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세상
톰 프랭클린.베스 앤 퍼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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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역사소설이자 연애소설이고 스릴러물이다. 처음 도입부를 읽을 때는 스릴러라는 생각을 했고, 중간 정도 읽었을 때는 미시시피 홍수를 다룬 역사소설로 다가왔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은 지금은 사랑 이야기가 눈길을 확 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역시 역사에 충실한 설명과 묘사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홍수에 잠긴 미시시피 주변 지역을 이렇게 멋지게 풀어낸 작품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여기에 금주법 시대가 곁들여지면서 밀주 제조업자와 연방 밀주 단속원의 대결이 부각된다. 이 둘 사이를 멋지게 헤엄치는 것은 역시 불가능할 것 같은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다.

 

1927년 미시시피 강은 홍수로 많은 도시들이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해있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작은 마을 하브나브가 바로 그런 곳이다. 이 작은 마을이 중요한 것은 바로 최고의 밀주 위스키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금주법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술의 매매와 음주가 동시에 어우러지는 장면들은 법 집행이 무색하다. 이런 시절에 밀주 단속원들은 전국을 돌면서 밀주를 찾아내고, 제작자와 유통자를 법정에 세운다. 자신들이 언론에 노출될 것을 기대하고 딕시 클레이의 남편 제시를 잡은 단속원 둘이 등장한다. 하지만 딕시의 놀라운 사격 솜씨와 여러 명이 있다는 거짓말이 엮이면서 전세가 역전된다. 이 평범한 도입부가 앞으로 펼쳐질 놀라운 이야기의 핵심 요인이다.

 

보통 밀주 단속원이 나타나면 밀주 제작자들은 뇌물을 준다. 아주 큰돈이다. 대부분 부패한 이 돈을 받고 눈을 감아준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다. 이런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는 두 형사가 있다. 그들의 이런 실적이 큰 실적을 잡았다고 보고한 후 사라진 두 밀주 단속원을 좇게 만든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이 보고한 실적을 찾아내라는 지시다. 이 지시는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후버가 내린 것이다. 처음 연방과 후버란 단어가 나왔을 때 그 유명한 FBI 설립자인 그 후버로 착각했다. 당연히 다른 인물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그는 이 실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자 한다. 햄과 잉거솔 콤비가 이 작은 마을에 오게 된 이유다.

 

이야기는 두 사람을 축으로 진행된다. 한 명은 당연히 잉거솔이고, 다른 한 명은 딕시 클레이다. 잉거솔은 고아 출신에 1차 대전을 참가한 용사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재즈다. 음악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재능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명사수이자 멋진 연주자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 중간에 그의 과거사가 흘러나오는데 왜 그가 임무를 수행하던 중 발견한 아이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 단서를 제공한다. 만약 이 아이가 없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좀더 스릴러 쪽으로 말이다. 이성은 늘 감정에 휘둘리고 무너진다.

 

딕시 클레이는 한때 제이콥이란 아들을 가졌지만 병으로 잃었다. 이 죽음이 그녀에게서 생기를 뺏어갔다. 그녀가 만든 멋진 위스키는 금주법 시대에 누구나 원하는 술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법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술을 마신다. 제시와 딕시의 부가 더 많이 쌓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딕시가 원하는 것은 이런 성공이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랑과 삶의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무언가다. 소설 속에서 그 무언가가 바로 잉거솔이 길에서 데리고 온 아기다. 딕시에 의해 윌리란 이름을 얻게 된다. 갑자기 그녀 삶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모성애가 발동한 것이다.

 

밀주 제작자와 밀주 단속원의 사랑 이야기로 변하는 것은 후반부다. 전반부는 세밀하게 이 시대의 풍경을 그려내고, 등장인물들 이야기를 펼치면서 그들의 과거를 하나씩 풀어낸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 있는 부분들인데 작가들은 이것에 역사와 상상을 곁들여 긴장감을 높인다. 언제, 어떻게, 누가 터트릴지 모르는 제방을 둘러싼 긴장감은 또 하나의 재미다. 제방을 터트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단순한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 고개를 끄덕인다. 잉거솔이 딕시가 밀주 제작자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느낀 갈등과 고민은 또 하나의 갈림길이자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는 순간이다.

