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자매 - 나치에 맞서 삶을 구한 두 자매의 실화
록산 판이페런 지음, 배경린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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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점령한 네덜란드에서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의 도피와 생존을 돕고자 애썼던 린테와 야니 두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며 기록문학이다. 특히, 절망 속에서 그리고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유대인들의 도피를 돕기 위해 신분증을 위조하고 전달하고 다시 배급권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헤매고 다니는 야니의 활약상을 읽어 나가다보면 너무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역시 아무리 뛰어난 소설일지라도 이 실화를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짦은 프롤로그를 빼고 책은 총 3개의 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I. 전쟁'과 'II. 하이네스트'에서는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펴 나가는 동안 유대인들의 도피와 생존을 위하여 안전한 도피처를 제공하고 위조 신분증을 구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조력자들과 협력하는 일, 그 과정에서 동지들이 잡혀 들어가고 배신을 하는 사람이 생기고 피난처가 다시 위험에 처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는데, 그 위기의 순간들에 대응하는 야니와 린테 자매의 용감무쌍한 일화들이 마치 소설인듯 펼쳐진다. 특히 동생인 '야니'는 수 많은 어려움과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불굴의 투사이다. 'III. 생존'에서 결국 도피처였던 '하이네스트'가 발각이 되고 언니 린테, 야니, 부모님, 남동생 야피, 그리고 '하이네스트'에 피신해있던 유대인들이 모두 잡혀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그 동안 아유슈비츠를 비롯한 유대인 수용소의 실상이야 여러 책이나 영상을 보면서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익히 들어왔고 보아왔던 사실들이 이 책에서도 변함없이 일어나지만 소설이 아닌 실화로서 소상히 알게 된 것은 처음이어서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너무 실감나게 다가왔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아닌 상황에 직면한 그 사람들의 실상을 마주하고 있자니 뭐라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슬픔이 밀려와서 ... 정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린테와 야니,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네 프랑크 자매는 아유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았고 1944년 10월 30일, 아우슈비츠 ㅡ 비르케나우의 최후의 선별 작업을 거쳐 독일의 베르겐 ㅡ 벨젠 수용소로 이송된다. 그곳은 다른 폴란드 내의 수용소와 달리 절멸 수용소가 아니었음에도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독일의 무관심과 잔혹 무도한, 비인간적인 관리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어나갔다. 린테와 야니 자매도 전염병에 걸려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갔었고 살아남았지만, 마르고트(안네 프랑크의 언니)가 죽자 안네도 살 희망을 잃고 곧 죽음에 이르고 만다.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이 베르겐ㅡ벨젠을 해방시켰을 때 6만 여명의 수감자가 자유를 찾았는데 수용소 부지 곳곳에 쌓인 시체만 해도 1만 3,000 여 구에 달했고, 6만 명 중의 4분의 1이 해방 이후 몇 주 동안 세상을 떠났다. 린테와 야니 자매는 구출 당시 몸무게가 불과 25 킬로그램 정도에 불과해서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베르겐ㅡ벨젠의 열악한 상황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자매가 귀환 중에 만난 친절한 치과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까지 무사히 귀환 하였고 린테, 야니 자매의 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에서는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줄줄 계속 흘렀다. 이건 실화니까 난 마음껏 울어도 되잖아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에 '하이네스트, 그 이후'를 읽으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야니, 린테 자메와 같이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활동하다가 죽거나 살해당한 협력자들과 활동가들의 이름, 활약상, 생몰연도 등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같이 활동했던, 나에게도 이제 익숙한 이름들을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산 사람, 살아 돌아온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린테와 야니 자매의 가정은 가난했지만 부모님 두 분이 서로 사랑하셨고 또 화목해서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는 서로 하고 싶은 말들, 나누고 싶은 이야깃거리가 한 가득이었다. 각자의 꿈과 계획에 관해 상의를 하기도 하고 사업이나 가족, 돈에 대해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는 분위기였다. 야니는 전쟁 전에도 파시스트가 판을 치는 마당에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겠느냐며, 세상이 불구덩이에 빠졌는데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인간을 지도자로 뽑은 독일인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할 수 있느냐며 아빠를 나무라기도 했던 딸이었다. 아삐와 딸이 이런 언성을 높이는 대화를 하는 일이 잦아서 가족들은 그럴 때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린테가 자기는 대스타가 될 거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 가족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식탁 주위에 차올랐던 긴장감이 사라질 즈음 창 밖 거리에서 아이스크림 장수가 <그 무젤만을 아시나요?> 노래에 맞춰 종을 울리며 지나간다. 장난스런 표정으로 엄마의 눈치를 살피던 남동생과 자매는 못이기는 척 허락하시는 엄마의 미소에 꼬마들처럼 문밖으로 우르르 달려나갔다. 이런 따뜻한 기억을 간직한 두 자매는 아우슈비츠ㅡ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도 함께 힘을 돋우며 서로가 서로를 격려했다. 



