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계곡 모중석 스릴러 클럽 35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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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여자가 추운 겨울 산을 오른다. 그녀가 오른 곳은 지옥계곡으로 불리는 곳이다. 장면이 바뀌어 로만 예거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본다. 암벽 등반로로 이어져 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산으로 올라간다. 쇠로 만든 다리 위에 한 여자가 서 있다. 그녀 곁으로 다가간다. 그를 본다. 그녀의 눈에 공포와 경악이 뚜렷하게 보인다. 난간 밖으로 몸을 던진다. 로만이 몸을 날린다. 그녀의 팔을 간신히 붙잡는다. 그녀가 도와주면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공포와 경악으로 가득한 눈은 도움을 거부한다. 떨어진다. 계곡 속으로 사라진다.

 

이 길지 않는 장면은 많은 의문을 남긴다. 그녀가 왜 겨울 산을 올라왔는지, 왜 로만을 보고 공포와 경악에 빠졌는지, 그의 도움을 거부한 것은 왜인지. 그리고 너무나도 분명한 투신 자살을 둘러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그 이야기는 재빠르게 진행되면서 새로운 사실을 보여주고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다. 그 과정에 벌어지는 잔혹한 살인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혹시 하는 기대는 산산조각난다. 흡입력 있는 이야기와 잘 짜인 구성은 속도감을 높여준다. 하지만 충분히 납득하지 못하는 장면도 있다. 이 부분은 중간 이후 의문으로 남는다.

 

계곡에서 투신한 여자의 이름은 라우라 바이더다. 억만장자 아버지를 두고 있다. 일반적 조건만 두고 본다면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녀의 부모가 경찰에게 살인자를 잡으라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녀의 투신을 본 사람이 분명히 현실에 있지만. 그리고 그녀의 절친 마라가 등장한다. 그녀를 통해 라우라의 친구들이 소개된다. 라우라의 남친이었던 리키, 그녀를 사랑했던 베른트, 마라의 전 남친이었던 아르민. 이 다섯은 등반 그룹을 만들어 자주 산에 올라갔다. 적어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로만과 마라가 현실 속에서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면 중간 중간 한 인물의 독백이 끼어든다. 과거가 아프카니스탄에서 시작하여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 끔찍한 변화가 있다. 변함없는 것 하나라면 한 여자의 존재다. 이 변화 과정 속에 드러나는 집착과 악의는 섬뜩하다. 이것이 현실에서 살인으로 이어질 때 투신 자살처럼 보였던 그녀의 죽음이 결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그럼 왜 로만을 보고 공포와 경악에 빠졌을까? 물론 작가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마지막에 내놓는다. 이 답에 대해서 개인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쁜 쪽이다.

 

소설은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중에서 라우라의 남친이었던 리키의 존재는 다른 친구에 비해 높은 편이다. 단순히 남자 친구였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의 존재는 뒤에 반전으로 이어진다. 진실이 하나씩 밝혀질 때 라우라의 가장 큰 공포 중 하나를 그가 공유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무시무시한 집착은 아름다운 한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녀가 처한 극한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니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야기의 힘은 약해진다. 얼마 전에 읽은 소설에서 여자들이 엄청난 의지로 살아남은 것을 생각하면 삶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곳에 있는 것 같다.

 

언제나 모든 사건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한다. 친구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먼저 생각하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날 그 순간에 로만을 만났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행동일 수도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니. 하지만 삶은 다시가 없다. 가정도 없다. 항상 최악은 조그만 이기심 사이를 뚫고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도와줄 마음이 없었던 그들이었다. 예상한 기대에 살짝 미치지 못한 소설이지만 마지막 장면은 다른 소설을 찾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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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링 월드 프리퀄 1 : 세계선단

오래전 <링 월드>를 읽으면서 그 크기를 상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의 상상력은 곧 한계에 부딪혔다. 경험하지 못한 규모가 머릿속에서 형상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기와 별도로 이야기 속에 빨려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이 연작이 나올 것이란 상상조차 못했다. 반갑다.

 

 

 

 2. 제3인류

솔직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에 감탄한 것은 <개미>가 마지막이다. 그 뒤 나온 소설들을 읽을 때 학설들을 이런 식으로 풀어낸다는 발상이 기발하다는 생각은 했다. 어쩌면 이 기발함에 계속 매혹되는지 모르겠다.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책이 몇 권 있지만 <아버지들의 아버지>와 어떤 연관성을 가질지 궁금하다.

