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분의 일
기노시타 한타 지음, 김혜영 옮김 / 오후세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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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출간된 기노시타 한타의 소설이다. 이번 작품도 역시 재밌다. 그리고 이전 작품처럼 연극 무대를 보는 느낌이다. 현재의 시간을 먼저 보여준 후 이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서로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평범하지만 잘 짜인 구성으로 반전과 반전을 펼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작가의 장기가 아주 잘 발휘되었다. 개성 강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상황을 꼬고, 반전을 연속으로 펼치면서 다른 반전은 또 없나 찾게 된다.

 

제목 <삼분의 일>은 세 명의 은행 강도가 2억 엔을 훔친 후 분배하기로 약속한 몫이다. 그런데 이 분배가 쉽지 않다. 나누기로 한 것을 두고 서로 티격태격한다. 단순히 운전만 한 고지마의 몫을 낮춰야 한다고 슈지가 주장한다. 겐도 여기도 동조한다. 흔히 보는 갱 영화처럼 분배가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경찰차 소리가 들린다. 슈가 밖을 보기 위해 나간다. 이때 고지가 겐에게 이등분을 제안한다. 슈지를 죽여서 둘이서 1억 엔씩 갖자고 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다음에 벌어질 상황을 예상한다. 하지만 작가는 나의 예상을 산산조각낸다.

 

은행 강도 후 그들이 모인 곳은 슈지와 고지마가 일하는 카바쿠라 허니버니다. 슈지는 점장이고, 고지마는 웨이터다. 겐은 손님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세 명의 남자들이 은행 강도를 위해 모이기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슈지는 경마에, 고지마는 도박에 중독되어 있고, 겐은 사업이 부도직전이다. 모두 돈이 궁한 상태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빚이 있다고 은행을 털지는 않는다. 이런 은행 강도가 왜 벌어지게 되었는지 슈지의 실수와 마리아의 등장으로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카바쿠라 허니버니의 시간과 교차하는 과거를 통해 이 은행 강도 뒤에 숨겨진 비밀들을 하나씩 벗겨낸다. 하나의 반전 뒤에 숨겨진 하나의 사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단순히 배신의 연속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배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도 같이 풀린다. 카바쿠라 허니버니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이 무대 속에 나온 세 명의 배우들의 연극을 보는 느낌을 주는데 이것을 실제 의도적인 연출의 결과다. 작가가 노골적으로 이런 식으로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뒤에 드러나는 사실을 볼 때 그들은 연출가의 노련한 연출에 의해 자신들의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여기에 다시 반전이 펼쳐진다. 반면에 카바쿠라 이외의 장면들은 이 연출된 장면들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다른 반전을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무대 위 세 명의 강도가 속고 속이는 역할을 맡아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면 이들 뒤에서 상황을 꾸미고 연출하는 역할을 맡는 사람들은 각자가 바라는 마무리를 예상하면서 피날레를 기다린다. 그런데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 무대 위의 배우들이 그들의 연출에 반기를 든 것이다. 만약 조금만 실수해도 아주 끔찍한 보복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말이다. 무대 뒤 연출가 역할을 맡은 두 명의 악당은 아주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70 노구의 시부가키 다미코는 한니발의 역겹고 두려운 악의와 공포를 부분적으로 아주 잘 재현한다. 보면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이런 개성 강한 인물들이 어떻게 보면 평범한 세 남자를 극한까지 몰고 간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구석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 수도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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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슈라라봉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3
마키메 마나부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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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메 마나부. 두 권의 소설을 읽었지만 아직은 이 작가에 대해 잘 모르겠다. 모리미 도미히코가 첫 작품을 읽고 우와~ 했다면 이 작가는 세 권을 읽은 지금도 뭔가 확 끌어당기는 힘이 약하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이 이후 점점 취향과 멀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마나부는 책 읽는 날의 컨디션에 따라 바뀌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도미히코의 소설은 비채에서 나온 작품이 정점을 찍었다면 마나부는 아직 그 정점을 유보한 상태다. <사슴남자>를 읽고 난 후 결정이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사이 다른 작품이 짠~ 하고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마나부의 다른 소설처럼 이 작품의 등장인물도 초능력을 사용한다. 일본 최대의 호수 비와 호가 한복판에 자리 잡은 시가 현의 작은 도시 이와바시리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히노데 가문이다. 히노데 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을 이용해 장사로 큰 돈을 벌어 이전 번주의 성을 샀다. 이 이와바시리 성에서 히노데 가의 종주 가족이 살고 있다. 히노데 가문의 능력자들은 이 성에 와서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수련한다. 이 능력이 모든 히노데 가문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점점 그 능력자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주인공 히노데 료스케는 사실 가문의 능력을 거부한다. 이런 능력이 평범한 삶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에 따라 성에 와서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런데 그와 함께 다닐 종가의 아들 단주로가 아주 괴팍하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아주 잘 사용한다. 너무 잘 사용해서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리면 무시무시한 복수가 벌어진다. 그를 뚱보라고 부른 상급생을 농구대에 매달아 놓고 벌집을 풀어놓을 정도는 소소한 것이고, 예전에는 집 둘레에 해자를 팔 정도였다. 그의 집안과 그의 성격을 아는 동급생이라면 누구도 감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 가문에도 적수는 있다. 바로 나쓰메 가문이다. 이 집안도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능력은 물체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는 능력의 실체는 시간을 다루는 것이다. 이 가문의 장남 히로미도 료스케와 같은 반이 된다. 앙숙인 두 가문의 아이들이 같은 반이 된 것이다. 이 두 가문은 서로의 능력이 발휘될 때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이 소리를 듣고 서로를 방어한다. 그런데 이 두 가문의 능력은 바로 비와 호 주변에서만 발현된다. 이 능력자들이 이 호수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히노데 가문은 승승장구하고, 나쓰메 가문은 점점 몰락하고 있다.