 

부부의 협업으로 탄생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 어떤 어색함도 느끼지 못했다. 미시시피 강을 둘러싼 상황을 배경으로 과연 이 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했다. 각각의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더 몰입했다. 읽으면서 작가의 다른 작품 <미시시피 미시시피>가 더 궁금해졌다. 조금 무겁고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단순한 기우였다.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부분에 이야기를 맞출까? 읽으면서 생긴 몇 가지 이미지가 춤을 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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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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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3연타석 홈런이다. 큰 기대 없이 읽은 <오베라는 남자>에서 시작하여 이번 작품까지 모두 만족스럽다. 물론 이 세 작품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들이 모두 노인이고, 개성이 너무 강하고 특이한 성격이란 점이다. <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에서 화자로 소녀가 등장한 것을 제외하면 조연으로 소녀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는 베가가 그렇다. 이것이 하나의 틀로 굳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단계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할 것 같다.

 

읽으면서 낯익은 이름과 행동이 눈에 들어왔는데 역자의 글을 읽으니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에 브릿마리와 켄트 부부가 나왔다고 한다. 그 당시 상당히 밥맛이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나중에는 이 감정이 살짝 변했지만. 물론 이런 사실을 몰라도 이 책의 재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편견 없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도 정확한 정보를 몰라 브릿마리의 행동에 더 집중하고, 그녀가 어느 방향으로 튈지 궁금해졌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그 속내까지 완전히 맞춘 것은 아니다.

 

평생을 남편과 가족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 브릿마리다. 그녀의 삶에서 남편 켄트를 빼면 남는 것이 없다. 청소와 정리에 강박증이 있는데 이것이 그녀를 사회와 멀어지게 한다. 그녀의 불행했던 과거가 나오는데 왜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강박증과 깐깐한 성격이라 아주 강한 내면을 지닌 것 같지만 상당히 여리다. 눈물을 자주 흘린다. 하지만 수건에 대고 흐느껴 운다. 왜냐고? 눈물이 바닥에 떨어져 자국이 남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가 세상을 향해 밖으로 나온다. 이유는 불쌍하다. 언론에서 홀로 살다 죽은 사람이 냄새 때문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은 후 이런 일이 벌어지기 원치 않기에 일을 찾는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다른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눈에는 취업센터 직원의 행동이 하나씩 거슬린다. 플라스틱 컵도, 컵받침이 없는 것도. 일상에 지친 직원의 눈에는 브릿마리가 진상이다. 읽으면서 나도 그랬다. 다음 날 약속을 잡는다. 그냥 한 말이지만 브릿마리에게는 다르다. 메모하고 다음날 찾아온다. 끈질기게 직원을 괴롭힌다. 세상의 흐름과 동떨어져 산 그녀이기에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렇게 행동한 끝에 하나의 일자리를 얻는다. 보르그 지역의 레크리에이션 센터 관리인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오지만 온 날부터 말썽이다. 차는 폭발하고, 그녀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축구공을 맞고 기절한다. 인연이 시작되었다.

 

보르그는 경제 위기 후 몰락한 마을이다. 주민들은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당연히 사려는 사람도 없다. 기절한 그녀를 데리고 온 아이가 베가고, 베가가 일하는 가게 주인은 미지의 인물이라 불리는 여자다. 이 가게는 참 많은 역할을 한다. 경제 위기 여파로 우체국과 자동차 정비소와 피자가게와 작은 점포까지 모두 같이 한다. 쉽게 공간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지만 결코 넓은 공간을 아닐 것이다. 이곳에서 브릿마리는 보르그에 대한 기초 정보를 조금씩 얻는다. 그리고 축구를 사랑하는 아이들을 만난다. 특히 리버풀을.

