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슨 투 디스
알렉스 로스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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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적 표현' 
모두 깜짝 놀랐죠. 올해 노벨 문학상이 밥 딜런에게 갔습니다. 
따지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닌데요. 노랫말은 가장 오래된 형식의 시이기도 합니다.

알렉스 로스가 자신의 책 <리슨 투 디스>에서 '딜런은 단어 선택, 리듬, 구조적 운을 중시하는 순수한 시인이라는 것이다."를 보신 분이라면 올해의 이 뉴스에 그다지 놀라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슨 투 디스>를 번역하신 장호연 선생님은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으로 팝계의 불가해한 음유시인 밥 딜런을 다룬 장을 꼽고 있습니다.

"한 명의 팬으로서 딜런의 연주여행을 직접 따라가며 그를 둘러싼 사회적 현상을 살펴보고 음악과 가사를 분석하고 있는데, 자신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세대의 목소리로, 특정 장르의 뮤지션으로 가두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달아나며 자신의 음악을 자유롭게 풀어헤치고 재조합하는 딜런의 모습에서 알렉스 로스는 악보로도 음반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는 '시간의 예술' 음악의 본질을 본다. 그의 음악이 세대를 넘어 계속해서 팬들을 얻고 집요한 추종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를 이렇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글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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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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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와 줄 수 있어요? 
섹스는 아니고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거 말이에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내가 당신과 똑같을 수 있는지 확신이 안 서네요. 
모험에 뛰어드는 의지랄까요. “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표현하는 사랑우정연애가족모성 등의 개념어들은 그들이 지시하는 대상을 일반화시킴으로써 단순 명료하게 전달하는 반면 그 대상의 진실을 온전히 전달할 수는 없다어쩌면 소설은 설명할 수 없는 것말로 할 수 없는 것과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켄트 하루프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단순 명확함주인공 남녀의 직설적인 대화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말하고 있는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고무엇이 움직이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첫 장면부터 사건으로 뛰어드는 단도직입적인 서술간결한 단문과 필요한 말만하는 남녀 주인공의 대화 안에 관계와 감정의 모세혈관을 지닌 이 소설은 빠르게 읽히지만 잔상은 아주 오래 남는다.

70대의 두 남녀는 밤마다 한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그리고 캠핑을 하고 낚시를 하거나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구는 하릴없는 시간을 보낸다미국의 거대한 자연과 시골 풍경은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기 보다는 두 사람의 배경 막으로 건조하게 묘사되고 이 커플 관계의 내면에 자리한 너그러움과 쓸쓸함으로 채색된다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옆집 할머니의 죽음도 일상의 순환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이 두 남녀가 뛰어든 모험은 사랑우정연민매혹, 불안, 상실 등의 언어들을 뛰어넘어인간들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그 무엇이거나 혹은 그 낯익은 단어들 모두를 아우른다.

켄트 하루프 유작 <밤에 우리 영혼은>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명백함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소설의 의지를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승리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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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심부름꾼 - 두뇌 속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배신과 정복의 스토리
이언 맥길크리스트 지음, 김병화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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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log.naver.com/kuju/150102021874 [비의식]

