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뮤직 러버스 온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18
야마다 에이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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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독서 모임에서 야마다 에미이(山田詠美)<솔뮤직 러버스 온리>가 다음 독서 토론 책이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야마다 에이미라는 작가의 존재조차 몰랐다. 의식처럼 자주 들르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야마다 에이미의 책을 검색했다. 물론 이 책이 있다면 더 좋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책이라도 살 요량으로. 아쉽게도 <솔뮤직 러버스 온리>는 없었고, 다른 두 권의 책을 샀다. 그럼에도 <솔뮤직 러버스 온리>부터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요설(요사스러운 수작)이라는 말과 빼어난 은유 그리고 탁월한 묘사를 그 누구보다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일본 출신 작가가 과연 이 모든 이야기를 마냥 상상으로만 만들어냈을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자신의 사적 체험이 개입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곧 그게 무슨 대수랴, 책만 재밌으면 됐지 하는 마음으로 책에 몰입했다.

 

모두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솔뮤직 러버스 온리>에는 타이틀 제목의 단편은 없다. 제목부터 왠지 어느 특정 대상(솔뮤직을 사랑하는 흑인들)을 지칭하는 은유가 한껏 배어 있는 그런 느낌이다. 야마다 에이미에게 공간과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속에 갑자기 등장해서 독자를 적잖이 당혹스럽게 만드는 캐릭터가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여느 단편에서 그렇듯, 그들에게 삶의 진실은 너무 다가오고 그 진실의 순간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런데 그 놓쳐 버린 삶의 진실을 대면하는 과정과 순간이 요설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이다. 단순하게 야하다는 느낌에서 한 층위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책의 곳곳에서 빛나는 순간에 대한 흩뿌리는 듯한 묘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야마다 에이미의 발칙한 상상력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터부를 넘나든다. 아니 그런 게 언제 존재했냐는 듯이. 젊고 경험은 없지만 사랑에 주린 흑인 청년들은 일반적 도덕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진격한다. 플로리다의 노을지는 바에서 화자를 만난 바람둥이 윌리 로이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겠다는 핑계를 대고 뉴욕까지 찾아와 남자 뮤즈를 자처한다. 어느새 그의 포로가 된 주인공은 자신의 본업을 그림을 그리다 말고 무시로 그에게 안기고 싶어한다. 결국 애인에게 꼬리가 밟히지만 사랑해서 같이 잤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라고 되묻는 로이 윌리의 당당함에 애인이 뒷걸음친다. 그 시절은 로비 네빌의 <C'est La Vie>가 한창 히트치던 시절이란다.

 

중년여인과 메이크러브를 통해 십대소년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 그린 단편도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난 미세스 존스의 그 남자가 된 주인공 윌리, 자기라면 미스터 존스처럼 일년씩 와이프를 혼자 두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사랑하는 애인에게 어렵게 번 돈과 용돈으로 각종 디저트를 제공하며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미세스 존스는 그에게 몸은 과자, 마음은 빵이라는 알듯말듯한 말로 절교를 선언한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평소보다 맛있다는 말로 관계의 소멸을 암시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미세스 존스는 과자를 너무 많이 먹어본 어른이었노라고 고백한다.

 

아버지 YOBO의 새엄마를 사랑한 남자 브루스에 대한 이야기 <Mama Used To Say>는 또 어떤가. 이 제목을 보며 엉뚱하게도 80년대를 주름 잡았던 흑인 랩스타 L.L. Cool J가 떠오른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창부들 사이에서 자란 브루스는 그야말로 Ladies man이 아니었던가. 절친이자 포주 TJ와는 달리 풋볼 장학금을 받고 동부의 대학으로 떠났다가 4년 만에 귀향한 브루스의 옛 이야기가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요조숙녀처럼 능숙하게 아버지를 도와 YOBO의 안주인이 된 새엄마 도로시는 이미 세상물정 모르는 것이 없는 브루스에게 금지된 유혹이다. 세상의 모든 터부가 깨지게 되어 있듯, 그들 역시 선을 넘는다. 타인의 행복이 자신의 것과 등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브루스는 자신 같은 여자를 조심하라는 새엄마의 경고를 들으며 동부로 떠난다.

