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7
안치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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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 이름이다. 이력을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섬, 그리고 좀비>에서 <도도 사피엔스>를 썼었다. 그때 쓴 평을 읽어 보니 영화 이미지가 가득하고 분량이 아쉬웠다는 글이 있다. 이것은 이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조금은 현실적인 사건 전개로 빠르게 이야기를 펼치지만 한 편이 아닌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재림>만 가지고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깊이 있는 장편을 만들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 속도가 빨라지면서 간결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것은 다음 이야기인 <만남, 그리고 시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소재를 완전히 활용하지 못한 느낌이랄까.

 

하나의 장편을 생각하고 읽었는데 두 편이었다. <재림>이 현재를 다룬다면 <만남, 그리고 시작>은 이 소설 속 탐정팀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팀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과거를 다룬다. 이 순서대로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시리즈로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들이 매력적이다. 가장 이성적이고 탐정 능력이 뛰어난 180센티의 여자 권민과 인간 심리 분석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고 풍부한 지식을 가진 승주와 변호사를 하면서 어릴 때 꿈꾸었던 탐정이 되고 싶었던 독고잉걸 등이 그들이다.

 

승주와 독고잉걸이 만담가처럼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다면 권민은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냉철하다. 연락책으로 중심을 잡아가는 인물이 독고잉걸이라면 사건을 해결하는데 중심에 선 인물은 단연 권민이다. 그의 과거가 잠시 나오는 이들의 만남을 다룬 <만남, 그리고 시작>은 권민의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중편이다. 그는 무술가이자 뛰어난 프로그래머다.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사건에 교활하게 다가간다. 이 교활함이 그의 가장 큰 무기다. 뛰어난 분석과 추리로 만들어진 통찰력은 가장 큰 자산이다. 이것을 아주 잘 활용해서 사건을 해결하는데 그 앞에 중요한 것은 효율과 효과다. 이것이 너무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되어 앞에서 말한 소재 활용의 아쉬움이 생긴다.

 

<재림>은 제목에서 풍기는 것처럼 기독교의 광신을 다룬다. 결코 가볍지 않은 소재를 한국 기독교의 문제와 생활 속 기독교를 엮으면서 풀어내었다. 신이 아닌 교회와 목사를 더 신뢰하는 모순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 광신의 위험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시작은 화가 박진우의 실종이다. 경찰은 그의 실종을 가출로 생각한다. 그를 아는 사람, 특히 담당 큐레이터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경찰이 움직이지 않자 사립탐정을 찾는다. 그들이 바로 독고잉걸의 팀이다. 이 팀의 일처리 방식은 한마디로 일사천리다. 조금의 시간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각자의 특성을 살려 현장을 잘 파악하고 분석한다.

 

탐정이 현실에서 인정되지 않는 한국에서 탐정을 하려면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흥신소나 신부름센터 같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조사원이다. 작가는 민간조사원으로 이들의 역할을 조정하지만 실제 하는 일은 탐정이다. 공권력인 경찰이 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작가는 간단하게 풀어내었다. 갈등을 생략하고 이들의 능력과 배경을 앞세워 너무 쉽게 현장 속에 들어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단서를 찾아내고 경찰의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하는 모습은 현실을 너무 쉽게 그려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기존 스릴러 소설 속 엄청난 범죄자들보다 실제 범인들은 단순하다는 말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너무 쉽다. 속도감 속에 인간의 고뇌가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승주와 장태경의 신앙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개인적으로 승주의 편에 있지만 이성 대신 광신과 집착으로 자신을 무장한 태경의 말들이 눈길을 끌었다. 몇 가지 나의 의문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광신에서 비롯한 광기는 어느 시대나 있어 왔다. 그리고 이 소설 속 살인자에 대한 설명에서 한 가지 생략된 것이 있다. 바로 왜 어떤 이유로 연쇄살인범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이지만 그의 내면은 생략되어 있다. 냉철하고 높은 지성을 이용한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지막 장면은 더 많은 분량으로 채워졌어야 할 부분이 생략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종교와 연쇄살인범을 다룬 멋진 장편이 한 편 탄생할 수도 있었던 기회인데 말이다.

 

<만남, 그리고 시작>은 무대가 영국이다. 이 팀이 결성되기 전 이야기다. 탐정이 되고 싶었던 독고잉걸이 승주와 함께 처음으로 의뢰받은 사건이다. 런던에서 갑자기 사라진 딸을 찾아달라는 부모의 요청이다. 외국인 여자의 실종을 영국 경찰이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도 않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러니 조사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독고 일행이 왔을 때 그들이 보여준 반응도 그렇다. 분노가 조금 쌓인다. 하지만 분노가 폭발한 것은 대사관의 대응이다. 해외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늘 대사관은 한국인의 편이 아니다. 자신들의 입장과 편의만 생각한다. 이것을 작가는 약간 노골적으로 인용했다.

