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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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요시다 슈이치 작가 스스로 감히 대표작으로 단언할 만한 작품이며 나 역시 10년 전에 읽었을 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작가는 아직도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 여길까? 나는 올해 1월 초에 이 작품을 다시 펼쳤지만 다 읽기까지 자그마치 2개월이 넘게 걸렸다. 여러모로 진행도 더뎠고 더 이상은 새로울 게 없고, 또 무엇보다 사건의 진상을 훤히 알고 있으니 이 작품의 사유를 다시 읽어내려가는 것이 더없이 지루하게 느껴진 탓이다. 이런 감상은 주로 트릭과 반전을 내세운 추리소설을 다시 읽을 때 들곤 하는데, 범죄를 다뤘을 뿐 추리소설이 아닌 작품인데 사유가 지루하다니, 한 번은 끊고 다시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안쓰러우면서 환멸을 느끼게도 하는 입체성이 '가관'인 소설이었다. 평소라면 압권이라 표현했겠지만 이번엔 가관이라 표현하고 싶다. 사실상 피해자의 아버지를 제외하면 다들 너무 이해불가할 만큼 돌발적인 언행을 저지르는데 작가는 그에 대해 충분한 분량을 할애해 묘사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라고 무마하는 느낌이었는데, 도망친 것도 무고죄를 저지르려는 것도 자수하려다 만류하거나 도피를 하는 것도 외로움을 느껴 서로에게 다가갔다가 배신하는 전개 등 일련의 전개나 묘사가 완급 조절이 들쑥날쑥한 터라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됐다.


 조금이라도 딴생각을 하면 전개를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예측불허했는데, 좋게 말하면 그만큼 등장인물들 하는 짓이 입체적인 걸 넘어 픽션치곤 대단히 현실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악인'은, 적어도 우리 상식으로 바라보면 꼭 법의 테두리 안팎의 여부로 깔끔하게 판별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연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안에서 이리저리 가치관을 흔들어대는 터라 주제의식이나 내용이나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전에 읽었을 땐 외로운 과거사를 가진 유이치가 가여웠고 경박한 게이고가 역겨웠고 요시노는 살해당한 건 불쌍하지만 일종의 자업자득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작품의 청승 떠는 것 같은 시선이 부담없이 흡수돼 무려 10점이나 줬으나 지금은 오히려 이 모든 캐릭터들의 언행이 불편하게만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유이치와 함께 도피 행각을 한 미쓰요의 경우 그녀의 과거를 내 기준에선 작가가 충분히 다뤘다고 느껴지지 않아서 모든 행동이 다소 작위적으로 다가왔고 때문에 최후반부의 대사도 아무런 여운을 안겨주지 못했다. 여운은커녕 약간 오그라들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평이려나.


 과거와 달리 내가 이 캐릭터들보다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인 걸까? 내가 다 포용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으며 감정적으로 행동하니 공감이나 동정보단 차갑게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반면교사로 삼게 됐다. 훗날 두 번째 읽고서 이렇게나 박하게 평하리라곤 10년 전엔 정말 상상도 못했다...

 이 작가의 <퍼레이드>와 <사요나라 사요나라>, 그리고 <요노스케 이야기>와 함께 정말 좋아한 작품인데 이 작품들도 지금 다시 읽으면 별로일까? 작가의 젊은 감각과 통찰력을 좋아했는데 이번엔 유독 젊기보단 얕게 느껴졌다. 한때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으나 나도 성향이 많이 바뀌었는지 아무리 두 번째 읽은 작품이라지만 인상이 많이 달라져 일종의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 영원한 팬심이란 없는 모양이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 439p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 4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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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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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아마 이 작품이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가장 가혹한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출판사 소개 문구에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도시 오슬로'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작품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시리즈 첫 작품인 <박쥐>에서부터 해리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픽픽 죽어나갔지만 이 작품은... 이 시리즈에 대한 애정이 더는 예전만 같지도 않고 바로 전작인 <목마름>을 읽은 게 벌써 3년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초반부터 단숨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 몰입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쯤 되면 작가가 해리를 괴롭히기 위해 작위적으로 사건을 일으킨다는 생각이 들 만큼 비슷한 유형의 비극을 시리즈 내내 다루니 알게 모르게 식상해져 충격이 오래 가지 않은 것이다. 또 해리가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유력 용의자들이 독자로 하여금 혼란을 안겨줄 만큼 유력 용의자라기엔 어딘지 모양 빠지는 작자들이라 그리 긴장감이 일지 않았다. 아무리 허탕을 치는 거라지만, 나중에 무고하다고 밝혀지더라도 용의자로 등장을 한다면 어느 정도 그럴싸한 모습이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선 긴장감을 영 주지 못했는데... 전엔 안 그랬잖아요, 작가님?