 

  3. 기시마 선생의 조용한 세계

추리소설가로 알려진 모리 히로시의 소설이다. 이 소설에 혹한 것은 네이버를 통해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인생의 항로가 바뀔지도 모른다. 주의를 요하는 소설!” 란 글을 읽은 후다. 기존에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과 분명히 다르 모습을 보여줄 텐데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너무 조용한 세계라 졸지도 모르겠지만.

 

 

 

4. 멍키스패너

프리모 레비의 소설이다. 쉽게 읽히지는 않았던 전작과 구입만 해놓은 책들을 생각하면 쉽게 손이 나가지 않을 책이다. 하지만 그의 책이 주는 무게감은 읽은 후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다른 책을 샀다.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그 연장선에서 이 소설을 선택했다. 선택되면 읽어야 하니까.

 

 

 

5. 세종특별수사대 시아이애이

제목이 어렵고 표지는 안습이다. 하지만 작가의 이름을 생각하면 그냥 지나갈 수 없다. 한국 미스터리에 조용한 울림을 주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현대물에서 시대물로 간 그녀의 작품이 과연 어떤 식으로 나에게 다가올지 기대된다. 등장인물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역할을 맡아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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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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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주인공은 케이, 한국명 한경희다. 처음 1부를 읽을 때만 해도 이 소설의 무대가 뉴욕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케이가 귀국하면서 무대가 바뀐다. 한국, 서울, 그중에서 홍대 근처. 이 장소는 케이가 생활하는 공간이자 꿈꾸는 곳이다. 이 이동을 통해 그녀는 천국에서 연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지옥 같다. 한동안 그녀가 뉴욕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에 파묻혀 생활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선택한 남자도 뉴욕에서 태어난 연상의 백수 재현이다. 좋은 부모를 만난 그의 생활은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청춘들과 너무나도 다르다. 천국을 꿈꾸는 케이에게 그가 쿨하고 멋지게 보인 것은 당연하다.

 

천국을 그리워하는 케이에게 한국은 너무나도 볼품없고 지루한 곳이다. 베이글은 맛없고 우디 앨런의 영화도 없다. 그녀의 환상은 이미 뉴욕에 맞춰져 있다. 모든 생활의 기준이 바로 뉴욕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녀가 잠실 친구를 만났을 때 보여준 행동과 그녀 집안과 과거는 이것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사회 경제 양극화의 심화 과정에서 높이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진 그녀 집안의 상황이 그녀를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만이 단순한 이유는 아니다. 사회 분위기가 그녀를 더 압박하고 있다. 잠실 친구가 보여준 행동은 가진 자의 전형적인 여유다. 여기에 대응하는 그녀의 행동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다가온다. 단순히 비겁하다고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방황, 좌절, 상실, 불안, 공포, 허세, 절망, 무력감 등의 감정과 행동들은 이 소설 읽는 내내 드러난다. 허영에 찌든 재현과의 관계를 보면 그녀의 삶 또한 허영으로 가득하다. 이것을 벗어난 후 선택한 또 다른 사랑은 현실의 무거움 앞에 너무 쉽게 무너진다. 대학생과 공돌이란 두 신분의 벽은 삶이 진행될수록 더 높아지고 두터워진다. 그가 한 달 야근해야 버는 돈을 케이가 과외로 벌고, 노는 곳이 홍대 등을 바뀌면서 이 괴리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순수한 감정은 힘없이 무너지고, 관계는 깨진다. 이것은 케이와 지은의 대화 속에서 이미 그 파국이 보인다. 지원이 느꼈을 좌절과 불안과 절망은 케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하면서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도 비슷하다.

 

곳곳에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허영과 허세가 드러난다. 가식적인 그들의 행동은 교묘한 말로 가려져 있다. 멋진 말과 비평으로 사람을 뒤흔들고 깨우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 밝혀지는 실체는 한 명의 비루한 사람일 뿐이다. 그가 풀어낸 수많은 이야기가 한때 우리 문학을 지배했던 후일담의 변주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아주 낯익다. 이런 무용담은 또 재미있다. 케이가 이 이야기에 혹해서 광주에 다시 찾아온 것은 그녀 주변에 이런 정도의 사람조차 없다는 의미다. 물론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그가 만든 논평의 거대한 틀이 산산조각나지만.

