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용골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8.5


 10년 전에 읽었을 땐 상당히 이색적인 추리소설이라며 감탄했지만 다시 읽으니 오히려 그 이색적인 특성이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설정은 여전히 참신하고 추리의 과정과 반전 모두 논리적이고 납득이 가능하나 작중에서 나오는 마법들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형편에 맞게 최소한의 개연성만 갖춘 터라 독자 입장에선 아무래도 공정하게 추리가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말하니 꼭 추리하며 읽는 독자 같지만 정작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읽는 독자다.;;

 허나 그런 내 눈에도 이 소설은 아슬아슬하게 공정함과 불공정함을 넘나들고 있어 읽으면서 불안했다. 추리소설의 미덕을 공정함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으니까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할 엠마의 정체나 팔크 피츠존의 턱에 난 상처에 대한 복선은 영 미묘했던 것, 저주 받은 데인인의 생각보다 썰렁한 활약 등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있어서 용케 이 작품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장편부문)을 수상했구나 싶었다. 처음에 읽었을 땐 어느 정도는 무시할 수 있는 단점이었지만 다시 읽으니 더욱 눈에 밟혔던 것 같다.


 시간대는 지금으로부터 10세기는 더 옛날이며 배경은 영국 인근의 가상의 섬이다. 데인인의 위협에 맞서 용병을 모으는 도입부나 마치 정말로 존재한다는 듯 마법을 묘사하는 태도와 논리적인 추리가 곁들여진 전개는 제법 흥미로웠다. 작중에선 마법이 거의 과학의 역할을 대신하지만 한편으론 마법이라 칭할 수밖에 없을 만큼 신비로운 묘사(저주, 투명화)가 많아 일반적인 추리소설이 아닌 판타지 장르에서나 느낄 수 있는 매력 또한 겸비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또 중세 시대의 분위기와 개성적이고 비중 있는 캐릭터들, 그리고 대규모 전투 장면은 이 작품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겠다. 이게 추리소설이 갖춰야 할 장점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선 꼭 중요한 요소들이었기에 이 요소를 모두 충족시킨 요네자와 호노부의 필력에 새삼 감탄했다. 요네자와 호노부가 '빙과' 시리즈 같은 일상 계열의 추리소설만 쓸 줄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꼭 추천하고 싶다. 다방면의 장르를 소화하는 작가의 저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론 이 소설을 작가의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보틀넥>, <추상오단장> 같은 일상, 성장이 강조된 추리소설들이야말로 요네자와 호노부의 진면목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부러진 용골>은 뭐랄까... 대놓고 후속작을 암시하는 결말에 반감이 생겼던 걸까, 아니면 생각보다 맥거핀이 남발된 것 같고 반전이 허무하게 다가와서, 어쩌면 제목의 정체가 별 대수롭지 못했던 탓인지 이래저래 여운이 남지 못했다. 어설프지 않은 세계관 묘사와 더불어 작가의 필력이 폭발하는 듯한 전투 장면에 비해 막상 추리소설의 묘미는 덜 부각돼 그 점이 아쉬웠다.


 그래, 이게 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이 문제다! 늘 말하지만 이 상을 받은 작품치고 추리소설다운 추리소설 같다는 인상을 주는 작품이 얼마 없는 것 같다. 오죽하면 아야츠지 유키토가 <시계관의 살인>으로 이 상을 받을 때 '추리소설이라고밖엔 할 말이 없는 작품으로 이 상을 수상해서 영광이다' 라고 말했겠는가. 그 작가한테 이 상을 디스할 마음은 없었을지 몰라도 난 그 소감에 적잖은 공감을 했다.