 오히려 수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힘든 해리의 골때리는 상황이나 수사를 거듭할수록 해리가 해리 스스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더 압권이었는데 이게 굉장히 느릿느릿 진행되기에 인내심이 많이 요구된다. 내가 봤을 때 670페이지는 확실히 과했고 개인적으로 음악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잡담은 분량이 너무 많이 할애된 감이 있으며 어쩐지 유치했다.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긴 하지만 이마저도 추리소설의 소품으로썬 공정성이 다소 결여돼 읽기 무가치한 부분이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허리 부분은 이래저래 불안정했지만 머리와 꼬리는 훌륭했다. 초반의 몰입도는 아까 말했듯 대단했고 결말은 진짜 가혹하고 기구하기 이를 데 없어 더없이 해리가 불쌍했다. 자업자득이라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독자인 내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치가 떨릴 정도인데 당사자는 어떨까? 시리즈가 장기화되면서 내심 '박수 칠 때 떠나라'는 생각이 들던 와중에 던진 초강수를 보고 작가에게 감탄... 보단 독하단 생각이 앞섰다. 후속작이 노르웨이에선 출간됐다던데 벌써부터 걱정이군. 해리가 또 얼마나 산전수전을 겪을는지 원.


 워낙에 중간 부분이 지루해 이제 이번 12편을 마지막으로 '해리 홀레' 시리즈에 작별을 고해야 하나 싶었지만 충격의 결말을 접하니 아직 시리즈의 명운은 남아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편까지 이어질까 궁금하면서 걱정도 되는데... 문득 1편부터 다시 읽고 싶어졌다. 내가 <스노우맨>과 <박쥐>를 10년 전 군대에서 처음 읽었다. 그때 노르웨이란 나라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전역하고 나서 돈을 모은 다음 <스노우맨>을 들고 노르웨이를 여행했다. 그 노르웨이 여행은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라 생각한다. 반대로 가장 아쉬운 선택 중 하나는 노르웨이를 고작 열흘만 여행을 갔던 것이고.

 아무튼 그런 내게 있어 이 시리즈는 누가 뭐라 해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시리즈다. 그러니 끝까지 읽고 싶다. 괜히 박수 칠 때를 놓쳐 흐지부지 끝나는 건 바라지 않는다. 후속작이 나오기 전까지 전작들로 복습을 해야지. 점점 전작의 내용이 후속작에 중요하게 작용하니 허투루 읽으면 나만 손해인 것 같다. 당장 이 작품만 해도 <목마름>의 어떤 전개가 아주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으니까. 언제가 될는지 모르지만 후속작이 출간하는 그날까지 시리즈의 방대한 세계관을 다시금 빠져들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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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가족 1
사토 아이코 지음, 곽미경 옮김 / 강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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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 작품의 원제는 '바람의 행방'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추상적인 제목이다 보니 '도쿄 가족'으로 바꿔 출간한 듯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도쿄 가족은 다소 평범하니 내 생각엔 절충안으로 '가족의 행방'으로 국내에 출간됐으면 어땠을까 싶다. 뿔뿔이 흩어지는 작중 요시미네 가족 구성원, 좁힐 수 없는 세대 차이로 인해 가까운 듯 멀어져가며 다시 가족이란 이름 아래 모이는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었을 것 같은데.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을 뽐내는 주인공들, 시대의 문제와 세대별 인물들의 심리를 어색하지 않게 묘사하는 작가의 통찰력과 필력, 그리고 이 인물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인간미 넘치는 시선은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읽음에도 빛이 바래지긴커녕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10여년 전에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읽으니 더 좋았던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나오키상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았겠는걸? 아, 작품의 저자 사토 아이코는 이미 1969에 나오키상을 수상한 베테랑 중에 베테랑 작가다. 1923년생이면 살아계시다면 올해로 100년은 넘게 사신 걸 텐데...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사실상 이 작품 하나밖에 없고 - <마흔, 이렇게 나이들어도 괜찮다>라는 자기계발서가 하나 있다... - 인지도가 워낙 없으니 앞으로도 작품을 접할 일이 요원해 보인다.


