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김용언 지음 / 반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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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를 사전에서 찾으니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 작품의 창작에 뜻이 있는 소녀. 또는 문학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소녀.”라는 정의가 보인다. 이 정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존의 인식을 반박한다. 미문 취향, 낭만적 감수성, 서구 동경, 소녀 감성 등으로 폄하받은 수많은 여성 작가들과 기존의 남성 작가들이 어떻게 차별받았는지도 같이 다룬다.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인식의 한계를 느꼈고, 현재는 전혀 구분하지 않는 성별에 의한 작품 성향도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문학소녀에 대한 논의의 시작은 전혜린으로 잡았다. 내가 알고 있는 전혜린은 사실 거의 없다. 집에 찾아보면 예전에 사놓은 그녀의 에세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전혜린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다른 작가의 글을 통해서다. 그녀가 번역한 소설도 나의 시대에는 맞지 않다. 당연히 읽은 기억이 없다. 아주 피상적이지만 그 이름은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바로 전혜린이다. 너무 많이 들었기에 그녀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그녀를 통해 문학소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선택했다. 좀더 쉽고 가볍게 읽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예상은 상당히 많이 틀어졌다.

 

이 책의 앞부분은 전혜린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놀라운 친일이력을 가진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그녀가 독일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했을 때 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 생략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놓친 것일까? 독일 유학시절 빈곤하게 산 그녀가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것이 번역이다. 나중에 귀국해서 문학전집 등을 편집할 때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같은 작품을 넣었다고 할 때는 그 안목에 놀랐다. 지금도 검색하면 그녀가 번역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전혜린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각 시대 속에서 여성작가들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로 이어진다. 남성작가와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평가는 그냥 보기에도 편견으로 가득하다. 이름을 여자로 착각한 후에 쓴 평론 해프닝은 짧은 에피소드지만 아주 분명하게 문학소녀에 대한 남성의 편견을 보여준다. 이것이 단순히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 시대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소녀란 단어가 통용되고 ‘10대라는 특정 시기를 거치는 주체가 아니라 여성-어머니가 되는 직전 단계로 간주’되었다. 저자의 이런 지적은 기존 학자들의 연구 결과이지만 전혜린과 결합하면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해졌다.

 

잘 몰랐던 사실 중 하나가 전혜린의 에세이를 둘러싼 사실과 에피소드다. 그녀의 사후에 지인들이 글을 모아 출간했다는 것과 당시 최고의 인기 문인인 이어령을 학생 김화영이 찾아가 서문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단 한 편의 소설도 출간한 적이 없다는 사실과 루이제 린저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사실들이 그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다. 그래서 창작물을 내지 못했다는 사실 혹은 그녀의 수필이나 일기나 편지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소녀적이란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녀가 쓴 수필과 번역한 작품들이 한국문학계 혹은 동시대 청춘들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고 이윤기 작가가 떠올랐다. 그가 번역한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 한국작가와 독자에게 영향을 미쳤던가.

 

실제 책을 읽다보면 전혜린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전경린도 그랬다고 했을 때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 실제 그녀가 가진 한계도 분명하다. 이 부분을 저자가 무시하지 않는다. 그녀의 고민 혹은 허세도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작품을 선택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관해서는 결코 폄하할 수 없다. 아직까지 그녀의 번역본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문학소녀. 나도, 당신도 전혜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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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일기 -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닌 나
김그래 글.그림 / 레진코믹스(레진엔터테인먼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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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라는 이름만 보면 자연스럽게 <미생>의 장그래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장그래처럼 대기업의 인턴사원이 아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자신의 작업실을 가진 만화가다. 이 책은 그가 일상을 그린 것을 모아 내놓은 두 번째 책이다. 페이스북에 잠깐 들어가보니 지금도 연재하고 있다.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나이가 더 어려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을 뒤로 하고 그래의 이야기로 들어가면 나의 젊은 시절 모습도 잠깐 잠깐 보인다. 이 모습보다 더 공감하는 것은 그녀의 일상이고 감상이고 물음들이다.

