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 반복되는 일상에 떠밀리다 마침내 새로운 세계에 닿다
오건호 지음 / 텍스트칼로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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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4



 포르투갈은 유라시아 반도 최서단에 있는 나라로 리스본 근교에 있는 호카곶은 '세상의 끝'이라는 이명이 있다. 먼 옛날 사람에겐 드넓은 수평선의 대서양밖에 보이지 않는 호카곶이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으리라. 하지만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느니 세상의 끝이라느니 하는 표현은 다소 과하거나 혹은 편협한 구석이 있다. 그렇게 따지면 한반도 땅끝마을도 세상의 끝이지. 한반도도 결국엔 유라시아 반도의 어느 한 방향에서 끝자락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저런 이명이 붙은 데엔 포르투갈이 대서양을 통해 유럽 변두리 나라에서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돋움했다는 자부심이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지금 세상에 머물기보단 저편으로 새로운 가능성 내지는 희망을 찾아 기어코 엄청난 결과를 이룩해낸 자부심과 그러한 과거에 대한 향수가 녹아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내일부터 3주간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떠나는데 호카곶도 반드시 방문할 예정이다. 그때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일주일간 포르투갈 여행을 바탕으로 한 이 에세이의 제목이 난 처음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배경이 어떻든 간에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란 수식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 첫째, 그리고 에세이의 제목으론 너무 식상한 감이 있다는 것이 둘째였다. 명색이 자기 표현의 정수로 통하는 에세이의 제목이거늘 이미 널리 알려진 표현으로 제목을 장식한다는 게 처음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작가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역량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흑백이면서 사실적인 화풍은 사진을 연상케 했는데,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만화 같으면서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인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는 점이 놀라웠다. 하루이틀 그려본 솜씨가 아닌 듯했는데 놀랍게도 저자는 그림을 따로 전공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이과 출신에다 직장도 그림과 연이 없는 곳이었는데 작금과 같은 삶에 피로감을 느끼던 와중 포르투갈의 도시 포르투가 예술가들의 도시란 말에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참 충동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는데 아무튼 처음엔 일러스트에 끌려 이 책을 펼친 것이지만 프롤로그에서부터 느껴지는 저자의 행동력과 필력에 이끌려 이후부턴 글에 집중하며 읽어내려갔다.


 책의 분량 자체는 200페이지도 넘지 않으며 개중엔 1~2페이지를 차지는 일러스트의 분량도 상당한 지라 체감상 100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책을 읽은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글의 밀도가 낮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행 중에 겪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그대로 집필한 글이라 글의 분량이 각각의 글이 단편적이고 촘촘하게 이어지지 않고 약간 따로 노는 부분이 없잖았는데, 작가의 사유나 순간순간 빛나는 감성이 깊이가 있는 만큼 책의 구성에도 고민을 해봤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가령 처음엔 리스본 공항에서 호의를 거절했다가 마지막에 자신도 리스본에 처음 온 관광객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저자가 느꼈던 감정처럼 독자로 하여금 시선을 확 잡아끄는 서사가 몇 개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포르투갈 여행 정보나 역사, 문화를 알고자 이 책을 읽는 건 아주 좋은 선택은 아닐 것이다. 저자 본인도 충동적으로 포르투갈로 떠난 탓인지 여행 중에 실시간으로 알아가는 느낌이 강해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되진 못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꼭 포르투갈이 아니어도 이 책의 내용은 어느 정도 성립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허나 호카 곶을 앞두고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란 이명을 저자 나름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부분은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어서 이 책을 읽은 게 후회되지 않는다.


 에세이 작가들에게, 특히 몇몇 여행 에세이 작가들에게 특히 미안한 얘기지만 사진이나 일러스트를 제외하면 텍스트의 내용만으론 차별점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필력과 사유가 별로라 다 읽고 시간 아까운 경우가 적잖았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의 경우 포르투갈을 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이 여행을 통해 깨달은 여러 사유를 담담하게 전하는 것에 중점을 둬서 적어도 시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상의 끝'이라고 한들 그래봤자 바다가 보이는 곶에 불과한 장소에서 저 나름대로 희망을 발견하는 서술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작가의 여정에 빠져들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때론 담담하게 얘기하면 더욱 몰입하게 된다.

