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의 흔적 - 돌과 바람의 조형, 이타미 준
이타미 준 지음, 유이화 엮음 / 미세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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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미 준 혹은 유동룡

 

이타미 준[伊丹潤, 1937~2011]’으로 알려진 건축가가 있었다. 2019년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이타미 준의 바다>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이타미 준을 본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오사카의  이타미[伊丹]’ 공항과 작곡가 최치정(崔致禎, 1927~1995)의 예명 길옥 윤/요시야 준(吉屋 潤)’에서 따온 이타미 준이라는 예명을 가진 유동룡(庾東龍)이라는 재일교포 건축가였다.

재일교포라는 것은 영원한 이방인을 의미한다일본에서는 조센징’, 한국에서는 쪽발이로 불리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이니까어쨌든 그는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을 그리워하며 살아갔다그래서일까대학시절 혼자서 한국 여행을 하면서 조선의 민화건축달항아리[白磁大壺]에 빠져들었고수집과 연구를 시작했다.

훗날 그가 <이조 민화(李朝 民畵)>(1975), 오사무 무라이[村井修, 1928~2016]와의 공저인 <이조의 건축[李朝の建築]>(1981), <조선의 건축과 문화[朝鮮の建築と文化]>(1983), <한국의 공간>(1985) 등의 책으로 펴낸 것도 이때부터 쌓은 내공 덕분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말년에는 제주에 비오토피아의 [핀크스 퍼블릭 골프 클럽 하우스](1998), [핀크스 맴버스 골프 클럽 하우스](1998), [포도호텔](2001), [()/()/(미술관](2006), [두손 미술관](2007), 그리고 [방주교회](2009) 등의 작품을 남겼다.

 

핀크스 퍼블릭 골프클럽하우스


출처: <손의 흔적>, pp. 118~119

 

 핀크스 맴버스 골프클럽하우스


출처: <손의 흔적>, pp. 126~127

 

포도호텔


출처: <손의 흔적>, pp. 142~143

 

() 미술관




출처: <손의 흔적>, pp. 162~163 / 핀크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 미술관




출처: <손의 흔적>, pp. 166~167  / 핀크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미술관


출처핀크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두손 미술관


 



 

출처: <손의 흔적>, pp. 172~173, pp. 176~177 / 핀토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방주교회


출처: <손의 흔적>, pp. 190~191

 

2003년 세계적인 동양박물관인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에서 이타미 준일본의 한국 건축가라는 제목으로 아시아인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이때 그는 국립 기메 박물관장으로부터 이타미 준은 예술가로서동시에 건축가로서 전통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시공을 초월한 독창성과 현대성을 지닌 예술작품을 창조해왔다” [p. 9]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2005년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여하면서 그 이유를 이타미 준은 현대 미술과 건축을 아우른국적을 떠나 세계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그의 작품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아시아 문화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 [p. 9]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다. 2006년 한국의 김수근 건축상을,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작품_SK건설 기흥 아펠바움], 2010년 일본 최고의 건축상이라는 무라노 도고[村野 藤吾][작품_두손 미술관//석 미술관]을 수상했다.

 

 

도공의 무심한 마음으로 빚는 건축.

 

유동룡의 고국에 대한 목마름은 달항아리 등에 대한 애정으로 표현되었고그는 이를 다시 건축에 담으려고 했다그래서 그를 풍토경치지역의 문맥에서 뽑아낸 본질을 건축에 녹아낸 건축가라고 말한다.

나는 풍토경치지역의 문맥 속에서

어떻게 본질을 뽑아내 건축에 스며들게 할지를 생각한다.

조형은 자연과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해야 하고,

공간과 사람자신과 타인을 잇는

소통과 관계의 촉매제여야 한다. ” [p. 7]

 

이를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온양민속박물관]을 들 수 있다.

 

온양민속박물관


출처: <손의 흔적>, pp. 44~45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의 무덤은 모두 흙의 조형물이다지역성과 풍토성이 짙은 시골집땅에서 솟아오른 원초적인 반원 형태의 무덤에서 흙과 불꽃그리고 흙으로 빚은 조형의 원점을 발견한 느낌이다.

