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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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는 것

 

외(外)’지인, ‘외(外)’계인, ‘이(異)’종족 등이 등장하는 소설, 영화, 만화들은 많다. 그런 작품에서 그들은 종종 나와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도구로 활용된다. 유명한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처럼. 동시에 이런 ‘다른’ 존재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도구의 역할도 한다.

 

이 소설 <나인>을 읽다가 문득 영화 <슈퍼맨>이 떠올랐다. 평범한 지구인처럼 키워진 클라크 켄트(Clark Kent)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히어로(Hero)로 활동하는 영화 말이다. <나인>의 주인공 ‘유나인’도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자라왔다.

 

평범하게 살던 주인공이 어느 날 자신의 힘을 깨닫고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나, 옆집의 친절한 이웃이 사실 영웅이었다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것이 삶에 일어나지 않을 판타지를 대리 만족 할 수 있어서였다. 나인도 한때 자신이 밤에는 세상을 구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새벽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웅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은밀하게, 자신은 영웅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는 걸, 아주 평범하거나 혹은 평범하기 위해 아등바등 헤엄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듯이. [pp. 238~239]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인에게 식물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손톱 사이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이상현상이 발생했다. 심지어 환영(幻影)처럼 보이는 소년마저 등장한다. 당연히 자신을 평범한 지구인이라고 여기고 살아왔던 나인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때 헛것인줄 알았던 소년, ‘해승택’이 그녀가 인간이 아니고 식물이라고 얘기한다. 여기에 나인의 이모로 살아왔던 ‘유지’, 즉, 지모(유지 이모의 약칭, 이하 ‘지모’)는 이제 와서 그녀가 멸망위기의 행성에서 탈출한 누브족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안 그래도 질풍노도의 사춘기인데, 자신의 정체성 문제까지 겹치니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울까?

 

 

진실을 밝힌다는 것

 

“이거 하나는 약속해 주라. 아무리 답답하고 화가 나도 네 능력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절대.”

“어렵지는 않은데……. 우리 종족이 위험해져서?”

“아니. 그 말 한마디로 인간들은 네가 뱉은 모든 말을 거짓말로 여길 테니까.”

나인은 이런 말들을 뼈에서 나온 말이라 표현했다. 깊은 상처는 뼈에도 흔적을 남기는 법이니까.

인간들은 그래. 믿을 수 없는 게 하나 생기면 모든 걸 다 가짜로 만들어 버려.” [p. 144]

 

누브족의 식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통해 나인은 2년 전 자취를 감춘 학교 선배 ‘박원우’ 실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문제는 진실을 안다고 해도 나인과 그 친구들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나인이 누브족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쉬운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누브족이라는, 외계인이라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다.

 

다른 존재가 이 행성의 생태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했어. 우리는 바깥에서 온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곧 떠날 테니까. 나는 그래서 그게 맞는 줄 알았어. 관여하지 않는 거. 우리는 처음부터 이 행성의 법칙에 끼어 있지 않았으니까. [p. 142]

 

다음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수사가 종결된 사안을 당사자도 아닌, 고등학생 몇 명이 나선다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재수사할 리 없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박원우 실종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심이 된, 일종의 스릴러 소설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진실은 박원우 실종사건과 관련된 것 하나가 아니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입장을 우리는 ‘공리주의(功利主義)’라고 한다. 구체적인 예시를 한 번 들어보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치 큰 사람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려 선로를 이탈한 전차를 막는 행위를 꺼렸던 일은 떠올려보라. 그 사람의 삶은 그에게 속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를 밀기가 꺼려지지 않았던가? 그 덩치 큰 남자가 자기 목숨을 던져 철로의 인부를 구했다면, 그 행동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어쨌거나 그의 삶이니까.

하지만 명분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의 목숨을 우리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라는 얘기가 있다. 공리주의 원칙에 따르면, 보다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덩치 큰 사람을 다리 아래로 밀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최선일까?

 

외곽 도로에 쓰레기를 몰래 버리고 가는 사람들을 지모가 전부 신고했을 때 신고 당한 사람들이 내뱉은 말이었다. 남의 집 앞도 아니고 차만 다니는 길에 쓰레기 좀 버린다고 누가 피해 보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좀 있지, 꼭 저렇게 본인만 정의롭다는 식으로 굴어야 속이 편한가. 지모의 등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리던 아저씨의 말을 나인은 십 년이 지나도록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뿐이 아니다. 특수 학교 설립에 찬성했을 때도 대부분의 주민이 지모를 그런 눈초리로 흘겼다. 가만히 좀 있지. 애도 없는 아가씨가 뭘 안다고 자꾸 말을 얹어. 땅값 걱정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지. 모르면 말을 말든가.

중략 ~

소수가 다수를 이기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게 구는 것이라고. [p. 138]

 

이 이야기에서 누가 다수이고, 누가 소수인가?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람의 숫자가 아닌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의 숫자까지 따지면 오히려 지모가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 우리가 멸종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것만 멸종일 수 있니?”

나인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 선배는 세상에 딱 저 선배 하난데 사라졌잖아.”

말을 할 때마다 비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비를 다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말해야 했다.

중략 ~

“…… 근데 내가 들었어. 저기 있다는 거 내가 알았는데 나야말로 그걸 어떻게 모르는 척해. 사람 한 명이 지구에서 멸종했는데.” [pp. 140~141]

 

한 명의 사라짐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멸종’이라고 얘기하며 그 또한 엄청난 일이라고 말하는 나인의 관점은 사소한 것을 사소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단기적인 최선, 최대의 행복이 아닌 장기적인 최선, 최대의 행복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나인의 시각이 옳은 것이 아닐까?

 

누브족이 자신들이 살던 행성, 리겔리에서 떠나 지구로 이주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더욱 나인의 생각이 옳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주선의 정원을 맞추기 위해, 식량의 확보를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었으니,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 현실에서 구현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세상의 모든 일에는 중요도가 있다. 누구든 소중하지만 어떤 죽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죽음은 살인자의 한 끼보다도 보잘것없다. 그렇게 어떤 일은, 죽음은, 억울함은, 호소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밀려 세상 밖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걸, 그렇게 사라지지도 분해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로 우주를 떠돌게 된다는 걸 미래는 아직 모른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지만 조금씩 알게 되겠지. 그걸 알아 가는 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이를 먹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것도 알게 됐으면 한다.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p. 376]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틀린 것이 아니라 여기고, 다름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야 복잡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신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짜 어른이 아닐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힘든 일이라고 포기해버리면 그건 어른이 아니다. 나이를 먹어 생물학적으로 어른이라고 보아야 하더라도.

 

1)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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