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깅을 하다 마주하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은 사람을 멈추게 한다. 매년 보게 되는 이 빛들은 어쩐지 반갑지 만은 않다. 꼭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서 밥을 먹어야 하는 껄끄러움이 있다.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형형색색의 빛을 보고 있으면 여지없이 그 빛들은 나를 향해 지금 만족하느냐, 지금 행복하느냐, 그 정도면 괜찮은 거냐,라고 조금은 강압적으로 말을 한다.



빛나는 크리스마스 불빛들은 어느새 괴물이 되어 모든 건 너 때문이야,라고 말을 한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도망치고 싶지만 다리가 땅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다. 불빛은 좀 더 무서운 얼굴을 한 채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백 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걱정으로 사는 인간아, 같은 말을 나는 왕왕 듣는다. 하지만 그래서 인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백 년 정도 살지만 천년만큼의 걱정과 고민으로 살아가기에 내 감정의 변이와 감정의 결락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하다.


우주의 점보다 못한 존재로 넓은 하늘을 노래하고 모든 이들의 행복을 바라며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지질하고 소심하게 내 감정의 변이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인간을 일으키고 숨을 불어넣고 살아가게 하는 건 다른 아닌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그 한 사람이 있다면 지구가 불바다가 된다 한들 무슨 걱정일까.


박준의 시에 보면 끌어안고 죽고 싶을 문장이 있는데 그 문장은 곧 사람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무서운 얼굴을 한 불빛에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큰 소리로 대답할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온다면 나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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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후 길게 쓴 리뷰를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으니 누군가 이렇게 빽빽한 글을 인스타에 올리면 아무도 안 본다고 했다.


인스타그램은 작은 글씨 때문에 이렇게 긴 글은 읽지 않을뿐더러 사진 위주의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긴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려봤자 누구도 읽지 않으니 다른 곳에 올려라, 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옙! 하고 난 다음에 계속 영화를 본 리뷰를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 인스타그램이 글자가 작긴 작지. 브런치 글은 글자가 좀 보기 좋을 정도로 크지. 그러나 모든 플랫폼을 대부분 폰으로 본다.


폰으로 보는데 브런치나 블로그나 페이스북의 글이라고 해서 글자가 크게 보이지는 않는다. 전부 폰의 화면에 맞게 다 작게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작업을 아이패드로 하는데 태블릿으로 인스타그램을 아직 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아이패드로 보니까 인스타의 글자도 크게 나온다.


태블릿이 12인치면 12인치 화면에 꽉 차게 나오지. 글자 때문에 인스타그램에 글 쓰는 게 이상하는 건 편견이라 생각한다. 사진 위주의 플랫폼이라 그렇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얼굴이 발로 세 번 밟은 감자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도 포기다.


내 브런치에 연동이 된 인스타그램에도 하루키의 소설이나 하루키에 대한 글만 빽빽하다. 그래서 하루키를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긴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사람들이 전혀 안 볼 것 같다고 하지만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올리는 인스타그램 덕분에 아직 무명이지만 여러 배우들과도 디엠을 주고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공포 영화 한 편을 보고 리뷰를 올렸는데 누군가 와서 댓글을 달았는데 제작사였다. 휴게소라는 공포영화는 제작비 때문에 극장 상영을 아예 염두하지도 못한 영화다. 그래서 나오는 배우들이 공포물을 표현하기 위해 처절할 만큼 연기를 했다. 상업영화로 관객을 무시하는 태도의 영화보다는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나는 최병모의 연기를 좋아한다. 최병모 배우는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많이 나오는데 최병모가 일단 영화에 나온다고 하면 주연이나 감독에 상관없이 죽 봐왔다. 최병모의 연기를 보는 게 정말 재미있다.


최병모는 부패하고 곰팡이가 핀, 그래서 긁으면 고름이 터져 나오는 인물들을 늘 연기를 했다. 그 사악함과 비굴함, 그리고 결국에는 지질 해지는 한국 사회의 병폐를 그 한 사람이 다 연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어느 날은 최병모 배우가 댓글을 달았다. 재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영화 박화영을 보고 꽤나 충격적이고 재미가 좋아서 리뷰를 썼는데 이번에는 감독이 댓글을 달았다. 박화영은 불편한 영화였다. 온통 불편함 투성이었는데 그 불편함을 가득 채우는 것이 10대들의 폭력이었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박화영의 모습을 보면서 불편하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는 몰입을 이 영화는 끌어냈다. 이런 비슷한 감정을 김영하의 소설 ‘비상구’를 읽을 때에도 들었다. 이환 감독이 똥파리에 출연했던 것이 기억났는데 영화를 연출했다.



