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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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능파란 단어를 보고 공공장소에서 읽기에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극적인 성애 묘사를 연상한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했다는 문구가 이런 쪽의 상상을 더 부채질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관능적인 장면은 보이지 않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한 것도 남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말이 청혼이었다. 이 말을 듣고 그녀가 한 것은 엄마를 찾아간 것이다. 결혼해도 되는지 묻기 위해. 엄마는 찬성한다. 이 놀라운 상황이 왠지 모르게 이상하게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오봉에 앗케시 마을의 스즈란긴자에서 한 여자가 분신을 하면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세쓰코다. 세무사와 엄마 집을 방문한 후 집에 둔 것이 있다고 말하고 갔는데 불이 났다. 완전히 타 신원 파악을 세무사와 몇 가지 단서로 했다. 세쓰코가 맞다. 몇 개월 후 남편 기이치로도 죽었다. 이 둘의 장례식을 주관한 것은 세무사 사와키다. 기이치로의 호텔 로얄을 담당하고, 한때는 세쓰코의 고용주이자 애인이었다. 물론 결혼 후에도 둘은 가끔 만나 몸을 섞는다. 이런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면서 기이치로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부터 일어난 사건과 일상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처음에는 에로틱한 뭔가가 나올 것이란 예상을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뒤틀린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세쓰코의 일상도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 아니고, 그녀가 참가한 단가 모임의 미치코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고, 암을 앓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세쓰코의 일상은 강하게 소용돌이친다. 남편의 딸 고즈에를 찾고, 러브호텔을 직원에게 넘기려고 한다. 남편을 열렬하게 사랑했다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바람을 피는 그녀가 할 행동은 분명 아니다. 이 이상함이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데 마지막에 한 방 크게 터트린다.

 

약간 평범하고 밋밋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단가 모임 동기인 미치코이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다. 아니 그녀의 딸 마유미를 세쓰코에게 맡겼다. 아이의 팔에는 꼬집힌 흔적이 있다. 분명히 아동 학대다. 마유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고즈에에게 맡긴다. 돈을 조금 주고. 어린 아이를 돌보는 단순한 일처럼 보이는데 뒤에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과 이어지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무섭다. 보여지는 표정과 감정 뒤에 숨겨진 진실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서늘한 느낌이 가슴 한 곳으로 파고든다.

 

유리 갈대는 세쓰코가 지은 단가집의 제목이자 단가의 제목이다. 그녀가 몇 번이나 자신의 단가를 인용해서 말한다.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그녀의 삶속에는 무엇이 흐를까? 이 허무와 공허함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치코와 함께 한 행동과 그 반응은 이것을 더욱 공고화시킨다.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간 후 예상한 반전이 나올 때까지는 더욱 더. 하지만 그 이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결국 알아채는 사람은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사와키 세무사 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사와키는 탐정 같은 역할도 하고, 경영컨설팅도 하고, 한 여인의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그의 강한 책임감은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한다. 그의 마지막 외침은 가슴에 강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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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야의 여름
트리베니언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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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베니언의 소설 중 번역된 것이 몇 권 되지 않는다. 운 좋게도 모두 읽었다. 처음 읽은 것이 예전에 장원에서 나온 <니콜라이>였다. 이때는 트리베니언이 누군지도 몰랐다. 굉장히 특이한 킬러가 나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이 재번역되어 새롭게 나올 예정이란 소식을 들었다. 원래의 제목을 그대로 단 채로. 그 다음 소설은 헌책방에서 구한 <메인스트리트>였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우연히 들고 읽었는데 완전히 매혹되었다.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책은 비채에서 <메인>으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 <아이거 빙벽>이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도 그 재미가 그렇게 줄지 않았다. 이때부터 트리베이언이란 이름이 완전히 내 몸속에 자리를 잡았다.

 

앞에서 말한 세 권의 소설은 각각 분위기가 다르다. 킬러, 경찰 등 직업이 다르지만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작가의 이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읽었다면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다. 그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은 사실 <카티야의 여름>이다. 이 책의 앞부분은 너무 정적이고, 움직임이 없어 과연 트리베니언의 소설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건은 언제 일어나고, 이 조용한 마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한 남자가 24년 전에 있었던 첫사랑의 추억을 간단하게 담은 소설로 착각할 정도다.

