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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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게 될 운명을 믿는가? 그렇다면 내가 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게 된 것이 그 운명이 아닐까 싶다. 지난 7월에 신형철 씨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통해 빼어난 산문집이 하나 나왔다는 소개를 듣고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하지만 이달초 우리 동네에서 열린 군포 책 축제 기간에 문동 부스에서 이 책을 사게 됐고, 이번 명절 동안 즐겁게 읽을 수가 있었다. 물론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다 즐거운 건 아니었지만,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책이라고 할까.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라는 레테르의 주인공 황현산 선생님이 그동안 발표한 칼럼을 모은 <책이 선생이다>의 제목은 프랑스 속담에서 힌트를 얻으셨다고 했던가. 낮이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행동의 시간이라면, 밤은 감성의 지배를 받는 성숙의 시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제목 한 번 멋지게 뽑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책에서 선보이는 선생의 사유는 유년 시절을 보낸 신안의 섬에서 선생이 느낀 정서에서부터 출발해서 거의 우리 사회가 접해 있는 거의 모든 접점을 모두 아우른다.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적 성찰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 격동의 세월을 몸소 체험한 지성의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말하고 싶다.

 

책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보면, 선생이 학자로서 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것만도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연구자의 사상까지 통제하려던 유신시절, 외국서적을 접하는 마지막 단계였던 우체국 창구에서 미스 아무개의 횡포에 왜 국가가 나의 공부를 방해하느냐며 일갈하고, 창구를 뛰어넘는 장면에서 일대 활극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 장면을 보며 마냥 웃을 수만도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 아니던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공부하며, 그것에서 비롯된 사유를 글로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자유가 부재하던 암울한 시절에 대한 선생의 소회는 희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역사의 역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던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이야기의 해석에서는 가히 탁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청춘들의 미래에 대한 충분한 고민의 시간이 묘하게 군대시절과 겹쳤을 따름인데 그렇게 갖다 붙이는 구조적 모순의 적용에는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요즘 대세가 된 텔레비전 예능에 나오는 군대 타령을 보며 굳이 보들리야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없게 된 가상현실의 재현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한동안 대학에서 진행된 영어강의에 대해서도 선생은 매서운 일침을 놓는다. 혹자처럼 철저한 언어 순결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우리 것을 지키면서 소위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주눅 들지 않고 우리 고유의 사고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번역에 있어서도 외국의 모든 저작이 다 우리말로 완벽하게 변용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차용과 재창조의 개념에서 관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만하다.

 

 

 

 

 

인문학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천대받는 역설적 현실에 대한 분석도 남다르다. 학문의 전당이자 인문학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대학에서조차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문계역 학과를 통폐합하는 작금의 현실 앞에 인문학 열풍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 인문학을 내세우는 천박함이 아니라, 지금도 돈벌이가 되지 않는 시작(詩作)에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는 문학가들이야말로 인문학의 선봉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수양이 덜 되었는지 시에서 느끼는 감흥은 소설의 그것에 비해 못하지만 말이다.

 

선생의 시선은 우리 주변부의 거의 모든 것에 가 닿는다. 선생의 무대인 문학은 물론이고, 영화, 정치담론, 학계 그리고 만화까지 아우른다. 나도 한 때 재밌게 읽은 <미스터 초밥왕>의 간단한 서사 구조를 풍요롭게 만드는 다양한 이야기 재료에 힘이 있음을 지적한다. 선생의 글을 읽으며, 나는 왜 우리는 우리의 대표 음식으로 꼽을 수 있는 김치에 대해 그런 서사를 가질 수 없을까라는 의구심에 도달하게 됐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물론이고, 그 문화에 대한 통찰과 해박한 지식과 연구가 그런 문화 아이콘을 생산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하는 단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문화 생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두터운 계층도 필수적인 요소다. 단순히 만화라고 가볍게 여기는 상대적 문화 우월주의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칼럼 혹은 글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되새김질할 수 있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으로 일컬어 마땅하다.

 

 

 

 

 

책의 중간에 실린 사진에 대한 품평도 일품이다. 어떻게 하나의 사진을 관조하며 이렇게 다양한 분석이 가능할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뱃전에 올라앉은 이들의 시선부터 시작해서, 버거운 살이를 상징하는 구공탄 그리고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사진 속 주인공들의 신산한 삶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이미지를 문자로 형상화시키는 선생의 공력에 감복할 수밖에 없다. 나라면 어떻게 묘사했을까? 아마 무색무취한 설명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까. 선생의 글에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추적하는 날카로운 눈썰미가 존재한다. 그 눈썰미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거야말로 선생이 정갈하게 다듬어 쓴 칼럼을 읽는 재미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어느덧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 됐다. 주변에서 누군가 어떤 책이 좋을까라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를 권해 주련다. 나의 추천을 받은 지인도 이 정갈한 책의 문자향에 나처럼 푹 빠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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