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 술에 대한 갈증을 느껴본 것이 참 오랜만이다. 술에 약한 체질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고, 많이 먹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이 책 속 몇 곳은 읽으면서 당장 술을 부어놓고 마시고 싶게 만들었다. 아마도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이었다면 소주를 꺼내어놓고 조금씩 홀짝이면서 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느 순간 취해서 책을 내팽개치고 졸았겠지만. 제목대로 나에게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겨진 것은 술이다. 그리고 그가 배를 타고 돌아본 여행과 바다 이야기다.

 

한창훈이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오래되었지만 실제 그의 책을 온전하게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단편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장편은 없다. 장편 몇 권을 사놓았지만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 낯익은 이름 때문에 선택했지만 그냥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의 글이 주는 재미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그의 글을 좋아하던 누군가의 평이 생각났는데 이제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하겠다. 그리고 그의 다른 자산어보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시인이 보는 지구는 우리와 다르다. 시인은 지구를 허공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이라고 말한다. 놀라운 비유다. 이 비유는 자주 등장한다. 작가의 비유가 아니다. 바다 위를 향해하는 배 위에서 그는 푸른 물방울을 말하고, 한 잔 술을 마시면서도 말한다. 단순히 비유만으로 이 책이 나에게 다가온 것은 아니다. 술에 대한 갈증만도 아니다. 바로 작가의 삶과 경험이 격렬한 표현 없이 자연스레 드러나면서 조용히 가슴 한 곳에 내려앉는다. 그가 강렬하게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문장은 감정의 파도를 더 높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심심하지만 이 담담한 글이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조그만 감정의 파도는 어느새 가슴 전체를 적시고 있다.

 

상선을 타고 홍콩에서 로테르담까지 간 항해기도 좋지만 고래를 보기 위해 탄 북해 향 조사선의 글은 더 좋다. 간결한 문장은 현실을 보여주고, 일상에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이동하면서 만나게 되는 몇 가지 이야기는 이 여행의 소소한 이벤트가 된다. 담담하게 있었던 일만 적어나가는 작가의 글을 보면 너무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나는 그 건조함과 간결함이 좋다. 그래서 작은 이벤트만 생겨도 반갑다. 흥겹다. 나도 한 번 이런 배를 타고 싶어진다. 물론 실제 이 배를 탄다면 글로 표현된 것 이상의 것을 견디면서 힘들게 보내야 할 것이다. 내리면 또 다른 감정이 생기겠지만.

 

그의 다양한 이력 중 배를 탄 것과 현재 거문도에 거주한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런 이력은 그의 삶을 심난하게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 글의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작가가 된 현재는 더욱 그렇다. 이 책 곳곳에 조금씩 흘러나오는 그의 과거사는 비교적 평탄했던 나의 삶과 비교된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삶을 어렵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단지 조금 더 많은 여행을 하고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을 뿐이다. 수십 일을 배 위에서만 생활한다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그 배 위에서 일을 한다면 그의 말처럼 술로 힘겨움을 이겨내야 하는 힘든 현실이 먼저 다가올 것이다. 연약한 책상물림의 환상이란.

 

자산어보란 이름이 제목에 들어있지만 실제 자산어보의 내용은 거의 없다. 몇 개 나오지만 그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어쩌면 술과 바다와 물고기들이 이 책에 자산어보란 이름을 붙이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흑산도 연해에 유배된 정약전이 바다를 보면서 좋은 어보를 쓴 것처럼 그도 어쩌면 그 기억에서 비롯한 작업을 했는지 모르겠다. 술 한 잔과 멸치 한 마리는 조용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술을 마시게 싶게 만들고, 귀신과 집 이야기 등은 스산한 느낌을 주지만 이성의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이 책은 감상과 이성을 조용히 흔들면서 나를 사로잡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