이번에 맡은 <온양민속박물관>은 시골집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근대의 벽돌을 만드는 방식처럼 황토를 틀에 넣어 누를 후 햇별에 말려 초벌구이 상태의 흙벽돌을 만들었다흙을 주제로 혹독한 자연 환경과 풍토성 속에 자립한 이 건축믈을 그 풍경에 맞설 수 있는 외관을 갖춘 셈이다.

그 지역의 돌과 흙으로 지역의 특성과 풍토에서 싹튼 전통 방식으로 건축물을 짓는 것은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개척하려는 노력이다.” [pp.51~52]

 

 

마지막 남은 손의 건축가.

 

유동룡은 오늘날 컴퓨터의 지배를 받아 현대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건축에는 온기가 사라지고 디자인의 독특성에만 쏠려 감동을 잃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정신문화까지 황폐해질 것을 염려했다그래서 그는 손으로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을 고집했다아날로그적인 손으로 그리는 드로잉과 글쓰기를 통해사람의 온기를 밑바탕에 두고 그 땅의 울림과 바람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했다.

나의 건축 작업에서 글과 드로잉은솜씨는 서툴어도 사람 냄새가 나고 따듯한 피가 흐르는 건축을 되돌아보기 위한 훈련의 선이라고 하겠다그것은 모두 살아가기 위한 것이고 심장이 뛰는 것과 같은 것이다사각형 안에 원을 그리고 그 혀상이 공기와 같이 청명하고 생명을 머금은 것으로 드러나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그것도 어떤 경지에서 보면 말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내게는 새로운 건축을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p. 16]

 

<이타미 준의 바다>에서 [먹의 공간부분에서 유동룡의 딸 유이화는 “아버지 대나무가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바뀌거나 썩지 않아요?”라고 질문하자유동룡은 “그걸 의도한 거야그게 시간의 맛이지라고 말한다사람과 함께 나이 먹는 집이것이 그가 의도했던 자연스러운 건축이 아니었을까?

 

먹의 공간


출처: <손의 흔적>, pp. 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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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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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고독한 삶뭉크 작품의 원천

 

절규로 유명한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삶을 보면 마치 죽음이라는 향기가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다섯 살 때[1868] 어머니[Laura Bjolstad]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열세 살 때는 (가족 중 가장 각별했던) 누이 소피에(Sophie)마저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뭉크의 아버지[Christian Munch]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매달렸다그리고 뭉크에게 엄격한 종교적 생활 방식을 강요했다병약하기까지 했던 뭉크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 학습을 받았기 때문에 교우 관계도 유지할 수 없었다그는 더욱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게 된다.” [p. 21]

그러한 사실만 보면 그의 앞에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와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다행히 그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과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뭉크의 어린 시절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고청년이 되어서는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 집착했다비극적 이별과 좌절을 겪고병마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다공황 장애우울증불면증정신 분열불안 장애환각피해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불행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p. 14]

 

 

청춘사랑과 방황

 

21살이었던 1885뭉크는 보레(Borre)에서 가족들과 여름 휴가를 보내다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그녀의 이름은 밀리 타우로브(Milly Thaulow), 이미 한 남자의 아내였다하지만사랑을 갈구하는 두 자유로운 영혼들의 앞에서는 그런 제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뭉크의 첫사랑이었다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녀가 자신이 고른 이와 두 번째 결혼을 했을 때그녀의 옆에 선 사람은 뭉크가 아니었다그렇게 뭉크의 첫사랑은 성냥개비의 불꽃처럼 확 피었다가 화상만 남기고 사그라졌다.