발가 벗겨진 채... 혹은 비를 쫄딱 맞으며... "몇 시간이고 점호가 이어졌다. 중간에 숫자를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백 명이 거대한 체스판 위의 폰처럼 늘어섰다. 도중에 누군가 풀썩 쓰러지면서 대열에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야니는 제 앞에 선 여자의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카포나 나치 여성 교도관들에게 저항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빗줄기도, 허기도, 벌벌 떨리는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도 애써 무시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양파가 손질되듯, 본질만 남을 때가지 한 꺼풀 한 꺼풀 발가벗겨졌다. 시작은 직장이었다. 뒤이어 학교에서, 집에서, 고향에서 쫓겨났다. 이웃을 잃고 친구를 잃었다. 가족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겼다. 종래에는 옷도, 머리칼도, 그림자까지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질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 나의 본질, 나 자신. 그것만은 뺏기지 말자." (353쪽)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유령처럼 수용소를 배회하는 산송장을 보는 것, 바로 '무젤만'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말한다. 무젤만이란 그런 존재들을 말한다. "나치가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를 놓아 버린 자들", "혼수상태나 다름없는 무젤만의 몰골", 파시스트들에게는 그것이 화장장의 굴뚝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보다 더 큰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는 존재들이고 '선별 과정'에서 가장 먼저 선별 됐다. '무젤만'은 마음 속에서 자신을 이미 가스실에 가두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야니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다른 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바로 의지할 사람이었다. 자매는 자아를 잃지 않도록 서로를 도왔다. 서로의 존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 줬다. 나는, 우리는, 암스테르담에서 온 자매라는 사실을." (354쪽)



"무젤만(Muselmann)은 원래는 '이슬람교도'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나치수용소에서 '산송장' 혹은 '더 이상 인간이라 보기 힘든, 좀비 같은 상태의 사람'을 칭하는 은어로 사용됐다(옮긴이 주)." 무젤만이라는 용어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도 설명을 찾을 수 있다. 구입 해 놓고 앞 쪽만 겨우 읽고 말았지만 궁금해서 그의 책에서 '무젤만'에 대한 설명을 찾아 읽어 보았다. 

"... ...가스실로 가는 무슬림들은 모두 똑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사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무능력 때문에, 혹은 불운해서, 아니면 어떤 평범한 사고에 의해 수용소로 들어와 적응을 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독일어를 배우기도 전에, 규율과 금지가 지옥처럼 뒤얽힌 혼돈 속에서 뭔가를 구별해내기도 전에 그들의 육체는 가루가 되었다. 선발에서, 혹은 극도의 피로로 인한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삶은 짧지만 그들의 번호는 영원하다. 그들이 바로 '무젤매너'Muselmammer(무슬림), 익사자, 수용소의 척추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136쪽)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을 기술한 기록문학이다. 반면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록산 판이페런 작가가 린테, 야니 자매가 유대인들의 은거지로 오랜 시간 사용했던 "하이네스트"에 살기 위해 이사를 하였고  오래된 저택을 복구하면서 바닥의 카펫을 뜯어냈을 때 거의 모든 방바닥에 지하실 문이 설치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낡은 나무 바닥 아래로 거대한 은신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타고 남은 양초, 악보, 오래된 저항단체 신문이 가득했고 그것이 하이네스트 역사 복구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이후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사를 계속하였고 인근의 사람들, 이전 소유주, 지역 토박이들을 인터뷰 하면서 이 저택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요한 한 시기, 집단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가 매번 발 디딜 틈 없이 굴러 가던 그 시절, 하이네스트는 유대인 자매가 운영하는 거대한 유대인 은신처이자 저항활동의 중심지였음을 알게 된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그래서 아우슈비츠의 생존기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결을 가진 기록문학일 수 밖에 없다. 함께 활동하고 목숨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였고 수용소 생활도 함께 하면서 두 자매는 서로를 의지하였다. 가족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두 자매는 서로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존재로서, 결국은 서로의 생명을 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프리모 레비의 책도 얼른 읽어봐야겠다. 



마지막으로 프리모 레비의 책에서 '작가의 말' 다음 페이지에 실린 시詩를 남겨 놓는다. 린테와 야니를 생각하면서... 


따스한 집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당신,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얼굴을 만나는 당신,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평화를 알지 못하고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없이,     

        기억할 힘도 없이

        두 눈은 텅 비고 한겨울 개구리처럼

        자궁이 차디찬 이가.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당신에게 이 말들을 전하니

가슴에 새겨두라.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깨어날 때나.

