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싱 유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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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할런 코벤의 신간 <미싱 유>를 읽었다. 영국 출신의 가수 존 웨이트가 1984년에 불러 대히트를 기록한(그의 유일한 넘버원 싱글이다) 동명의 곡을 모티프로 해서 할런 코벤은 책을 잡는 순간 도저히 손에서 뗄 수 없는 그런 마력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최근에 읽은 스릴러 중에서 개인적으로 최고의 몰입도를 자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이야기는 뉴욕 경찰 캣 도노반이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스테이시의 꾀임에 빠져 온라인 데이팅사이트에 가입하면서 비롯되었다. 독신자들이 우글거리는 데이팅사이트에서 그녀는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18년 전에 그녀의 약혼자였던 제프 레인스의 사진이었다. 존 웨이트의 노래를 즐겨 듣던 그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캣은 고심 끝에 <미싱 유> 뮤직비디오 링크를 그에게 보내지만 그의 냉담한 반응에 절망한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다. 18년 전, 조폭 코존의 살인청부로 아버지 헨리가 죽은 트라우마에서 캣은 여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아직까지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실연과 아버지의 비명횡사, 이것만으로 충분히 소설을 이끌어갈 만한데 할런 코벤은 또하나의 미스터리를 장착한다. 펜실베니아 아미시 농장의 상자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는 설정이다.

 

여전히 매력적이고 미남인 제프 레인스가 독신여성을 꾀어 밀월여행을 다수의 여성들에게 수차례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캣은 이중 충격에 휩싸인다. 아내와 사별하고 십대 딸을 키우며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존 웨이트의 노래 가사처럼 떠난 연인을 가슴으로는 그리워하면서도, 말로는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부정의 감정이라고나 할까. 코네티컷의 부유한 마을 그리니치에 사는 브랜던 펠프스라는 소년이 찾아와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찾아 달라는 요청을 캣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브랜던의 엄마 데이나와 함께 떠났다는 남자가 바로 자신의 옛 연인 제프였다는 사실에 그녀는 경악한다. 이별의 정당한 통보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제프가 신원마저 감추고 지난 18년간을 살아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데이팅사이트에서 부유한 여인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가정에 주인공 캣은 당황스럽다.

 

스릴러 장르의 고수답게 할런 코벤 작가는 갖가지 장치들로 독자들의 호기심과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미싱 유>에서 극한까지 밀어 붙인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초반에 내러티브 좌판에 늘어놓으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부터 시작해서 사라진 연인의 미스터리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는 아미시 농장의 타이터스란 미지의 인물에 대한 범죄행각 등은 절제된 미장센처럼 일관되게 매력적이다. 어쩌면 코벤은 소설의 영화화까지 고려한 게 아닐까. 이 정도 스토리라면 충분히 영화화되어서도 흥행가도를 달릴 수 있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작가는 독자들이 바로 인지할 수 있는 일반적인 정보들을 제공해 주고는, 보이는 대로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사실 이야기가 그렇게 진부하게 진행된다면 스릴러 소설 고유의 변별력이 가지는 재미가 반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수는 긴장감을 후반부까지 유지하는데 특별하게 공을 들이면서 역시 결말에서 기다리고 있는 과거의 사건을 일거에 뒤집는 ‘한방’을 대기시켜 두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에 대한 존재론적 비판도 주목할 만하다. 왜 사람들은 일반적 만남이 아닌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로맨스에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직접대면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에서 자유롭고, 감정의 소모가 적다는 장점도 있지만 소설에 나오는 타이터스 같은 악당에게 걸릴 수 있다는 위험을 작가는 조심스럽게 피력하고 있다. 타인의 신원을 도용해서 감정을 다루는데 있어 서툰 이들을 유혹하는 범죄자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브랜던의 해킹도 엄마를 구하는 방편이라는 긍정적 시선으로 본다면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반대로 얼마든지 나쁜 방향으로도 전환이 가능하지 않은가. 어쩌면 작가는 세상만사는 그렇게 양지와 음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빨간 원숭이해의 첫 번째 달을 마무리하는 책으로 할런 코벤의 스릴러 <미싱 유>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늦은 밤에 주로 읽느라 몸이 피곤하긴 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정말 다 읽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을 정도였다. 리뷰를 쓰기 전에 존 웨이트의 <미싱 유>의 뮤직비디오를 감상했는데, 32년이다 된 곡이지만 가사와 멜로디를 통해 곡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여전했다. 할런 코벤의 신작이 올해 또 나온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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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 새로운 희망 - 공주, 건달 그리고 시골 소년 스타워즈 노블 시리즈 4
알렉산드라 브래컨 지음, 안종설 옮김, 랄프 맥쿼리.조 존스톤 그림, 박상준 감수, 조지 / 문학수첩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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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 새벽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수중에 넣었지만 앤 타일러의 신간과 재니스 윤경 리의 소설을 읽다 보니 좀 밀렸다. 단숨에 100쪽 가까이 읽고 나서, 작가에 대해 궁금해졌다. 이름을 보아 하니 여류작가로 보이는데 누구지?하는 생각으로 인터넷 검색에 나섰다. 참 세상 좋아졌다. 예전 같으면 제법 품이 드는 정보검색이라는 일이 구글과 위키피디아 덕분에 이렇게 편해졌으니 말이다. 브래컨은 놀랍게도(?) 1987년생으로 <어둠의 영혼들> 3부작으로 미국에서 성인 판타지 장르 작가로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작가라고 한다. 2014년 11월에 스타워즈 시리즈 4편에 해당하는 <새로운 희망>을 소설화하는 작업을 제안받게 된 것이 바로 이 책이 탄생하게 된 계기였다.