 

언제나 삶에서 반전이 일어나는 것은 모든 것을 인정할 때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거듭 생각하고 무력감이 더 깊어지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찰나의 깨우침 같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따스하게 멈춰 선 풍경이 그녀가 가진 불안과 두려움을 산산조각낸다. 이때까지 천국을 그리워하며 멈춰 있던 그녀의 발걸이 앞으로 나간다. 천국이 있을지, 지옥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가겠다는 의지가 가득하다. 앞에서 그녀가 생각하고 경험하고 느낀 모든 것들이 바로 이것을 위해 존재한다. 너무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싸울 수 있다. 아주 힘들고 어렵고 지루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힘내라고 응원하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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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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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작품이다. 출간 연도를 먼저 쓴 것은 이 소설이 지닌 가치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요즘은 쉽게 야설과 포르노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 속 표현이 그렇게 야하고 외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1973년이라면 어떨까? 그 당시 미국의 분위기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아니 최근까지도 한국 문학계에서 이런 표현을 적나라하게 사용하는 작가는 몇 명 없었다. 그들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아니다. 거기에 비해 이 작품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와 판매고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개인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사도라 윙.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녀는 유대인이다. 첫 결혼이 실패한 후 정신과의사와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빈의 정신과학회에 참석한다. 그 시작은 빈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느끼는 공포와 정신과의사에 대한 기억들이다. 처음엔 그냥 평범한 이야기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환상, 즉 ‘지퍼 터지는 섹스’ 이야기가 나오면서 노골적인 단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한 편의 포르노 소설을 읽은 것 같다. 이런 순간은 가볍게 지나간다. 단순히 포르노였다면 좀더 노골적이고 외설적이면서 끈적였을 텐데 간결하면서도 농축적인 문장이 쉽지 않은 내용과 결합해서 집중력을 요구한다.

 

구성은 이사도라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한다. 현재에서 새로운 남자 에이드리언과 불륜이 벌어진다면 과거는 그녀의 삶이 어떻게 현재까지 오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표현된다. 이 과정 속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론과 학설과 주의ㆍ주장은 왜 이 소설에 수많은 거장들이 호평을 내릴 수밖에 없는지 알려준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학설과 이론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론 등이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새로운 인물상을 제대로 구현해내었을 때 가능하다. 이사도라의 행동과 심리 묘사는 노골적이면서 실질적이고 솔직하다. 이 때문에 읽을수록 그녀의 다음 행동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진다. 어떤 부분에서는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다. 바로 이 부분들이 모여 이사도라 윙을 만든다.

 

정신분석학에서 시작한 듯한 이야기는 여성의 환상으로 넘어가고 어느덧 페미니즘의 흔적이 드러난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성 해방을 온몸으로 실천하지만 그 속에서 추구하는 것은 사랑과 관심이다. 사랑과 욕망이 뒤섞여 흘러가는데 결국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홀로 설 수 있는 자신.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의존적인 성향을 더 많이 보여준다. 글쓰기 능력은 스스로 폄하하고, 두 번째 남편 베넷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다. 어쩌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아실현이나 성장은 여자에게 너무 힘든 일인지 모른다. 환경이 계속 억압하고 왜곡하기 때문이다. 음탕한 것 같은 그녀의 행동도 남자들의 것으로 바꾸면 플레이보이란 단어로 윤색되어지는 현실이 떠오른다.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묘사와 설명은 어느 순간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표현들이 숨겨진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준다. 그녀의 환상이 단순히 환상이었음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는 상상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잘 보여준다. 가끔 이런 차이를 알지 못한 남자들의 폭력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보여줄 때 우리의 바닥은 쉽게 드러난다. 그리고 에이드리언과 베넷을 두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녀가 왜 둘을 함께 가질 수 없는가 물을 때 현재 사회제도가 지닌 불합리함과 불안감을 엿볼 수 있다. 또 곳곳에 나오는 철학과 정치에 대한 단상들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놀랐고 반가웠다. 놀란 것은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표현들 때문이고 반가웠던 것은 깊이 있는 문장과 사유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가 요즘 자주 사용하는 문장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여자의 적은 여자다’, ‘인생에는 각본이 없다’ 등이다. 이제는 너무 유명한 표현들인데 이 소설에서 처음 다루어진 것은 분명 아닐 텐데 눈길을 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두려움을 잃어버린 그녀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때까지 지나온 삶의 흔적을 생각할 때 그렇게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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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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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자키 탐정이 돌아왔다. 1년 간의 외유 끝에 빗속을 아홉 시간 이상 운전해서 도쿄로 돌아왔다. 그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게 친절한 탐정이 아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탐정 사무소에 누군가 있다. 노숙자 마스다다. 그런데 평범한 노숙자가 아니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밖보다 안락한 실내란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사와자키가 돌아오면서 휴식처 한 곳이 사라졌다. 동시에 매일 사와자키에게 전화해야 한다. 노숙자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의뢰인이 남긴 전화번호로 연락을 한다.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새로운 사건이 시작된다.

