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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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슬로잉’이라고 불렀다. 자전 속도가 느려지면 가장 먼저 중력에 문제가 생겼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도 변했다. 기존의 하루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 이 설정을 읽으면서 북극이나 남극에서는 실제 시계 시간과 일출몰 시간이 다르지 않나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중반 이후도 왜 이것이 문제일까 하고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중력이 무거워지면서 새가 떨어지고, 운동 능력이 떨어질 때도 말이다. 하지만 물고기와 고래 등이 죽고, 나무 등이 말라 죽을 때 이 ‘슬로잉’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조금 늦은 깨우침이다.

 

열한 살 줄리엣이 주인공이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에게 지구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이 슬로잉보다 이에 영향을 받은 부모 밑에서 사는 친구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이 알려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를 벗어나 다른 주로 옮겼다. 나중에 정부에서 실제 해가 떠있는 시간과 상관없이 기존 시계 시간을 표준으로 삼았을 때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익숙해진 24시간 대신 자연의 시계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정부에서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작가는 이 엄청난 변화를 아주 담담하게 풀어낸다. 읽다 보면 큰 문제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조금만 차분히 생각하면 인류가 처한 위기가 아주 잘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SF이자 환경소설이다.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경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인류와 동식물 등의 멸종 위기를 경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종말론적 상황은 줄리엣을 둘러싼 성장을 다루는데 필요한 배경 중 하나다. 물론 단순한 배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읽기에 따라서는 더 중요하게 다룰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런 쪽에서는 SF적 발상에서 시작한 하나의 종말문학이 될 것이다.

 

줄리엣은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와 연기자 출신 엄마 밑에서 자란 평범한 소녀다. 슬로잉이 생기면서 절친이 다른 도시로 떠났고, 이 슬로잉이 고착되고 가속화되는 시점에 돌아와서는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이로 변한다. 이 변화는 줄리엣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력이 무거워지면서 생기는 문제가 나오고,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만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 늘어난다. 일상이 유지되지만 그 일상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이런 일상에서 줄리엣의 시선을 끄는 남자애가 등장한다. 세스다. 그의 엄마는 암에 걸렸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용기가 부족한 그녀에게 세스는 아직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 거리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종교적 신념, 생태학적 신념 등으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바꾸는 사람들이 생긴다. 종말이 다가오는 듯한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불안은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게 만든다. 이 공격이 다시 그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만든다. 규칙, 법규 등이 작지만 큰 차이를 만든다. 작가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하루를 맞춰 생활하는 사람들의 장점을 보여주지만 점점 길어지는 한낮은 사람의 생물학적 한계를 조금씩 무너트린다. 긴 시간이 흐른다면 사람과 동식물들이 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시간 속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한 소녀의 성장 속에는 아버지의 외도도 들어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할 수조차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머니에게 말해야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비밀로 남겨둔 것이다. 아버지의 거짓말도 하나씩 나타난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슬로잉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늘 있는 일이다. 단지 슬로잉이 이것을 부각시킬 뿐이다. 이런 자연과 생활의 변화는 한 소녀의 성장과 맞물리면서 잔잔하게 흘러간다. 너무 느슨하다. 그런데 가독성이 좋아 잘 읽힌다. 어떻게 보면 급격한 변화에 의한 종말론을 다룬 것보다 더 잔혹한 이야기다. 단계별로 별로 길지 않은 시간 속에 그 변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SF로 분류하고 싶다. 더불어 종말문학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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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10년 - 불황이라는 거대한 사막을 건너는 당신을 위한 생활경제 안내서
우석훈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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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8년 이후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닥쳐왔다. 이때 한국은 MB정권이 들어섰다. 인위적인 고환율 정책으로 대기업들은 이익을 보았지만 수많은 서민들은 높아진 물가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여기에 막바지인 듯한 부동산 부흥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불안감을 조성했다. 이때 집을 산 수많은 사람들이 속된 말로 부동산 막차를 탄 사람들이다. 물론 그 2~3년 전 최고점에서 집을 산 사람들은 제외하고. 이 당시 세계 불황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더블딥에 대한 경고도 나왔지만 한국의 경제신문 등은 부동산을 살 마지막이라고 무책임한 펌프질을 계속했고, 세계 경제와 다르게 한국은 착실히 경제 성장을 하고 있다는 거짓 지표를 발표했다.

