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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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어디까지 실화고 어디부터 픽션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본인의 경험을 유려하고 문학적으로 풀어넣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일이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는 작가지망생의 답답한 심정이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문학으로 승화됐다는 것인데,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이긴 하나 글의 진솔함과 주인공의 직업 덕분에 조금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한국어 수업' 시리즈 1편에선 미국으로 이민을 간 주인공이 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2편에선 한국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소설을 가르친다.

 그러고 보니 장르 문학이 아닌 보통의 한국 문학에서 이렇게 시리즈물이 나온 경우가 참 드물지 않나 싶다. 동일한 주인공이 두 편에 걸쳐 성장하는 이야기가 제법 신선했는데 각각의 작품이 꼭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것이 아닌 만큼 개별적인 완성도가 출중한 것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지점이었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를 볼 때도 느끼지만 요새 나오는 시리즈물은 너무 후속작을 위한 예고편으로만 기능해 그 점이 늘 불만이어서 하는 말이다.


 동일한 주인공이 나오고 주인공이 처한 환경도 나라만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으나 1편과 2편은 꽤 다른 양상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1편은 이방인으로서 자신에게 익숙했던 모국어인 한국어부터 자신의 과거의 삶의 족적마저 어색해지고 현실감이 떨어져가는 묘한 이야기를 전달했다면 2편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하며 조금은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며 여운을 안겨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2편은 한국이 배경인 만큼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익숙하게 다가와 친국하게 읽혀 신선함은 덜했던 반면 1편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의 고충'처럼 내가 쉽사리 경험하기 힘든 독특한 직업 세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어 훨씬 흥미로웠다.

 이 두 권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 역시 한 편의 소설을 완결을 짓고자 고군분투했는데 그렇다 보니 주인공의 고뇌나 희로애락에 적잖이 공감이 갔다. 좀 더 눈에 명확히 그려지면서 건실적인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꿈을 쫓기엔 이젠 시기적으로 너무 뒤늦은 것 아닌가 하는 주인공의 고민은 대다수의 작가 지망생, 예술가 지망생에겐 공감을 유발하는 대목일 것이다. 이처럼 비슷한 처지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은 고민을 하니 작가는 자신의 고민을 자신만의 어법으로 독특하게 풀어내는 것이 관건이었을 텐데 작가는 이 부분을 정면돌파로 수월하게 해결한다.


 때론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만 픽션답게 약간의 기승전결의 틀만 갖춘다면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문학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평범한 인생이란 없는 것 같고 어떤 시선으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느냐에 따라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덕분에 나도 소설을 쓸 때 적잖이 힌트를 얻었다. 문학을 너무 만만하게 여겨서도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여겨서 그리 전전긍긍했었나 싶기도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는데, 나도 내 삶을 너무 경시하며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을 쫓지 않았는지 반성도 해봤고... <초급 한국어>에서 주인공이 한국어를 깊게 들여보자 낯설음과 어려움을 느낀 것처럼 그 책을 다 읽은 뒤 나도 내 지나온 삶이 점점 그렇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가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내 읽는 내내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오랜만에 공감 가는 이야기를 읽어서 반가웠다. 학교 다닐 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학교 과제로도 비슷한 이야길 많이 접했는데 시간이 지나 오랜만에 이런 창작물을 접하니 감회가 새롭다. 후속작으로 '고급 한국어'...가 아니라 '실전 한국어'가 나올 수도 있다는데(ㅋ) 꼭 나왔으면 좋겠다. 그 작품에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지, 그리고 그 작품을 읽을 때 내 삶은 어떤 변화를 맞이했을지 몹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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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
찬호께이.미스터 펫 지음, 강초아 옮김 / 알마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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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8월에 대만에 가는 김에 대만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고 싶어졌는데 문득 이 소설이 떠올라 다시 읽었다. 이 작품은 홍콩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와 대만 추리소설가 미스터 펫이 공동집필한 SF 소설집으로 처음 접하신 분들은 제목의 의미며 작가들의 국적이나 장르까지도 도대체 무슨 내용일는지 짐작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중화권 작가들이 쓴 글임에도 작중 배경은 미국과 일본이라 더욱 정체불명의 작품이라 여겨질 수 있겠다.