 

의뢰인 우오즈미가 찾아왔을 때 만나지 못했다. 명함은 마스다에게 전해졌다. 그래서 그가 남겨진 명함을 가지고 의뢰인을 찾아간다. 쉽게 연락이 닿지 않는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탐정이 아니다. 우오즈미를 만나러 가는 것도 쉽지 않다. 연락처와 탐문을 통해 하나씩 단서를 연결해서 그를 만난다. 그가 바란 것은 11년 전 죽은 누나 유키의 죽음이 자살인지 아닌지 알고 싶은 것이다. 이미 경찰이 자살로 판명했고, 목격자까지 있는 사건이다. 너무나도 분명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분명한 사건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 작가는 이 과정을 건조하면서도 견고한 문장으로 하나씩 풀어낸다. 당연히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든 것이 벌어진 것은 11년 전 고시엔 고등학교 야구 8강전이다. 우오즈미 아키라는 부상당한 에이스대신 마운드에 올라갔는데 탁월한 기량으로 팀을 8강까지 올려놓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실력이자 성과다. 이런 그에게 누나를 통한 승부조작 요청이 들어온다. 이 사건이 밖으로 드러난 것은 그의 가방에 든 돈 5백만 엔 때문이다. 물론 그는 이 요청을 거부했지만 경기는 대패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누나가 자살한다. 자신이 거부한 승부조작의 흔적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누나도 6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 사건이 그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11년 동안 그의 삶은 누나의 죽음이 주는 ‘왜’에 짓눌려 있었다.

 

‘왜’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한 그가 사와자키를 만났을 때 흔쾌히 조사를 의뢰하지 않는다. 그를 찾는 동안 든 비용을 정산하고 떠난다. 얼마 후 노숙자 마스다가 나타나 아키라가 다쳤다는 말을 전한다. 심한 부상을 입었다. 병원으로 후송한다. 이때 아키라는 왜에 대한 답을 찾길 원한다. 이제 본격적인 사건 조사가 시작한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당연히 자살을 목격한 증인 3명을 찾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만난 증인들의 증언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아키라에 대한 공격과 부정확한 증언이 어떤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암시한다. 복잡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실 속으로 독자가 끌려들어간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과 연결되고, 사실이 은폐되고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쉽게 풀릴 수 있는 사건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한 소년이 11년 동안 삶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한 채 살았다. 하지만 이 꼬인 이야기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숨기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 사실을 알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하고, 그 진실에 다가가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고요했던 과거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파편처럼 깨어져 있던 사건과 사고가 하나씩 이어질 때 사와자키의 집중력과 추리력이 힘을 발휘한다. 동시에 그의 매력도 극대화된다. 살인청부업자들의 위협에 살짝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소설은 90년대 일본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신문 기사를 통해 시대상을 드러내고, 등장인물들의 직업과 활동을 통해 그 사회를 조금씩 알게 만든다. 사와자키가 전문가를 통해 정보를 수집할 때 그 깊이와 폭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장 가뱅 불법 비디오에 대한 에피소드는 일본의 저작권 풍경을 알려주고 그 당시 나의 행동이 떠오른다. 이런 간결한 에피소드와 묘사들은 개별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잔잔하고 냉철하게 묘사된 감정의 흐름들은 이야기에 더 몰입하게 만들고, 진실을 마주할 때 그 반전과 숨겨진 진실에 더 깊게 빠져들게 한다.

 

전작부터 이어져 오는 와타나베에 대한 야쿠자와 형사의 집요한 추적과 협박이 이어진다. 어쩌면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유일한 공통점일지 모른다. 물론 이전 사건에 등장한 인물들의 관계는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야쿠자와 형사가 그를 괴롭히고 압박을 가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이것도 탐정 사와자키 시즌 1의 완결판이란 소개처럼 끝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과 전개다. 몇 번이고 등장한 인물이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님을 알려줄 때 작가가 얼마나 꼼꼼하게 이야기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이 또한 소설 속 사건과 함께 읽는 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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