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그리고 생존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5
백상준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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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가 백상준의 <섬>을 연작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다. 가장 긴 작품이자 대상 수상작인 <섬>과 <천사들의 행진>과 <거짓말>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작품을 단편으로 읽어도 상관없지만 이야기가 이어져있다. 읽을 때보다 모두 읽은 지금 그냥 한 편으로 엮어내면서 그 속에서 각각의 이야기를 드러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이런 작업을 했을 때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세 명의 분위기를 녹여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더 깊이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섬>은 이전 수상작을 바탕으로 분량을 더 늘였다. 좀더 긴 작품으로 바뀌면서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통해 다음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이런 변화는 읽으면서 잘 느끼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전작에 대한 기억이 충분하지 못한 것이고 다음은 분량의 변화다. 읽으면서 경쾌한 분위기와 고립된 생존환경에 처한 주인공에 몰입하였는데 예상하지 못한 반전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마지막 <거짓말>에서도 반복되는 설정이다. 연작으로 만들어지면서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 있다. 바로 <나는 전설이다>이다. 작품 속 상황이 많이 인용되고 비교되지만 다른 결말을 가진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과 주인공이 처한 환경은 다르다. 이런 다른 환경과 전개는 이야기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대한 설정에 비롯한 것 같다. <나는 전설이다>가 마지막 인간의 생존이 전설이 되는 반면 <섬>은 고립되고 이기적인 현대 인간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으면서 연대가 사라지고 경쟁만 남는 것이다. 마트 물건을 둘러싼 은밀한 대결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중간에 넣은 장면과 <거짓말>의 마지막 장면은 하나로 이어진다.

 

이전보다 더 섬세해지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개작전의 경쾌함이나 함축성은 조금 사라진 듯하다. 아파트란 공간을 섬으로 설정한 것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섬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막은 것은 조금 아쉽다. 물론 이것에 대한 변명이자 이유를 다음 이야기 <천사들의 행진>에서 보여준다. 이 단편은 아마 가장 비열하고 폭력적인 현실에 대한 은유이자 역설일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좀비로 변한 세계에서도 여전히 남성의 성폭력과 강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현실 말이다. 가정 폭력의 피해로 실명한 주인공과 그로 인해 그녀가 겪은 성폭력이 여고생을 통해 다시 재현될 때 가장 무서운 존재가 천사로 변신하는 모습은 삶이 지닌 부조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연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거짓말>은 좀비로 변한 세계에서 생존한 군인들 이야기다. 모든 군인들이 좀비로 변한 것은 아니다. 당연히 생존자가 있고 좀비를 공격한다. 하지만 실탄의 한계에 부딪힌다. 연료가 부족하다. 왜 어떻게 좀비로 변하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를 보유한 군이 좀비 때문에 무력해진다. 몇 명의 생존자만으로 수백 만의 좀비를 상대할 수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좀비를 토벌하기 위해 나선 그들의 부대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했기에 오히려 안전한 곳이 된다. 이 또한 섬과 다를 바가 없다. 섬에 갇힌 군이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없다. 그러나 명령 체계는 살아있다. 여전히 상명하복이 존재한다. 중대장과 말년 병장이 친구라 하여도. 그리고 여자가 있는 곳에 또 다른 성폭력이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좀비를 지워버리면 군대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모든 군바리들이 왜 이런 일을 하지? 하는 의문을 다시 떠올린다. 가장 혈기왕성한 나이 때의 남자들에게 최상의 선택일 수 있지만 이성적으로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을 휘감고 돌아다니는 불안과 공포는 자살이란 형식으로 표출된다. 생존이란 가장 큰 현실 앞에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포기는 가장 쉬운 선택이다. 고립된 공간을 벗어나고자 하지 않거나 철저한 명령체계의 군대는 외부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그들이 또 다른 해법을 위해 밖으로 나갔을 때 만나는 현실은 전편에서 보여준 몇몇 장면의 해설이자 인간이 가진 혹은 현실이 보여준 거짓말을 그대로 드러낸다. 혹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가장 충격적인 반전 혹은 블랙 코메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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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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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읽었다. 집에 찾아보면 동서판을 제외하고 다른 판본도 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 보니 출간되고 나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구해놓았다. 늘 그렇듯이 그냥 구해만 놓았다. 이전에 히치콕의 영화로 본 적이 있어 흔쾌히 손이 나가지 않았다. 십 수 년 전에 영화로 봤는데도 말이다. 지금 기억으로 그 영화가 나에게 특별히 재미있었다는 느낌은 없다. 히치콕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아마 이런 기억 때문에 책에 손이 쉽게 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 현대문학에서 나온 책을 읽으면서 나의 조악한 기억력에 다시금 좌절한다. 영화 속 이미지 하나를 제외하면 거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맨덜리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 그곳은 이제 없다. 이 회상은 없는 곳을 대상으로 한다. 추억과 기억의 대상은 항상 장소보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이제 회상은 과거의 한 시점으로 옮겨간다. 그것은 맥심 드 윈터와의 첫 만남이다. 고아가 된 후 반 호퍼 부인의 말동무로 고용되어 여행중이었다. 말동무라고 하지만 거의 하녀 수준이다. 그런 그녀에게 드 윈터 씨가 다가온다. 반 호퍼 부인의 병으로 둘의 만남이 많아진다. 이들이 헤어져야 하는 순간 맥심이 그녀에게 청혼한다. 둘의 나이 차가 적지 않음에도 결혼한다. 단 화려한 결혼식은 없다.