 

클럽 DJ로 동경하던 여자를 얻게 되었지만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풋내기 사랑의 주인공, 소위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몰라 외부와 차단한 것이 신화가 되어 버린 소년,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어쩔 수 없이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배신의 아이콘 등 야마다 에이미의 단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독자의 불온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혹은 보여주고 싶은 삶의 진실이 무엇일까? 우리가 모르는 어떤 세계에서는 이런 삶도 있다는 계도일까? 그녀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내게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온다. 동시에 인간사 희로애락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이십대 중후반의 작가가 그린 흑인 청년들은 하나 같이 경험이 부족하고, 사랑에 고픈 인생들이다. 반면, 그들의 짝으로 등장하는 여성들은 노련하고 삶의 다양성을 체험한 산전수전 공중전의 명수들이다. 그들은 파트너와의 일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풋내기 사랑을 체험하던 파트너들은 절체절명의 사랑이라는 명제 앞에 선 베르테르처럼 고뇌하고 지속 불가능한 사랑의 부재에 슬퍼한다.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건 과자가 아니라 빵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8개의 단편을 다 읽고 후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나는 야마다 에이미의 흑인에게 바치는 이 소설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금도 그런 진 모르겠지만, 한창 시절 잘 놀던 작가의 남자 밝힘증<솔뮤직 러버스 온리> 창작의 원동력이었다는 비밀을 알게 됐다. 그녀는 음악을 몸으로 사랑할 줄 알지만, 일본어를 모를 그녀의 남자들을 거리낌 없이 희롱하며 이 작품을 헌정한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만 쓴다는 그녀의 선배격에 해당하는 아니 에르노만큼은 아니겠지만, 스스로 고백하듯이 수많은 남자에 중독된 아니 그들을 사랑할 줄 알았던 영미 씨의 고백을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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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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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매력적인 제목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작가의 번역된 영어 제목이 멀리 한국에서는 좀 다르게 번역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이란식 사랑 이야기 검열하기>가 좀 더 영어 제목에 가깝지 않을까? 뭐 상관없다. 이슬람 혁명 이래 이란에서 진행되는 문학 작품과 사상과 사유 자체에 대한 검열 그리고 이란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사실 소설의 초반은 무척이나 재밌어서 읽는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무슨 일로 잠시 독서를 멈추게 되면서 진도가 더디 나가기 시작했다. 독자는 온전하게 소설 속의 소설 주인공인 남자주인공 다라와 여자주인공 사라의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또다른 소설 속의 주인공인 페트로비치 혹은 작가가 무시로 등장해서 그어대는 검열된 취소선은 기본 내러티브 구조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게다가 정체가 의심스러운 부적 행상인까지 등장해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남녀 주인공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작가 만다니푸르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마술적 리얼리즘마저 우습게 만드는 현대 이란의 가공할 만한 검열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문학과 영화를 전공한 주인공들보다 더 위력적이고 가공할 만한 능력을 가진 검열관 페트로비치는 상상가능한 모든 성적 코드를 짚어내는데 탁월하다. 우리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매는 넥타이의 방향성에 그런 코드가 숨어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게다가 눈이 보이지 않는 영상담당 검열관이 세 명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는 설정 또한 희극에 가깝다. 가만, 작가는 너무 지나치게 이란의 상황을 소설적으로 과장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진짜 이란의 검열관들이 걱정하는 대로 서방 세계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닐까?

 

1953년 석유국유화를 주장하던 모사데크 정권이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이래, 이란을 지배하던 팔레비 샤의 경찰국가가 이슬람 혁명으로 전복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혁명에 동조했던 자유주의자들은 향후 이란 사회가 이렇게 억압적인 종교국가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지 몰랐을까 궁금하다. 신의 은총을 받아 석유를 그야말로 깔고 앉은 이란이 서방으로부터 악의 축으로 지목되고, 계속되는 경제 제재 때문에 비롯된 경제불황으로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주인공 다라가 소설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란 보통사람들의 서방 특히 미국에 대한 공포감, 반미의식과 역설적인 기대감은 소설의 곳곳에서 엿보인다.