 이 작품 이후로 요네자와 호노부는 상당히 대중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고 내는 작품마다 여러 문학상과 랭킹 1위를 석권한 것으로 알고 있다. 판타지처럼 원래 전문 장르가 아닌 작품을 완결했더니 더욱 필력이 상승한 모양이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1위를 한 작품이 참 많던데 그 작품들을 찾아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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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스 고스트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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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스포일러 : 10~15%


 <페퍼스 고스트>는 이사카 코타로 특유의 엉뚱함과 그에 대비되는 잔혹함, 그리고 통찰력이 총망라된 최신작이다. 고양이 학대 영상에 후원한 사람들을 찾아 보복을 하는 2인조와 비말 감염을 통해 상대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주인공의 설정에서 작가의 통통 튀는 개성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의 미래 예지 능력과 예지 능력을 통해 보는 미래 장면을 '선공개 영상'이라 부르는 것도 탁월했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이 그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주듯 주인공도 자신에게 비말을 옮긴 상대가 다음날 겪을 예정인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미리 볼 수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 <마왕>의 주인공도 초능력자였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 작품에선 하찮아 보이는 능력도 마음먹기에 따라선 큰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에 비해 이 작품 <페퍼스 고스트>는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사람이 시달리는 무력함이 강조돼 상대적으로 스케일이 작은 사건이 다뤄진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아무튼 주인공이 행동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가 발동이 걸리기 전까지 소소하게 능력을 활용해왔는데 중반부부터는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 변화의 과정을 독자가 몰입하며 공감할 수 있게 묘사하는 한편으로 소설을 예측불허하게 전개하는 작가의 노련함에 적잖이 감탄했다. 이게 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주인공 덕분에 이 작품은 인과와 개연성에 대한 압박에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운 덕분이다.


 인과를 비틀어버리는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엔 얼핏 인과를 벗어난 행동을 보이는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고양이를 학대하는 인터넷 방송인을 후원한 사람들이나 성급하고 무책임한 발언을 함으로써 인질 사건이 최악의 형태로 끝맺어진 것에 어느 정도 일조한 언론인처럼 책임 추궁이 미묘한 상대에게 복수심을 갖고 기어코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 그리고 중학생 소녀의 소설 속 인물들인 줄로만 알았던 러시안 블루와 아메쇼의 정체도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등 이 작품은 시종 사람들의 감정이나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의 원인과 결과는 완벽하게 설명하기 힘듦을 역설한다. 모름지기 소설이란 인과에 얽매이기 마련이지만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맥거핀이나 다름없던 몇몇 설정이나 긴 시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설명됐음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소설의 결말은 이 소설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평소라면 허무했다고 여겼거나 용두사미라고 분개했을 텐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작품의 제목인 페퍼스 고스트의 의미를 통해 작가가 뻔뻔스럽고 그럴싸하게 포장해 부정적인 감상은 남지 않았다. 대놓고 이 작품의 의도를 전달하고 있는 작가의 노력이 너무 필사적이라 오히려 읽는 입장에선 피곤했지만... 은근히 예측이 되지 않아 다음이 계속 궁금했던 이 작품 특유의 전개에 감명을 받았기에 기분 좋게 마지막을 덮을 수 있던 작품이다. 탁월한 오락적 재미가 호불호 갈릴 만한 주제의식과 결말을 잘 가다듬었다.


 작품을 볼 때 개연성과 인과를 굉장히 중요시했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관점이 많이 변하고 있다. 올해 극장에서 본 최고의 영화인 <플래시>나 얼마 전에 읽은 기욤 뮈소의 소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처럼 세세히 들여다보면 앞뒤가 안 맞지만 이야기를 통해 추구하고 말하고자 했던 바를 이해하니 인과의 개연성은 사사롭게 느껴졌다. 불확실하고 의문투성이인 현실 세계에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픽션의 역할이라 생각했지만 완벽히 인과에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서 감동과 재미가 덜한 것은 아니다. 나는 어느덧 그런 작품들을 단지 무리수를 던져버린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그런지 <페퍼스 고스트>도 은근히 거슬림이 적었던 작품이다. 작가의 대표작 반열엔 들지 못하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독특한 시도를 했던 작품이라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듯하다. 인과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운 걸 넘어 아예 이 작품만의 인과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작가의 필력이 발휘한 마법인 걸까? 혹시 이 소설의 모든 비현실적인 전개는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전개인지도 모른다. 현실에 사는 독자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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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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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5



