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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도 함께
존 아이언멍거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1월
평점 :
책을 읽기 전 낯선 작가 이름과 약간 두툼한 분량 때문에 조금 걱정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책일수록 읽기가 더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 리뷰를 보니 대단히 평가가 좋다. 약간의 걱정을 덜었다. 현대 우화라는 평이 보여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낼까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런 걱정과 기대는 읽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걱정은 사라졌고, 기대는 충족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마무리로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읽으면서는 다양한 영화와 소설들이 떠올랐다. 소재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담는 방식이다. 액자 구성이지만 앞과 뒤만 현재고, 한 작은 섬의 고래축제가 어떻게 유래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은 과거 이야기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알몸의 한 남자가 세인트피란 바닷가 모래사장에 떠밀려오면서부터다. 벌거벗은 채 발견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고, 간호사가 인공호흡을 하고, 여럿사람이 협심해서 그를 옮긴다. 그가 바로 조 학이다. 런던의 투자은행의 애널리스트다. 그의 전공을 보면서 현재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많이 찾은 전공자가 수학자란 말이 떠올랐다. 분석가답게 그는 시세와 현황을 분석해서 딜러들에게 정보를 넘긴다. 특히 공매도 분야에서.
공매도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거래 방식이다. 얼마 전 한국도 이것으로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다. 내부거래만 주로 다루었는데 실제는 거래방식의 문제가 더 크다. 한국만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영국에서도 실행되는 모양이다. 물론 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공매도 방식은 똑같지만 현실의 적용과 규제가 다르다. 금융기법은 간단히 넘어가자. 조가 하는 일은 이런 공매도를 위한 분석을 돕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정보와 소식 등을 취합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나중에 정식으로 정한 이름은 캐시다. 이 캐시의 성능은 대단하다. 최고의 예측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현실의 시간이 세인트피란에서 흘러간다면 과거는 그의 회상 속에서 빠르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 경계를 구분하지 않았다. 섬세하게 읽으면서 본인이 구분해야 한다. 뭐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조가 이 섬에 오게 된 것은 바로 자신이 짠 프로그램 때문이다. 믿고 진행한 공매도가 엄청난 손실을 본 것이다. 이에 놀라 차를 몰고 가장 먼 곳으로 향했는데 그곳이 바로 세인트피란이다. 그가 바닷속으로 들어간 것도 사실 자살이 목적은 아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고래를 만난다. 나중에 이 고래가 세인트피란 바닷가 표류한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의 합심으로 해결한다. 이때만 해도 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펼칠지 예상하지 못했다.
성공한 애널리스트지만 그에게 다른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사장 루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인류의 종말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요구한다. 캐시의 새로운 모습이자 능력이다. 루와 조의 대화는 인류의 취약한 부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현실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다. 인류가 늘 공공의 목적을 향해 진심으로 힘을 합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루의 주장을 들으면서 과장된, 너무 암울한 예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조 자신도 이 이론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석유와 독감으로 인류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는가. 화석 연료가 인류의 순간적 퇴보를 가져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독감만으로 종말이라니! 좀비 영화라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세인트피란에서 조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외운다. 예전과 다른 삶이다. 그러다 다시 접속한 캐시에서 이상한 징후를 발견한다. 이때부터 그는 종말에 대비한다.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사용하여 장기보관 가능한 물품을 산다. 주로 통조림들이다. 쌀과 밀가루도 산다. 교회 종탑에 쌓는다. 그의 이론을 믿는 듯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때만 해도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생각했다. 실제 그의 상사였던 재니가 독감에 걸려 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분위기가 바뀐다. 그렇다고 좀비 영화 같은 장면들은 없다. 약탈은 있지만 이 섬의 선량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식량을 내놓는다. 단수와 단전으로 어려움은 더 심해진다. 이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기보다는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다. 308명의 적은 사람들이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들 속에 내재된 선량한 마음 때문일까?
종말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결코 이야기는 무겁지 않다. 유쾌하고 즐겁고 유머 가득하다. 최악의 상황은 펼쳐지지 않는다. 이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설 최고의 장면이 나온다. 크리스마스 대축제다. 사람들의 총에 맞아 죽은 고래를 요리하고, 가지고 있던 식량을 털어 옆마을 사람까지 초청해 파티를 연다.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작가는 조 학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고래와 함께 마을에 온 한 명의 이방인으로 기억할 뿐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 결코 잊지 못할 선물과 삶을 던져준 인물로. 액자 구성 속에서 풀어낸 것도 바로 이 조 학과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 속에서 이야기는 조금씩 변하겠지만 축제가 계속되는 한 전설이 될 것이다. 이미 그는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