 

책을 펴고 목차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사계절로 장을 나누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세 장으로 나누었다. 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가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 구분이 살짝 궁금했다. 예상한대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봄 때문에 이 둘을 묶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 장 가득 그려진 그래의 일기를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은 거룩한 취미에서 학창 시절 억지로 했던 계획 세우기를 만났다. 지금도 계획이라면 아주 싫어하는 나이기에 이 취미는 낯설었다. 물론 그 계획을 가볍게 넘어가는 모습은 딱 나의 모습과 겹쳐지지만.

 

그래는 스마트폰을 끼고 산다. 고장 났을 때 에피소드는 왜 다른 폰을 구해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중독은 내가 더 심한 것 같다. 집에서 시간나면 이북을 열심히 보던 나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제 20대인 그래가 나이듦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녀의 나이를 착각했다. 나중에 알고 난 후에 살짝 웃게 되었다. 겨우 그 나이에,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학창시절 20대에 1~2년 후배들에게 얼마나 나이가 든 척, 잘난 척 한 적이 여러 번 있기에 조금은 공감한다. 뭐 지나고 나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인데 말이다.

 

사실을 말하면 이 책 속에 기발한 상상력이 샘솟듯이 나오지는 않는다. 아주 의외의 에피소드들이 나와 웃음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읽다 보면 이름처럼 ‘그래 그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공감대가 조금씩 형성될 뿐이다. 그래의 고민이 당사자에게는 엄청 어렵고 힘든 것이겠지만 그 시기를 지나왔고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아마 이 일기를 읽고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연령대는 20대이거나 방금 20대를 지난 30대 초반일 것이다. 같은 미대생이라면 조금 더 많이 공감할 것이다. 나 같은 중늙은이도 적지 않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이 일기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꽤 많은 것들은 게시판에서 본 것들과 비슷하다. 이 말은 만화가가 게시판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다. 나 혼자만의 고민이고 고통이라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군가 겪었던 일이란 것을 알게 된 순간이 떠올랐다. 미대생의 졸전에 대한 이야기는 팟캐스트를 통해 이미 너무 들었기에 오히려 친숙하다. 엄마들이 자식들에게 하는 말 중에 ‘나중에 너 같은 아들 혹은 딸을 낳아서 키워봐라’라는 말처럼 자신을 돌아보고 놀라는 말은 없을 것이다. 가끔은 나만큼만 자라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일의 나’ 이야기는 현재의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할 것을 잠시 미루었다가 내일로 넘어가고, 이것이 또 뒤로 밀리는 일이 최근에, 아니 이전부터 자주 있었다. 귀차니즘, 졸림, 먼저 놀고 같은 뻔한 이유는 식상할 정도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매월 일정한 급여가 나오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삶의 무거움도 엿보이고, 친구와 간 일본 여행의 작은 이벤트들은 마음이 잘 맞아 보기 좋았다. 처음에는 그래의 성별을 몰라 남자라고 착각했던 일도 있다. 옆으로 누운 얼굴 표정을 보고 어색하게 느낀 순간도 있다. 이런 장면들과 감상이 차분하게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일상의 순간을 이렇게 멋지게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아무 것도 아닌 나라고 말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해놓았다. 어른의 세계로 들어온 그래가 지금처럼 일상의 작은 일들을 계속 그려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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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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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는 살인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 소설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잘 어울리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실제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살인은 바로 이 해고에서 시작한다. 대량해고로 직장을 잃고 오랫동안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한 버크 데보레가 자신의 취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기발한 발상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 내가 죽인 사람들이 나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고, 그들이 죽는다고 해도 내가 가장 우선순위가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특수한 업무 경력자란 설정과 죽일 사람을 선택하기 위한 작업을 같이 넣었다.

