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마카롱 수수께끼 소시민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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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시민' 시리즈는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고전부' 시리즈와 닮았으면도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추리력에 대한 자신감이나 다뤄지는 사건의 스케일 등 두 시리즈는 차이가 뚜렷한 편이다. '고전부' 시리즈가 전형적인 일상 미스터리라면 '소시민' 시리즈가 더 강력한 사건이 다뤄진다. 그리고 또 하나 큰 차이로, '고전부' 시리즈는 꽤 많이 집필된 반면 '소시민' 시리즈는 다루는 사건이나 전개가 굵직하기 때문인지 당최 신작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들 수 있겠다. 시리즈 4편인 '겨울~'의 출간 소식 대신 단편 소식만 들리고 있다.

 전편인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을 읽은 지 꽤 돼서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가물가물하던 와중에 읽게 된 내 눈에도 이번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는 시리즈에서 조금 이질적인 축에 들었다. 일단 스케일이 '고전부' 시리즈에 비견될 만큼 아기자기하며 그간 곁가지에 불과했던 디저트들이 이번 수록작들에선 보다 비중있게 다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었던 '뉴욕 치즈 케이크 수수께끼'에선 아예 치즈 케이크 레시피의 한 부분이 작품의 핵심 트릭과 직결돼 남다른 쾌감을 선사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 기준에선 그 트릭이 퍽 기발해서 나도 한 번 시도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요리는 과학이라던데 정말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추리소설 중엔 저렇게 국명이나 지명이 앞에 나오고 그 다음에 키워드가 나오는 형태의 제목인 작품이 꽤 많다. 엘러리 퀸이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처음 선보인 제목인데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곧잘 패러디되곤 한다.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의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제목에 들어가 있는 파리 마카롱이나 뉴욕 치즈 케이크, 베를린 튀김빵과 피렌체 슈크림이 작품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하는 역할이 천차만별인 것이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디저트의 레시피가 아주 요긴하게 활용되는 경우는 극소수고 대개 사건 해결의 실마리보단 사건을 접한 계기 정도로 다뤄진다.

 이런 제목을 가진 추리소설이 의외로 제목이 흥미로운 것에 비해 내용은 그저그런 경우가 허다한데,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 정도면 적어도 반타작은 하지 않나 싶다. 시시한 단편 둘, 흥미로운 단편이 두 편 수록됐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는데, 다만 아쉬운 점을 굳이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시리즈의 스토리라인에 큰 전환점을 제시하지 못하는 아주 외전격인 내용들이었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오랜만에 나온 신작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란 것이다. 그렇게 기대를 하지 않은 나도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으니 다른 독자는 더욱 실망을...... 아닌가? 애당초 요네자와 호노부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시시함과 작은 스케일을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오히려 반색하려나? 글쎄, 이 부분은 애매하다. 내 경우엔 작가 특유의 사색 짙은 문장이 적어서 작가답지 못한 작품들이라 생각했는데... 독자마다 평가가 다를 것 같다.


 아무래도 빠른 시일 안에 시리즈 4편을 읽긴 힘들어 보이니 그 사이에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소시민' 시리즈의 전편을 재독하는 게 나을 듯하다. 시시하긴 했어도 오랜만에 읽으니 다시 정주행하고 싶어졌다. 아, 정말 여담이지만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과반수 이상이 나고야에서 진행된다. 내가 곧 나고야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 작중 배경이 반가웠고 다가올 여행이 퍽 기대됐다. 나고야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줄 알았으면 아예 현지에서 읽을 걸 그랬다고 짧게 후회도 하면서. 

훌륭한 파티스리와 제과 동호회를 함께 비교하는 건 시시한 일이야. 백 엔짜리 초콜릿을 먹으면서 고디바 초콜릿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우스꽝스럽잖아.