 

구성은 간단하다. 24년 만에 바스크 지방의 고향으로 돌아온 화자가 24년 전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한 여자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카티야다. 본명은 다른 것인데 자신을 카티야라고 부른다. 때는 1914년 아직 1차 대전 전이다. 장 마르크 몽장 박사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한다. 이 당시는 아주 비쌌던 자전거를 타고 쌍둥이 동생의 부상 때문에 병원을 찾아왔다. 동생의 이름은 폴 트레빌이다. 둘은 성별만 다르지 외모는 아주 닮았다. 폴의 부상은 둘의 자전거 경주에서 비롯했다고 하는데 각자의 의견에 따라 원인이 달라진다. 이 만남과 상황 속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트레빌 가족은 파리에서 왔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살리다. 이 마을은 몇 가지 소문 때문에 환자들이 찾아온다. 그로 박사와 함께 의사로서의 생애를 이어가는데 그의 전공 분야는 사실 정신의학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정신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의 정의감과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은 간단한 현실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진다. 즉 쫓겨난 것이다. 고학으로 힘든 의대를 마쳤고, 학창 시절 자신이 바스크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했다. 태생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여기에 아직 그의 순진함과 순수함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쟁도 일어나기 전이었다.

 

카티야의 등장과 트레빌 가족과의 만남은 의사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젊은 여자에게 빠지는 것도 흔한 일이다. 쌍둥이라는 것이 조금 특이할 수 있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카티야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미녀라기보다 매력이 넘치는 여성이다. 해부학과 프로이트의 책을 읽는 특이한 여성이다. 폴은 몽장의 등장을 반가워하지 않고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실 이 반응이 나올 때만 해도, 왜 그들이 살리에 왔는지에 대한 소문을 그로 박사에게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마지막 반전 같은 장면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니 나의 상상력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몽장은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작은 마을은 금방 소문을 퍼나른다. 이 소문을 그에게 전하는 역할은 하는 인물은 그로 박사다. 이 소문 때문에 폴은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카티야가 몽장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폴의 반응은 더 적대적이다. 몽장이 들은 소문을 말하면 더욱 화를 낸다. 약간 평범한 로맨스 소설 같은 분위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폴이 한다. 정신병이 있는 것 같은 아버지는 학문 연구에 정신이 없다. 암흑 시대에 대한 관심이 깊고, 풍부한 역사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역동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바스크 지방 축제를 가게 되는 것도 아버지 때문이다.

 

정적인 상황과 한 남자의 순애보 같은 이야기 전개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트리베니언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마지막 40여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이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차분하게 문장 하나 하나에 집중하고, 작가에 이전에 깔아놓은 설정 몇 가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그 윤곽이 보였다. 왜 이 작품을 스릴러라고 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이전 작품들에 비해 약간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한동안 이 마지막 장면은 강한 인상과 더불어 긴 여운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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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옳은 일이니까요 - 박태식 신부가 읽어주는 영화와 인권
박태식 지음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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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를 미친 듯이 본 시기가 있다. 영화관에서 보고, 집에 오면 비디오를 빌려 봤다. 나중에는 인터넷으로 다운 받아서 열심히 봤다. 인터넷 있기 이전에는 영화 잡지를 보고, 비디오로 나오지 않은 영화는 어떻게든지 구해서 보려고 했다. 지금이냐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아서 볼 수 있지만 그때는 불법 비디오나 희귀본이 된 비디오테이프를 찾아야했다. 힘겹게 찾아 본 영화가 나의 취향이나 이해를 완전히 넘어선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도 계속 찾아봤다. 이런 습관은 불과 몇 년 전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다 나의 손에서 영화가 조금씩 멀어지고, 완전히 책으로 넘어왔다.

 

박태식 신부, 잘 모른다. 내가 영화를 볼 때 이 이름은 거의 없었다. 내가 아는 평론가들은 이제 고인이 되거나 너무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가끔 영화에 관련된 인터뷰를 보다 보면 아는 얼굴들이 보인다. 그의 초창기 모습을 기억하기에 왠지 어색하다.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나의 취미나 기억이 이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아주 가끔 보는 영화도 거의 오락영화만 본다.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조금 어려운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는 영화 흥행이나 할리우드 상황 등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제는 찾아보지 않는다. 극장에 어떤 영화가 하는지도 잘 모른다. 이런 상황이니 이 책의 저자를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 책에 실린 46편의 영화 중 본 것은 딱 3편이다. 이전 같으면 최소한 반은 봤을 텐데 말이다. 비교적 2~3년 안에 상영된 영화다 보니 본 영화가 더 없다. 몇 편은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영화 프로그램이나 포탈 사이트 연예란에서 본 적이 있다. 처참한 숫자다. 올해 영화를 몇 편이나 봤는지 생각해보니 딱 1편이다. 바로 스타워즈 7편. 이전 같으면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을 열심히 찾아서 한 편씩 보면서 저자의 글과 나의 감상을 비교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열정이 많이 사라졌다. 좋은 영화를 구해놓고 그냥 묵혀두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이 책은 아주 조용히 옛 열정에 불을 당긴다. 모두 볼 수는 없지만 극찬한 몇 편은 메모해 두었다가 한 편씩 보고 싶다.