 우리 인간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혹 그릇된 인식으로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은 사실 그리 멀리서 구할 것도 없다. 내 무의식의 세계로 접근하는 법도 여전히 알 수 없으며, 내 의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리 신뢰 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아마 반복적으로 누구든 느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세상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더구나 이러한 오만을 토대로 멋대로 세상을 단정하고 조작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인류의 역사 내내 동일한 것은 아니었으며, 때론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합일을, 한편으론 신체는 한 낱 몸뚱아리라는 껍데기이자 혐오의 물질과 고귀한 정신, 영혼으로 분리하는 것처럼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달리 이해하기도 하였다.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일까? 바로 이러한 선택적 질문을 하는 것이 이미 단순하고 명료함을 쫒는 소위 ‘합리성’이라는 관점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둘 다 어느 정도 진실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일까? 분석적이고 무언가를 분명하게 확정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왜 발생한 것일까? 또한 오늘의 사회처럼 물질문명이 기승을 부리고 모든 것을 합리적이라는 기계적 사고로 환원하는 이러한 가치체계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데에는 어떤 궁극적이고 기원적인 연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근대화와 산업화, 소비자본주의라는 속성이 인간과 인간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있다고만 하면 이러한 체제를 바꾸면 합리화, 사물화하는 인간사회의 습속이 변화할 수 있을까? 이보다 근원적인 어떤 인간 본연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기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성질은 아닐까?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인간, 즉 인간의 존재성과 수 천 년에 이르는 인간사회의 역사에서 인간의 문화적 현상들이 두뇌와 어떤 긴밀한 조응 관계를 가지고 형성되었다는 성찰에서 시작되고 있다. 종교개혁에서 자본주의의 출현과 강화를 말한‘막스 베버’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 ‘페르낭 브로델’, 그리고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에 한 시대의 위치를 점유한‘헤겔’과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의 철학적 사유는 물론 여느 문학과 예술에 대한 통찰을 뛰어넘으며, 신경생리학, 정신의학의 경험적이고 이론적 기반의 고찰까지 아우르는 이 위대한 저작은 아마 인류 사상사의 기념비적 걸작이 될 것이라 감히 예견하게 된다. 이처럼 인용되고 검토되는, 방대하고 면밀한 지적 통섭은 물론, 이로부터 규명하려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현상학적 분석은 가히 敬畏,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인간 존재와 세계에 대한 관점, 아니 믿음은 우반구와 좌반구라는 두 개의 반구로 구성된 인간의 두뇌 작동으로 인간 세상의 문화적 현상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뇌 구조는 정신 경험의 본성에 대해서, 또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대해 뭔가 말해 준다는 것이며, 우리“경험의 상관 변수들이 두뇌 속에서 묶이고 조직되는 방식에 일관성이 있음이 밝혀진다면 인간 정신세계의 구조와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저술은 우반구와 좌반구의 구조와 기능의 이해를 통해 각 반구가 경험하는 세계를 구분하고 바로 이 두 반구의 본래적 이원성이 우리의 정신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투쟁하는지를 규명한다. 이 두 개의 반구가 각기 어떤 기능들을 하는 것인지를 언어, 진리, 음악 등 그 발생학적, 생리학적, 철학적 탐색을 종횡하며 이루어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적 성찰의 진수란 이런 것이다. 라는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이 화려한 지적 탐색을 통한 반구간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랄 수 있는데, “우반구가 우선적으로‘새 자극’을 처리하고 일상적이거나 친숙한 것들은 좌반구가 처리한다.”는 것이다. 일례로‘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우린 그녀를 몇 마디 말로 온전하게 전달할 수가 없다. 그녀는 갸름한 얼굴이고 키가 크며, 쾌활하다고 한들 설명하려는 그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를 체험한 나는 그녀와 나사이의 관계라는 지식에 의존하여 그녀를 안다. 이처럼 나와 타자‘사이’의 관계에 의존하여 세계의 면모를 인식하는 것이 우반구이며, 키와 생김새와 같은 사실의 묘사라는 부분적인 지식들을 통해 짜깁기하여 추정하고 짐작하는 것이 좌반구이다. 여기서 우반구는 어떤 맥락속에서 세계를 인식하지만 좌반구는 생명 없는'사실(fact)', 정지한 불변의 지식을 인식한다. 이처럼 두 반구의 앎에 대한 방식은 완연히 다르다. 이러한 기능상의 구분이 현실의 세계에 어떻게 투영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고찰은‘후설’의 정신현상학이나‘메를로 퐁티’의 “살아진 신체(lived body)"에서 심화되어 경험하는 신체와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신체에 대한 이해로 이행하여 신체에 대한 우반구와 좌반구의 상이한 인식을 거듭 설명함으로써 두 반구의 상이한 존재론적 지위를 규명한다. 즉 여기서 좌반구의 추상성, 명료성, 범주화하려는 경향, 폐쇄성, 독단성, 체계화 경향, 일관성 등의 성향과 우반구의 묵시성, 현재성, 상호성, 포용성 등 서로 다른 성격을 구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저작의 본질적 논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반구가 항상 대칭적인 균형을 가지고 작동하지 않는다는, 우리 지성의 내적 구조는 의심할 여지없이 비대칭적이라는 통찰이다. 이 둘 사이에는 일종의 권력투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특히 이 투쟁이 어떤 특정 비율에 의한 기능의 배분이 아니라 효율성이 높은 쪽에서 작업 전체를 맡으려는 승자독식 시스템에 의한 독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수용적이며 포용적인 우반구와는 달리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좌반구가 우위를 누리게 될 경우 세상은 해체되고 파편화되며, 추상적이고 명시성을 중시하는 실용 중심의 물질적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이며, 우반구가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경우 협력과 공유, 공감, 생명력의 복구가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우반구와 좌반구의 성격과 그들의 우위가 의미하는 세계의 현상에 대한 이해를 마치면, 우리 인간의 두뇌가 역사의 시간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경험 세계, 그 삶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인류 역사의 주요한 문화적 움직임에 따라 명쾌하게 제시하는데, “두뇌는 세계를 어떻게 형성했는가?”하는 질문으로부터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와 산업혁명, 현대와 포스트모던 세계인 오늘에 이르는 인류의 문화적, 정신적 전환시대들 마다의 시대의 본성과 두 반구간의 공존과 충돌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유형의 발견은 가히 인간 정신 통찰의 괄목할만한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좌반구가 우위를 점하는 시대는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어 신체가 사물화 되고, 다시 우반구 우위, 즉 반구간의 평형이 이루어지면 감성과 상상력이 부활하고 새로움과 즐거움이 회복된다. 논리적 체계를 현상에 우선하여 모호성이나 모순을 거부하고 확실성과 정지상태를 달성하려한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구분되는 고대 그리스의 경우처럼 플라톤 이후 르네상스 이전의 서구세계는 관념화되고 표상화되어 물질화되는, 생명과 공존 할 수 없는 분리와 해체로 이어지는 세상이 된다. 즉 획일화하고 명료화하고 신체를 거부하는 좌반구 우위의 시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좌우반구의 우위의 결과는 르네상스라는 인간의 회복과 예술의 부흥이,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대두로 다시금 데카르트와 같은 물질중심의 단순, 명료화, 개념화에 다시금 신체를 빼앗긴다. 이러한 반복은 산업혁명과 모더니즘이라는 자기 인식 과잉의 시대에 와서는 인간의 소외된 무기력을 양산하고 자아감각의 상실로 치닫는다.



