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스페인어라고? - 모르고 쓰는 우리말 속 스페인어, 2023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홍은 지음 / 이응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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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외래어 중 우리가 모르고 쓰는 스페인어를 소개함과 동시에 작가가 자신의 스페인 생활기를 담아낸 책으로 가볍게 읽기 좋다. 책도 얇고 수록된 글도 각각 짧은데 중간중간 느껴지는 통찰과 사유는 휘발성이 강하지 않고 제법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서 곱씹으며 읽기에 좋았다. 일전에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라고 내가 아주 혹평을 남긴 책이 있는데, 그 책과 비슷한 결의 가볍디 가벼운 책이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를 고른 탓인지 스페인어 공부도 글의 마무리도 흐지부지, 유야무야의 꼴을 면치 못했지만 <이게 스페인어라고?>의 저자는 여행 때 계기로 스페인어를 배우게 됐고 지금은 스페인어 책까지 낼 만큼 통달하게 됐으니 서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였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혼자만 언어 능력이 떨어져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언어에 관심을 갖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은 극소수다. 누구나 그런 계기를 만나길 기대하고, 또 어쩌면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여행지에서의 감상과 깨달음은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옅어지고 다시 끔찍이 여기던 일상으로 자연스레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스페인어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좋은 기회를 잡아 5년 동안 스페인에서 살게 됐다는 작가의 삶의 족적은 그래서 무척 부럽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정말 사소한 계기였는데 저렇게까지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이 책이 다수 독자들에게 스페인어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높여주는 책이 될 진 잘 모르겠다. 우리에게 친숙한 스페인어로 된 단어나 브랜드만 알려줬지 스페인 알파벳만의 발음 체계나 독특한 문법에 대해선 그리 깊이 있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벼움이 이 책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아무튼 워낙에 분량이 짧다 보니 스페인어의 매력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생각했을 때 스페인어는 친절함과 터프함이 공존하는 언어이며, 한국어처럼 읽긴 참 쉬운데 문법이 어려워 파면 팔수록 어려운 언어인데 그 점이 덜 묘사된 같아서... 스페인을 좋아하고 스페인어를 수박 겉 핥기 수준으로라도 배워봤다고 괜히 어깃장을 놓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다른 건 몰라도 작가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 행동력이 정말 바람직하고 존경스러웠다. 작가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고 그와 동시에 나의 삶도 돌아보게 됐다. 작가의 직업은 도예가이며 관악구에서 도예공방을 운영 중이라는데, 관악구가 집에서 멀긴 하지만 궁금한 마음에 조만간 방문해볼 생각이다. 내 삶에 있어 도예란 정말 조금도 관련이 없는 분야였지만, 작가가 여행을 계기로 스페인어라는 세계를 접했듯 나도 이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새로운 분야를 접하면 좋지 않겠는가. 최근 그 어떤 충동도 즐거움도 없이 하루하루 생존하기 바쁘고 지쳐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 무언가 자극이 필요한 참이다. 꼭 극적인 뭔가를 얻거나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그간 눈길을 두지 않은 것들도 둘러봐야지.

조금씩 쌓아 그란데를 만드는 삶과 한 번에 그란데를 취해 조금씩 음미하는 삶 중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아마도 각자 만족감을 느끼는 지점에 따라 기쁨의 정도도 저마다 다를 테다. 진정한 만족은 ‘자신에게 얼마나 적당하고 얼맞은가‘ 에 달렸으니까. - 26p

빈말을 빈말로 그냥 두었다면 그 관계도 허허롭게 끝났을 테다. 하지만 그 말을 참말로 바꾸는 데 공들이며 속을 채운 노력은 특별한 관계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결국 빈말은 채우는 말이 아닐까. 이미 무언가로 꽉 차서 더 넣을 수도, 쉬이 바꿀 수도 없는 말보다 상대방이 빈 채로 내어준 데를 자신의 의지로 채우면 알곡이 되는 말. - 1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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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일본 철도 여행 - 스케치북과 카메라로 기록한 드로잉 여행 1
김혜원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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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8



 글 말고 다른 형식으로 여행을 기록할까 싶던 차에 읽은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예전에 읽을 땐 작가의 아기자기하고 유머러스한 그림체와 일본 기차 여행이란 로망에만 감탄했지만 새삼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이 정말 축복받은 능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령 사진 촬영이 불가한 미술관에서의 경험일지라도 이 작가처럼 그림 실력이 뛰어난 경우엔 문제 없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니 정말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제아무리 말로 이렇더라 저렇더라 조리 있게 설명을 해도 시각적인 자료를 동반하면 전달력에 있어서 얘기가 달라지지 않는가.

