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하, 나의 엄마들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95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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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위해 팔려간 신부가 되다

 

버들의 아버지, 강 훈장은 과거에 급제해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고 썩은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초시(初試)에 합격한 후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양반이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과거가 폐지되자 그는 갑자기 먹고 살길이 없어졌다. 운 좋게도 소 장사로 돈을 벌어 양반 신분을 산 어진말의 안 부자가 훈장으로 초빙해서 비로소 강 훈장은 곤궁한 처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주천에 보통학교가 생기자 강 훈장은 맏아들과 버들을 보내 신학문을 익히게 했다. 하지만 버들네 가족이 누릴 짧은 행복은 강 훈장이 일제에 대항해 의병 활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고, 이어 맏아들도 길에서 행인들을 괴롭히는 순사에게 대들었다가 말발굽에 채여 세상을 떠나면서 사라졌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여자라는 이유로 버들은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고, 이후 남동생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며 부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년에 한 두 차례 버들네 집을 방문하던 방물장수 부산 아지매가 사진결혼을 권한다. 먼 나라, 미국의 포와(布?, Hawaii)라는 동네에 사는 9살 연상의 서태완이라는 사내였다. 버들에게는 다행스럽게 단짝친구였던 홍주도 사진결혼을 하기로 했다. 남편의 사별 후 산송장처럼 살아야 하는 과부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산 아지매 집에서 그녀들은 또 한 명의 사진 신부를 만난다. 수리재 무당 금화의 외손녀 송화였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의병의 딸, 과부, 무당의 손녀라는 핸디캡을 가진 그녀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포와로 가는 이민선에 올랐다.

 

하와이에서 일한 돈을 고향에 보내 주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방물장수의 얘기와는 달리 하와이에서의 삶은 신랄(辛辣)했다. 사진 결혼은 결혼 상대방의 조건은 물론 외모도 사진 속 모습과 다른 경우가 많았다. 자유연애 같은 결혼을 꿈꾸는 홍주는 연상의 남자를 선택했지만 막상 남편으로 나온 것은 자기보다 서른한 살이나 더 많은 마흔아홉의 조덕삼이었다. 천대받던 무당 외할머니의 손녀라는 처지에서 벗어나 새 삶을 꿈꾸었던 송화도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카락이 허연, 게다가 게으르고 노름하고 술주정이 심한 박석보가 남편으로 나타난다. 버들은 그나마 사진 속 모습과 똑같은 스물여섯 살 서태완을 만난다.

 

 

버들 가족의 정착 과정과 하와이 교민의 삶

 

하와이는 흔히 외교독립론을 펼친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텃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무장투쟁론을 주장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 1881~1928)가 하와이로 건너가 1913년 1월에 지방자치규정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5월에는 하와이 지방정부로부터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이하 ‘하와이 지방총회’)를 자치기관으로 인정받아 새로운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먼저 모든 회원에게 사실상 세금인 국민의무금을 받아 재정을 충실히 하였고, 여기에 파인애플 농장의 도지권(賭地權)을 제공한 박종수 등의 후원을 바탕으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과 군사학교를 창설하였다. 1919년에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 앞서 하와이에서 사실상의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1915년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항의로 특별경찰권이 취소됨으로써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권이 박탈되고 군사훈련이 중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파인애플의 흉작 등으로 재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농장주마저 계약을 취소하자 결국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은 해체된다. 여기에 그가 하와이 정착을 도와준 의형제 이승만과의 대립은 또 하나의 타격이 되었다. 1915년 하와이 지방총회 총선거에서 박용만계의 김종학이 압도적 표차로 당첨되자, 이승만은 개혁을 명분으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여 사조직화하였다. 이로서 무장투쟁을 위해 박용만이 하와이에 마련한 기반은 의형제였던 이승만에게 모두 탈취당했고, 두 사람의 지지자들은 거의 원수가 되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도 박용만 지지자[1919년 3월 이후 독립단]와 이승만 지지자[1921년7월 이후 동지회] 간의 갈등이 여러 차례 묘사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이미 이승만 지지자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기에 박용만 지지자인 서태완은 이승만 지지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 카후쿠(kahuku)에서는 서태완이 관리하던 농장에서 일하던 이승만 지지자들이 이탈하고, 호놀롤루(Honolulu)로 이사한 후에는 서태완이 이승만에게 불리한 기사를 썼다고 해서 이승만 지지자에 의해 테러를 당한다. 끝내 서태완은 박용만을 따라 만주로 가서 통의부(統義府) 의용군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총상으로 다리를 다치고 천식에 걸려 돌아왔다.

 

버들의 아버지 강 훈장도, 큰 오빠도, 심지어 남편도 독립운동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던졌다. 이들의 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을 뒷받침했던 여성들의 희생덕분이었다. 버들의 어머니 윤씨도, 버들도. 그녀들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그녀들에 대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누가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을까?

 

버들은 감히 하올레[=백인]의 일원인 롭슨가의 안마당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그녀가 겪은 수난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일본인 재봉소 옆에서 조선 문양의 자수품을 팔았고, 이를 시기한 재봉소의 일본인은 그녀의 아들 정호에게 아들이 대야의 물을 뿌렸다.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아들을 위해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는 그녀를 보면 나라 잃은 백성의 분함과 서러움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녀들이 항상 이런 고난을 겪는 것은 아니다. 기혼자라는 사실을 속이고 결혼한 남편을 버린 홍주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버들이 함께 세탁소와 재봉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마치 한겨울에 잠시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것 같아서 미소를 짓게 하는 부분이었다. 누군가에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고 나아가는 삶을 사는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아름답게 보일 수 밖에 없다.

요즘도 결혼 후 스스로의 삶을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누군가의 남편, 아내, 아빠, 엄마로 사는 경우가 있다. 아니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제법 많은 이들이 현재의 삶을 희생하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 알고 있다. 하물며 일제 강점기, 아니 1917년에야…….


만약 이야기를 이어갔다면 대하소설이 될 것 같아서였을까? ‘판도라의 상자챕터 이후 작가는 서둘러 화자를 버들에서 펄로 바꾸고 글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버들의 딸로 살아온 펄[=진주]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들이 어떻게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렸는지를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생략되어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땅에서도 연대를 통해 버티고 뿌리내린 그녀들의 삶에 삼가 경의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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