 스포일러 있음


 기욤 뮈소의 작품은 처음 읽은 작품이 가장 재밌다는 말이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접하는 작품은 다 처음 읽었던 작품의 복사 붙이기 같다는 말이 많은데 나 역시 거의 동의한다. 물론 이 작가도 나름대로 시도를 많이 하지만 특유의 가벼운 문체와 오그라드는 작풍 때문에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기욤 뮈소의 작품이며 무려 13년만에 다시 읽었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었고 그 사이에 기욤 뮈소의 책도 몇 권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평점을 보면 알겠듯 다시 읽으니 처음의 감동이 무척이나 많이 반감됐다. 그 당시에 나는 달달함에 내성이 없었고 이 작품의 결말처럼 다소 작위적인 해피엔딩에도 감동을 받았으나 이제는 달라졌다. 이제 나는 냉소적이고 확실한 건 취향도 많이 변했다. 물론 이 작품을 단순히 취향 차이라고 둘러댈 만큼 객관적으론 괜찮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궁하지만... 그래도 13년 전에 감동을 받았던 과거의 나를 위해 이 이상은 말을 아끼겠다.


 다만 작품의 핵심 소재인 시간 여행에 대해선 좀 더 얘기하고 싶다. 과거의 엘리엇과 현재의 엘리엇이 의사로서 협동하여 일리나를 살리는 과정은 개인적으로 명장면이라 생각하고 현재의 앨리엇이 폐암으로 죽을 예정인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것엔 안중에 없고 대신 그저 일리나를 한 번 더 보는 것에 간절했던 모습, 일이 틀어졌을 때도 자신의 딸 엔지가 아예 없던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해 현재와 과거의 자신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제안을 고민하는 전개는 다 좋았다. 요새는 '과거를 바꿈으로써 미래도 바뀐다'는 고전적인 시간여행물의 법칙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은 많지만, 이야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과학적인 개연성이 없더라도 작가가 해당 작품만의 법칙을 준수한다면 거부감 없이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매트가 엘리엇이 죽은 다음에 시간여행 알약을 먹어 과거를 바꾸는 후반부의 전개는 사족이자 누워서 침 뱉기 아니었나 싶다. 이는 과학적인 개연성과 더불어 해당 세계관의 개연성도 저버린 전개였다. 작가가 감동적인 결말을 위해 그 장면을 넣은 건 알겠는데 그 의도가 너무 뻔히 보였다. 최초의 앨리엇과 달리 시간여행의 위험성을 알게 된 후반의 앨리엇이 어떤 경위로 알약을 얻었고 10개 중 하나만 남긴 이유가 설명이 안 되는 등 은근히 앞뒤가 안 맞는다. 현재의 앨리엇이 과거로 간 시점에서 현재와 과거의 앨리엇은 엄연히 다른 인물이므로 이렇게 디테일하게 둘의 미래가 일치하는 건 명백히 작위적이지 않은가. 13년 전의 나는 이러한 작위적인 전개를 무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된다. 그 사이에 적잖이 예민해졌나보다.


 과거를 바꿔 미래도 바꾼다는 전개는 늘 설레는 전개다. 제아무리 말이 안 되고 위험천만한 계획이더라도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으리라. 나 역시도 이 작품을 처음 읽고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만큼 과거를 후회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보편적으로 몰입할 만한 소재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재로 남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일 텐데 기욤 뮈소는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뒀다. 영화화도 이뤄졌고 이렇게 개정판으로도 나왔다.

 아까 후반부의 작위적인 전개를 꼬집으면서 차라리 새드엔딩이면 어떨까 이 생각도 해봤다. 다른 작품의 스포일러라 말을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기욤 뮈소의 작품 중 새드엔딩의 작품이 있긴 하다. 이 작품도 그랬으면 어땠을까? 아마 그러면 이 정도로 많이 회자되는 작품은 못 됐을 것이다. 하지만 후반부의 전개가 앞뒤가 안 맞는 건 너무 아쉬운데... 참 아쉽다.