 

데보레는 취업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 최선 중 하나가 다른 경쟁자들의 이력서는 받는 것이다. 자산의 경력 광고를 내어 채용을 기다리는 수준에서 다른 경쟁자를 보기로 한 것이다. 이 작업은 자신보다 나아보이는 몇 명을 추려내는 역할을 하고, 그 결과는 이 경쟁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쯤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살인은 쉬운가? 하고. 당연히 쉽지 않다. 군대를 다녀왔지만 베트남 전쟁을 경험한 것도 아니다. 유럽에서 근무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아버지가 2차 대전 당시 주운 루거가 한 자루 있다. 이 총을 사용해 죽이려고 한다. 제대로 총을 다룬 적이 없다 보니 책을 사서 공부하고, 사격도 해본다. 역시 몇 차례 실수를 경험한다.

 

준비가 다 되었다. 이제 경쟁자를 선택한 후 그를 죽이면 된다. 이렇게 적고 나면 단순하게 보이지만 실제 살인은 다르다. 얼굴도 모르니 그가 맞는지 확인해야 하고, 목격자도 없어야 한다.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게 만든다. 그리고 첫 번째 살인을 한다. 성공이다. 다음 경쟁자를 죽이러 간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그 집 딸 때문에 생긴 오해에서 비롯했다. 경쟁자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까지 죽인 것이다. 이때 그가 느낀 감정은 복잡하다. 죽이지 말아야 하는 사람을 죽여야 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감정은 나중에는 조금 바뀐다. 어쩔 수 없다면, 이란 조건을 붙여서.

 

이제 그는 연쇄살인범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정체를 모른다. 행운도 따른다. 두 번째 살인의 용의자가 잡혔기 때문이다. 이런 행운은 다음 살인에서도 이어진다. 나중에는 형사까지 찾아온다. 그가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일에서 행운이 따른다면 가정사는 그렇지 않다. 먼저 아내와의 불화가 일어난다. 둘이 상담사를 만나 이 문제를 풀자고 한다. 그가 은밀하게 처리하는 일들 때문에 아내가 힘겨워한 것이다. 여기에 아들이 절도죄로 잡힌다. 소프트웨어를 훔치다가 잡힌 것이다. 이제 경쟁자를 죽여야 하면서 가정 문제도 같이 풀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닌데 예상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한다. 그리고 다음 살인은 어떻게 될지, 이 살인의 결과는 해피엔딩일지 기대한다.

 

사실 이 소설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는 나의 시선을 그렇게 많이 끌지 못했다. 박찬욱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조금 더 관심이 생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소설이 실업자가 살인을 한다는 단순한 소설로만 여겼다. 다른 작품에서 경쟁자를 죽여야만 살아남는 사람들 이야기를 몇 번 읽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취직과 생존을 위해 정말 열심히 움직였다. 그 이미지를 가지고 차분하게 읽으면서 이런 설정도 가능하다는 데에 놀랐다. 그리고 대량해고를 불러온 책임자들에게 총구가 향해지지 않고 개인들에게 향했다는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어쩌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가장 큰 적보다 바로 앞에 옆에 보이는 동료를 적으로 여기는 그 마음 말이다. 박찬욱이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배우와 어떤 설정으로 풀어낼지 한 번 괜히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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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바다 - 미술여행작가 최상운의 사진과 이야기
최상운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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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쪽 바다를 보면서 자랐다. 태어난 곳에서 바닷가까지는 100미터 조금 더 되는 정도였다. 이런 나에게 바다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자라면서 본 바다와 탁 트인 백사장이 깔린 바다는 달랐다. 일단 시원하고 가슴에 신선한 바람이 와 닿았다. 이전까지 바다하면 어시장의 생선들과 비릿한 냄새와 어선들이 버린 스티로폼 등의 쓰레기가 먼저 연상되었다. 그래서인지 해외에서 이런 부둣가를 보면 반갑고 낯익다. 누구나 바다하면 먼저 떠오르는 일반적 이미지와 다른 것이다. 이 이미지를 조금씩 벗어던진 것은 다양한 바다를 보면서부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

