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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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타모리 고 작가의 가나리야 시리즈를 읽다 보면, 정말 당장에라도 산겐자야 골목에 있다는 등신대 모양의 호롱불 초롱을 지나 그슬린 삼나무 문을 박차고 가나리야에 뛰어들어 마스터 구도가 건네주는 시원한 맥주 한잔을 걸치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의 마스터는 손님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순간 알코올과 그에 딱 맞아 떨어지는 요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마치 팔이 닿지 않는 등짝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작년부터 별러 오던 가나리야 시리즈에 그만 매료가 되고 말았다. 읽을수록 재밌어지는 안락의자 탐정물이라고나 할까. 사실 개인적으로 탐정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기타모리 고 작가의 가나리야 시리즈는 독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굳이 내가 머리를 쓰지 않아도 등장인물들의 자연스러운 토론을 통해 정답을 얻게 되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굳이 사건 현장에 나가지 않더라도 주방과 비어서버를 분주하게 드나들며 손님들이 안주처럼 돌리는 사건에 대한 정보들을 산적꼬치처럼 꿰어서 통찰해서 분석해내는 박학다식한 마스터 구도의 서비스가 그만이다. 다만 아쉬운 건 이 멋진 구도의 서비스가 원작자인 기타모리 고 작가의 사망으로 더 이상 접할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탐정물이 그렇듯, 기타모리 고 작가의 가나리야 시리즈에 등장하는 사건도 프레임 안에 해답이 숨어 있다. 나같이 머리 굴리기 싫어하는 평범한 독자는 그저 작가가 이끌어 주는 대로 안락하게 정답으로 가는 길을 더듬기만 하면 된다. 잘못된 길조차 가나리야의 다양한 손님들 중의 누군가가 이끌어 주지 않던가. 천성적 게으름 덕분에 그런 잘못된 상상조차 거부하는 박약한 정신세계 탓을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모든 문제는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망상을 해보기도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하이쿠 동호회 회원이었던 가타오카 쇼고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이지마 나나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프리랜서 작가라고는 하지만, 시간과 비용을 들여 죽은 사람을 신원해 주겠다는 결심은 쉽지 않아 보인다. 처음 주인공은 마지막 에피소드인 <물고기의 교제>로 다시 돌아와 긴 여운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장식한다.

 

현명하지 못한 나같은 독자는 작가가 여기저기에 흩뿌린 정보와 결정적 단서들을 아무 생각 없이 슥슥 읽고 지나가는 숱하게 범한다. 독자 한 수 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수인 기타모리 고 작가는 탐정물의 원칙에 충실하다. 항상 첫 번째 목격자를 의심하라. 다만, 범행의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발적인 범행은 사실 거의 존재할 수 없다. 원한이든 아니면 금전적 관계에 의한 것이든 사람의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해치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일탈적 행동을 어떻게 주어진 정보만으로 추론해낼 수 있겠는가. <살인자의 빨간 손>에서 작가는 그런 탐정물의 원칙을 고수하는 훌륭한 작법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6개의 에피소드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바로 <마지막 거처>다. 사진촬영에 대한 관심을 많아서인진 몰라도 카메라맨이 등장해서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일관적인 작업활동을 하던 중에 만나게 된 노부부의 안식처에 대한, 친환경적 주제 그리고 조화와 상실이라는 이야기를 다룬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삼박자에 개인사진전 포스터 절도라는 흥미로운 요소까지 소스로 장식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이제는 당당한 사진작가가 된 쓰부키 오부히코가 모터크로스를 즐기는 폭주족에 가까운 청년들을 담대하게 설득해서 그들이 망친 노부부의 텃밭을 원상복귀하고, 사진촬영을 거부하는 노인장의 마음을 풀기 위해 땅바닥에 엎드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프로정신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결말은 보너스다.