 

<이별>


출처: <뭉크>, p. 43

 

뿐만 아니었다. “1889 11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뇌졸증으로 마비가 와 곧 세상을 뜨고 만다화가가 되기로 한 뒤부터 아버지와 마찰이 잦았던 뭉크는 아버지에게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다게다가 아버지의 죽음 후 뭉크 가족의 불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아버지의 수입에 의존하던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랐고곧이어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이 발병하여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게 된다카렌 이모가 부업을 하고 막냇동생 잉게르가 피아노 레슨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지만 집안의 맏이로서 뭉크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화단에서 인정받고 화가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뭉크를 짓눌렀다.” [pp. 44~45]

 

아이러니하게도 뭉크의 이러한 20대의 방황은 혁신적인 예술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고자기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대표작 <절규(The Scream)>를 비롯하여 <마돈나(Madonna)>, <불안(Anxiety)>, <아픈 아이(The Sick Child)>, <이별(Separation)>, <키스(Kiss)등의 모티프를 그는 몸소 겪은 경험에서 가져왔다그래서 그의 그림은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p. 14]

 

 

뭉크의 혁신적인 예술

 

뭉크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시도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첫째뭉크는 하나의 모티프를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번 그리는 것을 즐겼다.

<절규또한 4개의 버전과 판화본이 존재한다동일한 제목에 같은 모티프를 가졌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4개의 버전이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p. 68]

 

<절규>(1893)


출처: <뭉크>, p. 12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알려진 버전이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서 보관하는 1893년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절규>의 얼굴은 대부분 이 버전에서 기인한다판지에 템페라와 크레용으로 그린 이 그림은 잘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화면 오른쪽에 덧붙여 확장시킨 부분이 그것이다.” [p. 68]

 

또 다른 <절규가운데 2개를 뭉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뭉크 박물관은 판지에 크레용으로 그린 1893년 작과판지에 템페라와 유채로 그린 1910년 작의 두 가지 버전을 소장하고 있다1893년 작은 크레용의 터치가 거칠고 건물과 배가 없다디테일이 약해 아마도 연습 버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반면 1910년 작은 템페라와 유채로 그려져 색이 선명하고 형태가 비교적 견고하다특징은 중심인물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pp. 68~70]

 

<절규>(1895)


출처: <뭉크>, p. 70

 

마지막으로 독일의 미술 수집가 유진 폰 프란케트의 주문으로 1895년 제작된 판지에 파스텔로 그린 버전이 있다이 버전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다른 버전에서는 배경의 길이 자유롭게 채색되어 있는데 반해이 그림에서는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배경의 두 남자를 주목해볼 만하다다른 버전에는 두 인물이 모두 서 있다그러나 이 파스텔 버전에서는 두 인물이 좀 더 섬세하게 표현되고 있다한 명은 서서 고개를 돌려 피오르를 바라보고 있고조금 뒤쪽의 다른 한 명은 난간에 기대어 있다.” [pp. 70~72]

덧붙이자면, <절규>에 앞서서 그 토대가 된 <절망(Sick Mood at Sunset: Despair)>(1892) <절망(Despair)>(1894)라는 작품도 있다.

<절망(Sick Mood at Sunset: Despair)>


출처: <뭉크>, p. 60

 

영원한 습작이 된, <아픈 아이>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이처럼 같은 작품을 조금씩 다르게 반복적으로 그림으로써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형상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닐까?

소설가 최인훈(崔仁勳, 1936~2018)이 그의 대표작인 <광장(廣場)>(1960) 10여 차례 개정과 개작(改作했던 것과 비슷한,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마음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뭉크가 남긴 많은 글 가운데 그의 예술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문구이다뭉크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풍경이나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다시 말해대상을 관찰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 본 것자신의 기억을 그리려고 했다.

기억이란 감정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이 화가의 뜻대로 해석되고, ‘편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13]

 

 

둘째작품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을 지에 관심을 가졌다.

뭉크 예술과 인생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생의 프리즈>는 인간 삶의 여러 모습을 주제별로 엮어 보여주는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작 아이디어로 작품의 배치 및 전시에 관한 뭉크의 관심이 빚은 결실이었다.