 

세계 불황이 지속될 때 외국의 한 경제학자가 L자형 장기 불황에 대해 경고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10년이나 지속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 이후 5년이 지났지만 과연 지금이 바닥인지 의문이 생긴다. 최근에 미국 경제지표가 좋아진다는 뉴스와 더불어 원화의 환율이 급속하게 오르고 있는데 과연 이것이 실제 경제지표를 반영하고 있는지, 아니면 전쟁특수를 통한 인위적인 부흥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지금의 상황은 시간이 좀 지난 후 정확한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 년 전에도 고용지수가 좋아졌다는 통계가 나왔지만 실제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렇게 큰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위에서 세계경제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적었지만 사실 다른 책 내용을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 한국의 실물경제에 대해서는 자주 만나는 은행 직원들의 부도율이나 연체율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운다. 잠시 바닥처럼 정체된 순간도 있었지만 다시 올라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회사의 이익이 점점 감소할 때 점점 심각해지는 현실 경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험은 몇 년 간의 경제리포트를 통해 기초를 배웠고, 점점 변하는 경제전문지의 논조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깨닫게 된 실질 지식 중 하나가 거치기간과 일할 수 있는 기간과 소득에 대한 분석이었다. 이것은 이 책의 1장과 2장의 내용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물론 여기에는 저자가 진행한 팟캐스트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부동산 구입에 관한 한 2000년 초반부터 사지 말자는 주의였다. 저자처럼 2002년 정도에 아파트를 샀다면 돈을 어느 정도 벌었을 것이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 전세로 살고 있던 친구가 아파트를 사겠다고 했을 때 격렬하게 말렸다. 물론 한 채는 샀다. 자신들이 실제 살 집이다. 이 집을 사는 것도 나는 반대했다. 더 문제는 다른 한 채였다. 아마 그 당시 한 채 더 샀다면 그 친구는 이자 비용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친구가 집을 사지 않은 것이 전적으로 나의 조언에 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조언은 2채를 사야 돈이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 그것으로 돈을 번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때, 2006년 정도는 거의 막차였다. 내가 엑셀로 그의 소득과 이자와 원금에 대한 표를 만들어준 것이 어쩌면 나도 모르는 공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다시 경제 현상에 대해 공부한 것이 바로 이 이후다. 앞에서 말한 경제리포트가 경제학을 전공한 나도 모르는 단어와 현상을 쏟아내면서 흐름을 배우게 만들었다. 그때 몰랐던 것이 지금 다른 경제 관련 책에서 나왔을 때 그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고, 직업 상 만나게 되는 은행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은행원들조차도 부동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다. 물론 나의 답은 사지 마라는 것이다. 나의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는 것들도 많지만 경험에 의한 것과 지표들이 더 많은 현찰을 가지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정말 그 동네에 살고 싶은 실 거주자라면 어느 정도 빚을 지면서 사는 것에 대해 반대는 이제 하지 않는다.

 

부동산보다 이 책에서 개인들이 관심을 둬야 하는 부분은 2장이다. 3장과 4장에서 다루는 고용과 교육은 개인의 노력으로 단숨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개인의 재무구조는 본인의 의지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이 때문이다. 빌리 빈 단장의 머니볼 이론을 인용한 재무구조 방법은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야 할 방식이다. 3장에서 나오는 고용문제 등과 겹쳐 생각할 때 이 이론은 현재와 미래를 조금 더 심도 깊게 설계하게 만든다. 특히 1년치 생활비를 저축하라는 부분은 조금 더 각론으로 들어가서 공부해야 하지만 삶의 불안정성을 생각할 때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이것이 전혀 불가능한 분들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허리띠를 졸라매면 가능한 사람이라면 시도해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

 