 형식은 만화지만 작가의 남다른 인문학적 취향 덕에 일부 파트는 대단히 유익하게 읽혔다. 가령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를 읽고 가보고 싶던 우동집을 직접 방문해보는 에피소드나 다자이 오사무의 발자취를 쫓는 문학기행, 쉽게 접하기 힘든 일본 미술관 방문기 등 통상적인 일본 여행기와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정을 기차 여행 중에 했다는 게 정말 대단했고 부러웠다. 아마 책에서 소개된 야간열차 중 몇 대는 운행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로망을 늦지 않게 이룬 작가의 행동력과 그 로망을 자신의 장기인 그림으로 남겨둔 성실함과 꼼꼼함엔 정말 고갤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준비 단계에 있어 정확히 말은 못하겠지만, 나도 글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여행기를 남겨보고픈 열망이 크다. 생각을 묵혀둔 다음에 글로 풀어내는 여행기의 묘미를 좋아하지만 이젠 그것말고 다른 형식, 가령 영상으로 담은 여행기처럼 보다 현장감 있는 여행기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느낀 감동은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엔 어느 정도 열기가 식어버려서 실감나게 표현하려고 해도 가식적이거나 상투적인 것 같다는 한계에 직면해서다. 여행을 좋아하고 앞으로도 계속 다닐 것이기에 더 잘, 그리고 후회없이 기록하는 것에 열을 올리게 되는 것 같다. 여행을 가는 것만큼이나 여행을 기록하고 추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니까.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드로잉 일본 철도 여행>은 출간되고 시간이 지나서인지 절판이 됐던데, 못 읽어본 분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거나, 만약 중고서점에서 발견한다면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해본다. 소장 가치도 있거니와 볼륨도 상당해 일본 여행에 관심이 많다면 후회 없을 책일 것이다. 여행 동선을 구상함에 있어 많은 참고가 됐는데 - 물론 작중 여행 시기가 최소 10년 전이니 JR 패스라든가 관광지 입장료 등에 대한 정보는 지금과 현저히 다를 수 있다. - 해당 도시로 여행을 갈 일이 있으면 이 책을 다시 펼쳐볼 예정이다. 일단 이 책에 나온 일본 도시 중 끌리는 곳이 있다면 사구가 있는 돗토리와 우동이 유명한 타카마츠, 그리고 예술의 섬 나오시마로 갈 것 같다. 비행기표를 한 번 알아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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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쿠르트 발란데르 경감
헨닝 만켈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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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북유럽 추리소설은 오랜만에 읽어본다. 헨닝 망켈은 북유럽 추리소설계에서 꽤나 명성이 자자한 작가인데 작품을 접해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에 엘릭시르에서 3개월에 걸쳐 연재된 중편소설 '피라미드'를 읽긴 했지만 이렇게 단행본을 읽어본 적은 없다.

 요번에 읽은 <피라미드>는 동명의 표제작과 여러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발렌데르 형사가 등장하는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이 책을 다 읽고서 시리즈 첫 작품인 <얼굴 없는 살인자>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어서? 아니, 이렇게 10편의 장기 시리즈로 나올 만큼 첫 작품이 괜찮았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말인즉슨 <피라미드>의 수록작들 중엔 작가의 명성과 달리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작품이 없었다. 전형적인 북유럽 추리소설답게 복지사회를 이룩한 선진국이라는 찬란한 간판 아래 그늘처럼 드리워진 병폐를 범죄/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흥미로웠지만 너무 분위기만 잡고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의 내면만 잘 묘사됐지 정작 추리소설다운 만듦새는 다소 심심한 축에 들었다. 범인들의 최후도 일관적이라 식상했으며 범인의 광기 어린 행적들도 사회 시스템의 빈틈이라면서 애꿎게 책임의 화살을 돌리는 시선도 그닥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그 탓에 다 읽고 여운에 빠지긴커녕 쌩뚱 맞고 허탈함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수록작들 대부분 결말이 2%, 아니, 20% 모자랐다. 형사라는 직업의 고충, 아버지와 아내 등 가족과의 불화를 겪는 와중에 형사의 재능을 발휘하는 발란데르의 모습 등 흥미를 자아내는 구간은 많았지만 역시 그놈의 결말, 그리고 범인들의 평면적인 동기와 사건의 전말에 비약이 있던 것이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단편보단 장편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은데, 찾아보니까 국내에 출간된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은 다 장편이더군. 장편에선 내가 단편에서 느꼈던 단점이 안 느껴지려나? 그래야만 이 작가의 명성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번에 다시 읽은 중편 '피라미드' 얘길 조금만 더 하겠다.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기엔 좋은 분위기와 결말을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특히 발란데르의 아버지가 자기 버킷 리스트를 이루겠답시고 벌이는 기행은 묘하게 공감대를 자아내 처음 읽을 때나 요번에 다시 읽을 때나 재밌었다.