 

마스터 구도 데쓰야와 손님 일당이 계획한 <가족사진> 설계는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트랩포인트가 일품이었다. 일에 미쳐 가정을 소홀히 하다가 이혼에 다다른 노다 가쓰야 아저씨의 동거인이 사라졌다고 이야기의 서두에 나오지만 독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바로 그런 설정이야말로 상황을 헷갈리게 하며 독자가 추리의 허방다리를 짚게 하는 결정적 순간이다. 흑백 가족사진이라는 고전적 방식을 이용해서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줄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 전달을 맡은 마스터 구도의 겸손하면서도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기 보다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조화가 필요한 시대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자기가 보고 싶은 사실만 원하는 법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다시 등장하는 이지마 나나오처럼. 그런 욕망을 상상 아니 망상이라 부르며 폄하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님들의 그런 갈망을 시원한 맥주와 구미를 당기게 만드는 요리로 순화시키는 역할을 가나리야 맥주바의 주인장 구도 데쓰야야말로 마스터답게 훌륭하게 수행해낸다. 기타모리 고 작가의 긴 여정은 이제 국내에 출간된 세 번째 책인 <반딧불 언덕>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다. 마지막 인스톨은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 그 책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스터 구도 데쓰야의 미스터리가 풀린다고 했던가.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속히 출간을 서둘러 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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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벗꽃이 날리는 날 그아래서 죽기를 ㅡ이란 ㅡ꽤나
유명한 사람의 싯귀인걸로 알아요.
이전에 ㅡ온다리쿠의 소설 ㅡ에서 언급된 적이 있네요.
이렇게 다른 글로 또 보다니 새롭습니다.^^

레삭매냐 2016-01-12 16:24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되게 유명한 하이쿠의 구절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온다 리쿠에서도 인용된 적이 있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

[그장소] 2016-01-12 16:33   좋아요 0 | URL
소설자체로도 참 인상적였어요.
언제 한번 찾아 봐야겠네요.이책도
 
오이디푸스 왕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42
소포클레스 지음, 김기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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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순전히 황현산 선생의 추천 덕분이었다. 모두 세 권의 책을 추천해 주셨던 것 같은데, 패트릭 리 퍼머의 <그리스의 끝 마니>를 먼저 읽기 시작했지만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분량도 더 적고 읽기 쉬워서 손에 잡은 김에 다 끝내 버렸다. 누구나 다 아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고대 그리스의 정치인이자 극작가인 소포클레스가 테바이 3부작으로 재창조해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읽으면서, 이런 희대의 비극의 원형이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이유에서 태어났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런 신화를 비극으로 재창조한 소포클레스의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소포클레스가 무려 기원전 5세기경에 저술한 테바이 3부작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인 테바이의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해서 저주 받은 아이들을(안티고네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낳고, 비극적 운명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하고 조국 테바이를 떠나 망명 중에 아테나이의 콜로노스에서 죽고, 그 자식들 역시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기본 줄거리다. 왜 오이디푸스는 이런 가혹한 아폴론의 신탁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던가. 당대까지만 하더라도 대자연의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인류의 숙명을 깨달은 인간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노력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신화가 붕괴되고 있는 마당에 그래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인간이 제 아무리 노력해서 운명을 벗어나려고 사력을 다해 노력하더라도, 신이 설계해 둔 운명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테바이 3부작을 연대순으로 발표하지 않고, 비극의 완성에 해당하는 <안티고네>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 오이디푸스 왕이 씻을 수 없는 수치심에 테바이를 떠나 유랑걸식을 하게 되자, 가련한 아버지를 부양하는 대신 권력에 대한 욕망에 휩싸여 파멸적인 사투 끝에 모두 죽어 버린 오이디푸스의 아들들인 폴뤼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 보면 콜로노스에서 마지막 거처를 찾던 오이디푸스를 찾아와 동생에게 빼앗긴 테바이의 왕권을 찾게 도와 달라는 폴뤼네이케스의 요청에 오이디푸스는 저주를 퍼붓지 않았던가. 신의 신탁에 버금가는 부모의 저주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고, 죽은 이오카스테의 오라비로 결국 테바이의 최고권력자가 된 크레온은 신의 섭리를 무시하고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불허하면서 갈등을 조장한다. 문제는 처벌을 무릅쓰고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바로 자신의 아들 하이몬의 연인이었던 안티고네였다는 점이다. 소포클레스는 이 비극에서 착오-발견-자기 결정이라는 비극의 패턴을 위한 교묘한 인과관계를 설계했다.