 <S.T.E.P.>엔 SF적 상상력을 두 추리소설가가 추리소설다운 집요함으로 풀어낸 소설들이 수록됐다. 총 4편의 중장편이 수록됐으며 두 작가가 두 편씩 담당했는데 두 작가 다 전공이 컴퓨터 쪽이라 원래부터 SF 소설을 집필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소재 다루는 데 능숙하고 심지어 고증이 탄탄하단 느낌마저 든다. 생각이 이상으로 각잡고 집필해 중반부에 컴퓨터 인공지능의 원리를 기술하는 대목은 나 같은 문과생에겐 약간 버겁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인공지능 시스템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벌어질 윤리적 딜레마와 미스터리한 사건들, 그리고 치명적 오류까지 그려내는 등 심도 있고 입체적인 이야기가 펼쳐져 끝까지 몰입도와 만족감이 증폭됐다.


 대다수의 독자들이나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사람들도 그렇고 나 역시도 미스터 펫보다 찬호께이의 작품에 더 눈길이 갔다. 찬호께이가 묘사하는 미국이 배경으로써 그럴싸하게 다가왔고 실제로 이 작가가 다루는 작중 사건이 이 세계관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에 비해 미스터 펫이 묘사한 일본은 작가의 필명처럼 좋게 말해 이색적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작위적으로 읽혔고 다루는 사건도 이야기의 본론에서 벗어난 별난 형식의 서사인 경우가 많아 어느 순간부터 정이 가지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 미래를 예측하는 사보타주 시스템을 다룬 본작에서 미스터 펫 작가가 선보인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의미 있고 재치 넘치는 편이었지만 솔직히 주인공 두 캐릭터의 매력이나 캐미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박한 평가를 내렸을 듯하다.

 반대로 찬호께이는 SF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초반엔 SF인 것을 강조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몰입을 시키다가 이 모든 것이 시스템의 맹점과 기계에 의존한 인간이 범하는 오류로 인해 터무니 없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등 SF다운 주제의식을 강렬하게 어필하는 것에 성공한다. 시뮬레이션, 인공지능, 평행세계, 다중우주 같은 설정은 요즘 세상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소재지만 추리소설의 대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서사적 디테일을 자신이 대학생 때 전공한 컴퓨터 공학에 접목시키니 금상첨화, 여호첨익이 따로 없었다. 이보다 설득력 있고 진중한 SF 스릴러는 흔치 않은데 6년 전에 읽었을 때나 지금 다시 읽었을 때나 똑같이 감탄했다.


 책의 제목은 각 수록작의 알파벳 앞글자를 엮은 것이기도 하지만 작중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미래에선 인간과 기계가 이인삼각으로 걸음을 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오는데 이 문장에서 작품의 제목이 비롯됐다고 생각된다. 이 주제의식도 사실 뻔하지만 표현이 너무 절묘하고 속된 말로 아다리가 맞아 이야기 전체가 강렬하게 가슴에 박힌다. 늘 느끼지만 난 이렇게 재치 넘치는 제목에 약하다. 뭐가 먼저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STEP이란 단어를 성사시키려고 각 작품의 제목 첫 글자에 해당 알파벳을 넣으려고 머릴 굴리는 작가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참 많이 읽었는데 호러나 청춘소설보다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컴퓨터 기술을 극한으로 다룬 SF 장르에 훨씬 재능이 많은 것 같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 중에 읽지 않은 건 동화추리소설 <마술피리> 뿐인데 그 작품은 어떨는지 기대되면서도 살짝 걱정이다. 실망하면 어쩌지?