파티스리는 파티스리에 어울리게, 홈메이드는 홈메이드답게, 주전부리 과자는 주전부리로 훌륭하다면 그걸로 족한 거야. 언제나 최고의 디저트를 원하는 건 구도자 같아서 멋져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뭘 먹어도 ‘거기에 비하면‘이라고 말하는 속물에 지나지 않아. - 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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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변주곡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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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찬호께이의 단편은 <풍선인간> 이후로 오랜만에 접했다. 이 작가는 대체로 <13.67>처럼 500페이지는 거뜬히 넘기는 분량의 책을 집필하곤 하는데 과연 단편에서도 솜씨를 뽐낼 수 있을까? 장편에 능한 작가가 단편에서 죽을 쑤는 경우는 흔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안고 책장을 펼쳤다.

 첫 수록작부터 그저 그래서 이 작가가 역시 단편은 약하구나 싶었다. 가끔은 중편도 섞였는데, 첫 수록작인 '파랑을 엿보는 파랑'은 반전이 있긴 해도 분위기가 딱 전형적인 싸이코 스릴러였던 터라 읽으면서 큰 감흥이 일지 않았고 이색적인 배경이나 설정, 장르를 내세운 단편은 대개 기대보다 두세 단계 아래의 만족도를 안겨줬다. 이토록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작가란 감탄이 나오기보단 그냥 이번 책은 작가의 습작을 짜깁기한 책이라고 멋대로 단정하고 읽어내려갔다. 전율을 안겨줬던 <풍선인간>과 달리 연작 소설집이 아니다 보니 모처럼 재밌는 단편을 읽어 흥미가 생겨도 그 다음에 사라지고... 흥미가 생기다 말기를 반복해 전반적으로 전율 없이 담담하게 읽혔다.


 그래도 마음에 든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커피와 담배' 같은 일상적인 소재를 미스터리하게 풀어나가는 아이디어를 대단히 좋아하며 의미심장한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찬호께이의 작품엔 이렇게 정신적인 이유든 뭐든 억울한 처지에 놓인 화자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이 많은 것 같은데 단편에서도 주인공의 절박함이 임팩트 있게 잘 녹아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만약 내가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상상만 해도 식은 땀이 난다.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과 마지막 수록작인 '숨어 있는 X'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내용의 작품들이라 함께 얘기하고 싶다. 일단 전자는 읽으면서 기분만 나빴고 결말은 더욱 기분 나빴던 반면 후자는 집중력이 가장 저고조였음에도 순식간에 몰입하며 읽었던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이었다. 전자는 추리소설가로 등단하기 위해 이유 없는 살인을 범하려는 추리소설가 지망생의 이야기고 후자는 피 한 방울 튀기지 않으면서 추리소설의 진면목을 그려나가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추리소설 읽기 교양 수업에서 벌어지는 추리 게임이 이토록 지루하지 않게 읽히다니... 대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작가의 <염소가 웃는 순간>이 연상됐는데 그 작품보다도 적어도 천 배는 더 괜찮은 소설이었다. 차라리 이 작품으로 장편을 내주지. 만약 후속작이 나온다면 무조건 읽을 것이다.

 두 작품은 추리소설이나 추리 게임을 주제로 삼았음에도 분위기와 지향점이 완전히 반대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은 우타노 쇼고의 <밀실살인게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인륜을 저버린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미쳤다는 것 외엔 별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재의 참신함에도 안쓰러움이 느껴진 반면 '숨어 있는 X'는 추리소설이라면 모름지기 살인사건이 다뤄지는 법이라는 선입견을 반박함으로써 <밀실살인게임>이나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의 살인광을 죄다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추리소설의 지적 쾌감이니 뭐니 떠들지만 실은 그저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데 추리소설을 핑계로 삼는 싸이코에 불과하며, 완전범죄를 저질러야만 추리소설을 잘 쓸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음을 주장하는 듯했다.

