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눈이 제대로 내리면 꼭 찍어봐야지 했던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스노우맨]을 읽었던 분들은 대부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스노우맨]이 3월에 출간되는 바람에 눈다운 눈을 만날 기회가 없었지요.ㅎㅎ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직접 눈사람을 만들어서 찍어보았네요. 아래는 요 네스뵈 소설의 주인공인 '해리 홀레'와 [스노우맨]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올렸습니다.)

 

 

 

 

 

 

 

 


 

1. 해리 홀레는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오스트렐리아의 시드니로 가는 30시간 동안의 비행 속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합니다.

 

 

(밴드 생활을 접고 오스트렐리아로 6개월간 떠나는 네스뵈에게 알고 지내던 출판사 여직원이 밴드에 대한 책을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완성된 작품은 180도 분위기가 다른 '해리 홀레' 이야기였다는군요.)

 

 

홀레는 -요 네스뵈에 따르면-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순수한 사람에서 (해를 거듭하고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어두운 쪽으로 변해 간 캐릭터입니다. 자신이 쫓는 범죄자에 가까워진 것이지요. 따라서 시리즈의 이야기도 점점 더 어두워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가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섞여 있는 (완벽하지 않은) 그의 스타일이 맘에 든다고 밝힙니다. 요 네스뵈는 [레드브레스트]를 쓸 때까지 그가 누군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으니, 제대로 된 그의 실제적인 모습은 3편인 [레드브레스트]부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해리 홀레의 삶에 대해서 잘 알게 되어 이제는 그가 좋은 친구같다고 하네요.

 

 

 

 

 

 

2. 홀레(Hole)라는 성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에 등장하는 주인공 '해리 홀레(Harry Hole)'의 홀레(Hole)라는 성(姓)이 궁금해서 알아보니..

 

 

(노르웨이어 발음으론 '훌레'라고 읽는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은 '호울'이라고 발음하더군요.)

 

 

요 네스뵈 왈: "할머니가 살던 곳의 지역 경찰관의 성이었습니다. 저는 그 경찰관 (Mr.Hole)을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제가 꼬마였을 때 할머니는 우리들에게 항상 말씀하시곤 하셨죠. 만약 너희가 8시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홀레 아저씨가 나타나 잡아갈거야,라고요. (그당시) 전 그 홀레 아저씨를 진짜 크고 무서운 사람으로 상상하곤 했습니다."

 

 

네스뵈는 어린 시절 홀레 경관을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고, 수년 후에 한 장례식장에서 홀레 경관을 만났다네요. 장례식장에서 신부님이 그가 홀레라고 말했을 때, 먼저 네스뵈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휴, 아직 8시가 안돼서 다행'이었다고 합니다.

 

 

 

 

읽으신 것처럼, 해리 홀레의 홀레는, 우리식으로 치면, 망태 할아범 같은 존재였네요.ㅋㅋㅋ

 

 

어렸을 때 훌쩍훌쩍 울거나, 징징거리면, 어른들이 '망태 할아범'이 나타나 잡아간다고 위협하곤 했었지요 (그 구라에 속아 울음을 뚝 그치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나봅니다).

 

 

 

좀 더 알아보니 "Hole"은 노르웨이에서 흔한 성이라고 하네요. 노르웨이에는 바이킹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갈 정도로 유서깊은 Hole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있는데,그 의미는 '둥글고 고립된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3. 해리(Harry)라는 이름

 

 

 

 

1970년대에 노르웨이에선 옷을 어떻게 입는지 몰라서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입는 시골 촌뜨기를 'Harry'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요 뇌스베가 주인공 이름을 '해리'라는 진부한 이름으로 지은 이유는 그것이 평범하고 촌스럽기에 주인공에게 어떤 독특한 캐릭터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그리고 Harry는 요 네스뵈가 유년 시절의 영웅으로 삼았던 아주 좋아하던 지역 축구 선수의 이름에서 따왔다는군요.(축구 선수를 꿈꿨던 네스뵈 답군요.)

 

 

네스뵈는 자신의 주인공이 세련되고 지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름때문일까요? 우리에게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했던 "더티 해리"와 마이클 코넬리의 분신과 같은 형사 "해리 보슈"를 떠올리게 합니다.

 

 

 

 

 

 

 

 

 


 

 

 

4. 최초의 '해리 홀레'가 나오는 영화이자, 영어로 각색되어 만들어지게 될 작품은 바로 [스노우맨]!

 

 

 

시리즈를 쓰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 의해서 방해 받고 싶지 않았고, 소설과 비교해서 영화가 너무 강한 매체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해리 홀레시리즈를 영화화하는 것에 주저했던 요 네스뵈는 마침내, 홀레 시리즈의 영화화를 허락하게 되었죠. 책으로 상상하는 해리 홀레는 수 백만명 이상의 모습이 될 수 있는데, 한사람으로 제한되고 고정되어 버리는 게 싫었다고 할까요. 이런 네스뵈도 잠시 동안 홀레 역으로 생각해 놓은 인물이 있었으니, 그 배우는 바로 '닉 놀테(Nick Nolte)'! 그런데 닉놀테(1941년생)는 너무 나이 많아서 좀 힘들것 같네요. 홀레 역은 큰 변화가 없다면, 디파티드, 셔터 아일랜드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호흡을 맞추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될 듯 싶습니다.

 

 

 

 

 

 

 

 

 

 

 

 


 

 

5.해리 홀레는 20대에 어머니를 여의고, 교사인 아버지 '올라브'와는 친밀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이번에 나온 [레오파드]에는 홀레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밀도깊게 그려집니다.) 그리고 다운 증후군이 있는 여동생이 있습니다.(역시 [레오파드]에 등장하지요.)

 

죽마고우인 '외위스타인'은 작가 요 네스뵈의 절친의 이름을 허락받고 사용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6. 요 네스뵈가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상당한 공포감을 독자들에게 심어주면서,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책이 의외로 피로 가득한 책이 아니라, 폭력과 잔인성에 대해서 매우 절제되어 있다는 점이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후속작인 [레오파드]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 집으로 가져 들어온 '스노우맨'...실내에 들어오자 녹기 시작해서 몸이 홀쭉해졌네요.ㅋ)

 

 

 

 

 

7.[스노우맨]은 제목으로부터 시작된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영화 제작자인 친구가 언어 감각이 좋은 네스뵈에게 앞으로 만들게 될 공포영화의 제목을 하나 생각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네스뵈는 그 내용(친구들이 스노우보드 여행을 떠나 차례차례 죽는다는 이야기)을 음미한 후, 완벽한 제목이란 생각에 "스노우맨"을 추천해주지요. 하지만 친구는 적절치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단박에 거절합니다. 그러나 네스뵈는 눈사람의 이미지 자체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뭔가 사소하고, 심지어 아늑한 느낌을 주지만, 그러면서도 잠재적으로는 겁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스노우맨"이라고 느낍니다.

 

요 네스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보통 저는 플롯을 시작하고 나서 작품의 개요(synopsis)를 씁니다. 그리고 그 구조로부터 아이디어가 나오지요. 하지만 [스노우맨]의 경우는 그 반대였습니다. 이 소설은 제목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멋진 제목이었지요. 저는 이야기에 관해 그 제목이 무엇을 암시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지요. 책의 제목은 집필 도중에 떠 오르기도 합니다. 특별한 규칙은 없습니다."

 

 

 

8. 해리 홀레는 고독하고, 알콜중독에, 여자를 좋아하고, 냉소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사람입니다. 요 네스뵈도 이 모든 특징이 중년 남자 형사의 상투성(Cliche)을 나타낸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델로 삼고 있는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진부함을 껴안고, 그것들로부터 한발자국 더 나아가라." 맞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해리 홀레는 전형적인 특징 속에서 뭔가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것을 품고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찍고 싶은 사진들이 있습니다.

 

이 포스팅은 해리홀레와 요네스뵈에 대한 제 애정이 담겨 있는 포스팅이라 보셔도 좋습니다.ㅎㅎ

 

하트모양으로 눈만들기가 은근히 어렵다는..ㅋㅋㅋ 눈사람의 빨간 모자는 이 장갑을 접어 만든 것입니다.)

 

 

 

 

([스노우맨] 책 장정과 매우 잘 어울리는 카페가 있어서 책을 들고가서 찰칵~찍어 보았습니다. 이 사진은 여름에 찍어 놓았던 것인데,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지면..꼭 찍어야지,하고 벼르고 있었답니다.)

 

 

 

 

 

(이 카페의 창에 붙어 있는 눈송이 모양때문에 그림자를 찍으면, 눈송이 모양이 바닥에 생깁니다. 이 사진의 컨셉은 주인공 '해리 홀레'가 빛과 어둠속에 몸을 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해보았습니다.ㅋㅋㅋ)

 

 

 

책에 대해서 좀더 궁금하신가요? 아래에 제가 쓴 스노우맨 리뷰를 링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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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매화
미치오 슈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기다렸던 미치오 슈스케의 [광매화]를 읽었습니다. 행복의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소외시킨 자들의 이야기가 작가의 섬세한 필치로 묘파되어 있는 걸작입니다. )

 

 

광매화를 읽다

 

 

'씨엘북스'에서 나온 미치오 슈스케의 [광매화]를 읽었습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읽기 시작해서 두어 시간만에 숨가쁘게 읽어버렸습니다. '미치오 슈스케'라는 작가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에 출간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책이었네요. 저는 슈스케의 국내 출간된 전작을 읽으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확실한 호불호를 표현해왔는데, 이 작품의 경우 '만족'과 '불만족'의 저울에 달아보면, 확실히 '만족'쪽으로 추가 기웁니다. 세렝게티 초원의 허기진 맹수처럼 돌격하여 단박에 끝냈을 정도로 빨리 읽힌 작품이었습니다. 기존의 슈스케 팬에게도 불평의 여지 없는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슈스케의 특성들이 골고루 균형있게 작품마다 음각되어 있어, 처음 미치오 슈스케를 접하시는 분에겐 매우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제1장 '숨바꼭질', 제2장 '벌레쫓기',그리고 제3장 '겨울나비'는 [구체의 뱀]에서 보여주었던 어두운 분위기와 생채기들을 연상시켰고, 그 이후의 장들은 타자의 아픔에 대한 감응, 그리고 희망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해줘서 앞장들에 비해 확실히 밝은 톤을 보여줍니다.
차갑고 서늘한 분위기의 앞장들에 비해, 4장부터는 확실히 느껴지는 체감온도가 4~5도 정도 올라갈 정도로 따스한 분위기기로 변합니다. 기술적으로는 4장 '겨울 나비'엔 슈스케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말장난(언어유희)을 통한 간단한 트릭이 등장해 [까마귀의 엄지]를 떠올리게 하고, 5장 풍매화의 경우는 소소한 반전이 담겨있어, 전반적인 분위기가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다양한 느낌의 슈스케를 맛보고 싶다면, 선뜻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을 정도로 균형감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1장부터 3장까지의 이야기는 어두운 슈스케를, 4장부터 6장까지는 밝은 슈스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작가에 따르면, 처음에는 철저하게 비통하고 어두운 느낌으로 여섯작품을 쓰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랬다면, 슈스케가 최초로 썼던 단편집 [술래의 발소리]와 매우 비슷한 풍이 되었겠지요. 사실 저는 3장까지 읽었을 때는 앞으로 전개될 연작의 전체적 분위기도 그러하겠지라고 미리 속단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슬픔과 괴로움이 최대치였던 3장 '겨울 나비'에서 4장 '봄나비'로 바뀌면서 '구원'에의 의지가 스며있는 따스한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겨울'과 '봄'처럼 온도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계절적인 제목이 의미심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

 

 

 


 

(나비는 이 작품에서 상당히 중요한 상징도구입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각 장마다 나비를 공들여 새겨넣었습니다.)