그의 다른 책에서도 나왔지만 세대론은 이번에도 나온다. 부동산을 두고 벌어지는 세대 전쟁에 대한 통찰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50대 이상들의 아이들 역시 20대와 30대임을 생각하면 조금 더 세분화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의 20, 30대의 저축률이 올라가고 있다는 통계 자료는 우리가 언론 등을 통해 접하는 일본 젊은이의 삶과 너무 달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과거가 일본의 과거와 너무나도 닮았다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이 부분은 전문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대목이다. 또 저축이 경제를 살린다는 그의 주장은 소비를 강조하는 기존의 틀을 흔든다. 이 부분도 더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사실 3장과 4장은 그의 인터뷰가 중심이 되어 고용과 교육 문제를 다룬다. 발상의 전환처럼 다가온 몇 가지 실례는 창업, 취업, 자녀 교육 등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각론은 개인들이 고민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저자가 4장에서 비교적 낙관적으로 풀어낸 선행학습에 대한 금지 조항이나 사교육의 불안한 미래는 더 두고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두고 보는 것에 그치면 변화가 생기지 않을 테니 현재와 미래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변화는 이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직 불황의 출구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금 삶의 재무 설계가 필요한 30대와 40대라면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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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긋는 소녀 - 샤프 오브젝트
길리언 플린 지음, 문은실 옮김 / 푸른숲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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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왔다가 이제는 절판된 <그 여자의 살인법>의 재간이다. 제목을 볼 때는 몰랐는데 작가의 이름과 이력을 보다가 갑자기 떠올라 검색하니 다른 제목으로 이미 출간된 책이었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번역자는 동일하다. 재간되는 책들에서 흔히 보게 되는 방식인데 오타나 비문에 대한 수정이 완전히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일관성 있는 표지로 나왔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길리언 플린의 소설을 읽을 때면 늘 중반 정도에서 고전한다. 잔혹한 장면이 계속해서 이어지지도, 긴장감을 극도로 고조시키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그 마을의 상황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이어지는데 약간은 지루하게 다가온다. 물론 이것이 그렇게 길지 않다. 이 순간을 넘기고 나면 속도가 붙으면서 단숨에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다른 작품에 비하면 주인공 카밀을 둘러싼 환경과 심리 상태가 다른 작품보다 더 특이해서 약간 더 긴장했지만.

 

카밀은 신문기자다. 편집장인 커리가 카밀의 고향 윈드 갭에서 벌어진 살인과 실종사건에 관심을 가진다. 그녀에게 그곳에 가서 사건을 조사하고 멋진 기사를 만들어오라고 요청한다. 이전에 고향으로 간 기자가 퓰리처 상을 수상하는 기사를 쓴 것 예로 들면서. 하지만 카밀은 오랫동안 윈드 갭에 가지 않았다. 가고 싶지도 않았다. 편집장이 출장을 요청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고향은 이제 성인이 된 카밀로 하여금 과거의 악몽과 마주하고 평화롭지만 정체된 시간을 느끼게 만든다.

 

