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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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의 인물들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한국에서 살기에 힘든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공작원으로 남파된, 소위 간첩이라고 하는, 북한 공작원, 그리고 그를 쫓지만 공명심에 눈먼 경찰, 그리고 이후 그들이 잡아 들이려는 외국인 노동자와 해외 결혼여자 등 한국사회에 적응하기에 힘들어서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그들이다. 소위, ‘루저’들이다.
  그런 그들은 남한에서 살려고 한다. 각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든 치열하게 남한에서 살려고 했고, 또한 그들 상당수는 쫓기고 있다. 생존을 위해 도망해야 하는 그들은 분명 한국사회에선 2등 국민일 뿐이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돈을 벌어야 하는 전직 국정원 직원 이한규(송강호) 역시 그렇게 우아하게 보이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 국제결혼이나 막노동 등을 해서라도 머나먼 타국에서 생존하려고 아등바등 하는 사람들을, 돈을 받거나 현상금을 위해 사냥하듯 잡아들이면서, 경찰이나 그들을 착취한 이들에게 넘기는 악덕 인간사냥꾼을 하는 전직 국정원 팀장에게서 남한이란 세상의 냉혹함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그 옆에 적의 동태를 탐지하려는 목적으로 함께 있기를 자처한 남파 간첩 송지원(강동원)의 생활은 불안할 뿐이다. 오랫동안 남한에서의 그의 생활은 언제나 쫓겼고 또한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런 둘의 불안한 동거는 무척 기묘했다.
  불안한 동거, 그들은 함께 산다. 그러나 간첩과 전직 국정원 팀장의 동거는 음모에 기인한 것일 뿐 상대에 대한 호감을 갖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를 알기 위해 위험한 호랑이굴로 들어갔고 상대의 정체를 알면서도 더욱 큰 포획을 위해 그를 받아들인 전직 국정원 팀장의 동거는 그래서 우울하다. 이미 상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행태를 위해 마련된 동거였기 때문이다. 상대를 알아야 생존할 수 있는 정글의 법칙을 남북한에서의 자신이 소속된 국가기관으로부터 철저히 교육을 받아서인지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서로간의 진실을 감추기 위한 억지스런 웃음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도 하고 가련하게도 보인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기 위해 함께 산다.
  이렇게 사는 그들이 공존하는 어느 오피스텔의 방은 결국 감옥이 된다. 상대를 철저히 감시하기 위해 추적하는 장면은 그들의 우아하지 못한 삶의 연장이 무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불행한 인연으로 그들은 서로를 옭아맬 것들만 찾아 다녔고, 자신의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그리고 상대에게 가장 큰 아픔을 선사하기 위해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계속 위장된 생활을 서로 반복하게 된다. 어쩌면 한반도에 함께 공존하는 남한과 북한이란 적대국이 갖고 있는 생활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은 사실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변한다. 그렇게 함께 사는 가운데 서로에게 확인할 수 있는 인간적인 매력은 그들에게 잔잔한 파문을 던지며, 어느 순간 상대의 가치와 인간미, 그리고 상대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아마 영화가 보여주려는 부분이 여기서부터 시작일 것이다. 배려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상대에 대한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인간관계로 그들은 발전하게 됐고, 함께 살면서 한 때 적이었던 대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지금 그들은 어떤 상황에 몰렸고 또한 어떻게 버림받았는지를 알게 되면서 그들은 또 한 번 변한다. 그리고 그들은 친하게 된다. 

  이런 그들의 묘한 우정은 번잡한 형식은 없었지만 자연스레 의형제로서의 관계로까지 확대된다. 그래서 상대를 위한 추석의 제사상에 자신이 아닌 의형제의 부모에게 절을 하는 장면은 그들의 진보된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의 관계가 무엇이고, 또 어떻게 흘러왔던지 간에 지금 성장한, 성숙된 의형제라는 관계로의 진보는 분명, 관객은 물론 한국사회가 꼭 가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단계일 것이며, 추석 이후의 다양한 긴장과 볼거리는 그들의 우아해진 관계를 증명해주는 자리가 된다. 