 

일곱 장을 SEA라는 표기로 나누었다. 많은 곳이 아는 바다지만 낯선 지명도 상당히 나온다. 한국 바다만 따로 모아놓지 않고 해외의 바다가 같이 넣은 것도 조금은 특이하다.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한국의 바다 대부분은 제주도와 관계있다. 제주 비양도, 우도, 마라도, 가파도, 애월, 제주, 서귀포 등이 책 속에 나온다. 제주에 가서도 섬은 거의 간 적이 없어 대부분 이름과 방송으로만 본 곳이다. 언제 한 번은 가보고 싶지만 늘 마음만 먹고 있다. 군산의 선유도도 이제 다리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하니 한 번쯤 갈 것 같다. 이렇게 이 책은 나의 기억을 되살리고 가보고 싶은 열망을 살짝 부채질한다. 그렇다고 수많은 외국의 바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미술여행작가라고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른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사진들이었다. 구도와 배경 등이 전혀 내가 기대한 것과 닮지 않았다. 오히려 각 장 마지막에 실린 화가들의 그림이 더 인상적이었다. 터너, 고흐, 인상파들, 쇠라, 호퍼, 모네 등의 그림 말이다. 사진들보다 오히려 그림이 긴 시간을 넘어서 더 분명하게 그 바다의 이미지를 더 잘 전달해주었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들이다. 사실 바닷가 풍경은 인터넷 검색하면 더 멋지고 전문적인 사진들이 쏟아진다. 뭐 그림도 그렇지만 이렇게 연결해서 감정과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다.

 

분량에 비해 글자가 많지 않고 오랫동안 들여다봐야할 사진도 생각보다 많지 않아 금방 읽었다. 잠시 멈춘 곳은 대부분 기억과 추억이 머문 곳이다. 그리고 유명 작가들의 작품에서 뽑아온 바다에 대한 문장들과 그가 경험한 몇 가지 이야기들이다. 낯선 만큼 신기해야 하는데 여행 서적이나 방송 등으로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덤덤하게 다가온다. 이 덤덤함을 뛰어넘는 순간은 언제 작은 에피소드가 있을 때다. 가끔 기억과 추억이 연결되면 격렬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반가움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가고 싶다는 마음이 합쳐진 것이다. 또 읽었지만 무심코 지나간 문장에서 뽑아 올린 글들은 다시 음미한다.

 

솔직히 말해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편집이다. 어쩌면 내가 기대한 글들은 여행 작가들의 일상과 경험이 더 녹아 있는 여행기였는지 모른다. 파편적인 단상 대신에 말이다. 그리고 그 바다와 직접 관계있는 글을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이런 예상을 뛰어넘은 재미와 감동을 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왠지 이 책은 아니다. 아쉬운 부분이다. 어쩌면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이 책을 뒤적인다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다른 감상을 전달하기도 하니까. 이 글을 적다 보니 더럽고 냄새나는 어린 시절 바다가 그립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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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해원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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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란 제목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레비 스트로스다. 너무나도 유명한 인문학 서적이다 보니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인문학 서적이 아니다. 소설이다. 그것도 아주 참혹하고 비정한 액션 스릴러다. 사실 처음에는 이 소설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신인의 첫 작품이고, 한국도 아닌 콜롬비아를 무대로 한 북한군 특수요원이라니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라고 미리 짐작했다. 출판사의 전작을 읽지 않았다면 이 기대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펼친 책은 나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먼저 읽은 독자의 호평이 없었다면 이 두툼한 분량을 아주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한국 액션 스릴러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그것을 충족시켜주었다. 북한군 특수요원 권순이를 통해서 말이다. 그녀의 암호명은 장산범이다. 암살자 세계에서 너무나도 유명하다. 영어로는 마운틴 타이거로 불린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중반부터다. 그녀가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도입부에 알려지고 바로 실제 능력이 발휘된다. 아마추어와 완전히 다른 능력은 그녀가 최고의 경호원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멀고 먼 콜롬비아에 오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와 더불어.