 

낯선 곳에서 그 어떤 경험도 지원도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단서 하나 찾은 것을 빼면 말이다. 이때 독고영걸의 친구가 한 명을 추천한다. 바로 권민이다. 권민의 조사와 추적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그리고 너무 쉽다. 현실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긴장감이 조금 떨어진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빨리 사건을 해결하는데 단서를 제공한 것은 독고영걸과 승주의 가택침입과 현장 조사 및 분석 능력 덕분이다. 실제 몸으로 해결하는 것은 권민이지만 독고 일행이 알게 모르게 지원한 것이다. 이때 이 팀이 멋진 시리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조금만 더 덧붙이는 능력을 발휘한다면 멋진 걸작이 탄생할 지도 모르겠다. 한 번 기대해본다.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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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지른 책들!!

올해는 생각보다 적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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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여름
아카이 미히로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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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섀도우 헌터스 3 : 유리의 도시
카산드라 클레어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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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이에몬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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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클레이튼 로슨 지음, 장경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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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박완서 지음, 민병일 사진 / 열림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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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완서 선생의 1996년 티베트와 네팔 기행기 <모독 - 세계문화예술기행 1>의 개정판이다. 사실 소설로 주로 만났지 에세이로 만난 것은 처음이다. 몇 권이나 나온 에세이에 쉽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한때 에세이는 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이 책에 관심이 간 것은 역시 티베트 때문이다. 늘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지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곳. 무협소설에서 밀교의 본산으로 수없이 등장한 그곳. 영화 속에서 너무나도 멋지게 등장하여 알 수 없는 동경을 불러오는 곳이 바로 티베트다. 그곳을 그녀는 동료 소설가 이경자, 김영현, 시인 민병일 등과 함께 다녀왔다.

 

세계문화예술기행이란 기획에 의해 패키지로 티베트와 네팔을 다녀왔다. 가이드를 따라 환갑도 지난 노인이 해발 5천 미터를 넘는 곳을 힘겹게 돌아다녔다. 고생이 심했다. 산소가 줄어든 곳에서 고산병 증세도 경험했다. 이런 힘든 일정을 무사히 마쳤는데 이 때문에 여행 중 충분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을 메워준 것이 바로 민병일 시인의 사진이다. 사진은 힘든 일정 속에서도 가슴 한 곳에 새겨진 감상을 글로 풀어내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어떤 곳에서는 사진만으로 충분히 그곳의 매력을 전달해주었다. 그곳에 가고 싶다는 열망도 같이.

 

티베트 여행기가 처음은 아니다. 다른 책을 이미 한두 권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여행이 자유여행도 아니다 보니 기행기의 깊이가 솔직히 깊지는 않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여행자의 솔직한 감상이 드러난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조장(鳥葬)을 자세히 설명해주면서 인식을 바로 잡아주었는데 이 책에는 그런 깊이가 사실 부족하다. 그곳을 지나가면서 잠시 마주친 사람들과의 인연을 조심스럽게 풀어낼 뿐이다.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도 같이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순간의 동정심 때문에 엄청나게 밀려오는 엄마와 아이들이 내민 구걸의 손길은 늘 동남아 여행기에서 만나는 풍경이다. 한 가지 낯선 것은 연필 대신 볼펜을 요구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몸도 힘들지만 마음도 편하지 않은 순간이 많았다. 장려한 사원과 수많은 불상을 보는 것이 눈에 최고의 사치이자 충격이지만 마음의 평화나 기쁨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이 호화와 사치를 극한 불상과 이 땅의 극빈층이 저절로 대조가 되어 불상에서 느끼고 싶은 자비를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수목한계선 너머에서 자라는 들꽃들이다. 오체투지로 사원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가며 절실한 염원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한 잔의 버터차를 같이 마신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그 동안 큰 변화가 없음을 보여준다.

 