  남북한에서 적으로서 만난 두 남자의 진보된 관계 발전은 관객들로 하여금 무척 강한 인상을 줬을 것이다. 또한 그런 관계 뒤로 보게 되는 ‘라이 따이한’과 어려운 국가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들 역시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내용들이다. 어쩌면 분노로 얼룩졌던 남북한 관계 역시 발전할 수 있는 만큼 해외이주노동자들과의 관계 역시 진일보한 측면으로 발전할 수 있고, 그리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의 발전을 넌지시 던져주고 있다. 아마도 감독의 마음엔 남북한만의 갈등이 아닌 남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동체 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이 영화에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의견에 동감한다.
  영화의 줄거리와 구성만이 이 영화의 볼거리는 아니다. 그 가운데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인다. 송강호, 말이 사실 필요 없다. 영화의 수준이나 흥행성에서 혹시 문제가 생겼을지언정 연기력으로 악평을 받은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억지로 찾자면 그의 초창기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강동원은 조금 달랐다. 2009년에 이어 올해도 인기몰이를 하는 ‘전우치’는 그의 코믹한 매력이 빛이 났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연기력이 보였다. 그런데 이번의 ‘의형제’에선 놀라운 변신을 보여줬고 아마도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을 얻은 것 같다. 일년도 안 되어서 그는 더욱 Upgrade된 채로 우리들에게 온 것이다. 그의 발전된 변화를 볼 수 있어 좋았고, 그의 다음 작품이 무척 기대된다. 그리고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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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3-24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俠'이 아닌 '관계'에 관한 영화였군요. 장훈 감독이 김기덕 감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화를 찍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novio 2010-03-2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관계에 관한 영화입니다. 한국 영화의 새로운 모습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키사라기 미키짱 - Kisaragi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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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반전의 향연이었다.
  유명 아이돌 스타의 죽음 1주년을 추도하기 위해 모인 어른들의 출연은 시작부터 괴이했다. 아이돌 스타들을 사모하기엔 너무 늙은 그들이었기에 영화는 어떤 광적인 팬들의 과도한 집착으로 보이기조차 했다. 그러나 철없어 보이기만 한 그런 다섯 명의 사회인들의 이야기는 각자의 사연을 통해 그들의 진정한 모습은 물론, 현실적인 캐릭터로 돌아오면서 각자의 애달프고 슬픈, 그러면서도 타당한 사연으로 가진 보통 남자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들이 어린 아이돌 스타를 사랑하는 것은 변치 않았다.
  영화인지 연극인지 헷갈린다. 어쩌면 의도적인 장치고 두 가지 요소를 결합시킨 이 영화는 재미있게도 추도식이 벌어지는 장소를 벗어나면 그곳은 환상과 과장의 세계로 표현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인 장소가 현실적으로 묘사되더라도 그들 속이 모두 현실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들은 아이돌 스타라는 환상적 이미지를 스스로 창조한 체, 그 속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하고 또한 벗어나고 싶지 않으려는 남자들일 뿐이다. 밖에서도 또한 안에서도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환상과 이상으로 뒤범벅된 것이다.
  선망의 대상이 됐던 ‘키사라기’ 아이돌 스타의 자살 1주년 추도식에 모인 다섯 남자들은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혀 정상적일 것 같지 않은 이 남자들은 양복이 잘 어울리는, 결코 십대라고 볼 수 없는 남자들로서 얼굴엔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10대들처럼 소위 광적인 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임 이후 자살이 아닌 살인이라는 기본 전제를 시작으로 하면서 그들의 흥미진진한 영화는 서서히 그 진가를 드러낸다. 영화의 압권은 무엇보다 끝없이 전개되는 반전의 연속이다. 그들의 과거의 비밀이 한 명 한 명 드러나면서 영화는 한 명의 과거사가 드러날 때마다 급격한 반전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반전 속에서 영화의 연극적 요소와 맞물리면서 보는 관객들을 흥분시킨다. 이런 흥분을 일으키는 아드레날린은 무엇보다 뛰어난 배우들의 멋진 카니발이 있기에 가능했다.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사랑스런 그녀, 현대의 남자들의 즐거움의 원천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인 곳에서 벌어지는 진실과 반전 속에 그들이 사랑했던 키사라기의 삶의 진실과 고민, 그리고 한 여인으로서의 행복과 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됐다. 무엇보다 화려한 아이돌 스타에서 인간이면서도 꿈을 가진 어느 착한 여인임이 확인됐다. 그녀는 평범했다. 하지만 그런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 모인 그들에게 그녀는 분명히 나름의 환상을 만들어주었고, 힘든 일상에서의 활력이자 먼 하늘의 별로서 다가온다. 진실이 그녀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포기할 수 없는 자기 나름의 환상적인 그녀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었다.  