 

그가 <태양>과 같이 따뜻한 희망이 넘치는 그림도 그렸다는 점을 알게 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절규> 하나만 알고 있던 화가 뭉크가 불행한 삶을 살면서 겪은 고독과 죽음을 그림을 통해 승화시키는 과정을 보는 것도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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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주영하 지음 / 사계절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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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그림 속의 음식음식 속의 역사>라는 제목과 책 소개만 보고 음식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이 책은 23장의 그림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한국적인 것이라고혹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이 약 100년을 전후한 시기이른바 근대에 형성되었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그나마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만큼우리 스스로 전통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시선에서 본 이색적인 것을 전통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이를 저자는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왔던 이정섭(李晶燮, 1895~?) <별건곤(別乾坤)> 12/13 (1928)이라는 잡지에 실은 글을 빌려 이야기 한다. “이정섭의 말처럼 김치, 갈비, 냉면은 1990년대 이후 세계적인 음식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인이 끼니로 식사를 할 때 김치나 갈비는 반찬에 지나지 않으며 냉면은 별식이다. 늘 밥을 먹을 때 식탁에서 쌀밥이 제일 중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쌀밥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우리 스스로 한국적인 것을 서양 사람들 시선에서 보기 때문이 아닐까?” [p. 91]


‘1장 그림으로 보는 서민의 음식 풍속’, ‘2장 그림으로 보는 궁중의 음식 풍속’, ‘3장 그림으로 보는 관리의 음식 풍속’에 실린 19장의 그림을 보면 우리에게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4 무렵),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그림이 절반 정도 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다.

풍(風)은 지배자의 윤리적 덕목(德目)이며, 속(俗)은 피지배자의 실천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풍’으로 ‘속’을 교화해야 한다는 풍속교화(風俗敎化)가 지배자가 풍속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당연히 지배자에게는 풍속을 살피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p. 63]

조선 후기 풍속화가들의 등장과 이들의 그림 자체가 백성들의 처지를 살피고 그들을 교화하기 위한 기초 자료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풍속화 한 작품 한 작품마다 당대(當代서민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와 풍속화 등과는 달리 음식의 모습이 또렷하고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유숙(劉淑, 1827~1873) <대쾌도(大快圖)>를 보면서

술잔 옆에는 사각 함에 노란색의 음식이 놓였다. 딱히 그림만으로는 그 정체를 분명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상상을 해보면 담긴 그릇으로 보아 떡 아니면 과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막걸리와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떡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 [p. 28]


김득신의 <강상회음(江上會飮)>에서는 숭어찜을 얘기하면서

사실 이 그림만으로 어떤 생선인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강의 생김새로 짐작해보면, 숭어일 가능성이 크다. 원래 숭어는 바닷물고기이다. (하지만 그림 속의 생선이 백과서전에 묘사된 숭어의 생김새와 유사하고,) 음력 4월쯤이 되면 산란을 위해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많이 등장하고 간혹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pp. 37~38] 숭어의 상태를 보면 이 그림 속의 물고기는 숭어라고 보아야 한다고 언급한다.


이렇게 풍속화 속에 그려진 음식을 찾아 무엇인지 추정하고역으로 그 당시의 풍속과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다른 이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지만 독특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전통의 창조>(1983)이라는 책에서 전통이란 근대 국민국가가 만들어 낸 창조물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민속학에서 말하는 국민 혹은 민족의 민속 역시 국민국가가 창조한 일종의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과정에서 피지배층의 민속은 언제나 존재해 왔던 실재(實在, reality)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국민 혹은 민족의 민속은 실재를 표상한 창조물이다. 즉 국민국가에 복무하는 민속학을 지향한 근대의 민속학자들이 실재하는 민속 중에서 특정한 현상들을 묶어서 표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pp. 254~255]