 

작년말에 <스타워즈> 시리즈 새로운 에피소드가 개봉하면서 전세계적인 흥행몰이에 나섰지만, SF장르가 유독 맥을 추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스타워즈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많은 흥행인원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본토에서 보여준 반응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극장에 스톰트루퍼 헬멧을 쓰고 나타난 사람부터 시작해서, 웅장한 음악과 함께 그 유명한 자막이 은하계로 흘러가는 장면에서는 모두가 괴성을 지르며 영화와 일체화가 되는 경험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근 40년간에 달하는 유구한 영화역사 속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선 스타워즈 신화에 도전한 이십대 작가의 패기를 격려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스토리라인은 기존의 영화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팰퍼틴 황제가 지배하는 은하계 해방을 위해 싸우는 반군 대열에 레아 공주와 건달 한 솔로 그리고 시골소년 루크 스카이워커가 합류하면서 제국의 가공할 무기인 죽음의 별(데스 스타)을 파괴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의 맥락을 그대로 따라간다. 초반의 작가가 명시한 대로 스타워즈 시리즈는 시간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소설은 현재진행형이면서 동시에 과거에서 이어진 운명과 싸우는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사에 얽힌 비극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브래컨 작가는 러닝타임을 고려해서 영화에서 표현할 수 없었던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표현하는데 특별히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공주>편에서는 레아 공주가 얼데란란 행성의 공주에서 반군 투사로 거듭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녀는 팰퍼틴 황제의 오른팔로 아무런 감정 없이 자신의 고향별을 통째로 없애 버리는 결정을 내린 다스 베이더의 포로가 되지만, 제국의 폭압적인 지배로부터 은하계를 해방시키겠다는 그녀의 결연한 의지는 흔들림이 없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는 고대 세계 이래 계속해온 투쟁의 역사가 영화/소설에서도 그대로 반복 변주된다. 대의를 가지고 싸우는 전사들에게 반동의 강제와 억압은 역설적으로 원심력으로 작동한다. 다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은하계에서 사라져 버린 얼데란란 행성의 무고한 수십억 인류의 운명은 대의와 생존이라는 가치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전통적 질문을 독자에게 숙제로 남겨준다.