긴 글이고, 글자도 작고, 누구도 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다 틀린 말 같다. 무엇보다 지적하는 사람이 관심과 간섭의 차이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어딘가에 글을 쓰던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 글을 써 올리는 것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주위에서 책을 내고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어서 우쭐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자꾸 간섭을 하려고 한다. 명심해야 할 건 그 타이틀에 빠져서 우쭐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낭패라는 것이다. 황석영 소설가 아냐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열에 여덟은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대 작가도 사람들은 크게 관심이 없다. 얼마나 많은 소설을 집필했으며, 무려 10년이나 매일 한국일보에 연재를 한 ‘장길산’의 작가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잘 모른다.


하루키도 일본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면 다 알 것 같지만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 작가들 대부분이 이런 부분에서는 겸손하다. 하찮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어쩌다 방문자수와 조회수의 노예가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글을 올릴 수 있는 곳에 글을 올린다는데 뭐 어때, 하는 마음을 가져보자. 글이 너무 길면 거기 인스타의 에이아이(잖아), 가 글이 너무 길다고 끊어!라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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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2-14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데요. 저는 인스타에 계정이 없어서 그런 것도 못하는데…
영화관계자한테 이런 댓글 받으면 기분좋죠.
근데 잘 나가는 영화관계자는 이런 댓글 안 달아주겠죠?
암튼 교관님은 진정한 영화 매니아네요.^^

교관 2022-12-15 11:53   좋아요 0 | URL
인스타그램이 없어요? ㅋㅋ 그렇군요. 작가들도 인스타를 활발히 하고 있어서 대화도 하고 메시지도 주고 받고 좋은 건 좋지요 ㅋㅋㅋ

쎄인트saint 2022-12-14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스타에도 ...
알라딘에 올리는 리뷰 그대로 옮겨 붙입니다.
그래도 볼 사람들은 다 보더군요...
너무 길어서 안 보려나 싶어서....
한 동안은 트위터보다는 쫌 길게 단출한 리뷰를 올렸더니...
전체 리뷰는 어디에 올리냐는 댓글이 달렸기에...
걍...길게 올립니다. 글 읽을사람은 읽고...
책 사진만 볼 사람은 그러시라구요~~

교관님의 활동을 응원합니다~^^

교관 2022-12-15 11:54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볼 사람은 다 보거든요. 꼭 안 보는 사람들이 ㅋㅋㅋ 무엇보다 적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한 사람이 어딘가에 자신의 글을 올리고 싶어 올리는 것에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았 ㅋㅋ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내가 지나다니는 길목의 한 고깃집에 이런 문구를 적어서 붙여놨다.


“돼지갈비 구워서 포장됩니다”


나는 매일 이 길목을 지나다닌다. 조깅을 하고 돌아올 때 이 길목을 지나와야만 한다. 이 고깃집도 코로나의 영향으로 인해 이 같은 결정을 한 것 같았다. 코로나 시기에 이 문구가 붙었으니.


코로나가 터지고 이 길목의 많은 술집과 식당이 폐업을 했다. 이 고깃집은 사람들이 줄어들고 오지 않아도 어떻게든 버틴 것 같았다. 그래서 올해 3월인가. 모친이 코로나에 걸려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 돼지갈비가 먹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기에 구운 돼지갈비를 포장해준다는 생각이 났다.


나는 보통 조깅을 하러 나가기 전에 주문을 해 놓고 조깅을 하고 오면서 포장이 끝난 음식을 들고 온다. 치킨도, 탕수육도 대부분 다 그렇게 포장을 해서 온다. 주문배달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이클이다.


저녁이니까 장사를 하고 있기에 들어갔다. 고깃집에는 한 테이블이 있었다. 올해 3월이었다. 아직 한창 코로나 때문에 예민한 시기였다. 테이블에는 남녀 커플로 고기를 3인분을 주문해서 구워 먹고 있었다.