당신의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주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 집이 무너져 내리고

        온갖 병이 당신을 괴롭히며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외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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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게으른 달‘이라니...
호텔 이름이 참 희한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야기는 더 희한하다.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도 정말 예사롭지 않다.
평범한 전개가 하나도 없다.
특별히 충격적인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특이하고 특별한 뭔가가 있다.

‘달은 게으르지 않아‘ 크로닌은 생각했다.
‘달은 보고 싶어서 조바심을 낼 거야. 달은하늘에서 구름을 걷어 낼 거고, 별들은 피범벅이 된 베개를 보면서 생각에 잠길 거야.‘
"댄커스 씨, 이곳을 게으른 달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뭐죠?"
댄커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집사람의 묘한 취향 때문이죠. 그 어감이 좋다는군요.
제법 인상적인 이름 아닌가요?"
"맞습니다." 달은 그녀의 소리를 좋아할것이 분명했다. 잘린 목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소리를, 고통에 겨운 울부짖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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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가 언청이여서 결혼을 못한다는건데
정작 프로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난 마음먹은 건 다 할 수 있어. 죽음이 아니면 그 무엇도 가둘 수 없는 힘이 내게 있으니까. 그리고 네가 도와준다면......"
그가 거기서 말을 끊고는 이파리 하나를 뜯어 찢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넌 평생 결혼하지 못할 거야." - P55

내 심장이 슬픔으로 가만히 뛰었다. 평생 결혼을 못 한다니너무 끔찍한 일 같았다. 여자는 다 결혼하는데, 잰시스도 할테고, 티비도 할 테고. 늘 발진이나 버짐 같은 것을 달고 사는방앗간의 폴리도 결혼을 할 텐데. 여자들이 결혼을 하면, 작은 오두막이 생기고, 아마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불을 밝힐
램프도 생길 텐데. 양초뿐이라도 상관없어. 양초를 창턱에 놓으면 남편이 ‘내 아내가 불을 밝혀 놓았군!‘ 그렇게 생각할 테니. 그리고 비가일디 부인이 골풀 요람을 만들어줄 테고, 어느날인가 요람 안에 근사하게 아기가 누워 있겠지. 세례식 초청장을 돌리면 이웃들이 여왕벌 주위의 꿀벌처럼 아기 엄마 주위에 몰려들겠지. 난 일이 잘못될 때마다 종종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신경 쓰지 마, 프루 사른! 너만의 벌집에서 네가 여왕벌이 될 날이 올 테니까." 그래서 난 이렇게 대꾸했다. - P55

"결혼을 못 한다고, 기디언? 오, 아냐! 난 꼭 할 거야."
"네게 아무도 청혼하지 않을 거야, 프루."
"아무도? 왜?"
"왜냐하면...... 아, 곧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네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그와 상관없이 집과 가구를 가질 수 있다고."
"하지만 남편이나 골풀 요람의 아기는 못 가져?"
"응."
"도대체 왜?"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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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사른 호수
내가 케스터를 처음 본 것은 정(情) 실잣기 때였다. 신기한 발명품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듣기로 어느 지역에서는 작물 가을걷이와 풀 깎기에도 기계가 사용된다는 이 최신 문물 시대에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된 독자가 혹시 정 실잣기가 무언지 몰라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잰시스 비가일디의 정 실잣기로, 잰시스는 스물세 살, 난 그보다 두 살 어렸을 때의일인데, 내 이야기가 거기서 시작하는 건 아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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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자매> III. 생존








1. 동쪽으로
무려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소환되다니, 믿을 수 없다는 웅성거림끝에 수용소 전체가 대혼란에 빠졌다. 이번 추방 열차는 어디로 향하는 걸까? 아비규환이 시작됐다. 어떤 이들은 미친 듯 돌아다니며명단에서 빼내 줄 사람을 찾고,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발버둥쳤다. 어떤 이들은 무얼 할지 몰라 황망하게 가족들을 찾았다. 같이 붙어 있는 게 좋을까? 오늘밤에 도망을 칠까? 베스테르보르크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라리 기차에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송 중에 뛰어내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아이들을 숨길 만한 곳이 있을까? 그나마 운이 좋아서 절멸수용소가 아닌 노동수용소로 가게 된다면 아이들도 함께 데리고 가서 해방될 때까지 버티는 게 낫지 않을까? - P329

린테와 야니는 손을 꽉 맞잡은 채 줄을 섰다. 
기차에서 내내 풍기던 악취를 잊으려 노력했지만 숨쉴 때마다 냄새가 느껴졌다. 자매는알 수 있었다. 
그 냄새를 평생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1944년 9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 
네덜란드에서 해방이 머지않았음을 확신한 사람들이 국기와 국장을 꺼내 걸었던 ‘광란의 화요일‘ 바로 다음 날, 브릴레스레이퍼르 가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 P344