 

소설은 후반으로 갈수록 다라와 사라의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조금은 과도하다 싶은 작가의 직접적 개입과 검열관까지 나서는 장면에서는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만다니푸르가 미국에서 쓴 이 소설이 이란의 오늘을 모두 대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저간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또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뿌리 깊은 서방세계의 오리엔탈리즘이 작가의 냉소주의와 결합해서 강화되는 건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고래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자랑하는 페르시아 고전문학에 대해 작가가 가지고 있는 뚜렷한 자부심 역시 볼거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검열의 이중성 역시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점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검열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검열관 페트로비치 역시 동의한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그런 취소선 같은 검열이 아니라,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된다는 그야말로 육체적 체험에 따른 내적 검열 혹은 셀프 검열이다. 이란에서 팔레비 독재가 판을 치던 시절은 우리나라의 유신시절과 정확하게 겹친다. 국민의 합의로 이루어진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던 시절, 우리는 입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입지 못했고 듣고 싶은 노래를 마음대로 듣지 못했으며, 머리조차 마음대로 기르지 못했다. 하긴 읽고 싶은 책도 마음대로 읽을 수가 없었구나.

 

만다니푸르 작가가 시전하는 블랙 유머 또한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란의 검열관들에게 <늑대와 춤을>을 미국의 위선을 폭로하는 반미영화의 대표주자다. 서양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필요한 것들만 발명한단다. 그렇다면 바이아그라는?(299) 한편, 정부 관리들의 지도로 이란 국민들은 추가 식료품 쿠폰을 지급받기 위해 밤마다 지칠 줄 모르는 재생산 활동에 전념했다. 불법적인 일에 기민하고 천재적으로 대응하며, 출판물이나 영상물 저작권 따위는 개에게나 줘 버리고 일갈하는 자국민에 대한 이 뜨거운 사랑을 어떻게 달리 표현한단 말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란에서는 왜?”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서사와 작가의 개입 그리고 검열관 훈수라는 삼각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나마 대답이 된 것 같다. 물론 이 책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만으로 한 사회를 가늠해 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여전히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아랍 혹은 페르시아 문학에 대한 첫걸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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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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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게 될 운명을 믿는가? 그렇다면 내가 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게 된 것이 그 운명이 아닐까 싶다. 지난 7월에 신형철 씨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통해 빼어난 산문집이 하나 나왔다는 소개를 듣고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하지만 이달초 우리 동네에서 열린 군포 책 축제 기간에 문동 부스에서 이 책을 사게 됐고, 이번 명절 동안 즐겁게 읽을 수가 있었다. 물론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다 즐거운 건 아니었지만,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책이라고 할까.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라는 레테르의 주인공 황현산 선생님이 그동안 발표한 칼럼을 모은 <책이 선생이다>의 제목은 프랑스 속담에서 힌트를 얻으셨다고 했던가. 낮이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행동의 시간이라면, 밤은 감성의 지배를 받는 성숙의 시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제목 한 번 멋지게 뽑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책에서 선보이는 선생의 사유는 유년 시절을 보낸 신안의 섬에서 선생이 느낀 정서에서부터 출발해서 거의 우리 사회가 접해 있는 거의 모든 접점을 모두 아우른다.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적 성찰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 격동의 세월을 몸소 체험한 지성의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말하고 싶다.

 

책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보면, 선생이 학자로서 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것만도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연구자의 사상까지 통제하려던 유신시절, 외국서적을 접하는 마지막 단계였던 우체국 창구에서 미스 아무개의 횡포에 왜 국가가 나의 공부를 방해하느냐며 일갈하고, 창구를 뛰어넘는 장면에서 일대 활극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 장면을 보며 마냥 웃을 수만도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 아니던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공부하며, 그것에서 비롯된 사유를 글로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자유가 부재하던 암울한 시절에 대한 선생의 소회는 희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역사의 역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던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이야기의 해석에서는 가히 탁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청춘들의 미래에 대한 충분한 고민의 시간이 묘하게 군대시절과 겹쳤을 따름인데 그렇게 갖다 붙이는 구조적 모순의 적용에는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요즘 대세가 된 텔레비전 예능에 나오는 군대 타령을 보며 굳이 보들리야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없게 된 가상현실의 재현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한동안 대학에서 진행된 영어강의에 대해서도 선생은 매서운 일침을 놓는다. 혹자처럼 철저한 언어 순결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우리 것을 지키면서 소위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주눅 들지 않고 우리 고유의 사고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번역에 있어서도 외국의 모든 저작이 다 우리말로 완벽하게 변용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차용과 재창조의 개념에서 관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만하다.

