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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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엄은 두 아이를 키우며 육아에 지쳐있었고 우연처럼 기적처럼 새로운 일을 제안받는다. 육아가 아닌 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미리엄을 일을 하기로 하고 보모를 구한다. 처음 누군가 타인을 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내 생활을 드러내야 하고 타인을 내 생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나타난 루이즈는 완벽한 존재였다.

희미한 그녀의 이미지는 절대 미리엄의 완성된 삶에 도드라지지 않았고 그의 육아는 완벽했으며 육아뿐 아니라 살림까지 반짝하게 빛을 낸다.

일은 성취감을 주고 삶에 여유를 주고 남편 폴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다시 충족된다.

모두가 루이즈 덕이다.

완벽한 일과 완벽한 가정 모두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루이즈 덕이며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나의 성공이고 나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완벽한 성취감앞에서 루이즈는 정말 소중한 존재이고 사랑스럽다.

 

그리스 휴가를 함께 다녀오고 난 뒤였을까

루이즈는 슬슬 완벽한 가정에서 이물감을 남긴다.

완벽한 화장과 옷차림. 티끌 하나 없는 살림살이. 부모보다 보모를 더 따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미리엄과 폴은 완벽한 삶을 위해 이제 루이즈를 덜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어서 루이즈가 없는 상황이 생생하게 상상된다. 쉽게 떼어낼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껄끄러운 것 그게 루이즈가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자기것을 가진 적도 없고 누군가와 친밀한 교류도 없이 딱딱한 자기 껍질에서 쉽게 나올 수 없었던 루이즈.

그녀에게 미리엄과 폴의 가족은 다정하고 완벽한 공간이고 관계였다.

그 관계속에 그 공간속에 내 자리를 갖고 싶다는 마음

어떤 것도 욕심내지 못했던 루이즈에게 그 가족은 가지고 싶고 속박되고 싶은 대상이다.

이제 떼어버리고 싶은 미리엄과 이제 들어가고 싶은 루이즈는 서로 타인이다

그리고 비극이 생긴다.

루이즈는 미리엄과 폴을 잘 알지 못했고 폴과 미리엄도 루이즈를 몰랐다.

가족처럼 격의없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건 찰라였고 여전히 타인이었다.

책을 다 읽고도 루이즈는 잡히지 않는다.

책 속에서 툭툭 던져놓듯이 순간을 빠르게 포착한 크로키처럼 묘사되는 루이즈는 조각조각 숨어있다. 그 조각들을 맞추어도 정말 중요한 단서들이 빠진 그래서 그 인물 전체를 볼 수 없는 상황, 사건을 앞에 둔 나나 경감처럼 여전히 그녀는 안개속에 있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알고 싶지 않다.

우리는 서로 관계가 없을 때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다.

나는, 그에게 타인이다.

그는, 나에게 타인이다.

그냥 아는 사이일 수는 있지만 알지 못한다.

어디에 살고 누구와 친하고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고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싶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다.

그가 내 영역에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듯 나도 그의 영역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타인을 알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사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모르는 것이 안전하니까

미리엄과 폴은 루이즈가 필요하다.

그들 삶에 쉼표가 필요하고 계속 원할한 지냉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더 할 나위없이 소중하고 필요한 루이즈지만 그녀는 나의 가족이 아니다.

그냥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딱 필요한 만큼의 관계를 원할 뿐이다.

루이즈도 자기를 모두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연기하고 있다.

만나고 걷고 생활하는 루이즈는 누구에게 자기를 보여주지도 않고 드러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같기도 하다.

그냥 혼자 견디는 것이 가장 쉬웠고 그냥 눈감는 것밖에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책을 다 읽고 우리는 폴과 미리엄을 알게 되지만 루이즈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녀가 스스로 말을 해줄지 아닐지조차 미지수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녀를 모른다.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궁금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것

그에 대한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이 나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고 내 정서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은 두렵다.

모두 외롭게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면서 동시에 알지 못하길 바란다.

같은 마음으로 그를 알고 싶지만 아는 것이 두렵다.

가끔 나도 루이즈처럼 나를 증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이렇게 점점 희미해져서 사라지면 좋겠다 라는 마음과 그러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내 속에 있다.

 

타인을 알고 싶어하지 않은 마음이 상대에게 닿아 상처가 된다.

상대에게 닿아 그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 역시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누구도 폭력을 의도하지 않았으나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다.