 

레아 공주에 비하면 건달이자 밀수꾼 그리고 훗날 반란군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한 솔로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은하계의 손꼽히는 악당인 자바 더 헛의 물품을 제대로 취급하지 못한 죄로 엄청난 금액의 현상금이 걸린 한 솔로는 코파일럿 우키 츄이와 함께 산전수전 그 중에서도 주로 공중전을 숱하게 겪은 밀레니엄 팔콘의 베테랑 선장이다. 레아나 루크 스카이워커처럼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투사가 아닌 개인의 생존과 영달에 더 관심이 많은 현대인의 자화상이라고나 할까. 벤 케노비와 루크를 얼데란 행성까지 데려다 준다는 조건으로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참가하게 되지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을 잊지 않는 멋쟁이로 변신에 성공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루크 스카이워커는 타우인 행성 출신의 ‘꼬마’로 제국군에게 그동안 자신을 키워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잃고 제다이 기사의 길로 인도해준 벤마저 희대의 악당 다스 베이더에게 잃은 그야말로 더 이상 아무 것도 잃은 게 없는 그야말로 천둥벌거숭이 같은 존재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스(the force)의 인도를 따라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전형 같은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약간의 막장드라마답게 출생의 비밀도 안고 있는 캐릭터로 시리즈에서 계속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희망>에서는 우주 최고의 조종사 애너킨 스카이워커의 아들답게 처음 몰아보는 반군의 엑스윙를 타고 철벽수비를 자랑하던 데스스타의 심장부에 양성자 어뢰를 명중시키면서 일약 스타가 된다.

 

영화에서 파생된 원소스멀티유즈 전략이 이제는 소설판에까지 도달한 모양이다. 지금으로부터 39년 전 조지 루카스가 창조한 현대판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여전히 순항 중이다. 기본 내러티브를 충실하게 지키면서도 세부적인 부분을 가다듬어 멋진 소설로 만들어낸 스타워즈 기획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언제나처럼 포스가 그대와 함께 하길. May the force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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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는 여자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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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텔레비전에서는 쿡방 먹방이 대세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방송에서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현란한 요리 대결로 시각과 상상의 미각까지 충족시켜주며 웃음까지 선사해 주니 더 바랄 게 없는 그런 포맷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의식주란 그런 점에서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식(食)은 그렇다 치고 의(衣), 다시 말해 옷은 어떨까.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요리와 달리 절대적 시간이 부족한 옷짓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 같다.

 

김숨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진짜 품이 많이 드는 누비 바느질에 수개월 동안 직접 도전했다고 하는데, 아마 남성작가였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다. 요리고 뭐고 뭐든 남자가 못하는 일이 없는데 바느질은 과연 어떨까. 작가는 바느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바늘에 대한 집착을 넘어 강박을 가진 소녀 서금택과 그녀의 여동생 주화순 그리고 진짜 바느질하는 여자인 그녀들의 어머니 군위네(남수덕)를 차례로 등장시킨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요 화자는 바로 금택이라는 9살 먹은 소녀로, 작가는 어머니의 유일한 딸이고자 하는 바라서는 안되는 금단의 욕망을 가진 그리고 어머니의 바느질하는 손을 가지고 싶어 하는 갈망에 가득한 내면세계를 한 땀 한 땀 누비 바느질하는 정성으로 담담하게 스케치해낸다.

 

김숨 작가 특유의 느릿한 서사구조에 나(서금택)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이 숨어있다. 어머니 남수덕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화자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한복거리 부령할매네 집에서 살던 그녀를 데리러 온 순간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작가는 온몸을 비트는 독자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설의 방대한 초반부를 한 벌의 누비옷을 짓는 군위네의 삶을 묘사하는데 아낌없이 투자한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그렇듯, 그런 순간을 이겨내야 비로소 <바느질하는 여자>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어느 순간을 소설을 덮어 버릴 지도 모르겠다. 한복거리에서 우물집으로 공간이동한 세 식구의 삶은 어머니가 어느 날 딸들에게 바늘을 건네주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다. 그 귀한 바늘은 마치 어머니와의 애정을 상징하듯 애지중지하는 금택에게도,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해 보이던 화순에게도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도 몰랐다.