윈드 갭은 조그만 도시다. 인구도 몇 천 명 되지 않는다. 한 집 건너면 서로 알 정도의 작은 마을이다. 이런 마을에서 일 년도 되지 않아 또 한 명의 소녀가 실종된 것이다. 1년 전 앤이 죽었을 때 그 마을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죽였을 것이란 예상이 나왔지만 다시 한 번 내털리의 실종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조금씩 변한다. 연쇄살인범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소녀에게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이빨이 모두 뽑혔다는 것이다. 작가는 누가 왜 이렇게 했는지, 범인은 누굴까 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 사건을 조사하는 카밀에 더 집중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두 소녀가 죽은 것은 조그만 마을에 큰 일이다. 하지만 작가는 카밀과 그녀의 가족에 그 집중한다. 카밀이 겪었던 과거의 상실과 병에 대해서 하나씩 풀어내고, 마을에 숨겨진 각종 이야기를 하나씩 캐내기 시작한다. 죽은 동생 메리언과 열세 살에 아이들을 쥐고 흔드는 동생 앰마가 과거와 현재를 뒤섞고 흔들어놓는다. 여기에 냉혹한 어머니의 등장까지. 카밀에게는 아주 큰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몸을 긋는 소녀다. 자신의 몸에 글자를 새긴다. 이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불안과 공포가 다가오면 그녀는 몸 한 곳에서 새긴 글자가 열기를 품고 다른 글자를 새기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명탐정도, 과학수사를 철저하게 진행하는 경찰도 이 소설에는 없다. 한 여성의 과거가 현재의 사건과 엮이면서 만들어내는 다양하고 충격적인 사실들이 그 대신 있다. 피가 튀지 않지만 섬세하게 인간의 감정을 묘사하면서 어둠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가득하다. 사실 그 장면들은 불편하다. 차라리 선혈이 낭자한 것이 더 편하다. 그 어둠이 더 긴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반전에 반전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 정도는 누구나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마음이 부서진 여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엇나간 사랑이 만들어내는 비극은 그래서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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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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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술에 대한 갈증을 느껴본 것이 참 오랜만이다. 술에 약한 체질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고, 많이 먹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이 책 속 몇 곳은 읽으면서 당장 술을 부어놓고 마시고 싶게 만들었다. 아마도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이었다면 소주를 꺼내어놓고 조금씩 홀짝이면서 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느 순간 취해서 책을 내팽개치고 졸았겠지만. 제목대로 나에게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겨진 것은 술이다. 그리고 그가 배를 타고 돌아본 여행과 바다 이야기다.

 

한창훈이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오래되었지만 실제 그의 책을 온전하게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단편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장편은 없다. 장편 몇 권을 사놓았지만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 낯익은 이름 때문에 선택했지만 그냥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의 글이 주는 재미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그의 글을 좋아하던 누군가의 평이 생각났는데 이제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하겠다. 그리고 그의 다른 자산어보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시인이 보는 지구는 우리와 다르다. 시인은 지구를 허공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이라고 말한다. 놀라운 비유다. 이 비유는 자주 등장한다. 작가의 비유가 아니다. 바다 위를 향해하는 배 위에서 그는 푸른 물방울을 말하고, 한 잔 술을 마시면서도 말한다. 단순히 비유만으로 이 책이 나에게 다가온 것은 아니다. 술에 대한 갈증만도 아니다. 바로 작가의 삶과 경험이 격렬한 표현 없이 자연스레 드러나면서 조용히 가슴 한 곳에 내려앉는다. 그가 강렬하게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문장은 감정의 파도를 더 높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심심하지만 이 담담한 글이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조그만 감정의 파도는 어느새 가슴 전체를 적시고 있다.

 

상선을 타고 홍콩에서 로테르담까지 간 항해기도 좋지만 고래를 보기 위해 탄 북해 향 조사선의 글은 더 좋다. 간결한 문장은 현실을 보여주고, 일상에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이동하면서 만나게 되는 몇 가지 이야기는 이 여행의 소소한 이벤트가 된다. 담담하게 있었던 일만 적어나가는 작가의 글을 보면 너무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나는 그 건조함과 간결함이 좋다. 그래서 작은 이벤트만 생겨도 반갑다. 흥겹다. 나도 한 번 이런 배를 타고 싶어진다. 물론 실제 이 배를 탄다면 글로 표현된 것 이상의 것을 견디면서 힘들게 보내야 할 것이다. 내리면 또 다른 감정이 생기겠지만.

 

그의 다양한 이력 중 배를 탄 것과 현재 거문도에 거주한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런 이력은 그의 삶을 심난하게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 글의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작가가 된 현재는 더욱 그렇다. 이 책 곳곳에 조금씩 흘러나오는 그의 과거사는 비교적 평탄했던 나의 삶과 비교된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삶을 어렵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단지 조금 더 많은 여행을 하고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을 뿐이다. 수십 일을 배 위에서만 생활한다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그 배 위에서 일을 한다면 그의 말처럼 술로 힘겨움을 이겨내야 하는 힘든 현실이 먼저 다가올 것이다. 연약한 책상물림의 환상이란.