,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식된 것이 아니라 일본’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에 복무하는 학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렇기에 저자도 나오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21세기 한국인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조선적 ‘전통’이 주로 18~19세기에 형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대를 연구하면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18~19세기의 생활사를 제대로 연구해 본 연구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가설은 절대적인 명제가 될 수 없다. 최근에 밝혀지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가 '조선적'이라고 믿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명제들 중 일부분은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계몽적 근대성의 표상(表象)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pp. 249~250]라고 말한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림 속의 음식음식 속의 역사>라는 제목처럼 조선 시대 풍속화를 통한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의 표상과 실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라는 부제(副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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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금숙 지음, 정철훈 원작 / 서해문집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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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의 형무소에서 어느 수감자가 자신이 처형시킨 인물 가운데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볼셰비키의 우두머리라는 한인 여성이 있었다는 고백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를 이어 착취 받는 이들을 대변하다.

 

김두서(金斗瑞)는 생존을 위해 고향인 함경북도 경흥을 떠나 북으로 갔다그는 한국중국러시아의 접경지인 지린[吉林]의 훈춘[琿春]에서 잠시 소작농 생활을 하면서 중국어를러시아로 이주 후에는 러시아어를 익혔다.  그러다가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의 시넬니코보[永安坪]에 정착하면서 귀화하여 표트르 김이 되었다그의 어학 능력 때문에 동청철도(東淸鐵道)1) 현장에 파견된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징집되었는데여기서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차별 받고 심지어 임금체불마저 당하는 한국과 중국 노동자를 위해 철도관리국에 항의하거나 노동쟁의를 벌여 못 받은 임금을 받게 해줬다이렇게 명성을 떨쳤지만제대하고 나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딸인 김알렉산드라[1885~1918, 본명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애칭은 쑤라]는 아버지의 사망 후 그의 친구였던 폴란드 귀족 출신 러시아인 표트르 스탄케비치의 도움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교사가 되면서 표트르 스탄케비치의 아들 마르크 스탄케비치(이하 마르크’)와 결혼을 했다한때 사상적 동지였지만 항만노조 일을 돌보느라 며칠씩 집에 오지 않는 그녀를 의심하고 이해하지 못한 남편은 도박에 빠지고 폭력을 휘둘렀다결국 스탄케비치 가문의 귀신이 되라는 남편의 저주를 뒤로 한 채 그녀를 집을 떠났다.

 

여기에 우랄로 떠난 노동자들이 계약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그녀는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1914년 우랄의 벌목장에 통역으로 간 것이었다.

 

2월 혁명 전야의 파도는 우랄까지 당도했다.

난 이 문제를 러시아 사회민주당 예카테린부르크 지부에 편지를 보내 우랄 목재소의 지옥 같은 상황을 고발했다(뤄쯔거우[羅子溝무관학교 출신생도들과 한인 노동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전폭적으로 날 지지했고점점 나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그들의 억울함을 자세히 들어주는 일이야말로 수없이 꼬인 문제들을 풀어내는 기초가 되었다.” [p. 174]

이를 기반으로 그녀는 우랄 노동자 연맹을 조직했다.

감격의 순간이군요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러시아·중국 노동자일제의 강점에서 독립하고자 투쟁하는 한인오스트리아 포로병그 모두가 우리의 동무입니다노동과 계급의 형제언제 어디서나 서로를 도울 동지입니다얼굴도 다르고 피부색과 국적도 다르지만 일하는 자로서 하나입니다만세!” [p. 185]

나아가 그녀는 2월 혁명 직후 차르 정부가 미지급한 노동자 임금을 받아내서 명성을 얻었다.

 

 

전환점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1917년 그녀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한다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을 접견하고그의 오른팔이자 탁월한 조직가인 야코프 스베르들로프(Yakov Sverdlov, 1885~1919)의 요청으로 하바롭스크로 파견되어 극동인민위윈회 조직에 참여한다. 1918년에는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인민위원(외무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같은 해에 이동휘(李東輝, 1873~1935) 등과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2)을 결성한다다만김알렉산드라가 사회민주당 당원이었기에 직책은 맡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이동휘와 함께 100명 규모의 한인사회당 적위군(赤衛軍)’을 조직러시아 혁명군인 적군(赤軍)에 가담하여 반()혁명세력인 러시아 백위군(白衛軍)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그러다가 그 해 9월 하바롭스크가 함락되자 철수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백위군에 발각체포된다.