 

영화와 인권. 어떻게 보면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보기 힘든 것이 인권이 아닌가 생각한다. 열정 페이를 이용한 영화제작이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저자는 인권의 범위를 아주 넓게 잡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을 넘어 사랑의 상처, 치매로 스러져가는 노인의 애절한 삶, 친구를 배신하는 것까지. 그래서 몇 편은 나의 이해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영화에서 감독의 의도를 발견하라고 했는데 영화를 보지 않은 탓에 이것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렵다. 아니면 나의 인권에 대한 범위가 아주 좁거나.

 

모두 4부로 나누어져 있다. 지금, 여기, 우리, 나. 지금과 나의 장에 실린 영화들에는 공감을 하지만 여기와 우리에 실린 영화 몇 편은 솔직히 왜 인권에 담았는지 의문이다. 나의 한계다. 저자가 영화에 대해 풀어 쓴 글도 상당히 재밌다. 대부분이 두 편을 같이 다루는데 비슷한 부분과 차이를 나열할 때 한때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의 방식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귀찮고 능력이 많이 부족해서 포기했지만 이런 종류의 글을 보면 먼저 눈길이 간다. 그리고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에 조용히 눈길을 준다. 그가 말하는 감상 포인트와 칭찬 등은 영화를 한동안 멀리했던 나에게 낯선 부분이 많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많은 참고가 된다.

 

1~2년 전에 갑자기 시간이 나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려고 검색했다. 상영은 하는데 도저히 볼 수 없는 시간에만 상영했다. 멀티플렉스로 바뀐 후 영화의 순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영화의 다양성을 말할 때 늘 나오는 지적이다. 엄청나게 흥행을 한 작품도 한 달이 지나면 극장에서 보기가 힘들다. 이런 상황이니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보고 싶은 영화는 많다. 이 책에도 많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전 같으면 모두 보려고 했을 것이다. 최소한 반 이상은 봤을 것이다. 현실은 이렇지 않다. 대부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한 평론가를 알게 되고,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인 것은 큰 성과이자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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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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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마루 가쿠란 이름이 왠지 입에 잘 붙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아주 잘 기억한다. 첫 작품인 <천사의 나이프>는 그 당시 많이 다루어지던 소년 범죄를 소재로 했었다. 나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일본 추리소설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피해자 가족들이다. 이런 소설에서는 늘 피해자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복수심 등이 나온다. 이와 더불어 다루어지는 것이 가해자의 감옥에서 나온 후의 삶이다. 용서와 복수란 피해자 가족의 선택이 자연스럽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연작단편집도 작가가 첫 작품부터 다루어왔던 소년 범죄와 피해자 가족을 소재로 한다.

 

사에키 슈이치. 이 연작단편집의 주인공이다. 그는 15살 생일날에 17살 누나가 강간 살해당한 것을 발견했다. 이 사건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처음이 경찰학교에 들어간 것이고, 두 번째가 경찰이 되어서 강간하려는 범인의 입에 총구를 집어넣은 것이다. 당연히 경찰에서 짤린다. 이후 호프 탐정 사무소에서 조사원으로 일한다. 소장은 전직 경찰인 고구레다. 적은 임금을 받고 그는 열심히 일한다. 그러다 한 의뢰를 받는다. 11년 전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찾으니 그를 용서해도 될지 알려달라고 한다. 첫 에피소드 <악당>은 이렇게 풀려나왔다.

 

연작단편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모두 소년 범죄나 성범죄와 살인 등이다. 모든 이야기는 호프 탐정 사무소에 어떤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에서 시작한다. 이 의뢰와 동시에 슈이치의 개인적 조사도 같이 진행된다. 그의 조사는 당연히 누나를 강간 살해한 세 명의 남자들의 현재다. 그가 가장 먼저 찾아낸 다도코로다. 그는 라면 전문집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 슈이치는 그의 주변을 맴돌며 감시하고 조사한다. 건실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퇴근 후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시고 2차를 간다. 이곳에서 그는 후유미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다도코로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슈이치에게는 이 여자가 정보원이다. 그녀는 슈이치를 좋아한다. 이 차이는 잔혹한 현실을 반영한다. 그 진심이 슈이치에게 전달되기 전까지는.