  진실한 그녀이기보다 환상과 낭만으로 치장된 그녀이기만을 원하는 오늘날의 남자들은 어쩌면 현실 부적응자들인지 모른다. 그리고 심적 고통을 언제나 마음 속에 담고 산다. 그러기에 그것을 피하고자 하지만 현실이란 냉혹한 벽 앞에 언제나 무디어지고 마는 자신들의 용기와 노력, 그리고 담대함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래서 어느덧 현실에서 벗어난 그곳으로 자신들의 쉼터를 만들고 그곳에서 행복을 느끼고자 한다.
  감상적이다. 현실에서 꿈과 낭만을 이룰 수 없기에 억지로라도 만들게 된 자신만의 낭만적인 장소는 사실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건강하지도 않다. 그런 과정에서 잃어버린 자신들의 건강한 생명력은 사라지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인생들만 양산한다. 그래서 그녀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며 그들은 행복하다는 착각을 만끽한다. 어차피 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면 가공된 환상이라도 즐겨야만 즐거운 가련한 인간들의 단면이다. 그리고 그런 험한 낭만 속을 거닐고 있는 것이 현대의 남자들이다.
  아이돌 스타는 어느덧 모든 세대의 욕망이 되고 있다. 10대들에겐 선망과 성공의 상징이라면, 20대는 물론, 30-40대 들에겐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남녀 따질 필요도 없다. 오빠 부대는 물론, 삼촌 부대, 누나, 아줌마 부대 등 한국사회에서 각종 부대들이 넘쳐나고 있다. 부대란 의미는 개인이 아닌 집단적 특성을 아우르는 어휘다. 한 사람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 집단적 현상이자 사회적 현상이며, 모두가 공동으로 갖고 있는 특성이란 말이다. 아이돌 스타에 대한 우리들의 이런 갈망은 어쩌면 잔혹해진 현실 속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가련한 인간들이 보이기도 하다. 또한 허약해진 인간관계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낳은 대안으로서의 기능도 한다.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약한 관계를 믿기 보다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스타에 취함으로써 차라리 현실의 고통을 잊고자 하는 몸부림인지 모른다. 어쩌면 현실에서의 실패라고 할까? 아니면 새로운 돌파구가 될까? 아무래도 돌파구는 못 될 것이다. 현실감각의 부재란 결국 현실에서의 능동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 찾기를 애초부터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으로 나아갈 것이다.
  불쌍하다. 영화 곳곳에 존재하는 현대의 남자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결코 현실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미 경제적 가치나 외모라는 기준 하에 판단되고 소비되는 현대의 남성들에겐 Loser란 항목이 그다지 특별한 기준도 아니며, 그 분류에 끼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은 누군가는 그런 애처로운 노력이 실패한다. 사회적 Loser들은 그래서 인구 비율 상 어느 정도의 계층을 형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Loser들이 찾을 수 있는 곳은 어쩌면 가공되고 치장된, 예쁜 가식의 미소녀일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로 구분되는 남성 Loser들의 소비력을 끌기 위해 예쁜 그녀들은 양산되고 있다.
  Loser, 그들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행복을 보장받았을까? 과연 그 보장받은 수준에서 만족할 수 있을까? 하긴 이런 물음은 무의미한 것이다. 어차피 스스로 찾아서 확보해야 할 사회적 자본이니까. 그러기에 최소한조차 마련할 수 없는 이들이 있기에 그들에게 예쁜 소녀는 사회가 마련해준 축복일 수 있다. 비록 거짓이고, 감추어진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자신을 위해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또한 예쁘게 치장한 그녀들이라면 진실이 무엇이든 고마울 따름이다. 사진 속의, 혹은 TV 속의, 혹은 강한 힘을 지닌 보디가드들이 둘러싼 공연장의 그녀들이, 보편적이겠지만 마치 자신만을 위해 웃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인 것이다. 매력, 그것은 소소한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그나마 보장된 축복인 것이다.