불안하고 두려운 개인들

다른 누구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버거운 개인들이 자꾸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미리엄의 불편과 이질잠이 루이즈에게

루이즈의 지나친 친절과 완벽함은 미리엄에게 깊이 숨겨진 불안이 건드려진다.

엄마의 위치를 침범당하고 있다는 두려움 불안과 다정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은 소망

그 두가지 욕망이 충돌되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서로에게 주지도 않았던 상처를 받는다.

 

타인을 안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의 바운더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동시에 타인을 수용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무심히 읽은 책인데 불안하고 두려워서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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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낮잠에서 꺠어나도 여전히 해는 마루 깊은 곳까지 닿아있었다.

집안은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걸까? 설마 어린 딸이 잠든 동안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걸까

끝방이 시끌한 걸 보면 고모들은 있는 모양이다.

고요한 마루 끝에 놓인 요강에 엉덩이를 댄다. 차가운 감촉에 순간 몸을 부르르 떨다가 괜히 마루 끝에 닿은 해가 미워졌다.

그리고 나는 어떤 아주머니에게 손목이 잡힌 채 골목을 걷는다.

아직 낮잠의 한 꼬리가 매달려 있는 멍한 상태로 골목을 걷는다 그리고 어느 집에 닿았다.

생일파티가 한창이었다. 이미 한참이 지난 상황인지 케잌은 적당히 흐트러져 있고 먹다 남은 음식들도 있고 아이들은 누가 새로 오든 개의치 않고 떠들썩하다.

**왔어.

힐끈 보고 인사를 했던가 아이들은 다시 놀이에 빠지고 나는 희미해지는 낮잠의 끝을 닦아내고 있다. 아주머니가 음식을 챙겨 주셨다. 일단 먹고 놀자.

그리고 나는 멍하니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늦게 초대되어 그 자리에 그냥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집은 가족들로 가득찼고 시끌거렸고 여전했다.

오늘 하루의 내 일상이 꿈이었는지 뭐였는지 아리송하다.

내가 그 생일에 가고 싶었던 걸까? 그건 언제 약속된 거였지? 대부분이 남자 아이들이었는데 내가 왜 초대된걸까? 친하지도 않았었는데

싫다고 말할걸 그랬나? 안갔더라면

어쩌면 오빠네 가족이 다 부재중인 휴일 한 낮 어린 조카 하나만 보내면 자기들끼리 재미난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고모의 술책이었을까?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낮선 시간 낮잠에서 깨서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혀 골목을 걷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어울리지 않은 멍한 표정으로 케잌을 퍼먹고 있는 내 모습이 참 도드라지게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슬펐다. 이유는 모르겠다.

 

# 2.

그 때 이모집에 가면 늘 돈가스를 해주셨다.

냉동식품이 아니라 고기를 두들기고 밑간을 하고 밀가루 달걀 빵가루를 입혀서 튀겨낸 돈가스였다. 그 때 사촌언니 오빠들은 이미 고등학생이어서 함께 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뭔가 모르고 고요하고 엄숙한 그 집에서는 마땅히 몸을 숨길 공간이 없었다.

돈가스는 이모네 아주머니가 만들었는데 나는 그때 마다 빵가루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시판 빵가루가 아니라 먹다 남은 식빵을 채에 문질러 가루를 만드는 과정 나는 늘 채를 앞에 놓고 빵을 문지르며 가루를 만들었다.

그때 나의 언니와 동생은 어디에 있었을까?

늘 공부하고 있던 사촌들과 함께였는지 아니니 모르겠지만 돈가스를 만드는 부엌엔 없었다.

나만 늘 빵가루를 만들었었다.

어른들이 지나가는 말로 잘한다 잘한다는 말에 신이 났던 걸까?

이건 **말고는 할 사람이 없네 니가 제일 잘한다.

그리고 이모가 몰래 찔러주던 오백원짜리 지폐에 맛을 들였던 걸까

왜 나만? 이란 마음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늘 내가 그 담당이었다.

그런 어느날 어디서 마음이 삐졌는지 오늘은 하지 않을거라고 고집을 피웠다.

뭐 할 수 없지.. 내가 동참하지 않아도 돈가스는 완성되었는데 왠지 죄스럽고 이 돈가스를 내가 먹어도 될까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완성되는 돈가스가 실망스러웠고

내가 마땅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한 마음

다들 아무렇지 않게 잘 먹었지만 나는 쉽게 넘기질 못했다.