 부모가 이혼한 요시미가 그 자신도 알게 모르게 위축돼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 정말 남일 같지 않았던 것을 시작으로 교실에 벌어지는 왕따 같은 문제에 둔하고 외면하려는 쓰레기 같은 교사 아오야기, 왕따 주도자인 가노의 역겹고도 일그러운 언행, 요시미의 삼촌인 고지와 할아버지 조타로가 자신들의 직업인 교사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 등 내가 감정이입하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요소가 한둘이 아니라서 적지 않은 분량인데다 이미 접한 내용임에도 마침 처음 읽듯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겼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 이를 테면 왕따라든가 학력 만능 사회와 같은 분위기는 결코 하루 아침에 해결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과연 이 소설이 나름대로라도 답을 낼 수 있을 것인지 기대하며 읽어내려갔다.

 작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 등 여러 세대의 다양한 입장에 놓인 여러 인물의 심리를 자연스럽고도 능수능란하게 그려내지만 역시 작가 자신과 가장 비슷한 또래인 노부코와 그녀의 친구들의 이야기에서 두각을 보인다. 그전까지 노부코는 조타로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면서 정작 조타로가 홀몸으로 시골에서 잘 살아가고 정작 자신은 혼자인 삶을 기대만큼 못 누리자 열폭한다거나, 아니면 아들과 손자와의 대화에서 겉돌거나 지레짐작하며 호들갑을 떨면서 새로운 며느리인 지카를 구박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 며느리 미호와 만났을 때 뒷담화를 하는 등 이래저래 호감형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이 본격적으로 조명되자 노부코 세대에 속하는 여성 전체에 형언할 수 없는 동정심이 일었다. 남편에 복종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미덕인 시대를 살아온 탓에 습성이 그쪽으로 고정된 것이나 그럼에도 가족 내지는 삶에 대한 의지만은 꺾이지 않은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 세대의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진정으로 가까워지긴 힘들겠지만 내 윗윗세대의 고충을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노부코 얘길 했으니 조타로 얘길 빼놓을 수 없지.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걸작'으로, 이 시대에 다시 환생한 돈키호테이자 동시에 시대를 역행하는 '사나이'다. 일본은 전쟁에 패해선 안 됐다거나 여자는 그래서 안 돼 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철밥통이지만 그의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고 거친 교육관이나 인생관엔 철학과 인간애가 있어 마냥 경멸하기엔 망설여지는 캐릭터였다. 개인적으론 아까 위에 언급한 쓰레기 같은 교사 아오야기나 왕따 주도자인 가노가 조타로에게 참교육을 당하는 전개를 기대했는데 그런 사이다 전개는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그런 전개는 조타로 못지않게 의협심이 강한 지카에 의해 자주 연출됐다. 뒷일을 좀스럽고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 말과 행동이 먼저 나가는 조타로와 지카는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많은 반작용을 낳지만, 오늘날 세상이 지나치게 복잡해진 걸 생각하면 이처럼 단순한 인물들의 모습은 큰 울림을 준다. 그런 단순함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의 행방을 한 곳으로 집결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요시미의 새엄마인 지카가 일반적인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계모상과는 아주 상반되게 철딱서니 없는 캐릭터인 것도 매력적이었고 오히려 요시미의 아버지 겐이치를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한심하게 묘사한 것도 재밌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아버지가 아오야기나 가노보다 더 답이 없는 인물인데 이런 하찮은 남자가 잘도 요시미의 엄마인 미호와 결혼한 것이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의문인 지점일 정도다. 센스 있는 전처를 그리워하거나 손이 많이 가는 후처 때문에 고부갈등이 생기는 것을 지겨워하는 내면 묘사가 어찌나 한숨을 유발하던지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다. 이렇게 자기 철학이고 줏대도 없는 사람이 제일 문제다. 조타로가 아들한테 실망해 시골로 간 것도 이해가 간다. 조타로가 가족을 결집시키는 가장이라면 겐이치는 정반대다.