티베트를 말하면서 달라이라마를 빼놓을 수 없다. 티베트의 독립을 우리의 일제 식민지와 같이 연결해서 생각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점점 늘어나는 한족의 모습과 그들이 보여준 몇 가지 행동은 충분히 반감을 가지게 만든다. 이것은 다시 네팔의 티베트인들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네팔 기행기는 이번 일정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전에 출간한 글을 이번 책에 덧붙였을 뿐이다. 거의 이십 년 전 글이지만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그 사이 더 발전하고 더 비싸지고 더 영악해진 곳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의 우리보다는 더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의 네팔 여행은 좋은 기억들로 가득하다. 상대방 문화를 있는 그대로 신기해하며 인정해주고 같이 즐겨 좋고, 싼 가격 때문에 한국에서 꿈도 꾸지 못할 낭비를 와장창해서 좋고, 트레킹으로 현실에 묶여 질식할 것 같았던 나의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느낄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여기에 아름답고 멋진 사진은 잠시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이것은 티베트 여행기 속 사진도 마찬가지다. 책을 다 읽은 후 잠자리에 들기 전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도 바로 이 사진들이다. 그녀와 동료들의 힘겨웠던 일정이 잠시 동안 나에게 편안한 휴식과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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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생각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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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이이화 선생의 책을 읽었다. 개인적 취향에 더 맞는 역사가가 이덕일이라면 이이화는 개인적인 몇 가지 때문에 혹은 전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때문에 왠지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물론 이덕일의 책이라고 무조건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하나의 논쟁이나 인물을 집중적으로 풀어낸 역사를 좋아한다. 물론 이덕일의 역사 서술 중 몇 가지는 호불호가 있다. 하지만 나에게 역사 서적도 미스터리 소설처럼 재미있게 쓸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역사가이기에 그 이름을 가슴 한 곳에 새겨두었다.

 

왜 이덕일을 앞에서 꺼냈느냐 하면 이이화가 한 인물, 허균을 풀어내는 방식을 보면서 이덕일이라면 훨씬 자극적이고 흥미롭게 썼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이 전두환의 신군부가 득세하던 1980년임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 글쓰기와 지금은 다를 것이고, 시대의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다. 비록 허균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글들이 추가되면서 더 풍성해졌다고 해도 구성에서 큰 변화가 없고, 사료 우선에 진중한 글을 쓰는 저자의 이력을 생각하면 쉽게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글 속에서 이전 연구자들의 글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허균의 모습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모습이 낯설지 않고 익숙하다. 그것은 바로 요즘 허균에 대한 생각이 처음 나왔을 때보다 많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모두 다섯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장은 허균이 살던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풍경을 보여주고, 2장은 천재 이단아였던 허균의 생애를 요약한다. 다음 장들은 각각 허균이 생각하는 정치, 학문, 문학에 대해 그의 글들을 분석하고 재해석한다. 이때 만나게 되는 그의 행동과 사상은 끊임없이 민중을 생각하는 모습이다. 저자는 허균이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 사이의 괴리와 모순에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는 선구적인 사상가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허균을 영웅으로 그려내기보다 ‘역사 속에서 부침한 양식 있는 한 인물’로 서술하면서 오늘날의 우리가 돌아보고 비춰보기를 원한다.

 

현재 시점에서 본다면 허균은 분명히 시대적 한계가 있다. 근대 민주주의가 바탕이 되는 상향식 민주주의를 아직 그는 몰랐다. 그것은 다른 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백성을 위한다는 점에서 그의 민본주의는 뜻이 깊다. 어리고 잘 모를 때 이 한계를 용납하지 못한 적이 있다. 역사가 어떤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고, 발전해가는 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홍길동전>을 두고 수많은 해석이 나오고 한계성을 지적하는 글이 나오는 것도 단순히 해석상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과 자료에 집착하다보니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 한 인물이 얼마나 새롭게 해석되는지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책의 대상인 허균도 바로 그런 인물이다. 동시에 광해군도.

 

저자는 각 장에서 허균의 생각을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풀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의 글 전문을 번역해서 실었다. 앞에서 인용했던 글들이 저자의 해석으로 한 번 인식되고, 전문 속에서 다시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되면서 저자의 해석이 하나씩 각인된다. 이 두 번의 강조는 허균에 대해 알고자 하는 바를 적절하게 인식시켜준다. 그리고 조선에 처음 서학을 가져왔고, 자신이 불교도임을 알려주는 글을 읽을 때면 약간 낯설지만 오히려 그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이 책 속에 나온 허균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그의 모습을 산산조각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와 그 시대에 대해 더 많는 연구가 더 깊이 있게 진행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최근 광해군 열풍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가 정치에서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다고 하지만 문학에서 보여준 문장에 대한 글은 아주 현대적이었다. 화려한 수사보다 뜻을 쉽게 알 수 있게 일상 언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뜻이 우선이란 말이다. 요즘 글들을 보면 화려한 수사나 어려운 단어를 끌어다가 치장하는 문장들이 많은데 이 부분은 한 번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나 자신도 가능한 간결하고 분명하게 문장을 만들려고 하는데 아직 내공이 부족하여 길어지거나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가끔 그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허균은 정치적으로는 민본주의자요, 학문적으로는 대단히 포용적이며 문학적으로는 분명히 그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당대의 권위에 대한 도전자고, 새로운 시대를 읽는 눈이 누구보다 탁월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았지만 새로운 도전의 기회도 생겼다. 앞으로 배우고 익혀야 할 수많은 것들이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구성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그 내용은 충분히 그것을 지울 정도다. 앞으로 허균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점점 더 조선시대 학자들에 대한 공부할 거리가 늘어난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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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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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를 처음 본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재미있다는 말에 그냥 봤다. 처음은 낯설었지만 어느 순간 다음 이야기에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의문이 생겼다. 왜 갑자기 주인공이 바뀌었지? 하고. 이 시리즈의 설정을 잘 몰랐기에 생긴 오해다. 그후 이 시리즈가 다른 출판사에서 한 권씩 출간되었다. 몇 권 사놓았다. 애니가 재미있었기에. 하지만 늘 그렇듯이 영화나 애니 등으로 먼저 본 원작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억이 조금 흐려졌을 때까지 읽지 않는다. 애니로 본 시리즈 다음이 궁금했지만 원작과의 차이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도 그랬다. 그렇게 <십이국기>의 몇 권은 책 더미 속에 묻혔다. 절판된 것도 모른 채.