 미스터 펫은 아직 이 책에서밖에 접하지 못했는데 국내에서 두 권이 더 출간됐다. 두 작품 다 왠지 내 취향일 것 같지 않지만 한 권 골라 도전해볼 생각이다. 찬호께이만큼은 아니지만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듯해 공동집필이 아닌 단독집필에서 그 아이디어가 어떻게 빛을 발할 것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단독집필한 작품이 훨씬 좋을 수도 있지.


각 수록작별 한줄 감상 (스포일러 포함)


'사보타주' - 나는 추리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항상 '이게 현실이 아니라 다행이다' 란 말을 하는데 이 말을 추리소설 등장인물을 통해 들어보긴 처음인 것 같다.

'T&E' - 모든 것이 다 좋은 작품이었는데, 이게 결국 정사가 아니란 게 아쉽다. 열린 결말을 감당하지 못해 그런 노선으로 변경한 건가?

'E PLURIBUS UNUM' - 반성과 복기 없는 추리는 안 하느니만도 못하다. 아니, 가장 위험한 짓이다.

'PRPCESS SYNCHRONIZATION' - 읽을 땐 재밌었는데 일주일 지나니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을 인위적으로 심을 수 있다면 반대로 빼는 것도 가능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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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욜로욜로 시리즈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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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는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에 등장하는 개의 정체를 상상해보는 가상 역사 소설, 이른바 팩션(fiction과 fact의 합성어)이다. 스페인도 아닌 오스트리아 국적의 작가 라헐 판 코에이는 이 개의 정체에 대해 아주 참신한 해석을 내놓는다. 불구의 몸을 가진 장애인인 바르톨로메를 내세우면서 독자로 하여금 당시 스페인의 극단적인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당시 스페인에서 장애인이란 신도 외면한 사람들이란 인식이 있어 날 때부터 죄를 짊어진 존재, 아무렇게나 하대해도 상관이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간주했으며 장애인 자녀의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숨겨야 하는 처지에 시달렸다. 아니, 차라리 사랑이라도 하면 다행이지, 이 작품 속 바르톨로메의 아버지 후안처럼 장애인 자식을 아예 없는 자식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궁정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몇몇 그림에서 알 수 있듯 장애인이나 흑인 노예라 할 지라도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대우와 존경을 받아가며 살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은 당연히 왕가의 선택을 말하는데 주로 두 가지 기준으로 선택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재능, 가령 그림이나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파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왕가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 작품에선 아직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사랑'을 받는 난쟁이들, 시녀들, 그리고 공주의 명으로 인해 인간개가 된 바르톨로메가 해당된다. 바르톨로메는 곱사등이의 몸 그대로 공주를 알현할 순 없고 개로 분장해야 했다. 아무리 불구의 몸이고 친부에게도 외면당한 존재이며 한 나라의 공주의 명이라지만 친부의 손에 직접 몸이 씻겨져 공주에게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는 과정은 절로 눈살 찌뿌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마르가리타 공주 같은 왕가의 사람들을 마냥 악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마르가리타 공주의 경우 왕가의 피를 물려받았다 뿐이지 아직 부모의 관심이나 자기 또래의 친구가 필요한 철부지 아이인데 왕족이란 이유로 체통을 지켜야 해서 남들 모르게 외롭게 자랐고 그 탓에 어딘지 괴팍한 취향이 형성돼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요지경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악인이라고 하면 왕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 과도하게 명령에 충실하거나 타인에게 비도덕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후안이나 니콜라시토 같은 작자들을 꼽을 수 있겠다. 