2. 그 무젤만을 아시나요?
몇 시간이고 점호가 이어졌다. 중간에 숫자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백 명이 거대한 체스판 위의 폰처럼 늘어섰다. 도중에누군가 풀썩 쓰러지면서 대열에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야니는 제 앞에선 여자의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카포나 나치 여성 교도관들에게 저항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빗줄기도, 허기도, 벌벌 떨리는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도 애써 무시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양파가 손질되듯, 본질만 남을 때까지 한 꺼풀 한 꺼풀 발가벗겨졌다. 시작은 직장이었다. 뒤이어 학교에서, 집에서, 고향에서 쫓겨났다. 이웃을 잃고 친구를 잃었다. 가족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겼다. 종래에는 옷도.
머리칼도, 그림자까지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질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 나의 본질, 나 자신. 그것만은 뺏기지말자 - P353

4. 라 마르셰예즈
1944년 10월 30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최후의 선별작업이 끝났다. - P382

5.별 수용소
베르겐-벨젠이었다.
자매는 마주본 뒤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긴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반짝이는 우박 덩어리가 머리칼을 타고 뺨 위로 떨어졌다.
첼레 역에서 누군가 베르겐-벨젠에 가는 게 아니냐고 말했을 때만해도 믿지 않았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좋은 징조였다. 베르겐-벨젠은 조건이 괜찮은 곳이었다. 이곳에는 가스실이 없었다. 말 그대로수용소에 불과했다. - P389

8. 망자의 도시
야니와 안네가 헤어지고 얼마 후, 마르고트가 침대에서 떨어지며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리고 더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이미 부모님도 돌아가셨다고 여겼던 안네는 언니마저 잃자 더이상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안네도 삶의 끈을 놓았다.
며칠 후, 린데와 야니가 프랑크 자매를 만나러 갔을 때 자매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두 사람은 시체 더미를 뒤져 마르고트와 안네의 시신을 찾아냈다. 다른 여자 두 명의 도움을 받아 자매의 시신을담요로 감싸 시체 매립지로 향했다. 그리고 한 명씩 천천히 구덩이깊숙이 떠나보냈다. - P416

9. 마지막 여정
골목으로 접어들며 차가 속도를 줄였다. 왼쪽으로는 운하가, 오른쪽으로는 주택가가 이어졌다. 카레 극장에 닿기 직전에야 자매는 비로소 잠잠해졌다. 오른쪽으로 펼쳐진 니우어 아흐테르 운하에 부모님이 살던 집이 있었다. 차가 천천히 좁은 길을 지나자 자매는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듯 동시에 밖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팔을 활짝 벌리고 가슴을 당당히 편 채 딸들을 마중 나왔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카레 극장을 지나 가파른 다리를 건넜다. 문득 린테가 야니의 팔을 움켜잡았다.
"봐 봐! 너 헤이그 집에서 쓰던 커튼이야!" 린테가 다리 건너 모퉁이에 자리한 집을 가리키며 외쳤다. "보프가 보여!"
차가 미처 멈춰 서기도 전에 린테가 문을 왈칵 열고 달려나갔다.야니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를 푹 숙이고 손을 무릎 사이에 감췄다. 몸이 고장나 버린 것 같았다.
보프가 달려와서 문을 열고 아내를 안아 들었다. 그는 마치 깃털 다루듯 조심스럽게 야니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로비가 신이 나서 고함을 지르며 두 사람 주변을 빙빙 돌았다.
"봤지? 우리 엄마가 돌아왔어요! 다들 와 봐! 우리 엄마가 왔어요!"
로비가 두 사람을 따라 들어왔다가 다시 거리로 달려나가서 외쳤다. - P432

자동차 한 대가 머뭇대며 엠말란으로 들어섰다.
호기심 어린 얼굴들이 창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가용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지난 몇 년간 군용 차량밖에 본 적이 없었다. 한적한 일요일 오후,하콘의 오보에 소리가 집밖까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순간 차가 황급히 멈춰 섰다. 뒷문이 활짝 열리고 누군가 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P435

피트의 손가락이 물 흐르듯 건반 위를 날았다. 바흐의 민속 음악에맞춰 상체가 앞뒤로 흔들렸다. 만족스러운 눈길로 사람이 가득한 거실을 둘러봤다. 모두 눈을 감고 음악을 한껏 즐기는 중이었다. 바로그때, 거실 창밖으로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커다란 갈색 눈동자와 밤송이 같은 머리, 피트-아니, 에베르하르트가 의자 위로 뛰어올라그랜드 피아노 너머로 몸을 날렸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현관으로 달려가 린테를 품에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펑펑 눈물을 흘리며 입을 맞추며 으스러질 듯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품에 안은 린테는 뼈밖에 없었다. 린테가 겪었을 고통이 에베르하르트의 뼈에 사무쳤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 기적 같은 재회를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린테를 맞이했다. 하콘이 친구를 꼭 안아줬다. 연주회가 막을 내렸다.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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