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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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리스트에서였던가 이 책의 제목을 내가 처음으로 발견했던 건. 뭐 상관없다. 그렇게 내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 정세랑 작가의 책을 오늘에서야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중고서점의 서가에 꽂힌 책들 가운데 발견했던 순간의 반가움. 프란츠 카프카의 책과 함께 사가지고 의기양양하게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다음 주말까지 읽어야 하는 김숨 작가의 <바느질하는 여자>와 어제 읽기 시작한 같은 작가의 <국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음에도 나의 독서관심은 명랑학원가를 출몰하는 퇴마사 안은영 샘의 이야기에 온통 쏠려 버렸다.

 

소설은 진도가 나갈수록 유쾌발랄해지는 심층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인들에게 적극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아닐 수 없다. 모처의 어느 사립 M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똘기충만한 보건교사 안은영 샘의 정체는 비비탄 총과 플라스틱 장난감 칼로 무장한 퇴마사다. 뭐 워낙에 희한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보니 퇴마사라는 직업이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과연 자신이 원해서 퇴마사가 되었을까? 원래 직장이었던 병원을 떠나, 에로에로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학교로 전직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악한 정령을 퇴치하는 임무에 전념 중이다. 그 와중에 같은 학교 한문샘이자 설립자의 손자인 홍인표와 썸을 타는 사이기도 하다. 장르소설로 빠지지 않는 요소들을 두루 갖춘 <보건교사 안은영>의 출발이 그래서 반갑다.

 

하도 오래 전에 청소년의 삶을 졸업해서 그런지 요즘 청소년들은 무얼 보고, 무얼 먹으며 사는지 관심이 없었다. 굳이 핑계라고 한다면 내 살이도 못지않게 바빠 서라고나 할까. 내 아이가 자라서 그 때쯤 되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겠지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아주 먼 시절의 걱정일 따름이리라. 정세랑 작가의 유쾌발랄한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것도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다. 어려서부터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어쩌면 퇴마사가 되어 살아갈 팔자의 징조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가여워 하고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유머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능력이라면 능력일 것이다. 책을 읽을수록 주인공 안은영 샘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구성도 마음에 든다. 일단 학교에서 벌어지는 원령들의 격렬한 공격을 막아낸 은영과 인표의 일대 사건을 필두로 해서, 다음 에피소드는 좀 가벼운 이야기로 교차편집된다. 은영이 어떻게 해서 이 업계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인표샘이 가진 쉴드에서 에너지 보충도 하고 유사 데이트를 하면서 역시 에로에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장면도 유쾌하다. 인간의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생산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방전시키는 순환의 과정이 아니었던가. 인표샘의 에너지 쉴드를 노리고 허리춤 공격을 하는 또 다른 능력자 맥샘의 공격을 막아내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그렇게 21세기 대한민국 공교육의 사각지대를 기막히게 파고드는지. 군대로 치자면 연예병사에 해당하는 연예인 김래디의 집에 출입하면서 역시 펑크가수인 그녀의 아버지 장학춘 씨의 아니 조슈아 장의 옛 애인 귀신을 퇴치하는 시퀀스도 역시 명장면의 하나로 꼽고 싶다.

 

그렇다고 정세랑 작가가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도 아니다. <온건 교사 박대흥> 편에서는 지난 가을 전국을 강타했던 국정교과서 파동의 연장성에 있는 교학사 교과서 채택 건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기도 한다. 부실한 역사서술에서부터 시작해 오류투성이 교과서가 교과서시장에서 퇴출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유일하게 제대로 된 교과서라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현장에 대한 스케치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의 합리적 선택 대신 정무적 판단을 가미한 선택을 강요하는 관리자의 모습이 어찌나 그렇게 비루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현실세계의 미묘한 문제에 대해 정세랑 작가는 장르소설의 작가답게 주술적인 방법으로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더 화끈한 결말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좀 아쉬웠지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전설답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섰다가 낭패를 당하는 사랑꾼 인표샘과 은영이 다시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그런 해피엔딩으로 일단은 마무리를 짓는다. 아마 이 정도 캐릭터라면 작가가 애정을 갖고 후속편에 써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 들어 좀 재밌는 책을 읽고 싶었는데, <보건교사 안은영>이 딱 그런 책이었다. 요즘 한국 소설이 위기라고 하는데, 이렇게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우리 작가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순문학은 순문학대로 그리고 장르소설은 장르소설대로 읽었으면 좋겠다. 모든 소설이 진중하게 가는 것도 독서 생태계의 다양성을 위해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정세랑 작가에게는 부디 <보건교사 안은영>의 후속작을 언제고 발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럼 냉큼 사서 읽을 테니까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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