이 고깃집에는 부부가 장사를 하는데 남편은 대략 60대 후반, 아내는 60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 매일 가게를 지키는 아내는 그날 없고 남편만 등이 젖히는 의자를 반백 소파처럼 앉아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사장에게로 가서 저기 문에 붙어 있는 구운 고기를 포장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사장님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얼굴에 드러났다. 나는 3인분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1인분에 9천 원이니까 3인분이면 2만 7천 원이죠?라고 계산을 하려고 하니까 구우면 양이 얼마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면 4인분을 구워달라고 했다. 그랬는데 그 사장님, 뭔가 아주 이상했다. 계속 양이 얼마 안 된다고 말을 하면서 반백 소파 같은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 것이다.


저기 뒤의 한 테이블에서 고기 3인분을 먹는 커플을 보며 그럼 5인분을 구워 달라고 했다.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고 양이 어쩌고 하는 것이다. 뭔가 구워서 파는 것은 양의 차이가 나는 겁니까? 옆의 테이블에서는 커플이 3인분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5인분을 구워서 포장해 달라고 해도 양이 적다고만 하면서 소파에 눕다시피 기대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


구워서 포장을 하는 것이 귀찮은 것인지, 귀찮은 것이면 귀찮다고 말하는 게 어렵다면 오늘은 안 된다고 하든지. 그러면 수긍을 하고 아 안 되는군, 하며 그냥 갔을 텐데. 무엇보다 비스듬히 누워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하는 그 모습이 너무 기분이 나빴다.


구워서 포장을 해서 팔지 않을 거면서 구워서 포장을 한다는 저 문구는 왜 붙여놨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하기 싫거나, 해주기 그렇거나, 못하겠으면 저런 말은 붙여놓지 말아야지, 이렇게 판매를 한다고 해놓고 너무나 말을 돌려가면서, 시간은 시간대로, 기분은 기분대로 망치고, 홀의 테이블에는 커플이 3인분을 버젓이 먹고 있음에도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이상했다.


고기를 먹고 있던 커플도 이상하게 생각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도 '아니 그렇다면 왜 저런 걸 붙여놨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선이 문에 붙은 그 문구를 보고 나와 사장을 번갈아 봤기 때문이다.


나는 됐다며 그냥 나왔다. 그 뒤로도 매일 이 길목을 지나다니고 있다.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 이후로 이 고깃집에 손님은 늘 없다. 보란 듯이 저 문구는 아직도 붙어 있다. 아마 그 누구도 구운 고기를 포장해서 가져가지 않았을 것이다.


고기를 구워서 팔면 상추와 된장, 마늘 같은 것도 같이 넣어줘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서일까. 아니면 고기를 구워서 포장을 하는 것이 귀찮은 것일까. 5인분이면 거의 5만 돈인데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지만 이상한 건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들이 도처에는 늘려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이 문구는 사라졌고 지난주에 고깃집은 폐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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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12-13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극적으로 장사할 의지가 없었던가 봅니다. 아니면 아주머니가 주로 장사를 하고 아저씨는 셔터맨이던가. 저희 동네에는 군에서 지정했다는 맛집 간판이 붙은 집이 있었는데 점심을 먹으로 갔다가 대단히 실망을 했어요. 묵무침이 나왔는데 냄새가 나는 거 같고 밑반찬도 가짓수만 많고 맛은 없고. 꼭 솜씨가 있어야 음식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했었답니다

교관 2022-12-14 11:30   좋아요 0 | URL
그런가봐요 ㅠ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사람들이 있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마우스로 그려본 '눈이 내리는데'


‘눈이 내리는데’는 노래다. 50년대에 나온 노래다. 나는 이 노래를 저짝 천조국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와 비교할 만큼 좋은 노래라고 생각한다. 마이 웨이가 너무 좋아서 훗날의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클 해서 많이도 불렀는데 ‘눈이 내리는데’도 그렇다.


