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교실에 들어오다 - 학교 안 혐오 현상의 실태와 대책
이혜정 외 지음 / 살림터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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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지금 어떤 시민을 길러내는가?

학교는 모든 구성원에게 안전한 학습의 공간인가?

학교는 한 사람의 학생도 차별없이 안전하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권리와 창구가 존재하는가?

 

학교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여전히 학업성취 대학입시 교육의 성과와 능력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소수자의 문제는 여전히 소주의 문제이며 주요 핵심이 아닌 논외거리일 뿐이다.

 

 

학급에서는 학업성취나 온라인 게임에서의 능력 좋은 성취를 얻지 못하는 것 모두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무엇인가를 잘 못하는 것이 혐오의 잉가 되는 학급 문화는 일의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 여기는 문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무능력이 곧 혐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기가 많은 남학생은 성적과 상관없이 학급내 상호작용에서 우위를 점한다. 학교의 공식적인 질서와 학생들간의 비공식적인 질서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누군가는 어떤 특성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되지 않기도 한다. 따라서 혐오의 대상이 누구인가 보는 것은 그 집단의 특성이 아니라 학교와 학급의 질서에 주목하는 논의로 연결되어야 한다.

 

학생들사이의 엄마혐오의 의미를 담은 다양한 욕설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것은 그것이 인신공격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혐오의 표현을 담은 욕설이 얼마나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서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학교내의 혐오가 친한 사이에서 장난이라는 명분 하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보니 학생들은 강도가 세고 공격적인 혐오표현을 듣고도 문제제기를 하기 쉽지 않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모두가 웃고 넘기는 상황에서 정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혐오표현이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엄연히 혐오 표현의 한 방식임이도 불구하고 '장난'이라며 가볍게 치부되고 혐오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또 다른 놀림거리가 되는 문화는 학생들 자신이 혐오 현상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스스로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구조적으로 차단하고 이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학생들은 자신이 들은 혐오 표현을 그냥 마음에 담아두거나 자신이 못 생긴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이 혐오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같이 도오하여 웃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는 학생들이 혐오를 당하거나 혐오상황을 목격하고도 이를 회피 무시 동조하는 것과 무관하지않으며 학교안 혐오 현상이 계속해서 유지 재생산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혐오상황에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한다면 오히려 더 힘든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 하는 마음이 혐오 상황을 무시 또는 회피하게 만든다.

 

학업성취 중심의 학교문화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쉽지 않고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 혐오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학생들이 이런 혐오현상을 반복하여 경험하게 되면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지양하고 다수의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과 말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상이라는 것은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인정하고 유포하는 임의적인 것이다.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차별적 사고를 한 뒤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약자를 마음껏 혐오하는 사고를 가지게 된다.

 

 

학교안이 혐오는 약자를 향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 약자라는 존재가 다양하다. 그것이 성별일 수도 있고 학업능력의 차이일 수도 있고 다문화, 다양한 형태의 가족, 신체적조건 경제적인 조건등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고 교묘해지는 혐오가 있고 폭력이 존재한다. 같은 성별 내에서의 미묘한 심리적인 갈등과 왕따도 혐오라고 할 수 있을까

넓게 본다면 학교내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들이 혐오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다만 그 폭력들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고 혐오라는 것이 또래 문화처럼 놀이처럼 이어진다는데 참 어렵다.

 

한 학교를 정해서 학생들을 관찰하고 면담해서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사실 여기 등장하는 '너른중학교'정도면 참 양호한 환경이다. 그리고 남녀사이의 혐오상황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모든 학생들 환경이 비슷하고 학업성취가 높은 지역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학교가 너른 중학교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연구 대상이 된 학생들을 선생님들에 의해 선발되었다면 그리고 외향적으로 스스로를 잘 드러내는 아이들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면 학교 전체에 분포된 혐오나 폭력이 모두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많은 한계가 있지만 학교내 혐오에 대해 한번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계기는 된다

 

결국 서로가 연대하고 지지하며 견뎌내고 혐오를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혐오 감수성이 높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무엇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어쩌면 학교의 한 축을 이루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감수성 향상이 더 우선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환경에서 성장한다.