  거짓이라도 좋을 것이다. 자신만의 그녀, 그것은 현대 방송 매체의 크나큰 발전으로 얻게 된 Loser들을 위한 축복인 것이다. 분명 그 뒤엔 슬픈 우화가 존재하고, 슬픈 그들이 존재한다. 어느 순간 최고의 것들을 독식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가 된 이 현실 속에서, 그나마 만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을 위한 기본권이 마련된 것이니까. 슬프지만 만족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나마 얻을 수 있는 비현실적인 망상 속에서 얻게 된 최소한의 행복조차도 빼앗길 수 있으니까.
  보기 나름이리라. Loser들의 삶에 만족하는 방식이 좋아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면 행복할 수 있다. 가식의 몸동작에서도, 아니면 Loser들의 소비력을 긁어 모으기 위해서도 멋진 모습으로 활약하는 미끼짱은 그래서 너무 좋아 보인다. 한 인간의 가치를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가치로만 따지는 이 시점에서 많지 않은 돈을 사용해서 얻을 수 있는 예쁜 소녀의 이미지는 확실히 좋은 행복의 조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록 불행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Loser들의 생존의 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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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2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novio 2010-03-24 16:06   좋아요 0 | URL
과연 삶을 제가 잘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요새 제 주변에 힘든 일이 있는데 님의 글을 보고 조금 힘이 나네요. 지금 눈이 오지 않은데 좋은 하루가 함께 하길 빕니다.
 
프롬파리 위드러브 - From Paris with Lov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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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 아마도 From Paris with Love란 제목은 반어법인 것 같다. 격렬하고 멋진 액션이 넘쳐났지만 영화 내부에 존재하는 사랑은 부차적이고 심지어 목적을 위한 수단 정도일 뿐이다. 인간의 허약한 관계가 폭로된 그런 영화다. 흔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혼이 넘쳐나고 타인에 대한 믿음이 낮아진 지금, 영화에서 보이는 그런 류의 관계는 사실 비극일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나는 폭력 속에 보이는 것은 동서양의 치열한 분쟁이었다. 그것도 미국적 시각을 통해 본 선과 악의 대결이랄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일하는 정보요원들은 신나게 해외에서 액션을 겸비한 활약을 보여준다. 그런데 과연 영화의 배경이 프랑스인지 아님 어느 국제도시의 한가운데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프랑스 파리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보지 않았으니 영화를 통해 추측할 뿐인데, 미국에서 파견한 정보원이 프랑스 입국 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터져 나온 프랑스에 대한 비난은 사실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1차, 2차 대전에서 살려줬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장면은 아무래도 미국이 갖고 있는 프랑스에 대한 자존심을 표현한 것이리라. 사실은 사실이지만 미국독립전쟁 시, 프랑스가 도와준 기억은 왜 사라졌는지 알고 싶었다. 국제정치란 것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프랑스를 도와준 것도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바라볼 문제지 은혜를 알아라 하고 다그칠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미국적 시각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정보원이 총질을 하고 공격하는 대상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아시아 출신들로 이루어진 마약 단체이며, 그 이후 나오는 파키스탄의 회교 테러리스트들이다. 아시아에 대한 은근한 반감이 드러나는 대목이란 사실을 관객은 은연 중 느꼈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중국식당에서 총질을 하는 장면이나 파키스탄 출신의 마약 밀매업자들을 상대로 한 ‘람보’식의 총질과 살해는 멋진 액션 뒤에 숨겨진 편향된 세계관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보면서 아시아인들의 무능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한두 명의 미국 정보원에 두 자리 수의 아시아 악당들이 맞고 넘어지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설정은 무척 안타까웠다. 굳이 역사적 근원을 따져서 왜 회교도들이 폭탄테러를 하는지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왜 매번 사건을 치고 문제를 만들고, 그리고 시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할 대상이 회교도인지 모르겠다. 미국의 만행에 눈감는 것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왜 하필 유럽의 한복판에서 그렇게 무참히 망가져야 하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서 공산주의 몰락 이후의 새로운 문젯거리로서 지목된 아랍 회교주의자들은 확실하게 악당으로 되어야만 했다. 과연 미국은 그들을 욕할 만큼 좋은 국가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영화는 너무 거칠다. 그 속에 보이는 선입견으로 가득한 미국적 시각도 그렇지만 그들이 다루는 다른 민족에 대한 거침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터미네이터’ 역시도 기계인간에 대한 다른 시각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미국인들의 구미에 맞는 영화 스토리와 스트레스 해소를 하려는 듯 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려니 좀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나만 그런 듯 하다. 그러나 가슴 아프다. 중국인이나 파키스탄인들이 먼 타국에서 미국의 멋진 총알대상이 된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인종차별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봐도 좋은 것이 있었다. 올바르고 정직한 한 미국 정보원의 인간성 파멸이었다. 상대를 배려하거나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알았던 젊은 첩보원은 그가 겪은 무섭고 파괴적인 상황으로 인해 거칠고 모진 인간으로 변해만 갔다. 그가 사랑했고 자신을 사랑했을 것만 같았던 사랑의 인간관계가 파괴된 이후, 인간적 성숙을 이루는 것과 같은 서사를 갖고 있는 것은 동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분노를 통해 성숙한다고 할까? 그나마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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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3-15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07 위기일발(Form Russia with Love)>을 연상시키는 제목이었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었을텐데... 제목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렇다고 <위기일발 첩보원> 뭐 이런식으로도 지을 수 없고.