 

두 딸들에게 어머니는 공평했다. 모든 것을 공평무사하게 나눠준 어머니의 모습이 단조롭게 서술된다. 어머니를 욕망했던 금택보다 수많은 땀을 거쳐 누비옷을 짓는 어머니의 기술은 오히려 화순에게 전달된 것처럼 보인다. 소설을 읽는 동안, 어머니와 딸들의 관계는 수없이 되풀이되지만 이상하게 세 여자에게 부재한 남성 즉 다시 말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독자들은 어머니의 남편이자 딸들의 아버지에 대한 관심을 증폭된다. 한창 근대화란 이름 아래 개발독재가 진행되던 1970년대 중후반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바느질하는 여자>에서 이미 어머니는 시대에 뒤진 여자라는 사실을 금택은 깨닫게 된다. 바느질하는 여자들은 바느질을 해서 먹고산다. 인간에게 필요한 의복은 특별한 기술이 없다면 자급자족할 수 없는 재화이기 때문에 대부분 비용을 지불하고 사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에서 누비 바느질로 대변되는 옷짓기는 소설쓰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두 가지 모두 생산자가 최종소비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쨌든 바느질하는 여자들은 자신의 기술, 노동을 통해 쌀과 소금을 사고, 연탄을 사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단조로운 그녀들의 삶에 김숨 작가는 어머니의 고객들이 물어다 주는 세상 이야기를 결부시키면서 소설의 외연을 확장시킨다. 바늘과 누비 바느질에 강박하는 금택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녀들의 수다가 기다려지기도 했다.

 

어머니의 곁을 맴도는 금택과 달리 화순은 언제나 귀기 서늘한 우물집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결국 나이가 찬 화순은 대구의 대학교 의상과로 진학해서 우물집을 떠난다. 하지만 그녀보다 공부를 더 잘했던 금택은 집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의 곁을 지킨다. 어머니와 금택은 자연에서 먹거리와 천을 염색할 푸새거리들을 찾는데 진력한다. 광목과 명주 같은 단순한 천을 이용해서 그렇게 다양한 빛깔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작가가 직접 서울과 경주를 오가며 바느질을 배웠다고 하는 물리적 노력이 소설에 한 땀 한 땀 배어있다는 그런 느낌이랄까.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대학에 들어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깨닫게 된 화순은 지금껏 자신들의 생활을 뒷받침해준 어머니의 단골들이 사실은 어머니를 착취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더 나아가 공장에 위장취업도 마다하지 않는 운동가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곁눈질해 배운 누비 바느질로 배냇저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 화순의 모습이 근대화에 상응하는 입체적 캐릭터라고 한다면,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어머니 곁에서 배회하며 사는 금택의 모습은 답답하기만 하다.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기만을 바라는 걸까.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운명이 어떻게 귀결될 지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과연 소설의 결말을 담담하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어머니와 금택의 조용한 세계에 파문을 던진 인물로 재숙이 등장한다. 금택의 어머니가 누비 바느질에 집착한다면, 어머니에게 누비 바느질 전수를 원하는 재숙은 다른 종류의 것에 집착한다. 그것은 바로 전통 누비 바느질이 가져다 줄 성공신화다. 아무리 세상만사가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미싱으로 대변되는 근대화시절에 전통복원을 하겠다는 이가 정작 자신이 해야할 일을 타인에게 미루고, 자신은 그 열매만 집어 먹겠다는 양태는 전문가 집단의 허상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비판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비정상의 정상화가 일상화가 되어 버린 시절에 전통 누비 연구소를 찾아 재숙의 양심에게 화순이 던진 일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느질하는 여자>는 속도가 나지 않는 그런 책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언제나 그렇듯 뿌듯한 성취감이 돋아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숨 작가의 단편소설 <국수>도 읽었는데 뭐랄까 이제서야 작가의 스타일이 잡힌다고나 할까. 남성이 배제된 공간을 지배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국수>에서 밀가루를 반죽하는 시간이 고민과 갈등을 해소하는 시간이었다면, <바느질하는 여자>에서는 누비옷을 짓는 그리고 누비대를 떠나지 않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금택의 시간이 그랬던 것 같다. 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에서는 또 어땠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녀가 아닌 같은 여성들간의 갈등은 보다 미묘하면서 첨예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들이 끝없이 등장하는 제임스 설터의 유작 <올 댓 이즈>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 읽고 나서의 감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드디어 내일 모레 달궁 독서모임이다. 이번 모임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게 될까 기대가 된다.

