 거, 순종과는 다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자연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일이 정말 좋아요.ㆍㆍㆍㆍㆍㆍ세상에는 영원한게 아무것도 없다죠? 어느 선사가 말하길, 고정관념이나 과거에서 나온 생각이 아닌, 무無에서 올라온 마음이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에고에서 벗어나면 분노도 슬픔도 줄어들 거라고 생각해요. 자연이 그런 걸 가르쳐주죠.ㆍㆍㆍㆍㆍㆍ흔히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보통은 나의 기대와 상처, 바람을 싣고 상대를 바라보죠. 자연엔 그런 게 없어요. 묵묵한 수굿함이라고나 할까? 그게 자연의 미덕으로 다가와요. "(40~41쪽)
라고 하는 '자야'의 삶에 가깝다.
될 수 있으면 문명의 이기를 줄이고, 획일화된 공장식 축산을 지양하며,
살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만 방목하여 키우고 채취하는 자급자족의 삶을 지향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2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등장하다보니까, 그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공통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산골'에 사는 '예술가'에 초점을 맞추기에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의 기준이 제각각일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어떤 사람은 '산골'이라는 '지역'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 들것이고,
어떤 사람은 '예술가'라는 직업 분류 상의 개념으로 접근하려 들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자유로운 영혼의 개념으로 바라보려 할 테니까 말이다.
앞에서 와인이며 오디오며 사진이며 음식이며 이 모두를 한데 아우르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는 살롱문화를 얘기했었다.
그 살롱문화 예찬론자는 어느 하나라도 격을 갖추면, 다른 장르 역시 다 따라오게 마련이라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그저 '오홋, 멋진걸~!'하는 정도였지, 산골에 사는 예술가의 풍모를 느낄 순 없었는데,
"사람 사이의 공감이라는 것. 그것만큼 좋은 게 다시 있을까? 굳이 예술인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에요. 공감이란, 이 시대 최대의 화두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은 물론, 자연과의 공감이라는 문제 역시 정색하고 깊이 있게 접근해야 해요.ㆍㆍㆍㆍㆍㆍ오디오로 음악을 즐기지만, 자연의 소리에 비하면 1퍼센트 미만의 감동을 얻을 뿐이죠. 최상의 음악은 자연이 내는 소리라는 겁니다. 자연의 소리를 닮으려는 것, 자연의 에너지와 감동을 닮으려는 게 예술이겠죠.ㆍㆍㆍㆍㆍㆍ"(193쪽)
이렇게 정색을 하고 자연을 얘기하는 걸 보니 또 달라보인다.
이 책은 글을 쓴 박원식도 그렇고, 사진을 찍은 주민욱도 그렇고,
소개되고 있는 25명의 예술가들도 그렇고,
하나하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25명을 묶어낸 방식이 통일성이 없고 산만했다.
누구 하나 책 한권으로 다루어도 손색이 없을 예술가들인데 가볍게 훑듯 지나가는건,
인터뷰어로서 인터뷰이에게 원하는 것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펼쳐주지 못한 셈이다.
비슷한 분위기로 몇 명씩 묶어 집중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는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쓴 박원식의 경우, 글이 수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산골 예술가들과 어우러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려하고 융슝했지만 겉도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박원식은 자신이 미문을 쓰는 줄, 글을 잘 쓰는 줄 알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러니 글 속에서라고 하지만, 상대방의 삶에 너무 깊숙이 개입해서 산촌생활자들의 개성을 짓누르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병고 후 삶이 변했다는 나태주를 향하여 '달인'이라고 치켜세우질 말던지,
"상생이 본분이라지만 상극도 이치다. 배터지게 얻어먹을 지경만 아니라면, 적시에 마땅히 얻어먹은 욕은 차라리 양분이라서 먹어도 체할 게 없다. (27쪽) "
라는 박원식의 입장은 생략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경주 남산의 한국 화가 박대성 편을 보게 되면,
"소산과 추사는 무엇이 다르지?"
"감히 추사의 정신세계를 따를 수 있예로는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겠지. 그러나 시적 상상력, 다시 말해 문기文氣는 미치기 워려워요. 그렇다면 이를 어쩌나. 내가 말이오. 죽는 그날까지 붓을 손에 쥐겠다는 이유가 뭐냐면, 추사를 때려잡겠다는 것, 그 때문이오. 하하핫!"
"앗!"
"ㆍㆍㆍㆍㆍㆍ부처를 이루려면 부처의 목을 베야 하는 법.ㆍㆍㆍㆍㆍㆍ"(282쪽)
라는 구절이 있다.
그동안 이 구절을 임제록과 관련하여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의미로 알았었다.
그리고 여기서 죽이는 대상도 부처나 조사가 아니라,
내 안에 내가 만들어 놓은 부처나 조사에 대한 아상, 말하자면 편견이나 선입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소산 박대성의 기백이 읽히는 듯 싶어 새로웠지만,
이런 고전의 경우,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로 생각이 미치자 아이러니컬 하다 싶기도 했다.
좋은 글은 경험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통찰에서 나오기도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는 있지만,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론 좋은 글을 쓰긴 어렵다.
기억도 가물거리던 대학 새내기 시절,
혼자 겉으로 두드러져서는 안된다던 그 말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건 웬일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