 

한편, 이 두뇌와 세계현상의 동질적 상관관계의 서술에 동원되는 문학작품과 회화, 음악 등 예술의 비평적 해석은 그야말로 지적 성찬이며 주제읽기에 넘치는 덤이라 할 수 있는데, 모더니즘의 대표적 인물들인 니체, 네르발, 달리,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베케트에서 발견되는 무관심과 공포, 불안과 지루함이 좌반구의 폐쇄된 거울 방에 갇혀 반복되어 증폭되는 인식의 과잉, 편집증적 정신의 양상임을 지적하는 것과 같다. 이는 우반구의 결함에서 나타나는 정신병적 소견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당대의 성격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의 저자의 믿음이 하나의 문화 분석 방법으로 가치와 권위, 신뢰를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좌반구가 우위를 점한 오늘의 우리 사회를 굳이 정리하려 한다면, 이 저작에서 규명한 좌반구의 성격을 그대로 나열하면 될 것이다. 세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말(語)중심의 사회이자, 조각난 부분에 열중이며, 그래서 명료성을 확인하려하고, 은유나 육화된 능력을 상실하고, 우반구를 배제함으로써 스스로 폐쇄될 수밖에 없는 자기 앎의 테두리에서 되돌이하는 지루함, 그래서 엄청난 자극과 충격이 아니면 자신을 확인 할 수 없는 곳, 은유나 미토스를 상실해서 정신적 물음에는 회피하는 세상, 기계적이며, 획득적이고 효용과 목표에만 염두를 두는 세계, 맥락이 박탈되다보니 조각의 순서에만 초점을 맞추어 기계적으로 환원한 것이 세상의 모습인 줄 아는 허위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 경험의 본성이 양분되어 있다는 이 저술의 논지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경험 형태에서 우반구의 우위를 위해 우리가 노력한다면, 괴테의 파우스트가 외친 “두개의 영혼이여, 아아! 내 가슴에 깃들라”라는 선언을 받아들인다면 아마 우리의 세상은 불안과 물질적 경주를 종식하고 르네상스와 낭만주의의 인식능력을 회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신경과학이 역사와 문화, 사회 분석적 통찰의 도구가 되고 시와 소설, 그림과 조각, 쇼팽과 바흐의 음악,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니체에 이르는 철학이 다시금 인간의 두뇌와 존재의 의미로 돌아와 나와 세계가 서로 조우하고 은유가 넘치는 감성의 사상이 되는 이 저작은 이 세기의 사상적, 문화적 방향을 제시하는 최고의 철학서요, 신경과학서이자, 인류문화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위대한 역작이며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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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마지막 날들
조제 렌지니 지음, 문소영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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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카뮈의 마지막 날들  