그런데 더 슬픈 건 아무도 나의 그런 심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빵가루를 만들었다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다.

 

# 3.

언니가 집을 나갔다. 외치에서 머리통이 큰 동생들과 다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언니가 집을 나갔다. 고만고만한 나이의 형제들은 위 아래가 있더라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있다. 위면 어떻고 아래면 어떤가 하는 마음에 서로가 무시하고 막대하는 시절

사실 우리는 언니가 가출했다는 것도 몰랐다. 그냥 잠깐 나갔나보다 그랬던 거 같다.

그리고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니들이 어떻게 했길래 그 착한 &&이 집을 나와?

니들은 언니가 가출했는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수가 있니?

평소 화를 내지 않은 이모가 쏟아내는 말을 고스란히 들으면서 왜 가출을 했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언니는 언제나 옳았다. 언제나 착했다. 더할 나위 없는 첫딸이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동생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뭐든 나서서 주도하고 챙기는 성격

그래서 동생들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뭔가를 주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시키는 것을 하거나 싫다고 하거나 두가지 중 하나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렇게 착한 언니는 어른들에게도 잘 해서 인정 받았고 그 덕에 우리는 늘 철없고 생각없는 동생이었다. 나이가 얼마가 되든..

그렇게 착한 언니가 참고참다가 화가나서 가출을 했으니 어른들이 보기엔 우리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가짢고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때 언니랑 무슨 갈등이 있었는지 왜 다퉜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언니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언니는 옳은 말을 했을 것이고 우리는 무시하거나 거부했거나 했을 것이다.

문득 그 때가 생각나면서 뒤늦게 억울했다.

무엇이든 항상 옳고 바른 사람이 있고 항상 틀리고 나쁜 사람이 있구나

착한 언니가 디폴트값이 되면서 우리는 늘 상대적으로 덜 착하거나 나쁜 사람이 되었다.

언니랑 의견이 다르거나 언니의 말을 거부하거나 언니를 화나게 하는 건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누구나 착하다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사람 그 사람의 그 강한 자부심이 때로는 주위사람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언니를 욕할 수 없어서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약이 올랐던 어리고 젊었던 내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때 나도 참 힘들었겠다고 토닥거려주고 싶었다.

 

# 4.

“한 번도 감정이 드러나는 걸 본 적이 없어”

이게 칭찬일까?

나를 소개하면서 선배가 한 말이다. 좋다고 막 들뜨는 성격도 아니고 힘들다고 티나게 가라앉는 성격도 아니고 늘 그만큼 담담하게 다르지 않게..

감정을 그렇게 조절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그건 내가 내 감정을 제대로 몰라서였다.

누군가 내 영역에 들어오면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그가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는게 먼저 눈에 띄어서 나쁜 의도도 아닌데 화를 내거나 그걸 표현한다는 건 너무 심한게 아닌가 하며 스스로 마음을 검열하고 차단한다.

너무 신나는 일이 있어도 그걸 표현하는 건 자만 혹은 뽐내는 일처럼 보일까봐 아닌 척 하느라 가끔 상대를 실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뭘 해줘도 좋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위로 뾰족하게 솟은 부분을 깍아내고 아래로 깊게 박히고 싶은 부분을 깍아낸다.

결국 뿌리를 내릴 수도 없고 위로 솟아 뻗어나갈 수 없는 나의 감정선들은 물속에서 흔들리는 부초처럼 그냥 그저 떠돌아 다닐 뿐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단단하게 어딘가 묶여져 있다. 어디에 옮겨 심기든 상관없는 상태에서 흔들려 흘러가버려도 안되게 단단학 붙잡고 있는 것 마치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도 잡지 못한 채 반동으로 흔들려 누군가에게 닿아도 안되는 상황에 몰린 것처럼

아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모양이다.

한동안 감정이 단단하고 잘 조절 할 수 있어서 이성적이라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감정은 늘 이성에 비해 하위 개념이라고 믿었고 감정을 주체못하는 걸 비웃었고 무시하면서 스스로 단단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자부심으로 느꼈다.

그렇게 안으로 허물어지고 텅텅 비어간다는 걸 몰랐다.

 

# 5

상처에도 경중이 있다고 믿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어디선가 기대고 싶을 때 누군가 더 큰 상처를 드러내 보이면 쉽게 내 상처를 안으로 숨겼다.