후안은 당시 기준으로 매정하고 부모 자격도 없는 인물이지만 차츰 죄책감을 느끼며 바르톨로메를 부끄러이 여긴 걸 뉘우치고 나아가 아들을 직접 구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1부가 다른 가족들이 가장인 후안의 눈을 피해 바르톨로메에게 몰래 글을 가르치는 내용인 걸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변화다. 이 변화의 과정이 이번에 이 작품을 두 번째 읽음에도 급작스럽게 느껴졌던 건 아쉽지만, 한편으론 너무 신파스럽지 않고 입체적으로 후안이라는 인물을 그려낸 것도 같아 눈길이 가기도 했다. 사극을 접하다 보면 가끔 과거의 인물이 너무 현재 우리 기준에서 봤을 때도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급진적이라 오히려 현실성을 반감시키거나 혹은 우리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미개하고 극악무도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후안은 문제가 많긴 해도 작품 외적인 측면에선 당시 시대상을 잘 가늠하게 해주는, 이른바 고증이 잘 된 인물상이라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니콜라시토는 바르톨로메와 같은 난쟁이지만 선배로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바르톨로메를 배려하긴커녕 자신이 공주의 유일한 난쟁이고 다른 난쟁이는 방해물로 간주하며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장애인이라고 다 같은 성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끼린 동지가 아닌 경쟁자로 여기면서 추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음을 잘 역설한 캐릭터이며 이런 현실감 있는 악역은 이야기에 적잖게 몰입도를 선사한다. 늘 느끼지만 악역이 등장해야 이야기에 긴장감이 조성되며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공식이다. 바르톨로메가 니콜라시토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까 궁금해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이 미치도록 비정하고 현실적인 상황은 기대보다 싱겁게 마무리되지만 그래도 기대를 안고 페이지를 넘긴 보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요번에 스페인 여행 때 직관한 <시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감상하고자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허나 <시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보단 스페인의 시대상과 마드리드의 분위기, 장애인에 대한 인식에 더 눈길이 갔는데, 집필의 시작이 <시녀들>의 개라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판이 커진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는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는데, 고전 명화의 배경을 살펴보면 필연적으로 당시 시대상, 화가의 삶을 살펴보게 된다. 개에 주목했다고 해서 정말 개 이야기만 하려고 했다면 이 정도로 깊이 있는 이야기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바르톨로메의 의지를 드러내는 문학적 장치로 개라는 동물을 접목시킨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용감하고 충직한 개'보단 장애인의 삶을, 장애인이란 이유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바르톨로메의 선택은 눈물 없이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서양도 그랬지 몰랐는데 동양에선 '개 같다'는 말은 결코 좋은 표현이 아니다. 서양은 그래도 내가 미국이나 노르웨이, 이번에 간 스페인에서도 느낀 거지만 사람들이 개를 정말 좋아해 막연하게 그 나라들엔 개를 활용한 욕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론 내 생각과 다른 모양이다. 개가 아무리 인간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물이라지만 인간에게 직접 '개 같다'고 말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욕설로 통하는 듯하다. 하긴 인간은 인간일 뿐 다른 존재로 비유당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겠다.