 

이 세 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단주로는 료스케를 부하라 부르고, 료스케는 자신도 모르게 부하처럼 행동한다. 꽃미남인 히로미는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뚱뚱한 단주로 뿐만 아니라 료스케도 어떤 관심을 받지 못한다. 물론 시선을 끄는 것은 있다. 단주로와 료스케의 빨간 교복이다. 보통의 학교라면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이 도시의 히노데 가문이라면 가능하다. 이렇게 세 명은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얽히고설키게 된다. 그 틈새를 파고드는 여학생이 있는데 바로 교장의 딸이자 예전 번주였던 선조를 가지고 있는 나쓰메다. 단주로가 그녀의 재능을 사랑하고, 그녀도 같이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단주로는 나쓰메를 바라보고, 나쓰메는 히로미를 바라보는 관계가 형성된다.

 

단순히 이들만의 관계가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니다. 이들에게 공동의 적이 등장한다. 그는 바로 이전 번주의 후손인 교장이다. 그는 이 두 집안의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단주로의 아버지와 히로미의 아버지를 식물인간 같은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현대 의학으로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다. 이들을 되돌릴 수 있는 존재는 교장 밖에 없다. 교장이 바라는 것은 이 두 가문이 비와 호를 떠나는 것이다. 비와 호를 떠난다는 것은 바로 능력을 잃는다는 의미다. 앙숙인 집안 사이의 웃기고 황당한 대결이 어느 순간 무시무시한 생사의 결투로 바뀐다.

 

적지 않은 분량이다. 다양하고 재미난 캐릭터가 더 있다. 남들의 마음을 읽고 쉽게 조종하다 자신의 평화를 잃은 그레이트 기요코나 료스케의 스승이 되는 총총 씨나 단주로 등의 등하굣길을 담당하는 겐 영감 등이 바로 이들이다. 등장의 분량은 각각 다르지만 읽다보면 상당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제목인 슈라라봉이 어떻게 나왔는지 보여주는 장면을 볼 때 착각을 했는데 이 기묘한 발음이 어떤 느낌인지 알려줄 때 빵~하고 터진다. 허식적인 설명이 사라지고 솔직한 표현은 자리한 곳은 금방 납득이 간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다시 표지의 안팎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먼저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세 남자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중요한 인물들이나 물건 등이 같이 보인다. 가끔 표지가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표지가 그렇다. 그리고 아쉬운 점 하나로 꼽자면 영화로 나왔다는 사실과 그레이트 기요코 역이 후카다 교코란 것을 알고 배우의 이미지가 계속 떠올라 왠지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옛날 후카다 교코의 연기를 본 사람이라면 조금 공감하지 않을까? 앞부분은 조금 집중하지 못했지만 중반 이후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몰입해서 읽었다. 역시 구성보다 캐릭터가 더 강한 소설이라 유쾌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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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런과 모리스의 컬렉션
린 섀프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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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 묘하다. 포트 에세이란 말에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경매 물품만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경매물품이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말 우리가 그냥 버리는 것들도 상당하다. 간단한 메모지나 여러 곳에서 모은 돌 등은 보통 우리가 이사를 하거나 짐을 정리할 때 버리는 것들이다. 심지어 메일을 출력한 것도 있다. 뭐 특별한 내용이 담겨 있지도 않은데. 이런 물품들이 적지 않은 금액으로 올라와 있다. 이 물품 목록을 보면서 이런 것들도 사는 사람이 있나 하는 의문이 생겼다.