겨우 이런 일로 징징대면 안되는 거야

우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죽고 싶다는 생각이 사소한 상황에서도 불쑥 생겨났지만 그건 잘못된 거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봉인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으니 역시나 과장된 생각이라고 믿었다.

늘 나의 상처를 나의 힘듬을 그 자체로 보지 않았다.

저 사람보다 얼마나 큰가 작은가? 늘 비교하는 대상일뿐이었다.

정말 문제는 내 상처는 누구의 것보다 너무나 작았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비틀대는 이유는 내가 약하기 때문이고 내가 징징대기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나에게 너무나 엄격하게 판단했다.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닌데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이를 그만큼 먹어서 이정도도 못 견디면 안되는데

부모가 되어서 먼저 힘들다고 지치면 안되지

가족이라면 함께 견뎌줘야 하는 거 아닐까?

내 욕구와 나의 마음은 늘 쉽게 잊혔다. 그렇다고 타인을 깊이 공감하며 들여다 볼줄도 몰랐다. 사실 나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도 볼 수 없다는 걸... 나는 늘 모르고 살았다.

내가 받지 못한 공감을 내가 나에게 해주지 못한 배려를 타인에게 할 수 없었다.

늘 고대로 따옴표로 가져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 써도 이상할 것 없는 입에 발린 위로와 공감만 남발하고 있었다.

공부가 힘든 아이에게

친구관게게 힘든 이들에게

가족에게 상처받은 누군가에게

늘 어디든 쓸 수 있는 공감과 위로의 말들 하나도 깊이가 없어서 그저 상투적이기만 한 그 말들 이외 나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듣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아파서 너무 힘들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가득한데 그걸 표현할 줄 몰랐고 오히려 너무 아파서 타인을 외면하고 싶었다.

고통의 치료는 샐프로...

나도 말하지 않는데 너도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딱 그마음 그렇게 점점 체온이 내려갔다.

웃기는 건 그러면서 난 참 나에게 공감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싫은 말 하지 않고 잘 들어주고 (거의 반이상은 딴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내주는 것

단 그게 전부였다.

딱 이마에 붙여서 가지고 있다가 등을 토닥이며 돌아서는 순간 그대로 냉정하게 떼어 버리면 그만인 만큼만 상대에게 곁을 내주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상처받고 힘들고 싶지 않아서

왜나면 나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할 줄 몰라서..

 

# 6.

 

윤성희의 소설들은 참 이상했다.

이 소설은 절대 영화가 되거나 드라마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도데체 사건이 나오질 않는다. 극적인 상황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내가 먼저 지쳐버리는 너무 손에 땀이 나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든다.

인물의 어떤 감정이나 느낌은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전혀는 아니더라도 거의 표현하지 않고 인물들의 상황만 나열하는데 그 상황이라는게 두서가 없고 개연성이 없다.

누군가를 만나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게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아픔이 있고 순간의 결정이 돌이킬 수 없었던 경험이 있고 이젠 잃어버린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만 그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결함들일뿐이다.

하지만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경험들을 따라가면서 자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그가 잘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된다.

 

어릴 적 드라마에 출연해 진구라는 역할을 했었던 형민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형민과 토크를 하던 아나운서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형민의 아내, 형민의 딸 형민의 딸의 친구 형민 아내의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형민의 직장 동료들, 출퇴근 시간에 만나는 토스트 포장마차 사람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무슨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처럼 줄줄이 나열된다.

이건 드라마가 될 수 없다.

뜬금없이 전편에서 스쳐가던 사람이 여기서 불쑥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가 특별하지도 않고 제대로 된 결말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다음편에서 누군가가 불쑥 마무리를 할 수 없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므로

드라마속 어린 진구는 참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묵묵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가족을 돌보고 의젓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런 진구의 성향은 아마 형민에게서 왔을 수도 있고 형민에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고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그건 대단한 유혹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내가 드러내 보일만한 것이 없을 경우 괜찮다는 평판만큼은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형민과 연결된 모든 사람들도 그랬다.

괜찮은 사람이었고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입히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

사람이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눌 수 없다 그렇게 나누겠다면 한 사람이 절반으로 나뉘거나 세토막 네토막 심지어 잘게 쪼개져버릴 수 밖에 없는 것

그게 사람일 것이다.

