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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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틀만에 다 읽은 필립 지앙의 <파문>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을 연상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필립 로스 소설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케페시 교수는 <파문>의 주인공 마르크와 판박이다. 프랑스 모처의 고향 마을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53살난 마르크는 특별한 매력도 없이 문학을 다루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 거리낌 없이 섹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문제는 자신의 학생인 바르바라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 있더라는 사실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자 우리의 지성인 교수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경찰에게 신고할 것인가? 아니다. 마르크는 죽은 바르바라를 끌고 자신이 예전에 발견한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교수라는 박봉에 다 낡은 피아트를 끌면서, 같은 대학 행정처에 근무하는 누이 마리안과 사는 마르크. 어째 불편해 보이는 삶의 편력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정확한 판단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모진 학대와 매질, 감금을 당한 두 오누이는 가족을 넘어 야릇한 관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실종된 바르바라를 찾아 경찰이 나서지만, 대학교수 출신 마르크가 사체유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경찰의 접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바르바라의 계모라는 미리암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잔잔한 호수에 인 파문이 소용돌이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신보다 훨씬 여학생들과 관계를 맺어온 마르크에게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미리암은 색다른 도전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여학생들이 줄 수 없는 무언가를 미리암이 자신에게 준다는 확신에 빠진 마르크는 비록 계모지만 제자의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물론 대학 사회에서 제자들과 성관계 그리고 학부모와의 관계를 엄금하고 있지만 유년시절의 상상을 초월하는 삶의 도전과 위기를 체험한 마르크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모양이다. 말초적 여흥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일탈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정말 몰랐단 말인가? 이런 위험을 감수한 스릴이야말로 일별 파렴치해 보이는 교수님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마르크는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

 

동시에 마르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뛰어난 후광과 명성을 얻게 될 그런 작가가 되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은 모양이다. 그나마 죽은 바르바라가 재능이 있었지만 이미 죽은 상태였고, 새롭게 자신에게 접근해온 지역 유지의 딸 아니 에그바움의 육탄공세는 피곤할 따름이다. 자신의 마음속을 온통 미리암이 뒤흔들고 있는데 치기 어린 불장난을 상대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마르크의 실존적 위기는 다른 곳엣 찾아온다. 문학강의가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대학에서 그의 정리해고를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는 누이 마리안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 중인 학과장 리샤르 올소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제되기에 이른다. 시류에 편승해서 학과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리샤르 올소를 맹목적으로 경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런 그와 만나는 누이 마리안에 대한 애증을 필립 지앙은 그대로 잡아내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마르크가 집요하게 집착하는 흡연은 말미에 등장하게 될 비극적 결말에 대한 암시였을까? 흡연이 더 이상 쿨한 행동이 아닌 세상에서 번갯불을 맞은 것 같은 허리통증에 시달리는 중년 남자에게 담배는 유일한 구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이 산책하기 좋아하는 숲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자 피난처였다. 아프간에 파병한 미리암 남편의 부재를 틈타 그녀의 애인이 된 마르크는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그녀의 매력이 빠질수록 헤어나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과연 몰랐을까? 사체유기에 이어 자신을 도우려던 경찰이 죽은(그가 직접 경찰을 죽였던가?) 뒤에 그 역시 바르바라의 경우처럼 처리한다. 욕실에서 피범벅이 된 그를 목격한 마리안의 반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싶다.

 

 

될대로 되라는 방식의 삶을 사는 그에게 거절당한 아니 에그바움의 물리적 복수는 위협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저러다 큰 일나지 하는 걱정을 뒤로 하고, 우리의 주인공 마르크는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죽은 바르바라의 관계가 끝에서부터 시작했다면, 아니 에그바움과의 관계는 그동안 마르크가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을 유혹하고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금융 사기꾼처럼 생긴 그의 아버지가 어깨들을 동원해서 무력시위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에게 미리암의 정체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누이간의 비밀이 밝혀지고, 파국이 이어진다.

