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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 트라비아타
이부키 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책의 분위기에 맞춰, 표지를 찍어놓은 사진을 이용하여 내 마음대로 한번 만들어 보았다.)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계단을 내려가 샌들을 신고, 정원으로 나가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 아래에는 어둠만 잔뜩 깔려 있을 뿐이었다. 밤하늘도, 바다도 경계가 사라져,
그저 검은색 하나만이 눈앞에 있었다.
바닷물을 만지고 싶어졌다.
(p.26)
작품은 기슈지방 남부의 미에(三重)현의 '미와시'라는 작은 해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처럼 바닷가 풍경이 책 안을 적시고 있어서 이전에 찍었던 사진을 이용해서 내 마음대로 표지를 만들어 보았다. 텅빈 조개 껍질이 어쩐지 끝나버린 여름을 상기 시킨다. 개인적으로 바닷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배경만으로도 기대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배경이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여겨지는 경우가 있는 있는 이 소설이 바로 그러하다. 나는 이 소설을 몰려드는 파도소리와 리듬을 생각하며 줄곧 읽었더랬다.
이부키 유키(伊吹有喜)의 이 작품은 2008년 그녀가 '나가시마 준코'라는 이름으로 [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 트라비아타]로 발표되어 제3회 포플라 소설대상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2009년 책으로 발간되면서 제목을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바꾸고, 필명도 현재의 이부키 유키로 바꾸게 되었다.
예담 측은 (개인적인 추측인데, 원제에서의 '바람'이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공기의 흐름(風)을 뜻하지만) 연애 소설에서 '바람'이 나타내는 의미가 우리 말에는 다른 부정적인 뜻이 있어서, 이 제목을 피하고, 원래 발표된 제목을 사용한 듯 보인다.[바람을 기다리는 사람] 보다는 원래 제목 [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 트라비아타]가 훨씬 괜찮게 느껴진다. (사실 제목때문에,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두 주인공 '비올레타'와 '알프레도'의 사랑처럼 안타깝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소설의 곳곳에서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로맨틱한 오페라인 '라 트라비아타'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여름이 끝날 무렵이란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바로 39세라는 나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름의 태양처럼 시뻘겋게 불타오르다가 마흔이 넘으면 가을이 되는 거예요.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서서히 식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도 언제까지 지속되는 여름은 없어요. 서른아홉, 그야말로 여름의 끝이죠. (p.277)
이 작품으로 데뷔하던 작가, 이부키 유키의 나이도 당시 39세였는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여주인공과 작가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이제 열정과는 거리가 먼 나이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말라가는 고목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텐데,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여자(남자)의 마음이 남아 있는 나이랄까. 마치 오스카 와일드가 이야기한 "노년의 비극은 그가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젊다는 것이다."라는 언명이 떠오르는 구절이기도 하다.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해서, 젊은이들의 푸릇푸릇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중년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나가서 의외였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사랑의 문제를 넘어서 중년의 문제, 노년의 삶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름의 끝날 무렵'이라는 상징성 짙은 제목이, 50대의 하얀 가을, 60대의 검은 겨울까지도 생각해보게 만든 것이다. 노년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알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 곳은 내 상상력이 밟기 두려워하는 곳이지만, 피할 수 없는 곳이기에 더 두렵다. 부디 시간을 음미해가며 그 나이에 걸맞는 몸과 마음으로 노년을 맞이하기를 바랄뿐이다.
이 작품은, 작품 내내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베르디(작곡), 모차르트(작곡), 바그너(작곡), 헨델(작곡), 바흐(작곡), 글렌 굴드(연주), 르페브르(연주)등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러기에 음악을 (특히 클래식음악) 좋아한다면, 더 매력으로 다가 올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좋아하고, 클래식 음악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서,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기실 작품 속의 음악을 당의정(糖衣錠)삼아 핥으며 책을 읽는 것 만으로도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작가 이부키 유키가 클래식에 대한 애정과 조예가 깊다고 하는데, 그것을 유감없이 이 작품에 쏟아 부은 듯 싶다. 테쓰지의 어머니가 남겨주신 집은, 작가의 표현을 빌면 멋진 식기와 유리잔등이 넘쳐나서 '여자들이 동경하는 보물 투성이'집이라고 했지만, (남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이 집이 어마어마한 LP와 CD,책으로 가득차 있어서 초미의 관심을 갖고 읽었다.