 

 

어두운 전반부와 비교적 밝은 후반부

 

일단 6개의 단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상처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 상처의 내역들은 모두 다르지만, 과거의 상흔이 현재 삶의 발목을 붙들고 있다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두고 있는 유폐에서 벗어나 한걸음씩 걸어나오는 모습을 슈스케류의 서정으로 섬세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이제는 '마치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 속에서 빠져나온 인물같다'라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작가 특유의 색깔로 채색된 세계가 구축되어진 느낌입니다. 특히 첫번째 이야기는(사실 이 작품만을 단발로 쓰려고 했다고 합니다) 연상의 여성과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그려져 있는데다, 아버지의 인간적 결함을 발견하고 그를 타자화 함으로서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성장소설적 설정때문에 [구체의 뱀(2009)]과의 친연성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자극적인 소재로 인해, 이 이야기가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강렬하고 충격적인 영상으로 각인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 슈스케는 연상의 나이의 여자에 농락당하는 소년이나 청년이 나오는 작품들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고 하네요. 가령 라디게의 "육체의 악마(열여섯살 소년과 전방에 나간 군인의 아내의 열애를 다룬 이야기)"나 B.콩스탕의 "아돌프(청년 아돌프가 연상의 유부녀 엘레노르와의 사랑을 다룬 자전체 소설)"같은 작품들 말입니다.)

 

 

작가의 미스터리적인 경향은 초기작들과 비교할 때 눈에 띄게 지워진 듯한 느낌은 있지만, 두번째 세번째 이야기를 연거퍼 읽다보면, 그가 추구하는 소설의 본령에 미스터리가 완전히 소거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미치오 슈스케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진실이 밝혀져 독자가 그것에 타격을 받을 때, 독자는 미스터리한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경찰이나 범죄자가 이야기에 등장한다고 해서 미스터리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단 오히려 이야기의 진실이 까발려지는 순간 때문에 사람들이 미스터리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미치오 슈스케)
그런 의미에서, 제2장과 제3장은 이 작품집에서 가장 미스터리적인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초창기의 강렬한 미스터리성은 많이 희석되었고, 좀더 순수문학적인 자리로 옮아가려는 작가의 욕망은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미 먼저 출간된 [달과 게]나 [물의 관]을 읽어보신 독자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방향성을 어렵지 않게 추측하실 듯 싶네요.

 

 

 

이 연작 단편집의 특징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각 단편이야기의 인물들이 조금씩 -마치 십자말 풀이처럼-연결되어 있는 점입니다. 앞 장에서 다뤄진 인물이 후일담처럼 뒷장에 그 인물의 뒷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해서 독자는 그 확장된 이야기가 반갑습니다. 가령 첫번째 장에서 주인공이 창밖을 통해 바라보던 술래잡기 하던 노란색 티셔츠의 소년이 두번째 장에서 바통을 받아 "술래가 찾아 오지 않았다'라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릴레이 하듯 이어지는 등장인물은 뭐랄까요, 좀 더 정이 들어서 감정이입이 수월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 1장의 조연이, 제2장의 주인공이되고, 제 2장의 조연이, 제3장의 주연으로 되는 방식인데, 이 방식을 택한 이유는, 작가가 연결성이 없는 오합지졸의 단편집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각 장마다 연결된 느낌을 주기 위해 각 장의 제목들 조차 3글자로 엄격하게 제한하여 정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글자수마저 맞춰서 옮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일본어 제목은 보시다시피, 3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虫送---風媒花-光)
따지고 보니 이 단편집외의 다른 단편집인 [술래의 발소리](2009)나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2011)에서도 단편들이라 할지라도 같은 색깔로 묶을 수 있는 연결성을 볼 수 있었지요.

 

 

 

 

 

 

(이 세계가 나와 타자간의 관계 속에서 이기적 욕망때문에 서로를 생채기 내는 공간이라는 슈스케적인 주제에 대한 천착은 여전하지만, 암울한 절망감보다는 희망과 구원의 손을 내미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어느새 구원과 희망은 슈스케에게 있어서 중요한 테마로 자리잡은 듯 합니다.)

 

 

왜 나비인가?
창밖에서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춤을 춘다. 여름 햇살을 즐기는 듯한 날갯짓. 어쩌면 친구를 찾는 것일지도. (제1장 숨바꼭질-p.46)

 

 

하얀 나비가 천천히 우리 앞을 가로 지르며 강변 어둠 속으로 날아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새하얀 날개를 나풀나풀 움직이다가 머지 않아 눈 녹듯 사라졌다. (제2장 벌레쫓기-p.90)

 

 

작고 하얀 무엇이 어룽어룽 움직인다. 나비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텐트 안에서 날개를 쉬고 있다. 손을 뻗자 나비가 가볍게 날갯짓을 했따. 날개 끝으로 내 손가락을 사뿐히 스치며 팔랑팔랑 텐트 안을 날아다닌다. 의지할 데 없는 아이가 남긴 낙서 같은 하얀 궤적이 텐트에 둘러친 돗자리 틈새로 불어드는 바람에 밀려 옆으로 흔들린다. (제3장 겨울 나비-p.96)

 

 

그때 하얀 무언가가 시야를 가로질렀다. 나비 한 마리 가 외로이 너울너울 흔들리며 석양을 향해 빨려 들어가듯 날고 있었다. 나비는 매일 정해진 길을 날아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제4장 봄나비-p.162)

 

 

하얀 나비 한마리가 맑은 초여름 공기를 즐기듯 날개를 팔랑이며 멀리 가슴을 활짝 편 소나기 구름쪽으로 사라졌다. (제5장 풍매화-p. 237)

 

 

하얀 나비는 도망치듯이 혹은 장난치듯이 어둠 속에서도 날개를 반짝이며 팔랑팔랑 높이 날아올랐다. 나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 보니 어느새 두 눈에 가로등 불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다시 나비를 찾았지만 나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비가 사라진 허공 끝에 시선을 고정하고 멈춰섰다. 아사요도 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6장 아득한 빛-p.303)

 

 

보다시피, 전 장에 걸쳐서 '하얀 나비'가 등장합니다. 처음 읽을 때는 제목에 꽃(광매화)이 들어가서 그런가? 나비가 자주 등장하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다시 읽으면서 확인해보니 작가의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하얀 나비'를 집어 넣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작품에 낙관을 찍듯 '나비'를 등장시킨 이유는, 앞서 말한 것 처럼 각각의 단편이 하나의 테마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연결고리로서 기능한다고 느껴집니다. 이 전 단편집인 [술래의 발소리 (2009)]의 경우에 "S"라는 인물을 각 단편마다 등장시켰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하얀 나비"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나옵니다.우선 '나비'는 대표적인 꽃가루 매개자이기에 '꽃'과는 원심분리해 내기 힘듭니다. 치약과 칫솔처럼 표리일체의 느낌이지요. 제목이 '광매화'라는 것. 풍매화, 충매화라는 말은 있지만, 광매화는 사전에는 없습니다. 작가의 조어(造語)이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힌트를 통해 '광매화'라는 제목이 갖는 의미를 독자가 추측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풍매라는 한자를 풀면 바람 풍(風)에다가 중매하다 할때의 매(媒)를 쓰거든. 바람으로 꽃가루를 운반하는 꽃이야. 풍매화는 화려한 외관을 가질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일부러 자신을 꾸며서 곤충을 불러 모으지 않아도 되니까. 바람이 화려한 색깔이나 눈에 띄는 모습에 이끌려서 불지는 않잖니.
도모에 씨는 설명하는 김에 곤충이 꽃가루를 옮기는 꽃을 충매화(蟲媒花)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가르쳐주었다. 어쩐지 충매화보다 풍매화 쪽에 호감이 갔다. (p.210)

 

 

 

광매화의 의미

 

빛이 매개가 되는 꽃. 작품 전반부에 어둠 속(작가는 그것을 '인생의 그림자'라고 표현합니다)을 날던 나비는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꽃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을 희망이라 불러도 좋고, 구원이라도 불러도 좋습니다. 아니면,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보아도 좋구요. 특히 마지막 장-아득한 빛에서 이런 빛의 이미지가 만재(滿載)합니다. 미치오 슈스케에 따르면, 빛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밝힙니다. 빛이 눈부시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림자란 빛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기에 빛이란 결국 가장 어두움에서 가장 밝음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빛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지요.

 

 

작품의 분위기도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서서히 바뀌는데, 종장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수렴되고, 구원됩니다. 어둠에 빠진 인물들을 밝은 쪽으로 끄집어 내주고하는 작가의 의도를 장이 바뀔때마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에 따르면 여자 주인공의 이름인 사치(幸)라는 한자는 원래 양손목을 위아래로 하고 수갑을 채운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였는데, 나중에는 형벌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 바뀌어서 지금은 행운이라는 뜻을 나타낸다고(p,161) 합니다. 작가는 수갑을 두른 것처럼 어둠 속에서 옥죄어 있는 등장인물들이 형벌에서 벗어나 행복(幸福)과 행운(幸運)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인도합니다. 빛을 향해 팔랑거리며 나아가는 나비처럼.
작가는 소설 속에 나비를 심어 놓은 진짜 이유는 6장의 끝부분에 등장합니다.
그 나비는 어떤 풍경을 보았을까? 빛으로 가득 찬 풍경이었을까? 어둡고 슬픈 풍경이었을까? 때로는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는 이 세상을 나도 나비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싶다. 모든 것이 한곳으로 흘러 모이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이 세상을. 어떤 풍경이 보일까? (p.303)
작가는 한 마리의 나비가 모든 사람을 보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작나비나 긴꼬리부전나비,흰점팔랑나비가 아닌 '하얀 나비'로 통일했던 거죠. 고대인들에게 나비는 영혼을 상징하거나 빛의 세계를 지향하는 무의식적 매혹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빛의 세계을 갈망하는 영혼의 암시에 대한 메타포로 나비만한 것이 없을 듯 싶네요. 하얀색은 전통적으로 순수를 의미하고, 단테는 천국을 백색 빛의 나라라고 묘사하기도 했지요. 시인들은 영원의 세계를 묘사할 때 주로 흰색으로 표현하므로, 슈스케의 '하얀 나비'는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된 한가지는, 미치오 슈스케는 기억의 어두운 뒤편으로부터 삶의 무늬들을 길어올리는 과정에서 곤충을 상징적 소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슈스케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소설에서 어두운 기억이라는 주제에 대한 편재성과 함께 곤충의 이미지에 대한 의존도가 사뭇 높다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미 [술래의 발소리]의 방울벌레, [해바라기가 피지않는 여름]의 무당거미, [구체의 뱀]의 꼽등이, [달과 게]의 소라게(곤충은 아니지만 작은 생물이라는 점에서)등을 마치 관찰자나 인격체처럼 묘사했던 것을 목도해 온 저로서는 이번 작품 속에서 곤충채집 하는 장면이나, 곤충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등장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습니다. 이젠 이렇게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곤충의 이미지에 의탁하는 방식은 작가의 독특한 표식처럼 낯익습니다.
작가는 유년시절 작은 생물들을 좋아했다는 것을 밝히면서 눈에 보이지 세계에 대한 스케치가 영상매체와의 차별화라고 잘라 말합니다.