 

슈이치가 누나의 살인자들을 조사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라면 사무소의 의뢰는 작가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에 대한 냉혹한 현실이다. 의뢰인들은 대부분 피해자 가족들이다. 그들은 가해자의 현재와 그의 삶을 알고 싶어 한다. 여기에 살짝 발을 담구는 부류가 있다. 가해자를 변호했던 변호사다. 하나의 사건을 가해자, 피해자 가족, 변호인, 조사원 등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아주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악당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흔하게 보던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죄하는 가해자가 아닌 변함없이 남의 약점을 이용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악당을 말이다. 그리고 15년 전 사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슈이치가 있다.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은 가볍게 읽을 수 없다. 다루는 주제가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빠르게 잘 읽힌다. 재밌다. 그리고 불편하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사람들 대신 현실의 악당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악당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비율이 절대적으로 적을 뿐이다. 불편함은 여기서 비롯한다. 사회의 법률이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 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감옥에서 조금이나마 빨리 나오기 위해 온갖 반성의 글을 가짜로 쓴다는 악당의 말은 아주 현실적인 표현이다. 가해자의 변호인이었던 사람이 피해자 가족으로 변한 후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보았다는 부분은 우리가 얼마나 허약하고 불안한 존재인지 대변한다. 이런 대사들이 나올 때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라면 어떨까? 하고.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과 논의가 필요한 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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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일색 김태희
김범 지음 / 네오픽션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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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이 얼마나 유치한 제목인가! 그러다 작가 이름을 봤다. 김범. 몇 년 전 <공부해서 너 가져>란 소설 한 편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가다. 어지간해서는 한 번 읽은 작가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 작가의 작품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간단하게 읽은 책 소개 글은 아주 반어법적이었다. 천하일색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그녀의 외모는 평범 이하였다. 이런 그녀가 연하의 성형외과 의사인 멋진 남자와 연애를 한다니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지 궁금했다. 또 어떤 반전이 펼쳐질까 하는 호기심도 자극했다.

 

36살의 성우인 김태희는 서울대 출신의 미녀 김태희와 동명이인이다. 동명이인으로 인한 에피소드는 차고 넘친다. 재작년에 끝난 <별에서 온 그대> 이후 도민준이란 이름만 나오면 모든 사람의 시선이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유명인과 동명이인인 경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김태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학창시절 미녀 김태희와 비교되었다. 다행히 공부는 잘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천하일색 김태희’라는 놀림을 받았다. 읽으면서 나쁜 놈들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 나이의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찰스 리.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다. 평소 전철을 타고 다니지 않는데 일이 생겨 탔다. 그곳에서 그는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의 여자를 발견한다. 바로 천하일색 김태희다. 변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중이었던 그녀다. 성추행에 대해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얼굴도 못생겼고, 몸매도 과체중인 그녀지만 괴롭다. 이때 도움을 준 인물이 찰스 리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가 그녀에게 빠질 줄은. 그의 이상형이 <닥터 지바고>의 라라인 것을 감안하면 도저히 얼굴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성격과 행동은 비슷한 점이 많다. 찰스는 그것을 간파한 것인지 모른다.

 

못생긴 김태희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우면서 외모지상주의를 꾸짖는다. 나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강남형으로 성형한 여자들이 지나가면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간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 부자연스러움에 질리지만 윤곽이 뚜렷한 외모에는 나도 모르게 반응한다. 마눌님 말대로 속물이다. 이런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면 잠시 반성을 하지만 또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못생겼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그녀들을 보는 법을 배웠다. 연습과 노력을 결과다. 아니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미의식의 일부를 되찾은 것이다. 아닌가? 미의 기준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시대에 한 개인의 모습을 존중한다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물론 아직 완전히 배운 것은 아니다.

 

찰스의 배경은 화려하다. 대학 총장인 아버지와 대기업 대표이사인 어머니에 자신도 의사다. 그것도 아주 잘생긴 연하다. 이런 그가 김태희에게 세 번만 만나자고 했을 때 그녀가 진심을 느끼기는 무리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외모는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라디오 방송에서도 밀리게 한다. 그녀에게 좋은 선배였던 박진국이 잘 가공된 고공주에게 빠져 구차한 변명을 내려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격이니 실력이니 하는 것을 가볍게 밟고 지나가는 것이 가끔은 외모다. 목소리가 좋으면 되는 라디오인데도 말이다. 이때 찰스가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랑을 다룬다. 연인들의 사랑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사랑도 같이 다룬다. 이 가족들의 사랑을 작가는 약간 미화한다. 한 편으로는 극단적인 소유욕으로 표현한다.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몇 개 나오는데 그냥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글 전체가 무겁지 않다보니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전개도 빠르다. 특히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아주 멋지다. 재미의 대부분이 바로 캐릭터에서 비롯한다. 이 둘의 사이를 두고 만들어지는 소문들은 우리가 흔히 내뱉는 말들이다. 읽으면서 뜨끔했다. 경쾌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비판이 많고, 유머도 넘쳐난다. 대표적인 것이 마지막 대사다. 남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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