 

 

 

 

 

인문학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천대받는 역설적 현실에 대한 분석도 남다르다. 학문의 전당이자 인문학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대학에서조차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문계역 학과를 통폐합하는 작금의 현실 앞에 인문학 열풍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 인문학을 내세우는 천박함이 아니라, 지금도 돈벌이가 되지 않는 시작(詩作)에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는 문학가들이야말로 인문학의 선봉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수양이 덜 되었는지 시에서 느끼는 감흥은 소설의 그것에 비해 못하지만 말이다.

 

선생의 시선은 우리 주변부의 거의 모든 것에 가 닿는다. 선생의 무대인 문학은 물론이고, 영화, 정치담론, 학계 그리고 만화까지 아우른다. 나도 한 때 재밌게 읽은 <미스터 초밥왕>의 간단한 서사 구조를 풍요롭게 만드는 다양한 이야기 재료에 힘이 있음을 지적한다. 선생의 글을 읽으며, 나는 왜 우리는 우리의 대표 음식으로 꼽을 수 있는 김치에 대해 그런 서사를 가질 수 없을까라는 의구심에 도달하게 됐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물론이고, 그 문화에 대한 통찰과 해박한 지식과 연구가 그런 문화 아이콘을 생산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하는 단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문화 생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두터운 계층도 필수적인 요소다. 단순히 만화라고 가볍게 여기는 상대적 문화 우월주의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칼럼 혹은 글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되새김질할 수 있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으로 일컬어 마땅하다.

 

 

 

 

 

책의 중간에 실린 사진에 대한 품평도 일품이다. 어떻게 하나의 사진을 관조하며 이렇게 다양한 분석이 가능할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뱃전에 올라앉은 이들의 시선부터 시작해서, 버거운 살이를 상징하는 구공탄 그리고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사진 속 주인공들의 신산한 삶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이미지를 문자로 형상화시키는 선생의 공력에 감복할 수밖에 없다. 나라면 어떻게 묘사했을까? 아마 무색무취한 설명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까. 선생의 글에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추적하는 날카로운 눈썰미가 존재한다. 그 눈썰미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거야말로 선생이 정갈하게 다듬어 쓴 칼럼을 읽는 재미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어느덧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 됐다. 주변에서 누군가 어떤 책이 좋을까라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를 권해 주련다. 나의 추천을 받은 지인도 이 정갈한 책의 문자향에 나처럼 푹 빠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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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돌봐줘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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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전 교보문고 매대에서 이 책을 봤다. 이 책의 제목을 들여다 보면서 애완동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이 책은 애완동물에 대한 책이 아니다) 애완견 기르기에 대한 책인가 하고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시절에 책을 사서 읽진 않았다. 아주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이 책이 절판의 운명에 처한 다음에야 그리고 그의 신간 <메이드 인 차이나>를 보고 나서야 <개를 돌봐줘>를 읽게 됐다. 결국 책과의 인연은 그렇게 가는가 보다.

 

프랑스 출신의 작가 장 미셸 에르의 데뷔작 <개를 돌봐줘>를 읽으며 우리나라 천명관 작가가 떠올랐다. 비범한 데뷔 소설로 문학계에 뛰어 들었지만, 어째 그 후로는 그만 못하다는 느낌이랄까. 장 미셸 에르의 경우에는 후속작 <메이드 인 차이나>와 너무 비교가 된다. 조국 프랑스에서 벗어나 중국까지 아우르는 글로벌한 스케일이지만 파리의 한 골목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 <개를 돌봐줘>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소설은 초반 둘르 불레트 가에서 벌어지는 서로 앙숙인 이웃 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라디오 방송작가 막스 코른느루와 달걀 아티스트 으젠 플뤼슈는 그야말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그저 그들의 진흙탕 싸움이 치열할수록 독자들은 즐거울 따름이다. 한쪽이 장군을 부르면, 다른 한쪽은 멍군을 부르는 공격과 방어전을 어쩌면 이렇게 재미지게 구성하는지 신예 작가답지 않은 노련함에 책을 읽을수록 빠져든다. 마치 천명관 작가의 <고래>를 읽을 때처럼.

