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주려고내 몸 허리를 찢어 애기나리 한 포기 캐낸다도려낸 만큼 몸은 철없이 한동안 욱신거린다아픈 자리 아물어 그런데 짙은 그늘이 생겨났다평생을 마음 썩도록은 남아 있을 아린 그늘생이 지나치며 자꾸자꾸 들여다보는 꽃그늘-108쪽
꽃나무를 이해하고 왔다진달래 꽃봉오리가 막 껍질을 찢고 빠끔히 세상을 내다본다. 따끈한 입김 훅 끼치자 자꾸 고개를 도리반거린다.가늘게 눈을 찡그린다. 어떤 안간힘이다. 허공으로 치켜감싸 쥔 꽃받침이 궁금한 눈벷에게 들어가! 들어가! 하는,활짝은 피지 않으려는 꽃 마음, 막 피려 할 때의 가장좋은 그 마음, 환한 꽃 막 안팎의, 두근두근 너와 나의 처음 눈빛을 간직한 꽃나무를 오늘 이해하고 왔다.-99쪽
돌돌 말린 나뭇잎들갓바위산 속 밤새 숨 놓아버린 굴참나무 잎들, 너럭바위에 오그라져 누운 저 몸부림들, 죽어서야 보여주는 삶의 결인가 살아서 환히 내밀지 못하고 늘 감춰들었던 햇살의 반대편,그 반편의 삶들 죽어서나 오글쪼글 내보이는가 늦가을 햇살도거기 초분에 내려들어선 노닥노닥 미안한 마음으로 오래 조문하거나,혹은 유달산 쪽으로 기울어 가기를 아예 잊어버린 맘씨 좋은 햇살들 칠성판에 누워 함께 바삭대는 중-89쪽
달개비 순정강아지풀이 그토록 간질이던 어제까지만 해도 꾹 잘도 참고 있더니날개 젖은 등줄실잠자리가 팔랑팔랑 그 황홀한 날갯짓으로 반달 쑥떡 같은 복주머니에 앉았을 때에야 그만달개비는 남빛 동그란 손수건을 슬그머니 꺼내놓고야마는 것이었네그 두 장의 손수건엔 희고 노란 실밥이 아직 묻어났네그건몇 날 밤 잠을 자지 않고 눈 비비며 겨우겨우 달개비가짠 것이어서잠자리의 날갯짓에 반해 얼떨결에 열리고 만 달개비의순정 탓이어서-86쪽
내가 보듬어본 향기들세상에 태어나 보듬어본 그 향기들을 절대 나는 잊을 수가 없다다 익은 나락을 베어 말린 후 탈곡하려고 묶을 때는 보듬을 수밖에 없는데 그때의 볏짚 냄새며추운 겨울 방을 덥히려 산에 올라 긁은 솔가리를 지게에얹으려고 안아 들었던 때의 아련한 솔향기며처음으로 기다리고 처음으로 사랑하고 처음으로 그대살갗 가까이 다가갔을 때 훅 끼치던 그 페로몬 향이며-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