어른들의 훈육을 듣고 어른들이 만든 사회통념을 익히고 만들어 놓은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다른 창을 만들고 다양한 상황을 공감하고 존중하는 사회. 어쩌면 학생들을 향한 교육이나 처벌보다는 어른들이 변해야 하는 것이 더 우선이다.

 

많이 부족하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은 책이다.

왠지 어떤 결론을 내려놓고 과정을 몰아간듯한 느낌도 들지만 한번 생각해볼 거리도 많다.

이렇게 학교내의 혐오에 대해 연구할 수 있게 학교를 공개했다는 것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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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 일상 속, 화내는 것도 지친 당신을 위한 분노 감정을 관리하는 연습
공진수 지음 / 대림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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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조절에 대해 쉽게 이해하고 적요할 수 있는 도서. 다만 가정폭력이나 데이트 폭력 학교 폭력등의 문제를 분노라는 감정만으로 풀어나가다 보니 도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계에서의 폭력은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장이 좀더 깔끔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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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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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말해야 할까

정말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뚱하고 하는 일 없는 아르바이트생 혜미를 잘라야 하는 건 중간간부의 몫이다.

위에 눈치를 보고 불쌍하고 가난한 알바생의 눈치도 봐야 한다.

누구 하나 똑 부러지게 그녀에게 지시하지 않는다. 그냥 슬쩍 뉘앙스만 뿌릴 뿐이다.

가운데서 전전긍긍하는 그녀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그냥 그가 선 위치에서 보이는대로 그리고 자기하나 방어하려는 작은 의도하나로 선하게 생각하려는 마음을 자꾸 모질게 먹을 뿐이다.

혜미는 그냥 법대로 자기 권리를 물어보고 요구했을 뿐인데 그걸 지키지 않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분명 거대한 조직이고 책임자들인데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그냥 중간간부인 그녀만 혼자 죄책감을 느꼈다가 배신감을 느꼈다가 점점 마모되어간다.

 

모두가 좋은 사람이고 제대로 일하고 싶을 뿐이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정해진 규칙대로

당일 배송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당일 배송이 되어야 하고 고장나지 않은 기기는 고장난게 아니라고 꼭 말을 해야 하고 고객을 납득 시켜야 한다. 고객조차 민망하고 부담스러운 배웅은 그대로 행해져야 한다. 그걸 규칙이랍시고 만든 사람들은 데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을까? 현장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현장을 관리하고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은 매뉴얼을 만들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만능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현장 사람들은 일도 하고 고객도 맞고 매뉴얼도 따라야 한다. 다들 선하다. 화가 나고 억울하지만 내가 화를 내며 감정을 터뜨려야 할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낼 수도 없다.

어디선가 입장이 바뀌면 내가 무의미한 매뉴얼을 읋어가며 누군가의 분통을 터뜨릴 것이고 그리고 그 사람이 터져버린다면 그 감정 찌꺼기를 고스란히 내가 뒤집어써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든 그 상대의 입장이 될 수 있다. 매뉴얼이란 규칙이란 그걸 지키는 사람은 전혀 참여할 수 없다. 다만 부리는 사람 마음이다.

 

 

같은 동네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빵집들은 제살깍아먹기에 여념없다. 뻔히 아는 사실이지만 누구도 먼저 멈출 수 없다. 먼저 멈추는 쪽이 지는 것이고 지는 건 죽는 것이다.