 

소설 <파문>의 몰입도는 정말 대단했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 마르크가 바르바라나 경찰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쥐꼬리만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명백한 범죄(사체유기)를 저지르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유년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다고 하지만 5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점이 사실 좀 이해가 가진 않았다. 범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고, 추후에 벌어질 또다른 범죄의 전주곡처럼 다가왔다.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의 섹스도 범죄는 아니지만, 대학사회에서 용인받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쾌락을 탐닉하는 장면도 불편했다. 어쩌면 더 이상 도덕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타락한 시대의 초상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계량화되어 평가받고 금전적 가치로 치환되는 시절에 한 지식인의 일탈로 간주하기엔 마르크는 너무 많이 나간 게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는 결말에서 그런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파문>은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지극히 탐미적인 소설이다. 다양한 층위의 사연들이 중첩되면서 이야기를 섬광 같은 파국으로 인도한다. 마치 숲 속에서 니코틴이 절실하게 필요한 마르크가 정신을 잃은 채 맞이한 몽롱한 감정의 전이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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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3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비흡연자라서 흡연자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잘 알지 못합니다. 제 생각인데 불안한 감정에 휩싸이면 그걸 어떻게든 잊으려고 담배를 찾는 것 같습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불안하고 힘들 때마다 술을 찾는 심리와 비슷한 거죠.

레삭매냐 2017-03-30 13:38   좋아요 0 | URL
저도 비흡연자라 흡연하는 심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싸이러스님 말처럼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술은 그나마 제약이 있지만 흡연에 대해서는
그나마 관대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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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의 루이스 세풀베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칠레 출신으로 환경문제, 정치적 이슈 그리고 마푸체 인디오들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아낌 없이 시전하고 있는 동시대 작가의 새로운 동화책을 만나볼 수가 있었다. 이번 동화를 닮은 소설의 주인공은 마푸체 인디오 말로 충직을 의미하는 아프마우다.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채 100쪽이 되지 않는 동화는 정말 심오하면서도 현재를 사는 우리가 생각해 볼 주제들로 가득했다.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는 우선 인디오 사냥에 나선 윙카(외지인들)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선봉장에는 추적을 위해 우리의 진짜 주인공 아프마우가 서 있다. 이제 시간의 흐름 속에 늙어가는 아프마우는 정글과 드넓은 강을 넘나드는 고된 추적 가운데, 자신의 삶을 반추해본다. 강아지 시절, 자신을 실어 나르던 말에서 떨어져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해지지만 재규어 나웰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과정은 정말 동화적 상상의 극치를 달린다. 재규어 나웰은 어린 강아지 아프마우를 마푸체 인디오들의 삶의 터전인 왈마푸로 데려다 준다. 거기서 어린 아우카만과 걱정 없이 살던 아프마우에게 윙카들이 들이 닥치면서 그네들의 삶은 풍지박산이 난다.

 