 

 

 


 

(씨엘북스측은 각 장을 구분하는 페이지에 나비의 이미지를 사용했는데, 이는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내용으로 볼때 매우 자연스럽네요. 각 장마다 나비의 크기와 모양에 조금씩 변화를 주었는데 그것을 확인하는 것도 은근 재밌습니다.)

 

 

총평

 

 

연재기간 2년. 비교적 길었기 때문일까요. 작가는 장편과 다른 시리즈의 단편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 출입이 가장 많았던 작품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새로운 단편을 시작할 때, 이전에 썼던 장까지를 다시 음미하고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요컨데, 이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한마디로 급하게 쓴 것들이 아닙니다. 연재기간이 길어지면, 세상과 작가 스스로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되지요.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단편집이지만 큰 스펙트럼과 깊이감을 보여줍니다. 청년이나 어린이의 시선만이 아닌,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다양한 주인공들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색채도 전반부는 어두운 그림자 짙게 드리워져 있고, 후반부는 비교적 밝은 빛의 세계를 지향해서 독자에게 다양한 맛을 선사하지요. 제가 이 책 [광매화]를 슈스케를 미처 접하지 못한 독자들의 첫번째 책으로 꼽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전반부가 마음에 들면(사실 저는 이쪽입니다만), [술래의 발소리],[구체의 뱀],[해바라기가 피지않는 여름],[달과게],[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 같은 작품을 구해서 어두운 느낌의 미치오 슈스케를 더 알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비교적 밝은 느낌의 후반부가 마음에 든다면,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 [까마귀의 엄지], [외눈박이 원숭이]등을 읽으면 좋겠다고 느꼈지요. 그런데 미치오 슈스케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을 접할 첫번째 책으로 바로 이 작품을 선택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른 이유입니다. 앞서 말했던 바통을 넘겨주는 식의 구성으로 단편과 장편의 경계를 지우기에, 단편 선호자와 장편 선호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장편으로는 할 수 없는, 다시말해 연작 단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었기에 이번 작품집을 썼다고 했는데, 그 시도는 매우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각 단편마다 독자들을 흡입하는 만만치 않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작품인데, 그 여운이 다음 장까지도 온기를 잃지 않고 고스란히 이어지니 말입니다.

 

 

이 세계가 나와 타자간의 관계 속에서 이기적 욕망때문에 서로를 생채기 내는 공간이라는 슈스케적인 주제에 대한 천착은 여전하지만, 암울한 절망감만을 보여주는 데 몰두하지만 않고, 희망과 구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제 슈스케의 소설들이 배회하고 있는 세계는 힘겹고 어두운 삶의 언저리에서, 이제는 울 이유가 없다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듯 보입니다. 작가는 힘주어 말합니다. 울지말자. 울 이유가 없다고. 하얗고 눈부신 세계를 바라보라고.(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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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2-11-2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이름이 우리나라 모 경연프로그램의 준말과 같군요. 나비라고 하시니 이와이 슌지 감독의 "스왈로우 테일"에서의 나비 문신의 그 상징성이 떠오르네요.

에세르 2012-12-03 18:16   좋아요 0 | URL
만약 미치오 슈스케가 하루키만큼 알려진다면, 금방 한국 독자의 머리에 각인 될 듯 싶어요. 너무 유명한 프로그램의 준말과 똑같아서요..ㅋㅋ 그래서 주변에 이 작가를 소개하면 한결같이..사람들이 어어..똑같네..라고 말하지요.
스왈로우 테일은 아직 못봤는데, 혹시 보게 되면 관심가지고 보겠습니다.
 
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 트라비아타
이부키 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책의 분위기에 맞춰, 표지를 찍어놓은 사진을 이용하여 내 마음대로 한번 만들어 보았다.)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계단을 내려가 샌들을 신고, 정원으로 나가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 아래에는 어둠만 잔뜩 깔려 있을 뿐이었다. 밤하늘도, 바다도 경계가 사라져,
그저 검은색 하나만이 눈앞에 있었다.
바닷물을 만지고 싶어졌다.
(p.26)
작품은 기슈지방 남부의 미에(三重)현의 '미와시'라는 작은 해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처럼 바닷가 풍경이 책 안을 적시고 있어서 이전에 찍었던 사진을 이용해서 내 마음대로 표지를 만들어 보았다. 텅빈 조개 껍질이 어쩐지 끝나버린 여름을 상기 시킨다. 개인적으로 바닷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배경만으로도 기대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배경이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여겨지는 경우가 있는 있는 이 소설이 바로 그러하다. 나는 이 소설을 몰려드는 파도소리와 리듬을 생각하며 줄곧 읽었더랬다.

 

 



 

이부키 유키(伊吹有喜)의 이 작품은 2008년 그녀가 '나가시마 준코'라는 이름으로 [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 트라비아타]로 발표되어 제3회 포플라 소설대상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2009년 책으로 발간되면서 제목을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바꾸고, 필명도 현재의 이부키 유키로 바꾸게 되었다.
예담 측은 (개인적인 추측인데, 원제에서의 '바람'이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공기의 흐름(風)을 뜻하지만) 연애 소설에서 '바람'이 나타내는 의미가 우리 말에는 다른 부정적인 뜻이 있어서, 이 제목을 피하고, 원래 발표된 제목을 사용한 듯 보인다.[바람을 기다리는 사람] 보다는 원래 제목 [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 트라비아타]가 훨씬 괜찮게 느껴진다. (사실 제목때문에,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두 주인공 '비올레타'와 '알프레도'의 사랑처럼 안타깝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소설의 곳곳에서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로맨틱한 오페라인 '라 트라비아타'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여름이 끝날 무렵이란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바로 39세라는 나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름의 태양처럼 시뻘겋게 불타오르다가 마흔이 넘으면 가을이 되는 거예요.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서서히 식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도 언제까지 지속되는 여름은 없어요. 서른아홉, 그야말로 여름의 끝이죠. (p.277)

 

이 작품으로 데뷔하던 작가, 이부키 유키의 나이도 당시 39세였는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여주인공과 작가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이제 열정과는 거리가 먼 나이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말라가는 고목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텐데,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여자(남자)의 마음이 남아 있는 나이랄까. 마치 오스카 와일드가 이야기한 "노년의 비극은 그가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젊다는 것이다."라는 언명이 떠오르는 구절이기도 하다.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해서, 젊은이들의 푸릇푸릇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중년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나가서 의외였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사랑의 문제를 넘어서 중년의 문제, 노년의 삶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름의 끝날 무렵'이라는 상징성 짙은 제목이, 50대의 하얀 가을, 60대의 검은 겨울까지도 생각해보게 만든 것이다. 노년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알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 곳은 내 상상력이 밟기 두려워하는 곳이지만, 피할 수 없는 곳이기에 더 두렵다. 부디 시간을 음미해가며 그 나이에 걸맞는 몸과 마음으로 노년을 맞이하기를 바랄뿐이다.

 

 

 

 

이 작품은, 작품 내내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베르디(작곡), 모차르트(작곡), 바그너(작곡), 헨델(작곡), 바흐(작곡), 글렌 굴드(연주), 르페브르(연주)등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러기에 음악을 (특히 클래식음악) 좋아한다면, 더 매력으로 다가 올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좋아하고, 클래식 음악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서,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기실 작품 속의 음악을 당의정(糖衣錠)삼아 핥으며 책을 읽는 것 만으로도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작가 이부키 유키가 클래식에 대한 애정과 조예가 깊다고 하는데, 그것을 유감없이 이 작품에 쏟아 부은 듯 싶다. 테쓰지의 어머니가 남겨주신 집은, 작가의 표현을 빌면 멋진 식기와 유리잔등이 넘쳐나서 '여자들이 동경하는 보물 투성이'집이라고 했지만, (남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이 집이 어마어마한 LP와 CD,책으로 가득차 있어서 초미의 관심을 갖고 읽었다.
이 책에서 음악을 녹음해주고, 그 음악을 듣는 행위는 -마치 연애 편지처럼-기미코와 테쓰지의 사랑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테쓰지를 통해 오페라 '춘희'를 소개 받는 기미코는 전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듣고, 이 오페라에 대한 온갖 녹음을 들으며 즐거워 한다. 둘의 사랑을 대변해주는 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 속에서 음악은 기미코에게 사고로 죽은 아들과의 접점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음악을 들으면서, 피아노를 전공하려 했던 아들과 대화하고,이해하려 하며 그의 존재감을 느끼며 추억한다. 그저 소설내에 B.G.M(배경음악)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추억과 치유와 사랑의 메신저로서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이부키 유키 소설 내의 음악이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는 음악과 갈라지는 지점일 것이다.

 

 


 

빛나는 소리의 입자가 날아오르고, 튕기며 마음속으로 녹아든다. 그것은 파도의 거품과도 비슷해. 자신도 모르게 볼륨을 높였다. 이런 음악이 있구나,하며 두 귀에 살짝 손바닥을 댄다. 곡명은 바흐의 <아다지오>였다. 뜻은 알 수 없지만 느낌이 좋은 이름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키미코는 무의식중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는 순간이었고 이내 사라졌다. 이어폰을 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러자 귓가에 훅 하고 숨결이 불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장난치듯 몸을 바싹 기대는 것 같았다. (p.52)


 

 


 