 

맥심에게는 레베카라는 전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사고로 죽었다.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아름답고 멋지고 활동적이고 감각이 뛰어난 여주인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은 경쟁할 수 없다. 그리고 한 번도 귀족 생활을 경험해보지 않은 그녀에게 맨덜리의 삶은 너무 낯설다. 거기에 레베카를 추종하는 댄버스 부인의 존재는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신혼 여행 후 맨덜리 영지로 돌아온 이 부부에게 삶은 현실이 된다. 특히 그녀에게는 더욱 더. 소설의 전반부는 거의 대부분 그녀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부정확한 영화 이미지가 살짝 끼워든다.

 

주눅 들고 익숙하지 않은 맨덜리의 생활은 그녀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다. 남편도 영지로 돌아온 후 바쁘게 돌아다닌다. 밀렸던 일에 집중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변한 일상이 그녀에게는 쉽게 적응되지 않는다. 자신이 여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전 여주인 레베카와 비교되고, 비교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읽으면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 바로 여기다. 자신이 지닌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그녀를 볼 때 안쓰럽다. 거의 신경쇄약 직전의 여자 같다. 집안 가득 들어차 있는 레베카의 흔적과 유산은 그녀를 더욱 괴롭힌다. 레베카가 탔던 보트와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되기 전까지.

 

좌초한 선박 때문에 발견된 보트와 시체는 소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화자의 심리 변화를 주로 다루는 스릴러에서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현실로 변한다. 이 현실은 걱정의 대상이 바뀌면서 시작된다. 이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그녀를 어른이자 여주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은 바로 레베카에 대한 진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녀가 느끼던 불안감과 공포는 이제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이 반전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하지만 진정한 반전은 뒤로 가면서 이어진다.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결국 마지막 장면은 또 다른 반전이자 첫장에서 맨덜리가 없다고 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사실 이 소설은 어떻게 보면 밋밋한 부분이 많다. 공포감을 조성해주지도 않고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스터리를 푸는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댄버스 부인이 만들어내는 몇 가지 장치와 행동이 나에게 공포와 억압의 원인으로 작용하지만 그렇게 강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물론 이 부분은 이후 다른 소설들에서 자주 본 설정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위태위태한 화자의 심리 변화는 어떤 파국을 가져올까 기대하게 만든다. 이것은 끝까지 변함없다. 히치콕의 영화를 다시 한 번 더 본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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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 몬스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8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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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도 다케루란 이름을 나에게 각인시켜준 것은 그 유명한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이란 작품이다. 그 이후 그의 작품을 몇 편을 읽었지만 이전 같은 재미를 제대로 누린 적이 없다. 첫 작품이 준 인상이 너무 강한 것도 이유 중 하나고, 이 시리즈를 그 뒤 일부러 읽지 않는 탓이다. 그러다 만난 이번 소설에서 살짝 이전 재미를 기대했다. 강한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전개 말이다. 결론만 먼저 이야기하면 아니었다. 이전 작품과 다른 방향으로 이 소설을 썼다. 사회파 의학소설이란 평이 있는데 그 장대함에 비해 재미는 사실 떨어진다. 어떻게 보면 시리즈의 첫 권 같은 느낌이랄까.

 

가상도시 나니와를 배경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그냥 무난하다. 오래된 개업의와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신종인플루엔자 캐멀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 양상을 보면 불과 몇 년 전 한국에서 일어났던 신종플루 사태와 거의 비슷하다. 매스컴을 통한 공포 분위기 조성과 백신 열풍은 엄밀한 과학적 분석이나 대처를 넘어 진행되었다. 소위 광풍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 소설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캐멀이 지닌 위험성을 과대 포장한 세력에 의해 극단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 한국과 다른 원인을 보여준다. 바로 그 부분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다.