조만간 기욤 뮈소의 몇 안 되는 새드엔딩 작품도 읽으려고 한다. 그 작품 포스팅에서 이 작품에 대한 얘기도 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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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 제4권 부패와 자각의 시대 - 믿고 보는 신일용의 인문교양 만화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4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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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나는 지금까지 동남아시아 국가로 여행을 네 번 떠났다. 말레이시아 한 번, 태국 한 번, 작년에 베트남 두 번. 은근히 많이 가본 편이지만 그렇다고 동남아에 대해 아는 거라곤 얼마 되지 않는다. 물가가 싸고 덥고 휴양하기에 좋은 곳이란 인상이 강하고 그 나라의 역사나 언어에 대해선 수박 겉 핥는 수준으로만 알고 있었다.

 배탈이 거하게 났던 말레이시아, 코로나 직전 마지막 여행지 방콕, 코로나 이후 처음 간 여행지 하노이...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여행지들이기에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러한 나의 갈증을 제대로 해소시킨 만화로 저자는 최대한 밀도 있게 압축을 해도 4권이나 나왔다고 서두에서 미안한 듯 말하지만, 읽다보면 오히려 두세 권은 더 나와도 될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책에서도 나오는 얘기지만 동남아시아가 워낙에 미국 뺨칠 만큼 여러 인종과 문화가 혼합된 곳이라 역사도 다채롭고 깊이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밀도를 유지하고 분량을 더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필리핀의 호세 리살과 베트남의 호찌민이 왜 죽어서도 그 나라 국민들한테 절대적인 지지와 예우를 받는지, 싱가포르는 어쩌다 말레이시아한테 독립을 '당하고' 이내 리콴유라는 독재자가 어떻게 나라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는지, 미얀마와 태국의 복잡하고 연민이 느껴지는 근대사와 동병상련이 느껴지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근대사, 무수히 많은 독재자 중 가히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캄보디아의 폴 포트...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인물과 역사적 사건이 너무 많아 약간 부끄럽기도 했고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게 됐다.

 <먼나라 이웃나라> 스타일의 학습 만화긴 하지만 이 책은 정치/문화/역사에 관심이 지대한 성인 독자가 아니면 그 재미와 유익함이 어필되기 힘든 만화였다. 그만큼 취향에 맞으면 이만한 만화가 없을 테고, 나 역시 일부 파트는 생각보다 내용이 깊어서 읽기 버거웠지만 그건 내가 연달아 읽어서 그런 거지 생각날 때마다 파트별로 끊어 읽으면 지식 습득의 효과는 상당할 터다.


 개인적으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사람이 마젤란도 마젤란의 선원 12명도 아닌 그 배에 올랐던 말레이시아인 노예라는 것과 내가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단편소설인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이 언급된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유럽과 일본의 식민지 시절을 겪었고 아직도 선진국, 특히 서구의 시선에서 보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지지리 궁상맞고 결점이 많은 나라들이 많긴 하다. 그 시선은 일리가 있으며 자국 사람들도 그러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지들이 본인들 이득에 따라 이용한 탓에 동남아 국가들이 아직도 피해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역겹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인구의 힘일까 문화의 저력일까 힘든 역사를 견뎌낸 끈질김 덕분일까? 책에서 접하는 근대사를 보면 진작 나라가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비극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일부 국가에선 현재진행형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외세에 시달리고 남북으로 분단되기까지 한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역사를 가진 국가라고 자평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동남아시아 국가들만 봐도 우리와 비슷한 공감대의 역사를 가진 나라는 많다. 우리 역사가 힘들지 않다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처절하고 힘들었던 시절이 어느 나라에나 보편적으로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가 롤모델로 삼았던 미국, 일본, 유럽의 선진국들은 식민지 신세를 겪지 않고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들이라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초라하고 한스럽게 느껴지는 것일 터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보편적인 역사를 가진 나라이건 뭐건 그걸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걸, 그렇다고 우리와 비슷하게 힘든 나라들이 결코 열등해서 극복하지 못하는 게 아니란 걸 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와 선입견을 없애고자 기획했던 신일용 작가의 책은 내용적으로나 만화적으로나 훌륭한 책이었다. 만화치고 글이 너무 많이 더디게 읽히지만 그만큼 밀도가 높았다. 또 글이 많다고 만화적 재미나 그림이 후달리는 것도 아니니 - 유려한 화풍은 아니긴 하지만 - 만화를 좋아하고 동남아에 관심이 있거나 동남아로 여행을 계획 중인 사람은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책을 읽고 동남아 어딘가로 여행을 떠고 싶어졌는데... 어디로 갈까? 어디든 가기 전에 이 책을 다시 읽고 갈 것이다.