 

처음에 읽으면서 당혹감을 느꼈고, 목록이 이어지면서 단순한 물품보다 이것과 관련된 사진이나 메모 등이 있으면 가격이 더 올라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출력된 메일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물론 이것은 억지스런 이해다. 332점의 경매 품목 중 몇 개는 이 책에 사진이 없거나 경매가 철회된 것이다. 철회된 물건은 또 묘하게 뭘까 하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읽으면서 결혼식 초대장까지 10~25달러에 올라와 그 가격에 놀랐고, 운세놀이 모양으로 접힌 오이스터 바의 메뉴가 15~20 달러란 사실에 한 번 더 놀란다. 만약 여기에 둘만의 어떤 기록이 있었다면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모리스가 세계 곳곳 150개 호텔의 카드 키를 모아 둔 것을 보고 어떻게 체크아웃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혹시 이 카드로 그 호텔에 몰래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금방 몇 호실인지 표시가 없으니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레스토랑에 훔쳐온 후추통과 소금통을 경매 목록에 올려놓은 것을 보고 장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런 물건에 대한 느낌과 감상이 먼저 다가왔다면 그들이 남긴 메모와 글들에서 그들의 사랑과 이별의 낌새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저자가 이 책을 기획한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황당하고 장황한 경매 목록과 황당한 듯한 가격을 보면서 금방 이 의도를 깨닫기는 쉽지 않다.

 

단순한 목록과 그 속에 담긴 메모 등을 읽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기존의 독서법으로 다가간다면 정말 카탈로그 보는 것 이상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쪽지나 메모 등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그 짧은 글에서 이들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쉽게 읽을 수 있지는 않다. 그 빈 공간을 상상으로 채워야 하고, 그들의 감정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둘의 파국을 암시하는 글 중 앤 둘런이 레노어 둘런에게 보낸 편지는 헤어짐에 대해 아주 통찰적인 글이다. 26살 음식 칼럼니스트 둘런과 39살 사진작가 모리스의 사랑은 이렇게 끝난다. 머물러 있는 사람과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일해야 하는 남자의 사랑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순간에 보여준 그 감정은 짧은 메모 등에서 잘 드러난다. 다 읽은 지금도 표지를 보면 묘한 감정이 오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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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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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일곱 단편은 1980년부터 1982년 사이에 발표된 것이다. 하루키가 전업작가가 되기 전 작품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이 단편집은 그 당시의 글을 그대로 실은 것이 아니다. 작가의 전집이 나올 때 작가의 손에 조금 혹은 조금 더 많이 개작되었다. 개작된 내용에 대해 간단하게 알고 싶으면 책 마지막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참고하면 될 것이고,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인터넷서점에서 잘 검색되지 않는 초판본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띠지에 나오는 ‘작가의 전면 개고를 거친 완전판 출간!’이란 표현은 개인적으로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읽은 듯하지만 나의 저질 기억력은 이 책을 읽을 때 처음 읽은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어쩌면 처음 읽는지 모른다. 하루키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워낙 판본이 다양해서 헷갈릴 때가 있다. 집에 있는 책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 단편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읽는 동안 혹시 <양을 둘러싼 모험>과 어떤 연관성이 있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답은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거슬리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시드니에 사는 탐정이 엔화로 수수료를 받는 장면이다. 실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가의 말에 “어린이 대상 단편집에 실렸다”란 글을 읽고 금방 수긍하게 되었다.

 

작가의 말에서도 나오지만 이 글에 실린 단편들은 대부분 제목이 정해진 후 쓴 글들이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와 <땅속 그녀의 작은 개>는 예외다. 재미난 점은 <오후의 마지막 잔디>가 나온 후 장편 개작 요청을 팬들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루키의 몇몇 장편이 단편에서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당연하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느낌 감상이 뭔가 에로틱하면서 느슨한 기분이었는데 실제 뭔가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몇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 이것 때문에 팬들이 요청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의 분위기가 강하게 풍겨 그런 것도 있겠지만.

 

<땅속 그녀의 작은 개>는 눈으로 쫓다가 입으로 소리 내니 발음하기 상당히 어려웠다. 머리와 입이 꼬인 느낌이랄까. 비수기의 한적한 리조트호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화자와 한 여성의 짧고 강한 며칠이 아주 인상적이다. 자신의 일상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젊은 여자와의 만남을 다루는데 제목은 그녀의 이야기에 나온 사연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 허점투성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늘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면 필요를 느끼지 못할지 모른다. 화자가 그 젊은 여자를 리딩하는 장면은 이 단편의 또 다른 묘미다.