 위에서 '이 책의 내용은 꼭 포르투갈이 아니어도 성립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이 작가는 다른 나라, 포르투갈과 관련이라곤 없는 폴란드나 동남아 어디를 가도 이만한 수준의 사유의 결과물을 냈을 테니까. 중요한 건 포르투갈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의 여정이 참 부럽기도 했다. 나에게 여행이란 철저한 계획의 산물이다. 계획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완벽한 여행을 위해 많이 공부하고 여러 입장권과 투어를 예약할 때도 있다. 물론 그 과정을 꽤나 즐기는 편이지만, 정말 오래전부터 그 여행지에 방문하는 걸 너무나 고대한 나머지 그저 발길 닿는대로 느끼고 사유하는 여행과는 연이 없었던 것도 같다.


 여행엔 나처럼 계획하는 여행과 반대로 충동적으로 떠나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여행처럼 다양한 갈래가 있다. 여행은 반드시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고, 계획적인 여행이라고 사유가 없을 리 만무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라도 마냥 무계획적인 여행일 수도 없다. 문제는 내가 지금껏 여행은 이래야만 한다고 나도 모르게 규정을 지으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무척 손해 보며 살았을 것 같단 생각도 드는군.

 이번 3주간의 여행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완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여행이 될 듯해 불안하면서 설렌다. 내일 출국인데도 실감이 안 나는데 이래도 되나 싶구만. 분명히 날 당황시킬 일이 많이 일어날 텐데... 대비는 해두더라도 생각이나 판단은 그때 내려야겠다. 과도하고 생각이 개입되면 자칫 여행을 떠난 보람이 반감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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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를 위한 스페인어 안내서 - 최소한의 스페인어로 떠나는 미식 여행 자기만의 방
이지가을 지음, 허지영 그림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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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스페인 여행이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아 부랴부랴 스페인 관련 책을 찾아 읽고 있는 중인데, 그중 실용적이기로 이만한 책이 있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알아보게 된 결정적 계기가 스페인 음식이었던 만큼 현지 식당 방문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는데 그런 내게 딱 알맞은 책이었다. 여행 떠나기 직전에 읽게 돼 다행이구만.

 스페인어 입문용 교제로 공부 중이고 여행용으로 유용한 스페인어도 따로 습득하는 중이지만 이렇게 컨셉을 확실히 정해주니 더욱 잘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전문적인 자세로 내용을 주도하고 음식 설명, 식당에서 벌어질 법한 다양한 상황을 아주 맛깔나게 설명해줘 이 책만 정독하면 스페인 식당에서 무리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음 좋겠지만 저자도 말하듯 십중팔구 현지인 상대로 반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 퍽 헤맬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준비함에 있어 식당에 특화된 회화를 미리 알아두는 건 아주 실용적인 자세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좋든 싫든 여행지에서도 식사를 해결해야 하고 기왕이면 평소보다 더욱 실패없이 해결하고 싶기 마련이잖은가. 꼭 미식이 아니어도, 어지간히 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다수의 독자가 적어도 식당에서만큼은 맛있는 걸 먹고 싶고 자기 의사를 표명하고 싶을 것이다. 음식의 기호 문제도 있고 알레르기처럼 치명적인 문제도 발생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번역 어플의 성능이 발달하고 정 급하면 영어나 바디랭귀지를 동원하면 된다지만 그렇게 삐딱선을 타버리면 여행지에서의 식당 방문은 소극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럼 여행의 재미가 반 이상 급감해버린다. 프리토킹이 아니어도 대화의 가닥이라도 잡을 정도라면 '내가 이걸 알아듣다니!' 하고 남모를 짜릿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식당에서의 어휘와 회화 숙지는 필수불가결한 준비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스페인의 요리뿐 아니라 스페인 사람들, 저자 본인이 겪은 에피소드도 짤막하게 곁들여진 것과 허지영 일러스트레이터의 아기자기한 그림체가 어우러져 입력할 정보가 흘러넘침에도 부담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노력 깨나 해야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의 행복하고 만족스런 스페인 여행을 기원하는 저자의 응원에 힘입어 나도 좀 노력이란 걸 해보려고 한다. 여행은 노력해볼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것도 3주 여행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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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 우리에게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스페인 이야기
서희석 지음, 이은해 감수 / 을유문화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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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5월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가게 돼서 요새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찾아 보는 중이다. 이전에도 관심이 많은 나라들이라 정기적으로 관련 책을 찾아 읽었지만 이렇게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진짜로 가게 된다는 기대를 안고 있는 와중에 읽으니 내용들이 전에 없이 술술 들어온다. 여담이지만 스페인어 교제도 샀다. 현지에서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해야 하니까...

