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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랄프 네이더 지음, 강경미 옮김 / 꾸리에 / 2011년 3월
평점 :
낯익은 작가가 아니다. 하지만 이력을 보면 상당하다. 그의 이름을 딴 네이더리즘이란 단어가 있을 정도다. 2000년 대선에 출마한 적도 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주는 것 중 하나가 100여 개가 넘는 시만 단체를 조직해 시민의 대변자로 활약했다는 부분이다. 31세에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절단한 친구에게 바치려고 쓴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대기업 GM을 고발하고 사장의 공개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런 이력이 이 소설을 허구가 아니라 실현가능한 유토피아에 대한 소설적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실현가능한 유토피아라고 했지만 미국 사정을 잘 모르는 나에게 이 소설이 보여주는 설정들이 쉽지만은 않다. 몇몇 부분에서는 의문을 눈초리로 보지 않을 수 없는 부분도 많다. 전체적으로 흐르는 낙관주의적 분위기는 사실 이 슈퍼리치들에 대한 반격이 긴장감 없이 진행되게 만든다. 비록 그것이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말이다. 쉽지 않은 독서지만 미국이 지닌 수많은 문제점들 중 일부를 깨닫게 만들고 몇 가지 믿음이 과장되었음을 알게 된다. 어쩌면 이 실현가능한 유토피아보다 더 소득을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로 나온 것이 2009년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2005년 9월 뉴올리언스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몰고 온 끔찍한 장면을 워렌 버핏이 보면서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에 그곳을 방문한다. 이때 한 노인이 워렌의 손을 잡고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우.”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깨닫게 만들고 이 소설의 총 챕터와 똑같은 17명의 슈퍼리치가 워렌의 요청에 의해 마우이 섬에서 모인다. 그들은 워렌 버핏, 테드 터너,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 폴 뉴먼, 솔 프라이스, 조지 소르소, 피터 루이스, 버나드 라포포트, 제노 파울루치, 로스 페로, 조 자메일, 레너드 리지오, 필 도나휴, 맥스 팔레브스키, 배리 딜러, 빌 코스비, 요코 오노 등이다.
사실 여기에 등장하는 열일곱 명 중 낯익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단편적인 언론을 통해서만 미국의 정보를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몇몇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맞지 않아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바로 테드 터너, 폴 뉴먼, 조지 소르소, 빌 코스비, 요코 오노 등이다. 아마 이 이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런 이미지를 뒤로 하고 소설 속에 집중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미국 정치, 경제, 언론 등에 대한 환상이 하나씩 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문제점이 있는지도 보인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이 현상들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불편한 현실이다.
현재 세계에서 3번 째 부자로 불리는 워렌 버핏을 앞에 내세운 것은 그가 주장한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는 서약 때문일 것이다. 이후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들이 주인공 설정을 위해 딱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 이 소설 속에서 워렌 버핏이 등장하는 부분이 많지 않다. 이것은 17명의 수퍼리치들도 마찬가지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 이들의 적들이 고용한 로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슈퍼리치들이 만든 흐름을 깨트리기 위한 적임자로 뽑혔기 때문이다. 그가 펼쳐보이는 전략들은 기존에 성공했거나 있을 수 있는 것들인데 최근에 한국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과 너무나도 비슷해 놀랄 정도다.
읽으면서 이 수퍼리치를 한국에 대입하면 누가 있을까 고민했다. 당장 불가능한 이름만 떠올랐다. 이건희, 정몽구, 최태원, 김승연 등. 가장 큰 범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윤리와 도덕을 외치는 그들이 보여준 코미디는 이 소설 속 슈퍼리치의 적들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정치인으로 옮겨가면 이 땅의 진보가 무너져가고 있는 요즘 새로운 대안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의문이 생긴다. 탐욕만 가득한 재계, 정계, 언론계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주장들은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정치를 포기한 시민에게 이보다 좋은 수단은 없다.
참으로 많은 내용과 정보를 담고 있다. 가장 눈여겨 본 것은 역시 시민들의 정치 참여다. 직접 그들이 변화를 주도함으로써 변하게 되는 가상현실은 참여를 막으려는 수구세력의 방해를 필연적으로 넘어야 한다. 아무리 슈퍼리치가 변화를 주도하고 길은 만든다고 해도 결국 진정한 변화를 만드는 것은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슈퍼리치들이 얼마나 많은 자금을 쏟아 부어 이 작업을 펼치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어쩌면 이런 자금적인 문제와 인지도가 필요했기에 슈퍼리치들을 주연으로 내세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빠르게 읽기는 힘들지만 한국의 수구세력들이 부러워하는 미국의 현실 문제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