형민도 그렇게 하영이도 그렇게 모두가 그렇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다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과 무게는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사람은 좋은 사람은 알아보지만 그 사람이 견디는 무게는 알지 못한다.

스스로도 알지 못할진데 타인이 어떻게 알까?

 

# 7.

그가 어떤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별 거 아닌 기억일 수도 있고 차마 꺼내기 힘들어 지워버린 고통일 수도 있고 쉽게 잊힐 것 같지만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할 것이다. 무심하게 흘리는 별 거 아닌 이야기가 타인인 내개 깊게 박히기도 하고 힘들게 힘들게 꺼낸 이야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날아가버리기도 한다.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몹시 아프다.

그냥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은 사람이고 싶었다.

좀 쉽게 살고 쉽게 무뎌져서 흔한 그래도 편한 사람이었으면 했는데

자꾸 부끄럽고 미안하고 어쩔 줄 모르는 이 마음이 너무 무겁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마치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처럼”

형민이 미안하다는 마음을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할 줄 알아서 그래서 미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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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9-12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희망님, 추석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추석 보내세요.^^

푸른희망 2019-09-13 20:40   좋아요 1 | URL
늘 상냥하시고 부지런한 서니데이님~ 명절 잘 보내시고 계신가요?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계속 기다립니다~^^
 
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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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여사의 공감은 이때도 여전했구나. 형사 목격자 탐정 피해자 그리고 살인자의 지갑들이 각자 주인의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자의 입장이 있고 맥락이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목격자 형사 탐정이 되고 누군가는 살인자가 된다. 맥락은 공감하지만 행동은 책임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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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무더위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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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플레져가 일본 장르소설 읽기인데.. 이 취미도 나이를 타는 모양이다. 피식피식 웃으며 가볍게 읽기 좋은 작가의 작품인데 자꾸 짜증이 나는건... 호르몬의 문제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더워서는 인간의 머리도 대개는 이상해진다. 이 말이 딱 어울리는 독서경험. 책은 죄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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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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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나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은 각각의 '나'들이 찾아야 한다. 이 '나'들은 문화와 관습이 정해주는 자리가 아닌 충분히 다른 세계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남성적'나;들이 보편적인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 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확장하길 갈망한다. 자신의 쾌/불쾌가 사회적 옳음 /그름과 일치해온 사람일수록 제 기분에 의지해 사안을 판단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여자의 감정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과 자리를 벗어나면 부정적인 의미로 감정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여자의 감정은 정치화 되지 못하고 해석당한다.여성의 연대와 목소리를정치행위로 보지 않는 게 문제다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기존에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문제를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하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p10 <들어가는 말: 보편의 제구성>

 

 

 

칭찬은 일종의 권력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이다.나는 너에게 칭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너는 나에게 칭찬을 '받는'사람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칭찬하지 않는다. 칭찬은 아랫사람을 인정하는 행위로 구축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칭찬을 받으려는 아이. 주인의 칭찬을 받으려는 반려견,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려는 칭찬은 아랫사람이 갈구하는 당근의 역할을 한다. 뒷사람은 칭찬을 통해 계속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라는 압력을 넣는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평소에 좋게 봤는데'와 같은 말을 덧붙여 비난한다.

칭찬은 평가의 다른 방식이다

                                                p26 < '진짜'는 없다> 

 

 

 

'진짜' 페미니스트를 강조하지만 때로'진짜'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언어다. 넌 늘 화가 나 있는 '진짜'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이다.불편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를 선호하는 이들은 사회 개혁보다는 페미니스트 재교육에 관심이 많다.페미니스트 감별사가 되어 페미니스트를 얌전하게 길들이려 한다. 태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내용을 무시할 수 있어서다. 나에게공손하기만 하다면 너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너의 말을 교양있게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p28 <진짜는 없다> 

 

진짜(좋은)와 가짜(나쁜)에 대한 구별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이는 순수와 비순수 곧 순수와 오염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며 그것은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참된'민족과 '참된' 문화와 '참된' 공동체 그리고 폄하하고 공격해도 문제되지 않는 '참되지 않은'타자들이라는 대립구도를 구축하는 전략을 나는 곰곰히 들여다 보았다. 순수, 진짜 참됨을 향한 숭배는 극우의 정신에서뿐 아니라 많은 운동 진영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짜인 우리와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저들을 만들어 저 타자들을 축출의 대상으로 삼는다. 진짜 페미니즘에 대한 점검은 꾸준히 헛수고가 될 것이다. 동시대 페미니즘은 꾸준히 남성혐오로 번역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성정은 죽어야 증명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란 자신의 현재를 방해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이다.