 이 마지막 수록작 한 편을 읽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구입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다. 결말까지 산뜻해 아주 좋았고 실제로 작중에 묘사된 추리소설 교양 강좌를 나도 수강 신청하고 싶었다. 나도 이렇게 재밌게 학교를 다녔으면 참 좋았을 텐데. 과거에 딱히 미련이 없는 나로 하여금 학창 시절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추리소설뿐 아니라 일종의 청춘소설로써의 완성도도 뛰어났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작품은 몰라도 마지막 수록작은 꼭 읽었으면 좋겠다. 불리한 전략일 수 있지만, 가장 뛰어난 작품이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게 단편 소설집의 만족도를 크게 향상시키는 것 같다. 덕분에 작가의 묵직한 장편 못지않게 이 책도 좋게 기억에 남게 될 것 같다. 작가의 단편집이 몇 권 더 출간됐던데 그 책들도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 이 책과 같은 완성도이길 바란다. 


만약 누군가 돈 때문에, 혹은 고통을 회피하려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팔아버렸다면......, 자네는 그 사람이 멍청하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그 사람을 ‘멍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네. 하지만 1만 글자 분량의 단편소설로 한 사람의 일생을 묘사해버리는 일처럼 참 재미없다고 생각하겠지. - 122p


증명할 수 없는 추리라는 건 연예면의 가십 기사 같은 거야. 들으면 재미있지만 나하고는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지. - 410p


한 사람의 작가에게는 유명해지고 큰 돈을 버는 것보다 나무통 안에 숨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는 게 더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 4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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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쏘다 반니산문선 4
조지 오웰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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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인상적인 제목의 표제작과 첫 번째로 수록된 '너무나 즐겁던 시절'이 기억에 남는 조지 오웰의 산문집을 읽었다. 조지 오웰의 대표작은 흔히 <1984>와 <동물농장>이 꼽히는데 두 작품 다 안 읽었다. 아니 못 읽었다. 읽다가 흥미를 못 느껴서 이탈했다. 이 산문집을 다 읽은 지금은 두 작품을 다음엔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읽어야겠노라고 벼르고 있다. 일단 그 전에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하는 <버마 시절>부터 먼저 읽어야지. 표제작 '코끼리를 쏘다'처럼 이국적이고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사뭇 기대된다.

 조지 오웰은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 에세이스트로서의 명성도 상당하다는데 대표적인 에세이로 스페인 내전 참전을 바탕으로 쓴 <카탈루냐 찬가>를 들 수 있겠다. 아무튼 이 책엔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짧고 인상적인 제목의 에세이가 총 일곱 편 수록됐다. 위에서도 말했듯 첫 번째로 수록된 '너무나 즐겁던 시절'과 두 번째로 수록됐으면서 표제작이기도 한 '코끼리를 쏘다'가 제일 인상적이었고, 그밖에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와 '영국적 살인의 쇠퇴' 등의 글은 나름대로 흥미로웠지만 제목이 주는 기대감을 충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짧은 분량임에도 오웰의 시선, 절대주의를 혐오하고 목적성을 띈 정치적 글쓰기에 대한 소신을 확실히 엿볼 수 있어 여러모로 충족감을 안겨주는 글들이었다. '나는 왜 쓰는가'는 내가 나중에 <1984>와 <동물농장>까지 읽고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저자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입장과 당시 가졌던 마음가짐이 부분부분 언급돼 해당 작품을 읽고서 그 글을 접하면 더 감명 깊게 읽힐 듯하다. 


 '너무나 즐겁던 시절'은 오웰이 자신의 학창 시절을 통해 아동의 인권에 대한 고찰과 동정심을 드러낸 수준급 에세이다. 길이도 제일 길고 실제로 다루는 에피소드도 다양하고 많아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속물적이고 폭력적인 학교, 지금 기준으론 도저히 빈말로라도 학교라 부르기 힘든 인권 유린의 현장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반면교사 삼아야 하며, 조지 오웰이 그렇듯 보상 심리를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린 시절을 불합리하다 여겼던 만큼 지금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태도로 배풀어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뜻깊은 글이었다. 작가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가감없이 묘사된 폭력 교사나 부자 가문의 자제들의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는데 나도 그렇게 묘사될 만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아주 철저히 반면교사 삼으려고 한다.