 

저자는 비극의 설계자답게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난제를 해결하고 테바이의 왕이 되어 영화를 누리는 순간들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이것도 비극을 비극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장치였을까. 테바이 비극 시리즈를 읽다가 궁금한 점 중의 하나는 저주의 신탁이 왜 오이디푸스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실행되었느냐는 점이다. 그것도 자식을 넷씩이나 낳아서, 인간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던 그런 인생의 최절정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나락으로 추락을 시작한다. 신화에서 모든 금기는 깨지게 마련이고, 신탁이나 예언들은 하나 같이 빗나가지 않고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테이레시아스가 인간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예언을 하고, 그 예언이 실행되어 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비극의 전조를 예감하면서도 최종국면에서 기다리고 있을 비극적 진실을 구도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인간의 존재를 소포클레스는 담대하게 그려 나가고 있다. 여담으로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들의 존재에 대해, 오래전 좋아했던 우디 앨런의 영화 <마이티 아프로디테>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그 코미디 영화에서도 코러스들은 쉴 새 없이 노래하며 떠들어 대면서 비극의 전조를 알리고 경고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물론 주인공들이 그들의 조언을 듣진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 인간사도 그런 게 아닐까. 객관적 시각으로 판단해 보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난제에 빠져 그런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은 주저 하지 않고 실행에 옮기지 않던가 말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정처 없이 방랑하던 가운데 마침내 도착한 콜로노스에서 영웅적 죽음을 준비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인간의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피를 선택했지만, 권력욕에 불타는 크레온와 아들 폴뤼네이케스는 오이디푸스의 평안에 도전한다. 테바이의 수호라는 미명 아래 자신과 안티고네를 강제로 테바이로 압송하려는 시도를 또다른 아테나이의 영웅 테세우스의 도움으로 무산시키고, 자식의 도리는 다하지 않았으면서도 권리만 주장하는 아들 폴뤼네이케스의 청원마저 단칼에 거절한 소포클레스가 사랑한 도시 아테나이를 축복하며 하데스의 세계로 가는 길을 받아들인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운명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걸까?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 대며 운명에 저항하며 삶을 개척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닐까.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너무 성급하게 읽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페이지에 주석을 달아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모르는 부분에 달린 주석 표시를 보면서도 독서의 호흡이 끊길까봐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다음번에 읽게 되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긴 호흡으로 음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넥스트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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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3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3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제국 비사
프로코피우스 지음, 곽동훈 옮김 / 들메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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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나의 간단한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로코피우스는 도대체 왜 이 책을 썼을까라고 말이다. 팔레스타인 카이사레아 출신의 사마리아인으로(유대인으로 추정되는) 비잔티움 제국 수사학자이자 공식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는 야사에 해당하는 이 책 말고도,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장군으로 로마제국의 고토(故土)를 수복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세운 벨리사리우스의 리비아원정, 이탈리아원정 그리고 페르시아원정을 모두 수행하면서 <전쟁사>라는 기록을 남겼고, 또 유스티아누스 황제를 노골적으로 칭송한 <건축론>을 저술했다. 그리고 황제의 의해 원로원 의원이 되어 자줏빛 토가를 걸치는 영예를 얻기도 했던 관변학자가 어찌해서 이런 불경스러운 기록을 남겼는지가 이 책을 읽는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역사가로서 프로코피우스는 어쩌면 기존의 기록인 <전쟁사>와 <건축론>에서 자신이 기술했던 내용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들을 세 명의 인물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벨리사리우스, 유스티아누스 황제 그리고 테오도라 황후가 그들이다. 일체의 부정적인 편견을 버리고 그의 기록을 더듬다 보면, 희대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던 벨리사리우스는 오쟁이 진 남편으로 아내 안토니나에게 휘둘려 전쟁도 망친 못난 장군이라는 것이다. 사실 비잔티움 제국의 명군으로 알려진 유스티아누스가 뛰어난 무공을 세운 벨리사리우스를 시기하고 질투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동방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해 오던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우와 평화협정을 맺어 한쪽 전선을 안정시키고, 서방에 전력을 집중시킨 전략은 비잔티움 제국 최대 판도를 만들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지 않았던가.