함께 공생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작은 내 이익과 손실계산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나 보낼 수 없다. 여차하면 작은 손실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우리 동네에는 빵집이 몇 개가 있을까 세어봤다. 다들 장사는 잘 되는지.... 그래도 그들은 지금도 웃으며 고객을 맞이 하고 있다. 어두운 바다 오징어잡이 배처럼 불을 밝히고

 

 

경력직은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뽑으려고 하는데 아무도 뽑아주지 않으면 경력을 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뭐든 해보려고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시도하고 경험하면 닳고 닳아서 신선한 맛이 없다고 또다시 탈락시킨다.

어떤 일이든 쉽게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는 너무 쉽게 가지기도 한다.

공감없는 이해는 잔인하고 이해없는 공감은 공허하다.

 

마음을 주고 공감하다보면 아무것도 내 손에 남는게 없는 허탈감이 들고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내가 왜 이렇게 삭막해지나 싶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등을 두드리며 괜찮아 괜찮아 하는 말은 공염불과 다르지 않고 뭐든 잘잘못을 따지고 하나하나 짚어 나가는 그 똑똑함에 섬뜩하게 살의를 느낀다.

뭐든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쉽게 판단할 수 없고 쉽게 마음을 나눌 수도 없다. 그리고 삶은 점점 사람을 소외시킨다.

산업이 이제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부분보다 사람을 배제하고 기계화되고 조직화되어 사람도 작은 부품이고 하나의 과정으로 대상화되어버린다.

나는 사람인데 너도 사람인데

서로 잘 살아보려고 하는 일인데

아니 그냥 평범하게 행복해지고 싶을 뿐인데

너무 사는게 힘들고 두렵다.

 

기사의 글은 그저 머리를 스치고 지워지지만 이렇게 이야기로 만들어진 글을 마음에 박힌다.

내가 이해를 했든 경험을 했든 이건 타인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힘을 가진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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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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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예전과 같지 않다라는 말을 쉽게 한다.

예전과 같지 않을 경험들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건 삶이 흔들리는 커다란 충격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사소한 어떤 만남이거나 깨달음이거나 스치듯 지나갔던 경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이 책의 인물들은 그런 순간을 겪는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그냥 스쳐지날 순간들에서 문득 든 생각들이 그렇게 통찰을 준다.

어쩌면 그들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냥 그렇게 순간 느끼고 말아도 그만인 일일테니까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들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길지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

 

삶의 진정한 비극은 우리 자신의 상처 때문에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볼 눈을 가리고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의 고통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가까운 사이에서 주고받은 상처들은 더욱 사람을 단단하게 닫게 만든다. 믿었던 만큼 내 편이라고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만큼 나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받은 충격은 대단하다.

어머니가 어느 순간 가족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하고 떠나버렸던 순간의 공포 그건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인정을 해버리는 자신을 말리고도 싶다. 내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그 가까운 타인- 엄마가 준 상실과 빈 자리때문이라는 것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다. (미시시피 메리)

오랫동안 믿어왔고 의심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실체를 알게 된 순간의 충격은 그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지며 내가 봤던 것 믿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눈의 빛에 눈멀다)

서로 다른 길을 갔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과거를 기억하는 때 서로의 기억이 다르고 서로의 기억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느끼는 전율같은 것. 그것은 기쁨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이해가 되는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자기 스스로의 말랑말랑해진 감정선에 감동할지도 모른다. (동생)

전쟁의 경험으로 순수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동시에 그것을 갈망하는 남자는 낯설지만 따뜻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민박집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엄지치기 이론)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성장한 남매는 이제 안정되었다. 오빠는 부유한 사업가로 일에서 가정에서 성공했고 동생은 안정된 민박집을 운영하며 타인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지금은 안정된 그 남매가 가난한 시절 쓰레기통을 뒤지며 음식을 구걸하는 기억을 간직하고 지금의 부유함이 주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지니고 있는 한 그들은 타인에 대한 마음을 가진 따뜻한 사람일 수 있다. (도티의 민박집/ 선물)