(작가는 사랑이란 '밥처럼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라는 전언을 책밖의 독자에게 보내온다.
그래서 투박하게 '사랑을 먹다'라는 컨셉으로 찍어본 사진.)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테쓰지와 떨어져 지내는 키미코가 테쓰지가 있는 도쿄의 날씨를 신경쓰는 부분이다. 예컨대 사랑이란게 이렇다. 사랑은 타자가 내 삶에 틈입해서 나를 따라 다니게 된다.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달처럼 어디를 가든 사랑에 빠진 자를 비춘다. 이런 경험은 사랑을 해본 경험이 있는자에게는 누구나 있었던 경험이 아닐까. 작품은 이렇게 동일한 경험의 추체험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텔레비전에서는 전국의 날씨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일의 도쿄는 비.
비 표시가 된 '도쿄'라는 문자와 그 배경이 되고 있는 롯폰기의 모습이 비친다. 어디 있든 매일 아침, 매일 밤, 도쿄의 풍경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 하늘 아래 있을 테쓰지를 생각했다. (p.322)
어찌보면, 세상에 흔한 것이 '연애이야기'라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쉽게 상투적이 될 수 있다. 마치 보라색 사탕은 대개 포도맛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뻔한 사건 전개와 대사로 참신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번 결혼했던 적이 있는 중년들의 조심스런 사랑이란 점이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젊은이들의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랑보다는 조심스럽고 신중할 수밖에 없다.)도시의 엘리트 남성과 시골의 순박한 여성의 사랑이라는 점도 다른 작품과는 구별될 수 있는 특징이라 하겠다. 두 사람 다 상처를 품고 있기에, 그 상흔들을 보듬어 안으면서 사랑이 싹튼다.
현재 속에서 고통스런 과거를 호명하는 행위에 익숙한 키미코나, 가족과의 소통불능과 부인에 대한 상처로 세계와의 관계맺음에 실패한 테쓰지 모두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 과정이 위화감없이 자연스레 묘사되어 읽는 내내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과장된 제스쳐나 감정의 과잉은 없었던 점이 좋았다.울창한 숲을 걸을 때 나무에서 피톤치드가 방사되어 상쾌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부키 유키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발산하는 청신한 느낌이 공기가 맑은 숲속에 산림욕이라도 한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어지럽게 마음 속을 부유하던 일상사의 피곤한 것들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투명한 느낌의 이야기 속에 인간 사이의 어둡고 공허한 단절의 틈을 응시하는 작가의 눈매 또한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꼭 제목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직 여름의 기운이 남아있는 초가을에 읽어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 싶다.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줄거리가 탄탄하고 인물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작가로 데뷔하기까지 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낸 결과물이라 그렇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게 되면, 욕망은 사그라들고 무작위로 날아들던 큐피드의 화살도 통제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어보면, 무기력하고 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단순하고도 명징한 진실에 가닿게 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나이와는 무관하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춘희'에 나오는 가사의 한 부분이 마음 속에 메아리친다. '사랑하고 싶다. 나를 사랑한 것과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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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2-11-09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내용도 사진도 모델도(?)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늘 책 읽으시면 책을 야외나 카페에 데리고 가서 사진촬영 해주시나봐요? 지난번 레오파드도 그렇고요. ^^

에세르 2012-11-23 19:52   좋아요 0 | URL
야클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책을 읽고 책이 마음에 들면 망설임없이 외부에 가지고 나가서 찍어 줍니다. ^^ 레오파드는 네..꼭 아프리카에 갈 수 없기에 꼭 동물에서 찍고 싶었습니다.ㅎㅎ

2012-11-10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세르 2012-11-23 19:52   좋아요 0 | URL
액박이 저도 뜬 것 같아서 새로 사진을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Mephistopheles 2012-11-10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라트라비아타는..특히 딱 꼬집어 말해서 "sempre libera"는 이 동영상으로 대체하고 싶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loVh94Dbv9w)

에세르 2012-11-23 19:58   좋아요 0 | URL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복사해서 구글에 붙여서 보았습니다. 영화의 한장면이죠? 음악도 좋고,영상도 멋집니다.^^ 노래 너무 감동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남자주인공 얼굴보니) 예전에 좋아했던 영화네요~

라로 2012-11-1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세르님~~~~~~.
저는 작업하신 표지가 제목과 더 잘 어울려요!!!
님의 리뷰를 읽으면 그 책이 꼭 사고싶어져요!!!ㅜㅜ
돈 윈슬로의 책도 욕심내어 원본으로 샀는데 아직 읽고 있지는 못하지만
하루키의 책은 덕분에 즐거운 독서였어요!!!!^^(땡투 저라는 은근한 고백,,ㅋ)
이 책도 음악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혹 하는걸요!!!
제가 원래 일본 서적을 잘 안 읽어요. 하루키와 히데오등 몇 안되걸랑요~~.ㅋ

에세르 2012-11-23 19:57   좋아요 0 | URL
나비님, 작업한 표지가 더 멋지다고 칭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두번째 줄에 쓰신 말씀은, 제가 책관련 포스팅을 한 후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네요..^^
하루키의 책 마음에 드셨다니 보람을 느낍니다.ㅎㅎ
 
레오파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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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좋다. (The thicker, The better)

 

올 초 [스노우맨]이 들이민 충격이 아직까지도 손에 잡힐 듯 남아 있다. 나는 [스노우맨]을 통독한 후, "소중한 눈 보호법 리스트 중에 '1시간 독서후에는 10분간 눈에 휴식을 주세요'라는 말이 있다. 이 문구를 무색하게 만드는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눈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그 10분을 쉴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라고 썼다. 그만큼 다른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몰두하고 읽은 책이었다. 그리고 요 네스뵈의 다른 작품이 이 작품보다 재밌기는 아마 힘들지 않을까,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7개월 후, 해리 홀레가 [레오파드]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무려 784페이지에 이르는 두께이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가졌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읽는 내내 절감했다.

 이 작품은 [스노우맨]을 능가한다. 이 책은 치명적인 재미로 가득차 있다. 그러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중량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이렇게 빨리 읽게 되는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주요 캐릭터 외에 다른 등장 인물들의 부차적 줄거리(subplot)마저도 흥미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어떤 평자는 다른 조연급 인물들의 디테일한 삶의 궤적을 훑은 것 때문에 지나치게 작품이 길어졌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요 네스뵈는 각 인물들에 공평하게 분량을 배분함으로써 독자가 범인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작가가 주인공 외의 어느 한 특정 인물만의 과거 묘사에 공을 들이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범인이 노출되어 김이 빠져버리는 경우는 얼마나 허다한가.

 

수년 전 나는 일본 홋카이도 여행 중 쿠로다케 산 중턱까지 가기 위해, 로프웨이(케이블카)를 타러 갔었다. 로프웨이의 출발점 승강장에 케이블카를 지탱해주는 어른 팔뚝 굵기의 케이블을 잘라서 자랑하듯 전시해 놓은 것이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안전을 위해선 철심을 꼬아 만든 케이블이 굵으면 굵을 수록 좋다,라는 것이었다. 여기 또 다른 의미로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좋은 것이 있다. 이 정도로 거역하기 힘든 재미를 준다면 이 보다 더 두꺼워도 좋다. 스칸디나비아 지방은 길고 추운 겨울로 인해 실내에 있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구를 신경써서 고르기 때문에, 튼실한 명품가구들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어둡고 추운 겨울 밤을 함께 지새울 양질의 스릴러를 그들은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처럼 일급 스릴러라면, 마땅히 두꺼워야만 한다.

 

 

 

 

 

 

 

 

 

 

 

 

 

 

 

 

(비채 표지의 빨간 색 책등은 사과의 색깔을, 아니면 피의 색깔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정면의 당구공처럼 생긴 빨간색 물건은..두 말할 것도 없이 '레오폴드의 사과'를 나타낸 것이다.)

 

 

(레오폴드의 사과의 생김새. 24개의 날카로운 바늘이 튀어 나온다.)

 

레오폴드의 사과(Leopold's Apple)

 

콜탄

 

'이것은 사실 고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효율적인 도구는 아니다. 입에 들어간 사과 때문에 죄수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과에 달린 줄을 두 번째로 잡아당길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목격한 원주민들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 다음 사람은 입을 벌리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다이아몬드의 위치를 술술 털어 놓았다.(p.224)

 

많은 독자들을 소름끼치게 했을 '레오폴드의 사과(Leopold's Apple)'는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오래도록 돋을 새김되어 남아 있을 이 고문 기구는, 우연의 일치일까, 묘하게도 '레오파드(Leopard)와 음성학적으로 유사성을 보인다. 실제로 몇몇 영미 독자들 중에서 레오폴드의 사과를 '레오파드의 사과'로 잘못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 작품을 읽어 본 독자는, 레오파드, 레오폴드..이 비슷한 발음의 두 단어가 스릴러 팬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배경으로 콩고가 등장하기 때문에 콩고를 개인사유지로 만들었던 벨기에의 '레오폴드 왕'의 이름이 이 고문 기구로 붙여 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그것 외에도 '레오폴드'가 식민지배 당시 수백만명 이상의 콩고인을 학살했던, 잔인한 왕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잔악무도한 왕의 이름이 들어간 소름끼치는 고문 도구. 네스뵈는 절묘하게 콩고의 가혹하고 어두웠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과 자신의 발명품을 포개어 놓았다. 식민지 시절 상아와 고무, 다이아몬드가 풍부해서 참혹한 역사를 겪었던 콩고는 이제는 콜탄(Coltan)으로인해 신음하고 있다. 콜탄은 핸드폰과 노트북 컴퓨터의 핵심적인 재료(정련하여 탈탄룸으로 만든다)로, 이들 기기의 증가에 따른 수요급증으로 인해 비싼 값에 거래되는 광물이다. 누군가는 이 광물이 콩고에 이득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 편에 있다.

 

 

 

 

(광물 자원이 풍부한 콩고(DRC)는 세계 콜탄 매장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지도상에서 해리 홀레가 찾아간 고마(Goma)지역에 대부분의 콜탄이 매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반군이 장악하고 있다.)

 

 

(콜탄(coltan). 핸드폰과 같은 소형 전자제품의 주재료로 쓰이기에 중요한 광물로 부상했다.)

 

콜탄 매장량이 많은 콩고는 이로 인해 내전이 장기화되고(반군은 콜탄을 팔아 무기를 구입했고,1998년부터 시작한 내전은 4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콩고인의 노동 착취, 그리고, 자연환경파괴라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피를 부르는 새로운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다. 콩고에서 불법으로 채취된 콜탄은 구 식민지배국인 벨기에가 중간다리 역할을 하며 유럽에 판매되어 실제적으로 콩고는 가난하게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핸드폰과 노트북, 각종 콘솔 게임기의 사용자들은 궁극적으로는 이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위해 자금을 대고 있는 셈이다.

 

앙골라, 잠비아, 짐바브웨,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모두 암울한 과거와 한층 더 암울한 미래를 가진 나라들이었다. 하지만 방금 해리가 물어본 나라보다 더 암울한 나라는 없었다. 콩고. 그곳에서 마침내 금광을 발견했다. 다이아몬드와 코발트, 그리고 콜탄의 형태로. (p.222)


"한번은 콜탄을 찾아 헤매느라 눈이 뒤집힌 남자가 족장의 딸을 사슬에 묶어 분화구 속으로 집어넣은적이 있다네. 족장이 그들 영지에 있는 광산을 그에게 인도한다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거든."(p.243)

 

'레오폴드의 사과'의 재질이 콜탄이라는 점은 이 기구가 만만치 않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에 설득력을 덧대어 준다.

자네도 알다시피 저건 온갖 스프링과 바늘이 달린, 꽤나 복잡하게 작동하는 물건이잖나. 특수 합금으로 만들었지. 콜탄 맞네. 맞아. 아주 귀한 물건이지. (p.224)

 

 

('레오폴드의 사과'는 요 네스뵈의 어린시절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사과나무 밭에서의 일화에 유래한다. 네스뵈의 영감은 '유년시절의 공포'로 부터 기인한다.)

 

 

작가는 콩고로 조사하러 가는 여행 중에 다양한 고문 도구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술회한다. "고문에 관한한 사람들은 지나치게 창의적 인 것에 언제나 놀라곤 합니다. 헝가리에 있을 때 성난 시민들이 부다페스트의 대주교를 가운데가 불룩한 술통에 넣은 후 큰 바늘들을 박아 넣고 언덕에서 굴려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 종류의 발명품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레오폴드 사과의 유래- 유년의 상상물


네스뵈는' 레오폴드의 사과'는 유년시절 여름 휴가 때 할머니의 사과 나무 밭에서 남동생과 놀던 때의 생각에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비교적 행복했던 유년을 보냈던 작가에게 유일한 슬픔은 오슬로를 떠나 몰데(Molde)로 이사했을 때였다. 이 무렵 작가는 생애 최초로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며, 이야기를 머리 속으로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때론 이때 생각했던 상상력의 산물이 이 처럼 작품에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 유년 시절의 공포였다고 밝히며, 그는 그것을 '순수 혈통의, 백색의 공포'라고 칭한다.