 

표제작 <중국행 슬로보트>의 제목을 읽으면서 중국으로 배를 타고 가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하루키는 배가 아닌 그가 만난 세 명의 중국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때, 대학 초 아르바이트 때, 스물여덟 살 때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중국인 동창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을 이야기하는 작가는 서른이 넘었다. 이 다른 연령별로 만난 중국인에 대한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는 중국에 대한 감상은 ‘너무도 멀다’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이야기를 끄집어 올려 풀어내는 그의 능력이 다시금 잘 발휘되어 있다.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는 판타지같은 이야기다.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해 써보고 싶다고 말하고 난 후 오고 가는 대화는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특히 “내가 왜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해 소설을 쓰려는지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에 대한 소설을 써야 하고, 그에 대한 소설을 쓰고 나면 그것 쓰는 이유를 설명할 이유도 이미 없지 않을까.”(54쪽)하고 말할 때 그의 소설 중 하나가 어디에서 시작하게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다른 작가들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이후 가난한 아주머니가 그에게 다가왔다가 떠나갔는데 이 존재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인다. 작가가 상당히 손을 본 작품이라는데 초판은 어떨지 궁금하다. 어느 문장이 새롭게 생겼고, 이야기의 흐름이 어디서 살짝 변했는지 알고 싶다.

 

<뉴욕 탄광의 비극>은 뉴욕 탄광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화자와 태풍이나 집중호우가 닥칠 때마다 동물원을 찾는 비교적 기묘한 습관을 가진 친구 이야기다. 하지만 기묘한 습관에 중점을 두고 펼쳐지는 소설은 아니다. 친구의 상복을 빌려 입고 장례식에 간다는 이야기가 몇 번이나 흘러나오는데 그 당시 죽은 몇 명의 친구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목도 그렇고. <캥거루 통신>은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재미난 실험이 담겨 있다. 백화점 상품관리과 직원이 잘못 산 판을 교환해달라는 고객에 대해 카세트테이프로 불가능하다는 회신을 한다. 그런데 그 회신이 골 때린다. 어떻게 보면 미친놈처럼 보인다. 카세트테이프 소설로 썼다는데 작가의 목소리로 이 소설을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뭐 일본어는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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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 제18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홍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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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마주 보는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외롭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을 끌고 나가는 주인공 이레나 그녀가 좋아하는 친구 율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율이가 바라는 사랑은 엄마의 사랑이고, 이레는 율이의 사랑을 바란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바라는 사랑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특히 이레의 경우 율이와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졌을 때 생길 아픔과 상실감을 먼저 생각한다. 이런 사랑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먼저 느끼지만 곧 공감하게 된다. 뭐 보통 이런 경우 가슴앓이만 하다 끝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소설은 서로 다른 곳을 보는 사랑을 다루지만 배경이 되는 설정은 대형마트의 골목상권 진출이다. 율이 엄마가 구멍가게를 하는데 동네 어귀에 대형마트가 들어선다. 대형마트 하나가 들어서면 동네의 조그만 마트는 대부분 문을 닿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율이 엄마는 매일 데모에 나가고, 가게는 율이와 이레가 본다. 이 시간이 이레에게는 행복한 순간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율이가 대형마트에 취직한다. 당연히 엄마 몰래 취직한다. 이 취직이 나중에 불러올 징후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곳곳에 나타난다.

 

어릴 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죽은 이레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엄마이자 아버지다. 그런데 할머니가 암에 걸렸다. 아주 슬픈 현실인데 할머니가 너무 쿨하다. 할머니와 함께 하는 몇몇 에피소드를 보면 이레가 얼마나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상실감에 빠진 그녀가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친다. 바로 취업이다.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한다. 이때 한 아르바이트가 눈에 들어온다. <들어주는 사람>이란 직업이다. 그녀가 생각한 것은 물건을 들어주는 것이었는데 실제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준다.

 

이레의 아르바이트는 사실 쉬운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한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어느 고객은 구멍 이야기만 하다 끊고, 어떤 고객은 불만만 토해놓고 끊는다. 각자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이야기를 밖으로 토해놓고 부담을 드는 것이다. 듣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이레에게는 이 일을 하는데 재능이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율이의 가출 이후 그를 찾아 떠나는 이레의 모습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문장과 사람들의 관계를 그렇게 무겁게 다루지 않는다. 현실의 무거움을 의도적으로 살짝 벗어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유심하게 이들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안고 있는 아픔과 고통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이레가 할머니와 함께 간 사이비 의료기기 판매소 풍경은 사랑도 관심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가 위로하고 위로받는 곳이다. 혹시 이레 할머니도 이곳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쿨한 할머니는 그냥 한 번 경험할 뿐이다. 아들이 자신이 싸우는 대형마트 직원으로 취직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계속 투쟁하는 율이 엄마의 모습은 강한 생명력과 함께 애잔함을 전해준다. <들어주는 사람>의 사장이 겪은 과거와 현재 직업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슬픈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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