그나저나 예고편에서 본 존 트라볼타의 모습은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

novio 2010-03-15 21:01   좋아요 0 | URL
트라볼타의 변신은 반길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기자의 변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까요. 아마도 영화 마지막에서 사랑을 갖고 프랑스를 떠날 수 있단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멋지게 일을 해결하고 좋은 만남도 갖고. 다만 사랑보단 우정이 더 좋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채식주의자 - Vegetari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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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로웠다. 현실이란 공간에서 비현실적인 환상의 공간으로 접근하는 과정은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상징을 내포했고, 현실을 거부하는 방식이 기존 방식과는 크나큰 차별성을 지니고 있어서 보는 내내 당혹스러웠으며 동시에 공포를 느끼게까지 됐다. 이 영화에서 현실에 대한 잔인한, 혹은 비이성적이거나, 인간의 행복을 전혀 마련해주지 못하는 일면을 재해석하고 분해하는 방식은 너무 색달라서 보는 내내 긴장을 하게 했다. 그러나 그런 긴장감 속에서도 영화는 아름다운 화면과 매력적인 예술적 감각으로 관객을 미지의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고, 현재의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이끌었다.
  영화의 시작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원인에 의한 거부에서부터 시작한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거부, 그 시작은 꿈에 의한 것이라고 갑작스레 변한 영혜(채민서)는 이야기한다. 평범할 것만 같았던 그녀의 돌연한 변화는 현실에만 익숙했던 주변의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어쩌면 영혜 자신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갑작스런 변화에 대해 특별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그것에 의한 변화만은 영화는 보여준다.
  영혜가 가려는 세계는 역시나 평범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원인에 뒤이어 그녀가 지향하는 세계는 인간적이지 않은, 아니 동물적이지 않은 식물의 세계였다. 육식과 동물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와 동시에 그녀가 지향하는 식물의 세계와의 마찰은 이 영화에서의 강한 갈등을 만들어 놓은 반목상태에 있는 이분법적인 세계들이다. 영혜는 식물의 세계관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동물적인 현실세계에 대해 단호한 거부를 선택한다. 영화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선택에 뒤이은 세상의 반응과 영혜의 이상한 변화와 집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영혜의 기이한 행동은 가족들에게 낯설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영화 속의 가족만이 그렇지 느낀 것은 아닐 것이다. 관객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영혜에 대해 세상은 그녀에 대한 거부에 반항하듯 거칠게 그녀를 몰아가기만 했다. 아버지의 폭력,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 등 일반인으로선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그녀의 행동에 대해 일반적인 속성을 지닌 영화 속의 인물들은 평범한 반응만을 보이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혹시나 그녀가 다시 동물의 세계라고 거부한 그곳으로 귀향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점차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그녀는 특별하고 불편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식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영화를 통한 미적세계를 창조하는 그녀의 형부, 민호(김현성)는 어쩌면 비현실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현실의 부적응자인지 모른다. 세상을 달리 보며, 아니 세상을 달리 보려고 하는 형부, 민호는 평범을 거부하면서, 괴이한 미적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영화 제작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형상화하고자 원하는 부분을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었으며, 언제나 방황하고 있었으며, 예술가로서의 특별한 체험과 그 형상화를 지향하는 그는 언제나 실패했다. 특이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그 역시 현실부적응자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신비롭기만 한 영혜가 다가왔다. 