또, 마이 웨이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곡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원곡자가 따로 있다. 원곡은 샹송이다. ‘눈이 내리는데’도 61년에 한명숙이 부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모르려나) 실은 58년에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 중이던 최양숙이 발표한 곡이라고 한다. 다음 해인 59년 KBS 라디오 방송 HLKA에서 제작한 라디오 드라마 '어느 하늘 아래서'에서 주제가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한명숙이 불러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한명숙의 노래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명숙은 '노란 셔츠의 사나이'를 불러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한명숙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면 둔중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눈이 내리는데~”를 “눈이 나리는데~”로 불러서 더욱 고풍스럽다. 한명숙이 나오는 버전은 찾지 못했다. 6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한 한명숙의 무대 모습을 보면 올림머리와 고풍스러운 의상을 입고 다양한 음악을 하며 노래를 부른다. 60년대는 아무튼 예술적으로 너무나 풍성하고 부러운 시기다. https://youtu.be/gFP-OORmri0 영상출처: oo7JB1



최무룡이 부르는 버전도 있다. 최무룡은 기교 없이 편안하게 부르는데 호소력이 짙은 목소리다. 최무룡은 최민수의 아버지다. 배우이며 감독도 했다. 최무룡이 감독한 69년의 영화 '어느 하늘 아래서'에서 삽입이 되었나? 그랬을 것이다. 이 영화는 전쟁 중에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김지미, 신성일, 남궁원, 이순재의 아주 파릇파릇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시 최무룡이 부르는 모습이 담긴 버전은 찾지 못했다. https://youtu.be/eAjjXoYve7s 영상출처: Nareusha Jeong



나는 이 노래를 패티 김이 불러서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패티 김의 노래인 줄 알았다. 패티 김은 엄청난 고음과 폭발하듯 터지듯 음역을 절제하며 실을 뽑아내듯 애절하게 부른다. 정말 좋다. 길쭉길쭉한 팔다리로 휘저으며 무대를 압도하는 그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 아무튼 나는 패티김이 부르는 노래가 제일 좋다 https://youtu.be/bM1E2gdR23Y 영상출처:패티김 - 주제



유익종이 부르는 버전도 있는데 정말 마법 같은 목소리다. 마치 온 세상에 포근한 눈이 내리듯이, 그 눈이 소복소복 쌓였을 때 살포시 밟고 가듯이 부른다. https://youtu.be/LnqT9M6L0o8 영상출처:Zigzag



또 주현미가 부르는 버전도 아주 좋다. 피아노 한 대로 노래를 부르는데 트롯 기를 빼고 부르는 주현미의 목소리가 이렇듯 나긋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특히 “모두 다 세상이 새하얀데~”하는 부분은 감탄이 나온다. 토란잎에 맺힌 물방울 같다. 주현미 버전은 피아노 한 대라 더 목소리에 집중이 되는 것 같다. 주현미는 영상에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https://youtu.be/7UKQ4VWkeg0 영상출처:주현미 TV



임수정이 부르는 버전이 있는데 임수정이 부르는 느낌은 산이나 들이 아닌 80년대 화려한 서울의 밤에 수북이 내린 눈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아니라면 고향을 등지고 뉴욕으로 가버린 한국의 스타가 그곳에서 성공을 했지만 이제 더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그래서 뉴욕의 겨울에 하얗게 내리는 눈을 노래하는 느낌이다. https://youtu.be/YAxomBMShP8 영상출처: Vernet Angel



홍민의 버전도 있고, 이광조, 문주란의 버전도, 최진희의 버전도 있다. 가장 최근에는 조정민이 부르는 버전으로 들었다. 그 외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다. 가사가 좋다. 가사가 간단하지만 들으면 그 광경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진다. 스토리가 한눈에 드러나는 가사다. 무엇보다 이 노래는 흥얼거리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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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지면 야외의 강변에 운동을 하러 나오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줄어든다. 그래서 나는 좋다. 아마 강변의 조깅 코스를 꾸준하게 달리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알 것이다. 올해도 오늘까지 4일을 제외하고 매일 한 시간 이상 조깅을 했다. 오늘 이전의 일주일 정도는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할 정도로 따뜻한 오물 같은 포근한 날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강변으로 나와서 5분 정도 달리고 나면 그때부터 등이 후끈후끈 부스터를 달아 놓은 것처럼 몸이 달아올라 땀이 날 정도였다.


내가 싫어하는 계절, 겨울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모든 것을 차갑게 만들고 시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몸을 웅크리고 추위를 피해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을 겨울에는 볼 수 있다.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존재들 속에 나도 속해 있다.


매일 조깅을 하는 것에 큰 의미는 없다. 그저 습관 같은 것이다. 매일 배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자는 거와 비슷하다. 포근하다고는 하나 얼굴에 닿는 그것은 겨울이라는 걸 알려준다. 벤치가 있는 곳에서 잠시 멈춰서 운동화 끈을 당긴 다음 숨을 고르고 나무와 거리를 두고 외롭게 떠 있는 별을 본다.