 

깐깐한 할머니 브릿마리와 천방지축 같은 아이들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각각의 사연을 하나씩 풀어내고, 축구에 대한 열정을 브릿마리에게 주입한다. 브릿마리에게 관심을 두는 스벤이라는 경찰이 등장한다. 그와 잘 되려는 순간 남편 켄트가 나타난다.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녀의 모습은 또 다른 재미다. 그리고 이 마을의 전설 같은 축구 코치 뱅크의 딸이 조용히 이야기 사이에 들어온다. 정체된 듯한 마을이지만 사람들의 마음까지 완전히 정체된 마을은 아니다. 이곳에서 브릿마리는 자신의 만능 세제인 과탄산소다를 뿌리며 청소한다. 이 청소가 사람들 사이에 낀 때를 지우는 것 같다. 동시에 읽는 속도를 더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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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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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이렇게 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의 언어로 소설 등을 쓰는 작가가 상당히 있다. 자전적 요소가 많다고 하는데 그 경계를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꽤 많은 부분에서 그의 경험이 녹아 있을 것이고 생각한다. 그가 그려낸 곳과 프랑스에 대한 환상과 프랑스어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면 경험한 자의 여유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나에게 쉽지 않았다. 더디게 읽혔고, 가계도가 충분히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묘사가 많은 부분도 하나의 이유다.

 

한 장의 사진과 프랑스어와 할머니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할머니 샤를로트가 없었다면 이 소설은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프랑스 출신이고, 러시아에서 험난했던 20세기 초반을 보냈다. 소설 속에 그녀가 경험했던 일들을 하나씩 보여주는데 그 참혹함은 엄청나다. 물론 그것이 당시 그곳만의 특별한 것은 아니다. 현재도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지고 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살인과 강간과 폭행과 부상병들까지. 사지 중 일부가 절단된 병사들을 사모바르라고 부르는 부분에서는 깜짝 놀랐다. 잠시 다시 생각하면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국전쟁 이후를 다룬 영화나 소설에서 말이다.

 

책속에서 프루스트가 나왔을 때 작가가 풀어내었던 이야기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아니다보니 순간적인 이미지를 모아야했다. 이 이미지들은 어느 순간 엮이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묶인다. 개인적으로 편하게 읽힌 것은 역시 3부였다. 현재가 아닌 과거를 다룰 경우 타인의 경험보다는 자신의 것이 더 생생하기 때문이다. 십대의 열정과 충동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섹스 후에 대한 그의 감정은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의 경험과 할머니의 경험을 같이 놓고 해석했을 때 이것이 남자 일반적인 감정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러시아만의 특징인지 쉽게 분간이 되지 않았다.

 

기억과 사실이 교차한다. 프랑스어는 프랑스 출신 할머니 샤를로트를 통해 배운다. 러시아어가 모국어인 그에게 프랑스어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열심히 두드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다 보니 문을 조금씩 열어준다. 후반부에 이 경험을 들려줄 때 낯설었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도 이때다. 샤를로트가 자신이 당한 강간 이야기를 해줄 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에 놀란다. 이 부분이 바로 앞에서 말한 섹스 후 남자의 감정을 표현한 대목이기도 하다. 이 이외에 할머니는 자신이 겪은 삶의 다양한 부분을 말해준다. 물론 그가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키운 것은 할머니의 가방 속 신문과 그 기사와 할머니의 이야기들 덕분이다.

 

전체적인 이미지는 솔직히 다 읽은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더 넓은 시베리아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전제주의 국가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역자도 지적했듯이 베리아를 제외하면 할머니의 신분증을 둘러싼 에피소드 외에 몇 개 없다. 빈곤과 궁핍함과 허기 등이 가득한 시절이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빠르게 씻겨 간다. 현실과 삶의 놀라운 회복력 덕분이다. 작가가 섬세하게 표현한 장면들이 나에게 깊이 와 닿지 않아 힘들었지만 차분하게 음미한다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다. 마지막 장에서 프랑스 유언이 던져준 반전은 다시 첫 이야기를 돌아보게 만들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감정들의 정체에 의문을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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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도 함께
존 아이언멍거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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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 낯선 작가 이름과 약간 두툼한 분량 때문에 조금 걱정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책일수록 읽기가 더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 리뷰를 보니 대단히 평가가 좋다. 약간의 걱정을 덜었다. 현대 우화라는 평이 보여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낼까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런 걱정과 기대는 읽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걱정은 사라졌고, 기대는 충족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마무리로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읽으면서는 다양한 영화와 소설들이 떠올랐다. 소재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담는 방식이다. 액자 구성이지만 앞과 뒤만 현재고, 한 작은 섬의 고래축제가 어떻게 유래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은 과거 이야기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알몸의 한 남자가 세인트피란 바닷가 모래사장에 떠밀려오면서부터다. 벌거벗은 채 발견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고, 간호사가 인공호흡을 하고, 여럿사람이 협심해서 그를 옮긴다. 그가 바로 조 학이다. 런던의 투자은행의 애널리스트다. 그의 전공을 보면서 현재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많이 찾은 전공자가 수학자란 말이 떠올랐다. 분석가답게 그는 시세와 현황을 분석해서 딜러들에게 정보를 넘긴다. 특히 공매도 분야에서.