 나는 원래 '한 권으로 읽는~' 이란 제목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는다. 한 권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욱여넣으면 내용이 풍성해지긴커녕 빈약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의 경우 스페인 근현대사만을 다루는 듯해 솔깃했다. 실제로 목차를 보니 펠리페 2세부터 살펴봐 정확히는 근현대사보다 좀 더 전의 역사부터 포함된다 할 수 있는데 아무튼 결과적으로 제법 디테일하고 고증이 탄탄한 책이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적어도 진짜 근현대사 파트 전까지는.


 애석하게도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프랑코 독재까진 거의 단순 사실 나열이라 다소 지루하게 읽혔다. 반면에 펠리페 2세를 비롯한 스페인 왕가의 이야기는 의외로 굉장히 재밌었다. 수도원을 지을 때의 노동자들과 임금 문제로 갈등을 겪는 것이나 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를 제압하고자 스페인이 혈세를 낭비하며 용병들을 고용했는데 정작 그 용병들이 또 상황을 악화시키는 에피소드, 게다가 중간중간 왕가의 스캔들까지 다루니 역사보다 대서사시를 읽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렇게 사진도 거의 없고 그나마도 흑백인데 그럼에도 빠져들며 읽는 역사 이야기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건 내용도 내용이지만 작가의 필력 덕분이라 해야겠다.

 그나저나 스페인 역사를 대서사시라고 한다면 굉장히 비극적인 대서사시라 할 수 있겠다.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너무 많은 식민지를 관리하고 반란을 제압하는 것에 너무 많은 수고가 들어 결국 자국 사정도 망쳐버리는 본말전도의 모습이 처음엔 쌤통이다가도 나중엔 정말 처절하게 비쳐졌다. 이 시기를 다룬 부분이 유독 흥미로웠던 이유는 바로 스페인 자국에서 자기네들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면밀히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다양한 사유를 낳았기에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스페인 현지에서 유학하고 현재도 살고 있다는 저자는 그 다양한 사유들 중에 흥미롭고 의미 있는 해석을 잘 모아 이 책에서 소개해 상대적으로 팩트 위주인 근현대사보다 오히려 어느 정도의 성찰과 교훈이 담긴 중세가 더 흡입력 있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스페인 역사가 우리에게 낯설지만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라 강조한다. 식민지를 엄청나게 거느린 나라와 중국과 일본에게 짓밟힌 우리나라의 역사와 닮은 구석이 있을까 싶었지만 저자가 공언한 대로 제법 닮은 구석이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의 왕가나 구체제가 결정타를 맞은 부분이 그러했다. 무능한 지도자와 비선실세가 나라 말아먹은 꼴이나 - 그런데 재밌는 건 스페인에서 무능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두 왕이 있었는데 이때 궁정화가가 무려 벨라스케스와 고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원. - 다른 유럽 나라가 종교부터 시작해 근대적인 가치관을 확립해나가고 있을 때 스페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뒤늦게 부랴부랴 쫓아가다 경험 부족으로 결국 내전이 터지고 30몇 년 독재자의 압제를 겪기도 하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독자는 적을 것이다.

 아까 스페인이 본말전도의 길을 걷는 걸 보고 쌤통이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스페인이 남미나 네덜란드, 까딸루냐와 바스크 지방에 한 짓은 정말 악랄했지만 그렇다고 스페인 모든 국민이 겪는 고통을 인과응보로 여기는 건 내키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스페인에서 양심 있고 생각 있는 지식인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의 의지가 좌절됐는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과응보라는 말은 잘못 내뱉으면 정말 폭력적으로 들리는데 이 경우가 딱 그렇다.