 '코끼리를 쏘다'는 오웰이 제국주의 경찰로 버마(지금의 미얀마)에 근무할 당시에 겪었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고 인간적인 에피소드를 다룬 짧은 글이다. 오직 피식민지인들인 버마인들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수 없단 이유로 코끼리를 쏴죽이는 내용인데, 발정난 코끼리라는 심증만 있는 상태에서 소보다 안전해 보이는 눈앞의 코끼리에게 무자비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은 너무 사실적이고 그에 대해 뉘우치거나 훗날 여러 정황 증거로 인해 면죄부를 받는 순간에서도 부끄러워하는 묘사가 일품이었다.


 여담이지만 오웰이 행동하는 지식인이긴 하지만 '코끼리를 쏘다'의 경우 작가가 스무살 초반이었던 지라 그 당시의 감정이 깊이가 얕고 버마인들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 않으며 서스럼없이 '노란 얼굴'이란 표현을 쓰는 등 작가의 명성에 비해 좀 깨는 구간이 몇몇 있다. 그래도 결국 제국주의 시대 영국에서 태어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차별적인 언행을 보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얼마든지 멋있게 포장할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않았던 건 그냥 작가가 에세이 특유의 자기 고백적 성격에 충실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뭐, 그래봤자 '백인의 의무' 같은 개소릴 운운했던 키플링의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이 점 유의하며 읽으면 보다 흥미로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오히려 이런 솔직한 태도가 작가가 그토록 추앙받는 비결이려나? 작가의 소설들도 읽어봐야겠다. 올해가 바로 조지 오웰의 진정한 명성을 확인해볼 시기인 것인가! 새해부터 좋은 글을 읽어 올해 어떤 좋은 책들을 접할지 몹시 설렌다. 


‘내가 저지른 무엇인가‘만이 죄가 아니었다. ‘내게 일어난 무엇인가‘도 죄가 될 수 있었다. - 15p


아이가 정말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기란 몹시 어렵다. 겉으로는 아주 행복해 보이는 아이도 실제로는 드러낼 수 없거나 드러내기 싫은 공포에 시달리고 있을 수 있다. 아이는 일종의 이질적인 수중 세계에 살고 있고, 우리는 기억이나 점술을 통해서만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단서는 우리도 한때는 어린아이였다는 사실뿐이다. - 93p


아이의 약점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시하지도 않는다. 또한 무엇이든 쉽게 믿기 때문에 남들에게 쉽게 휘둘린다. 남들의 농간으로 열등감에 쉽게 빠지고, 이해할 수 없고 가혹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에 쉽게 물든다. - 97~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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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 밀실살인게임 3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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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0


시리즈 전편의 스포일러 있음 


 이 시리즈는 뭐랄까... 1편에서 끝냈어야 하는 게 나았다고 본다. 2편으로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하고 3편은 세계관을 더욱 확장시켰지만 그래도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1편의 다섯 주인공의 캐릭터를 모방한 새로운 다섯 명 살인게임을 즐기는 2편의 설정은 다소 억지스러웠고, 3편에서 1인 5역을 하며 불특정 다수에 문제를 내거나 아예 살인 생중계를 하는 건 참신했지만 아무래도 우려먹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 관념이 마모된 인물들을 통해 인터넷 기술, 익명성의 병폐를 낱낱이 묘사하거나 극한의 악과 더불어 유희를 추구하는 방향성 자체는 그래도 이 시리즈만의 개성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그럼에도 2편과 3편이 1편보다 못한 아우라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데엔 아무래도 유희로 다뤄지는 트릭들의 퀄리티가 그닥이기 때문이 가장 크다. 낭만의 복권이니 뭐니 떠들면서 이유도 목적도 없는 살인이 범람하는데, 그 사고방식 자체도 역겨운데 살인 방식과 해답이 드러나는 연출도 상투적이고 구려서 뒤로 갈수록 빠져들긴커녕 점점 의무적으로 읽게 됐다. 원한이 끓어올라 상대를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동기가 전무한 채 오직 유희 때문에 살인에 손을 대는 인물들을 보노라면 긴장감이고 완전범죄의 성사 여부고 뭐고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히 지루할 수밖에.