 

[뱀다리] 소설읽기의 맥을 끊게 하는 오자가 너무 많다. 과연 이 책 교정은 본 걸까 싶을 정도로 많은 오자가 남발돼서 별 한 개를 줄였다. 앞으로 신경을 좀 써 주셨으면 좋겠다.

 

[뱀다리2]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비가 자신의 몰락한 한황실의 후손이라고 맨날 약파는 중산정왕 유승(희대의 정력왕이자 자식부자)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금루옥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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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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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리스트에서였던가 이 책의 제목을 내가 처음으로 발견했던 건. 뭐 상관없다. 그렇게 내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 정세랑 작가의 책을 오늘에서야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중고서점의 서가에 꽂힌 책들 가운데 발견했던 순간의 반가움. 프란츠 카프카의 책과 함께 사가지고 의기양양하게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다음 주말까지 읽어야 하는 김숨 작가의 <바느질하는 여자>와 어제 읽기 시작한 같은 작가의 <국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음에도 나의 독서관심은 명랑학원가를 출몰하는 퇴마사 안은영 샘의 이야기에 온통 쏠려 버렸다.

 

소설은 진도가 나갈수록 유쾌발랄해지는 심층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인들에게 적극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아닐 수 없다. 모처의 어느 사립 M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똘기충만한 보건교사 안은영 샘의 정체는 비비탄 총과 플라스틱 장난감 칼로 무장한 퇴마사다. 뭐 워낙에 희한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보니 퇴마사라는 직업이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과연 자신이 원해서 퇴마사가 되었을까? 원래 직장이었던 병원을 떠나, 에로에로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학교로 전직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악한 정령을 퇴치하는 임무에 전념 중이다. 그 와중에 같은 학교 한문샘이자 설립자의 손자인 홍인표와 썸을 타는 사이기도 하다. 장르소설로 빠지지 않는 요소들을 두루 갖춘 <보건교사 안은영>의 출발이 그래서 반갑다.

 

하도 오래 전에 청소년의 삶을 졸업해서 그런지 요즘 청소년들은 무얼 보고, 무얼 먹으며 사는지 관심이 없었다. 굳이 핑계라고 한다면 내 살이도 못지않게 바빠 서라고나 할까. 내 아이가 자라서 그 때쯤 되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겠지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아주 먼 시절의 걱정일 따름이리라. 정세랑 작가의 유쾌발랄한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것도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다. 어려서부터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어쩌면 퇴마사가 되어 살아갈 팔자의 징조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가여워 하고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유머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능력이라면 능력일 것이다. 책을 읽을수록 주인공 안은영 샘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구성도 마음에 든다. 일단 학교에서 벌어지는 원령들의 격렬한 공격을 막아낸 은영과 인표의 일대 사건을 필두로 해서, 다음 에피소드는 좀 가벼운 이야기로 교차편집된다. 은영이 어떻게 해서 이 업계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인표샘이 가진 쉴드에서 에너지 보충도 하고 유사 데이트를 하면서 역시 에로에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장면도 유쾌하다. 인간의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생산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방전시키는 순환의 과정이 아니었던가. 인표샘의 에너지 쉴드를 노리고 허리춤 공격을 하는 또 다른 능력자 맥샘의 공격을 막아내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그렇게 21세기 대한민국 공교육의 사각지대를 기막히게 파고드는지. 군대로 치자면 연예병사에 해당하는 연예인 김래디의 집에 출입하면서 역시 펑크가수인 그녀의 아버지 장학춘 씨의 아니 조슈아 장의 옛 애인 귀신을 퇴치하는 시퀀스도 역시 명장면의 하나로 꼽고 싶다.