 엉뚱하고 참신한 상상에서 비롯된 팩션의 정수를 보여준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는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역사나 장애인 인권, 그리고 청소년 성장문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는 작품이다. 시대의 한계 탓에 바르톨로메가 꿀 수 있는 꿈에도 제약이 걸리지만 그래도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지지하는 이들을 만나고 오히려 꿈을 꾸는 것에 제약이 있기에 그 꿈이 더욱 소중해지기도 하는 등 성장문학 특유의 뭉클한 장면과 감정선이 많은 작품이라 삶에 지친 분들에게 추천한다.

 장애인 이야기를 보고 지친 마음을 달래라고 하는 것은 좀 불건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바르톨로메가 장애인이란 것에 집중하지 말고 일종의 은유로 생각하고 읽으면 한 명의 장애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기도 하다며 더욱 공감하며 읽게 것이다.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과 흔치 않은 장애인 주인공이 등장함에도 공감할 수 있다니... 다시 읽어도 대단한 작품이다.

물론 이것은 해석의 오해일 수도 있지만, 역사라는 것이 해석의 산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행복한 오해‘라는 이름을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 행복한 오해일 테니까. - 3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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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편지
조현아 지음 / 손봄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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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아기자기하고 서정적인 그림체와 미스터리를 쫓는 이야기의 동력, 그리고 기분 좋은 결말이 일품인 굵고 짧은 작품이다. 짧은 분량 때문에 완성도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올해 안에 애니메이션 영화로 개봉된다고 하니 그때 화제를 모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본심을 말하자면 영상화를 굳이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만큼 자체적인 완성도가 매우 뛰어난 나머지 행여 기대가 배신당할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연출이라든가 성우 캐스팅이라든가 막상 영상으로 보면 내가 느낀 감성이 깨질까 두려워하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어느 순간부터 실사화, 영화화, 2차 창작이 기대되긴커녕 긁어부스럼처럼 느껴진다. 아직 영화 포스터도 나오지 않은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하지만 말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주인공의 여정도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작중 내내 시선을 끈 부분은 일상을 매우 아름답게 감미롭게 조명한 점이다. 학교 풍경이나 정원 관리인이나 비밀 장소들을 일상적이면서 조금은 환상적인 연출을 가미한 묘사가 굉장한 설렘을 자아낸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감탄한 동시에 반대로 나는 세상을 시큰둥하게 턱을 괸 채로 다소 탁하게 바라보고 있진 않은가 하고 반성도 해보았다.

 작중에서 호연이의 말에 의하면 모든 장소와 인간은 관심을 가지고 인지하는 순간 내 앞에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모든 의미 있고 환상적인 순간과 장소는 어디 멀리에 있어서 힘겹게 찾아가야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산재한데 내가 알지 못할 뿐인 걸까. 얼마 전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굉장히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를 경험한 내게 일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호연이의 말은 제법 울림을 안겨줬다.


 멀리 가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있듯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아름답다고도 여기지 못하는 감정도 있을 것이다. 여행 중엔 이런 생각을 못해봤다. 누군가가 여행은 걸어서 읽는 책이고 책은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여행으로 얻는 것도 있고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얻는 것도 있다. 여행이 곧 책이고 책이 곧 여행이라는 말이 지금 불현듯 진심으로 와 닿았다. 여행하느라 한동안 소홀히 했던 독서에 다시 본격적으로 매진하자는 다짐이 일었다. 앉아서 하는 여행도 설렌다.

모든 장소는 들어가기 위한 방법이 달라. 사람도 마찬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인지하는 순간 내 앞에 존재하게 되는 거야. - 여섯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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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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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9.4


 스페인에 여행을 떠나기 전 피카소나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 출신 화가들과 관련된 책도 많이 읽어봤는데, 마침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가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 중에 이렇게 달리를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기에 찾아 읽어봤다. 제목만 봐선 무슨 내용일는지 가늠이 안 됐는데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었다. 일본의 어떤 독자는 '추리소설로도, 연애소설로도 손색이 없다'고 했던데, 추리소설로는 사람마다 평이 갈릴 수 있지만 손색이 없는 연애소설이란 말엔 퍽 공감했다. 그나저나 역시 추리소설엔 치정이 어울리는 소재인 건가. 소재가 특이해도 하나도 이질적으로 읽히지 않은 데엔 치정이 살인의 강력한 동기가 되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피해자가 달리 애호가인 것도, 피해자가 죽은 장소가 밀실의 고치인 것도 아니다. 열렬한 달리 애호가인 나머지 콧수염도 달리처럼 기르던 피해자가 어째선지 시체로 발견됐을 땐 수염도 말끔히 밀린 상태였다. 도대체 얼마나 원한이 깊길래 살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소중히 기르던 콧수염까지 자른단 말인가. 예전에 신경 써서 수염을 길러본 사람으로서 말하는 건데, 콧수염은 수염 중에서도 그럴싸하게 기르기 까다로운 털이다. 그런데 달리만큼 길렀다는 건 그만큼 애정과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일인데 그걸 잘라간다는 건, 그것도 살해를 저지르고 빨리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굳이 다른 사람의 수염을 면도하는 번거로운 짓을 한다는 게 여간 기괴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의문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아 소설의 초반이 굉장히 지루함에도 결말은 반드시 읽겠노라고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히 중반부부터 피해자의 딱한 사정, 운명의 사랑을 만났음에도 짝사랑에 그치고 만 사연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몰입도가 올라갔다. 이윽고 과거 회상 장면에선 피해자가 실연 직전인 탓인지 어딘가 광기에 차있으면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초라한 면모를 드러내는데, 화자인 아리스의 과거도 마찬가지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은 정말 인륜지대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랑에 좌절당하지 않고 쟁취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을 쟁취한다는 표현엔 어폐가 있겠다. 내 경우엔 늘 사랑이 일방통행이어서 비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 말하자면 사랑은 상대와 쌓아나간다는 말이 훨씬 적절하겠다.