  몽고반점이란 기이한 연결고리를 통해 형부와 처제에서 만난 영혜와 민호는 그들이 갖고 있는 세상에서의 가족이란 관계를 벗어나 몸에 아름다운 꽃을 그린 바디 페인팅을 통해 서로간의 동질성을 느끼는 만남을 갖는다. 육체에서의 꽃을 통해 식물의 세계로의 탐닉에 빠져든 영혜와 위험한 매력에 들어가고자 한 민호의 위험한 관계는 매우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페인팅 장면과 육체 위에 한껏 피어난 꽃들의 향연, 그리고 그런 꽃들 속에서 꽃피운 그들의 정열과 애욕, 어쩌면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평가될 수 있는 더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은 불륜이었고 파란이었다. 예술이란 장막을 거두어 버리면 나타나게 될 탐닉과 함께 등장하는 불륜은 시작부터 파괴될 운명이었다. 상식과 전통이란 세계관은 그런 것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고 결국 파괴가 될 뿐이다. 그런데 그 파괴는 세상이 아는 한 가장 잔인한 파괴인 것이다. 그리고 그 파괴를 단행한 자는 다름아닌 언니이면서 아내이자 그 불륜에 파괴된 지혜(김여진)가 단행한다.
  동생인 영혜와 남편인 민호와의 묘한 불륜은 이 영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동을 멋지게 포장해 줄 수 있겠지만 결코 일반인의 시각에선 결코 허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분노를 대변하듯, 지혜는 그 둘에게 슬픈 분노를 터뜨린다. 그들에게 그녀는 세상의 격리를 의미하는 정신병원으로 강제로 보낸다.   

  정신병원, 격리를 의미한다. 세상과의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이 치료를 목적으로 가는 곳이다. 그 치료란 것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끄는 다양한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병원이란 그 말 자체엔 현실은 옳고 꿈을 쫓는 것은 그르다 라는 기본 전제를 내재하고 있다. 이래서인지 영혜에게 이 곳에서의 치료는 폭력으로만 느껴진다. 정신은 물론 이젠 몸조차 이미 세상을 거부하는 듯 식물로서의 특성만 지니고 있고, 그것만을 쫓고 있었다. 나무의 움직임이 땅 속으로 향한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세상에서의 상식이 그녀에겐 잘못된 편견이자 적대적인 의미로만 느껴질 뿐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리고 어디에서든 그녀를 현실의 세계로 이끌 수 있는 것이나 곳은 없어 보였다. 현실에서의 영혜, 그녀는 방황만 할 뿐이고 아파할 뿐이다. 그래서 그곳으로부터 영혜는 벗어난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서사와 구성을 지닌 이 영화는 내용의 파격성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인해 관객들은 압도되고 그 파괴력에 놀랄 뿐이다. 동시에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파열되는 이상적인 꿈과 냉혹한 현실간의 긴장을 목도하면서 현실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마력을 보여준다. 현실에 대한 거부가 영화 속에서 다소 거칠게 형상화됐지만 그 거부에 대한 인지를 모든 관객을 할 수 있었다. 현실과 다른 생각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성은 영화를 일반화할 경우 주변에 산재해 있음을 알고, 또한 강요된 상식에 의해 통제되는 현실의 인간들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현실의 가혹성은 어쩌면 인간 모두가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현실의 잔혹성을 의미할 수 있는 동물의 세계에 대해 영혜는 그렇게라도 저항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땅으로 들어가려 했는지 모른다.
  영화 속의 거부는 다양한 상징성을 낳고 있다. 어떤 이에겐 자연보호를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어떤 이에겐 가부장적인 세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아니면 피곤하기만 한 경쟁위주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부정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인간들의 불운에 대해 비난하면서 식물의 세계로만 침잠하는 영혜의 모습에서 현실은 강하게 부정되기만 한다. 그렇게 현실은 부정되고 관객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할 시간을 갖게 된다. 우린 이 곳에서 행복하냐고...