 

"우리 할머니는 큰 사과나무 밭을 가지고 계셨는데, 우리에게 사과를 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사과를 '먹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과나무에 올라가 손으로 따지 않고 먹곤 했습니다. 우리는 반쯤 먹어치운 사과가 나무에 매달려 있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어느날 동생은 저에게 "누가 가장 큰 사과를 더 크게 입으로 베어 물수 있는지"를 도전했습니다. 저는 큰 사과를 골라 따지 않은 채(여전히 나무에 매달려있는 사과를) 입에 집어 넣었지요. 사과를 입에 넣을 수는 있었지만, 도저히 그것을 입 밖으로 빼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큰 사과를 입에 넣은 채 사과나무의 가지 위에 누워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만약 3주 동안 여기에 머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사과는 여전히 크기가 커지면서 자라는 중이니, 내 머리는 결국 폭발하게 될까? 무슨 일이 생길까? 그 후 저는 그 사과에 대한 악몽을 꾸었지요. 그것이 바로 '레오폴드 사과'가 탄생하게 된 아이디어였습니다."

 

작가는 헝가리에서 들은 고문기구의 이야기와 유년의 상상물을 결합시켜 이 끔찍한 레오폴드 사과를 탄생시킨 듯 싶다.

 

희생자의 입에 넣은 그 가공의 잔인한 고문기구는 [레오파드]의 무시무시한 요소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작가 스스로도 이 책을 제일 힘을 많이 쏟은 작품이라고 꼽는 동시에 가장 잔인한 책이었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몇몇 독자들은 이 책의 잔인성과 폭력적인 장면을 지적했는데, 다음의 말에 작가의 고민이 엿보인다.

"저는 특히 '레오폴드의 사과'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을 생각해 냈느냐?" 그 말의 숨은 뜻은, " 어떤 종류의 병적이고 변태적인 인간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는 것이었죠. 저는 제 책에 있는 그 폭력이 목적을 위해 적절하게 눈금이 매겨졌는지 아닌지를 묻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폭력 이면에 있는 등장인물을 말하기 위한 바로 그 목적 말입니다. 아니면 선정주의(sensationalism)의 유혹이나 효과를 위한 효과, 그리고 고통에 대한 무감각한 매혹에 휘둘린 것인지 아닌지를 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레오폴드의 사과'로 되돌아가면, 네스뵈는 이 고문기구에 콩고의 쓰디쓴 '과거'의 잔영들이 어른거리게 만드는 상징적 인물의 이름 (레오폴드)을 박아 넣었고, 그것의 재질에는 현재의 피비린내를 상징하는 콜탄을 사용했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 버린 콩고의 현 사정은 지극히 당대적인 문제이다. 어찌보면 고통스런 역사적 기억의 반복체험이랄까. 네스뵈는 과거와 현재를 '레오폴드의 사과'를 이용하여 연결시킨다. 어두운 과거의 그늘이 현재의 시간 위에도 드리워져있다.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 그것은 비단 콩고의 문제만은 아닌것이다. 레오폴드의 사과는 인간의 탐욕이 불러일으키는 폭력의 거듭됨을 반영하는 것이라, 증폭된 비애감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레오폴드의 사과'는 인간의 야만적 폭력성의 표징이기에 묵시록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므로 이 책이 담지하고 있는 잔인한 폭력성은 분명 독자에게 한동안 얼얼할 정도의 충격을 주지만, 그것이 결코 도저한 폭력에의 탐닉도, 자극적인 선정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가공의 이야기보다 더 잔인한 현실에 대한 작가의 준열한 의식을 집약시켜주는 도구로서 사용된 것이다. 이렇게 '레오폴드의 사과'라는 은유적 표상에 작품의 주제를 의탁하는 네스뵈의 솜씨는, 독자들에게 몸에 익은 독법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볼것을 드세게 요구한다. 작가는 소설밖의 독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콩고에서는, 아니 세상 도처에서는 '레오폴드의 사과'를 입에 물게 하는 것처럼 잔혹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 전언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파괴적인 탐욕을 지니고 타자를 고문하는 인간이란 존재가 새삼 섬뜩하고 생생한 질감으로 육박해 온다.

 

 

([레오파드]의 속표지와 실사판 레오파드. 우연의 일치로 표지 모양과 똑같은 모습 일때 찍었다. 초점은 책에 맞췄다.)

 

(매섭게 응시하는 표범. [레오파드] 표지의 뒷면이 피를 연상시키는 빨간색이라서 약간 흥분한 듯하다. 보호 유리엔 날카로운 발톱으로 긁은 자국이 선명하다.)

 

 

(이빨을 드러내는 레오파드. 해 질무렵이 되자 야행성 맹수 특유의 모습으로 변했다.)

 

 

(낮에 망원으로 잡은 레오파드. 한낮에는 활동성이 둔해져서 움직이기 싫어하지만, 눈매만큼은 압도적이다.)

 

 

(저 녀석을 잡기란 불가능해요. 서식지는 넓어도 숫자는 많지 않아요. 밤에만 사냥에 나서고, 낮에는 주위 환경에 몸을 잘 감추고 있죠. 아주 외로운 동물 같아요. (p.237))

 

 

왜 레오파드인가?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이 [레오파드]는 전작인 [스노우맨]과는 달리 이렇다할 "레오파드(표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에 의아해 할 듯 싶다. 심지어 이 작품에서 연쇄 살인마의 윤곽이 드러난 이후에 경찰들은 범인을 '다른 별명'(그것이 무엇인지는 스포일러가 될수도 있으니 함구한다)으로 부른다. '표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울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심지어 작가가 '표범'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쓴 것은 첫 장이 유일하다. "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표범 같은 존재. 표범은 워낙 소리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먹잇감의 코앞까지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숨소리마저 먹잇감의 숨소리에 맞출 수 있다고 했다. 상대가 숨을 죽이면 그들도 숨을 죽인다고 했다. 그녀는 분명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뭘 기다리는 거지?(p.12)" 이 문장이 전부다. 이 책의 제목을 영어 판본에서 원제(Panserhjerte-갑옷을 두른 심장)와는 달리 [레오파드]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책에서 쓰인 표범을, 매우 조용히 다가와 가까이 존재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스런 존재의 은유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해리가 콩고를 방문했을 때, 죽은 표범을 보고, 운전사가 해리에게 아주 외로운 동물이라며 말하는데, 그것은 이 작품 전체에서 풍기는 '레오파드'의 속성을 잘 드러내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장면에서 'cat'이 '고양이 속(屬)의 동물(사자,호랑이,표범 따위)의 뜻이 있기 때문에, 고양이보다는 표범으로 번역되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알아보니 미국인들도 이 부분을 죽은 표범(dead leopard)에 관한 묘사로 인식하고 있고 있었다.)

 

네 발이 막대에 묶인 커다란 고양이를 매고 가는 두 남자가 차옆으로 지나갔다. 아이들은 죽은 고양이 주위에서 춤을 추며 환호했고, 핀으로 고양이를 찌르기도 했다. 주황색 털의 얼룩무늬 고양이였다.

"사냥꾼인가?"해리가 물었다.조는 고개를 저으며 백미러를 힐끗 보더니 영어와 불어를 섞어 대답했다. "차에 치인 것 같네요. 저 녀석을 잡기란 불가능해요. 서식지는 넓어도 숫자는 많지 않아요. 밤에만 사냥에 나서고, 낮에는 주위 환경에 몸을 잘 감추고 있죠. 아주 외로운 동물 같아요." (p.237)

 

 

아래의 문장들도 표범의 존재가 느껴진다.

 

순간, 열어둔 침실 문이 생각났다. 문을 닫았어야... 그는 숨을 죽였다. 누군가 그와 함께 숨쉬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다. 짐승이다.그는 뒤를 돌았다. 입이 딱 벌어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일 수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가까이 올 수가 있지? (p.428)

 

늘 무언가 있었다. 지금처럼. 동물인가? 아니면 그놈일까? 유령일까? 밖에 무언가가 있었다. 확실하다. 그는 문을 보았다. 문은 잠겨 있고, 안쪽에 빗장까지 걸려 있었다. 창고에는 라이플도 있었다.여기서 밤낮으로 입고 다니는 두툼한 빨간색 체크 셔츠 아래로 그의 몸이 떨렸다.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인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p.426)

 

위에 발췌한 부분은 '표범'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첫 장에서 작가가 표현한 표범의 특징이 반복된다. 분명 있다고 느껴지지만 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공포스런 존재. 이것 외에도 '레오파드'를 연상시키는 구절이 몇 번 더 등장한다. ("우모트는 왜 총을 가지고 다니죠? 지금은 사냥철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맹수 때문이라고 했어요. 자기방어라고.""이 동네에 맹수가 있어요? 늑대?" "어떤 동물인지 정확히 말한 적은 없어요."(p.257)) 이러한 야수 같은 존재를 사냥하는 해리 홀레를 떠올릴 때, 그림자처럼 날쌔게 다가오는 맹수의 상징인 '레오파드'로 정한 영문판의 제목 (그리고 한글 번역판의 제목 역시)은 매우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으로부터 출발한 스노우맨

 

여러모로 이 작품의 제목은 '스노우맨'이란 구체적인 느낌의 악인이 등장하는 [스노우맨]과는 대조적이다.

[스노우맨]은 제목으로부터 시작된 작품이었다. 영화 제작자인 친구가 언어 감각이 좋은 네스뵈에게 앞으로 만들게 될 공포영화의 제목을 하나 생각해 달라고 부탁한다. 네스뵈는 그 내용(친구들이 스노우보드 여행을 떠나 차례차례 죽는다는 이야기)을 음미한 후, 완벽한 제목이란 생각에 "스노우맨"을 추천해준다. 하지만 단박에 퇴짜를 맞고 만다. 하지만 네스뵈는 눈사람의 이미지 자체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다. 뭔가 사소하고, 심지어 아늑한 느낌을 주지만, 그러면서도 잠재적으로는 겁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스노우맨"이었다.

" 보통 저는 플롯을 시작하고 나서 작품의 개요(synopsis)를 씁니다. 그리고 그 구조로부터 아이디어가 나오지요. 하지만 [스노우맨]의 경우는 그 반대였습니다. 이 소설은 제목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멋진 제목이었지요. 저는 이야기에 관해 그 제목이 무엇을 암시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지요. 책의 제목은 집필 도중에 떠 오르기도 합니다. 특별한 규칙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추측하건데, [레오파드]는 제목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노르웨이판 원제가 [Panserhjerte]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제를 보면 아무래도 작가의 의도 좀 더 바투 다가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제목을 직역하면 panzer (panser) heart (hjerte)정도. 우리말로는 '장갑(갑옷)을 두른 마음'이나, '기갑을 두른 심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혹은 'Armoured Heart'로도 영역되는데 이것은 심낭에 석회물질이 쌓여지게 되는 상태를 일컫는 의학용어로도 쓰인다.(보통 수축성 심막염을 유발하는데, 이것과 비슷한 용어가 panzerherz다.)