그것은 마치 500년 전, 스페인 정복자들의 침략처럼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졌다. 총칼을 앞세운 폭력 앞에 아우카만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마을 사람들은 윙카들을 피해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주인고 아프마우 역시 윙카들에게 사로잡혀 고단한 삶을 시작한다. 이 무람없는 윙카들은 대지의 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응구네마푸에 대한 존경심 따위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방인들이다. 응구네마푸를 믿는 이들이라면, 모든 삶이 순환이라는 개념에서 자신이 생존을 위해 먹는 것도 모두 대지의 거대한 순환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인데, 이 무법자들에게 대지는 그저 약탈의 대상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아마 이 심오한 주제에서는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생활의 편리라는 점 때문에 미래의 심각한 환경오염과 재앙을 유발할 수도 있는 난개발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훗날 이러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른 채 말이다. 지금 당장 우리네 삶을 심각한 수준으로 위협하고 있는 황사나 미세먼지를 연상해 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푸체 인디오들을 내쫓아 버리면서도 윙카들은 독일산 셰퍼드(아프마우)가 인디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자신들이 거둬간다. 어쩌면 이런 설정도 계급착취의 일환으로 순치되어 동화 속에 등장한 게 아닐까. 마푸체 인디오들의 삶의 터전은 토지는 물론이고, 그들이 보유한 보잘 것 없는 재산조차 약탈의 대상으로 간주한 윙카들에 대한 고발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 윙카들의 사고가 생성과 소멸이 응구네마푸, 다시 말해 대지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마푸체 사람들의 믿음과 상충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동화 속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윙카들과 아프마우가 쫓는 대상을 처음에는 그저 부상당한 인디오라고만 설정해서 작가의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의 인디오는 아프마우와 오랫동안 헤어졌던 옛 친구(페니) 아우카만이었다. 마푸체 사람들의 땅을 노리는 윙카들에게 글을 깨우치고, 마푸체 사람들을 조직해서 대항하려는 아우카만이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윙카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에게 두려운 것은(동화 속에서 아프마우는 수시로 두려움의 냄새를 인지한다) 바로 그런 자각과 연대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그러니 그의 할아버지를 총으로 죽였던 것처럼 윙카들은 또다른 폭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의 충직한 아프마우의 태업이 작가가 동화 후분에 배치한 놀라운 만남과 슬픈 결말을 예비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지식인의 시점을 개에 투영해서 동화 스타일로 풀어낸 작가의 시도에 경의를 표한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우리에게는 정말 생소한 마푸체 언어로 독자를 그네들의 세상으로 인도한다. 나와는 다름이 어느덧 불편함을 그리고 나쁘다는 선동이 난무하는 시절에, 세풀베다처럼 그런 불편함을 견디며 사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쓸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독서야말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그런 간접체험을 할 수 있는 최고의 효용을 담은 선물이라는 작은 생각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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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크
존 버거 지음, 셀축 데미렐 그림,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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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중고서점에 존 버저의 책이 있다는 걸 알고선 그야말로 한 걸음에 달려가 책을 사왔다. 제목은 <스모크>. 무슨 내용의 책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도, 오로지 존 버저의 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샀다. 그리고 읽었다. 그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려고 했으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사서 읽는 수밖에 없었다.

 

책을 정말 얇았다. 그리고 그림이 많았다. 제목처럼 스모크, 담배 연기 그러니까 흡연에 관한 아주 짤막한 글이었다. 한참 금연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던 무렵, 유럽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아무데서고 담배를 피워 대는 거였다. 작가에 의하면 기차는 물론이고 심지어 비행기에서도 담배를 피웠단다. 놀랍군.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예전에 교무실에서 남자 선생님들이 피워 대는 담배연기로 자욱할 지경이었단다.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나는 흡연가가 아니라 그네들의 심정을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흡연자들을 악마로 만드는 전투적인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코너에 몰린 소수자가 되었다. 자신만의 건강을 해치는 게 아니라 타인의 건강까지 해치는 이들로 지탄받게 된 것이다. 아,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담뱃세를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려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사용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저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부족한 세수확보를 위해 정책이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어쩌면 흡연자들은 조국의 재정을 위해 오늘도 비흡연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 가며 구석지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존 버저 작가에 의하면 예전에 사람들은 인심 좋게 나눠 담배를 나눠 피우며 서로의 견해를 나누며, 여행에 대해 그리고 계급투쟁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모르는 이들하고 술 마시는 경우는 드물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흡연하는 소수자들의 끈끈한 그런 유대가 있었던 게 아닐까.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로 지구가 뜨끈뜨끈해졌지만 그런 거대한 차원의 담론보다 당장 내 호흡을 불쾌하게 주변의 흡연자들을 악마로 만들었다는 거다. 한 때 재떨이는 호의의 상징이었지만, 이제 흡연은 공공의 적이자 사회악이 되었다.

 

어쩌면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하나의 멋진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 흡연자들은 악마가 되었고, 흡연은 사회악이 되었는가에 대한 하나의 고찰 대충 뭐 이런 제목으로 말이다.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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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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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존 버저 작가가 돌아가셨다고는 소식을 듣고 나서 부지런히 그가 남긴 책들을 처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무려 9년 전에 받은 책도 있었다. <제 7의 인간>, 진작에 다 읽었는데 미처 리뷰를 작성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읽어야지 싶다. 1월에 읽기 시작한 존 버저의 소설 <A가 X에게>을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그동안 43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의 서간소설을 왜 빨리 읽지 못했던 걸까.


