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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973년 작품이다. 출간 연도를 먼저 쓴 것은 이 소설이 지닌 가치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요즘은 쉽게 야설과 포르노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 속 표현이 그렇게 야하고 외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1973년이라면 어떨까? 그 당시 미국의 분위기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아니 최근까지도 한국 문학계에서 이런 표현을 적나라하게 사용하는 작가는 몇 명 없었다. 그들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아니다. 거기에 비해 이 작품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와 판매고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개인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사도라 윙.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녀는 유대인이다. 첫 결혼이 실패한 후 정신과의사와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빈의 정신과학회에 참석한다. 그 시작은 빈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느끼는 공포와 정신과의사에 대한 기억들이다. 처음엔 그냥 평범한 이야기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환상, 즉 ‘지퍼 터지는 섹스’ 이야기가 나오면서 노골적인 단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한 편의 포르노 소설을 읽은 것 같다. 이런 순간은 가볍게 지나간다. 단순히 포르노였다면 좀더 노골적이고 외설적이면서 끈적였을 텐데 간결하면서도 농축적인 문장이 쉽지 않은 내용과 결합해서 집중력을 요구한다.
구성은 이사도라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한다. 현재에서 새로운 남자 에이드리언과 불륜이 벌어진다면 과거는 그녀의 삶이 어떻게 현재까지 오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표현된다. 이 과정 속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론과 학설과 주의ㆍ주장은 왜 이 소설에 수많은 거장들이 호평을 내릴 수밖에 없는지 알려준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학설과 이론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론 등이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새로운 인물상을 제대로 구현해내었을 때 가능하다. 이사도라의 행동과 심리 묘사는 노골적이면서 실질적이고 솔직하다. 이 때문에 읽을수록 그녀의 다음 행동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진다. 어떤 부분에서는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다. 바로 이 부분들이 모여 이사도라 윙을 만든다.
정신분석학에서 시작한 듯한 이야기는 여성의 환상으로 넘어가고 어느덧 페미니즘의 흔적이 드러난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성 해방을 온몸으로 실천하지만 그 속에서 추구하는 것은 사랑과 관심이다. 사랑과 욕망이 뒤섞여 흘러가는데 결국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홀로 설 수 있는 자신.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의존적인 성향을 더 많이 보여준다. 글쓰기 능력은 스스로 폄하하고, 두 번째 남편 베넷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다. 어쩌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아실현이나 성장은 여자에게 너무 힘든 일인지 모른다. 환경이 계속 억압하고 왜곡하기 때문이다. 음탕한 것 같은 그녀의 행동도 남자들의 것으로 바꾸면 플레이보이란 단어로 윤색되어지는 현실이 떠오른다.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묘사와 설명은 어느 순간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표현들이 숨겨진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준다. 그녀의 환상이 단순히 환상이었음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는 상상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잘 보여준다. 가끔 이런 차이를 알지 못한 남자들의 폭력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보여줄 때 우리의 바닥은 쉽게 드러난다. 그리고 에이드리언과 베넷을 두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녀가 왜 둘을 함께 가질 수 없는가 물을 때 현재 사회제도가 지닌 불합리함과 불안감을 엿볼 수 있다. 또 곳곳에 나오는 철학과 정치에 대한 단상들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놀랐고 반가웠다. 놀란 것은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표현들 때문이고 반가웠던 것은 깊이 있는 문장과 사유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가 요즘 자주 사용하는 문장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여자의 적은 여자다’, ‘인생에는 각본이 없다’ 등이다. 이제는 너무 유명한 표현들인데 이 소설에서 처음 다루어진 것은 분명 아닐 텐데 눈길을 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두려움을 잃어버린 그녀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때까지 지나온 삶의 흔적을 생각할 때 그렇게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