 

프로코피우스는 비사의 후반에서 사실상 제국의 공동 통치자였던 유스티아누스와 테오도라가 그렇게 동부전선에서 전역한 병사들에게 지급한 급여조차 주지 않았다고 악의 가득한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퇴임한 후까지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경제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나 사료된다. 프로코피우스는 자신이 모시던 황제를 사실상 악마와 다를 바 없다고 저간의 떠도는 소문에 근거해서 묘사한다. 이런 부분은 아무리 비잔티움 제국에 미신적 요소가 많았다고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황제와 황후가 제국의 신민들은 물론이고, 제국의 방위를 맡은 병사들 그리고 관료들에까지 착취를 일삼았다는 주장과 함께 지진, 기근 같은 자연재해까지 모두 황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무래도 과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비정상적인 축재 형태에 대해서도 프코피우스는 매서운 비난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나는 프로코피우스가 어쩌면 고대 로마공화정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대 같은 민주공화정이 아닌 비잔티움 제국의 수장인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독재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그리고 황제의 폭정 때문에 수천만 명이나 되는 제국의 신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과장한 부분도 당대의 인구를 고려 해봐도 전혀 가능하지 않은 수치다. 그런 부분이 많을수록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과연 저자는 몰랐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본다 하더라도, 확실히 비잔티움 제국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이래 능력 이상으로 확대한 제국의 영역을 지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공화정 로마 시대 말기의 카이사르처럼 갈리아를 정복해서 게르만 족의 항시적인 침입으로부터 완충지대를 만들고 로마식 시스템을 정착시켜 항구적 평화를 도모하겠다는 원대한 계획 없이 이루어진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벨리사리우스라는 명장의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 이탈라이 본토 그리고 에스파냐 일부분까지 일시적으로 수복할 수는 있었어도 그 영토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건 당대 비잔티움 제국의 경제상태나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대규모 원정과 제국의 통치를 위해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프로코피우스가 비난한 것처럼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정책들을 남발했던 게 아닐까. 게다가 사실상 제국의 공동통치자였던 테오도라 황후에 대해서도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을 엮어 헤타라이(고급 매춘부) 출신으로 매도하면서(정사에 의하면 어느 정도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황후가 황제를 뛰어넘는 사실상의 실권자였노라고 폭로하고 있다. 남성우월주의 시대에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여성에 대한 거부감을 일부 엿볼 수도 있다.

 

확실히 이 시대에 계속된 원정으로 재원이 부족했다는 사실도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을 통해 알 수가 있다. 헬레스폰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에 대한 관세 부과도 결국 재정부족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매점매석에 의한 인플레이션 현상도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참제도에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던 낙타도 없애 버려서 전선에 보급할 물자 수송이 어려웠다는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어쨌든 제국 통치의 최종 책임은 최고권력자에게 있는 것이니 프로코피우스의 비난도 아주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일전에 읽은 레이 황 교수의 주장을 유스티아누스에게도 적용시켜 본다면, 최고권력을 행사하는 통치자에게 제국의 모든 신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을 적용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제한된 제국의 재화와 자원을 선별적으로 배분하고, 제국의 안정을 위한 원정을 기획하는 결정만으로도 중세 황제에 대한 기대치는 충족된 게 아닐까.

 

도를 지나친 최고권력자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은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어두운 면을 다뤘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역사적 가치를인정받을 만하는 생각이다. 역사가가 남긴 기록이 얼마나 믿을 만한가에 대해서는 아마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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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
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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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전공했다. 특히 어려서부터 중국 역사책을 열심히 읽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그런 열악한 상태의 조악한 번역물이었지만, 그래도 태사공 선생이 기술한 <사기> 같은 명저를 읽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한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많이 시간이 흘러 전공하고는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역사책 읽는 즐거움은 여전하다. 작년말부터 읽기 시작한 레이 황의 중국 거시사 책인 <중국, 그 거대한 행보>를 빨강원숭이해 벽두에 다 읽었다.

 

