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왔다
티무르 베르메스 지음, 송경은 옮김, 김태권 부록만화 / 마시멜로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8.8


 밑도 끝도 없이 히틀러가 죽지 않고 현대의 독일에서 깨어난다는 황당하고 섬뜩한 설정의 작품이 있다기에 찾아 읽어봤다. 진짜 히틀러가 말이다. 난 혹시나 너무 미쳐버려서 자신이 히틀러라 단단히 착각해버렸다는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반전은 없었고 이 작품 속 히틀러는 진짜 히틀러였다. 어쩌다 현대로 넘어왔는지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리라. 전범이란 자각도 없이 여전히 망상에 빠진 그가 무슨 짓을 할 것인가 그 여부가 중요할 것이다.

 의외로 이 작품 속에서의 히틀러는 자신이 이끌던 나치와 독일이 패전하고 지금의 독일이 꿈꿔온 것에 비해 전혀 다른 역사를 밟은 현대의 독일에 어느 정도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니, 적응한다기보다는 눈치를 본다는 표현이 옳은데 오히려 이런 주변머리를 갖추고 서서히 자신이 암약할 기회를 노리는 점이 참 현실적이고 섬뜩하게 다가왔다. 당연히 사람들은 히틀러를 보고 그냥 히틀러 흉내를 완벽히 내서 모종의 풍자를 노리는 코미디언이라 알아서 착각하지 진짜 히틀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점점 현혹되는 사람이 늘어가는데, 그때마다 현대의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의 언변에 넘어갈 만큼 만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그 나라 사람들이 한 명의 미친 독재자한테 시달린 흑역사를 잊을 리 없으니 다시 돌아온 히틀러라 해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믿으면서.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독일이 과거에 그런 과오를 저지른 건 히틀러 단 한 명의 책임이 아닌 히틀러의 이름을 연호하고 지지를 아끼지 않은 우중愚衆의 책임도 크고, 히틀러는 그저 운이 좋거나 시대가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를 잘 파악한 미치광이라는 말이 아주 과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고 입가에 쓴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타인의 의견을 자신과 다르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묵살할 순 없지만 무슨 일이 터진 다음엔 민주주의가 형체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런 말랑말랑한 분위기 속에선 독일은 언제든, 아니 평화로운 분위기가 만연한 어떤 나라든 나치에 찬양한 과거 독일의 전철을 밟을 공산이 크다.  작중에서 히틀러가 다른 창작물에서와 달리 미묘하게 인간적으로 묘사된 터라 우리 주변에 악마를 가려내는 건 무지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

 억지 주장은 언변으로, 장황한 말투에 사람들이 당황하면 카리스마로 어떻게든 무마하고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고급 코미디로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착각하고 포장해주다 보니 히틀러는 어느새 유튜브 스타가 되고 만다. 이 과정은 다소 과장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작가가 의도한 바는 전해졌다. 어딘지 허술한 정치인들과 네오나치마저 차례차례 논파해나가는 히틀러의 기상천외한 여정은 그가 과거에 했던 짓을 그대로 재현할 초석을 닦았다는 불길한 암시를 남기며 끝맺어지는데 이 후반부의 전개에 몇이나 웃을 수 있을까. 어려운 서사와 인물을 그럴싸하게 써내려간 패기와 묘한 유머는 인정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블랙유머로 부르기엔 지나치게 섬뜩하지 않은가 싶었다. 나는 <그가 돌아왔다>를 코미디 소설이라 정의하는 것은 작중에서 사람들이 히틀러를 코미디언으로 착각하는 것만큼 웃긴 일이리라 여겨졌다.


 이 작품이 영화로도 나왔다는데 그 결과물이 궁금하다. 평가가 원작 못지않게 좋던데 어떻게 결말이 났을지 궁금하고 대체 어떤 배우가 히틀러를 연기했을지 궁금하다. 이래저래 리얼리티가 중요한 스토리인 만큼 과장 없는 히틀러 연기가 과연 어떻게 디렉팅됐을지 몹시 궁금하다. 듣자하니 연기나 결말이나 소설보다 더 불길하게 연출됐다는데... 나치에 치를 떠는 독일에서 이런 파격적인 작품이 나온 것도 신기한데 영화로도 나왔다고 하니 그 만듦새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담이지만 책엔 일종의 부록 같은 개념으로 만화가 김태권의 단편 만화가 실려있다. 그는 <히틀러의 성공시대>라고 히틀러와 나치가 어떻게 독일을 집어삼키는지 그 과정을 그린 작품을 그렸는데, 지나치다 싶은 희화화와 아재 개그 때문에 히틀러와 그 시대의 섬뜩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 단점이 거슬리는 작품이었다. 요번에 실린 단편 만화는 그런 부분은 조금 덜어지고 대신 현실성을 높여 섬뜩함을 더하는 데 중점을 뒀던데... 아예 이 소설을 원작으로 둔 만화를 그려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이번 만화는 너무 패러디라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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