 요시미의 친엄마인 미호가 이혼 후에 겪는 사랑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가장 이질적인 이야기였다. 그녀는 요시미와 모자 관계라는 끈은 이어져 있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앞으로 요시미네 가족과 인연은 없을 것이니 선이 그어진 듯 전혀 다른 이야기가 풀어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미호의 포지션이 참 현실적으로 묘사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아직까지 서양만큼 가족 관계를 쿨한 듯 따뜻하게 선을 지켜나가는 건 참 어색한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허물이 없는 관계를 지향하기에 이처럼 남인 듯 남이 아닌 관계, 결국 미호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엔 함께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커리어 우먼으로 잘 살아갈 것이고 요시미와 모자관계는 전보다 소원해진다 하더라도 결코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설마 그 이후에도 이상한 남자한테 휘둘리는 건 아니겠지? 만약 후속작이 나온다면 거기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궁금하다. 물론 다른 캐릭터들도.

 찾아보니 2022년에 작가의 작품 중에 <凪の光景>이라는 작품이 출간했는데 뜻이 '잔잔한 바다의 광경'이라고 한다. 설마 후속작인 걸까? 본작품에서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대신에 미래 세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낸 만큼 후속작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후속작이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 순 있지만 이 작가의 필력이라면 그런 일은 없으리라 단언한다. 딱 한 작품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이 책만 봐도 내공을 알 수 있어서 추후에 소개될 작가의 다른 책도 기대가 된다. 과연 더 소개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로 고생한 걸 비교해봤자 별 도리 없어. 알아달라고 하는 쪽이 억지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 말은 하고 싶어. 너희들이 생각하는 고생이랑 우리가 겪어온 고생은 다르다고.
그런 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서로 알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지. 기대를 버리는 거야. 철저히 고독해지는 거야. 결국 악착같이 살아야 돼. - 2권 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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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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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기욤 뮈소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작품에 한해선 가장 인상적이고 여운이 짙은 작품이다. 결말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결이 달라 통속적인 소재와 언제 읽어도 구린 표현력, 불필요한 장면 등 거슬리는 점이 많았음에도 계속 곱씹어보게 된다. 작가가 데뷔작에 이어서 쓴 두 번째 작품으로 교통사고를 당하고 사경을 헤맨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에 대한 통찰이 깃든 덕분에 이런 남다른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작가의 단점은 고스란히 있어서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긴 애매하다. 가령 네이선이 자신을 협박하는 남자를 떨쳐내는 장면이라든가 캔디스를 구하기 위해 접근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작가의 필력은 유치하기 그지없어 과연 이 사람에게 소설가라는 직함으로 불러도 되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망설여질 정도다. 이 작가의 문체가 '영상 같은 묘사 방식'으로 주로 수식되곤 하는데 내가 봤을 때 이런 수식어는 문장력이 떨어지는 소설가한테 붙여지는 일종의 조롱이라 생각한다. 소설엔 소설다운 영상엔 영상다운 표현 방식이 있고 각 분야가 다른 분야의 형식을 지나치게 쫓으면 졸작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 나도 내 말이 좀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듣자하니 기욤 뮈소는 여전히 1년에 한 권씩 꾸준히 신간을 집필하고 있다는데, 이 작가는 그럼에도 독자들 사이에서 '처음 읽은 작품이 가장 좋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것도 다작을 하는 소설가에게 그리 좋은 얘기는 아닌 듯하다. 쉽진 않겠지만 신작이 제일 좋아야지, 처음 읽은 작품이 좋았다는 건 결국 자가복제라는 얘기 아닌가?