                                       p49 < 진짜는 없다>  

 

완벽한 진짜만 허락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과 충돌을 통한 성장을 억압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진짜 길만 있는 사회보다는 여러 종류의 다른 길이 있는 사회가 옳다. 물론 '잘못된' 길에 이르거나 위험한 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길을 더럽힐 수도 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반복하며 길을 알아갈 권리가 있다.누구도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실패를 쌓아 균형을 만들 권리가 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하면 영영 고립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

                                                          p42

 

 

지금 여기에는 항상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권력이 지배자다. 나중은 실체가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결국 영원히 나중이 된다. 그렇게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 점령당한다.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순간은 나중으로 밀려나는 목소리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리도록 만드는 그 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이들이 바로 사회의 약자다. 소수자들의 저항축제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시적 해방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현재는 그토록 귀하며 여기의 안전은 언제나 불안하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 지금보이는 몸짓을 막지 말아야 한다.재발견의 번거로움을 남기지 말고 지금 여기의 존재를 억압하지 않으며 그 목소리를 묵살시키지않는 것이 최선의 진보다. 우리는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p52 

 

 

여성다움은 대부분 무시당해도 가만히 있는 성질이다. 이를 '다소곳한''참한' '청순한'  '얌전한'  '순한'   조용한' 등의 형용사가 대체 하고 있다. 성희롱앞에서도 여성들은 가해자를기분 나쁘지 않게 해야한다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남자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졌다. 여성의 일상에서 '남자에 대한 무시;라고 규정되는상황은 셀 수 없이많다. 자기 생각을 말하면 '기가 세고 설치고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 여자가 된다. 가해자의 무시해서라는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여성의 행동에는 토를 넘는 이나. 지나친 이라는 말이 곧잘 붙어다닌다.그렇기에 공개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툭하면 페미나치라는 소리를 듣는다. 페미나티는 저항의 언어를 뒤집어서 저항하는 자를 도리어 가해자로 만드는 대표적인 언어이다.진보정당의 계시판에서페미나티라는말이 여성들을 공격하기위해 등장해도  이는 사회적 문제가 되지 못했다. 다른 큰 일도 많은데 여자들이 너무 설치기 때문이다 저항은 조롱당하고 무시와 무지 속에서 목소리 자체가소거당하고 있는대도 올바른 목소리만 허락하겠다는 올바른 사람들의 진보는 대부분 여성의 삶과 무관한 진보다.

 

                                          p64 

 

존중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이 기본적인 태도가 당연하지 않다보니 여성을 존종할 줄만 알아도 특별한 남성이 된다. '남성다움'에 는 여성에 대한 지배가 포함되어 있기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존중은 종종 사회적으로 무시당한다. 남성은 여성을 존중하지 않도록 부추긴다. 아내를 존중하는 남성을 남자답지 못한 인간으로 보고 남성연대에서 탈락시키려 한다. 남성이여성을 존중하기 어렵고 또 존중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걸레는 여성의 경험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언어다.걸레는 낡고 냄새나는 더러움의 상징이다.걸레, 곧 경험있는 여자는더럽다는 낙인이 찍힌다. 처녀성에 대한 집착은 여성에 대한 소유욕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의 경험이 남성의 기능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p 71 <몸이된여성들> 

 

여성의 다양한표현과 다양한 모습의 재현은 기존의 체제를 위협한다. 여성을 단지 '자궁으로 여기는 것은  여성의 생각과 인격을 무시할 수 있는 흔한 방법이다. 돌아다니고 말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자궁~ 남성의 시각에서 자궁은 생각이 없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곳은 힘들고 외로울 때 돌아갈 수 있는 장소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가두는 공포로 탈바꿈 해 억압할 수 있다. '이빨 달린 질'은 오래된 신화다.