 p.s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단편소설은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 장편소설은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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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 협박 시 주의사항 - JM북스
후지타 요시나가 지음, 이나라 옮김 / 제우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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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스포일러 : 10%


 이 작품의 원제는 '그녀의 공갈'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온 제목보다 원제가 선입견을 만들지 않아서 더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제목은 마치 주인공이 겁도 없이 살인범을 협박했다가 피의 보복을 당하는 내용으로 연상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협박을 결심하기까지 고뇌와 협박을 하고 난 다음에 갖는 뉘우침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개가 중요한 작품이기에 '살인범 협박 시 주의사항'은 작품 분위기와 미묘하게 따로 노는 감이 있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저 제목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살인범을 협박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이 작품의 내용에 의하면 살인범을 협박할 때 과연 그 사람이 정말 살인범인지 확인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일 터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은 헛다리를 짚어도 제대로 짚은 셈인데, 아쉬운 점은 이 주인공의 오해가 사건의 커다란 변수를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는 작가의 섬세한 묘사력은 흥미로웠지만 주인공에게 협박을 당한 쿠니에다의 시점을 생각하면 돈을 뜯긴 것을 제외하면 그의 신변에 당장엔 커다란 변화가 일지 않는다. 그로 인해 협박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생긴 걸 빼고 순수하게 범죄소설의 관점에서 주인공의 오해와 협박이 무슨 역할을 했는가, 그 점이 한 번에 와 닿지 않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간단히 말해 심리 묘사를 제외하면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적인 짜임새와 결말의 의외성은 기대보다 부족한 작품이었다. 결말은 먼 길 돌아온 것치고 급작스럽고 여운과 동시에 허무함도 그에 못지않게 안겨져 약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가련한 처지이면서 악녀에 가까운 면모도 보인 주인공 케이코의 캐릭터성은 많은 질문거리를 낳지만, 개인적으론 케이코는 절박함이나 악녀스러움이 내가 예상보단 2% 부족해 그녀의 선택이나 그녀의 자책 모두 과하게 느껴졌다. 만약 같은 플롯과 같은 인물을 가지고 기리노 나쓰오나 기시 유스케가 집필했다고 생각해보자. 훨씬 더 음습하고 악마적인 작품이 탄생했을지 모른다.

 20대 여성과 50대 남성의 플라토닉 러브도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다. 30대 남성의 내 경우엔 그래도 서로가, 특히 남성 쪽이 선을 지키며 감정을 교류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성 독자들도 같은 생각일까? 일본 특유의 유흥 업소 종사자 여성을 부적절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불쾌해하지 않을까. 내가 내 감상에 젖으면 그만이지, 굳이 여성 독자들의 시선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으나 등장인물과 비슷한 연령대와 처지에 있는 독자들의 반응도 내심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만 애잔함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필력을 겸비한 작품인 것인지... 나의 감상과 타인의 감상이 극히 다를 때가 많아서 어느 순간부터 내 감상을 함부로 밀어붙이지 못하겠더라. 더군다나 말 한 마디에도 검열을 해대는 시대가 됐으니 원;;


 안타깝게도 작가는 이미 고인이 됐다고 한다. 유명 작가인 것에 비해 국내에 출간작이 이 작품이랑 <텐텐>밖에 없던데 나오키상 수상작을 비롯해 여러 작품이 소개되길 바란다. 소개되는 일본 소설가들이 다 거기서 거기다 보니까 이젠 일본 소설이란 것만으로 식상하게 다가올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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