 

그렇다고 정세랑 작가가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도 아니다. <온건 교사 박대흥> 편에서는 지난 가을 전국을 강타했던 국정교과서 파동의 연장성에 있는 교학사 교과서 채택 건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기도 한다. 부실한 역사서술에서부터 시작해 오류투성이 교과서가 교과서시장에서 퇴출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유일하게 제대로 된 교과서라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현장에 대한 스케치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의 합리적 선택 대신 정무적 판단을 가미한 선택을 강요하는 관리자의 모습이 어찌나 그렇게 비루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현실세계의 미묘한 문제에 대해 정세랑 작가는 장르소설의 작가답게 주술적인 방법으로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더 화끈한 결말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좀 아쉬웠지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전설답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섰다가 낭패를 당하는 사랑꾼 인표샘과 은영이 다시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그런 해피엔딩으로 일단은 마무리를 짓는다. 아마 이 정도 캐릭터라면 작가가 애정을 갖고 후속편에 써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 들어 좀 재밌는 책을 읽고 싶었는데, <보건교사 안은영>이 딱 그런 책이었다. 요즘 한국 소설이 위기라고 하는데, 이렇게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우리 작가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순문학은 순문학대로 그리고 장르소설은 장르소설대로 읽었으면 좋겠다. 모든 소설이 진중하게 가는 것도 독서 생태계의 다양성을 위해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정세랑 작가에게는 부디 <보건교사 안은영>의 후속작을 언제고 발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럼 냉큼 사서 읽을 테니까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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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 살베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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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에 리디 살베르의 공쿠르상 수상작인 <울지 않기>를 읽고 나서 시간이 제법 흘렀다. 바로 리뷰를 썼어야 했는데, 천성이 게으른 지라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새해가 열하루나 지나가 버렸다. 개인적으로 리뷰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바로 써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데, 늦고 말았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참 간사한지라 책을 읽으면서 강렬한 느낌을 받지만 기록해 두지 않으면 바로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리디 살베르의 소설은 방점을 찍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를 잊지 말자고.

 

소설 <울지 않기>는 두 명의 실존 인물의 교차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한 명은 프랑스 태생의 보수 가톨릭 작가인 조르주 베르나노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절대자유주의(아나키즘)가 물결치던 뜨거운 여름의 추억을 간직한 작가의 어머니 몬세다. <울지 않기>는 물론 사실이면서, 작가 리디 살베르의 소설화의 과정을 거친 이중적 구조다. 시공간적 배경은 1936년 7월의 에스파냐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필두로 한 일단의 군인들이 공화정 에스파냐를 무너뜨리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다. 정당한 선거로 선출된 민주주의 정부를 뒤집기 위해 집결한 과거 수백 년 동안 에스파냐를 지배해온 기득권층은 군부와 결탁해서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원하는 이들의 꿈을 짓밟기에 나선다.

 

훗날 엘 카우디요라 불리게 되는 프랑코와 그를 지지하는 팔랑헤당이 주도하는 백색공포가 주도하는 야만의 시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덮친다. 왕정주의자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국민군이 도처에서 저지르는 만행과 그들의 죄를 사해주는 데 전력한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의 이중성에 분노하기 시작한다. 한편, 1936년 당시 열다섯 살의 소녀였던 몬세는 마음과 정신의 혁명시기에 아나키스트였던 오빠 호세의 영향으로 진정한 인격체로 거듭나게 된다. 그 후 육십년이라는 시간과 삶의 무대가 에스파냐에서 프랑스로 바뀌어 치매로 이젠 정신마저 오락가락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뜨거웠던 그 여름의 체험을 그녀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게 되었다. 소설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정당한 분노를 들줄 삼고, 혁명과정에서 나어린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몬세의 경험을 씨줄 삼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전진한다.