중국 역사시대의 돌입이라고 할 수 있는 은나라 시대를 필두로 해서 현대 중국에 이르는 유구한 세월을 거시사적 측면에서 망원경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최근 아날학파를 중심으로 한 현미경으로 역사를 관찰하는 미시사가 트렌드가 되었는데,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중국사에 관한 이야기들은 역사를 좀 접해본 독자들이라면 거의 모를 정도가 없으니, 생략하고 경제적 측면에서의 접근이 아주 신선했다. 서양에 비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이 비교적 일찍 들어선 진한제국을 통일 1제국으로 그리고 수당을 2제국으로 마지막으로 명청을 통일 3제국으로 분류하고 간기에 만이융적(아마 남만, 동이, 서융, 북적의 분류로 보인다)으로 대표되는 이민족 세력의 중원 정복을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특이한 사항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원동력이었던 중앙집권제와 특유의 관료제도가 오히려 중국의 역사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예리한 지적이다. 게다가 맹자가 일찍이 설파한 만백성을 즐겁게 하는 왕도정치 이데올로기는 어떤 왕조가 들어서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전통적 화이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비록 통일제국이 설립되긴 했지만, 근대적 화폐환산시스템과 신용거래 그리고 서비스 제도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규모 자영농 중심의 농촌경제에서 이룩된 잉여생산물을 통한 자본축적은 난망했고, 수량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어려웠던 점을 계속해서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초기에는 능률적인 시스템이었던 관료제도 역시 새로운 혁신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점에 수긍이 갔다. 한나라 시대에 도입된 대규모 교육 시스템 역시 새로운 개혁과 혁신을 담보하는 대신 왕조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역할에 머물렀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레이 황은 또한 최고권력자에게 일반적 시선의 도덕률을 요구하는 편견에서 벗어나라는 주문도 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다른 저서인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에서도 저술했듯이, 형과 아우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당태종 이세민의 경우에서 보듯 혈육과도 나눌 수 없는 최고권력 경쟁의 비정함을 볼 수 있긴 하지만 현대의 기준에서 골육상쟁이라는 도덕률을 절대군주시대에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이긴 한 것 같다. 중국에서도 명군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당태종이 정착시킨 율령격식과 조용조 같은 시스템은 당시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제도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피해만 없다면, 최상위 권력층의 쟁투는 물론이고 이민족의 지배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한 왕조에서 다른 왕조로 바뀌는 과정에서 순국하는 케이스는 송나라나 명나라의 경우처럼 사대부 계층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던 부분은 명청시대와 민국 시대의 이야기인데, 저자 레이 황 교수는 우수한 자원과 충분한 노동력을 가졌던 명제국을 비경쟁적이고 내향적인 제국으로 부르고 있다. 개국을 주도했던 태조 주원장에 대해서도 지독한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해서 원나라 말기의 전란을 경험하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에 대해 냉철한 분석을 시도한다. 수차례에 걸친 명태조의 숙청작업은 왕조의 기반을 닦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의 뒤를 이은 영락제가 정복사업에 나서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급자족형 농촌경제에 만족하는 관료들은 기존질서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태생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위한 중추역할을 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은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었고 환관들의 발호가 이어지면서 왕조는 멸망의 수순을 밟게 됐다.

 

중국의 근대화는 아편전쟁 이후 숱한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며 정체되었고, 결국 제국의 해체와 중일전쟁이라는 전국적 규모의 전란과 국공내전이라는 폭력적 방식으로 오늘날의 중국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때 국민당군 장교였던 레이 황 교수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투쟁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균형감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구한 장강의 물결 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 등장한 역사인물들에게는 저마다의 역할이 주어져 있었고 역사발전은 지체될 수 있어도 결국 제 갈 길을 가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 와중에 역사를 퇴행시키는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사태 같은 반동적 체험이 빠질 수 없겠지만 말이다. 레이 황 교수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한 세기에 걸친 외세침탈로 인한 굴욕에서 벗어나 대국굴기에 나선 현대 중국의 미래전망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 특히나 인접국가로 하루가 다르게 중국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가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불투명한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 이웃나라 중국의 거시역사를 비교적 객관적 시각에서 다룬 레이 황 교수의 중국대역사는 일독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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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흩날리는 밤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김미림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언제나 그렇듯 나의 뒤죽박죽 독서 때문에 내가 2016년 빨강원숭이해에 처음으로 읽은 책은 레이황 교수의 <중국, 그 거대한 행보>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정말 올해 처음 읽은 책으로 그리고 첫 번째 리뷰로는 당당하게 작고한 기타모리 고 작가의 책 <벚꽃 흩날리는 밤>으로 기억되게 될 것 같다. 지난해 여름에 구입한 책인데, 참 오랜 시간 끝에 읽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램프의 요정 100자평인가에서 보고 기억해 두었다가 망각 속에서 소환시켜 만나게 된 그런 책이기도 하다. 아마 그 책은 <맏물 이야기>였지.