 1편의 5인방은 진즉에 무대를 떠났건만 수준 미달인 캐릭터들이 선배의 인기에 편승하는 듯한 분위기도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오리지널' 두광인, 잔갸군, 반도젠 교수, aXe, 044APD는 캐미도 재밌고 생김새나 말투, 그리고 선보이는 트릭도 모두 개성적이라 희대의 살인마들임에도 쉽게 부정하기 힘든 매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2편부터는 그저 어설픈 반복에 전편보다 더 선을 넘은 트릭이 나와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마 2.0 잔갸군이 자신의 작은 체구를 활용해 시체 속에 은신한다는 트릭은 꽤 볼 만했지만, 2.0 두광인은 실망스러웠고 2.0 044APD는 허무했다. 2.0 aXe와 반도젠 교수는 너무 수수했고... 3편의 1인 5역 범인은 미친 정도로 따지면 시리즈 전체에서 으뜸이지만 선사하는 트릭의 기발함이나 완성도는 끽해봐야 중위권 수준을 맴돈다. 개인적으로 원격 살인과 투명 망토 트릭은 좋았지만. 특히 투명 망토 트릭을 얘기하면서 작가가 직접 개입하는 듯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어쩌면 이 얘길 하려고 이 시리즈를 집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트릭이 너무 쉬우면 실망이라 하고 너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뭐라 하고... 우타노 쇼고는 추리소설가의 고충을 작품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토로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은 대체로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같은 사회파 추리소설이다. 어느 정도 본격추리소설적인 요소가 들어가지만 그래도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포착하고 비판하는 작가의 시선을 높이 사왔던 터라 순수하게 트릭을 추구하는 추리소설가로서의 고충은 나름대로 신선하게 읽히기도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살인을 전제로 한 트릭만 다루는 걸까? 작가는 작중 인물들 중 그 누구의 입을 통해서도 이에 대해 고찰하지 않는다. 살인이란 극단적인 범죄와 추리소설적 트릭은 별개의 개념 아닌가? 작가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주제인지 모르겠으나 그에 대한 고찰이 동반하지 않으니 작중 인물 모두가 살인을 저지르고 싶어 안달이 난 참에 밀실살인게임이란 좋은 핑곗거리를 접했다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점이 1편과 후속작 두 편의 평가가 갈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닌가 싶다. 


 게다가 작가가 작품을 통해 뭘 토로하는 건 좋은데 2편과 3편, 분량으로 따지면 전부 합해 700페이지가 넘는데 그 안에 이 시도 저 시도 참 다양하게도 하느라 밀도와 완성도가 1편에 뒤진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는 것도 문제다. 본격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알겠으니 4절은 그만 듣고 싶다. 만약 4편이 나온다면 1편의 5인방의 캐릭터성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등장인물과 시스템을 고안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우려먹은 나머지 두광인의 다스베이더 마스크에 대한 묘사만 나와도 신물이 나올 것 같으니 말이다.

 마니악스가 출간된 지 어느새 10년이 훌쩍 넘었고 4편이 나올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우타노 쇼고의 신작 소식 자체도 안 들린다. 추리소설에 관한 아이디어와 애정이 넘치는 작가인 만큼 <벚꽃~>이나 '밀실살인게임' 시리즈 같은 작가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을 집필하기를 팬의 입장에서 간절히 기도한다. 