한편으로는 국내에 출간된 그의 책들을 모조리 다 읽어 버리면 아쉽지 않나 하는 노파심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럴 걱정은 없을 것 같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책들이 연달아 출간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걸 걱정도 팔자라고 한다나.


언제나 그렇지만 서설이 길었다. 소설 <A가 X에게>는 테러 조직 구성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 살고 있는 남자 사비에르와 그의 정신적 동지이자 연인인 아이다가 서로 교환한 세 뭉치의 편지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감옥 밖 세상에서 약제사로 일하는 아이다가 보내는 편지가 주고, 사비에르는 답장 대신 투기 금융 자본이 지배하는 바깥세상에 대한 간략한 메모 정도로 대신하고 있다.


분명 감정의 교류는 쌍방향일 것이다. 밖에서 약제사로 일하는 아이다가 약국에서 알약을 분류하고 처방전을 조제하며, 콩을 까고, 저혈당 혹은 그 반대로 쇼크가 온 당뇨병 환자를 긴급구조로 살려 내고, 난민들을 돕고, 5천만달러 짜리 아파치와 탱크로 그녀의 동지들을 잡아 가려는 무력시위를 연대의 힘으로 막아내는 동안 사비에르는 옥중에서 가지 않는 시간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흔치 않은 서간소설 양식에서 아이다가 보내지 않은 편지를 통해 연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마저 드러내는 반면, 사비에르의 관심은 오로지 정치적 투쟁에만 쏠려 있다는 느낌이다. 존 버저 작가는 이런 감정의 간극을 의도하며 글을 쓴 것일까? 그 점이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다가 옥중의 남자와 결혼을 시도했으나 아마 당국의 허락을 받지 못했던가. 두 달간에 걸쳐 책을 읽다 보니 내용마저 헷갈린다. 이것도 책읽기에 얽힌 오독의 즐거움이 아닐까. 저자가 저술한 내용과는 달리, 저자의 손에서 떠난 책은 오롯하게 오독마저 즐기는 엉터리 독자의 몫일 테니 말이다. 어쨌든 두 남녀의 편지를 통한 사랑 이야기 속에도 녹록하지 않은 우리네 현실은 전진을 계속한다. 전 세계 총 자본의 3% 정도가 생산에 재투자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그렇다면 그 많은 자본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이다와 사비에르 그리고 그들의 동지들이 저항하는 자본이 행사하는 폭력은 상상 이상이다. 일체의 저항을 허용하지 않고 중무장한 아파치와 탱크를 동원하는 ‘그들’을 상상해 보라.


존 버저 작가는 현명하게도 사비에르와 아이다가 사는 곳을 특정하지 않는다. 그곳은 스페인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터키일 수도 있다. 또 어쩌면 한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다양성을 부인하고 획일적인 질서를 구축해서 자본을 무한 증식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영속적인 지배를 위한 대전략이기 때문일까.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읽었던 이런 세상을 사는 것이 고통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렇게 세계화에 저항하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전달한 21세기 현자가 남긴 편지들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늘까지 올해 들어 모두 6권의 존 버저 작가의 책을 읽었다. 나의 존 버저 책사냥은 계속 될 것이고, 다른 미술평론와 에세이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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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22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작 읽기에 도전 중인 레샥매냐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스티븐 제이 굴드 읽기를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굴드, 이 사람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동안이나 오래 갈지 모르겠습니다. ^^;;

레삭매냐 2017-03-22 13:24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현암사에서 나온 굴드 씨의 책을
하나 샀는데 읽지는 않았네요.