  그런 영혜를 보고 관객들은 어쩌면 현실의 속성을 각성하고 이해하면, 어느덧 영혜, 그녀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하고 어쩌면 부러워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이 도피인지 용기인지 모르지만 불편한 것에 대해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무 버거운 짐이 되어 가고만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그런 용기를 저버리고 보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러기에 독특한 행동을 보이는 자들에게 한없이 가혹하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인간의 비열함을 폭로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나약함이 폭로되는 슬픈 사연을 무시하기 위해서 말이다. 영화는 어쩌면 인간의 비겁함을 난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식물이 되고자 한 어느 불행하게만 보이는 여성의 형상화를 통해 영화는 자유, 갈망, 타성, 비겁함, 그리고 용기를 차례로 보여준다. 어느덧 영화는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치 거울처럼 보는 이들의 가슴에 깊은 고민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영화는 타성에 저항한 영화다. 과거를 통해 현재의 타당성을 이해시키려는 기존의 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이 영화에 있었다. 과거의 사유가 무엇이든 제일 중요한 것은 거부란 결과이고, 그것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이자 주제의식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영화의 타성을 문제삼고 있다. 동시에 마지막 역시 주인공의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모른다. 이것 역시 새롭다. 거부에 따른 부적응과 고통이야말로 이 영화가 이야기해주려는 것이지 거부에 따른 부작용으로 주인공의 최종 정착지는 어디이다 라는 설정 역시 타성일 뿐이다. 영화는 모든 면에서 새로운 전개와 시각, 그리고 열린 시작과 결말을 자유롭게 쓰는 다시 없는 기이한 매력을 맘껏 펼쳐 보인다. 이런 매력에 자신의 매력을 한껏 높인 ‘채민서’의 열연은 영화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아마도 그녀 아니면 영혜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완벽한 탄생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관객은 물론 그녀 역시 [채식주의자]란 영화의 영혜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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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3-11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원작 못지 않게 '끔찍'한 것 같군요. 저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

novio 2010-03-11 12:21   좋아요 0 | URL
전 소설을 읽지 못했는데 비슷한 구성일 것 같아 소설 읽는 것이 조금 무섭네요^^
 
평행이론 - Parallel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똑 같은 인생의 반복, 누구나 그런 상상을 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많은 인생 중에 비슷하거나, 아니면 정말 똑 같은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소위 ‘평행이론’이란 이론이 화제를 끄는 이유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도 믿기 힘들 뿐만 아니라 확률적으로도 믿기 힘든 일로 판단한다.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이런 믿기 힘든 이론을 갖고 이론의 이름을 딴 [평행이론]은 매우 모험적인 시도를 한다. 실현되기 힘든 것을 영화화하는 것, 분명 영화의 뒤에 있는 주제의식과 고민, 그리고 현대 사회에 대한 성찰은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큰 인상을 남길 것임이 확실하다.
  영화는 똑 같은 인생의 반복을 갖고 있는 어느 두 젊은 판사의 인생을 보여준다. 그런데 똑 같은 인생의 실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반복해서 신기해서일까? 영화 [평행이론]은 극단적인 설정을 갖고 그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관객의 가슴을 슬프게 만든다.
  같은 나이에 같은 과정을 통해 같은 위치는 물론 같은 혼란을 겪은 두 명의 판사의 인생의 형상화를 통해 영화는 관객에게 신기한 인생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더욱 본질적인 현실의 인간관계를 통찰력 있게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변화 없는 인간의 불운한 속성을 기이한 한 편의 서사를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이다. 30년 차이를 두고 같은 시간에 같은 날짜에 유사한 인간들의 인생 반복에서 보이는 불변하는 불행한 인간관계를 통해 인간의 불행을 보여주고 있다. 같다고 할 수는 없는 인생이지만 비슷한 불운을 겪고 있는 인간사의 불행, 바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슬픈 세계관인 것이다. 