 

어머니= 대지 라는 공식에 따라 한국의 민중미술에서도 여성은 대지로 표현되었다. 대표적인 민중미술가 임옥상의 <대지의 어머니>는 가슴이 축 늘어진 나이든 여성이 상반신이 땅에서 올라온 모습이다. 땅과 여성이 한 몸이되어있다. 이 여성의 몸에서는 고단한 세월이 느껴진다.작가는 이 작품을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 기증했다. 이 작품을 본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작가는 땅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을 의도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나체의 상반신을 드러낸늙은 여자의 형상은 생명력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였다. 어머니= 대지= 생명력의 공식은 그 대지에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감정 이입하는 사람의 시각일 뿐이며  대지와 동일시되는 사람의 시각은 아니다. 나의 땅은 생명력있는 대지이지만 남의 땅은 빼앗아야 할 장소가 되고 주인 없는 땅은 정복의 대상이 된다.

                                  p 91 

 

여학생 휴게실이나 여직원 휴게실이 있는 이유는 여성을 위한 특혜가 아니다.여성이나 성소수자가 보편적인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 장소를 이용하는데 불편함을 겪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 폭력을 방지하는 대인일뿐 특혜와는 전혀 무관하다 여성의 장소는 자꾸만 제약을 받고 침범 당한다. 화장실 몰카라는 성폭력은 바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침략행위이다.남성은 여성의 몸(공간)을 침범해그공간을 채우고 장소를 점령하려 한다. 그래서전쟁은 반드시 강간을 동반한다.

                         p123 

 

 

근대 도시는 공공장소와 집을 공과 사의 영역으로 구별했다.정숙한 여성들은 사적인 집 안에 있어야 했고 남성들은 거리와 바에서 시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밤에 거리를 걷는 독신 여성은 성매매 여성으로 오해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여성이 체면을 유지한다는 것은 공공장소에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편안할 안은집에 있는 여성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집에 여자가 있어야 남자가 편하다는 의미다.

                                    p 143

 

 

여성은 집사람이다. 집은 돌아다니지 않는다.과거의 쓰개치마, 전족, 남자를 동반하지 않는 해외여행 금지 등에는  모두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일부 나라에서 부르카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집은 과연 여성에게 안전한가 밖에서 여성이 보이지 않길 바라는 사회일수록 여성에게 집이란 공간은 많은 차별과 폭력을 은폐하는 장소가 된다.

 

                         p 208 <같은 공간 다른 자리>  

 

 

이주는 제 주변을 구성하는 인간관계와 환경, 기후, 음식, 때에 따라 언어까지 바뀌는 일상의 자각 대변동을 몰고 온다. 상실로 채워지는 이주는 한편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꾸준히 되묻는다.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스튜어트 홀의 주장대로 특정한 역사  곧 장소와시대속에서 자리매김되어  형성된다

특히 여성에게 이주는 인정과 젠더의 정체성을 둘러싼 질문의 무게를 가중시킨다. 나의 젠더와 국적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환경은 나의 기원에 나를 꾸준히 묶으려 한다

 

 

 

부모가 그러면 안되지 않아?

엄마가 그러면 안되는거지. 친엄마라면 그러지 않았을거야. 자격이 없지

무슨 엄마가 그래?

여자가  그러는  거 말이 안되지.

그래도 여잔데 그건 아니지 않아?

말이?

행동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있고 그 이유로 마땅히 그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

뭔지 모르지만 기대하고 있는 기준에 맞지 않다는 말이겠지

상식이고 보편이라고  기대하는 것들을 뒤집어 보면 그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고 편견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문제는 차처하고 가장 궁금한 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기준은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라는 거다.

누군가가 누군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은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조항이며 동시에 '누군가'가 아닌 ' 또 다른 누군가'의 불편과 차별을 바탕으로 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명제는 옳을까 그를까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는 건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별의 문제이고  취향의 문제이며 내게 기대되는 역할의 문제도 다 포함하고 있다.

다수의 편의를 위한 마땅함들은 누군가 보이지 않는 이들의 희생과 무시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를 두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주로 소수자일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일

세상이 기대한다고 말하는 진짜는 누가 정해놓았을까?

고백하자면  그렇게 누군가가  누군가 (분명 전체를 위한다고 믿으면서도  일부만 편한) 를 위해 만들었다는 규칙에 맡기는 일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

내게 거슬리는 건 그건 상식이 아니라고  맞지 않는 일이라고 탓해버리면 되거든

왜 그러느냐고 한다면  원래 그런 거잖아. 라는 말이면 누구든 입을 닫게할 수 있거든

 

학생답지 않잖아.

그것도 여학생이 그렇게 앉으면 안되지.그렇게 말하면 안되지.남들이 어떻게  보겠니?