 

공매도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거래 방식이다. 얼마 전 한국도 이것으로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다. 내부거래만 주로 다루었는데 실제는 거래방식의 문제가 더 크다. 한국만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영국에서도 실행되는 모양이다. 물론 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공매도 방식은 똑같지만 현실의 적용과 규제가 다르다. 금융기법은 간단히 넘어가자. 조가 하는 일은 이런 공매도를 위한 분석을 돕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정보와 소식 등을 취합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나중에 정식으로 정한 이름은 캐시다. 이 캐시의 성능은 대단하다. 최고의 예측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현실의 시간이 세인트피란에서 흘러간다면 과거는 그의 회상 속에서 빠르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 경계를 구분하지 않았다. 섬세하게 읽으면서 본인이 구분해야 한다. 뭐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조가 이 섬에 오게 된 것은 바로 자신이 짠 프로그램 때문이다. 믿고 진행한 공매도가 엄청난 손실을 본 것이다. 이에 놀라 차를 몰고 가장 먼 곳으로 향했는데 그곳이 바로 세인트피란이다. 그가 바닷속으로 들어간 것도 사실 자살이 목적은 아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고래를 만난다. 나중에 이 고래가 세인트피란 바닷가 표류한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의 합심으로 해결한다. 이때만 해도 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펼칠지 예상하지 못했다.

 

성공한 애널리스트지만 그에게 다른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사장 루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인류의 종말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요구한다. 캐시의 새로운 모습이자 능력이다. 루와 조의 대화는 인류의 취약한 부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현실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다. 인류가 늘 공공의 목적을 향해 진심으로 힘을 합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루의 주장을 들으면서 과장된, 너무 암울한 예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조 자신도 이 이론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석유와 독감으로 인류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는가. 화석 연료가 인류의 순간적 퇴보를 가져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독감만으로 종말이라니! 좀비 영화라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세인트피란에서 조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외운다. 예전과 다른 삶이다. 그러다 다시 접속한 캐시에서 이상한 징후를 발견한다. 이때부터 그는 종말에 대비한다.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사용하여 장기보관 가능한 물품을 산다. 주로 통조림들이다. 쌀과 밀가루도 산다. 교회 종탑에 쌓는다. 그의 이론을 믿는 듯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때만 해도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생각했다. 실제 그의 상사였던 재니가 독감에 걸려 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분위기가 바뀐다. 그렇다고 좀비 영화 같은 장면들은 없다. 약탈은 있지만 이 섬의 선량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식량을 내놓는다. 단수와 단전으로 어려움은 더 심해진다. 이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기보다는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다. 308명의 적은 사람들이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들 속에 내재된 선량한 마음 때문일까?

 

종말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결코 이야기는 무겁지 않다. 유쾌하고 즐겁고 유머 가득하다. 최악의 상황은 펼쳐지지 않는다. 이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설 최고의 장면이 나온다. 크리스마스 대축제다. 사람들의 총에 맞아 죽은 고래를 요리하고, 가지고 있던 식량을 털어 옆마을 사람까지 초청해 파티를 연다.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작가는 조 학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고래와 함께 마을에 온 한 명의 이방인으로 기억할 뿐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 결코 잊지 못할 선물과 삶을 던져준 인물로. 액자 구성 속에서 풀어낸 것도 바로 이 조 학과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 속에서 이야기는 조금씩 변하겠지만 축제가 계속되는 한 전설이 될 것이다. 이미 그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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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글 트레킹 - 플라톤부터 러셀까지 철학자들과 함께한 영국 종단기
게리 헤이든 지음, 곽성혜 옮김 / 유노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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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삶에서 며칠을 연속으로 걸었던 적은 없다. 한참 유행하던 국토대장정도 가지 않았고, 지리산 종주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나다보니 이렇게 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환상이 있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룬 에세이에 빠지고, 단순히 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소설에 감탄했다. 이런 나에게 영국 종단과 철학의 결합이란 이 책이 매혹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두께도 그렇게 두껍지 않으니 부담 없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읽기 시작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예상하지 못한 문장과 구성 때문이다.