 

아버지는 혹시 눈사태로 눈 속에 묻혀 수축성 심막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리 남매에게 열심히 설명한 적이 있다. 수축성 심막염이란 심장 주위의 심낭이 굳어져서 심장이 팽창하지 못하는 증상을 말한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장(armoured heart). (p.204)

 

'갑옷을 두른 마음'이나 '석회물질이 쌓인 심장의 상태를 지칭하는 의학용어.. 그렇다. 요 네스뵈는 그의 스탠드 얼론 작품인 '헤드헌터(Headhunters)'라는 작품처럼, 이 책의 제목도 이중의미(double meaning)를 사용한 것이다. (이로써 영문판에서 제목을 "레오파드"로 바꾼 이유가 설명된다. 책 제목으로 전문적인 의학용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마케팅을 위해, 기존 홀레 시리즈의 제목- the Redbreast, Nemesis, the Devil's star, the Redeemer,the Snowman -처럼 좀더 구체적인 이미지의 단순한 단어가 적절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

 

 

 

(노르웨이 판본의 [레오파드]. 원제는 Panserhjerte로 영어로 옮기면, Armoured Heart나 Panzer Heart다.)

 

 

 

갑옷으로 둘러싸인 심장 그리고 아버지 올라브와의 관계

 

노르웨이 판본의 장정 표지 그림을 보라. 갑옷(철갑)으로 둘러쌓인 심장 모양에 바늘이 나와 있다.군데군데 상처라도 입은 듯한 핏자국이 보인다. 말할 필요도 없이, '레오폴드의 사과'와 '갑옷을 두른 마음'이라는 제목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그림이다. 그렇다면, 은유적으로 심장의 철갑을 두른, 그리하여 피가 통하지 않아, 메마르게 석회화 된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군인가?

 

 

주인공 해리 홀레는 특히 이 작품 [레오파드]에서 마음의 균열과 상처를 고통스럽게 되새김질 한다. 그 고통을 잠시나마 지우기 위해, 술과 담배, 그리고 아편까지도 손을 대지만, 영혼의 괴로운 뒤척임에서 해방되기 힘들다. 그 원인의 절반은 전작 [스노우맨]에서 받은 트라우마에 기인하며, 절반은 현 세계와의 관계 맺음의 실패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네스뵈는 홀레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임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네스뵈의 말에 의하면, [레오파드]가 자신의 캐릭터인 '해리 홀레'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그 어떤 소설보다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모든게 얼마나 빨리 변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이 파괴될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것이 인생이다. 파괴되는 과정,시초의 완벽함으로부터의 붕괴. 갑작스럽게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냐, 천천히 무너질 것이냐만이 유일하게 마음을 졸이는 사항이다. 서글픈 생각이었지만 해리는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p.60)

 

 

 

작가는 암투병으로 임종을 앞둔 아버지와의 관계를 부각시키면서 해리 홀레의 내면과 과거를 보여주는 데 몰두한다. 1997년 암으로 돌아가신 작가의 아버지와의 기억이 이 작품에 투영되어 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자신이 경험했던 전쟁에 대해 글쓰기를 꿈꿨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더이

상 미뤄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을 작가는 얻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남겨두고 호주로 날아가 그곳에서 그는 첫 번째 작품을 쓴다.)

 

 

 

이 작품에는 작가(네스뵈) 아버지의 그림자가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데, 그 중 한 예로 경찰 동료인 비에른 흘림이 좋아하는 '행크 윌리엄스'(홀름은 미국 컨트리 음악계의 전설적 인물인 [행크 윌리엄스 전기]를 옆에 끼고 산다)는 사실 미국에서 유년을 보낸 작가의 아버지가 굉장히 좋아하던 뮤지션이었다. (행크 윌리엄스는 말년에 알콜중독에, 몰핀과 진통제에 중독되었고,그로인해 실직하고 이혼을 당하는 이력을 갖고 있는데 이런 모습이 해리 홀레와 겹쳐진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에 스며있는 해리와 아버지 올라브와의 관계는 유달리 애틋하다. 해리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아들에게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가라고 말한다.

 

 

 

" 네 엄마가 죽은 후에 난 그 죽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 껍질 속으로 들어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어. 마치 외로움이 네 엄마와 날 더 가깝게 해주는 듯 했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해리. 라켈과 헤어져서 네가 얼마나 힘들지 안다만, 넌 나처럼 하면 안된다. 숨으면 안 돼,해리. 문을 잠가버리고 열쇠를 던지는 것은 하지 마라."(p.70)

 

 

 

자신을 외로움 속에 내던지고 세상과 유폐된 채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비단 해리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역시 단절의 심연 속에서 괴로운 삶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부채의식 속에서 이런 아버지에 대해 해리는 동질감을 느낀다. (왜 베개에 놓인 아버지의 적나라하고 황폐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을까? 아버지의 말이 왜 자신의 독백처럼 들렸을까?..그는 아버지의 판박이였기 때문이다.(p.72))

 

 

 

이 책에서 세상과 자신을 유리시키는 상징으로 모든 것을 차가운 눈으로 덮어 지워 버리는 눈사태가 사용되는데, 그것은 황폐한 외로움의 동공(洞空)이자, 타자와의 소통불능 상황에 대한 은유적 장치이다.

 

 

 

"눈 속에 생매장된다는 건..."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눈보라로 향했다."그 어둠, 그 고독감, 꼼짝도 할 수 없죠. 눈이 강철 같은 손아귀가 되어 몸을 옭아매고, 빠져나가려는 내 시도를 번번이 비웃어요. 곧 죽으리라는 확신. 숨을 쉴 수 없을 때 느끼는 죽음의 공포. 패닉 그보다 더 처참하게 죽을 순 없을 겁니다."(p.256)

 

 

눈 사태로 인해 눈 속에 갇히면, 수축성 심막염으로 인해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진다는 설명이 작품 속에서 몇번이고 반복되는데, 그것은 관계속의 고립과 회복불가능 할정도로 차갑게 굳어버린 마음을 나타낸다. 생각해보면, 아버지 올라브와 홀레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수의 인물들이 딱딱하게 얼어붙은,철갑을 두른 듯한 마음을 갖고 있다. 대부분 유년의 상흔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영혼이 훼손된 삶을 살고 있다. 살아 있지만, 내면은 죽어서 매장된 사람, 생중사(生中死)의 상태. 홀레가 홍콩에서의 아편으로 고통을 잊으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했던 삶이 바로 이런 삶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이 뭉크 박물관에서 나누는 대화는 의미 심장하다.

 

 

 

 

 

 

<생명의 춤(Dance of Life)-뭉크>

 

 

대체 이 <생명의 춤>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거야? 얼굴도 흐릿하잖아. 내 눈에는 꼭 좀비들 같구만."

"춤꾼들처럼 빙글빙글 돌지만 내면은 죽어서 매장되어 있고, 부패된 사람들 같은데요. 분명."(p.377)

 

죽음과 가까워진 아버지와 해리의 대화는 사랑과 미움은 결국 한 줄기에서 시작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작가의 전언을 보내오고 있다.

 

"넌 사랑이 많은 아이였어."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겠죠." "아냐, 사랑이다. 사랑과 미움은 같아. 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하지. 미움은 그저 동전의 이면일 뿐이야. 난 네가 술을 마시는 이유가 네 엄마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늘 생각했다. 아니면 네 엄마에 대한 사랑 때문이거나." "사랑은 살인자죠." 해리가 중얼거렸다.(p.202)

 

 

 

 

<뱀파이어(Vampire)-뭉크>

 

 

"뭐하는 것 같아?"

"여자가 키스하고 있는데요."

"여자는 남자의 목을 물고, 피를 빨아먹는 중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요?"

"뭉크가 이 그림의 제목을 <뱀파이어>라고 했으니까."

"사랑과 고통. 그게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이었지." (p.449)

 

 

위 대목은 [레오파드]의 노르웨이어 원제(Panserhjerte)에 마음(heart)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염두해 둘 때, 이 작품의 주된 테마중 하나는 '사랑'이고 그것은 '고통'과 '미움'을 수반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한때 뜨거웠던 마음이 식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흐르면서 모든 것을 불태우며 식어가는 용암처럼.

그렇다. 차갑게 식어 굳어버린 것을 녹일 수 있는 존재란 아주 뜨거운 것이야 한다. 이로써 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배경적 요소인 니라공고 화산의 존재 이유가 설명된다. 분화구에 용암호가 있어, 뜨거운 마그마로 부터 분출된 용암이 끓고 있는 콩고 공화국의 고마 지역에 위치한 화산. 나는 니라공고 화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 보면서 요 네스뵈가 8시간에 걸쳐 정상까지 올라가 뜨겁게 끓어 오르는 용암들을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했다. 화산이 분화할때 분화구에서 분출된 뜨거운 마그마가 식어서 굳은 것이 용암이라면, 이 책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고체의 용암은 '한때 뜨겁게 부글부글 솟아오르던 어떤 것'을 투영하는 상징적 도구로서 기능한다. 고체 용암은 '단단하게 굳어 버린 심장(Armoured heart-Panserhjerte)'의 다른 이름이다.

 

 

 

 

(프랑스어 판본의 [레오파드]는 니라공고 화산과 용암을 형상화 했다)

 

 

 

그러므로 해리 홀레가 치유를 위해, 이끌리듯 고체 용암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니라공고 화산으로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여정인 것처럼 보인다. 사랑도 미움도, 선인도 악인도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화산. 이 산위에서 과연 해리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용암처럼 뜨거운 피가 흐르는 마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대단한 이유는, 차가움과 뜨거움, 눈사태와 화산, 사랑과 미움, 복수와 용서, 삶과 죽음과 같은 여러 대조되는 상징적 요소들로 빼꼭히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여담이지만, 비채에서 만든 표지의 빨간색은 앞서 말했던 사과와 피의 색상을 나타내는 것 뿐 아니라, 니라공고 화산의 용암을 표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노우맨]에 등장하는 오슬로에 대한 해리 홀레의 감정을 보자.

 

 

 

한때는 그의 도시였으나, 이제는 감정적으로 피폐해졌고 재산 분할도 끝났으며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옛 연인과 같은 존재였다. 발 아래의 도시는 사방이 산등성이로 둘러싸인, 움푹 파인 지대였고, 피오르가 있는 곳만 예외였다. 지질학자들은 오슬로가 죽은 화산 분화구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밤이면 해리는 상상했다. 도심의 불빛은 밝게 타오르는 용암을 간직한 지표면의 구멍이라고. 그는 반대편 산등성이에 조명을 받은 하얀 쉼표처럼 놓인 홀멘콜렌 스키 점프대를 기점으로 라켈의 집이 어디쯤일지 찾아봤다. ([스노우맨], p.90]

 

 

이렇게 이미 전작 [스노우맨]부터 해리의 마음이 굳어져 가는 조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해리는 사랑하는 존재 라켈과의 문제로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흥미롭게도 네스뵈는 뒷 작품인 [레오파드]의 주된 소재를 예고라도 하듯, 이 작품에서 이미 '용암과 화산분화구'에 대해 언급하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슬로를 '감정이 떠나버린 옛 연인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레오파드]에서 해리가 오슬로를 떠난 이유와 돌아오기를 한사코 꺼려했던 이유도 모두 납득이 가고, 죽은 화산(오슬로)을 떠나 살아있는 화산(콩고)으로 향했던 해리의 여정 또한 자연스러워 보인다. 오슬로는 굳어버린, 죽은 화산분화구 같은 마음의 거대한 상징이다. 오슬로라는 장소는 해리 자신의 삶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암담한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해리에게 있어서 애증이라는 이중감정의 대상이다. 그러기에 그는 어쩔수 없이 오슬로에 떠나려고 하면서도 언제나 다시 오슬로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라켈에 대한 그의 마음처럼.