 그렇다 보니 한 나라를 단순히 나쁜 나라, 멍청한 나라, 게으른 나라라고 선입견을 가진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선입견을 조장하는 분위기가 우리 주변에서 만연한 걸 넘어 당연시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경각심을 가지면서 살아야 할 듯하다. 좀 거창한 말이긴 했지만,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처럼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을 읽다 보면 단순히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깨달음을 늘 얻곤 한다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역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겠지. 이걸 인식한 것만으로도 정말 좋은 공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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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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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2


 책을 읽고 이안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시간이 지나 다시 읽으니 안타깝게도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일러스트가 수록된 특별판을 읽으니 더더욱 영화의 비주얼과 비교돼 소설의 표현력이 초라하게 다가오는 역효과를 낳았다. 책의 일러스트는 대체로 예뻤지만 경이로운 수준은 아니었고 대체로 있으나 마나 한 내용이었던 터라 작품의 몰입도를 크게 높여주진 못했다.

 비주얼이 아닌 연출이나 몰입도 측면에서도 영화가 소설보다 뛰어났다. 파이의 독창적이고 강인한 정신세계를 어필하는 소설의 전반부는 적잖은 독자들이 공인하듯 지루하고 리차드 파커가 호랑이의 이름이라는 반전은 유머러스하긴 해도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너무 뜸을 들여 김새기도 한다. 그에 비해 영화는 초반부의 지루한 부분을 많이 쳐냈고 책의 아쉽거나 두루뭉술한 부분을 많이 개선했다. 가령 파이가 일시적으로 실명했을 때 자신처럼 조난된 처지의 사람을 만나는 장면은 정말 사족이었는데 그런 사족이나 설명충스런 부분을 영화에선 압도적인 비주얼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하기에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에겐 더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작품의 결말도 영화가 더욱 잘 묘사했다고 본다. 번역의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책에선 파이가 두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냐고 묻는 반면 영화에선 더 마음에 드는 이야기냐고 묻는다. 사소한 뉘앙스 차이일 수 있으나 단순히 이야기의 만듦새를 겨루는 것이 아닌 인간이 기적과 믿음을 가지는 매커니즘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의 주제의식과 깊이를 생각하면 나는 영화에서의 배우들의 호연이나 연출이 더 마음이 간다.

 영화 쪽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소설은 파이가 화자로서 이야기하고 결말도 파이가 끝맺는 형식이다. 영화에선 파이에게 이야기를 들은 작가가 자기만의 답을 내리고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된다는 허락을 얻음과 동시에 자신처럼 파이의 두 이야기를 들은 일본인 조사관들이 적은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 미소 짓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 장면이 일품이었다. 인간은 끔찍한 이야기를 인정하느니 황당하더라도 환상적이고 희망이 있는 이야기를 믿으려 한다. 이 믿음은 때론 비극도 기적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공감을 구하는 장면이었는데 나도 마음속으로 동의하며 고갤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이렇게 지루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간혹 영화화가 너무 잘 이뤄지면 원작도 반사이익을 보기 마련인데 <파이 이야기>는 정반대다. 영화 덕분에 책도 부커상 수상작 중에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하고 이렇게 일러스트 버전처럼 여러 버전의 책이 지속적으로 출간되는 등 스테디 샐러로 자리매김됐지만...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다고 생각해보긴 정말 처음인 것 같다.

 여담이지만 제목은 원제보다 우리나라 버전의 제목이 더 좋다. <라이프 오브 파이>보다 <파이 이야기>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파이 전체의 삶이 아닌 파이의 두 가지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니까. 영화도 원제말고 이 제목으로 상영하지. <나를 찾아줘>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작품도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았는데. 원작 소설보다 더 괜찮은 영화가 은근히 많다. 소설은 무조건 영화보다 낫다는 것도 참 이상한 편견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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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티무르 베르메스 지음, 송경은 옮김, 김태권 부록만화 / 마시멜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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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밑도 끝도 없이 히틀러가 죽지 않고 현대의 독일에서 깨어난다는 황당하고 섬뜩한 설정의 작품이 있다기에 찾아 읽어봤다. 진짜 히틀러가 말이다. 난 혹시나 너무 미쳐버려서 자신이 히틀러라 단단히 착각해버렸다는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반전은 없었고 이 작품 속 히틀러는 진짜 히틀러였다. 어쩌다 현대로 넘어왔는지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리라. 전범이란 자각도 없이 여전히 망상에 빠진 그가 무슨 짓을 할 것인가 그 여부가 중요할 것이다.