 그렇다면 내 경우는 어떨까? 나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로 기욤 뮈소를 처음 접했지만 이 작품 <그 후에>가 더 좋다. 의사이자 메신저인 가렛 굿리치의 캐릭터성이 마음에 들어서, 죽음에 대해 책임감 있게 얘기하는 작가의 태도가 생각 이상으로 진지해서, 그리고 그 주제의식이 녹아있는 반전이 굉장히 훌륭하기 때문이다.


 일단 쓴소리 먼저 하겠다. 난 이 작품이 출판사의 광고처럼 <식스 센스> 수준의 반전을 선보였다는 말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복선이 부족해 뜬금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과 출판사의 호들갑만 빼면 참 좋은 반전이라 생각한다. 반전이란 주인공의 믿음이 송두리째 부정당해야 좋은 반전이란 말이 있는데 이 작품의 반전이 그 말에 제대로 해당된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자기 삶의 실수와 매듭을 풀어낸 네이선에게 닥친 예상치 못한 장애물과 그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지 열린 결말로 처리한 작가의 선택은 숱한 단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고갤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슬프고 비정한 결말이지만 그래서 로맨스라는 본작품의 성격을 극대화시키지 않았는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로맨스는 해피엔딩보단 새드엔딩인 편이 더 명작으로 남는 것 같다.

 불필요하고 반복적인 장면과 과거 회상은 덜어내 분량을 줄이고, 특히 초반부의 지루한 진입장벽만 낮춘다면 훨씬 좋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물론 이대로도 괜찮은 작품이다. 나는 많이 투덜거리긴 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조차 사랑할 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나 역시 사경을 헤매본 경험이 있었더라면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고. 작품이란 건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면 독자마다 감상이 통일되지 않고 갑론을박을 낳기 마련이다. 난 <그 후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란 반열에 든, 그야말로 기욤 뮈소의 대표작이라 본다. 작가도 실제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란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까? 신작으로. 갑자기 이 작가의 신작들이 궁금해지는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의사로서 절망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은......저 환자들을 낫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절망을 느끼는지를 묻고 있는 거요?
아니, 도리어 그 반대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더 의욕이 생기지. 병을 낫게 할 수 없다고 치료를 못하는 건 아니오.(중략) 우리는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에 동행이 되어 주는 일을 하고 있소. 사람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것보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길에 동반자가 되어주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 103~1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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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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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최근 헨닝 망켈의 작품을 읽고 북유럽 추리소설에 다시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몇 권 더 읽어볼까 찾아보던 중 북유럽 추리소설계의 전설적인 작품이라는 <로재나>가 눈에 띄었다. 아... 예전에 읽다 중도 이탈했던 작품이었다. 사실적인 걸 넘어 지지부진한 형사들의 지난한 범인 추적의 과정이 너무나 매력 없게 읽힌 탓에 숱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덮을 수밖에 없었다. 벌써 7년 전 일이다.