이 책에서 음악을 녹음해주고, 그 음악을 듣는 행위는 -마치 연애 편지처럼-기미코와 테쓰지의 사랑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테쓰지를 통해 오페라 '춘희'를 소개 받는 기미코는 전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듣고, 이 오페라에 대한 온갖 녹음을 들으며 즐거워 한다. 둘의 사랑을 대변해주는 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 속에서 음악은 기미코에게 사고로 죽은 아들과의 접점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음악을 들으면서, 피아노를 전공하려 했던 아들과 대화하고,이해하려 하며 그의 존재감을 느끼며 추억한다. 그저 소설내에 B.G.M(배경음악)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추억과 치유와 사랑의 메신저로서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이부키 유키 소설 내의 음악이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는 음악과 갈라지는 지점일 것이다.
빛나는 소리의 입자가 날아오르고, 튕기며 마음속으로 녹아든다. 그것은 파도의 거품과도 비슷해. 자신도 모르게 볼륨을 높였다. 이런 음악이 있구나,하며 두 귀에 살짝 손바닥을 댄다. 곡명은 바흐의 <아다지오>였다. 뜻은 알 수 없지만 느낌이 좋은 이름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키미코는 무의식중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는 순간이었고 이내 사라졌다. 이어폰을 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러자 귓가에 훅 하고 숨결이 불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장난치듯 몸을 바싹 기대는 것 같았다. (p.52)
(작가는 사랑이란 '밥처럼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라는 전언을 책밖의 독자에게 보내온다.
그래서 투박하게 '사랑을 먹다'라는 컨셉으로 찍어본 사진.)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테쓰지와 떨어져 지내는 키미코가 테쓰지가 있는 도쿄의 날씨를 신경쓰는 부분이다. 예컨대 사랑이란게 이렇다. 사랑은 타자가 내 삶에 틈입해서 나를 따라 다니게 된다.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달처럼 어디를 가든 사랑에 빠진 자를 비춘다. 이런 경험은 사랑을 해본 경험이 있는자에게는 누구나 있었던 경험이 아닐까. 작품은 이렇게 동일한 경험의 추체험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텔레비전에서는 전국의 날씨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일의 도쿄는 비.
비 표시가 된 '도쿄'라는 문자와 그 배경이 되고 있는 롯폰기의 모습이 비친다. 어디 있든 매일 아침, 매일 밤, 도쿄의 풍경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 하늘 아래 있을 테쓰지를 생각했다. (p.322)
어찌보면, 세상에 흔한 것이 '연애이야기'라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쉽게 상투적이 될 수 있다. 마치 보라색 사탕은 대개 포도맛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뻔한 사건 전개와 대사로 참신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번 결혼했던 적이 있는 중년들의 조심스런 사랑이란 점이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젊은이들의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랑보다는 조심스럽고 신중할 수밖에 없다.)도시의 엘리트 남성과 시골의 순박한 여성의 사랑이라는 점도 다른 작품과는 구별될 수 있는 특징이라 하겠다. 두 사람 다 상처를 품고 있기에, 그 상흔들을 보듬어 안으면서 사랑이 싹튼다.
현재 속에서 고통스런 과거를 호명하는 행위에 익숙한 키미코나, 가족과의 소통불능과 부인에 대한 상처로 세계와의 관계맺음에 실패한 테쓰지 모두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 과정이 위화감없이 자연스레 묘사되어 읽는 내내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과장된 제스쳐나 감정의 과잉은 없었던 점이 좋았다.울창한 숲을 걸을 때 나무에서 피톤치드가 방사되어 상쾌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부키 유키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발산하는 청신한 느낌이 공기가 맑은 숲속에 산림욕이라도 한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어지럽게 마음 속을 부유하던 일상사의 피곤한 것들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투명한 느낌의 이야기 속에 인간 사이의 어둡고 공허한 단절의 틈을 응시하는 작가의 눈매 또한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꼭 제목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직 여름의 기운이 남아있는 초가을에 읽어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 싶다.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줄거리가 탄탄하고 인물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작가로 데뷔하기까지 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낸 결과물이라 그렇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게 되면, 욕망은 사그라들고 무작위로 날아들던 큐피드의 화살도 통제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어보면, 무기력하고 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단순하고도 명징한 진실에 가닿게 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나이와는 무관하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춘희'에 나오는 가사의 한 부분이 마음 속에 메아리친다. '사랑하고 싶다. 나를 사랑한 것과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