내가 평생 믿어왔던 것 그것이 하늘의 계시였다고 믿었던 어떤 신념. 그 창을 통해 세상을 보았던 어떤 믿음이 어느 순간 깨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살아온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부정해야만 할까? 하지만 현명한 아내는 그걸 굳이 깨어야 할까라고 반문한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은 순간이지만 그걸 다시 되돌리는 것은 어쩌면 나의 마음일지 모르겠다. (계시)

아무도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나 깊은 곳에 상처를 숨기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나만 그런것도 아닌데 다들 입을 닫고 있으니 알 수 없고 내 상처에 침잠할 수밖에. 나의 이웃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그들에게도 고통과 상처가 깊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살아갈 일이 괜찮아질 수도 있겠다. 그건 누군가보다 비교우위를 갖는 속물적 마음일 수도 있지만 모두가 다르지 않다는 엉뚱한 연대감일 수도 있겠다 (풍차)

    

당신은 누구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왜 그랬을까요?

당신 속의 상처는 어떤 건가요? 

하나를 고르기는 참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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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상처는 남의 상처일 뿐이다.

타인의 아픔을 통해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지만 그냥 비슷한 모양새일뿐 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 비슷하고 같아서 그게 그거 같아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에겐 자기의 아픔이 유일하고 강하고 독해서 다른 것은 비교할 수 없다. 상처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다. 우열을 따질 수도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내가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의 상처에서 나와 비슷한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냥 타인의 아픔에 대해 내가 알아갈 뿐이다.

힘들었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도무지 상상할 수 없지만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어쩌면 공감을 훈련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다양한 사람을 간접 경험하기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모르고 넘어가는 것보다 낫지 않는 위안한다.

내가 몰라서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서 이해할 수 없어 무시하거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일은 없도록 ... 가능한한 요만큼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다.

 

 

어릴 적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손타지 않은 아이.. 라는 말이었다.

능력이 뛰어나서 도드라져서 남의 눈에 쉽게 띄는 스타일도 아니고 말썽을 부리거나 너무 손이 많이가는 처리곤한한 문제아도 아닌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묻혀가는 아이

조금 무심해도 알아서 자기 일을 잘 하고 도드라지지 않고 조금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보이는 그런 아이 나는 그런 아이였다.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지만  못하지도 않았고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간 아~ 할만큼 못나지도 않았고 예민하게 신경써야할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둔하지도 않은 그런 아이. 그냥 중간은 하는 그래서 좀 편하고 만만하고 쉽게 칭찬하고 잘 해주면 순종적인 채로 나이 드는 아이 뭐 그런 아이

사실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샘도 많았고 내가 가진 것과 타인이 가진 걸 비교하느라 혼자 속을 복달거렸고 실망하고 세상 막막하게 우울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나지 않았다. 내향적이라 말이 없고 뚱한 표정을 가지고 있어서 고집있어 보이는 면이 없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똥고집을 부리고 몽니를 부리는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형제중에서도 중간에 위치해서   언니 챙겨야 하니까 잠깐 저 집에 동생이 아직 어려서 잠깐 이쪽으로 여기저기 옮겨 놓아도 그냥 있는 둥 마는 둥 혼자 잘 놀고 말도 잘 듣고 밥도 찬투정 없이 잘 먹고 잘 자서 맡아주는 사람도 점차 무심해지는 그런 아이였다.

혼자 오래 외가집에 맡겨진 기억도 있고 명절에 이동할때 한차에 타기에 넘쳐서 혼자 다른 가족과 타고 간 기억도 있다. (언니는 커서 안되고 동생은 어려서 안된다는 적확한 이유가 있었고 나는 나이는 어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성숙하지도 않아서 적당해야했다.)

그렇게 손이 가지 않은 아이는 그렇게 컸다.

물론 매년 매 순간 온순한 아이이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냥  내가 하고 말거나 참고 말거나 하는게 편했다.