  최연소의 부장판사가 된 김석현(지진희), 그 어떤 불행도 그의 인생에 끼여들 여지가 없어 보였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살았다. 그런 관점 속에서 맺고 있는 그의 주변의 사회와 인간관계는 굳건하고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믿음직스럽다고 믿었고, 자신의 사무관은 자신의 충실한 아랫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장인, 그의 상사, 그리고 그의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과 탄탄한 인간관계를 형성, 자신을 믿어주었고, 또한 그런 믿음 속에 살았다. 그러나 기이하지만 그에겐 필연적인 인연으로 만난 평행이론으로 그가 생각한 모든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서사가 진행되면서, 최연소 부장판사 석현은 결코 믿을 수 없는 인간들 사이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 와중에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그의 인간적 매력에 기인해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을 소비하기 위해 그들이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는 스스로 믿었던 모든 것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확인하고 자신을 빼곤 믿을 수 없는 인물들로 가득한 현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판결에 따른 보복행위를 통해 과거의 판결을 돌아보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었던 사실에 경악하게 되고 자책하게 된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은 판사로서 그에겐 너무 가혹한 결과물인 것이다.
  판사,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사회적 정의를 수호하는 사회의 버팀목이다. 판사는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사회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사의 확신은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소신이다. 그러나 김석현 판사는 무너졌다. 그것은 마치 현실에서의 정의가 무너지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는 순간처럼 보였다. 또한 자신이 알려고 하는 진실에 다가가면서 만나게 되는 인간관계의 허약함은 그를 점차 나락으로 빠뜨리고, 가장 자신이 믿었지만 사람들의 위선과 배신이 폭로되면서 그는 인간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의 서글픔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핏줄이란 것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고통은 가장 극적이다. 영화는 그런 비극을 넘어 더욱 극단적인 비극을 향해 마지막으로 가고 있었다. 결코 변하지 않은 인간의 불행은 그 끝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믿었던, 그리고 믿고 싶었던 것 하나하나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자신도 믿지 못한 상황을 상기하게 하는 비극이야말로 이 영화의 압권인 것 같다. 반전을 위한 것이겠지만 그 반전 뒤에 있는 인간의 허약함이 서글프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영화의 비극성은 능력 있는 판사의 몰락이 아니다. 그것이 30년 전 이미 발생했다는 것도 역시 아니다. 그런 반복은 더 중요한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그것은 같은 시간대와 같은 날짜의 반복을 넘어 시간과 날짜가 다르지만 유사한 사건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반복된다는 점이다. 신뢰했던 사람들의 배신은 일상의 다반사이며,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족 구성원의 배신 역시 그다지 진귀한 경험도 아니다. 영화에서의 평행이론은 현실적이라 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극단적 현실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면 인간사에선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벌어진 인간의 불행이 바로 일반적인 것이다. 특히 인간은 허약한 인간관계의 위험함을 알면서도 그런 위험을 도피하지 못하고 재생반복만 하도록 하는 인간의 본질적 탐욕을 이 영화는 공포스럽고 신비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이 영화는 매력적이다. 평행이론의 극단적 설정을 넘어 인간관계의 허약함이 무한히 반복되고 있으며, 또한 순서와 방법, 그리고 인물의 차이야 있겠지만 그런 상황의 유사성은 언제나 반복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디어에서 들려오거나 보여주는 정보들엔 그런 비극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영화는 그것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은 유사성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무엇보다 파멸의 순간으로 갈 수밖에 없으면서도 즐거움과 탐욕이란 마약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인간사의 비극성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탐욕과 기분으로 인해 파멸하는 인간군상에 대해, 인간은 얼마나 생각하며 사는지, 그리고 과연 해결할 의지는 있는지, 영화를 보면서 성찰하게 됐다.
  지진희의 원숙한 연기력은 그의 연기가 점차 물이 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감 있는 매력적인 판사에서 어느덧 손과 옷에 피를 튀기면서 인간 내면의 파멸을 경험하는 판사의 역할을 무척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마지막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현실로 밀리면서 고뇌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가장 잘 형상화하고 있었다. 과연 지진희임을 확인케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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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04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이군요. 볼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던 영화인데
봐야겠어요. 리뷰 감사합니다.^^

novio 2010-03-05 01:57   좋아요 0 | URL
전 무척 즐겁게 봤습니다. 꼭 같은 경험을 공유하셨으면 합니다.

Tomek 2010-03-1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다고 할 수는 없는 인생이지만 비슷한 불운을 겪고 있는 인간사의 불행, 바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슬픈 세계관인 것이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novio 2010-03-11 12:19   좋아요 0 | URL
공포영화가 귀신이 나오거나 피가 낭자한 것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어쩌면 가장 무서운 영화 같았습니다. 엉망인 글,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