 

문장은 건조하다. 어느 시인의 산문집에서 꽃과 나무 이름을 아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 글을 만드는지 읽은 적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의 저자도 자신의 글재주가 조악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묘사는 늘 막연하기만 하다고. “살림 지대를 지났다고 말할 수 있을 뿐, 나는 어떤 종류의 나무가 있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들판을 가로질렀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어떤 종류의 농작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실제 이 책을 읽으면서 꽃과 나무와 농작물에 대해 쓴 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삭막한 문장들이다. 하지만 이 삭막함을 가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걸으면서 느낀 감정과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인용한 철학자 등의 글이다.

 

스코틀랜드 북부 땅끝에서 잉글랜드 남서부 땅끝까지 약 1900킬로미터의 거리를 도보로 종단한다. 3개월 동안 250만 걸음을 걷는다. 남한을 한바퀴 삥 둘러도 이 정도 거리는 되지 않는다. 중간에 텐트 등을 집으로 보내기는 했지만 가장 힘든 초반 코스를 무거운 짐을 지고 걸었다. 며칠 만에 아내인 웬디의 발에 거대한 물집이 잡혔다. 어쩔 수 없이 쉬어야만 했다. 이런 고난이 있었지만 이 부부는 무사히 종단을 마쳤다. 그 과정은 물론 간단하지 않았다. 벌레와 곤충과 추위와 통증과 힘겨움 등을 견뎌야 했다. 읽으면서 간접적으로 그 기분이 느껴졌고, 순간적으로 왜 이렇게 힘든 도보 여행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여행은 웬디가 바라던 것이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5년 동안 영어 선생을 했다. 대단히 활동적인 여성이다. 낯선 외국이란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의 국토대장정처럼 영국에서도 이 종단을 꽤 많은 사람이 시도하는 모양이다. 반대 방향으로 걷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 종단이 끝날 무렵 이들의 몸 상태는 최고조에 달했다. 초반보다 편한 길은 몸을 더 가볍게 한다. 중간에는 자신들의 예산을 생각하지 않고 텐트도 보낸다. 숙소와 먹는 것이 좋아지면서 상태도 좋아진다. 적지 않은 나이고, 긴 시간 동안 걸은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열정과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그저 담담하게 적어나간다.

 

모두 여덟 코스로 나누었다. 각 코스마다 철학자 한 명씩 넣었다. 하지만 그 철학자 한 명이 그 코스 전체를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걸으면서 느끼고 깨닫고 배운 것들을 철학자나 시인의 글을 통해 적절하게 풀어내었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기획하고 걸은 길이 아니다 보니 이런 구성이 되었다. 에피쿠르스에서 장 자크 루소까지 이어지는 이 여정을 이들만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읽으면서 동양에 대한 약간의 환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철학자와 하이쿠 시인 바쿠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이런 생각이 또 다른 편견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여행을 떠나기 전 이들은 앞으로 겪을 시련과 고난을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욱신거리는 등짝과 물집 잡힌 발바닥 때문에 낭만이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힘든 여정을 지나면서 몸은 환경에 조금씩 적응을 하고, 조글을 걷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생각한다. 어떤 순간 육체적 도전은 그 이상이 무엇이 되었다. 종교인들의 순례의 열정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감정과 깨달음은 마지막 코스를 걷는 순간에도 변함없다. 이제 이 모든 길들이 하나로 다가온다. 부분적인 좋고 싫음이 아니라.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들의 만족감이 얼마나 높은 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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