지난날과 그리고 그 사람을 떠올려본다. 외롭다 한들 매일 외롭게 저 하늘에 떠 있어서 나를 봐 달라 반짝이는 별 만 할까. 하지만 그 별을 매일 밤 나무가 바라본다. 별은 나무의 관심은 모른 채 몸을 밝히고 있다.


어느 날 밤은 구름 사이로 달이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후후 하하 숨을 토해내며 달리다가 또 잠시 멈추어 그 모습을 봤다. 이 날도 새삼 포근해서 달을 보며 턱밑까지 차오른 말들을 내뱉어보고, 그래서 조금 놀랐다.


뭐라 그랬냐 하면

영화 ‘러브레터’에서

히로코가 설원에서 외친 말.


“오~~~ 뎅~~ 다~~~ 낑~~~~ 가~~~ 노~~~ 코~~~~ 가~~~ 끼~~~~ 예~~~”


달린다. 달리는 건 일상 속 일탈하는 기분이다. 스포츠카든, 에르메스든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 더 이상 그것들도 일탈이 아니게 된다. 아이폰 14를 구입해서 일탈 같은 그 기분도 일 년이 지난 오늘이 되면 일상이 되어서 벌 감흥이 없다.


그러나 매일 달리다 보면 다리의 근육에 기분 좋은 무리가 오고, 심장에 자극을 준다. 가만히 그저 하루를 보낸다면 그 자극과 무리가 가져오는 일탈 같은 기분 좋은 고통은 느낄 수 없다.


겨울과 여름의 조깅이 다른 건 땀이다. 여름에, 특히 폭염 속에 조깅을 하면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는데 정말  상쾌하다. 역시 조깅이니 운동이니 하고 나면 땀을 흘리는 게 좋다. 하지만 겨울은 땀이 나도 안에 입고 있는 티셔츠가 살짝 젖는 정도라 찝찝하다.


그러다가 한파가 와서 조깅을 하면 마치 북극곰처럼 후후 입김이 많이 나온다. 입김은 미스트가 되어 어때? 뛸만해? 그만두지 그래? 이렇게 뛴다고 뭐 달리지나? 괜히 춥기만 하고 시간만 낭비한다구,라고 한다. 온갖 방해로부터 리추얼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날부터 조깅을 하는 나를 응원하려는 조명쇼가 펼쳐지고 있다. 한 조명이 달에 가서 닿았다. 달은 흥 하며 인공조명에 질 수가 있나. 나는 몇십억 년 동안 여기에서 매일 밤 너희 인간들을 위해 밤을 밝혀줬는데.


달은 루나틱과 인세인으로 나뉜다.   


서양의 달은 어떤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인세인은 천성적으로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게 바람직한데, 루나틱은 달에 의해 즉 루나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신을 빼앗기는 것이라 오래전 서양에서 루나틱은 달 때문에 일시적으로 정신이 미쳐버리는 것으로 그 사람의 문제를 달에게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동양에서 달은 신성한 존재, 소원을 빌거나 안위를 바라는 토테미즘적인 신성함을 담고 있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어디서 주워 들었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면 그 기묘한 엘리베이터가 나를 맞이한다. 건물의 총 3대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2대는 교체가 되었고 이 엘리베이터만 그대로다. 교체된 엘리베이터는 뭔가 너무 기계 동물의 뱃속 같은 느낌이라 지하 4층으로 아무도 누르지 않았는데 알아서 내려와서 아무도 내리지 않고 타지도 않는데 컴퓨터 목소리로 “지하 4층입니다. 문이 닫힙니다”라고 한다.


시작이 끝이며 끝이 곧 시작이다. 다크 시즌 3에 나온 대산데, 우리는 결말을 알 수 없지만 결말은 우리를 안다. 이제 곧 12월의 마지막을 보내고 나면 다시 1월의 시작이다. 이런 무한 굴레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미래의 인간들이 이런 시간의 무한 굴레를 바꾸려고 인간이 의지라는 환상에 빠져 이것저것 해보지만 결국에 인간의 운명, 즉 시간의 무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결정을 내릴 순 있으나 결국에 결과는 같은 결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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