 

이후 재판관이 그녀에게 만약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p. 225]고 회유했지만,

그녀는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했어요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계급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어요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건가요?

잘 들으세요몇 년 뒤에 극동에서조선에서중국에서전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입니다내가 해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 [pp. 225~226]이라고 반박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

 

혹시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그녀가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볼 여지는 있다하지만그녀가 혁명가로서 살아가고또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이 결국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능하고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그녀와 같은 이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삶이 가능해졌으니까물론 지금도 완벽하게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그러나 남성과 여성계급과 지위민족과 인종의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그녀의 꿈을 지금 우리가 나눠서 꿈꾸면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옥의 티

 

p. 203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사회당)이 탄생했다.

→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사회당)이 탄생했다.



1) 동청철도헤이룽장성(黑龍江省하얼빈[哈爾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내몽골[內蒙古자치구 만저우리[滿洲里], 동쪽으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쑤이펀허[綏芬河], 그리고 남쪽으로는 랴오닝성[遼寧省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잇는 철도 노선이다. 1911년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에는 중동 철도(中東鐵道)라고 불렀다.

2) 임시 의장 이동휘(李東輝, 1873~1935), 부위원장 오와실리[한인 2김알렉산드라와 사실혼 관계], 군사부장 유동열(柳東說, 1879~1950), 당 기관지 <자유종주필 겸 출판부장 김립(金立, 1880~1922),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 이인섭(李仁燮, 1888~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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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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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國에 들어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를 대표하는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境の長いトンネルをけると雪であった]”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그래서 저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찾아가는 여행을 소설 <설국>의 배경이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에치고유자와[越後湯]’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아닐까?

 

제대로 된 설국을 보기 위해 일기예보까지 확인한 저자는 열차를 타고 시미즈[淸水터널을 지나환상 속의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몇 초 후 터널이 끝났다말 그대로 설국이었다밤 시간은 아니었지만 터널 반대편에 비해 습하고 흐렸으며 눈은 역 구내에까지 높이 쌓여 있었다온통 흰색으로 된 세상설국이었다온도와 습도색깔이 터널 저쪽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었다말 그대로 딴 나라였다.

기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동안 차창 밖으로 플랫폼에까지 날아와 쌓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청소나 정리를 잘하는 일본인들의 기질로 미루어봤을 때 역 구내에 이만큼 눈이 쌓인 건 몇 시간 만의 일일 것이 분명했다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의 방문에 맞춰 폭설을 내려준 조물주에게 감사했고이제 기차에서 내려 걸어가게 될저 멀리 보이는 시골길의 풍경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p. 43]

아마 이때 저자의 기분은 해리포터가 9 3/4 플래폼을 지나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도착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줄거리의 소설이 아닌 이미지의 소설

 

피천득의 <인연>은 피천득과 아사코[朝子] 3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그리고 있다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도 어떻게 보면부모의 유산으로 살아가면서 서양무용 평론가를 자처하는 기혼자 시마무라[島村]와 병든 약혼자의 약값과 병원비를 대기 위해 게이샤[藝者]가 된 코마코[駒子] 3차례 만남그리고 코마코의 친구인 요오코(葉子)와의 만남을 주된 이야기로 하고 있다.

줄거리만 보면 불륜을 다루는 로맨스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국>은 노벨 문학상을 받고일본문학 사상 최고의 서정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다행히 저자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설국>을 읽고 실망했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재미가 없다는 반응에서부터 너무 밋밋하다” “이해하기 어렵다”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내 생각에 이런 반응은 <설국>에 대한 잘못된 접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설국>은 인과관계가 분명한 여타 소설과는 조금 다른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우리가 소설에 접근하는 익숙한 방식인 줄거리 위주 독법이나 기승전결을 염두에 둔 흔한 독법으로 읽다 보면 <설국>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암시적 장치를 놓치고 만다.