 

[카뮈의 마지막 날들]은 카뮈 사후 50주기를 맞아 카뮈가 죽기 전 이틀 동안의 여정을 재구성한 소설이다. 저자는 카뮈의 작품과 가족, 친구, 동료들의 증언과 방대한 양의 자료 등을 토대로 인간 카뮈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은 카뮈의 죽음의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다양한 문화와 계급을 위한 문학, 모두를 위한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알제리의 가난하고 초라한 프랑스인의 화려하지만 고독한, 그리고 당당하지만 채워지지 않은, 그리하여 완벽한 여정을 보여준다. 
  

어머니, 혹은 알제리와 프랑스 


카뮈는 1960년 1월3일 루르마랭의 자택을 나와 파리로 향한다. 알제리 독립운동에 따른 알제리-프랑스 사이의 폭력적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 속에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한 카뮈는 대중의 몰이해와 파리 부르주아 지식층의 시기와 질투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폭력과 이데올로기, 정치적 이상주의에 대한 거부를 자기 철학으로 삼은 카뮈에게는 고통의 시기였다.




알제리에 남아있기를 고집하는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알제의 좁고 낡은 아파트에 홀로 기거하고 있다. 귀머거리에 말도 잘 못하는 카뮈의 어머니가 그녀의 어머니에 맞서 ‘카뮈는 학교에 가야해요’라고 외치던 장면은 가슴 뭉클하다.


그녀는 자식이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로 성공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상을 탔다는 것에 감동했을 것이고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기자들을 부담스러워했을 뿐이다. 프랑스로 건너와 성공한 아들 곁에서 노년을 보낼 것을 끝내 마다했던 어머니였다. 알제리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폭력의 종식을 위한 카뮈의 노력은 대중의 몰이해와 파리 지식인들의 거센 반발을 산다.

카뮈에게 알제리와 프랑스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다. 그는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어야 했음에도 침묵을 택한다. 혹자는 그의 침묵이 알제리에 있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안전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귀머거리 가난한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그 침묵,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자들,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들이 위협적인 현실에 대항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침묵이 아니었을까?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그를 키워낸 곳은 알제리였다. 그는 프랑스의 식민정책과 탄압에 대해서도 거부했으며 알제리 독립 후 이집트주도의 신 아랍제국주의와 구소련의 반서방주의 사이에 놓이게 될 불안한 알제리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드러내면서 알제리와 프랑스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백기완 선생처럼 ‘제국주의자의 오만방자함‘이라 할 수도 있으나, 정의와 자유의 이념으로 희생되는 수많은 약자들이 언제나 그의 관심사였던 것은 이 소설 속의 어머니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는 어머니, 알제리, 프랑스 이 세 개의 단어로 압축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당시의 카뮈를 감싸고 있었던 단어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를 대하는 파리 지식층의 “왕따”에 상처받은 한 남자의 연약한 그림자가 있다. 최고학력자를 위한 철학을 한다는 사르트르를 비롯한 대부분의 파리 부르주아 지식층은 카뮈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았다. 그가 알제리의 가난한 가정부의 아들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자신들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카뮈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의 존재자체가 가난이었고 그로부터 삶을 배웠으므로.





노벨상 수상 이후 더욱 거세진 비난에 카뮈는 흔들리고 있었다. 작가로서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도 스스로 해가면서 그는 전쟁터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그가 한 번도 본적이 없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는 “최초의 인간”을 붙들고 있었다. 바깥세상으로부터의 공격이 거세질수록 그는 알제리와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가난했지만 생으로 충만했던 그 기억들 속으로.




이렇듯 그를 둘러싼 묵직한 안개 속을 뚫고 그의 자동차는 파리를 향한다. 속도에 대한 기피,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만큼 부조리한 것은 없다고 평소 말했던 카뮈는 결국 그 스스로 부조리를 입증하고 만다.




권력과 정치, 위선과 타협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저항, 신과 이성 그리고 이상적 사회에 대한 불신은 그를 진정한 자유인이자 현실주의자로 자리 매김한다. 항상 고독했던 남자, 그러나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들과 언제나 연대했던 남자, 카뮈가 1960년 1월4일 플라타너스 그늘아래 미완의 “최초의 인간”과 그가 항상 지니고 다녔던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를 남기고 사라져가는 이야기. [카뮈의 마지막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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