 하지만 다른 수록작들과 마찬가지로 추리소설다운 짜릿한 맛은 2% 부족했다. 다만 추리소설 말고 다른 장르, 순수 문학이나 사회 병폐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에겐 만족스러운 작품일 듯하다. 위에서도 말했듯 헨닝 망켈의 작품은 정말 전형적인 북유럽 추리소설이니까.


 내가 노르웨이를 여행했을 때 도서관과 서점을 모두 포함해 못해도 열 곳 이상을 방문했는데 방문하는 곳마다 추리소설만 있는 책장이 광범위하게 있어 놀랐었다. 어디선가 북유럽에선 추리소설이 주류 장르라고 들었는데 그냥 있는 말은 아니구나 싶었다. 주류인 비결로 사회 문제를 파고드는 북유럽 추리소설의 성격이 북유럽 독자들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라고 하는데 이게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과도 느낌이 살짝 달라서 굳이 북유럽 사람이 아니더라도 취향에 맞을 사람은 엄청 반길 듯하다.

 나는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등 나름대로 북유럽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봤고 또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헨닝 망켈의 작품을 읽으니 꼭 그런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담백한 문체와 깊이 있는 분위기가 범죄자를 쫓는 형사의 이야기와 약간 따로 논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어쩌면 나만의 생각에 불과한지 모른다.... 하지만 모르지, 이래놓고 <얼굴 없는 살인자>를 보고 완전히 이 작가의 스타일에 반해버리게 될지.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 내가 취향이 변해서 이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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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피리 - 동화 속 범죄사건 추리 파일
찬호께이 지음, 문현선 옮김 / 검은숲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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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마술 피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니 사실상 유일하게 접해본 중화권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의 이색 동화 추리소설집이다. 그간 내가 찬호께이의 작품을 홍콩이라는 독특한 배경 때문에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이 책을 읽고 홍콩은 배경 혹은 작가의 출신지에 불과할 뿐, 내가 찬호께이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관심을 가는 이유는 이 작가의 추리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동화의 비하인드를 추리소설다운 방식으로 풀어낸 발상의 전환도 재밌었고 역사적 고증을 위한 작가의 노력과 책임감도 생생히 느껴져 이래저래 풍성한 독서였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개인적으론 <마술 피리>가 짜임새나 세계관의 몰입도 등 훨씬 매력적인 작품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건 대놓고 마법을 다루는 설정을 싫어하는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발언이다.


 애석하게도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는 동화, 잭과 콩나무, 푸른 수염, 마술 피리 모두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동화를 재해석한 찬호께이의 해석이 얼마나 절묘한지는 특별히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애당초 잘 모르는 동화였기에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 수 있어서 그런대로 신선하게 읽혔던 것도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국 동화를 모티브로 했는가 여부보단 추리소설로써 만듦새가 탁월한가 여부가 더 중요하기에 동화는 결국 세계관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요소 정도로 이해하면 편하다. 그래도 굳이 주제의식을 끌어내본다면, 동화 속 세계에서도 첨예한 갈등과 대립, 속임수와 죽음이 난무하지만 그 혼란을 바로잡는 것은 바로 지혜와 이성적 사고가 이끄는 사필귀정의 전개일 터다.


 수록된 세 편의 소설 모두 모티브가 된 동화와는 판이하거나 혹은 정반대의 내용이지만 사필귀정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귀족이자 법학 박사, 이야기 수집꾼이라는 주인공 일행이 모난 곳 없이 매력적인 인물들인데 심성이며 추리력까지 완벽하다 보니 자칫 이야기가 밋밋해질 법도 했으나 읽는 내내 속시원하고 뒷맛도 깔끔했다. 지나칠 정도로 개연성이 어긋나지 않는 이상 주인공이 맘껏 능력을 발휘해 사건을 해결하고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그래서 동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건가?