 의외로 이 작품 속에서의 히틀러는 자신이 이끌던 나치와 독일이 패전하고 지금의 독일이 꿈꿔온 것에 비해 전혀 다른 역사를 밟은 현대의 독일에 어느 정도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니, 적응한다기보다는 눈치를 본다는 표현이 옳은데 오히려 이런 주변머리를 갖추고 서서히 자신이 암약할 기회를 노리는 점이 참 현실적이고 섬뜩하게 다가왔다. 당연히 사람들은 히틀러를 보고 그냥 히틀러 흉내를 완벽히 내서 모종의 풍자를 노리는 코미디언이라 알아서 착각하지 진짜 히틀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점점 현혹되는 사람이 늘어가는데, 그때마다 현대의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의 언변에 넘어갈 만큼 만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그 나라 사람들이 한 명의 미친 독재자한테 시달린 흑역사를 잊을 리 없으니 다시 돌아온 히틀러라 해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믿으면서.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독일이 과거에 그런 과오를 저지른 건 히틀러 단 한 명의 책임이 아닌 히틀러의 이름을 연호하고 지지를 아끼지 않은 우중愚衆의 책임도 크고, 히틀러는 그저 운이 좋거나 시대가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를 잘 파악한 미치광이라는 말이 아주 과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고 입가에 쓴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타인의 의견을 자신과 다르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묵살할 순 없지만 무슨 일이 터진 다음엔 민주주의가 형체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런 말랑말랑한 분위기 속에선 독일은 언제든, 아니 평화로운 분위기가 만연한 어떤 나라든 나치에 찬양한 과거 독일의 전철을 밟을 공산이 크다.  작중에서 히틀러가 다른 창작물에서와 달리 미묘하게 인간적으로 묘사된 터라 우리 주변에 악마를 가려내는 건 무지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

 억지 주장은 언변으로, 장황한 말투에 사람들이 당황하면 카리스마로 어떻게든 무마하고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고급 코미디로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착각하고 포장해주다 보니 히틀러는 어느새 유튜브 스타가 되고 만다. 이 과정은 다소 과장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작가가 의도한 바는 전해졌다. 어딘지 허술한 정치인들과 네오나치마저 차례차례 논파해나가는 히틀러의 기상천외한 여정은 그가 과거에 했던 짓을 그대로 재현할 초석을 닦았다는 불길한 암시를 남기며 끝맺어지는데 이 후반부의 전개에 몇이나 웃을 수 있을까. 어려운 서사와 인물을 그럴싸하게 써내려간 패기와 묘한 유머는 인정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블랙유머로 부르기엔 지나치게 섬뜩하지 않은가 싶었다. 나는 <그가 돌아왔다>를 코미디 소설이라 정의하는 것은 작중에서 사람들이 히틀러를 코미디언으로 착각하는 것만큼 웃긴 일이리라 여겨졌다.


 이 작품이 영화로도 나왔다는데 그 결과물이 궁금하다. 평가가 원작 못지않게 좋던데 어떻게 결말이 났을지 궁금하고 대체 어떤 배우가 히틀러를 연기했을지 궁금하다. 이래저래 리얼리티가 중요한 스토리인 만큼 과장 없는 히틀러 연기가 과연 어떻게 디렉팅됐을지 몹시 궁금하다. 듣자하니 연기나 결말이나 소설보다 더 불길하게 연출됐다는데... 나치에 치를 떠는 독일에서 이런 파격적인 작품이 나온 것도 신기한데 영화로도 나왔다고 하니 그 만듦새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담이지만 책엔 일종의 부록 같은 개념으로 만화가 김태권의 단편 만화가 실려있다. 그는 <히틀러의 성공시대>라고 히틀러와 나치가 어떻게 독일을 집어삼키는지 그 과정을 그린 작품을 그렸는데, 지나치다 싶은 희화화와 아재 개그 때문에 히틀러와 그 시대의 섬뜩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 단점이 거슬리는 작품이었다. 요번에 실린 단편 만화는 그런 부분은 조금 덜어지고 대신 현실성을 높여 섬뜩함을 더하는 데 중점을 뒀던데... 아예 이 소설을 원작으로 둔 만화를 그려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이번 만화는 너무 패러디라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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