 왜 수염이 밀렸고, 어떻게 고치 안에 시체가 방치될 수 있었는지 등의 수수께끼는 이야기가 진행되며 차츰 밝혀진다. 사건의 진상에 비해 지나치게 폼을 들였고 분량도 많이 소모한 감이 있지만 설명과 개연성이 명쾌하며 해당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와 완전히 인상이 달라지기도 해 새삼 반전에 살고 반전에 죽는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이런 거지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초반이 특히 지루하고 소재 자체도 달리라는 키워드를 빼면 완전히 통속적이라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내겐 이런 화려하지 않으며 잡다한 요소마저 좋았다. 예전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풍과 세계관이 뭔가 애매하다고 여겼는데 이젠 분량이 더 길어도 좋으니 히무라와 아리스의 잡담이나 그들이 진범을 잡기 위한 시행착오를 더 빈번히 겪었음 좋겠단 생각마저 든다. 일상적이라서 더 빠져들게 되고 특히 진범을 찾고자 헤맨 시간이 길수록 히무라가 진범 사이에 오가는 긴장감이라든가 진범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서술의 임팩트가 올라가 다 읽고 난 다음의 여운에 크게 이바지한다고 본다. 특히 여운에 있어서 아리스가와 아리스만한 추리소설가가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달리 관련 이야기가 다뤄진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한 여자에 일편단심이었던 달리에 대한 해석, 사랑을 받은 여자보다 그만큼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던 달리가 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해석도 인상적이었고 - 여담이지만 작중에서 마성의 여성으로 등장하는 사기오 유코가 방금 말한 해석을 내놨는데 이 해석을 보고서야 왜 그토록 많은 남성이 반했는지 납득이 갔다. 캐릭터는 설명보다 한 마디의 대사로 드러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 짝사랑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잘 알던 피해자의 내면,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의 애정을 얻으려는 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라는 대사도 마찬가지로 인상적이었다. 위의 두 말에 적잖이 공감하기도 했고, 자신만의 갈라(달리가 사랑한 여인)를 찾지 못해 '고치'라고 불릴 만한 특수 기계에서 위안을 찾는 모습이 특히 애처롭게 느껴져 사건의 진상과 무관하게 피해자를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착잡한 마음이 앞서게 되는 것 같다.

 내일 떠나는 3주간의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에서 바르셀로나 근교인 피게레스라는 소도시도 방문할 예정이다. 그곳에 있는 달리 미술관을 가기 위함인데, 그 미술관엔 비록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은 없지만 - 그 작품은 뉴욕의 모마MOMA에 있고 여담이지만 그 작품은 이미 봤다.ㅋ - 달리의 평생동안 보여준 예술 세계의 진수, 갈라를 향한 애정의 증표 등 달리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다고 해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달리가 뛰어난 예술가지만 작품 중엔 가끔 과하거나 일반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결과물도 있어 과연 100% 만족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래도 이렇게 <달리의 고치>로나마 달리 이야기를 접한 만큼 꼭 방문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달리와 갈라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며 미술관을 둘러보게 될 듯하다. 과연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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