 

, 그럼 이 유쾌한 소설의 제목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막스 코른느루가 이웃 브리숑 부인의 애견 엑토르를 <파리의 노트르담> 상자로 죽이고 그 사실을 숨기면서 롤러코스터 전개가 펼쳐진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관리인, 편집증으로 똘똘 뭉쳐 기괴한 영상을 재창조해내는 자모라 감독, 아파트의 꼬마 말썽꾼 브뤼노 등등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소설을 다채롭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렇지만, 한바탕 소동 끝에 브리숑 부인이 번지 점프로 죽으면서 <개를 돌봐줘>는 미스터리물로 방향을 튼다.

 

이 사건을 맡은 타뇌즈 반장이 사실은 경찰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을 지경이다. 브리숑 부인이 누군가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노력하던 투톱 주인공 으젠 플뤼슈마저 시체로 발견되면서, 그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막스 코른느루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너무 당연한 설정인가? 홀로 남은 막스가 힘들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며 도대체 누가 범인인가로 독자를 인도한다.

 

사소한 이웃 간의 다툼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살인사건 그리고 연이은 대폭발로 모두 13명이나 되는 세입자들을 날려 버리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후반에 가서 이런 결말로 이야기가 끝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물론 범인은 우리가 아는 범주의 인물이다. 누구나 다 범인이 될 수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에 미스터리/서스펜스의 재미가 있다. 게다가 서사의 주인공 역시 필요에 따라 무대에서 곧바로 퇴장시킬 수도 있다. 유머로 시작해서,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설정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일에 삐져서 상대방을 골탕 먹이는 일에 열중하는 막스와 으젠의 전투 전개 과정은 너무 재밌다. 무지막지하게 많은 피자 배달을 시키고, 남우세스러운 야릇한 잡지구독신청은 차라리 귀엽기까지 하다. 부적과 주술에 능한 도사로 포장해서 끝없는 전화공세에 시달리게 하는 수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양념처럼 등장해서 기괴한 시를 읊조리고, 극한의 말썽의 선보이는 꼬마 악동 같은 이웃의 배치도 마음에 든다. 이런 유머를 곁들인 소스를 후반부에 준비된 앙트레에 흩뿌리는 장 미셸 에르의 기법은 탁월하다. 소설의 곳곳에 배열된 캐리커처와 스케치는 상상만으로 부족한 부분을 곧잘 채워준다.

 

장 미셸 에르의 <개를 돌봐줘>는 대중소설이 지녀야할 모든 미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유머스러운 이웃 간의 전쟁에서 시작해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미스터리로 전환되고, 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서스펜스까지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은 순 없을 것 같다. 물론 결말은 온전하게 작가가 지배한다. 뛰어난 추리소설 팬이라면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겠지만, 나같은 보통의 독자에게 그건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저 작가가 먹여 주는 대로 스푼에 담긴 달콤쌉싸름한 시리얼을 소화해내면 될 테니까. 그것으로 만족한다.

 

빛나는 데뷔작의 아우라 때문에, <메이드 인 차이나>에서는 조금 실망했지만 여전히 장 미셸 에르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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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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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호들갑쟁이다. 무엇보다 책에 관해서 그렇다. 작년 가을, 중국 출신의 작가 모옌이 201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일단 그의 책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열세 걸음>, <개구리>, <홍까오량 가족>, <모두 변화한다>,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까지. 그런데 지금까지 읽은 책은 <사부님> 뿐이다. 호들갑이 지속적인 책읽기로 이어지지 않으니 큰 일이다.

 

모옌과의 첫 만남은 수년전 책을 다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할 무렵에 만난 중국 현대 소설선 <만사형통>에 실린 단편 <먹는 일에 관한 이야기 둘>이었다. 사실 오래 전이라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니 실제적인 첫 만남은 <사부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모두 세 개의 중편이 실린 소설집의 백미는 역시 타이틀인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가 아닐까 싶다.