 

자산어보란 이름이 제목에 들어있지만 실제 자산어보의 내용은 거의 없다. 몇 개 나오지만 그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어쩌면 술과 바다와 물고기들이 이 책에 자산어보란 이름을 붙이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흑산도 연해에 유배된 정약전이 바다를 보면서 좋은 어보를 쓴 것처럼 그도 어쩌면 그 기억에서 비롯한 작업을 했는지 모르겠다. 술 한 잔과 멸치 한 마리는 조용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술을 마시게 싶게 만들고, 귀신과 집 이야기 등은 스산한 느낌을 주지만 이성의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이 책은 감상과 이성을 조용히 흔들면서 나를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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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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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었다.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반 정도 읽고, 나머지를 집에 와서 바로 다 읽었다. 그것이 며칠 전이다. 바로 서평을 적으려고 했는데 쉽게 손이 가질 않았다. 가독성도 좋고 어느 정도 재미도 있는데 왠지 어디에서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의 형식이 낯설어 그런 느낌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사건이 터지고,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다른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 말이다. 아니면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한 몇 가지 설정 등이 낯익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부터 나의 기억력은 아주 부정확해지기 시작했으니까.

 

폭우로 60명이 죽고 32명이 실종된 그날 밤 소년은 살아남았다. 그가 자라 취직을 한다. 좋은 대학이 아니다보니 쉽게 붙지 않는다. 이때 한 곳에서 면접을 보자고 한다. 그 곳이 바로 도서출판 풍문이다. <월간 풍문>을 만드는 출판사다. 이 잡지는 세상에 떠돌고 있는 온갖 해괴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곳곳에 비치되어 있지만 잘 모르는 잡지다. 면접도 워낙 간단하게 진행되고 그는 취직하게 되었다. 어리둥절하게 시간을 보내다 대호 선배와 목련 흉가로 가게 된다.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단 하나 밤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책에 실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모임 뭔가 수상하고 괴이하다.

 

다섯 개의 이야기가 다섯 편의 단편으로 바뀐다. 모두 자신이 경험했던 기이한 일들을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 중 단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다. <과부들>은 불륜과 애인의 실종이 아내 고향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예상된 반전이 펼쳐진다. 빤한 장면이지만 잠들었다고 생각한 장모가 실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순간 섬뜩했다. <도플갱어>는 성형에 대한 이야기다. 과도한 성형에 대한 경고처럼 보이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마지막 장면을 비틀면서 사실을 미궁으로 빠트린다. <홈, 스위트 홈>은 한국인의 집에 대한 집착을 점층적으로 높여가면서 공포감을 조성한다. 광기에 사로잡혀 펼치는 살인은 빙의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집착이 만든 현상인지 살짝 의문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잔혹한 단편이 <웃는 여자>다. 사이코패스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주는 보고서 같은데 어느 순간 폭주하면서 힘이 빠졌다. 도시 괴담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알려주지만 역시 예상된 결말로 이어지면서 잔혹함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눈의 여왕>은 저주와 희생자 설화를 뒤섞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희생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씁쓸했다. 애절해야 하는 사랑이 중심에서 힘을 발휘해야 하는데 왠지 곁다리로 밀린 듯해 아쉽다. 그리고 프롤로그에서 나온 소년의 잊혀 있던 과거가 풀려나온다. 너무 감상적이라 오히려 감동이 사라진다.

 

화자가 이야기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소설이 아니다. 그가 들은 이야기가 중심에 있다. 하지만 시작과 끝에 그가 있다. 그의 이야기도 밤의 이야기꾼들처럼 초현실적이다. 슬프고 괴이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새로운 모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끝낸다. 이 소설이 시리즈로 나온다면 또 다른 밤의 이야기꾼 이야기나 화자와 <월간 풍문>의 편집장 등과 함께 한 모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가독성이 좋지만 역시 익숙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라 힘이 딸린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좋으니 구성을 다듬고 결말을 조금 더 건조하게 풀어낸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뭐 실제 작가가 나보다 더 고민하고 잘 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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