힘들어 보이는 엄마에게 나까지 무게를 얹고 싶지 않았고 언니나 동생에게 샘내는 걸 들키는 일이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고 대낮 빈집에서 혼자 낮잠에서 깼을 때 햇살이 길게 들어오던 마루에 앉아서 혼자 쓸쓸했었지만 누구에게도 그 감정을 말한 적이 없었다.

책가방도 내가 싸고 내 옷도 내 물건도 내가 챙겼고 누군가가 주는 내 몫에 대해서 주저하지도 않았다. 챙길건 챙기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그러니까 손이 안가는 아이이면서 동시에 어쩌면 정도 가지 않은 아이였을 수도 있다. 대단히 잘나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페끼치는 것도 싫고 뭔가 나누기보다 그냥 다 주고 마는게 더 편하다보니 깍쟁이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아이일지라도 누군가 관심을 주면 참 좋았던 거같다.

다만 좋은 티를 이상하게 냈다는게 문제지만 틱틱거리는 거.. 뭐 그런걸로

 

부모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상식적이었고 책임은 강했다.

다만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던 거 같다. 상대가 원하는 걸 주기보다 내가 줘야 한다고 믿었던 것을 주었다. 그들이 주었다는 걸 잘 알았기에 원망할 수 없었다.

나중에 나이를 먹어 보니 누군가를 공감하는 게 많이 서툴고 타인의 아픔에 마음이 저릴 만큼 이해가 가지만 어떻게 위로하고 곁에 있어줘야할지는 너무 어렵고 서툴렀다.

원만하게 잘 자랐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고 어떤 부분은 넘치게 가졌으나 어떤 부분은 지독하게 매말라서 언제든 바싹 바스라져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걸 모르고 나이를 먹었다.

사랑과 공감을 글로 배워서 머리로 익혔다.

감정이나 정서라는게 타고난 것보다 배우고  흉내내고 그렇게 계속 반복하고 연습해서 익히는 거란걸 몰랐다.

나는 내가 사람들을 열외시켰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냉정하게 그냥 내가 원하지 않아서 상대를 누락시켰다고 믿었다.

그냥 티나지 않게 조용히 예의있게

그런데 사실 나는 나를 누락시켰다.

나를 제외함으로서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상처받을까봐 미움받을까봐 버림받을까봐 조용히 티안나게 한 구석에 자리 잡아서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맞춰주면서 이건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내가 잘 하고 있는 거라고 믿었고 그래도 힘든 관계에서는 내가 조용히 정리하고 제외시켰다 믿으면서 내가 조금씩 조금씩 투명해져갔다.

 

사실 나도 손이 많이 가는 아이고 싶었다.

저 녀석때문에 내가 못살아 하면서 엉덩이를 맞아가면서도 뭔가 관심을 받고 토닥임을 받고 싶었던 거다.

뛰어나서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긴 했지만 그건 너무 먼 길이라 그냥 손이 많이 가고 조금 어딘가 어설프고 어리석어서  자꾸 지켜봐야하고 걱정해야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거같다.

그렇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 같다.

깔끔하게 정리되고 매사에 주고받는 게 딱 떨어지는 그런 거 말고

그래서 돌아서면 잊히는 거 말고

 

이제 나를 사랑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하기로 괜찮다고 등을 쓰다듬어주기로 하고 적어도 내가 누군가에게 갈증나게 하지는 말자고  생각한다.

 

책이란 어쩌면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한 모양이다.

심리치유서를 참 많이 읽으면서도 늘 머리로 받아들였다.

이런 케이스 저런 케이스를 정리하면서 딱딱 맞게 서랍을 정해 넣어두었는데

지금 이순간 어쩌면 이렇게 무언가를 흔드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지금 이순간 내가 조금 말랑말랑해져서 어떤 위로를 원하는 딱 그런 순간이었고

그 때 이 책이 내게 온 모양이다.

때로는 이렇게 기막힌 핀트가 존재하기도 한다. 사람사는 일이 꽤 따뜻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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