이 행위는 못된 장난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저 행위는 무거운 범죄다. 그렇게 선을 긋는 기준은 뭐지? 개인의 감각이야. 사람마다 다르다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해 약국 앞의 개구리 마스코트를 훔쳐가는 건 괜찮지만, 그 마스코트를 창문에 집어던져서 유리를 깨면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또 어떤 사람은 유리를 갠 것까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깨진 틈으로 안에 들어가서 금전등록기를 털면 안 된다고 선을 그을 거야.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안에 들어가서 화장실을 빌리거나 물을 마시는 정도는 괜찮다고 여길 수도 있고. 어차피 보험에 들었을 거라며 영양 드링크나 위장약을 실례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

약국에서 잔업하던 점원을 때려죽이고 ‘잔업 수당 늘리려고 일하지 마라.ㅋㅋ‘ 라고 트윗하는 녀석이 있다고? - 196~1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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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래빗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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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4


 <화이트 래빗>은 이사카 코타로가 간만에 초심으로 돌아간 느낌으로 쓴 범죄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러시 라이프> 같은 초창기 작품에 자주 출연한 도둑 구로사와가 오랜만에 주역으로 등장하고, 때마침 토끼의 해가 얼마 남지 않았던 연말에 토끼와 관련된 소설을 읽어서 묘하게 반가웠던 소설이다. 게다가 소설의 문체가 내가 좋아하는 <레 미제라블>을 패러디한 문체인 터라 그 점도 인상적이었다. 옛스러운 걸 넘어 가끔은 촌스럽게도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 점을 노리고 쓴 것 같아 나중엔 순수하게 즐기면서 읽게 됐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즐거움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철학적인 요소가 다분했던 다른 작품에 비해 트릭과 반전에 공을 들인 작품이라 작가 특유의 퍼즐식 구성을 기대했다면 만족을, 반대로 내적 깊이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싱거울 수 있다. <레 미제라블>을 비롯해, 오리온자리, 토끼 등 여러 소재가 다뤄지지만 의미 있게 활용되기보다 그때그때마다 이야길 원활하게 풀어나갈 소도구로 기능할 뿐이다. 이 소재들에 얽힌 잡설 또한 가볍게 읽고 넘어가면 됐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에선 짧게 언급되는 잡설도 놓쳐선 안 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터라 이런 가벼움이 2% 부족한 아쉬움을 자아냈다.


 재밌고 유쾌했던 작품이지만 재독하거나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평하기엔 약간 주저된다. 주역인 구로사와라는 캐릭터가 하도 오랜만이라 외려 낯설었고 작가의 다른 캐릭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이라 구로사와가 출연한 작품이라며 소장할 생각까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상술했듯 작가가 철학적 깊이를 크게 노리지 않고 집필된 작품이라 다시 곱씹을 만한 얘깃거리가 사실상 없었다. 서사도 트릭의 놀라움에 비해 꽤 단순해서 재밌었지만 두 번이나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다.

 작품의 핵심 트릭은 분명 후반부에 그 내막이 밝혀졌을 때 놀랍긴 했지만 놀라움을 제외하고 봤을 때 대단한 의미가 있었나 싶다. 뭐하러 이리 복잡하게 썼을까 하고 의문이 남자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훌륭한 트릭이다. 하지만 오직 놀라움과 즐거움에 주목했지 작품 내적으로 긴밀하게 얽혀있는, 이른바 그 트릭을 써야만 주제의식이 살아난다는 감탄이 나오지 않으니 엔터테인먼트 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감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란 정체성이 작품의 단점이라 얘기할 순 없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이라 나도 모르게 까다롭기 그지없는 잣대를 들이대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깔 만한 작품이 아닌데... 연말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작중 활극이나 드라마의 묘미가 스며들지 못했던 것 같다. 작가가 바라듯 그저 즐기며 읽으면 그만인 것을.

 그래서 나중에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내가 작가의 팬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읽으면 뭔가 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만약 다시 읽는다면 <레 미제라블>을 읽은 다음에 읽어보는 게 좋겠다. 그럼 등장인물들의 수다나 인용이 더 반가우면서 감동적으로 읽힐는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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