 

 

 

그녀가 누굴 닮았는지 생각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해리는 그녀가 누굴 닮았는지 알고 있다. 라켈을 닮았다. 세상 여자들은 죄다 라켈을 닮았다.(p.62)

 

 

해리의 전 여자친구인 라켈은 그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그의 마음 속에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칠흙같은 어둠을 마음에 품은 남자가 돌아갈 수 있는 존재이자 굳은 마음을 격렬하게 떨리게 할 수 있는 대상이다.

 

 

 

 

(빨간색은 이 표지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서 스타킹 색도 빨강으로..^^)

 

 

 

다양한 원체험에서 길어올려지는 글과 사실성

 

 

네스뵈는 몇가지 다른 진지한 직업에 관심을 갖고 나서야 비로소 홀레 시리즈를 썼다.

그는 축구를 시작했지만,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양쪽 무릎의 인대가 망가져서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부상당하기 전까지 17살 당시의 본인은 EPL의 토트넘 핫스퍼에서 뛸것을 확신했다고 한다.그래서일까 작가는 지금도 토트넘 핫스퍼의 광팬이다.) 차선책으로 그는 경제학을 공부했고, 90년대 초에 주식 중계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창조적인 정신을 억누르기는 힘들었기에 밤에는 동생과 함께 결성한 록밴드에서 연주와 노래를 했다. "우리는 지역 클럽에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료나 공짜 맥주를 위해 공연했지요. 우리는 매주 밴드 이름을 바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밴드가 연주하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누가 연주해?'라고 물으면, '그 녀석들이야'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밴드명은 'Di Derre'가 되었습니다. 노르웨이 말로 Di Derre는 '그 녀석들(those guys)'이거든요."

 

Di Derre는 1년후에 음악 투어를 하기 시작했고, 네스뵈는 밴드에서 노래와 가사를 썼다. 그는 이무렵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네스뵈는 그 자신을 음악가라기 보다는 스토리텔러로 보았다. 그는 음악을 이야기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밴드 결성 2년후에 발표한 앨범은 노르웨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갑작스레 팝스타가 된 네스뵈는 한 해에 180회의 공연을 할 정도로 음악에 시간을 쏟아 부었다. (한창 때의 Di Derre는 노르웨이에서 '아하(A-ha)'다음으로 존재감있는 밴드였다고 술회한다. 지금은 더이상 레코드를 발표하지 않지만 여름에는 취미로 공연한다고 한다.) 완전히 소진된 네스뵈는 휴식이 필요했고, 그래서 날아간 곳이 오스트레일라의 시드니였다. 이 곳에서 그는 최초의 소설을 쓰게 되고, 이것이 해리 홀레 사가(saga)의 시작이었다.

 

 

(만약 레오파드라는 CD가 있다면, 수록곡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스노우맨]에서처럼, 요 네스뵈는 [레오파드]에도 많은 음악들을 담았다. 대부분이 영미 음악들인 점이 주목할 만 하다.

 

Sex Pistols -No future (p.44)

Miles Davis - , (p.85)

Deep Purple - (p.129)

Martha Wainwright - (p.171)

Duke Ellington- (p.302)

Joy Division- (p.455)

Tracy Chapman- (p.540)

 

음악들을 찾아들으며 책을 다시 읽었는데, 네스뵈가 책을 쓸 당시의 분위기를 교감하는 듯 해서 좋았다.)

 

밴드 생활을 통한 가사쓰기와 음악에 대한 관심은 그의 글쓰기의 밑바탕이 되었음은 당연하다.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 [스노우맨]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음악들이 등장한다. 음악이 이야기를 몰고 가지 못한다면,작품에서 빼버린다고 할 정도로 음악은 그의 소설에서 중요하다. 음악은 그 사람이 누군인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말해 준다고 믿고 있는 네스뵈이기에 선곡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한가지 주목 할만한 점은 그가 작품에 언급하는 음악들은 노르웨이의 음악이 아니라 대부분 영미의 음악들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미국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아버지의 영향일 수도 있고, (아버지는 Jo Nesbo를 '요'가 아닌 '조'라고 미국식으로 불렀을 정도였다) 80년대에 미국 가수들의 오슬로 공연을 보아왔던 네스뵈의 경험일 수도 있다. 알아보니 Ryan Adams나 Neil Young같은 가수들은 그당시 뿐만 아니라, 요즘에도 오슬로에서 공연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해리는 거실로 가서 닐 영의 시디를 집어넣었다. 그러다 15분 후에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꺼내고 대신 라이언 아담스의 음반을 밀어넣었다.라이언 아담스의 '9번가의 약탈'을 방해하며 전화벨이 울렸다.[스노우맨]p.35') 개인적인 생각에 이러한 문화적 코드의 공감이 그의 미국에서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이유들중 하나가 아닐까한다.

 

 

 

    (레오파드의 두개골 위에 책을 올려놓고 찍어보았다.)

 

 

 

요 네스뵈가 이번 작품을 쓰기 위해서, 홍콩과 콩고를 직접 방문하고(홍콩의 경우, 이 작품을 쓰기 몇년 전에 다른 소설을 위해 조사를 떠났지만, 최종적으로 그 소설을 쓰지 않아 이번에 그 자료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눈사태 전문가나 스쿠버 다이빙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는 등의 사전 조사를 철두철미하게 했다는 것을 상찬하고 싶지는 않다. 제임스 미치너가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작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니까. (작가에게 조사를 철저히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은 버스운전사에게 기어를 잘 바꾼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 이런 단순한 기능을 잘하지 못하는 운전사가 어떻게 버스에 올라탈 수 있겠는가. -제임스 미치너) 다만, 그러한 사실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은 작품 전체에 안정성과 강력한 힘을 준다. [스노우맨]의 리뷰를 쓸 때도 언급했지만, 작가의 다채로운 이력은 그의 글에 핍진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의 작품 [헤드헌터]의 초반부분에 등장하는 인터뷰 장면은, 금융분석가로 활약하던 시절에 헤드헌터로 부터 인터뷰를 받았던 경험을 통해서 썼던 사실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 [레오파드]에서 그런면은 예외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암벽등반에 대한 대목이었다. 요 네스뵈는 작가에게는 치명적인 손목 부상을 당하고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암벽 등반광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태국에 몇개월씩 머물며 암벽등반을 즐긴다고 한다.) 요 네스뵈는 잠시 글쓰기로부터 머리를 쉬게 하는 목적 외에도, 창조적 영감을 얻기 위해 암벽등반을 즐기고 있는 듯 보인다.

 

" 지하실에 내려 갔을 때, 유년에 느꼈던 공포..그런 것이 여전히 제 소설의 연료가 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등반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등반이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마도 자동차 운전보다 덜 위험할 거에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몸이 갖는 신체적인 공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몸은 등반에는 관심이 없지요. 몸은 오직 내려가고 싶거나 벽에 붙어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의 몸이 더올라 가도록 설득해야만 합니다. 당신의 움직임은 본능적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직관과는 반대입니다. 매번 올라갈 때마다, 저는 여전히 공포의 간지럽힘을 느낍니다."

 

 

해리는 두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며 몸을 뒤로 기울이는 데 집중했다. 지난 수백만 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한 몸의 진화지향적 반발, 즉 인가이라는 종은 절벽에서 미끄러지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주장은 무시해야만 했다. 결국 머리가 한 끗 차이로 몸을 이겼다.(p.516)

 

 

그래서일까,두려움에 정면승부하는 무모한 매력이 있는 해리 홀레는 작가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대변해주는 분신처럼 느껴진다. 절벽위에 매달리며 아래를 내려다 보며 추락(하강)하며 순백색의 공포를 느끼는 장면은 필경 작가의 망막에 맺혀졌을 두려운 장면일 것이다.

 

 

 

 

 

 

총평

 

이 책을 붙잡고 있는 한, 마법처럼 시간은 흘러간다. 동거하기 쉽지 않은 '장르적 재미'와 '깊이'를 성취해 놓은 백열하는 걸작이다. 나는 책을 덮으면서, 힘과 열정이 최고조에 올라 그 열기때문에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작가를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방대한 스케일과 현기증이 날 정도의 복잡한 얼개 속에서도 작품은 방향성을 잃거나 느슨해 지지 않는다. 마치 정글 속에서 언제 독사가 튀어나올지 모를 것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진다. 작가의 모든 것을 이 작품에 쏟아 부었다는 느낌이다.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꾸만 다음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콩고의 콜탄 문제로 인한 황폐화 같은- 당대의 구체적 역사성이나 현실 조건을 치열하게 음각해 놓았다는 점이 놀랍다.

 

노르웨이 내의 두개의 경찰조직(크리포스와 강력반)이 연쇄 살인마를 잡기위해 서로 경쟁을 하며 벌이는 암투 역시 이 책의 재미를 더해준다. 그래서 강력반인 해리 홀레가 살인마 뿐 아니라, 더 큰 조직인 크리포스와도 머리싸움을 벌여하는 이중의 압박감이 독자에게 재미를 두배로 안겨준다. 이 작품에선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내는, 고독한 독불장군 스타일인 해리가 자신의 조직에 대한 의리와 책임의식을 시험 받는 중요한 무대가 되니 이 부분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캐릭터들도 모두 책밖으로 걸어나와 살아 숨쉰다. 플롯뿐 아니라 캐릭터를 연구하는데 1년 이상을 쏟아붓는다는 네스뵈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점은 읽어 본 독자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는 이야기의 재미 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작가다. 작가의 분신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해리 홀레의 캐릭터는 전편 [스노우맨]보다 좀더 구체의 옷을 입었다. 죽어가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그의 내면적 정서에 좀더 가까이 다가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리 홀레 시리즈 3편인 [레드브레스트(The Redbreast)]를 쓰면서 해리홀레가 누구인지를 작가 자신도 비로소 알았다고 했는데, 이 작품에 이르러서는 더욱 발전한 캐릭터로 살아있는 존재같은 인물의 생동감을 담아냈다. 일반적으로 뇌스베는 집필할 때 플롯을 가장 중시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사생활에 집중하는 것을 기피해 왔는데, 이번 작품만큼은 홀레의 개인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 불가피했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의 몇몇 장면은 작가가 다시 쓸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과도한 잔인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가 추구하는 소설의 본령은 결코 이런한 '피의 비명'에 있지 않다. (노르웨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크누트 함순(Knut Hamsun)이 주장한, "작가는 '피의 속삭임'과 골수의 기도를 묘사해야한다"는 말을 언급하며, 네스뵈는 [레오파드]의 일부분이 '피의 비명'에 가까운 면이 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악의 본질에 대한 진실되고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이전에는 말해지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러한 폭력성은 필연적 속성처럼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작가를 둘러싼 외적 현실은 더욱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에 있는 오슬로와 유또야 섬에서 브레이빅(Breivik)이 저지른 학살극을 우리는 기억한다. 77명의 아까운 생명을 앗아간 이 잔혹한 행위는, 세계적으로 안전한 나라로 유명한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일이라 자국민 뿐만아니라 전세계를 충격과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작가는 '노르웨이의 잃어버린 순수(Norway's lost Innocence)'라는 장문의 기고문에서 예전에 존재했던 방식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앞에 놓인 길이 있기에 용기를 가져야한다며 이 사건 때문에 슬픔에 빠져 있는 자국민들을 다독이기도 했다. 이 끔찍한 사건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관해 그는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가 생길 수도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 테마일지도 모르겠다. 해리 홀레는 끊임없이 자신의 두려움과의 대화 속에 있는 사나이다. 그는 소름끼치는 악과의 대결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매번 두려워하지만 (평범한 우리들처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해내는 인물이다.