 

한국에서 신종플루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을 때 가장 덕을 본 것은 제약회사다. 타미플루란 약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백신을 꼭 맞아야 하는 필수였다. 지금도 이 단어를 검색하면 수많은 기사와 글들이 나온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소설 속에서처럼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신종플루로 죽는 사람보다 계절성 인플루엔자로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언론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공포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어떤 사태로 이어지는지 그대로 보여준 좋은 사례다. 그런데 작가는 신종플루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소설은 쓴 것이 아니다. 읽으면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의사 부자가 사라진 뒤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했다.

 

신종플루 캐멀에 대한 사실을 밝히면서 이야기는 1년 전으로 돌아간다. 동경 특수부의 에이스 가마가타 마사시가 나니와로 부임해오고, 지사와 만난다. 갑자기 변한 전개에 어리둥절할 때 무라사메 지사를 통해 작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의익(醫翼)이다. 의료를 통해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를 변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자 혁명이다. 일본을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깨트리고자 하는 시도다. 그러니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대응책 중 하나가 신종 인플루엔자 캐멀 전략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과 비슷한 설정을 하나 더 발견했다. 그것은 룰렛이란 대응책이다. 하나의 스캔들이나 사건이 터졌을 때 다른 추문이나 사건으로 돌려 막는 것을 말한다. 불과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자주 일어났다. 7~80년대 간첩단 사건이나 21세기 연예인 스캔들 등이 바로 그것이다. 비슷한 문화 구조와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국가이다 보니 전략도 비슷한 모양이다. 신종 인플루엔자 캐멀과 함께 룰렛은 읽으면서 실제로 가장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아직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혼란을 주는 인물은 바로 히코네다. 그는 대단한 통찰력과 분석력과 기획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다른 등장인물들과 대비되는 동시에 이 소설이 시리즈의 첫 권이란 느낌을 강하게 준다. 왠지 모르게 장대한 이야기의 도입부이자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정도에서 멈췄다는 느낌이다. 물론 작가가 앞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설정은 분명하게 보여줬다. 일본에 무지한 나에게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설정이 아니지만. 그리고 캐릭터나 사건 등이 주는 재미가 부족하다. 거대한 헤게모니 싸움과 사회파 의학소설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말이다. 오락적 재미보다 지적 재미가 더 큰 소설이라 조금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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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스트라나 이야기 체코 문학선 4
얀 네루다 지음, 신상일 외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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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문학하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밀란 쿤데라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재미있게 읽었고 한때는 나오면 거의 모두 읽었었다. 그런데 얀 네루다란 작가가 현지에서는 더 중요한 작가인 모양이다. 뭐 더 중요하다는 평가 자체가 이상한 말이지만. 작가 해설에 따르면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얀 네루다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사실 네루다란 이름을 보면서 어떤 관계가 있나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 의문이 살짝 해결되었다.

 

1848년 이전 프라하 말라스트라나 지역을 묘사한 단편소설집이다. 말라스트라나는 체코 프라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블타바 강 서편에 있는 작은 마을이란 뜻의 지역이다. 이 작은 마을 배경으로 모두 열세 편의 중단편 소설을 담았다. 분량은 각각 다르고 그 지역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삶도 다양하게 드러난다. 충분한 배경 지식이 없다 보니 오독의 가능성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몇 편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강한 캐릭터와 예상하지 못한 결말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몇몇은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가장 먼저 마음에 든 것은 <훼방 선생>이다. 장례식을 방해한 후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을 살려낸 의사의 독특한 기행은 시대를 넘어 흥미로웠다. 자신이 가진 보석이 큰 돈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다룬 <물의 정령>은 시간과 정성이 지닌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준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보여준 기이한 행동을 다룬 <올해 위령의 날에 쓴 글>은 지나간 추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준다. 한 이방인 상인의 불쌍한 죽음을 다룬 <보렐 씨가 해포석 파이프를 길들인 사연>은 가슴이 아리지만 마지막 문장은 그것을 더 강하게 만든다.

 

<한밤의 이야기>는 반전이 주는 재미가 가득하고, <리샤네크 씨와 슐레글 씨>는 한 여자로 인해 일어난 두 남자의 감정 대결과 화해를 다룬다. <다정한 루스카 부인>의 다정함은 주변 사람을 벌게지게 만들고 그 행동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녀가 거지를 망하게 만든 방법>은 소문이 지닌 위력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거지도 망한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아니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해야 하나. <1849년 8월 20일 오후 12시 30분에 오스트리아가 멸망하지 않은 이유>는 황당한 이야기다. 이 이유가 전혀 설득력이 없는데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핑계가 되는 모양이다.