 

애니로 잘 만들어졌다고 해도 결코 채울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물론 애니가 보여줄 수 있는 장점도 많다. 애니의 장점 하나를 먼저 꼽는다면 책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 쉽게 요마들의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는데 바로 볼 수 있다. 자막으로 요마의 이름을 표기한 것이다. 이것이 이 시리즈의 마니아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그러나 나처럼 소설을 읽으면서 읽는 속도에 비해 이미지가 금방 만들어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일이다. 그 이미지가 애니메이터에 의해 고정되는 것은 아쉬운 일지만. 애니의 단점은 섬세한 심리 묘사나 설명이 생략되거나 불가능한 것이다. 애니를 본 지 오래되어 요코의 감정 변화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부분의 비교는 직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의 저질 기억 때문에.

 

애니로 먼저 봤기에 책을 읽으면서 원작의 이미지가 계속 떠올랐다. 부정확한 기억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한 결과를 모호하게 만들고, 어느 장면에서는 애니의 한 장면이 뿌옇게 떠오르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 애니의 이미지가 제대로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원피스>처럼 원작을 따라 계속 시리즈가 애니로 만들어지기를 바랐다. 전체가 아니라면 시리즈 중 한두 편이라도 더. 워낙 대작이다보니 애니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은하영웅전설>이 애니로 모두 나왔던 것을 생각하고, <원피스> 등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방대한 이야기의 도입부가 되는 이번 편은 이 시리즈를 이해하고, 세계관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평범한 여고생 요코는 갑자기 나타난 청년 게이키에 의해 다른 세계로 옮겨온다. 꿈속에서 며칠째 그녀를 괴롭혔던 존재들이 현실에 등장한 것이다. 정확한 설명도 없이 그는 그녀를 데리고 달아난다.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사랑의 도피처럼 보이는 모습이다. 이런 그녀를 데리고 달아나려고 했다면 안전하게 모셔야 할 텐데 적들의 공격에 그녀는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다. 그 곳은 교국이다. 이 나라는 허해를 건너온 이방인인 해객을 우대하는 곳이 아니다. 그녀의 낯선 옷과 모습은 바로 해객임을 말해준다. 그녀를 잡은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현청으로 옮기려고 한다. 이때 요마들이 이들을 공격한다. 게이키가 준 검으로 요마들의 공격을 물리친다. 달아난다. 이제 그녀의 힘겨운 행로가 시작한다.

 

이번 이야기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요코가 한 명의 왕으로 성장하기 위한 초석을 닦는 것이다. 낯선 세계로 와서 그녀는 자신을 팔려고 하는 사람의 의도를 선의라고 믿기도 하고, 자신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노인의 눈물나는 이야기에 끌리지만 가진 돈을 털릴 뿐이다. 여기에 해객을 잡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굶주림은 그녀의 또 다른 적이다. 여기에 낮 동안 계속되는 요마들의 공격은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간다. 검의 빛을 통해 자신이 떠난 후 집이나 학교의 모습을 보지만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강하게 만들뿐이다. 그리고 가장 큰 적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원숭이가 계속해서 그녀를 충돌질한다. 자살하라고, 죽이라고, 믿지 말라고. 심리적인 갈등은 점점 커지고,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만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십이국기의 세계에 한국은 없다는 것이다. 가끔 일본 판타지를 읽을 때면 중국만 나오지 한국은 존재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한국이 워낙 작은 나라라 의미가 없는 것인지. 그리고 이 낯선 세계의 풍경을 일본과 중국의 혼합으로 그려낸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것은 이 재밌는 책에 대해 가지는 조그만 불만이다. 가끔 조선의 술법으로 귀신이나 악마를 부리는 것이 나오는 것보다는 낫다. 부정확한 기억이지만 <시귀>에서 보여준 치밀하고 압축된 세계와 밀도 있는 문장이 이번에는 좀 약한 것 같다. 방대한 세계관과 다양한 주인공들을 내세워야 하는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간결한 문장으로 속도감 있게 풀어내려고 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제 요코와 열두 나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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