 속편이 나와도 좋겠지만 나오지 않더라도 여한이 없을 만큼 각 수록작 모두 이야기를 적절히 끝맺은 것도 좋았다... 아, 마지막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하멜른의 마술 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제외다. 그 작품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마지막엔 사족이 너무 많았다. 작가가 집필에 애먹은 것도 알겠고 자료 조사를 열심히 한 것도 알겠는데 분량과 밀도를 앞에 두 작품과 비슷하게 맞췄다면 어땠을까 싶다. 뭐, 그래도 긴 만큼 주인공 호프만 박사의 참교육은 쾌감이 상당했다.


 홍콩을 배경으로 두지 않은 찬호께이의 작품도 좋군. 이 작가가 이 정도로 다채로운 작풍을 구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무서운 걸 넘어 경외심까지 드는 작가다. 다음에 어떤 작품이 출간될는지 모르지만 설령 소재가 그리 끌리지 않아도 작가 이름만 믿고 구입하고 읽게 될 듯하다. <염소가 웃는 순간> 빼고 다 좋았다. 내가 호러를 싫어해서 별로였던 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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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아줌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스기타 히로미 그림,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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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크리스마스 때 생각이 나서 읽은 <산타 아줌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색 동화다. 산타클로스가 되겠다며 면접을 보게 된 제시카(여성)를 향한 각국 산타클로스들의 치열한 갑론을박이 주된 내용이라 아이보단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을 작품이다. 다만 결말까지 전개가 순조롭고 내용도 짧은 데다 뻔하다면 뻔하다고 할 수 있을 해피엔딩이기에 막상 어른들한테 다소 썰렁하게 읽힐 듯하다.

 전에 읽었을 땐 나름대로 신선한 작품이라 여겼다. 특히 작품의 원서가 발간된 2002이란 시기를 생각하면 약간 선구적인 측면도 있다고 느껴졌다. 여성은 어째서 산타클로스를 하면 안 되는가, 왜 백인의 고령 남성만이 산타클로스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요새 굉장히 많이 나오는 종류의 질문이고 때문에 이젠 조금 식상한 정도라 이 작품이라고 특별히 신선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허나 작중 일본 산타클로스가 여성이 산타클로스가 안 된다는 이유는 다시 읽어도 코웃음이 날 만큼 인상에 강하게 박혔다. 말인즉슨 산타클로스는 부성의 상징인데, 요즘 일본의 아버지들은 가정에서 돈을 벌어다주는 존재로 전락해버려 부성의 상징인 산타클로스마저 여성이 맡아버리면 얼마 남지 않은 부성의 권위는 고꾸라져버릴 것이다. 라는 게 작중 일본 산타클로스가 하는 주장의 골자였다.

 다른 건 차치하고 우선 산타클로스가 특별히 부성의 상징인지 돌이켜봤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냉정히 말하면 우리가 산타클로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선물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지 선물을 주는 할아버지여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착하게 한 해를 보내면 보답으로 선물을 받는다는 그 이야기에 교훈이 있어서 자녀들한테 들려준 것이지 그 이야기에 성별이나 인종 등 외적인 요소를 일일이 재단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적어도 나는 없어서 상술한 일본 산타클로스의 주장은 기괴하게 들렸다. 그런데 실제로 저렇게 이 주장 저 주장 끌어모아 딴지를 걸 사람이 있을 것이라 기괴하면서도 현실적으로도 느껴졌다.


 아무튼 이 주장에 일부 산타클로스들은 동정하고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산타클로스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아들에게 잊지 못할 따뜻한 선물을 주고 싶은 제시카의 마음이 산타클로스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녀는 결국 최초의 여성 산타클로스가 된다. 자칫 잘못하면 서슬 퍼런 갈등의 장이 될 뻔했지만 분량의 문제인지 동화의 정체성을 중시한 탓인지 갈등은 싱겁게 해소된다. 이와 같은 결정에 분명 납득 못할 산타클로스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목적을 달성했고 변화는 이뤄졌으니 잘 됐다고 할 수 있으려나? 약간 의문은 남지만 그래도 뒷맛은 깔끔했다.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를 감상함과 더불어 뜻하지 않게 요즘(당시) 일본의 아버지들이 겪는 처량한 신세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던 독특한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특유의 따뜻함에 현실적인 색채를 더했으니 천편일률적인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질린 사람들한테 잘 맞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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