야구 선수의 타율에 관한 부분만 읽고서 말이죠 :>

존 버저 작가의 책은 쉬엄 쉬엄 도전해 보렵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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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저의 작가 책은 그전부터 컬렉션해 왔지만, 정작 읽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 작가가 작고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사후 그의 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출간하고 있는 열화당에서 두 권이 책이 또 나왔다. 한 권은 사진집인데 가격이 비싸서 사지 못하고 대신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에세이 모음집인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를 사서 어젯밤에 읽었다. 모두 11편의 에세이들이 담겨 있는데, 어떤 내용은 잘 몰라서 와 닿지 않는 내용도 있었고(특히 그림 부분에 대해), 또 시장을 장악한 독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는 격하게 공감할 수가 있었다. 본인은 부인했을 지 몰라도 내 눈에 그는 명백한 마르크스주의자다.

 

첫 번째 에세이가 모국어로 시작했던가. 해외에서 살아 보면 아마 모국어 말하기의 편리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존 버저 역시 프랑스로 자발적 망명해서 살아온 이방인이니 이방인의 설움을 잘 알지 않을까하는 그런 엉뚱한 상상이 들었다. 외국인 이민자와 노동자에 대한 그의 일관된 시선과 주장을 고려해 볼 때, 아마 나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을 것 같다. 모국어에 대한 그의 단상은 에세이집의 후반부에 나오는 아랍 여성의 노래와도 일맥상통한다. 점점 더 실황연주를 듣기 어려운 자가복제의 시대에, 굳이 언어를 몰라도 눈 앞에 선 인간이 선율에 따라 부르는 노래에 대한 이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서 좀 더 확장해 본다면 휴머니스트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에세이집에서 좌충우돌하게 되는 나의 사유는 미디어 시스템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로벌리즘이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를 석권한 투기 금융 자본의 폐해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자비한 자본의 폭력 아래, 세계적으로 3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자리와 안정적인 거주지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지적 앞에 놀랄 따름이다. 지금도 중동 지방에서 창궐하는 IS의 핍박을 이기지 못해 위험천만한 지중해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는 수많은 난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왜 미디어는 그런 문제들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쓰레기 정보들만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자본에 종속된 미디어 현실에 대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중세 시절에는 엄격하고 무자비한 검열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중이 정보를 얻는 과정을 차단했다면, 현대에는 정보의 양으로 질을 통제하고 있다. 최근에 벌어진 탄핵정국에서 검증되지 않은 가짜뉴스들이 범람하고 재인용되는 현상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미술평론가로서 존 버저 저자는 수십년 전 대규모 푸생전에서 만난 무명의 스웨덴 미술가 스벤 블롬베리를 회고하는 글도 에세이집에 담았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피카소처럼 생전에 명성과 그에 따른 후광으로 힘입은 금권까지 누린 미술가가 몇이나 될까. 작고한 스벤 블롬베리를 추억하며,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즐거웠던 시간들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우리가 과연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해주는 그런 시간이 갖게 만들어 주었다.

 

폴란드 자모시치 출신으로(저자가 유럽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나라가 폴란드라고 했던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다가 우파 백색 테러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추모의 글을 한 번 살펴 보자. 인간다움 삶을 주장하던 혁명가의 삶이야말로 존 버저가 평생 동안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한 축에 자본가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시무시한 혁명가가 존재했다면, 다른 한 편에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영화계에서 추방당한 광대 찰리 채플린이 있었다. 전자가 대중의 각성을 요구하며 변화를 강조했다면, 후자는 삶이라는 잔인한 질곡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대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자본 축적과 이윤 추구가 삶의 절대명제가 된 시절에, 서로 역설적이지만 우리네 삶의 페이소스(pathos)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소재들을 정밀타격한 작가의 글들은 정말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배어 나오는 곱창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건대 전문적으로 미술 공부를 하지 않은 미술문외한으로 저자가 에세이집의 곳곳에 새겨 넣은 회화에 대한 글들에는 공감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권의 책을 다 읽어 내는데 급급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존 버저의 에세이들이 주는 힘은 기대 이상이었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이런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다 읽고 나서도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글 말이다. 80년 필력의 힘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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