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러시아 - 일리야의 눈으로 ‘요즘 러시아’ 읽기
벨랴코프 일리야 지음 / 틈새책방 / 202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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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짧지만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줬던 일리야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찾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책의 출간 시기가 러시아에 대한 전세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던 즈음이라 나도 조금 눈치가 보여 결국 반년이 흐른 이제서야 읽게 됐다. 지금이라고 러시아의 인식이 좋아지긴커녕 악화일로를 걷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러시아에 좋은 감정이 많다. 당장 일리야의 고향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할 적에 생각보다 친절했던 러시아 사람들이나 노르웨이 여행 때 새벽녘 베르겐 기차역에서 나처럼 혼자 여행온 러시아 아저씨와 코인로커를 어떻게 사용하지 같이 머릴 맞대며 이리저리 헤매다 우리 둘 다 깔끔히 사용을 포기하고 서로 좋은 여행을 기원하며 헤어진 추억 등이 있어 뉴스 속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만으론 좀처럼 러시아에 대한 악감정이 싹트지 않았다.


 일리야는 서두에서 시기가 시기인 지라 눈치가 보이긴 하나 오히려 지금처럼 러시아에 대한 온갖 안 좋은 편견이 난무할 때가 이 책을 출간할 적기란 생각이 든다고도 말한다. 언젠가는 러시아도 국제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우니 언제까지고 벽을 쌓기보단 교류하게 되는 순간이 올 텐데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문화나 정치 등 조금이라도 무지한 점을 줄이고 서로 사람 사는 곳이란 인식을 자신이 쓴 책이 심어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고 겸손하면서도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어 신뢰감이 갔다.

 아울러 러시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은 나라이고 그렇기에 일리야 본인이 아는 러시아는 간혹 본인이 겪은 범위 안에 국한됐거나 최대한 한국인 눈높이 맞추려다보니 러시아만의 세계관이 자칫 왜곡될 수 있을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시사하는 태도도 도리어 신뢰감을 더해줬다. 첫장에선 러시아의 다양한 지리와 기후 같은 가벼운 주제로 시작해 소비에트와 러시아가 전혀 다른 나라이며 어쩌다 푸틴 같은 독재자에 열광하고 왜 정치에 무관심하게 됐는지 역사적 배경 같은 것을 꽤 그럴싸하게 설명한다.


 물론 지면의 한계와 자료 조사 및 독자를 배려한 탓인지 설명이 불충분하게 느껴진 부분이 없던 것은 아니다. 간혹 그토록 무능하고 쓰레기 같은 정치인에 당했다는 이유로 같은 쓰레기지만 유능하다는 이유로 그 정치인의 허물과 비리까지 용인하거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음에도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후진적인 여성 인권 등은 책을 읽은 지금도 이론적으로나 알겠지 진심으로 와 닿진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컬쳐쇼크의 순간은 일리야도 처음 한국에 와서 살 때 많이 겪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선 서로 인종이 달라도 언어와 국적이 같다면 같은 러시아인으로 여기는 반면 단일민족 국가인 탓에 좁은 땅덩어리에서 어디 지역 출신이냐 갖고 차별하는 등 조금만 다르면 배척해버리는 우리나라의 정서 등 처음엔 이론적으로나 알겠지 진심으로 와 닿진 않은 순간이 많았고 어떤 점은 지금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익숙해졌다고 얘기한다.


 중요한 점은 그 나라가 그런 문화와 인식을 갖게 된 데엔 다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으나 서로 완전히 이해하거나 존중하긴 힘든 일이란 걸 인정하는 것 아닐까. 진정한 의미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자기기만일는지 모른다. 대신 최소한 사전 지식을 갖고 노력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나 러시아나 지금보다 더욱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을까 하고 우리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게 일리야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개선의 여지가 없는 와중에 일리야가 쓴 비판적이면서 묘하게 팔이 안으로 굽는 듯한 내용의 책을 읽으니 러시아를 향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기어코 왕따의 길을 걷고자 하는 러시아의 꼬라지를 생각하면 고개를 젓게 되지만 그 나라의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 찬란한 유산이나 고난의 역사를 버텨낸 사람들의 저력, 그리고 내가 직접 겪은 그 나라의 따뜻한 첫인상을 떠올리면 국가감정과 개인과 개인의 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별개의 일로 치부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다소 낙관적이고 무책임한 생각까지 든다.


 저자 일리야는 우리나라로 귀화한 한국인이라 보다 러시아에 비판적일 수 있지만 러시아에서 나고 자라 러시아식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그가 완전한 의미에서 한국인이라 하기엔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여겼는지 대신 자신은 러시아계 한국인이란 표현으로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을 정의내린다. 우리에겐 아직 생소하게 들리는 단어일 수 있지만 러시아와 한국 두 나라에 깊은 인연의 뿌리를 내린 일리야의 족적을 살펴보면 완전히 러시아인이 아니라기에도 한국이라 보기에도 미묘할 만큼 두 나라 문화에 빠삭한 그에게 이보다 적합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처음 <비정상회담>에 출연할 때보다 진보한 한국어 구사력과 폭넓어진 세계관으로 중무장했기에 이 책이 단지 방송에서 못다한 이야길 길게 풀어내거나 러시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어내는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한 나라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는 것과 별개로 그 나라의 문화나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해하려는 길은 어렵고 까다로우며 그 길을 걷게 되면 필시 이질감 못지않게 동질감도 느끼게 돼 애증이 생겨버린다는 걸 이 책을 읽는 내내 깨닫게 됐다. 참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러시아, 일본만큼이나 참 곤란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졸지에 러시아에 좋은 인상을 가진 모든 외국인들을 한꺼번에 갈 곳 잃고 할 말도 잃게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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