그 말을 뒤집으면 너가 그렇게 하는 게 나는 거슬리고 너의 거슬리는 행동으로 내가  욕 먹는건 딱 싫다. 이런거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면그냥 욕하거나 모른 척 하면서  적당히 무시할테고

나랑 상관있는 사람이라면  너를  위한 말이야라고 하면서 위하는 척  생각해주는 척 하며 니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마음을 감추기 딱 좋은  세상의 기준들

 

진짜 감별사들은 세상에 너무 많아

점점 세분화 됨면서 개인 자격이라도 있는것 처럼 진짜 다운 걸 가려내는  사람들

자식답게

학생답게

신입직원답게

아르바이트답게

후배답게

주로 이렇게 엄격한 기준은 나보다  약하고 만만한 사람에게 향하기 마련이고

간혹 위를 향하는  기준은 그들의 꽉 막힘이  꼰대같은 행위들을 이해해주라는듯  마땅하다는 걸 말하는 기준으로 쓰이곤 하지  (물론 모두가 그렇진않지만...)

 

페미니즘을 알든 모르든  누구나 조심스럽게

"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

"내가 꼭 페미니즘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덧붙여 의견을 말하는 것이 예의고 동시에 자기를 보호하는 막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차별은 싫고  삶에서 여러가지 억울한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그래도  튀고 싶지 않은 마음

누군가에게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결국  누군가 타인에게 기준을 맡기게 되는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믿고 있더라도  그래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렇게 행동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입을 다물고있어도 될까   예쁘게 화장하고 샬라라 옷을 입고 누군가에게 얘교있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고 적당히 보호 받고 싶고 모른 척 하고싶은 마음을 가져도 될까?

누가 하는 말처럼  내가 필요할때 필요한 카드를 적당히 뽑아 쓰고 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자꾸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당당하고 솔직한 타인이 나랑 상관없을 땐 멋지다고 하면서

내 가까운 곳에서 그렇게 나랑 비교될것 처럼  보이면 그냥 이유없이 미워지고 너무 나대고 설친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밉상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터무니 없이 화가 나는 부분은  주로 이런 것이다.

내가 살면서 너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점이 지금 이 시간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

그땐 사람들이 좀 무지했고 생각이 짧았고 너무 오랫 관습때문에 잘못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정보에도 접근이 가능하며 한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빠르게 의도와는 상관없이도 전파되는 세상에서 그리고 누구나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어쩌면 시끄럽고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여전히 누군가는 불공정함과 공포와 내가 책임 질 수도 없고 질 필요도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형태는 조금씩 진보하고 변할 뿐이다.

그저 치한이나 변태들이 어두운 골목을 돌아다니던 시절에서 이제는 내가  당연히 이용해야하는 공공시절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지울수도 없고 쉬지도 않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곳에서 나는 영원히 누군가에게 노출될 수도 있다는 것

공포의 불안은 진화하는데

그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여전히 없다.

차라리 그 시절의 변태나 치한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이 이렇게 여전할 줄 알았다면 이렇게 더 치밀하게 치사해질 줄 알았다면 후손을 남기지 말고 그냥 삶의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지는 것을 택했어야 헸는데...

조심하며 살아온 내 시간만큼 내 아이들도 조심해야 하고 더 조심해야 할 목록이 늘어나고 있다면 이건 도데체 뭐라고 해야할까?

 

 너는 진짜냐? 고 묻는 이에게 나도 묻고 싶다.

니가 생각하는 진짜는 도데체 뭐지?

그 진짜가 진짜로 진짜라고 믿는 너는 진짜니?

이 무슨 말장난같은.....

 

이제 무얼 읽어도 시원해지는 건 점점 줄어든다.

세상은 점점 엉망이고 막장을 향해 달려가는 아침 드라마같고

그러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나의 무능일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아프고 먹먹한 이야기에서 그래도 실날같은 무언가를 잡아야 하는데

그냥 사는게 두렵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보라고  아이들을 채근하는 내가 무섭고

그렇게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뭐.... 복잡한 마음 뿐이다.

 

올 여름이 너무 덥지도 않았는데

이제 갱년기에 접어들어서일까?

무얼 읽어도 다 깝깝하고 쉬이 지친다.

이건 책의 문제오 아니고 날씨의 문제도 아니고 그저 아직도 막막한 이 세상의 문제 8할에 개인적인 호르몬의 문제가 2할인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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