 

 

 

[스노우맨]이 라켈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레오파드]는 해리의 아버지 올라브와의 관계가 이야기의 한축이었다. 그러므로 다음 작품인 [팬텀]에서는 아버지로서의 해리가 주된 내용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듯 싶다. (아버지의 역할.. 10대 딸을 두고 있는 네스뵈에게 있어서 지나칠 수 없는 테마인 셈이다.)

 

장르 소설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의 짜릿함에 가장 큰 점수를 주는 독자라면 바로 이 책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다음 장면이 어떻게 될것인지 예측해 보려고 해도, 안대를 끼고 한 치 앞을 내다 볼수 없는 상태로 걷는 느낌을 받았었다. 작가는 이 책을 여러번 고쳐쓰면서 어떻게든 부피를 줄여 보려고 노력했다고 했지만, 이러한 압도적 재미라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이렇게 순도높은 재미만 보장해 준다면, 길면 길 수록 좋기 때문이다.

 

 

 

 

    (순도높은 재미,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독자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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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0-2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요네스뵈의 책이 치명적인 재미를 지니고 있다 해도, 에세르님의 리뷰만 할까요! 와우.

에세르 2012-10-28 23:06   좋아요 0 | URL
끄응.소이진님.. 너무 극찬이시라 저도 모르게 어디 숨을 곳이 없나 주변을 살폈네요..ㅠㅠ(감동의 눈물입니다)
요 네스뵈의 이 작품은 말씀처럼 '치명적'인 재미를 가진 책입니다.작가가 각고의 시간을 보낸 티가 팍팍납니다!

야클 2012-10-28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에세르님 서재를 왜 이제서야 알게 되었을까요? 글과 그림(특히나 사진...빨간색... -_-) 모두 즐겁게 감상하고 갑니다. 사진 속 모델은 과연 누굴까 느무느무 궁금해 하면서... ^^

에세르 2012-10-28 23:09   좋아요 0 | URL
야클님, 반갑습니다!
즐겁게 감상하셨다니..그 말씀에 포스팅한 보람을 느낍니다~^^
이번 책은 빨간색이 매우 중요해서 주로 빨간색으로 도배를 하게 되었네요~ㅋㅋ 모델은 평생 모델입니다.ㅎ

Mephistopheles 2012-10-2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콩고가 등장하는군요. 최근에 읽었던 제노사이드도 주 무대가 콩고였는데.....
고문, 집단살육, 광기, 인간이기에 가능한 모든 행위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니 그건 참 아니올시다라고 보고 싶지만요.^^

에세르 2012-10-29 11:11   좋아요 0 | URL
올해의 화제작 [제노사이드]를 아직 못읽었습니다. 이상하게 절묘하게 못만나고 있는 책이네요. Mephistopheles님이 언급하시니, 조만간 주문해서 읽어봐야겠네요. 콩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지 덕분에 알았네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을듯해서 읽기 전부터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프레이야 2012-10-31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이 책은 읽어보질 못했지만 이렇게나 알차고 성실하고
암게살 들어찬 것마냥 포실한 페이퍼는 처음 봅니다. 세상에 고수는 많아요, 역시!
좋은 글 읽게 되어 반갑습니다.^^ 사진도 아주 매력적이네요.

에세르 2012-11-01 00:03   좋아요 0 | URL
오오 프레이야님, 어쩜 그리 칭찬도 맛깔나게 해주시는지..놀랬습니다. 글을 잘쓰셔서 예상은 했습니다만,감사합니다! 고수는 전혀 저와 어울리지 않는말씀이구요..^^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

루쉰P 2012-12-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왠지 잡지사에서 일 하시는 듯한 포스가 느껴지네요 ^^ 세상에 리뷰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정도 스케일이면 책을 직접 출판하시는 곳 보다 더 강렬한 비주얼을 보여 주시는데요. ㅋㅋㅋ

아 정말 대박이시네요. ㅋㅋㅋ 반갑습니다. ㅋㅋ

에세르 2012-12-18 10:20   좋아요 0 | URL
루쉰P님 감사합니다. 잡지사라는 말은...ㅎㄷㄷ 대단한 칭찬이시네요~
좀 늦게 댓글 보았는데, 오늘 아침 기분이 루쉰P님 덕분에 아주 좋아졌네요.
저도 반갑습니다. 놀러가겠습니다.^^
 
최후의 일구
시마다 소지 지음, 현정수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시마다 소지-[최후의 일구]를 읽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구]에서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야구와 추리소설의 접목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다. 폭염때문에 순도 높은 집중력도 보장할 수 없는 몸 상태였다.

그러나 웬걸, 이 작품은 내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했다. '재미'라는 단어를 느슨하게 사용하지 않고, 깐깐하게 사용하더라도 이 책의 재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는 꼼짝 없이 몇시간을 이 책에 달라 붙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헤롤드 블룸은 시간은 관용을 베풀지 않기 때문에, 나이를 먹을 수록 헛된 독서를 원치 않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책이라면,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마음 놓고 내맡길 수 있다.

 

 

 

 

 

 

이 책은 탐정 미타라이가 등장하는 1장과 다케타니의 야구 인생이 펼쳐지는 2장, 두 매듭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2장의 몰입도가 올해 읽은 책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가독성'이란 잣대를 들이댈때, 후한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2류투수인 다케타니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글을 읽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까지 빠르게 주파하게 되었다. 후반부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수기라서 쉽게 주인공에 동화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시마다 소지가 그려낸 작중 인물이 피와 살이 있는것 처럼 생생하게 그려졌기 때문 일것이다.

개인적으로 야구라는 스포츠에 매력을 느끼고 있기도 했고, 실제로 경기를 보는 듯한 박진감 넘치는 경기 묘사도 훌륭했다.

이렇게 써내려 가면, 도무지 다음 장을 안 읽고 저항하기란 어렵다.

이 작품은 장르를 쉽게 규정하기 조금 어려운 면도 있다. 추리물이면서도 스포츠물이고, 또 어찌보면 한 청년의 청춘의 방황과 시련을 새겨 넣은 청춘 소설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다케타니의 개인사에 초점을 맞춰도 재미가 있고, 다케타니와 다케치의 우정에 초점을 맞춰도 흥미롭다. 하나의 소설이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다채로운 이야기를 껴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해 표면에서 겉돌며, 공회전하는 부류의 소설은 아니다. 이 작품을 어느 장르에 수납할 지는, 각각의 독자가  어떤 부분에 크게 공명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 작품의 또다른 매력은 작가가 단순히 스포츠와 결부된 추리물을 가공해 낸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 만연해있는 대부업체 문제를 작품 속에 녹여냈다는 점일 것이다. 현실의 총체상을 직시하여, 사채의 횡포를 다루었던 사회파 추리물로는 미치오 슈스케의  [까마귀의 엄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등이 떠오르는데, 이제는 시마다 소지의 [최후의 일구]도 그 리스트에서 기억되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작가들이 앞다투어 다루었기에 일면 진부할 수도 있던 주제를 야구라는 뜻밖의 소재와 결부시켜 다양성을 열어젖힌 작가의 시도가 놀랍고, 또 그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다. 비슷한 주제를 따분한 시각으로 그려내서, 고만고만한 느낌을 자아내지 않았다는 것이 내가 받은 느낌이었다. 이 작품은, 읽어본 독자는 공감하겠지만, 작가의 개성있는 육성이 담겨 있어 여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질감의 변별성을 보인다. 시마다 소지는 사채업의 병폐뿐만아니라, 승부조작이라는 스포츠계의 뿌리 깊은 암종도 고발한다. (20세기 초에 야구도박에 의한 승부조작은 미국 야구의 역사와 함께 했을 정도로 문제거리였다고 한다.) 승부조작은 얼마 전 우리 스포츠계를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였기에 이 책에 묘사된 것들이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온다. 스포츠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승부조작과 야구를 사랑하는 젊은이의 열정이 묘하게 대비되는 점 또한 인상적이었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특징을 띄고 있는 작품답게 트릭과 반전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전반적인 얼개와 이야기에 중심을 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 말미에 부드럽게 파고 드는 감동은 아무래도 이러한 수수께끼의 해답보다는 드라마에 중심을 둔 작품의 속성때문인 듯 싶다.

어떤 일본 독자는 서평에서 '피가 통하는 미스터리'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끝부분에 다다르면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된다.

종장에서 맛보게 되는 뜨거운 감동은 야구에 대한 젊은이의 가열찬 열정과 그가 가닿으려 했던 목표에 대한 끈질김에서 나온다.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이방의 기사]를 인상깊게 읽은 독자라면, 반가워할 콤비인 미타라이 기요시와 이시오카 가즈미의 등장만으로 이 책을 펼치고 싶어질 것이다. 이 둘의 등장은 [이방의 기사(2010년 국내 출간)]이후 2년만이라 오랜만에 친구라도 만난 듯이 반갑다. 비록 이 둘의 활약이 작품 내에서는 주조음이라기 보다는 배음에 가까워서 아쉬워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작품의 짜임새를 보았을 때, 딱 이정도가 적당하다고 보았고, 작가도 둘의 역할을 부각 시키는 데 큰 욕심을 내지 않은 것 같다.

 

 

 

 

 

(응원하고 싶은 청춘의 이야기와 야구의 매력, 사회파 추리소설의 깊이를 한곳에 녹여낸 역작이다.)

 

 

 

 

 

보통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부라는 수식을 거느리는 시마다 소지는 이번에 야구라는 매력적인 소재에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용해시켜 찾아왔다. 그동안 시마다 소지가 보여주었던 방향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다. 모든 방향 변화가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 것은 분명 좋은 방향이라 장담할 수 있다. 우리가 스포츠에 매료되는 한가지 이유가, 예상치 못한 전개와 의외성 때문이기도 한데, 이 작품은 그 장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독자는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 될지 종잡을 수 없어,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대표작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시마다 소지의 이 말을 믿고 읽어도 후회는 없을 듯 싶다. 특히 작품 말미에 차오르는 감동이 허툰 감상성에 견인되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마음에 든다. 이제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은 주인공이 던지는 '최후의 일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 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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