 

몬세의 오빠 호세와 후안(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청년들은 공화국의 대의에 찬동하면서 파시즘에 대항한 정의로운 전쟁과 급진적 개혁안을 선포한다. 하지만 유년시절부터 호세의 라이벌이었던 대지주 계급 출신의 디에고 부르고스 오브레곤은 칼 마르크스 이론에 경도된 공산주의자로 변신해서 호세와의 대립각을 이어간다. 시스템의 의존하지 않은 혁명가의 공허한 구호는 일시적으로 대중을 선동하여 현혹시킬 수 있어도, 대중은 본능적으로 현실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디에고는 감정을 절제하고 절대자유주의가 양산할 무질서를 비난하면서 질서와 규율을 강조하며 호세의 주장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에스파냐의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호세와 디에고의 대립이라는 미시적 대결구도를 통해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진영의 규합으로 이루어진 이질적 결사체였던 에스파냐 공화국의 당시 현실을 작가는 예리하게 분석해낸다. 고도로 훈련되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파시스트 국민군과의 치열한 내전을 앞둔 상태에서 상이한 두 집단의 화학적 결합 없는 상태에서 공화국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에스파냐 내전의 추악한 진실 폭로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어떻게 그가 믿는 신을 추종하는 사제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마구잡이로 숙청한 파시스트들의 피 묻은 손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서방세계의 지식인들이 진실을 외면해도 그의 증언은 계속된다. 극한에 도달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끝에서 베르나노스는 광신의 단면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공화군에 대한 국민군의 반란을 디에고의 고모인 도냐 푸라로 대표되는 우파는 성전이자 십자군 전쟁으로 간주했다. 내전에서 패배한 적들에 대한 국민군의 배 가르기와 참수는 일상적인 처벌이었고, 심지어 포로가 된 죄수의 거세도 있었다고 한다. 공화파 역시 대지주 계급과 사제들에게 국민군 못지않은 만행을 저지른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일설에 따르면 7,000명 정도의 사제들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다만 그들의 행동은 사진이라는 형태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남아 역선전의 자료 널리 활용되었고, 팔랑헤당과 국민군의의 그것은 어둠 속에서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행해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해방구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국제여단 출신의 프랑스인 앙드레 말로(진짜 앙드레 말로가 아니다)와의 격렬한 사랑의 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 몬세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녀와 동행했던 호세 역시 ‘올바른 대의’를 위해 비무장한 사제들에게 저지른 잔학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대는 절대자유주의자들의 대화를 듣고 환멸을 느끼고 귀향을 결심한다. 외국에서 반파시즘 전선에 동참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온 국제여단의 허상을 호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국민군과 싸우기 위해 열정과 드높은 의기를 가지고 죽음의 전선으로 떠나는 청년들의 모습에 선각자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느낀 것과 같은 동일한 감정을 호세는 체험하기에 이른다. 혁명이 그들의 삶의 구원해 주리라는 기대는 결국 환상이었던 걸까. 조르주 베르나노스와 몬세의 증언이 균형을 이루던 지점에서 이탈해서 소설은 급속하게 후자의 이야기 속으로 가속하기 시작한다. 고향에서 임신한 몬세의 과거를 묻지 않고 결혼하기로 결심한 디에고 가문과의 결혼잔치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당시 에스파냐 현실정치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었다. 에스파냐 내전에서 공화파들의 운명처럼 호세와 디에고 그리고 몬세의 삶 역시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지난 세기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인류 양심의 시험장이라 불렸던 에스파냐 내전을 80년 만에 다시 문학적으로 부활시킨 <울지 않기>를 읽으면서 비슷한 체험을 했던 우리의 역사가 연상될 수밖에 없었다. 리디 살베르는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의 육성 진술과 조르주 베르나노스라는 지식인의 양심고백이라는 방법을 통해 에스파냐 내전의 실체에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한다. 역사적 사건이기에 독자는 내전의 진행과 결말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삶의 진실이라고 믿는 가치를 위해 싸운 이들의 잊혀진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책에 소중하게 담아냈다. 리디 살베르의 <울지 않기>는 엄혹한 역사의 진실 앞에서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지 그렇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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