 작년에 마르틴 베크 시리즈 10권이 국내에 완간됐다는 소식은 들었다. 10권을 완간하기까지 6~7년 걸린 걸 보면 후속작에 대한 독자들의 성원이 마냥 열광적이었던 것 같진 않다. 물론 다른 문제 때문이었을 순 있지. 어쨌든 그래도 전권이 완간된 걸 보면 이 클래식한 추리소설이 우리나라 독자들한테도 자신의 매력을 어느 정도 어필하는 데에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비록 중도 이탈하긴 했어도 7년 전 일이고 북유럽 추리소설에 다시 관심이 가고 있던 차에 큰맘 먹고 다시 펼쳐봤다. 과연 나는 10권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일단 1권인 <로재나>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역시나 지루하고 요즘 추리소설에 비하면 극적인 맛이 덜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년 전에 집필된 작품인 만큼 이해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이 작품 이전엔 북유럽 추리소설 또한 영국이나 일본처럼 수수께끼 풀이에 중점을 뒀지만 <로재나>를 기점으로 현실적인 경찰 조직 묘사, 사회 문제 비판의 색채를 띈 작품이 많이 나오게 됐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을 생각이다. 역사적으로 의의가 대단한 작품인 건 알겠는데 역사는 역사일 뿐 완성도는 어땠는지 살펴보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추천사에서 헨닝 망켈은 이 작품의 특징으로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이야기라 언급했다. 하나의 살인사건이 해결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시간과 형사들의 고생, 헛발질이 필요하단 걸 강조한 말이다. 누가 소설가 아니랄까봐 참 잘 포장했는데 이 말을 온전히 공감하는 독자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어떤 독자들은 치명적인 단점으로, 어떤 사람들은 결말에서 범인을 잡을 때 쾌감을 더해주는 서사적 장치라 여길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헨닝 망켈이 자신이 처음 읽던 시기에 느낀 강렬함에 아직 사로잡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클래식은 클래식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의의가 있고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 나로선 이러한 서두에서의 언급은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결국 호들갑이지 않았나 하고 중얼거렸다. 현실적인 수사 묘사, 사회 비판, 그래서 뭐? <로재나>가 선구적인 작품일 순 있어도 오늘날에도 과거에 처음 출간됐을 때와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말은 그렇게 해도 부분적으로 흥미로운 요소가 산재한 작품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다. 피해자의 정체가 밝혀지던 대목, 피해자가 생전에 다소 문란했던 사생활이 밝혀짐에도 형사들끼리 저급하게 뒷담화를 까지 않았던 것, 주인공 마르틴 베크가 현실에 있을 법한 형사라 괜히 더 이입이 가능했던 것, 그가 용의자를 심문하거나 최후반부에 드러나는 범인의 똘끼, 그 범인을 취조할 때 전혀 말려들지 않고 프로패셔널하게 일처리를 하는 마르틴 베크 등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많았다. 지금 기준에선 화려함이라곤 없지만 정석적인 구조에 탄탄한 마무리가 여운을 준 작품이었다.


 요약하자면 출판사와 띠지, 서두와 해설의 호들갑을 제외하고 본다면 편안하게 감상이 가능한 작품이었다. 60년대 스웨덴의 모습이나 첨단 과학 없이 노가다적인 방식으로 범인을 잡아낸 형사들의 고군분투는 마치 일일 드라마를 보듯 묘하게 빠져들게 만드는 지점이 있어 마지막 장까지 읽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과연 나는 10권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일단은 2권인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와 시리즈 최고작이라는 <웃는 경관>은 읽어볼 생각이다. <웃는 경관>은 명성도 명성인데 제목이 궁금해서라도 읽을 것 같다. 또 모르지. 그 작품까지 읽고서 완전히 이 시리즈의 팬이 돼버려서 10권까지 빠르게 독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재나>를 재평가할 일은 적어도 지금으로선 요원해 보인다. 물론 이것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P.S 이 책의 저자 두 명의 원래 직업은 기자였다고 한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도 기자였는데, 그러고 보니 스웨덴, 아니 전세계의 추리소설가들 중에 기자였다가 추리소설가로 전직하는 경우가 은근히 흔한 편인 것 같다. 요코야마 히데오도 떠오르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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