 

가장 긴 중편인 <인간 군상 - 어느 수습 변호사의 목가적이고 단편적인 기록들>은 제목 그대로다. 목가적이고 단편적인 기록 사이에 담긴 개인의 오해와 감정들은 우리가 흔히 살면서 저지르는 수많은 실수 중 하나다. 등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자기중심적이고 그 때문에 오해는 필수적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 부분이 재미지만. 이 단편에 한 편의 sf소설이 있다. <1890>이다. 혹시 이 작품이 <1984>란 제목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닌가 하고 상상해본다. 그리고 첫 작품 <백합 세 송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지금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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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사계절 : 한겨울의 제물 살인의 사계절 시리즈 Four Seasons Murder 1
몬스 칼렌토프트 지음, 강명순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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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사계절 시리즈 첫 권이다. 제목에 사계절이 들어간 것처럼 이 시리즈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으로 모두 4권이다. 이 소설은 그 중 첫 권이자 겨울이다. 부제도 겨울이 들어간 한겨울의 제물이다. 그래서인지 도입부부터 추위를 강조한다. 북유럽의 추위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조차 움직이길 싫어할 정도의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여주인공이자 형사인 말린이라고 이 날씨가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아침의 고요함 속에 경찰서에서 일을 하고자 한다. 그런데 파트너인 세케에게서 살인사건에 대한 연락이 온다. 함께 현장으로 간다. 그곳에서 150킬로 거구의 남자가 처참한 몰골을 한 채 걸려 있는 것을 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신원확인이 바로 되지 않는다. 장의사의 도움으로 얼굴을 복원하니 바로 연락이 온다. 벵트 안데르손, 46세다. 별명은 볼벵트. 축구장 밖에서 선수가 찬 공이 울타리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기 때문에 붙은 별영이다. 정신적 장애도 있다. 이런 이웃이나 아는 사람들의 정보와 달리 그의 어린 시절 과거는 대단하다. 아버지를 도끼로 내려친 적이 있다. 비록 실패해서 귀만 날렸지만. 그의 살인사건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쉽지 않다. 집은 그에 대한 평가와 달리 깨끗하다. 그의 평온한 일상을 깨트린 두 남자 아이가 있었지만. 여기서 형사들의 수사는 시작된다. 탐문과 조사와 대조 등을 통해 사실을 쫓아가지만 범인이 쉽게 나타날 리가 없다.

 

단순히 한 남자의 죽음 다룬 소설이 아니다. 이 죽음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그의 아버지 구석집 칼레 이야기는 너무 대단해서 쉽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그의 야수성에 매혹된 여자들 이야기는 자기 파괴적인 생활과 더불어 폭발한다. 야수성이 폭발할 때 여자들이 매혹되지만 그의 집에서 아내와 자식들은 그의 폭력에 시달린다. 벵트가 도끼를 든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가 살이 찐 것은 그의 엄마가 아들의 칭얼거림을 방지하기 위해 단 것들을 입속으로 넣어준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 칼레의 매력은 가끔 폭력을 동반하는데 그 피해자가 느낀 감정의 깊이는 대단하다. 이 소설은 바로 거기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여형사 말린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형사들의 수사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힘겹고 지루하고 끈질겨야 한다. 우리나라 형사 이야기에서 가끔 만나는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일은 그들에게 없다. 최상의 컨디션 유지를 위해 휴식을 강조한다. 굉장히 효율적이다. 그리고 말린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10대 아이를 가진 후 이혼하고 홀로 아이를 키운다. 그의 남편이었던 얀네가 안정된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꾸는 꿈속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따뜻한 휴양지로 노년의 시간을 보내러 간 부모와의 관계는 또 다른 문제 중 하나다.

 

복지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그 나라의 문제점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하지만 그 문제들이 모두의 문제는 아니다. 일부다. 이 일부를 전부처럼 강조하면 복지는 깨진다. 작가가 과연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 부분을 쓴 것인지 살짝 의문이 생긴다. 앞에 말린이 홀로 아이를 키운 것이나 순서상 뒤지만 시간상 앞인 라켈의 육아에 대한 서술을 보면 약간 혼란스럽다. 사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나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스웨덴에서도 살인사건과 같은 일이 생기는 것 아닐까. 복지가 잘 갖춰지면 사회가 좀더 안정될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지는 약간 의문이 생긴다. 너무 북유럽 스릴러를 많이 읽은 것일까?

 

북유럽 미스터리를 읽으면 주인공들의 심리적 갈등이 많이 다루어진다.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형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만의 편견일까? 아니면 내가 주로 읽은 책들이 그런 것일까? 이 갈들을 바탕으로 범인상을 추리하고 쫓는다. 당연히 힘든 일이다. 증거와 증인을 찾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심증이 있으면 물증이 없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족의 비극은 뒤로 가면서 더 강해진다. 비열한 모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강한 흡입력이나 긴장감을 높여주는 스릴은 조금 부족하다. 그러나 탄탄한 구성과 차분한 전개, 수사의 한계에 대한 묘사 등은 뛰어나다. 시리즈 다른 책들이 나오면 이 작품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몇 가지 이야기가 좀더 깊숙하게 다루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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