결론부터 말하면 <설국>은 일종의 '암시 소설'이다. <설국>에는 사건과 그 사건들이 결합해 결말로 향해 가는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게다가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감정 표현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설국> 줄거리의 소설이 아니라 이미지의 소설이다. <설국>에서 나오는 모든 배경은 일종의 논리가 아닌 이미지다시마무라[島村]가 살고 있는 도쿄라는 현실 세계가 아닌 터널 밖의 세계즉 에치고유자와[越後湯]라는 이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p. 62]

 

결국 <설국>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읽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국>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한 행 한 행시를 읽듯 이미지를 읽어나가는 것이다읽으면서 소설 전체의 인과관계를 찾거나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그냥 나열된 이미지 하나하나를 감상하듯 읽어야 한다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독자 스스로 어떤 종합에 이르게 된다.” [pp. 82~84]

 

 

허무와 체념의 미학

 

그렇다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왜 이런 이미지의 소설을 썼을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오사카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하지만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버지어머니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채 자라난다두 살 때 아버지가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부모가 사망한 후 이바라키에 있는 조부모 집에서 살았지만 일곱 살에 할머니가열 살 때는 누나가 세상을 떠난다그리고 결국 마지막 보호자였던 할아버지마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시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장례의 명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의 초반 생은 죽음과 이별로 점철되었다.” [pp. 134~135]

뿐만 아니라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 재학 시절 사귀게 된 첫사랑의 소녀 이토 하쓰요[伊藤 初代]에게 일방적으로 파혼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마도 이렇게 삶의 환희보다 죽음의 허무그리고 체념을 먼저 배운 그의 삶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진 듯한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닐까?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관해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삶을 살았고 글을 썼다”고 말한 적이 있다동시에 그는 “작품을 통해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며자신은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고도 덧붙였다어떤 주장도 힘주어 말하지 않는 습관이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치고는 꽤나 단정적인 발언이었다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철학과 문학적 지향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고백이다그에게 현실은 죽음이었고죽음은 자연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허무하고 아름다운 궁극 같은 것이었다이런 세계만을 바라본 그에게 현세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나 승패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p. 243]

 

어쩌면 그는 벚꽃이 지듯 스러져 가는 일본식 죽음의 미학을 삶과 글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래서 저자도 나는 그를 떠올리면 늘 벚꽃이 생각났다죽기 직전의 모습이 이다지도 화려한 꽃이 벚꽃 말고 또 있을까벚꽃은 절정의 시기를 잠시 보여주고 꽃비가 내리듯 소멸을 향해 간다어느새 돌아보면 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른 잎만 남는다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알려주듯이바라키의 벚꽃도 그렇게 영혼처럼 떨어져갔으리라” [p. 147]고 말한 것이 아닐까?

 

저자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을 허무만으로 얘기하지 않는다아예 직설적으로 체념의 문학이라고 말한다흔히 체념이라고 하면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한다는 것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데여기서는 반대로 이치나 도리를 깨닫는 마음을 의미한다.

체념이라는 단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내내 나를 따라다닌 ‘화두’였다체념한다는 것그리고 그 체념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그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체념에는 체념이 주는 힘이 있다깊은 체념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체념이 힘이 된다는 것을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내가 원고의 첫 행을 쓰는 것은 절체절명의 체념을 하고 난 다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희망보다 체념을 먼저 배운 자는 잔치가 끝난 다음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안다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그 흔적들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공간에서 몸을 일으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분명 색다른 미학이다모두 다 끝났다고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코피를 쏟는 일’그것은 체념의 도를 깨우친 자만이 찾아낼 수 있는 표현이다.” [p. 138]

절망과 허무를 극복한 긍정적인 그 무엇이 체념인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에 대해 잘 모르겠다그저 영상으로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뿐학창시절에 읽었던 <설국> <천우학(千羽鶴)>을 다시 읽으면 이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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