 

그런데 시대만 <맏물 이야기>의 에도시대와 현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서사의 구조는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어느 책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느낌은 그렇다. 도쿄 산겐자야의 어느 골목에 있다는 맥주바 가나리야의 명물은 맛있는 네 가지 다른 종류의 맥주도, 그 집에서 나오는 기가 막힌 요리도 아닌 바로 주인장 구도 데쓰야라는 존재다. 맥주의 시원한 맛에 어울릴 만한 그리고 단골손님들이 물어오는 희한한 이야기 거리라는 안줏감 말고도 마스터 구도가 제깍제깍 만들어내는 퓨전 요리의 향연에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다. 우리 동네 근처에 이런 바가 있다면 어쩌면 나는 알코올 중독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망상이 불쑥 들었다.

 

소설은 페이지터너라 불릴 정도로 재밌고 맛깔스럽다. 고향 요릿집의 데릴사위로 찍혀 가게 십오 주년 행사에 소환되어 결국 그 인연으로 도쿄에서의 택시 기사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필두로 시작해서, 벚꽃이 필 때마다 ‘교이코’라는 기묘한 이름의 벚나무를 찾게 형사와 그의 죽은 아내가 조종하는 일종의 복수극 그리고 버블경제 시대를 마감하고 장기불황에 접어든 일본 사회에서 종신고용이라는 신화를 마감하고 구조조정을 맞이한 세대를 모욕하는 개를 이용한 해고 통보라는 기발한 착상까지 이야기는 숨차게 달려간다.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마스터 구도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눈치로 손님이 필요한 순간에 미지근해버린 맥주잔을 시원한 맥주로 갈아 치우고, 궁진한 입을 달래줄 기가 막힌 요리들을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제공하는 천상의 서비스를 손님들에게 대접하니 어찌 맥주바 가나리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비슷한 서비스를 몬트리올 여행 당시 생캐서린 스트릿의 어느 바에서 오래 전에 경험했었던가.

 

나머지 두 이야기인 황금 칵테일을 찾는 <나그네의 진실>과 <약속>에서 기타모리 고 작가는 깊숙한 인간 내면세계 탐험에 나선다. 빈타운이라 불리는 도시에 있는 칵테일 바에 갔었는데 칵테일 메뉴가 없어서 바텐더에게 메뉴가 없냐고 물었더니 자신만만한 태도로 어느 칵테일이든 만들어 준다고 해서 ‘싱가폴 슬링’을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황금 칵테일을 찾는 나그네의 이야기에서 바로 개인적 체험이 연상됐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가나리야의 손님과 마스터 구도 그리고 또 다른 오지랖 넓은 손님들이 가세해서 이런 저런 의견을 내며 미스터리의 종착점에 도달해 가는 과정이 너무 재밌게 다가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까지 꿰뚫는 마스터 구도의 정체가 자연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 작가는 도대체 뭐 하던 사람이람. 물론 기타모리 고 작가는 아직까지 천기누설을 할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네 번째 시리즈로 미루고 있다.

 

마지막 이야기인 <약속>은 십년 전 약속을 지키려는 헤어진 연인들의 슬픈 로맨스라는 느낌으로 시작했는데, 역시 예상을 깨는 반전이 숨어 있었다. 단 한 번의 시위 체험으로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이 찍힌 남자 히지카타는 온갖 연쇄불행을 겪고 밑바닥에서 드디어 치고 올라와 베스트셀러 작가로 승승장구하는 시절이지만, 그 반대의 길을 걷던 유키에는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파탄 직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자신의 불행을 옛 애인에게 모두 떠넘기려는 그녀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려면 누군가 내 불행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극단적 방법마저 동원하려는 계획을 세우다니. 물론 유키에가 행동에 옮기기 전에 우리의 마스터 구도에게 적발되어 무산된 것이 다행이었다. 전에 그녀가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행동에 대한 의심을 돋게 하는 것이야말로 기타모리 고 작가가 독자에게 선물한 회심의 일격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가나리야 시리즈는 모두 세 권이 피니스 아프리카에를 통해 소개되었는데 나는 그 두 번째 인스톨부터 읽게 됐다. 새해 처음으로 만난 책이 이렇게 재밌어서 참 기분이 좋았다. 바로 전에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거시사적 차원의 역사서를 읽어서 그런 진 몰라도 중량감이 달라서였을까. 그리고 보니 책을 계속해서 읽다 보면, 앞뒤로 읽는 책이 어떤가도 연쇄독서에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며칠 전에 읽기 시작한 코니 윌리스의 단편집을 펼쳤는데, 사실 생각보다 별로여서 덮어 버렸다. 앞으로 남은 가나리야 시리즈 두 권도 마저 읽어야겠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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