 

콜롬비아의 메데인 카르텔을 둘러싼 이야기다. 세계 최고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조직 이름이 메데인 카르텔이다. 한때 정부마저도 뒤흔들던 강력한 조직이다. 예전에 이 조직을 둘러싼 수많은 영화나 소설이 나왔다. 대부분 그들을 쳐부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권순이가 이 조직을 위해 일하게 하면서 나의 이성을 잠자게 만들고 감성을 자극했다. 현실적으로 최고의 악당들인데 이들을 살짝 응원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데는 그들을 없애기 위한 조직이 너무나도 잔혹했기 때문이다. 카르텔과 비교해서 전혀 뒤질 것이 없다. 리타의 존재도 이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 아이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누가 악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늑대라고 불리는 조직이 메데인 카르텔을 없애려고 한다는 기본 설정에 권순이가 그 주변에 놓인다. 분량은 당연히 권순이가 많지만 카르텔을 둘러싼 이야기는 역사의 흐름이다. 보고타 도심에서 총이 쏟아지고, 포탄이 날아다닌다. 카르텔을 없애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고, 그 음모 속에서 순이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특수요원이 개인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한다고 해도 정규군 속에 갇히면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행운과 우연이 겹치면서 몇 번의 위기를 넘어가지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 한계를 넘어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순이의 능력이다. 너무나도 무섭고 강렬하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피와 살이 터지고 내장이 흩날리는 묘사는 섬뜩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카르텔을 뒤에 놓으면 순이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온다. 그녀의 존재를 아는 한국 안기부 직원 덕진, 카르텔을 공격한 무리에게 성폭행까지 당한 열세 살 소녀 리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온 이전의 동료, 그녀가 겨우 살아나온 침몰한 배 속의 소녀들. 이런 인연들이 모여 권순이의 삶을 뒤흔든다. 침몰한 배에서 겨우 살아난 후 구출된 뒤에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그녀가 겪었던 일들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것들 중 마지막 방점을 찍은 것은 역시 침몰하는 배속에서 구하지 못한 소녀들이다. 이 소녀들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세월호 사건 당시 학생들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액션영화도 많이 떠올랐지만 가장 먼저 든 것은 무협소설 속 주인공이었다. 용병으로 자신을 내려놓았지만 최고의 암살 요원이었던 그녀가 수많은 적들이 죽이는 장면은 무협 속 주인공과 다름없다. 최고의 저격수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긴장감은 결과와 상관없이 아주 매력적이다. 그리고 길지 않는 시간 동안 수차례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결코 그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그녀를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뭐 현대의 무협이 액션 스릴러의 주인공 캐릭터를 빌려온 것도 많지만 말이다. 그리고 카를로스가 늑대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은 조금 허술하다. 적들의 작전이 치밀했다고 해도 그 파악이 너무 늦다. 그 속에 몇 개의 반전을 집어넣은 것도 과한 설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냥 늑대의 조직력과 정보력으로 밀어붙여도 충분했을 텐데.

 

가볍게 읽기에는 그 속에 담긴 잔혹한 장면들이 너무 많다. 가독성이 워낙 좋아 이 참혹함에 마냥 빠져 있을 수 없다. 순이의 트라우마가 그 순간에 탁 터진 것은 변증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 순간의 설명은 조금 늦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지만 마약을 둘러싼 콜롬비아의 전쟁은 평화로운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 룸살롱 같은 뜬금없는 장면은 아쉽다. 마지막에 카르텔이 무너지는 상황이 얼마나 충실한 고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허황되어 보인다. 곳곳에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을 충분히 가릴 재미와 속도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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