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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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책을 읽고 이안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시간이 지나 다시 읽으니 안타깝게도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일러스트가 수록된 특별판을 읽으니 더더욱 영화의 비주얼과 비교돼 소설의 표현력이 초라하게 다가오는 역효과를 낳았다. 책의 일러스트는 대체로 예뻤지만 경이로운 수준은 아니었고 대체로 있으나 마나 한 내용이었던 터라 작품의 몰입도를 크게 높여주진 못했다.

 비주얼이 아닌 연출이나 몰입도 측면에서도 영화가 소설보다 뛰어났다. 파이의 독창적이고 강인한 정신세계를 어필하는 소설의 전반부는 적잖은 독자들이 공인하듯 지루하고 리차드 파커가 호랑이의 이름이라는 반전은 유머러스하긴 해도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너무 뜸을 들여 김새기도 한다. 그에 비해 영화는 초반부의 지루한 부분을 많이 쳐냈고 책의 아쉽거나 두루뭉술한 부분을 많이 개선했다. 가령 파이가 일시적으로 실명했을 때 자신처럼 조난된 처지의 사람을 만나는 장면은 정말 사족이었는데 그런 사족이나 설명충스런 부분을 영화에선 압도적인 비주얼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하기에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에겐 더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작품의 결말도 영화가 더욱 잘 묘사했다고 본다. 번역의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책에선 파이가 두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냐고 묻는 반면 영화에선 더 마음에 드는 이야기냐고 묻는다. 사소한 뉘앙스 차이일 수 있으나 단순히 이야기의 만듦새를 겨루는 것이 아닌 인간이 기적과 믿음을 가지는 매커니즘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의 주제의식과 깊이를 생각하면 나는 영화에서의 배우들의 호연이나 연출이 더 마음이 간다.

 영화 쪽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소설은 파이가 화자로서 이야기하고 결말도 파이가 끝맺는 형식이다. 영화에선 파이에게 이야기를 들은 작가가 자기만의 답을 내리고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된다는 허락을 얻음과 동시에 자신처럼 파이의 두 이야기를 들은 일본인 조사관들이 적은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 미소 짓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 장면이 일품이었다. 인간은 끔찍한 이야기를 인정하느니 황당하더라도 환상적이고 희망이 있는 이야기를 믿으려 한다. 이 믿음은 때론 비극도 기적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공감을 구하는 장면이었는데 나도 마음속으로 동의하며 고갤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이렇게 지루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간혹 영화화가 너무 잘 이뤄지면 원작도 반사이익을 보기 마련인데 <파이 이야기>는 정반대다. 영화 덕분에 책도 부커상 수상작 중에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하고 이렇게 일러스트 버전처럼 여러 버전의 책이 지속적으로 출간되는 등 스테디 샐러로 자리매김됐지만...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다고 생각해보긴 정말 처음인 것 같다.

 여담이지만 제목은 원제보다 우리나라 버전의 제목이 더 좋다. <라이프 오브 파이>보다 <파이 이야기>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파이 전체의 삶이 아닌 파이의 두 가지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니까. 영화도 원제말고 이 제목으로 상영하지. <나를 찾아줘>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작품도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았는데. 원작 소설보다 더 괜찮은 영화가 은근히 많다. 소설은 무조건 영화보다 낫다는 것도 참 이상한 편견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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