 

한 때 잘 나가던 선구적 노동자 딩스커우 사부는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강퇴(강제퇴직)을 당한다. 이럴 수가 있나 그래. 중국 노동자의 모범으로 칭송받던 딩 사부 역시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조 조정이라는 미명 아래 길거리로 내몰린다. 시장님을 비롯해서 높은 분들에게 항의해 보지만, 수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 그런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별무소용이다. 그러던 차에 도제 샤오후의 기발한 제안으로 딩 사부는 새로운 사업을 하나 시작한다. 어찌어찌해서 장만한 고물 버스를 개조해서, 인공호수 부근을 찾는 연인들에게 러브하우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체면을 앞세워 사양하던 딩 사부도 배고픔 앞에 어쩔 수 없이 승복하고 만다. 문제는 이게 큰 돈벌이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각종 연인들의 편의를 위한 제품을 장만하면서 딩 사부의 러브하우스는 상종가를 치기 시작한다.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에는 항사 마가 끼는 법, 과연 딩 사부의 아담한 연인들의 휴게소사업은 어떻게 될까?

 

쇠불알볶음 때문에 이러저러한 에피소드가 끝없이 발생한 두 번 째 이야기 <> 역시 읽을 만하다. 소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생산을 위해 절대 필요한 존재다. 집단생산의 상징인 인민공사 소속 소들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문제는 다른 곳에 한눈 팔지 말고 일만 열심히 하도록 거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작가 모옌은 소를 거세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다양한 유머 코드를 넣으면서 재밌는 전개를 구사한다. 빼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수의사 동지를 소 잡은 우마왕이라고 표현한 장면에서는 절로 웃음티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거세된 소처럼 죽어라 일만 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는커녕 자신들의 대표조차 마음대로 뽑지 못하는 중국의 인민들이야말로 정치적으로 거세된 존재라고 말이다. 요즘 읽고 있는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에서 이란 정부의 검열관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성적 코드 잡아내기에 달인이라면, 중국의 공안들은 이렇게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을 잡아내는데 달인이 아닐까. 소 솽지를 둘러싼 한바탕 소동은 거세를 잘못해서 살모넬라균에 지독하게 중독된 솽지를 잡아먹은 인민공사 지도급 인사들의 집단 식중독으로 끝난다. 사건 처리를 비꼬면서 이거야말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대혁명의 위대한 승리라고 떠벌리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멋지다.

 

마지막 에피소드 <삼십 년 전의 어느 장거리 경주>는 모든 일에 있어 거의 전능한 능력을 보여준 우파분자, 그 중에서도 주충런 선생에 대한 오마쥬다. 1960년대 중국 각지에서 대부분의 우파분자들이 혹독한 시절을 보내는 동안에도 글쓴이의 사는 동네로 추방된 우파분자들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쾌활하고 낙천적으로 지냈다고 증언한다. 저자가 다닌 다양한 소학교의 노동절 체육대회와 관련된 현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관람대를 만들기 위해 멀리 장백산에서 운반된 홍송 재목을 훔쳐 어머니 관을 짜려던 얼치기 도둑 이야기, 주 선생이 내로라하는 탁구선수를 완패시킨 이야기하며 하나 같이 모옌의 장기인 리얼리즘에 바탕한 이야기들이다. 이 탁월한 우파분자 주 선생이 참가한 장거리 경주 우승으로 화려한 마무리를 맺는다.

 

인민해방군 출신의 작가 모옌은 철저하게 체제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하진처럼 폭넓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건 아니다. 리얼리즘에 탁월하지만, 항상 경계에 근접해 있을 따름이다. 왜 경계를 뛰어 넘어 곪아 가고 있는 체제의 급소를 찌르지 않는지 궁금하다. 딩 사부의 휴게소 사업 에피소드도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그런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 아무리 노동 계급의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구조 조정되어 먹고 살 게 없어진 마당에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모옌은 냉정하게 그린다.

 

무산계급이야말로 공산주의 국가의 기둥이라고 하지만, 권력화된 무산계급의 위선과 타락을 보여주는 <> 역시 마찬가지다. 냉소적으로 사건을 전개해 가며 선을 넘지 않는 기법 역시 탁월하다. 체제 내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을까? 모옌의 소설에는 과거의 중국이 아닌 현재의 중국 이야기는 왜 없는 것일까. 그가 중국 정부가 환영하는 어용작가라는 비판 역시 다시 한 번 곱씹어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모옌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같은 인민해방군 출신의 옌롄커 작가의 문화혁명과 대약진 운동에 대한 반성 같은 날선 비판을 그에게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갈수록 고단수가 되는 딩스커우 사부의 유머가 그저 우습게 읽히지만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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